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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20,294자)

장진호 전투 — 남쪽으로 싸우다

1950 · 네오

장진호 전투(호수 서쪽), 1950년 11월 27일~12월 11일 — 장진호와 서쪽 끝 유담리, 1419·1542고지, 덕동고개(폭스 고지), 하갈우리와 동쪽 고지, 고토리, 황초령 수문교와 1081고지, 진흥리, 함흥·흥남. 11월 27일 밤 중공군 제79·89사단의 유담리 공격, 제59사단의 덕동고개 차단, 28일 밤 제58사단의 하갈우리 공격, 12월 1~2일 해병 제7연대 1대대의 산길 행군, 12월 1~4일 유담리→하갈우리 돌파, 6~7일 하갈우리→고토리, 7일 다리 공중 투하, 9~11일 황초령 통과와 함흥·흥남 도착.

1950년 11월 27일 월요일 저녁 여섯 시 반, 함경남도 장진군 유담리(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 — 함경도 고원의 큰 인공 호수 장진호의 서쪽 끝, 다섯 갈래 능선이 둘러싼 골짜기 마을.

서쪽의 큰 산이 해를 가린 지 두 시간 만에 골짜기는 캄캄해졌다. 기온은 화씨 영하 이십 도, 섭씨로 영하 이십구 도까지 내려갔다1.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 E중대장 새뮤얼 야스킬카(31) 대위는 산골짜기 바닥의 참호를 하나씩 돌았다. 병사들은 두툼한 방한 외투의 두건을 눌러쓰고 있었고, 두건 가장자리에는 입김이 얼어 하얀 테가 앉았다.

그날 아침 여덟 시, 대대는 미 제10군단의 명령에 따라 서쪽으로 공격을 나갔다. 서쪽 마을 무평리로 나아가 서부전선의 중공군 보급로를 끊으라는 명령이었다2. 해 질 때까지 대대가 얻은 땅은 천사백 미터 남짓이었다. 서쪽 산비탈에는 중공군의 참호가 계단처럼 층층이 파여 있었고, 거기서 쏟아지는 기관총 탄에 대대는 오후 두 시 반에 걸음을 멈췄다1. 같은 날 저녁, 해병 수송대대장 빌 중령은 빈 트럭들을 끌고 남쪽 하갈우리로 내려갔다. 이튿날 탄약과 식량을 싣고 돌아올 참이었다. 중공군은 이미 길가 산에 들어와 있었지만 웬일인지 트럭을 그냥 보내 주었다. 그 트럭들은 다시 유담리로 올라오지 못했다1.

“중대장님, 카빈 노리쇠가 안 움직입니다.”

“입김 불어. 그래도 안 되면 겨드랑이에 끼우고 있어.”

“겨드랑이도 얼었는데요.”

카빈과 자동소총 몇 자루는 그날 밤 쓸 수 없을 만큼 얼어붙었다. M1 소총과 브라우닝 기관총은 손질만 잘해 두면 버텼다1.

아홉 시쯤 북서쪽 능선에는 고무 운동화를 신은 중공군이 수백 미터 앞까지 기어와 있었다. 중공군 제9병단의 제79사단과 제89사단이었다1. 아홉 시 이십오 분, 나팔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박격포탄이 해병 참호선에 쏟아졌고, 중공군은 E중대와 옆 F중대가 맞닿은 이음매로 몰려들었다. 야스킬카는 뒤에 두었던 3소대에서 경기관총 한 개 반과 분대 하나를 떼어 이음매로 보냈다.

중공군의 무전은 연대에서 끝났다. 전화선은 대대까지만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 중대와 소대는 나팔과 호루라기, 조명탄과 손전등을 신호로 움직였다1. 그 밤 해병들이 들은 나팔 소리는 중공군 중대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였다.

열 시 반, E중대 2소대가 골짜기 이백 미터 위쪽의 초가집에 기관총을 퍼부었다. 지붕에 불이 붙었다. 불길이 좁은 골짜기와 양쪽 비탈을 대낮처럼 비췄고, 그 빛 속에 드러난 중공군은 자정까지 거의 다 쓰러졌다1.

날이 밝은 뒤 해병들은 낮에 많이 나아가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대대가 서쪽으로 오 킬로미터를 더 갔더라면 그 골짜기 안에서 포위되었을 것이다1.

*

같은 날 밤, 장진호 남쪽 끝 하갈우리(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읍) 남동쪽 산길 —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제20군 제58사단 제172연대 3중대.

제9병단은 중국 동부 화둥 지방에서 싸워 온 군대였다. 원래는 중국 동북 지방에서 부대를 정비하며 그곳 추위에 맞는 겨울옷을 받을 예정이었다. 많은 부대가 그 옷을 받지 못한 채 압록강을 건넜다2. 압록강을 넘은 첫날에만 병단 전체에서 팔백 명 넘게 동상에 걸렸다3. 병단 사령관 쑹스룬(43)에게 베이징의 마오쩌둥(57)은 11월 12일 전보를 보냈다2.

“미군 해병 제1사단의 전투력은 미군 가운데 가장 강하다고 한다. 우리가 네 개 사단으로 그 두 개 연대를 포위해 섬멸하려는 것은 모자라 보인다.”

전보에는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한두 개 사단을 예비로 두고, 제26군을 전선 가까이 끌어다 놓으라는 것이었다2.

몇 달 전까지 이 병단은 바다 건너 대만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20군은 10월 초 상하이에서 열차에 올라 산둥으로 옮겨 가 정비했고, 제27군은 11월 1일 산둥 취푸에서 군용열차를 탔다10. 열차는 만주를 거쳐 압록강 가까지 곧장 올라갔다. 병단은 11월 중순 무렵까지 지안과 린장에서 차례로 강을 건넜고10 11, 그 뒤로는 낮이면 숲과 굴에 숨고 밤에만 걸었다.

