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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18,403자)

장진호 동쪽 전투 — 호수 동쪽에 남겨진 부대

1950 · 네오

장진호 동쪽 전투, 1950년 11월 27일~12월 2일 — 장진호 동쪽 기슭의 길을 따라 북쪽부터 미 제32보병연대 제1대대(페이스) 진지, 풍류리강 어귀 신흥리의 미 제31보병연대 제3대대·제57야전포병대대 진지, 1221고지, 후동리, 하갈우리. 27일 밤 중공군 제80사단의 공격, 28일 후동리 전차대의 구출 시도 실패, 29일 새벽 페이스 대대의 남쪽 이동과 맥클린 실종, 30일 밤 중공군 총공격, 12월 1일 오후 한 시 돌파 시작과 1221고지 밑 차단선, 후동리에서 무너진 차량 행렬, 얼음 위로 하갈우리까지 걸어간 생

1950년 11월 27일 월요일 밤 아홉 시, 함경남도 장진호(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 동쪽 기슭 — 개마고원 남쪽 산골짜기에 물을 막아 만든 큰 호수, 그 동쪽 길의 북쪽 끝에 진을 친 미 제7사단 제32보병연대 제1대대 지휘소.

지휘소는 골짜기 안 농가 몇 채였다. 대대 부관이 그날 하루 사단 사령부에서 이백사십 킬로미터를 달려와 두 주 치 편지 자루를 내려놓았다1. 몇 분 뒤 연대 쪽 장교가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날이 밝으면 북쪽으로 공격한다는 작전 명령이었다1. 대대장 돈 페이스(32) 중령은 중대장들을 불러 모으면서 중대마다 편지 나르는 병사도 데려오라고 일렀다1.

“편지부터 나눠 주자. 압록강 이야기는 그다음이다.”

이틀 전 함흥(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을 떠날 때 병사 몇이 도쿄에서 나온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유엔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미군 사단들은 크리스마스까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었다1.

전날까지 이 자리를 지키던 미 해병대는 떠나면서 말을 남겼다. 사로잡은 중공군 포로들이 새로 들어온 세 사단이 호수 근처에 있고, 그들의 임무는 미군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전날 밤 중공군 순찰조가 해병 하나를 참호에서 끌어내 총을 빼앗고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도 했다1.

페이스의 대대는 정원의 구할쯤을 채우고 있었고, 중대마다 한국인 병사가 서른에서 쉰 명씩 붙어 있었다1. 대대 천이백 명 가운데 삼백 명쯤이 한국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2. 미 제7사단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오기 전 모자란 인원을 한국에서 급히 뽑은 청년들로 채웠다. 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였다. 대부분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고, 영어를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2.

제31연대전투단 전체로 치면 미군 약 이천오백 명에 한국군 카투사 약 칠백 명, 모두 삼천이백 명쯤이었다는 기록도 있다16.

C중대 소대장 제임스 모트루드 중위의 소대에는 서른 명 남짓한 카투사가 있었다. 모트루드는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군사훈련을 받은 병사 하나를 한국인 소대 선임하사로 세웠다. 그의 이름은 태충영이었다. 그는 영어를 조금 알았고, 날마다 말이 늘었다3. 미군들은 카투사와 한 참호를 쓰기를 꺼렸고, 카투사 둘을 한 참호에 넣으면 둘 다 잠들었다. 소대는 미군 하나와 한국인 하나를 짝지었다3.

“청, 애들한테 말해. 둘 중 하나는 꼭 눈 뜨고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소대장님. 그런데 이 추위에는 눈꺼풀도 얼어서 안 감깁니다.”

열 시가 조금 지나 중대장들이 모였을 때, 대대 정면에서 총소리가 났다. A중대 부중대장 세실 스미스 중위는 중공군 순찰조가 아군 진지의 자리를 알아내려고 왔다고 보았다. 그는 참호 줄을 따라 뛰어다니며 소리쳤다1.

“쏘지 마! 쏘지 마!”

사격이 멎었을 때 순찰조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자정이 조금 지나 진짜 공격이 왔다. 중공군 한 중대가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고, 다른 한 중대가 동쪽 산에서 쏟아져 내려와 길 동쪽의 두 소총중대가 맞닿은 이음매를 쳤다1. 중기관총 사수 로버트 리 아멘트라우트 상병은 가파른 비탈을 기어오르는 적에게 총구가 내려가지 않자, 삼각대째 총을 품에 안아 들고 쏘았다1. 두세 시간 뒤 중공군은 두 중대 사이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차지했다1. 남쪽 연대장과 포병대대로 이어진 전화선은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끊겼고, 무전은 끝까지 잘 잡히지 않았다1.

*

같은 날 밤, 남쪽으로 육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신흥리(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 신흥리) — 풍류리강이 장진호로 흘러드는 좁은 물굽이, 미 제31보병연대 제3대대와 제57야전포병대대의 진지.

중국인민지원군 제27군 제80사단 제239연대 제4중대장 리창옌(22)은 산둥성 룽청 사람이었고, 열여섯에 팔로군에 들어갔다4. 중대는 그날 밤 신흥리의 남쪽과 남동쪽 두 갈래로 마을에 뛰어들었다4. 작은 무리의 적을 쓰러뜨린 뒤 병사들은 추위를 막을 것부터 찾았다. 중대의 사상 교육을 맡은 지도원 좡위안둥이 알록달록한 네모난 천 한 장을 주워 담요처럼 어깨에 둘렀다4. 총소리가 다시 나자 그는 천을 내던지고 싸움 속으로 뛰어들었다. 좡위안둥은 그날 밤 전사했다5.

