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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15,437자)

군우리 전투 — 죽음의 길

1950 · 네오

군우리 전투, 1950년 11월 27일~30일 — 청천강 아래 군우리·개천·신림리·와원, 남쪽으로 미 제2사단 사령부·갈현동·용원리·순천·숙천·안주. 11월 27일 터키여단의 와원 동쪽 진출과 되돌아옴, 28일 밤 중공군 제114사단의 와원 공격과 터키여단의 신림리 후퇴, 29일 개천 고개의 막힘, 29일 새벽부터 중공군 제113사단이 막은 군우리–순천 도로(갈현령·송골봉), 30일 미 제2사단의 남쪽 돌파와 제23보병연대의 안주 쪽 철수, 영국 미들섹스 대대의 위치.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0년 11월 하순 어느 아침, 평안남도 개천군 조양면(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조양동 일대) — 청천강 가의 길목 마을 군우리(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군우동)에서 동쪽 산골 고을 덕천으로 이어지는 길 위의 면.

터키여단의 하사관 카즘 운뤼는 싸움이 붙기 며칠 전부터 지도를 나눠 주는 일을 맡았다. 군우리 일대가 그려진 종이를 부대마다 세어 넘기고, 지도 위에 길과 고개를 다시 그려 넣었다1. 여단은 한 달 전 부산에 내렸고, 11월 20일 군우리로 올라와 미 제9군단의 예비대가 되었다2. 지중해의 항구 이스켄데룬을 떠날 때 병력은 오천팔십삼 명이었다3.

운뤼는 그날 아침을 공책에 적었다1.

“얼마쯤 가서 조양면에서 전투단을 따라잡는다. 아직 날이 덥혀지지 않아, 병사들은 저마다 피운 불가에 모여 몸을 녹이고 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뒤 차가 다시 움직였다. 길은 좁았고, 한쪽은 낭떠러지였다. 골짜기 바닥의 사람들이 어린아이만 하게 내려다보였다. 트럭은 세 시간을 기어올라서야 산꼭대기에 닿았다1. 운뤼는 공책에 한 줄을 더 보탰다. 터키에서는 짝을 찾을 수 없는 봉우리들이 빗살처럼 늘어서서, 구름에 닿을 것 같다고.

불가의 병사 하나가 지도 꾸러미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하사관님, 그 종이에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나와 있습니까?”

“길은 나와 있지. 어디로 가는지는 장군님이 아시고.”

“장군님은 누가 알려 줍니까?”

“미국 사람들. 미국 사람들한테는 하느님이 알려 주시겠지.”

*

1950년 11월 27일 월요일 정오 무렵, 와원(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동쪽 길 — 군우리에서 동쪽으로 십육 킬로미터, 개천강을 따라 덕천으로 가는 길가의 작은 마을.

터키여단의 대열은 아침부터 동쪽으로 나아갔다. 앞에는 미 제72전차대대의 전차 한 소대가 섰다. 덕천을 되찾으라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61) 중장의 명령이었다4. 이틀 전 저녁 덕천 일대의 국군 제2군단이 무너졌고, 터키여단은 그 빈자리를 메우러 나선 길이었다.

정오 가까이 군단 사령부에서 무전이 왔다. 덕천 쪽에서 중공군 한 연대가 서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여러 건 들어왔다. 제9군단장 쿨터 소장은 처음 싸움에 나서는 터키여단이 그 연대와 길 위에서 맞부딪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여단은 와원 동쪽 칠 마일, 십일 킬로미터 지점에 진지를 파고 기다리라는 명령이었다4.

여단장 타흐신 야즈즈(58) 준장은 통역이 옮긴 명령을 듣고 대열을 돌려세웠다. 여단은 왔던 길을 되짚어 와원 바로 동쪽에 진지를 팠다4. 미군 고문관이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동쪽을 짚었다.

“장군, 와원 동쪽 칠 마일입니다. 여기가 아닙니다.”

“와원 동쪽이라고 했소. 여기가 와원 동쪽이오.”

진지는 처음 모였던 자리와 거의 같은 곳이 되었다. 북쪽으로 십삼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미 제38보병연대가 오른쪽 끝을 지키고 있었다4. 두 부대 사이에는 산만 있었다.

*

1950년 11월 28일 화요일, 와원.

그날 터키 병사들이 뒤로 보낸 포로는 백스물다섯 명이었다. 포로들은 두 손을 들고 걸어오며 무어라고 소리쳤다. 터키 병사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뒤쪽에서 포로를 넘겨받은 미군이 그 사람들의 얼굴과 군복을 다시 보았다. 덕천에서 밀려나 서쪽으로 헤매던 국군 제6사단과 제7사단 병사들이었다4. 이틀 전에도 와원에서는 터키 대대가 서쪽으로 쫓겨 오던 국군 이백 명쯤을 중공군으로 알고 쏜 일이 있었다5.