3중대장 양건쓰(28)는 그 밤 사이에 산 네 개를 넘었다. 중대원 한 사람이 가진 먹을 것은 반쯤 익힌 콩 한 줌이었다4. 중국 쪽 기록으로 하룻밤에 백삼십 리, 육십오 킬로미터를 걸어 하갈우리 남쪽 마을에 닿았다4. 영하 사십 도라고 그들은 적었다. 양건쓰는 그해 9월 전국 전투영웅 대회에 나가 마오쩌둥을 만난 사람이었다5.

“콩 아껴 먹어라. 미국 놈들 깡통은 내일 아침에 열어 줄 테니.”

중대원 몇이 언 얼굴로 웃었다. 웃다가 입술이 갈라졌다.

*

1950년 11월 28일 화요일 새벽 두 시 반, 덕동고개(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 —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잇는 이십이 킬로미터 외길의 한가운데 고갯마루, 미 해병 제7연대 F중대가 지키는 길가 언덕.

중대장 윌리엄 바버(31) 대위는 전날 이백사십 명을 데리고 고개에 올랐다. 화기중대에서 중기관총과 박격포를 덧붙여 받은 큰 중대였다1. 보름달이 언덕을 비추고 있었다. 한 시 십오 분에 꼭대기를 돌아본 3소대장 로버트 매카시 중위는 병사들이 추위에 멍해져 있는 것을 보고 분대장들을 불러 모아 꾸짖었다. 다음 순찰 때는 참호마다 암구호가 또렷하게 돌아왔다1.

두 시 반, 중공군이 북쪽과 서쪽과 남쪽에서 한꺼번에 덮쳤다. 꼭대기의 두 분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서른다섯 명 가운데 열다섯이 전사하고 아홉이 다쳤다1. 2소대와 3소대 사이 이음매에서는 이등병 헥터 카페라타(21)와 일병 둘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두 소대 규모의 중공군을 막아 냈다고 해병대 전사는 적었다1. 아침 여섯 시 반, 공격은 흩어졌다. F중대는 스무 명이 전사하고 쉰네 명이 다쳤다. 매카시는 진지 앞에 쓰러진 중공군을 사백오십 명쯤으로 셌다1.

부상병은 비탈의 천막 두 개에 눕혔다. 위생병들은 촛불 아래서 붕대를 갈고, 부상병을 침낭에 넣었다 꺼냈다 했다. 모르핀 주사액은 얼어 있었다. 위생병들은 주사기를 입에 물어 녹인 다음 찔렀다. 혈장도 얼어 있었다. 위생병들은 그것이 없어 죽어 가는 사람을 지켜보아야 했다1.

이틀 뒤인 30일 새벽 두 시, 어둠 속에서 영어가 들려왔다1.

“F중대, 너희는 포위되었다. 나는 해병 제11연대의 중위다. 중국군이 따뜻한 옷과 좋은 대우를 줄 것이다. 지금 항복하라!”

참호 안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따뜻한 옷이 있으면 저 사람들이 먼저 입었겠지.”

해병들은 대답 대신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그 빛에 드러난 중공군에게 기관총을 돌렸다1. 바버는 전날 저녁 다섯 시에 소대장들을 모아 놓고 구원은 곧 오지 않는다고 말해 두었다. 오늘 밤 공격은 어느 때보다 거셀 것이고, 늘 그랬듯이 막아 낼 것이라고 했다1.

*

1950년 11월 28일 밤, 하갈우리 — 장진호 남쪽 끝, 유담리와 호수 동쪽 길이 만나는 고을. 미 해병 제1사단 전방 기지.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57) 소장은 그날 오전 열한 시에 헬리콥터로 하갈우리에 내려 사단 지휘소를 열었다1. 이 고을에 비행장을 닦게 한 사람이 그였다. 얼어붙은 땅은 불도저 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병들은 날에 쇠이빨을 용접해 붙였다. 흙을 퍼 담으면 흙이 날에 붙은 채로 얼어서 착암기로 깨어 내야 떨어졌다1. 27일 저녁까지 활주로는 필요한 길이의 사분의 일쯤 닦였다. 밤에도 공사는 투광등 아래서 이어졌다1.

28일 밤 일곱 시 오십 분쯤 첫눈이 내렸다. 열 시 반이 조금 지나 붉은 조명탄 세 발과 호루라기 세 번이 울렸다1. 중공군 제58사단이 고을 남서쪽을 지키는 해병 제1연대 3대대의 두 중대를 쳤다. 자정을 넘긴 열두 시 반, 중공군은 H중대의 한가운데를 뚫고 중대 지휘소까지 들어왔다1. 몇은 활주로까지 와서 불도저 운전병들에게 총을 쏘았다. 공병 장비 장교 로버트 맥팔랜드 소위가 공병들을 이끌고 나가 활주로를 쓸어 냈다. 공병들은 몇 사람을 잃고, 다시 투광등 아래로 돌아가 불도저에 올랐다1.

총알은 사단장 숙소에도 날아들었다. 한 발이 판자벽을 뚫고 들어와 부엌의 냄비와 프라이팬에 부딪혀 요란하게 튀었다1.

“다친 사람은?”

“냄비 하나가 중상입니다, 장군님.”

*

1950년 11월 29일 수요일 아침, 하갈우리 동쪽 고지 — 고을을 내려다보는 큰 산. 미군은 ‘동쪽 고지’라 불렀고, 중국군은 그 남동쪽 봉우리를 ‘소고령’이라 불렀다.

새벽 다섯 시 반, 해병 제1연대 3대대 부대대장 레지널드 마이어스(31) 소령이 반격을 맡겠다고 나섰다1. 데려갈 보병은 없었다. 그는 고을 안의 해병과 미 육군과 국군 근무 부대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사무병, 타자병, 트럭 운전병이 섞였고, 대부분은 서로 얼굴도 몰랐다. 그렇게 모은 사람이 중대 하나쯤 되었다. 이름 모를 국군 근무병 몇이 미군 서기병 뒤에 붙어 얼어붙은 비탈을 기어올랐다.

새 눈이 묵은 빙판을 덮고 있어 무거운 짐을 진 병사들이 자꾸 미끄러졌다1. 안개가 걷힌 아홉 시 반, 해병 코세어 전투기들이 산마루에 네이팜탄을 떨어뜨렸다1. 포병과 박격포의 지원은 없었다1.