리창옌이 소리쳤다5.

“죽기 살기로 쳐라! 하나도 남기지 마라!”

중국 쪽 기록은 제4중대가 그 밤 ‘북극곰 연대’라 불린 미 제31연대의 지휘소를 부수고 연대장을 죽였다고 적는다5. 중대는 미군 삼백여 명을 죽이고 곡사포 열두 문을 빼앗았다고 보고했다4.

같은 밤을 미군 기록은 다르게 적는다. 동쪽 고지에 가까운 I중대와 K중대가 먼저 공격을 받아 남서쪽 포병 진지 쪽으로 밀려났고, 제3대대장과 포병대대장이 둘 다 다쳤다. 포병 A포대는 곡사포 곁에서 쫓겨났지만, B포대 포 둘레에 보병과 포병이 한데 모여 버텼고, 날이 밝자 중공군이 물러갔다6.

중공군에게 적은 미군만이 아니었다. 박격포는 얼어서 자주 포탄이 나가지 않았고, 소총의 노리쇠는 얼어붙어 당겨지지 않았다. 손이 곱아 수류탄 끈을 당길 수 없는 병사들은 이빨로 끈을 물어 당겼다7. 제27군 군장은 펑더칭(40)이었다. 장진호 일대의 기온은 영하 사십 도까지 내려갔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는다8.

*

1950년 11월 28일 화요일 오후, 페이스 대대 지휘소 앞 논바닥.

아침까지 대대는 간부를 잃었다. A중대장 에드워드 스컬리언 대위는 다리를 다친 소대장 대신 소대를 맡으러 가다가 수류탄에 전사했다. 페이스가 그 자리에 보낸 작전장교 보좌 로버트 헤인스 대위는 중대에 닿기도 전에 숨어든 적에게 전사했다. 페이스는 부중대장 스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1.

“이제 자네 몫이다.”

종일 비행기가 하늘에 있었다. 항공모함에서 뜬 해병대 콜세어 전투기들이 아군 코앞까지 내려와 기총을 쏘았고, 대대에 배속된 해병 항공통제관 에드워드 스탬퍼드 대위가 무전으로 표적을 불렀다1. 대대 응급소 앞에는 해가 질 무렵까지 시신 스무 구쯤이 쌓였다1.

오후에 논바닥으로 헬리콥터가 내려앉았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58) 소장이 내렸다. 그는 주머니에 은성훈장 세 개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페이스의 것이고, 나머지 둘을 받을 사람은 페이스가 고르라고 했다1. 페이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날 밤 다쳐 후송을 기다리던 소대장 에버렛 스몰리 중위가 물통 위에 앉아 있었다1.

“스몰리, 이리 와서 차렷.”

마침 본부중대 취사반장 조지 스탠리 중사가 지나갔다.

“스탠리, 이리 와서 스몰리 중위 옆에 차렷.”

페이스는 걸을 수 있는 부상병과 운전병, 서기 열댓 명을 그 뒤에 줄 세웠다. 알몬드는 세 사람의 파카에 훈장을 달아 주고 말했다1.

“지금 귀관들을 붙잡고 있는 적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중공군 사단의 찌꺼기일 뿐이다. 우리는 계속 공격한다. 압록강까지 간다. 중국인 세탁부 몇 놈한테 발목 잡히지 마라.”

헬리콥터가 떠오르자 페이스는 장갑 낀 손으로 파카의 훈장을 뜯어 눈밭에 내던졌다1. 작전장교 웨슬리 커티스 소령이 지휘소로 걸어가며 장군이 지프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1.

“들었잖나. 북쪽으로 도망치는 찌꺼기라고.”

스몰리는 다시 물통 위에 앉았다. 그는 옆에 있던 병사에게 말했다1.

“나 은성훈장 받았다. 근데 뭘 해서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날 아침 열 시, 사단 부사단장 호데스 준장이 남쪽 후동리(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연대 전차중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왔다. 전차대는 마을 위쪽 일 마일 거리의 차단선에 막혀 전차 두 대를 잃고 돌아갔다6. 오후에 페이스 대대를 찾아온 연대장 앨런 맥클린 대령은 남쪽 자기 진지로 돌아가려다 길이 끊긴 것을 알았다. 그는 페이스 지휘소로 되돌아와 남쪽 함흥에 있는 제2대대를 당장 올려 보내 달라는 무전을 해병사단을 거쳐 군단에 보냈다. 군단은 그 다급함을 알아듣지 못했다6. 그날 밤 열 시, 알몬드는 도쿄에서 맥아더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 병력을 모으라는 것이었다1.

*

1950년 11월 29일 수요일 새벽 세 시, 페이스 대대 진지.

부대대장 크로스비 밀러 소령이 소총중대들을 돌며 연대장의 명령을 전했다. 탄약이 바닥났으니 남쪽 제3대대 진지로 합친다. 짐을 내리고 그 자리에 부상병을 싣는다1. 부상병은 백 명쯤이었다6.