“한국군! 우리 한국군이라고!”

포로 줄에 섞인 국군 병사 하나가 제 가슴의 계급장을 두드렸다. 그를 끌고 온 터키 병사는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중공군도 국군도 그에게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날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 제342연대가 와원의 터키군 앞 대대와 맞붙었다. 싸움은 하루 내내 이어졌고, 앞 대대에서만 사백 명쯤이 죽거나 다쳤다6. 총검과 칼이 오가는 육박전까지 벌어졌다5. 야즈즈는 훗날 회고록에서, 미군 전차장들이 여러 번 공격을 거부해 터키 병사들이 총검 돌격으로 메워야 했다고 썼다5.

자정이 되기 직전 여단은 서쪽으로 오 킬로미터를 물러나 마을 신림리(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일대)에 들어갔다. 와원을 지키라는 명령과는 맞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야즈즈와 고문관들은 여단이 미 제2사단에 배속되었다는 사실을 28일 밤늦게야 알았고, 그 무렵 군단과 잇는 전화와 무전은 끊겨 있었다4. 자정이 지나자 중공군은 신림리까지 따라와 다시 공격했다.

*

1950년 11월 29일 수요일 새벽, 개천(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 신림리에서 서쪽으로 오 킬로미터, 터키여단 사령부가 있는 고을.

앞 대대들과 여단 사령부 사이에는 전화선도 무전도 없었다. 야즈즈가 공격을 안 것은 여단 포병대대가 개천으로 물러 들어왔을 때였다. 포병대대장이 보고했다4.

“보병 세 대대가 다 포위되었습니다.”

야즈즈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에 보충대대의 한 중대와 미군 전차 한 소대를 신림리로 보내 길을 열고 철수 명령을 전했다. 구출대는 쉽게 닿았고, 세 대대는 막힘 없이 개천으로 물러났다4. 중공군은 개천강 남쪽 능선을 타고 그 뒤를 따라 서쪽으로 왔다.

그날 오후, 중공군이 개천 북쪽의 미 제38보병연대 제3대대를 쳤다. 미 제2사단 부사단장 브래들리(50) 준장은 제38보병연대장 페플로 대령을 거쳐 터키여단에 반격을 명령했다. 반격은 없었다4. 곧 박격포탄이 개천 시내의 터키군 위로 떨어졌고, 지키는 사람이 없던 남쪽 골짜기에서 중공군이 나와 군우리로 가는 고개를 노렸다. 야즈즈는 곧바로 물러났다. 터키군의 병사와 차량이 두 줄로 고갯길을 메웠다4.

페플로는 예비대인 제1대대를 트럭에 태워 동쪽으로 보냈다. 트럭은 개천에서 쏟아져 나오는 터키군 차량에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고개 남쪽 산을 차지한 중공군이 길 위에 총탄을 퍼부었고, 미군과 터키군은 길 북쪽으로 엎드려 해가 지고도 한참 동안 마주 쏘았다4.

어두워진 뒤 B-26 폭격기가 고개 위를 때렸다. 밤에 땅 위의 아군 바로 앞을 때리는 폭격은 제5공군에게 아직 서툰 일이었지만, 그날 밤의 폭탄은 중공군 위에 떨어졌다4. 불길이 잦아든 길로 병사들이 다시 서쪽으로 걸었다. 터키여단은 흩어졌다. 지휘관들이 보이지 않았고, 터키 병사들은 고개에서 군우리를 지나 남쪽 미 제2사단 사령부까지 무리 지어 늘어섰다. 야즈즈는 신안주로 돌아 순천에서 여단을 다시 모으겠다며 차를 타고 떠났다4.

*

1950년 11월 29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군우리에서 순천(현 북한 평안남도 순천시)으로 가는 도로 — 미 제2사단 사령부 남쪽 고갯길과 철도역 마을 용원리(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룡원리).

중공군 제113사단은 전날 아침 순천 북쪽의 작은 마을 삼소리를 차지했다. 사단장은 위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제337연대를 북쪽 용원리로 보내 군우리–순천 도로를 끊게 했다7. 제337연대 1대대 1중대 2소대장 궈중톈은 날이 밝기 전 용원리 근처의 고개 갈현령에 닿았다. 소대원은 서른 명 남짓이었다8.