산마루 위에서는 양건쓰의 3중대가 그 비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국 쪽 기록은 그날 오전 열 시까지 3중대가 미군의 공격을 여덟 번 물리쳤다고 적었다4.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양건쓰와 통신병 왕시, 다친 기관총 소대장, 부상병 우푸였다. 양건쓰는 왕시에게 우푸를 업고 내려가라고 했다4.

“중대장님은요?”

“진지를 잃으면 체면을 잃는 거다. 진지도 체면도 잃을 수 없다. 명령이다.”

중국 쪽 기록은 양건쓰가 폭약 꾸러미를 안고 올라오는 미군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적었다5. 그는 사흘 전에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맞았다5.

정오에 마이어스의 부대는 산마루에 닿지 못했다. 처음 올라간 사람의 절반 넘게가 다치거나 지쳐 떨어져 나갔다1. 미 육군 전사는 그 실패를 전투 경험 없는 병사들과 미끄러운 비탈, 그리고 중공군의 화력 탓으로 돌렸다5. 동쪽 고지는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중공군의 손에 남았다.

*

1950년 11월 29일 수요일 아침, 고토리–하갈우리 길 — 십팔 킬로미터 외길, 길 양옆으로 산이 바짝 붙은 골짜기.

하갈우리의 방어선에는 사람이 모자랐다. 그날 아침 고토리에서 부대 하나가 북쪽으로 길을 나섰다. 영국 해병 제41코만도의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이끄는 혼성 부대였다. 영국 해병, 미 해병 한 중대, 미 육군 제31보병연대의 한 중대, 사단 본부와 근무 부대 병사들까지 구백이십이 명이 차량 백사십한 대에 나눠 탔다1.

길 양쪽 산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행렬은 서다 가다를 되풀이했다. 해 질 무렵 골짜기 한가운데서 행렬이 끊겼다. 앞쪽은 전차를 따라 어둠 속에서 하갈우리로 밀고 들어갔고, 뒤쪽은 길가 도랑에 엎드린 채 남았다1.

“앞에 간 차들은요?”

“들어갔겠지. 우리는 여기서 버틴다.”

그 하루에 부대는 전사와 실종 백육십이 명, 부상 백오십구 명, 모두 삼백이십일 명을 잃었다. 차량은 일흔다섯 대를 잃었다1. 살아남은 해병들은 그 골짜기를 ‘지옥불 계곡’이라고 불렀다1. 스미스는 뒤에, 그 부대에서 하갈우리에 닿은 사람들이 고을을 지키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고 적었다1.

*

1950년 12월 1일 금요일 밤 아홉 시, 유담리 남동쪽 1419고지 — 덕동고개 북서쪽, 길이 없는 눈 덮인 산줄기.

유담리의 두 해병 연대, 리첸버그(47) 대령의 제7연대와 머리(37) 중령의 제5연대는 남쪽 하갈우리로 빠져나가기로 했다1. 큰길은 제5연대 3대대가 뚫고, 해병 제7연대 1대대장 레이먼드 데이비스(35) 중령은 길이 아닌 산으로 가서 덕동고개의 F중대를 구하기로 했다1.

부하들은 침낭을 하나씩 짊어지고, 탄띠를 하나씩 더 둘렀다. 기온은 화씨 영하 십육 도, 섭씨 영하 이십칠 도였다. 산을 기어오르며 흘린 땀이 옷 속에서 얼기 시작했다1. 눈은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판초를 뒤집어쓰고 손전등으로 지도와 나침반을 맞춰 보아도 방향은 자꾸 어긋났다. 행렬 머리가 남서쪽으로 휘었다. 그대로 가면 해병 포병이 밤새 포탄을 떨어뜨리기로 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1. 무전은 닿지 않았고, 두건을 쓴 귀에는 뒤에서 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데이비스는 혼자 눈을 헤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1.

1520고지에서 중공군 한 소대와 부딪쳤다. 중공군 몇은 잠들어 있었거나 추위에 몸이 굳어 있었다1. 싸움이 끝나자 해병들이 눈 위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그 모습을 뒤에 「도미노처럼」이라고 말했다. 장교와 하사관들이 쓰러진 병사들을 흔들고 뺨을 때려 깨웠다1. 데이비스는 중대장들에게 자기가 내리는 명령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믿을 수 없었다1.

2일 오전, 무전병이 소리쳤다1.

“폭스 식스가 나왔습니다!”

F중대장 바버의 호출 부호였다. 바버는 길잡이를 보내 주겠다고 했고, 데이비스는 사양했다. 오전 열한 시 이십오 분, 해병 제7연대 1대대 B중대의 첫 병사들이 F중대의 참호에 닿았다1. 닷새 만이었다.

닷새 동안 F중대는 스물여섯 명이 전사하고, 세 명이 실종되고, 여든아홉 명이 다쳤다. 모두 백십팔 명이었다. 장교 일곱 가운데 여섯이 다쳤다1. 고개에 오른 이백사십 명 가운데 다치지 않은 사람은 절반 남짓이었다.

그 산줄기의 다른 쪽에는 중공군 제20군 제59사단이 있었다. 중국 쪽 기록으로 그 사단은 11월 28일 새벽부터 덕동고개 일대의 봉우리들을 붙들고 엿새를 버텼다6. 해병들이 넘어간 1419고지를 지키던 제175연대 6중대의 한 소대는 모두 전사했다. 시신들은 모두 해병 쪽을 향해 있었고, 어떤 이의 손가락에는 수류탄 안전핀 고리가 열 몇 개 걸려 있었다6. 중국군이 ‘사응령’, 죽은 매의 고개라 부른 해발 천오백십구 미터 봉우리에서는 12월 3일, 주봉에 남은 제177연대 예순 명 남짓이 여덟 번 공격을 막다가 저녁 여섯 시에 진지를 내주었다6.

중국 쪽 기록은 같은 제177연대의 6중대 백이십오 명이 매복 진지에서 전투 대형 그대로 얼어 죽었다고 적었다7. 싸움이 끝난 뒤 진지를 치우던 병사들이 쑹아마오라는 전사의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찾았다3.