새벽 네 시 반, 행렬이 움직였다6. 다리를 다친 중대장 대신 C중대를 이끈 모트루드는 길 동쪽 눈 덮인 능선을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걸었다. 아래 길에서 트럭 소리만 들렸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1. 날이 밝아 올 무렵 행렬의 머리가 풍류리강 어귀의 얼어붙은 물굽이에 닿았다. 길은 그 물굽이를 빙 돌아갔고, 그 끝에 중공군 차단선이 있었다. 얼음 건너편이 바로 제3대대 진지였다1.

페이스는 두 중대를 북쪽 고지로 올려 차단선을 뒤에서 치게 했다1. 그사이 길 위의 행렬에 얼음 건너편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맥클린은 그 사격이 자기 병사들의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격을 멈추게 하려고 혼자 얼음 위로 걸어 나갔다1.

“쏘지 마라! 우리다!”

그는 적어도 네 발을 맞았다. 지켜보던 병사들은 총알이 박힐 때마다 그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맥클린은 멈추지 않고 건너편 기슭에 닿았고, 거기서 사라졌다1. 건너편 기슭에는 포병 진지를 치려고 숨어든 중공군이 있었다6.

그제야 사격이 중공군의 것임이 드러났다. 페이스는 손에 잡히는 대로 병사들을 모아 산개 대형으로 얼음을 건넜다. 중공군 한 중대가 포병 진지를 치려던 참이었고, 페이스의 병사들은 그 뒤통수를 쳐서 중공군 육십여 명을 쓰러뜨렸다1. 차단선도 무너졌다. 열두 시 반, 마지막 병사가 제3대대 진지에 들어갔다6. 아무리 뒤져도 맥클린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6. 남은 장교 가운데 가장 높은 페이스가 두 보병대대와 포병을 묶어 지휘를 맡았다. 그때부터 부대는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라 불렸다6.

그 시각 구출 부대가 되어야 할 제31연대 제2대대는 함흥과 하갈우리 사이의 마전동(현 북한 함경남도)에서 군단이 보내 주기로 한 트럭을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은 오지 않았다1.

*

1950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신흥리 물굽이의 진지.

진지는 가로 오백오십 미터, 세로 천팔백 미터쯤의 낮은 땅이었다. 호수 쪽을 빼면 사방의 능선이 모두 중공군 손에 있었다1. 비행기가 보급품을 떨어뜨렸다. 첫 번째 꾸러미는 동쪽 고지에 떨어져 싸워서 찾아왔고, 두 번째는 남서쪽 진지 밖에 떨어져 고스란히 중공군에게 갔다1. 병사들은 잠들면 얼어 죽을까 봐 자지 못했고, 자동화기는 십오 분에서 삼십 분마다 한 번씩 쏘아 보아야 얼지 않았다1.

태충영은 늘 작은 분대용 버너를 들고 다녔다. 그는 소대 선임하사와 함께 그 버너로 전투식량의 커피를 데웠다. 높은 산이라 물은 끝내 미지근하게밖에 데워지지 않았다3.

“청, 이게 커피야, 냉수야?”

“여기서는 이게 제일 뜨거운 겁니다, 소대장님.”

30일, 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이 진지에 와서 페이스를 만났다. 페이스는 돌파가 어렵다고 말했다. 옮겨야 할 부상병이 오백 명쯤이었다2. 들것을 단 헬리콥터가 그날 두 번 와서 중상자 넷을 실어 갔다1. 해가 기울도록 남쪽에서 구출 부대는 오지 않았다.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고 말했다1.

“딱 하룻밤만 더 버텨. 그러면 끝이다.”

그날 밤 열 시쯤 중공군이 다시 왔다1. 중국 쪽 기록은 제80사단과 제81사단의 한 연대가 그날 밤 신흥리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고 적는다8. 제80사단장 잔다난은 날이 밝기 전에 미군을 없애라고 명령했다2. D중대장 어윈 비거 대위는 꾀를 냈다. 중공군이 신호탄을 쏘면 다른 색 신호탄을 맞받아 쏘고, 중공군이 호루라기를 불면 그도 호루라기를 불었다1.

“저쪽이 초록이면 우리는 빨강이다. 누가 누구 신호인지 저들도 헷갈려 보라지.”

자정이 지나 중공군이 진지 한쪽 끝을 뚫고 들어왔다. 날이 밝을 때까지 다섯 번 뚫렸고, 다섯 번 메웠다1. 중국 쪽 기록은 자기들 동상자가 미군의 몇 배였다고 적는다8.

*

1950년 12월 1일 금요일 새벽, 신흥리 진지.

동트기 직전 중공군이 진지 안의 작은 언덕 하나를 빼앗았다. 대대 본부가 D중대에 반격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대장 로버트 윌슨 중위가 나섰다1.

“싸울 줄 아는 사람은 다 따라와! 반격하러 간다!”

박격포탄은 이미 다 떨어졌다. 윌슨은 스무 명 남짓을 모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맨 앞에 섰다. 첫 총알이 팔에 맞아 그는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두 번째 총알을 맞고 그는 “이건 좀 아프군” 하고 계속 걸었다. 몇 초 뒤 세 번째 총알이 이마에 맞았다1. 뒤를 이은 프레드 수구아 중사도 몇 분 만에 전사했다. 남은 병사들이 끝내 언덕을 되찾았다1.

모트루드의 소대 지휘소에는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미군 소대 선임하사 캠벨 중사는 몸속이 다 찢어졌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보겠다고 가족사진을 찾았고, 곧 숨졌다. 같은 포탄에 태충영도 다리와 등을 다쳤다3. 그는 진지에 남았다3.