갈현령의 주봉은 높았지만 나무 하나 없이 훤했다. 궈중톈은 주봉을 버리고, 그 북쪽 길가의 작은 산등성이에 진지를 팠다. 길이 거기서 꺾여 차가 속도를 줄여야 했고, 길에서 오십 미터 남짓 떨어진 자리였다. 주봉에는 가짜 진지를 만들어 두었다8. 명령받은 자리와 다른 곳이었다. 궈중톈은 소대원들에게 또 하나를 일렀다8.

“전차는 보내 줘라. 보병을 막는다!”

중국 쪽 기록은 그 아침을 이렇게 적었다. 여덟 시가 조금 넘어 지프 한 대와 큰 트럭 세 대가 북쪽에서 내려왔고, 소대는 트럭 위의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미군 비행기가 백여 차례 날아와 주봉의 가짜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 소대는 그날 미군 이백열다섯 명을 죽이고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8. 중국 쪽 주장이다.

미군 쪽 기록에도 그 아침의 피가 남아 있다. 동트기 전 순천에서 북쪽으로 보급품을 싣고 오던 터키군 차량의 병사들이 사단 사령부에 들러 길이 막혔다고 알렸다. 아홉 시에 사단 헌병중대의 순찰대가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사령부에서 육 킬로미터 아래에서 총을 맞았다. 한 명이 전사하고 세 명이 다쳤다4. 사단 수색중대가 오전에 고개로 갔다가 정오 무렵 멈췄다. 제38보병연대 C중대가 전차 한 소대와 함께 오후에 합류했다. 중대에 남은 사람은 일흔다섯 명이었다. 해 질 무렵 그들도 사령부 쪽으로 물러났다. 고개의 중공군은 이제 한 대대쯤으로 보였다4. 남쪽에서는 영국 제27여단의 미들섹스 대대가 고개 남쪽 십일 킬로미터 지점까지 올라와 밤을 났다4.

*

1950년 11월 30일 목요일 새벽 세 시 반, 군우리 남서쪽 — 미 제9보병연대 집결지.

제9보병연대장 슬론 대령은 전날 밤 사단장 카이저(55) 소장에게 보고했다. 나흘 싸움으로 연대의 병력은 절반 아래로 줄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를 합쳐도 사오백 명이 전부였다. 카이저는 그 사람들을 다 데리고 날이 밝으면 길을 뚫으라고 했다4. 세 시 반, 대열이 남쪽으로 출발했다. 여섯 시 반, 사단 사령부를 팔백 미터도 지나지 않아 남서쪽 고지에서 기관총이 울렸다4. 중공군이 고개 북쪽까지 길을 막아 놓았다는 첫 확실한 표시였다.

중국 쪽 기록은 군우리 남쪽 길가의 고지 하나를 송골봉이라고 부르고, 그 산에서 남쪽으로 빠지려는 미 제2사단 제9연대와 싸웠다고 적었다9.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제112사단 제335연대 1대대 3중대가 그날 새벽 그 산에 올랐다. 미군보다 오 분 먼저였다고 그들은 쓴다10. 3중대는 새벽부터 다섯 시간 넘게 폭탄과 포탄과 로켓과 네이팜을 맞았다9. 산꼭대기의 흙과 돌이 갈아엎어졌고, 네이팜 불길에 바위가 그을렸다.

오전 열 시 무렵 다시 포격이 그치고 미군이 산을 올라왔다. 중대장과 지도원, 소대장 세 사람이 다 쓰러졌다9. 탄알이 떨어진 중대장 다이루이는 총검을 들고 미군 사이로 뛰어들었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었다10. 마지막에 남은 부중대장 양원하이는 총검이 부러진 소총을 들고 뛰어들었다. 몸에 불이 붙은 부상병 셋이 미군 쪽으로 달려 나갔다. 붕대를 감던 위생병은 손에 든 부목으로 적을 내리쳤다9. 백스무 명이던 중대에서 일곱 명이 살아남았다9.

미군 쪽 기록은 그 산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슬론의 두 대대는 서쪽 능선과 동쪽 낮은 땅으로 나뉘어 올라갔다가, 남쪽 다음 고지에서 쏟아지는 기관총과 박격포에 멈췄다4. 카이저가 국군 제3연대를 보냈다. 국군은 로켓과 네이팜을 쏟는 비행기와 길 위 전차의 기관총을 등에 업고 첫 산에서 중공군 몇을 몰아냈다. 그다음 능선에는 두 번 올라가 두 번 밀려났다. 국군이 그날 오전에 얻은 땅은 일 킬로미터가 조금 넘었다4.

*

같은 날 낮 열두 시 무렵, 미 제2사단 사령부.

정오가 되도록 길은 열리지 않았다. 북쪽에서는 군우리 아래 개천강 남쪽을 지키던 제23보병연대장 프리먼(43) 대령이 중공군이 강 건너에 늘어나고 있다고 알려 왔다4. 서쪽 안주로 도는 길은 끊겼다는 보고가 전날 밤에 들어와 있었다. 그 길은 사실 그때까지 열려 있었다4.