“나는 가족과 조국을 사랑하고, 나의 명예를 더 사랑한다. 나는 영광스러운 지원군 전사다. 얼음과 눈이여, 나는 결코 너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얼어 죽더라도 나는 내 진지에 꼿꼿이 서 있겠다.”

*

1950년 12월 5일 화요일, 하갈우리.

유담리의 행렬은 하갈우리까지 이십이 킬로미터를 빠져나오는 데 맨 앞이 쉰아홉 시간, 맨 뒤가 일흔아홉 시간이 걸렸다1. 함께 들어온 부상자와 환자가 천오백 명쯤이었고, 그 셋 가운데 하나는 동상 환자였다1.

사단 매점은 원래 하갈우리를 기지로 삼을 셈으로 물건을 잔뜩 올려 두었다. 그 물건을 다시 실어 낼 트럭이 없었다. 스미스는 남은 물건 모두, 값으로 만삼천오백사십칠 달러 팔십 센트어치를 병사들에게 공짜로 나눠 주라고 했다. 대부분은 사탕과 과자였다1.

닷새째 수염을 깎지 못한 병사들이 볼이 불룩하도록 캐러멜 사탕 ‘투시 롤’을 물고 다녔다. 반쯤 언 깡통 전투식량보다 맛이 나았고 배탈도 나지 않았다1.

“이거 먹는 거야, 바르는 거야?”

“둘 다. 씹다가 라디에이터 구멍에 붙이면 물 안 샌다.”

실제로 해병들은 씹은 투시 롤로 트럭 라디에이터의 구멍을 막았다1.

첫 수송기가 내린 것은 나흘 전, 12월 1일 오후 두 시 반이었다. 활주로는 그때 사십 퍼센트밖에 닦이지 않았다. 극동공군의 C-47 한 대가 얼어붙은 흙바닥에 내려앉아 부상자 스물네 명을 싣고 다시 떴다1.

그날 해 지기 전까지, 하갈우리에 남아 있던 부상자 천사백여 명이 모두 비행기로 실려 나갔다. 12월 1일부터 닷새 동안 하갈우리 활주로를 떠난 부상자는 사천삼백십이 명이었다. 해병이 삼천백오십 명, 미 육군이 천백삼십칠 명, 영국 해병이 스물다섯 명이었다1. 미 육군 부상자 대부분은 호수 동쪽에서 무너진 제31연대전투단에서 얼음판을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날 극동공군 수송사령관 터너 소장이 하갈우리에 왔다. 부상자를 다 실어 낸 다음 병력도 비행기로 빼 주겠다고 했다. 스미스는 거절했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남쪽으로 싸우며 내려가야 했다.

거꾸로 비행기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다. 보충병 오백삼십칠 명이었다1. 그들도 걸어서 내려갈 행렬에 섞였다.

기자 회견에서 영국 기자 하나가 이번 작전을 ‘퇴각’이라고 쓰려 한다고 했다. 스미스는 뒤가 없는데 퇴각이 있을 수 없다고 답했다. 사단은 포위되어 있으니 바다까지 가는 길은 퇴각이 아니라고 했다1. 미국 신문에는 그 말이 더 짧게 실렸다8.

“퇴각이라니, 무슨 소리!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고 있을 뿐이다.”

베이징의 마오쩌둥은 12월 4일 펑더화이와 쑹스룬에게 전보를 쳤다. 적이 하갈우리에서 비행기로 해병 제5·7연대를 빼내려 하니, 빨리 비행장을 장악해 적이 비행기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2. 그 비행장은 그날도 투광등 아래서 수송기를 받고 있었다.

같은 전보 끝에는 유담리에 대한 한 줄이 있었다. 유담리에 남아 버티는 적은 에워싸 두기만 하고 섬멸하지 말라, 그래야 그들을 구하러 오는 적까지 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2. 유담리의 해병들은 그날 오후 두 시에 이미 하갈우리에 들어와 있었다1.

*

1950년 12월 7일 목요일 아침 아홉 시 반, 고토리(현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 — 하갈우리에서 남쪽으로 십팔 킬로미터, 황초령 고갯길 위쪽의 고원 마을.

하갈우리를 떠난 만 명은 6일 아침부터 7일 밤까지 싸우며 고토리로 내려왔다.

그 길에 서른여덟 시간쯤이 걸렸다. 차량은 천 대가 넘었다. 사단은 그 길에서 전사 여든세 명, 다친 끝에 죽은 사람 스무 명, 실종 일곱 명, 부상 오백여섯 명, 모두 육백열여섯 명을 잃었다1.

남쪽 길에는 끊어진 다리가 하나 있었다. 고토리에서 육 킬로미터쯤 아래, 황초령(현 북한 함경남도 영광군) 고갯길 낭떠러지 옆에서 발전소 수압관을 건너는 다리였다. 한쪽은 절벽이고 다른 쪽은 깎아지른 벼랑이라 돌아갈 길이 없었다. 끊긴 틈은 오 미터, 다리 받침까지 치면 칠 미터가 넘었다1. 중국 쪽 기록으로 지원군 공병은 12월 1일, 4일, 6일 밤 세 번 그 다리를 폭파했다9.

해병 공병대대장 존 패트리지 중령은 하늘에서 그 틈을 살펴보고, 조립식 강철 다리 조각 네 개가 있어야 한다고 계산했다. 투하하다 망가질 것을 생각해 여덟 개를 청했다1. 아홉 시 반, 미 공군 대형 수송기 C-119 여덟 대가 고토리 위로 날아왔다. 한 조각이 천백 킬로그램이 넘는 쇳덩이가 커다란 낙하산에 매달려 내려왔다. 정오까지 여덟 조각이 다 떨어졌다. 하나는 중공군 쪽으로 떨어졌고, 하나는 망가졌다1.

이튿날 8일에는 눈보라가 쳤다. 고토리 북쪽 길목의 해병 D중대 차단선 앞에 피란민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하갈우리에서부터 해병들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해병들은 그들을 진지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피란민 속에 중공군이 무기를 숨기고 섞여 있을 수 있었다1. 지붕도 없는 눈밭에서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웅크렸고, 그 무리에서 낮게 우는 소리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1. 해병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몇 사람의 치료뿐이었다.