일곱 시, D중대 소대장 제임스 캠벨 중위도 박격포탄 파편에 왼쪽을 맞았다. 응급소 천막 안에 쉰 명, 밖의 철길 둔덕에 서른다섯 명이 누워 있었다. 붕대도 모르핀도 떨어졌다1. 페이스가 응급소에 와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다 진지로 돌아가 달라고 했다1.

“사십 분만 더 버티면 비행기가 온다.”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페이스가 다시 소리쳤다1.

“이 게으름뱅이들아, 일어나서 좀 거들어!”

C중대장 데일 시버 대위가 박격포탄이 코앞에 떨어졌다가 터지고 난 뒤 커티스 소령에게 어깨를 으쓱했다1.

“소령님, 제가 천 살은 먹은 것 같습니다.”

오전 열 시, 해병대 전투기 한 대가 낮게 날아와 무전을 보냈다. 날씨가 풀리면 정오가 지나 비행기들을 데려오겠다고 했고, 진지와 하갈우리 사이의 길에는 아군이 없다고 했다1. 열한 시, 하갈우리에서 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철수 명령이 왔다6. 페이스는 또 하룻밤을 버티느니 한 번에 하갈우리까지 내달리기로 했다. 포병은 남은 포탄을 다 쏘고 곡사포를 부쉈다1. 성한 트럭 스물두 대에 휘발유를 모아 넣고 부상병 육백 명을 실었다. 나머지 차는 소이수류탄으로 태웠다6.

*

같은 날 오후 한 시, 신흥리에서 하갈우리(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읍 하갈우리)로 가는 호숫가 길.

비행기들이 머리 위에 오자 행렬이 출발했다6. 앞장선 모트루드의 소대가 진지를 벗어나자마자 총알이 날아왔다. 거의 같은 순간 지원하러 온 비행기 네 대가 표적을 잘못 잡아 행렬 머리에 네이팜을 떨어뜨렸다1. 모트루드가 타려던 반궤도 차량이 불길에 휩싸였다. 몇 명은 그 자리에서 타 죽었고, 옷에 불이 붙은 다섯 명쯤이 미친 듯이 불을 두드렸다1. 병사들이 흩어졌고, 대열은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1.

페이스가 대열을 다시 세웠고, 행렬은 남쪽으로 삼 킬로미터쯤 떨어진 부서진 다리에 닿았다. 반궤도 차량이 트럭을 한 대씩 끌어 개울을 건넸다. 그사이 몇몇 병사가 대열을 떠나 호수 얼음 위로 걸어 나갔다6.

다리 아래쪽에서 길은 1221고지의 북쪽 비탈로 올라갔다가 동쪽으로 꺾이고, 안장처럼 파인 고갯마루에서 머리핀처럼 휘어 내려갔다. 그 굽이에서 기관총과 소총이 행렬의 머리와 옆구리를 때렸다6. 페이스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트럭 줄을 따라 오르내리며 병사들을 모았다. 자기 지프 곁을 지날 때마다 거기 달린 중기관총을 몇 연발씩 쏘았다1. 그는 1대대 정보장교 로버트 존스 소령에게 한 무리를 이끌고 굽이 남쪽 고지로 오르게 하고, 자신은 다른 무리를 이끌고 굽이 북쪽 고지로 올랐다. 양쪽에서 동시에 치는 계획이었다1.

날이 거의 저물 무렵 두 무리가 차단선을 부수었다. 그 싸움에서 페이스는 수류탄 파편을 맞았다1. 병사들이 그를 길로 메고 내려와 트럭 운전석에 앉혔다1. 다섯 시였다1. 트럭은 펑크가 나고 부서졌다. 존스는 열다섯 대쯤을 다시 굴렸으나 부상병을 다 싣지는 못했다6. 부상병은 트럭마다 두 겹으로 쌓였고, 사람들이 보닛과 범퍼, 옆판에 매달렸다1.

밤 아홉 시, 행렬이 후동리 북쪽 끝에 닿았다. 마을 안의 중공군이 맨 앞 트럭의 운전병을 쏘았고, 트럭이 뒤집혀 부상병들이 길에 쏟아졌다1. 한 시간쯤 버티던 사람들은 트럭으로 마을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앞선 세 대의 운전병이 차례로 쓰러졌고, 운전병 없는 트럭 세 대가 둑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안에 탄 부상병들을 깔았다1. 트럭 옆에 매달려 있던 캠벨은 철길 밑 배수관으로 뛰어들었다.

캠벨은 배수관을 기어 나와 다리를 다친 병사 하나를 끌고 논을 가로질렀다. 호숫가에 닿았을 때 그의 무리는 열일곱 명이었고, 총을 든 사람은 셋이었다1. 그들은 얼음 위를 걸었다. 바람이 눈을 쓸어 가 얼음은 미끄럽지 않았다1. 호숫가 북한 농가 앞에서 일행 가운데 한국인 병사 하나가 집 사람에게 물었다1.

“미군 해병대가 어디 있습니까?”

“날마다 저 길로 미군 지프가 다닙니다.”

캠벨은 그 길이 낯익다고 느꼈고, 앞장서 길로 올라갔다. 삼 킬로미터쯤 가자 해병대 전차 초소가 나왔다. 캠벨이 하갈우리의 해병 병원에 닿은 것은 12월 2일 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1.