카이저는 길을 달려서 뚫기로 했다. 고개 남쪽에서는 영국군이 북쪽으로 쳐 올라오고 있으리라고 그는 짐작했다. 미들섹스 대대와는 무전이 닿지 않았다. 영국군은 아침에 고개를 치다가 막혀, 용원리 근처에서 내려오는 미군을 받아 주려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4.

부사단장 브래들리가 부대마다 새 명령을 돌렸다4.

“쓸 수 있는 차량과 장비는 전부 가지고 나온다. 멈추지 말고 계속 간다.”

열두 시 사십오 분, 페플로의 제38보병연대가 맨 앞에서 출발했다. 한 시, 선두 전차가 제9보병연대 진지를 지났다. 전차 위에는 장교 셋과 병사 열여덟이 매달려 있었다4. 길가 산에서 기관총이 간간이 날아왔고, 매달린 병사들은 산을 향해 마주 쏘았다. 이 킬로미터 남짓 가자 길 위에 전날 사단이 잃은 장갑차와 전차와 이 톤 반 트럭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밀어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몇 분의 멈춤이 뒤로 이어진 수백 대의 차량에 서고, 기다리고, 다시 가는 박자를 새겼다4.

고개를 지나 사백 미터쯤 더 가자 두 번째 장애물이 나왔다. 트럭과 잡동사니 장비가 길을 막고 있었다. 전차 운전병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들이받아 뚫었다. 다음 굽이를 돌자 미들섹스 대대의 초소가 보였다. 오후 두 시였다4. 영국군의 무전이 미 제8군 사령부의 일지에 그대로 적혔다4.

“군우리–순천 보급로, 1400시 현재 개통.”

*

같은 날 오후 세 시 반, 용원리 북쪽 고개.

선두 전차 뒤의 길은 열린 길이 아니었다. 중공군 제113사단의 두 연대가 길 양쪽 산 위에서 기관총 서른에서 마흔 정, 박격포 열 문쯤을 쏘았다. 사격은 대부분 길 옆구리를 향했고, 먼 데서 길 위로 내리꽂혔다4. 차가 멈출 때마다 병사들은 트럭과 전차에서 뛰어내려 길가 도랑에 엎드렸다. 차가 다시 움직이면 운전병이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떠나기도 했다. 부상병은 뒤에 오는 차에 자리가 있으면 실렸고, 자리가 없으면 쓰러진 자리에 남았다4.

고개 안에는 이미 부서진 트럭이 스무 대 넘게 널려 있었다. 중공군은 고개 양 끝에서 기관총을 길 따라 쏘았고, 양쪽 비탈 위에서는 수류탄을 던져 내렸다. 길이 처음으로 완전히 멈췄다4. 세 시 반이 조금 못 되어 카이저와 브래들리가 고개 앞까지 내려왔다. 네 시 반 무렵 카이저는 작전참모 홀든 중령과 차를 다 버리고 산으로 걸어 나가는 길을 잠깐 따져 보았다4.

그때 비행기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공중 통제기 조종사들은 길 양쪽 고지에 모인 중공군을 놓칠 수가 없다고 보고했다. 전투폭격기는 고개 위로 너무 낮게 날아서, 고개 안의 병사들은 비행기가 그대로 산에 처박히는 줄 알았다. 비행기의 기관총탄이 머리 위 칠십 미터도 안 되는 바위벽을 때렸고, 흘러내린 네이팜이 길 위의 차 몇 대에 불을 붙였다4.

사단 헌병중대의 상사 로버트 카이저(26)는 행렬 앞쪽에서 삼 킬로미터쯤 뒤에 있다가, 앞이 막혔다는 것을 알고 고개로 뛰어갔다11. 그는 움직이는 차로 부서진 차를 길 밖으로 밀어냈다.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을 아직 굴러가는 차에 싣고, 걸을 수 있는 병사에게 핸들을 맡겨 남쪽으로 보냈다11. 다친 포병 사격지휘병 리처드 피저를 지프까지 업어 간 사람도 그였다.

“상사님, 카이저라면서요? 사단장님하고 무슨 사이입니까?”

“아무 사이도 아냐. 무슨 사이였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트럭을 밀고 있겠어? 핸들 잡아!”

그는 두 시간 반 동안 길을 치웠다. 총에 맞고도 행렬이 고개를 다 빠져나갈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11. 미 육군 공식 전사는 카이저 소장이 수색중대의 경전차 두 대를 보내 부서진 차들 사이로 길을 밀어냈다고 적었다4. 행렬은 다시 남쪽으로 움직였다. 해가 지자 비행기들이 돌아갔다.