그 밤, 눈밭에서 여자 둘이 아이를 낳았다. 해군 위생병들이 그 곁에 무릎을 꿇었다1. 위생병 하나가 얼어붙은 손을 겨드랑이에서 빼내 산모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산모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같은 날 고토리에서는 해병과 미 육군과 영국 해병 백십칠 명이 한 구덩이에 묻혔다. 언 땅을 하나하나 팔 시간이 없었다. 무덤 위로 눈이 내렸다. 해병대 전사는 한국에서 흰색이 상복의 색이라고 적었다1.

*

1950년 12월 9일 토요일 오후, 황초령 수문교 — 고토리 남쪽 고갯길, 수압관을 건너는 끊어진 다리 자리.

해병 제7연대 1대대의 C중대와 B중대 한 소대가 짧은 싸움 끝에 다리 자리를 차지했다. 끊어진 다리 너머로 건너간 소대는 참호마다 웅크린 중공군 쉰 명쯤을 보았다. 그들은 총을 쏘지 못했다. 몸이 너무 얼어 있었다1.

“들어서 꺼내라. 조심해서.”

해병들은 그들을 참호에서 들어 올려 길가에 앉혔다1. 중국 쪽 기록은 그 남쪽 1081고지를 지키던 제60사단 제180연대 2중대가 진지에서 모두 얼어 죽었다고, 그들의 손이 노리쇠에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적었다9.

패트리지가 다리 조각을 실은 트럭과 함께 도착했다. 해병들은 포로들에게도 일을 시켰다. 받침을 쌓고, 트럭이 강철 궤도판과 합판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오후 세 시 반, 다리가 놓였다1. 저녁 여섯 시 첫 차량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몇 대가 건너간 뒤, 흙 고르는 장비를 끌던 트랙터 한 대가 가운데 합판을 뚫고 빠졌다. 바퀴 달린 차는 더 건널 수 없었다1.

기술중사 윌프레드 프로서가 트랙터를 몰아 다리 밖으로 조심스럽게 뒤로 빼냈다. 패트리지는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강철 궤도판 두 개를 최대한 벌리면 전체 폭이 삼백사십오 센티미터쯤 된다. 전차는 양쪽에 오 센티미터씩 남고, 지프는 안쪽 틈에서 일 센티미터 남짓이 남는다1. 불도저가 궤도판을 다시 벌렸다. 어둠이 내린 뒤 첫 지프가 양쪽 바퀴 가장자리를 긁으며 건넜다.

그 밤 내내 다리 위로 사람과 차가 끊이지 않고 건넜다. 패트리지는 뒤에 그 밤을 이렇게 말했다1.

“불빛도 없는데 모든 것 위에 희미한 빛이 덮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포성이 울렸고, 꽁꽁 언 눈을 밟는 수많은 발소리와 바퀴 소리가 났습니다. 길 한쪽에는 북한 피란민들이, 다른 쪽에는 해병들이 걸었습니다. 이따금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길에는 소도 있었습니다.”

고토리의 눈밭에서 태어난 두 아이가 그 행렬 안에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

1950년 12월 10일 일요일 밤부터 11일, 황초령에서 진흥리(현 북한 함경남도)와 함흥(현 함흥시)·흥남(현 함흥시 흥남구역)까지.

맨 뒤에는 전차 마흔 대가 따라 내려왔다. 그 뒤를 지킨 것은 수색중대의 어니스트 하젯 중위와 소대원 스물여덟 명이었다. 전차 뒤로는 피란민 수천 명이 바짝 따라붙었다1. 새벽 한 시 조금 전, 뒤에서 아홉 번째 전차의 제동장치가 얼어붙었다. 꼬리의 아홉 대가 길에 멈췄다. 피란민 속에서 중공군 다섯이 줄지어 나왔고, 누군가 영어로 항복하겠다고 외쳤다1. 하젯이 다가가자 맨 앞 사람이 비켜섰고, 뒤의 넷이 숨겨 둔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꺼냈다. 하젯의 카빈은 방아쇠를 당겨도 얼어서 나가지 않았다1.

난전 끝에 맨 뒤 전차 두 대와 승무원을 잃었다. 전차 승무원들은 앞쪽 전차의 얼어붙은 제동장치를 풀어 두 대를 몰고 내려갔다. 한 대는 전차를 한 번도 몰아 본 적 없는 상병 레트가 몰았다1.

“죽는 한이 있어도 이놈은 끌고 내려갑니다!”

다리 아래에서 기다리던 공병들은 마지막 해병이 건넜다고 여기고 폭약을 터뜨렸다. 다리가 협곡으로 무너져 내렸다1. 그때 하젯의 소대원 일병 로버트 디모트는 폭발에 밀려 길가 벼랑 아래 바위턱에 정신을 잃고 걸려 있었다. 깨어난 그는 길로 기어 올라왔다. 길 위에는 피란민들만 있었다. 디모트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수문 관리소 건물을 기억해 냈고, 피란민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 진흥리로 내려왔다. 장진호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해병이었다1.

11일 오후 한 시, 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진흥리를 떠났다. 밤 아홉 시에는 전차를 빼고 모든 부대가 함흥과 흥남의 집결지에 닿았다. 전차 행렬은 자정 삼십 분 전 흥남 항구의 상륙함 대기 지역에 들어왔다1. 항구에는 배들이 와 있었다.

해병 제1사단은 이 싸움에서 전사 육백사 명, 부상으로 죽은 사람 백십사 명, 실종 백구십이 명, 부상 삼천사백팔십오 명, 그리고 주로 추위에서 온 비전투 손실 칠천삼백삼십팔 명을 보고했다8. 중국 인민해방군 총후근부가 1988년에 펴낸 통계는 제9병단의 전투 손실을 이만 천삼백육십육 명, 그 가운데 전사자를 칠천삼백사 명, 추위와 굶주림에 따른 비전투 손실을 삼만 칠백삼십이 명으로 적었다8. 미국은 포위를 뚫고 나왔다는 것을, 중국은 적을 몰아냈다는 것을 각자의 승리로 기억했다8.