*

1950년 12월 2일 토요일 아침, 후동리.

밤새 정신을 잃었던 D중대 기관총 사수 글렌 핀프록 일병은 날이 밝아 눈을 떴다. 그는 길을 조금 내려가 트럭 한 대 곁에서 불을 피우려는 부상병들을 만났다. 전날 저녁 페이스를 앉힌 트럭이었다. 운전석의 페이스는 얼어서 죽어 있었다1. 마을에서 중공군이 걸어왔다. 몇은 얼음 쪽으로 달아났고 몇은 붙잡혔다. 중공군은 부상병 몇에게 모르핀을 놓고 상처를 싸맸으며, 며칠 돌본 뒤 풀어 주었다1.

하갈우리로는 사흘 동안 사람들이 들어왔다. 거의 다 얼음 위로 걸어 왔다. 중공군은 얼음까지 나간 사람은 끝난 사람으로 여겼는지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6. 해병대는 차를 몰고 얼음 위로 나가 사람들을 실어 왔다6. 서쪽 유담리에서 싸우던 해병 두 연대도 그 무렵 하갈우리를 향해 산길을 뚫고 내려오고 있었다6.

12월 4일, 제32연대 제1대대가 사람을 세었다. 처음 1,053명이던 대대는 장교와 사병, 배속된 한국군을 다 합쳐 181명이었다1. 처음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를 이룬 이천오백 명 가운데 하갈우리에 닿은 사람은 천 명이 조금 넘었고, 그 가운데 싸울 수 있는 몸은 385명이었다6. 그들은 해병대 장비를 받아 임시 대대가 되었고, 다시 남쪽으로 싸우며 내려갔다6.

중국 쪽 기록은 이 싸움을 미군 연대 하나를 통째로 없앤 유일한 싸움으로 적는다7. 첫 밤의 공격이 끝났을 때 제80사단의 제238연대와 제239연대는 둘을 합쳐 육백 명이 채 남지 않았다고도 한다2. 제239연대의 대대 취사반장이 만터우라는 밀가루 찐빵을 찔 시루 밑에 깔 천을 구해 오라고 통신반장에게 부탁했다. 통신반장이 찾아온 천을 펴 보니 노획한 미군 연대의 깃발이었다7. 좡위안둥이 죽던 밤 담요 삼아 어깨에 둘렀던 그 천이었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는다4. 깃발은 지금 베이징의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걸려 있다4. 그해 12월, 제4중대는 ‘신흥리 전투 모범중대’라는 이름을 받았다4.

중국 군 위생부의 1988년 집계는 제9병단의 손실을 다르게 센다. 추위와 병으로 잃은 병사가 3만 732명으로, 싸움에서 잃은 병사 2만 1,366명(그중 전사 7,304명)보다 많았다13.

2023년 4월 28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 마오닝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 쪽 전사 기록으로 적 3만 6천 명, 그중 미군 2만 4천 명을 없앴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연설한 이튿날이었다14. 중국 군사과학원이 2000년에 낸 『항미원조전쟁사』에서 그 숫자는 두 번째 공세 전체의 것이고, 같은 책은 장진호 전투만은 1만 3,916명으로 적었다14. 미 제31연대 전투단 약 2,500명 가운데 다치지 않고 돌아온 사람이 385명이었다는 기록은 그 곁에 그대로 있다.

2021년에는 이 싸움을 다룬 중국 영화 《장진호》가 흥행 56억 9,500만 위안으로 중국 영화 사상 1위가 되었다15.

이듬해 2월에는 속편 《장진호의 수문교》가 나왔다. 해병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다리 조각으로 다시 이은 황초령의 그 다리를 중공군이 폭파하는 이야기였다17. 영화가 상영되던 2021년 10월, 전직 기자 뤄창핑은 매복 진지에서 얼어 죽은 중대를 비꼬는 글을 웨이보에 올렸다. 이듬해 5월 하이난성 싼야의 법원은 영웅열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그에게 징역 7개월을 선고했다18.

*

2012년 5월 25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하와이에서 날아온 공군 수송기에서 태극기에 싼 유해 열두 구가 내렸다9. 2000년부터 2004년 사이 미군 발굴단이 북한 장진호 일대의 옛 싸움터에서 미군 유해를 찾을 때 섞여 나와, 미군 유해로 여겨져 하와이로 갔던 아시아인 유해였다10. 그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이 밝혀졌다.

김용수(17)는 부산에서 났다. 항일운동가 김인주의 아들이었고, 학생 신분으로 자원해 미 제7사단 제15대공포대대에 배속된 카투사였다10. 그 대대의 D포대가 12월 1일 페이스의 행렬 사이사이에 반궤도 차량을 끼우고 남쪽으로 내려왔다1. 이갑수(34)는 경상남도 창녕에서 났다. 그는 아내와 네 살, 일곱 살 두 아이를 두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되었다9. 기록은 그가 12월 5일 장진의 하갈우리에서 숨졌다고 적는다9. 그의 인식표가 유해와 함께 나왔다10. 아버지가 떠날 때 네 살이던 아들 이영찬은 예순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9.

같은 해, 미국의 한 가족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2004년 장진호 근처에서 나온 유해 하나가 디엔에이 검사로 페이스 중령으로 밝혀졌다11. 아버지가 죽을 때 네 살이던 딸 보비 브로일스는 국방부 담당관들이 집으로 가져온 서류를 받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북한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과 이미 화해했던 참이었다12.