*

같은 날 오후 네 시, 군우리 남쪽 개천강 가 — 미 제23보병연대 진지.

프리먼은 두 시 반과 세 시 반, 두 번 사단에 무전을 쳤다. 무전은 약하고 자주 끊겼다. 그는 해가 지기 전에, 혹은 자기가 판단하는 때에, 서쪽 안주로 도는 길로 빠지겠다고 했다. 네 시, 브래들리가 허락했다4.

프리먼은 아직 남쪽 길에 오르지 못한 제38야전포병대대장과 제9보병연대의 맨 뒤 병사들을 이끄는 장교를 불러 같이 가자고 했다. 두 사람 다 거절했다4. 프리먼은 제15야전포병대대장과 의논해 대포를 끌고 가지 않기로 했다. 제15야전포병대대는 가진 포탄을 이십 분 남짓 동안 모두 쏘았다. 포병들은 포신 안에 테르밋 수류탄을 넣어 터뜨리고 트럭에 올랐다4. 포격이 그친 뒤 한참 동안 중공군의 총소리가 끊겼다. 앞의 관측병들은 중공군이 비어 가는 미군 진지 앞에서 서둘러 땅을 파는 모습을 보았다4. 연대는 해 질 무렵 안주의 미 제5연대전투단 진지 뒤로 들어섰고, 자정 직전 숙천(현 북한 평안남도 숙천군)에 모였다4.

남쪽 길의 맨 끝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한국에 하나뿐인 8인치 곡사포 대대, 제17야전포병대대가 어두워진 뒤 고개를 넘었다. 고개 아래 마을 갈현동 서쪽에서 개울을 건너려다 곡사포 한 문이 깊은 도랑으로 굴러떨어졌다. 포병 하나가 포를 부수러 도랑에 내려갔고, 그를 비추려고 켠 불빛을 보고 갈현동에서 박격포탄이 날아왔다4. 남은 견인차와 곡사포는 한 대씩 천천히 개울을 건넜다. 그들이 사격권을 벗어났을 때는 자정이었다. 그 뒤의 제37야전포병대대는 곡사포 열 문과 차량 쉰세 대를 길에 버렸다4.

그보다 뒤의 제503·제38야전포병대대와 제2공병대대, 제9보병연대의 마지막 병사들은 출발점 바로 아래에서 어둠 속 공격을 받았다. 부서진 차들이 길을 깊이 막았다. 그들은 포와 장비와 차를 다 버리고 길을 떠나 산을 넘어 순천으로 걸었다. 모두가 닿지는 못했다. 마지막 낙오병이 안전한 곳에 닿은 것은 며칠 뒤였다4. 중국 쪽 기록은 제113사단이 12월 1일까지 그 길에서 유엔군 삼천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고, 자동차 오백여 대를 빼앗았다고 적었다7.

*

1950년 12월 1일 금요일, 평양 남쪽 고을 중화(현 북한 황해북도 중화군)로 가는 길.

미 제2사단의 인사참모부가 그날 숫자를 올렸다. 11월 후반 보름 동안 사단의 전투 손실은 사천구백사십 명, 그 가운데 구 할이 25일 뒤에 생겼다. 장교만 이백삼십칠 명이었다. 11월 15일 실제 병력 만오천의 삼분의 일이었다. 대포 예순네 문을 잃었고, 공병대대의 장비는 거의 다 없어졌다4. 카이저는 그날부터 남은 사단을 중화로 옮겨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4.

중대마다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 다음에 대답 없는 이름이 이어졌다. 대답 없는 이름 옆에는 전사, 부상, 실종 가운데 하나가 적혔고, 어느 것도 적을 수 없는 이름이 많았다.

터키여단의 카즘 운뤼는 지도를 나눠 주던 공책을 며칠 동안 비워 두었다. 그가 다시 쓴 것은 11월 30일이었다1.

“미군 병사들이 가리켜 준, 지붕 없는 트레일러 안에서 밤을 보냈다.”

터키 쪽 기록은 군우리 싸움에서 여단이 이백십팔 명이 전사하고 사백오십오 명이 다치고 아흔네 명이 실종되었다고 적었다3. 미군 장교들 가운데는 터키 병사들이 무너져 달아났다고 쓴 사람도 있었고, 와원과 군우리 사이에 그들 말고 아무도 없었다고 쓴 사람도 있었다5.