그 숫자 뒤에는 각 군이 위로 올린 보고서들이 있었다. 미군은 뒤에 그 보고서 묶음을 노획해 영어로 옮겼다1. 제27군의 보고서는 이렇게 적었다.

“발과 양말과 손이 얼어붙어 얼음덩이 하나가 되었다. 수류탄 뚜껑을 돌려 열 수 없었고, 도화선에 불이 붙지 않았다. 박격포탄은 칠십 퍼센트가 터지지 않았다.”1

제26군의 보고서는 병력의 구십 퍼센트 넘게 동상에 걸렸다고 적었다. 병사들은 자주 굶었고, 이틀 동안 감자 몇 알로 버틴 병사도 있었다1. 제20군의 보고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적을 갈라놓고 에워싸는 데는 성공했으나, 하나씩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다.”1

12월 11일, 쑹스룬은 동부 전선 작전의 검토를 올렸다.

“이번 작전은 아주 잘못 싸웠다. 미 해병 제1사단과 제7사단을 다 섬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병력이 크게 줄었다.”2

그 뒤 석 달 가까이 미군 정보기관은 제9병단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다. 1951년 3월 18일 제26군 제77사단의 병사가 포로로 잡히고서야, 그 병단이 다시 전선에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1. 중국 매체는 쑹스룬이 1952년 9월 귀국길에 압록강 가에서 오래 서 있다가, 모자를 벗고 장진호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고 전한다12.