“이 세월이 지나서라니, 믿기지가 않네요.”

페이스는 2013년 4월 17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11. 그가 지휘했던 병사 하나가 그 딸에게 말했다12.

“당신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살아 있지 않을 겁니다.”

이갑수와 김용수는 그해 6월 대전현충원에 묻혔다9. 1950년 12월, 호수 동쪽의 같은 얼음과 같은 길에서 두 나라 아버지가 쓰러졌고, 두 나라의 네 살 난 아이가 예순 해 넘게 기다렸다.

사료 출처

1. Russell A. Gugeler, 『Combat Actions in Korea』(미 육군 군사사센터, 1954·개정 1970) 제6장 「Chosin Reservoir」(54~79쪽), koreanwar.org 게재본 PDF koreanwar.org/kwp2/cmh/combat_actions_in_korea.pdf — 11월 25일 북상, 도쿄 방송의 「크리스마스 귀국」, 27일 밤 편지와 작전 명령(우편 담당병 소집), 해병대가 전한 포로 진술과 끌려 나간 해병, 중대마다 한국군 30~50명, 세실 스미스의 「Don't fire!」, 자정 뒤 공격, 아멘트라우트가 총을 안고 쏨, 봉우리 상실, 전화선 단절, 스컬리언·헤인스 전사와 「It's your baby now」, 콜세어와 스탬퍼드, 시신 스무 구, 알몬드의 은성훈장 수여와 스몰리·스탠리(원문 연설: Don't let a bunch of Chinese laundrymen stop you), 페이스가 훈장을 던짐, 커티스와의 대화(원문: You heard him, remnants fleeing north!), 스몰리의 말(원문: I got me a Silver Star, but I don't know what the hell for!), 28일 밤 22시 알몬드의 도쿄 보고, 29일 03시 밀러의 철수 명령과 블랙아웃, 모트루드의 능선 행군, 물굽이 차단선, 맥클린이 네 발 맞고 사라짐, 육십여 명 사살, 제2대대가 마전동에서 트럭을 기다림, 600×2,000야드 진지, 공중 보급, 30일 헬리콥터 두 번에 중상자 넷, 「Hold out one more night」, 비거의 신호탄·호루라기, 다섯 번의 돌파, 윌슨 중위의 반격(원문: Come on, all you fighting men!, That one bit)과 수구아, 캠벨 부상과 응급소(쉰 명·서른다섯 명), 페이스의 말(원문: If we can hold out forty minutes more, Come on, you lazy bastards), 시버의 말(원문: I feel like I'm a thousand years old), 10시 해병기 무전, 포 파괴, 13시 출발과 네이팜 오폭, 머리핀 굽이의 페이스(담요, 지프 기관총), 존스와 양면 공격, 17시 무렵, 후동리 21시, 트럭 전복, 캠벨의 배수관·얼음·북한 농가의 한국인 병사·12월 2일 05시 30분 도착, 핀프록이 본 페이스와 중공군의 부상병 치료·석방, 12월 4일 181명/1,053명. 원고는 1950년대 블루먼슨 대위의 현지 채록과 참전자 면담·편지에 기댄다. 2.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Chosin Reservoir」(2026년 10월 열람) — 제32연대 제1대대 약 1,200명 중 약 300명이 카투사(Vogel 2025 인용), 카투사의 훈련·언어 사정, 30일 바 소장의 방문과 부상병 약 500명(Appleman 1990 인용), 제80사단장 잔다난의 「날 밝기 전 섬멸」 명령과 제238·239연대 잔여 병력 600명 미만(Guang 2007 인용). 원서는 직접 보지 못했다. 3. James O. Mortrude, 「Jim Mortrude: Rifle Platoon Leader East of Chosin」, 『Changjin Journal』 2006.11.27 재게재(원게재: Army Chapter Chosin Few 소식지 1999년 11월호), archive.nymas.org/text_resources/The+Changjin+Journal/Changjinjournal061127.html — 소대의 카투사 서른 명 남짓, 한국인 소대 선임하사 Chung Yung Te(한글 이름 태충영, 일제강점기 훈련, 영어가 빠르게 늚), 버디 시스템과 한 참호를 꺼린 일, 분대용 버너와 미지근한 커피, 12월 1일 새벽 박격포탄에 캠벨 중사 전사(원문: all torn up inside, one last look)와 Chung Yung Te 부상·잔류. 4. 王斯文·邱宇哲, 「志愿军老战士李昌言去世,系电影《长津湖》“伍千里”原型」, 人民网辽宁频道 2022.11.24, 澎湃新闻 재게재 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20878272 — 리창옌 1928년생·산둥 룽청·1944년 7월 팔로군 입대, 제27군 제80사단 제239연대 제4중대, 남·남동 두 방향 돌입, 좡위안둥이 두른 「담요」, 시루 천을 찾다 깃발을 다시 찾음, 300여 명 사살·곡사포 12문, 군사박물관 전시, 「신흥리 전투 모범중대」. 5. 央视新闻, 「送别!“伍千里”原型李昌言老英雄走了」, 2022.11.25, 共产党员网 재게재 12371.cn/2022/11/25/ARTI1669357843448754.shtml — 좡위안둥 전사, 리창옌의 외침(원문: 往死里打!一个都不要留!), 「북극곰 연대」 지휘소 파괴와 연대장 사살 주장. 6. 