중국에서도 이름이 불렸다. 작가 웨이웨이가 송골봉 싸움을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가」라는 긴 글로 써서 중국 전체에 알렸다. 그는 훗날 그 글이 실린 책을 제335연대에 보내며 연대장 판톈언 앞으로 한 줄을 적었다12. “판톈언 동지, 당신들이야말로 진짜 작가요.” 그러나 그 산에서 죽은 3중대장의 이름은 지금도 기록마다 다르게 적힌다9. 다이루이와 다이위청이다10.

2025년 여름, 군우리 땅에서 나온 뼈 몇 조각이 터키 국기에 싸여 경기도 오산의 미 공군 기지에 내렸다. 하와이의 미군 감식소가 거의 틀림없이 터키 병사 네 사람이라고 했다. 네 사람의 이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유전자 대조가 끝나면 실종자 명단은 백예순일곱 명에서 백예순세 명으로 줄어든다13.

사료 출처

1. DHA(데미뢰렌 통신), 「Kore gazisinin savaş anılarını anlattığı günlük, tarihe ışık tutuyor」(2022.11.27), dha.com.tr/gundem/kore-gazisinin-savas-anilarini-anlattigi-gunluk-tarihe-isik-tutuyor-2167932 — 하사관(başgedikli) 카즘 운뤼의 일기, 군우리 싸움 며칠 전 군우리 지도를 나눠 주고 그리는 일을 맡음, 조양면(Choyang-Myon)의 불가와 산길(원문: Bir süre yol aldıktan sonra muharebe grubuna Choyang-Myon’a yetişiyoruz… / Türkiye’de eşine rastlanmaz zirveleri…), 싸움 뒤 빈 쪽, 11월 30일 다시 쓴 일기(원문: Geceyi Amerikan askerlerinin gösterdiği üzeri açık bir römorkun içinde geçirdik). 2. 국가보훈부 영문 누리집, 「Turkey」(2026년 10월 열람),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27 — 1950년 11월 20일 군우리 이동과 미 제9군단 예비대 편입, 여단장 Tahsin Yazici. 3. TRT Haber, 「Bir kahramanlık destanı: Kunuri çarpışması」(2026년 10월 열람), trthaber.com/haber/kultur-sanat/bir-kahramanlik-destani-kunuri-carpismasi-727393.html — 여단 병력 5,083명, 1950.9.17 이스켄데룬 출항, 군우리 싸움(11.26~29) 손실 전사 218·부상 455·실종 94. 4.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4장 끝부분(77~83쪽)과 제6장 「Disengagement in the West」(106~127쪽), koreanwar.org/kwp2/cmh/ebb_and_flow.pdf — 27일 터키여단의 덕천 쪽 진출과 쿨터의 정지 명령(와원 동쪽 7마일), 야즈즈의 오해와 와원 동쪽 진지, 미 제38보병연대와 8마일 거리, 28일 와원 교전과 125명 「포로」가 국군 제6·7사단 병사로 밝혀진 일(각주 67, 미 고문단 보고 「Turkish U.N. Brigade Advisory Group, 20 Nov-13 Dec 50」), 자정 직전 신림리 3마일 후퇴, 제2사단 배속을 28일 밤늦게야 안 일과 통신 두절, 29일 새벽 개천 사령부와 포병대대장 보고, 아침 구출대(보충대대 1개 중대·전차 1개 소대), 29일 오후 브래들리의 반격 명령, 개천의 박격포 사격과 남쪽 골짜기의 중공군, 이중 대열의 고개 정체, 제38보병연대 제1대대의 막힘, B-26 야간 공격, 여단의 와해와 야즈즈의 신안주 경유 순천행, 29일 새벽 터키 보급 차량의 보고, 09시 헌병 순찰대(1명 전사·3명 부상), 수색중대 정오 정지, C중대 75명, 미들섹스 대대 7마일 남쪽 집결, 슬론의 보고(400~500명), 30일 03시 30분 출발·06시 30분 피격, 국군 제3연대의 공격(4분의 3마일 못 미침), 정오 무렵 프리먼 보고와 끊겼다는 안주 길 보고(실제로는 열려 있었음), 미들섹스 대대의 위치, 브래들리의 「쓸 수 있는 차량·장비 모두」와 「계속 움직여라」 지시, 12시 45분 출발, 선두 전차의 장교 3·병사 18, M39·M4·2.5톤 트럭 장애물, 두 번째 장애물 돌파, 14시 미들섹스 초소, 「MSR between Kunu-ri and Sunch'on open as of 1400」, 기관총 30~40정·박격포 10문, 도랑과 