사료 출처

1. Lynn Montross·Nicholas A. Canzona,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ume III: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미 해병대 본부 역사과, 1957), Project Gutenberg 전자본 65009(gutenberg.org/files/65009/65009-h/65009-h.htm) 제8~14장 — 11월 27일 2대대 5연대 공격(08시, 14시 30분 정지, 약 1,500야드), 빌 중령의 빈 트럭, 18시 30분 암흑과 화씨 영하 20도, 카빈·자동소총 결빙과 M1·브라우닝, 제79·89사단과 고무 운동화, 21시 25분 호루라기와 이음매 공격, 야스킬카의 경기관총 반개 분대 증원, 22시 30분 초가집 방화와 자정까지의 사격, 03시 300명 재공격, 「3마일 더 갔더라면」 판단, F중대 240명·보름달·01시 15분 매카시의 순찰·02시 30분 공격·35명 중 15 전사 9 부상·카페라타 등 셋의 이음매 방어·06시 30분·전사 20 부상 54·적 시신 450, 촛불 아래 위생병과 입으로 녹인 모르핀·언 혈장(매카시 「Fox Hill」 인용), 30일 02시 영어 항복 권유(원문: Fox Company, you are surrounded. I am a lieutenant from the 11th Marines. The Chinese will give you warm clothes and good treatment. Surrender now!)와 81밀리 조명탄, 29일 17시 바버의 소대장 회의, 스미스의 28일 11시 지휘소 개설, 활주로의 쇠이빨·착암기·투광등, 28일 19시 50분 첫눈과 붉은 조명탄 세 발·호루라기 세 번, 00시 30분 H중대 돌파, 맥팔랜드의 공병 반격, 스미스 숙소 부엌 냄비에 튄 총알, 29일 05시 30분 마이어스의 반격과 해병·육군·국군 근무병 혼성 부대·55개 부대·45분 등반·09시 30분 공중 지원·포병 지원 없음·정오에 절반 이상 이탈, 데이비스 대대의 침낭·탄띠·들것의 탄약·화씨 영하 16도·서남쪽으로 휜 행렬·혼자 앞으로 나간 데이비스·「도미노처럼」·명령 재확인 부탁·「Fox Six on the radio, sir」·12월 2일 11시 25분 도착·길잡이 사양, 하갈우리까지 14마일·맨 앞 59시간·맨 뒤 79시간·12월 4일 14시·부상자 약 1,500명, 색색 낙하산, 매점 물품 13,547.80달러 무상 지급과 투시 롤(라디에이터 수리), 12월 5일까지 공수 후송 4,312명(해병 3,150·육군 1,137·영국 해병 25), 레슨던, 터너의 제안과 보충병 537명, 「뒤가 없으면 퇴각도 없다」, 고토리의 풀러와 더운 밥, 수압관 다리의 16피트(받침 포함 24피트) 틈과 세 번의 파괴, 패트리지의 네 조각 계산과 여덟 조각 요청, 12월 7일 09시 30분 C-119 여덟 대·2,500파운드·정오까지·하나는 중공군 쪽·하나는 파손, 8일 피란민과 두 출산·117명 합장·흰 상복, 9일 다리 자리 점령과 얼어붙은 중공군 약 50명, 포로 노역, 15시 30분 설치·18시 통행·합판 파손·프로서·136인치 계산, 패트리지의 밤 회고(원문 일부: There were many North Korean refugees on one side of the column and Marines walking on the other side. Every once in a while, there would be a baby wailing.), 하젯 소대 28명과 전차 40대, 01시 직전 제동장치 결빙, 다섯 중공군의 위장 투항, 카빈 불발, 레트 상병(원문: I'm going to get this tank out of here even if I get killed doing it!), 다리 폭파, 디모트의 귀환, 11일 13시·21시·23시 30분. 2. 중국어 위키백과, 「长津湖战役」(2026년 10월 열람) — 무평리 방향 공격과 만포–강계–희천 보급로 차단 목적(Mossman 인용), 제9병단이 동북에서 겨울옷을 받지 못하고 입북(Millett 2010 인용), 마오쩌둥의 11월 12일 전보(「美军陆战第一师战斗力据说是美军中最强的,我军以四个师围歼其两个团,似乎还不够」)와 12월 4일 전보(「望宋陶覃迅速控制下碣隅里飞机场不使敌军撤走」), 하갈우리 공격에 제58사단의 1개 연대만 투입된 일. 3. 「长津湖战役有多惨烈?亲历老战士的讲述让人泪奔」, 央视新闻 위챗 계정, 共产党员网 게재 2021.10.4, 12371.cn/2021/10/04/ARTI1633316654703770.shtml — 쑹아마오의 쪽지 전문(「我爱亲人和祖国,更爱我的荣誉 / 我是一名光荣的志愿军战士 / 冰雪啊,我绝不屈服于你 / 哪怕是冻死 / 我也要高傲地耸立在我的阵地上」), 제9병단 입북 첫날 동상 800여 명. 4. 「群英壮志撼山岳 勇士辉煌化金星」, 『人民周刊』 2023.3.20 제11판, paper.people.com.cn/rmzk/html/2023-03/20/content_25972705.htm — 제20군 제58사단 제172연대 3중대, 영하 40도·반쯤 익힌 콩 한 줌·산 넷·하룻밤 130리, 소고령 방어, 오전 10시까지 여덟 번 격퇴, 통신병 왕시·부상병 우푸·기관총 소대장, 「丢了阵地就是丢脸。我们既不能丢阵地,更不能丢脸!」「执行命令!」. 5. 중국어 위키백과, 「杨根思」(2026년 10월 열람) — 1922.11.26 출생·1950.11.29 전사, 1950년 9월 전국 전투영웅 대회에서 마오쩌둥 접견, 1071.1고지 동남 소고령(미군의 East Hill)에서 폭약을 안고 전사, Mossman 『Ebb and Flow』 102쪽 인용(공격한 부대는 해병·육군 근무 부대 혼성 중대, 실패 원인을 전투 경험 부족·미끄러운 비탈·중공군 화력으로 돌림). 6. 抗美援朝纪念馆, 「激战死鹰岭」, 중화인민공화국 퇴역군인사무부 누리집 게재 2020.9.29, mva.gov.cn/sy/zt/kmyc70zn/zygs/202009/t20200929_42464.html(2022년 웹 보관본으로 열람) — 제59사단의 11월 28일 새벽 점령, 6주야 방어, 제175연대 6중대 한 소대 전원 전사와 손가락의 수류탄 고리, 12월 3일 제177연대 60여 명의 여덟 번 격퇴와 18시 진지 상실. 7. 중국어 위키백과, 「冰雕连」(2026년 10월 열람) — 제20군 제59사단 제177연대 6중대(전원 125명 동사), 제60사단 제180연대 2중대, 제27군 제80사단 제242연대 5중대의 이른바 「冰雕连」, 쑹스룬이 보고 전보에 「6중대는 한 사람도 일어서지 않았고 시신에 상처와 핏자국이 없었다」고 적었다는 서술(郑学富, 上游新闻 2021.10.7 인용). 8.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Chosin Reservoir」(2026년 10월 열람) — 머리·리첸버그의 공동 돌파 명령(Appleman 1990, 215쪽), 스미스의 「Retreat, hell!」 발언과 그 출처(「Retreat of the 20,000」, 1950), 해병 제1사단 보고 손실(전사 604·부상 후 사망 114·실종 192·부상 3,485·비전투 7,338, Appleman 1990·Montross 1992 인용),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위생부 1988년 통계(전투 손실 21,366·그중 전사 7,304·비전투 30,732), 양측의 서로 다른 승리 기억(NPR 2020). 9. 「志愿军三炸水门桥」, 学习时报, 인민망 당사학습교육 누리집 재게재 2022.3.29, dangshi.people.com.cn/n1/2022/0329/c436975-32386491.html — 수문교 8.8미터 경간, 12월 1일 제172연대 공병 폭파·4일 재폭파·6일 밤 결사대 폭파, 7일 C-119 투하, 1081고지의 제180연대 2중대가 9일 전원 동사로 발견되고 「손이 노리쇠에 얼어붙었다」는 서술, 11일 미군의 다리 폭파.