25화 출처와 같은 책 — Mossman, 『Ebb and Flow』 제5장 「The Battle of the Changjin Reservoir」 중 「East of the Reservoir」「Task Force Faith」(96~100쪽)와 제7장 「Concentration at Hungnam」 중 「Task Force Faith」(133~136쪽): 27일 밤 제3대대·제57포병대대 피습(대대장 둘 부상, A포대 이탈, B포대 둘레 저항), 28일 10시 호데스 전차대의 실패(전차 2대 손실), 맥클린의 제2대대 요청과 군단의 무반응, 29일 부상병 약 백 명과 04시 30분 출발, 건너편 기슭의 중공군, 12시 30분 합류, 「Task Force Faith」 명명, 12월 1일 11시 스미스의 철수 명령, 13시 출발, 트럭 22대·부상병 600명, 부서진 다리와 얼음으로 빠진 병사들, 1221고지와 머리핀 굽이, 존스가 살린 트럭 약 15대, 21시 후동리, 사흘간 얼음 위로 온 생존자, 해병대의 얼음 위 수색, 약 2,500명 중 1,000여 명 귀환·385명 전투 가능, 임시 대대 편성. 7. 『新民周刊』 2021년 11월 22일호 장진호 전역 특집 58~59쪽, img1.xinmin.cn/xmzk/2021-11-22/591122.pdf — 얼어 나가지 않는 박격포, 얼어붙은 노리쇠, 이로 수류탄 끈을 당김, 대대 취사반장과 통신반장의 시루 천, 「미군 연대 하나를 통째로 섬멸한 유일한 전례」라는 평가. 8. 照宁, 「歼灭“北极熊团”——记开国少将彭德清」, 人民政协网 2021.10.28, rmzxw.com.cn/c/2021-10-28/2974577.shtml — 제27군 군장 펑더칭, 제80사단과 제81사단 한 연대의 신흥리 공격, 11월 30일 밤 맹공, 영하 40도, 지원군 동상자가 미군의 몇 배. 9. 「62년만에 조국 품으로」, 2012.5.26, twig24.com/news/diplomacy/2012/05/26/20120526001008 — 2012년 5월 25일 서울공항 도착, 이갑수 1916년 창녕 출생·미 제7사단 카투사·1950년 12월 5일 하갈우리 전사·아내와 네 살·일곱 살 자녀·아들 이영찬(65), 김용수 1933년 부산 출생·학도병 자원, 6월 대전현충원 안장 예정. 10. 「Soldiers killed in North repatriated」, Korea JoongAng Daily 2012년 5월, koreajoongangdaily.com/korea/soldiers-killed-in-north-repatriated/10426831 — 김용수가 김인주의 아들이고 미 제7사단 제15대공포 자동화기대대 소속 카투사, 이갑수의 인식표가 현장에서 나왔으나 미군 유해와 섞여 하와이로 감, 2000~2004년 미군 발굴, 한미 공동 감식과 디엔에이 검사. 11. 영문 위키백과, 「Don C. Faith Jr.」(2026년 10월 열람) — 1918년 8월 26일 인디애나주 워싱턴 출생, 리지웨이의 부관, 바니 일병이 몬 트럭과 다른 사망 경위, 명예훈장 추서, 2012년 디엔에이 신원 확인, 2013년 4월 17일 알링턴 안장. 12. 「Remains of Missing MOH Recipient Identified」, Military.com 2013.4.12, military.com/daily-news/2013/04/12/remains-of-missing-moh-recipient-identified.html — 2004년 수습, 2004년이 북한이 장진호 일대 발굴을 허락한 마지막 해, 딸 보비 브로일스(아버지 전사 때 네 살)의 말(원문: I'm just incredulous, after all these years), 북한에 묻힌 것과 화해했던 일, 옛 부하의 말(원문: I would not be alive if it weren't for your father). 13.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위생부 집계(1988), 327쪽 —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Chosin Reservoir」 재인용. 제9병단 비전투 손실 30,732, 전투 손실 21,366(전사 7,304). 중국 매체가 옮기는 다른 집계(전투 사상 19,202·비전투 28,954, 7번 출처)와 다르다. 14. 자유아시아방송(RFA) 중국어판, 2023.4.28(rfa.org/mandarin/yataibaodao/junshiwaijiao/sc-04282023134746.html); 신화사 논평 2023.5.4(thepaper.cn/newsDetail_forward_22952108) — 마오닝 대변인의 장진호 전투 「3만 6천·미군 2만 4천」 발언, 『항미원조전쟁사』(2000)가 이 숫자를 두 번째 공세 전체의 것으로, 장진호 전투 단독은 13,916명으로 적었다는 지적. 책 쪽수는 원서를 열람하지 못하고 재인용했다. 15. 每日经济新闻, 2021.11.24(nbd.com.cn/articles/2021-11-24/2008102.html) — 영화 《장진호》의 흥행 56.95억 위안(국가영화전자기금판공실 수치).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페이스 1918년생(영문 위키백과), 알몬드 1892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리창옌 1928년생(人民网辽宁), 펑더칭 1910년생(중국어 위키백과 「彭德清」), 김용수 1933년생·이갑수 1916년생(2012년 송환 보도). 