남겨진 부상병, 고개의 트럭 20여 대, 15시 30분 카이저·브래들리, 16시 30분 차량 포기 검토, 저공 폭격과 75야드, 네이팜, 경전차 두 대의 길 내기, 프리먼의 14시 30분·15시 30분 보고와 16시 허락, 제38야전포병대대장 등의 거절, 제15야전포병대대의 20여 분 사격과 테르밋, 숙천 집결, 제17야전포병대대(한국 유일의 8인치 대대)의 곡사포 전복과 갈현동 박격포, 자정, 제37야전포병대대 손실(곡사포 10·차량 53), 제503·38야전포병대대·제2공병대대·제9보병연대 후미의 산길 탈출, 12월 1일 집계(전투 손실 4,940명, 9할이 25일 이후, 장교 237명, 병력의 3분의 1, 대포 64문)와 중화 이동. 5.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Wawon」(2026년 10월 열람) — 26일 터키 대대가 쫓겨 오던 국군 약 200명을 중공군으로 알고 공격(Appleman 1989 등 인용), 28일 칼과 총검의 육박전, 야즈즈 회고록의 주장(미군 전차장들의 공격 거부와 총검 돌격), 블레어·프리먼의 비판(broke and bugged out)과 베빈 알렉산더의 반론(와원과 군우리 사이의 유일한 유엔군). 원 문헌들은 직접 보지 못했다. 6. 중국어 위키백과, 「清川江戰役」(2026년 10월 열람) 「军隅里战斗」 절 — 중공군 제114사단 제342연대와 터키여단 앞 대대의 28일 교전, 앞 대대 약 400명 사상, 28일 황혼의 5킬로미터 후퇴와 포위(중국 군사과학원 『抗美援朝战争史』 등 인용). 7. 刘媛媛, 「三所里战斗:穿插迂回作战的范例」(25화 출처와 같은 기사), 解放军报 2020.1.7, 중국사회과학망 재게재 — 사단장이 위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제337연대에 용원리(龙源里) 점령을 명령, 12월 1일까지 유엔군 3,000여 명 살상·포로, 자동차 500여 대 노획. 8. 唐家明·况冬, 「葛岘岭阻击战:创造零伤亡奇迹」, 解放军报 2020.1.21, 중국사회과학망 재게재(cssn.cn/jsx/…/202208/t20220803_5450928.shtml) — 제113사단 제337연대 1대대 1중대 2소대장 궈중톈(郭忠田), 30여 명, 29일 새벽 도착, 주봉 대신 길가 작은 산(길에서 약 50미터, 굽은 길), 주봉의 가짜 진지, 「放过坦克,阻敌步兵!」, 8시 넘어 지프 1·트럭 3, 미군기 100여 차례 출격, 215명 사살·사상자 없음(중국 측 주장), 「郭忠田英雄排」 칭호. 9. 辛旗, 「松骨峰战役惨烈瞬间:志愿军重伤员冲向敌人自爆」 1~3쪽, 중국신문망 2013.10.17, chinanews.com.cn/mil/2013/10-17/5390359.shtml — 제38군 제112사단 제335연대 1대대 3중대의 송골봉 점령, 남쪽으로 빠지는 미 제2사단 제9연대와의 싸움, 새벽부터 다섯 시간 넘는 폭격·포격·네이팜, 10시 무렵 돌격, 중대장 다이위청(戴玉成)·지도원·소대장 셋 전사, 부중대장 양원하이(杨文海)·불붙은 부상병 셋·위생병의 부목, 120명 중 7명 생존. 10. 新华网, 「75年铿锵不变,松骨峰精神永驻长存」(2025.11.30) — 3중대가 미군보다 5분 먼저 송골봉 도착, 중대장 다이루이(戴如义)의 총검 돌격, 7명 생존. 11. 미 육군 누리집 army.mil, 「Former Army MP, CID agent awarded for heroics」(2014.3.26), army.mil/article/122674 — 제2헌병중대 로버트 카이저 상사(1924.10.1생), 행렬 앞에서 약 2마일 뒤에서 달려감, 움직이는 차로 부서진 차를 밀어냄, 사상자를 실어 보냄, 약 2시간 반, 부상 뒤에도 남음, 사격지휘병 리처드 피저를 지프로 옮김, 브래들리의 1952년 편지, 2014년 수훈십자훈장 추서. 사단장 로런스 카이저와의 관계는 기사에 없다. 12. 高丹, 「抗美援朝英雄范天恩传记《天生无畏》出版」, 澎湃新闻 2024.9.22, 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28820746 — 제335연대장 판톈언(范天恩)의 송골봉 지휘, 웨이웨이의 「谁是最可爱的人」, 책에 적은 글(원문: 范天恩同志,你们才是真正的作者). 13. Habertürk, 「Kore'den 75 yıl sonra gelen 4 şehit」(2025.8.19), haberturk.com/kore-den-75-yil-sonra-gelen-4-sehit-3815811 — 군우리 지역에서 나온 뼛조각, 하와이 미군 감식소의 분석, 터키 국기에 싸여 오산 미 공군 기지에 도착, 이름 미확인·유전자 대조 대기, 실종자 167명→163명 예정.