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올리버 스미스 1893년생, 윌리엄 바버 1919년생, 레이먼드 데이비스 1915년생, 새뮤얼 야스킬카 1919년생, 헥터 카페라타 1929년생, 레지널드 마이어스 1919년생, 호머 리첸버그 1903년생, 레이먼드 머리 1913년생(이상 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쑹스룬 1907년생(영문 위키백과 「Song Shilun」), 양건쓰 1922년생(중국어 위키백과, 「时年28岁」), 마오쩌둥 1893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매카시, 빌, 맥팔랜드, 터너, 패트리지, 프로서, 하젯, 레트, 디모트, 쑹아마오, 왕시, 우푸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대조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기온 — 해병대 전사는 11월 27일 밤 유담리를 화씨 영하 20도(섭씨 약 영하 29도), 12월 1일 밤 산길을 화씨 영하 16도로 적었고, 중국 쪽 기록은 영하 30도(퇴역군인사무부)·영하 40도(인민주간·CCTV)로 적었다. 본문은 각 장면을 그 쪽 기록대로 적었다. [자료 충돌] 입북 첫날 동상자 — CCTV 기사는 800여 명, 중국어 위키백과(徐焰·李建 인용)는 700명. 본문은 「팔백 명 넘게」를 따랐다. [자료 충돌] 소고령(동쪽 고지) 싸움 — 『인민주간』은 미군이 두 시간 넘게 포탄 6,000여 발을 쏘고 M26 전차 8대를 앞세워 공격했다고 적었고, 해병대 전사는 마이어스의 혼성 부대에 포병·박격포 지원이 없었고 공중 지원만 있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여덟 번 격퇴」를 중국 쪽 주장으로만 적고, 전차와 포격은 쓰지 않았다. 양건쓰가 죽은 시각도 중국 쪽은 오전 10시 무렵 이후, 미 전사는 시각을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수문교 남쪽의 얼어붙은 중공군 — 해병대 전사는 다리 자리 너머 참호에서 얼어붙은 중공군 약 50명을 「들어 올려」 포로로 넘겼다고 적었고(살아 있었음), 중국 쪽 학습시보는 1081고지의 제180연대 2중대가 전원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적었다. 같은 일인지 다른 일인지는 확인하지 못해 둘 다 적었다. 다리 설치 날짜도 학습시보는 8일 오후, 해병대 전사는 9일 15시 30분으로 다르다. 본문은 해병대 전사를 따랐다. [자료 충돌] 스미스의 말 — 해병대 전사(스미스 자신의 기록 인용)는 「뒤가 없으면 퇴각도 없다」는 취지만 적었고, 널리 알려진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는 1950년 언론 보도에서 나온 표현이다. 본문은 앞의 것을 스미스의 답으로, 뒤의 것을 신문에 실린 말로 나누어 적었다. [자료 충돌] 손실 — 해병 제1사단 보고(전사 604 등)와 미 제10군단 집계(전사 393·부상 2,152·실종 76)가 다르고, 중국 제9병단 손실도 총후근부 통계(약 5만 2천)와 서방 추정(Roe, 약 6만)이 다르다. 본문은 사단 보고와 총후근부 통계만 각자의 기록으로 적었다. [재구성] 야스킬카 중대의 「카빈 노리쇠」 대화, 하갈우리 남동쪽 산길의 「콩 아껴 먹어라」 대화와 웃음, F중대 참호의 「따뜻한 옷」 중얼거림, 스미스 숙소의 「냄비 하나가 중상」 대화, 마이어스 부대의 국군 근무병이 서기병 뒤에 붙어 오르는 모습, 데이비스 대대 무전병의 말을 우리말로 옮긴 표현, 투시 롤을 두고 한 「먹는 거야, 바르는 거야?」 대화(라디에이터 수리는 기록), 고토리에서 위생병이 산모의 손을 잡은 몸짓과 「조금만 더」라는 말(두 출산과 위생병의 도움은 기록), 수문교의 「들어서 꺼내라」, 레트의 말을 다듬은 우리말, 첫 장면 참호를 도는 야스킬카의 모습, 양건쓰의 마지막 대사 앞뒤의 정황(대사는 『인민주간』에 따름)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인민주간』의 양건쓰 장면은 그 자체가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한 중국 쪽 서술이다. 고토리에서 태어난 두 아이의 이후는 기록에 없다. 10. 「志愿军第9兵团」 관련 보도 — 『新民晚报』 2021.10.24(img1.xinmin.cn/xmwb/2021-10-24/141024.pdf): 대만 공격을 준비하던 제20군이 10월 초 상하이에서 열차로 산둥에 옮겨 정비. 中央电视台 「国家记忆」: 제27군이 11월 1일 취푸에서 군용열차에 오름. 도강은 11월 7~19일 지안·린장(중국 쪽 연표). 11. Roy E. Appleman, 『Escaping the Trap: The US Army X Corps in Northeast Korea, 1950』(Texas A&M University Press, 1990) 21쪽 — 제9병단의 압록강 도하를 11월 10일 무렵으로 적음. 12. 『新民周刊』 2021년 11월 22일호 장진호 특집, img1.xinmin.cn/xmzk/2021-11-22/611122.pdf — 쑹스룬이 1952년 9월 귀국하며 압록강 가에서 오래 서 있다가 모자를 벗고 장진호 쪽으로 절했다는 서술. 华夏经纬网 2020.9.10 「宋时轮:流着泪离开朝鲜战场的司令员」도 같은 장면을 전한다. [10-18 덧붙임] 소유자가 준 중공군 시점 장진호 영상 자막(영상자료/중공군_대본재료/장진호_전투_전체자막_정리본.txt)과 대조해 원고에 없던 사실만 덧붙였다. 기존 줄은 그대로 두었다. 1번 출처(Montross·Canzona)에서 더 가져온 것: 중공군 무전은 연대까지·전화는 대대까지·그 아래는 나팔·호루라기·조명탄·손전등, 드라이스데일 특임대(총 922명·차량 141대, 전사·실종 162·부상 159·합계 321, 잃은 차량 75대, 「The Fight in Hell Fire Valley」), F중대 닷새 손실(전사 26·실종 3·부상 89=118, 장교 7명 중 6명 부상), 12월 1일 14시 30분 공정 40% 활주로의 첫 C-47(부상자 24명), 보충병 537명, 하갈우리–고토리 약 38시간·사상 616명(전사 83·부상 후 사망 20·실종 7·부상 506)·차량 1,000대 넘게, 노획 문서 「Compilation of Battle Experiences Reported by Various Armies」(제500군사정보단 문서 204141)의 제27군(얼음덩이·수류탄 뚜껑·박격포탄 70% 불발)·제26군(90% 넘게 동상·이틀에 감자 몇 개)·제20군(「We succeeded in the separation and encirclement of the enemy, but we failed to annihilate the enemy one by one」) 보고, 석 달 가까이 제9병단을 찾지 못함과 1951.3.18 제26군 제77사단 포로. 2번 출처(중국어 위키백과 「长津湖战役」)에서 더 가져온 것: 11월 12일 전보 뒷부분(「应有一个至两个师作为预备队,九兵团的二十六军应靠近前线」), 12월 4일 전보 끝(「只留下其在柳潭里地区之固守部队围而不歼,以利钓鱼」), 쑹스룬의 12월 11일 「第9兵团对东线作战的检讨」(「这次作战打得很不好,不仅未能全歼美陆一师及第七师,反遭巨大减员」). [나이]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은 출생연도를 대조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압록강 도하 — 중국 쪽 연표는 11월 7~19일에 걸쳐 차례로, Appleman은 11월 10일 무렵으로 적었다. 본문은 「11월 중순 무렵까지」로 적었다. [자료 충돌] 드라이스데일 특임대 인원 — Montross 922명, Appleman 921명. 본문은 Montross를 따랐다. [자료 충돌] 제9병단 손실 — 자막과 『新民周刊』 계열은 전투 19,202명·동상 28,954명(합계 약 4만 8천), 총후근부 1988년 통계는 21,366명·30,732명이다. 본문은 기존대로 총후근부 통계를 따랐다. [재구성] 드라이스데일 부대 도랑에서의 「앞에 간 차들은요?」 대화, 「나팔 소리는 중대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라는 풀이 문장은 기록(무전·신호 체계)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쑹스룬의 압록강 장면은 중국 매체 서술이며 독립 사료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2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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