맥클린은 193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만 확인하고 출생연도는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모트루드, 태충영, 스미스, 캠벨, 커티스, 비거, 윌슨, 존스, 핀프록, 좡위안둥, 잔다난, 바, 호데스, 밀러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맥클린의 최후 — 미 육군 전사는 얼음 건너편에서 사라졌다고만 적고, 다른 미국 쪽 서술은 붙잡힌 뒤 포로로 죽었다고 적는다. 중국 쪽 기록은 제4중대가 27일 밤 연대 지휘소를 부수며 연대장을 죽였다고 적는다. 본문은 미군 증언(29일 얼음 위)을 따르고 중국 쪽 주장은 주장으로 적었다. 미국 전쟁기념위원회 자료는 유해를 찾지 못했다고 적는다. [자료 충돌] 페이스의 최후 — 『Combat Actions in Korea』와 『Ebb and Flow』는 파편에 맞은 그를 트럭 운전석에 앉혔고 12월 2일 아침 그 자리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적는다. 영문 위키백과는 바니 일병이 몬 트럭이 마지막 차단선을 지났고 그 뒤 소총에 다시 맞아 죽었다고 적는다. 사망일도 12월 1일과 2일로 갈린다. 본문은 핀프록의 목격을 따랐다. [자료 충돌] 병력과 생존자 — 『Ebb and Flow』는 약 2,500명 중 천여 명 귀환·385명 전투 가능, 『East of Chosin』 서평(Publishers Weekly)은 약 3,000명 중 385명, 다른 서술은 2,300명이라 적는다. 카투사 수도 「중대마다 30~50명」과 「1,200명 중 약 300명」으로 다르다. [자료 충돌] 제80사단장 — 영문 위키백과(Guang 2007 인용)는 잔다난, 『Ebb and Flow』는 Liu Yung이라 적었다. 제27군 군장도 중국 측은 펑더칭, 『Ebb and Flow』는 녜펑즈(Nieh Feng-chin)라 적었다. 본문은 중국 측 표기를 따랐다. [자료 충돌] 중공군의 동상·전사 — 『新民周刊』은 장진호 전역 전체에서 제9병단 전투 사상 19,202명·동상 28,954명·동사 4,000여 명을 적었다. 이 수치는 서쪽 해병대 전선을 합친 것이라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이갑수가 제31연대전투단에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보도는 「미 제7사단 카투사」「12월 5일 하갈우리 전사」로만 적는다. 김용수의 소속 대대(제15대공포 자동화기대대)는 D포대가 페이스 행렬에 있었으나, 그가 D포대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유해가 장진호 동쪽에서 나왔는지도 보도에 없다. [재구성] 「편지부터 나눠 주자」, 태충영과 모트루드의 두 대화(눈꺼풀·커피), 「쏘지 마라! 우리다!」(맥클린이 얼음 위로 나간 까닭은 기록), 비거의 「저쪽이 초록이면」, 「딱 하룻밤만 더 버텨」의 말투(원문 취지는 기록), 북한 농가 앞의 문답 말투(물음과 답의 내용은 기록), 알몬드의 연설과 오간 말을 뺀 수여식의 몸짓, 신흥리 중공군 돌입 장면의 세부, 마지막 두 문장의 대비(두 아이가 모두 네 살이었다는 사실은 기록)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태충영의 한글 이름은 확인하지 못해 영문 표기의 소리대로 적었다. [자료 충돌] 10-17 영상에 맞춰 「28일 밤의 공격」을 「첫 밤의 공격」으로 고쳤다(공격은 11월 27일 자정 무렵 시작). 제80사단 두 연대의 600명 미만 잔존은 Guang 2007 인용이다. 16. 미국 전쟁기념물위원회(ABMC), 「Korean War Honor Roll」 제31연대전투단 관련 항목, abmc.gov/korean-honor-roll/279294 — 미군 약 2,500명과 배속 한국군(카투사) 약 700명, 모두 약 3,200명 가운데 전투 가능 385명. 17. 「长津湖之水门桥」, 2022년 2월 1일 개봉, 흥행 약 40.6억 위안(IT之家 ithome.com 보도. 정확한 숫자는 집계처마다 조금씩 다름). 18. 자유아시아방송(RFA), 「Chinese journalist sentenced in Hainan」, 2022.5.6, rfa.org/english/news/china/sentenced-05062022102548.html; 로이터(Malay Mail 재게재 2022.5.6) — 전 『财经』 부편집장 뤄창핑(罗昌平)이 2021년 10월 웨이보에서 「冰雕连」을 비튼 글로 구금, 2022년 5월 하이난 싼야시 법원에서 「영웅열사 명예 침해」로 징역 7개월과 공개 사과 선고. [10-18 덧붙임] 소유자가 준 장진호 영상 자막과 대조해 덧붙였다. 기존 줄은 그대로 두었다. [자료 충돌] 제31연대전투단 병력 — 본문의 「약 2,500명」은 미군만의 숫자다. ABMC는 카투사 약 700명을 더해 약 3,200명 가운데 385명이 전투 가능했다고 적었다. 두 기록을 함께 두었다. [자료 충돌] 뤄창핑 선고일 — RFA·로이터는 5월 6일 보도, PEN America는 날짜를 달리 적었다. 본문은 「5월」로만 적었다. [나이] 뤄창핑은 출생연도를 대조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2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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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동쪽 전투 — 호수 동쪽에 남겨진 부대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