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타흐신 야즈즈 1892년생(터키 인물 사전 biyografiler.com 「Tahsin Yazıcı」, 1892년 마나스티르 출생·1970년 사망), 워커 1889년생·카이저(로런스) 1895년생·프리먼 1907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브래들리(조지프 슬레이든) 1900년생(영문 위키백과 「Joseph S. Bradley」), 로버트 카이저 1924년생(army.mil 기사). 카즘 운뤼, 쿨터, 페플로, 슬론, 홀든, 리처드 피저, 궈중톈, 다이루이(다이위청), 양원하이, 판톈언, 웨이웨이는 이 화를 쓰며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제113사단장의 이름은 확인한 자료에 나오지 않아 쓰지 않았다(장융후이는 당시 제38군 부군장이었다). [자료 충돌] 터키여단의 손실 — 터키 쪽 기사(TRT·CNN Türk·DHA)는 군우리 싸움 전체에서 전사 218·부상 455·실종 94를, 터키 인물 사전은 하룻밤에 전사 78·부상 352를, 중국어 위키백과는 와원의 앞 대대에서만 약 400명 사상을, 영문 위키백과는 여단 병력의 약 20퍼센트를 적었다. 본문은 터키 쪽 기사의 숫자를 터키 쪽 기록으로 적었다. 터키군과 미군의 공식 기록이 이 싸움을 크게 다르게 본다는 연구(Uyar·Güvenç, 「One Battle and Two Accounts: The Turkish Brigade at Kunu-ri in November 1950」)가 있으나 본문은 보지 못했다. [자료 충돌] 국군 오인 사건 — 미 육군 전사는 28일 무렵 터키군이 후송한 「포로」 125명이 국군이었다고, 영문 위키백과는 26일 와원에서 국군 약 200명을 공격했다고 적었다. 같은 일인지 다른 일인지 확인하지 못해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궈중톈 소대의 도착 — 해방군보 2020.1.21은 29일 새벽, 중국어 위키백과 「葛岘岭阻击战」은 28일 새벽. 본문은 해방군보를 따랐다. 「215명 사살, 사상자 없음」과 「전차 50여 대」는 중국 측 주장이며 미 육군 전사에는 대응하는 기록이 없다. 갈현령(葛岘岭)이 미 육군 전사의 「고개」와 그 아래 갈현동(Karhyon-dong)과 같은 곳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송골봉 — 중대장 이름이 신화망은 다이루이(戴如义), 중국신문망은 다이위청(戴玉成)이고, 지도원도 杨绍成·杨少成으로 갈린다. 생존자는 7명(신화망·중국신문망), 5명(봉황망 2014)으로 다르다. 「미군보다 5분 먼저」는 25화에서 통속 기사라 쓰지 않았던 대목이나, 이 화에서는 신화망 기사에 근거해 중국 쪽 주장으로 적었다. 송골봉이 미 제9보병연대가 30일 아침 공격한 고지들 가운데 어느 것인지는 미 육군 전사로 확인되지 않는다. 중국 쪽 기록이 상대를 미 제2사단 제9연대라고 적었을 뿐이다. 판톈언 전기 기사는 송골봉 전과를 500여 명, 중국신문망은 300여 명으로 적어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고개의 길 트기 — 미 육군 전사는 카이저 소장이 수색중대 경전차 두 대로 부서진 차를 밀어냈다고, army.mil 기사는 로버트 카이저 상사가 움직이는 차로 혼자 길을 치웠다고 적었다. 본문에 둘 다 적었다. [재구성] 불가의 병사와 운뤼의 대화, 운뤼가 공책을 쓰는 몸짓(일기 문장은 기록), 「와원 동쪽 칠 마일입니다」로 시작하는 고문관과 야즈즈의 대화(오해 자체는 기록), 포로 줄의 국군 병사가 계급장을 두드리며 외친 말과 터키 병사의 몸짓, 페플로의 제1대대 트럭이 막힌 장면의 세부, 궈중톈의 명령을 뺀 갈현령 진지의 몸짓, 송골봉 장면의 묘사(중국 쪽 기록의 뼈대 위), 브래들리의 지시를 한 문장으로 묶은 대사, 선두 전차 위 병사들의 몸짓, 「상사님, 카이저라면서요?」로 시작하는 대화, 로버트 카이저가 피저를 업은 방식, 12월 1일 중대마다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터키·중국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운뤼의 조양면 일기에는 날짜가 나오지 않아 「11월 하순 어느 아침」으로 두었다.

2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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