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15,922자)
청천강 전투 — 북진의 끝
1950 · 네오
1950년 11월 24일 금요일 정오 무렵, 평안도를 가로지르는 큰 강 청천강 가의 미 제24사단 사령부.
전날은 미국 명절 추수감사절이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구운 칠면조를 받았고, 아침 열 시 정각에 미 제8군 전체가 북쪽으로 움직였다1. 청천강에서 압록강까지는 팔십 킬로미터쯤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맥아더(70) 원수 일행에는 도쿄의 장성들과 통신사 지국장들이 섞여 있었다1. 미 제8군 사령관 워커(61) 중장이 그들을 데리고 제1군단과 제9군단, 제24사단 사령부를 차례로 돌았다. 제1군단장 밀번(58) 소장만 그림에 그늘을 하나 그었다. 북쪽 고을 운산(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 쪽으로 나간 정찰대가 두터운 방어진을 보고 왔으니 그쪽 공격은 쉽게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보고였다1. 그 말은 오래 남지 않았다. 처치(58) 소장이 제24사단의 진격을 설명하는 동안, 천막 안의 얼굴들은 밝았다1.
그날 도쿄 사령부는 공보문을 냈다. 북한에서 유엔군의 ‘거대한 압축 포위’가 결정적 국면에 다가가고 있고, 공군이 지난 세 주일 동안 북쪽에서 내려오는 보급로를 끊어 증원을 크게 줄였다는 내용이었다. 저녁에 나온 두 번째 공보문은 손실이 ‘놀랄 만큼 가볍다’고 적었다1. 맥아더가 그날 병사들을 두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도 있다2.
“빨리만 가면, 그중 몇은 크리스마스에 집에 갈 수도 있겠지.”
활주로에서 일행을 배웅하고 사령부로 돌아온 제8군 참모장 레븐 앨런 소장은 참모 몇에게 말했다1.
“공격은 될 거야. 안 될 것 같았으면 맥아더 장군이 여기까지 건너오지 않았겠지.”
전선의 한 소총중대는 그 무렵 철모와 대검을 거의 다 버린 채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이 지닌 탄약은 평균 쉰 발이 안 되었고, 수류탄은 한 사람에 한 발도 돌아가지 않았다2. 무거운 것은 크리스마스까지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 보였다. 겨울옷은 군 전체가 모자랐다2.
“철모는 왜 버렸어?”
“집에 가는데 머리 보호할 일이 뭐 있습니까. 마누라 잔소리 막는 데는 소용도 없고요.”
*
1950년 11월 25일 토요일 아침,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현 대유로동자구) —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산골 금광 마을, 한국전쟁에 들어온 중국군인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부.
전날 오후, 미군 정찰기 두 대가 한 시간 넘게 골짜기 위를 맴돌다 돌아갔다3. 사령부는 그날 밤 명령을 내렸다. 아침밥은 새벽 네 시 전에 다 먹고, 당번이 아닌 사람은 날이 밝기 전에 모두 방공굴로 들어간다. 베이징의 마오쩌둥(57)도 그날 밤 전보를 보냈다. 지휘 기관의 안전에 충분히 주의하고 절대 방심하지 말라는 당부였다3.
보름 남짓 앞서 지원군은 일부러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4. 낡은 장비를 진지와 길가에 버리고 갔고, 1차 공세 때 사로잡은 미군 포로들을 풀어 주며 지원군이 굶주려 곧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흘렸다5. 24일 운산 남동쪽으로 올라간 미 제25사단의 기갑부대는 그렇게 풀려난 미 제8기병연대 병사 서른 명을 길에서 거두었다6. 대부분 다치고 발이 얼어 있었다.
사령관 펑더화이(52)는 굴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날 저녁 서부전선 전체가 움직이기로 되어 있었고, 지도는 나무판자로 지은 작전실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안 간다.”
부사령관 훙쉐즈(37)가 말로 안 되자 그의 팔을 붙잡고 문밖으로 끌어냈다7. 펑더화이는 끌려 나가면서도 욕을 했다. 산허리의 굴에는 다른 부사령관 덩화(40)가 먼저 와 있었다7.
작전실에는 사람이 남았다. 사령부의 러시아어 통역 겸 비서 마오안잉(28)과 참모 가오루이신이었다8. 두 사람은 전날 밤 늦게 잤다가 아침을 놓쳤고, 작전실 난로에 밥을 데우고 있었다7.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맏아들이었다. 사령부 안에서는 그를 ‘류 비서’라고 불렀고,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3.
열한 시, 비행기 네 대가 골짜기 위를 지나갔다3. 작전실 사람들은 밖으로 나왔다가, 비행기가 지나가자 도로 들어갔다. 곧 비행기 네 대가 다시 왔다. 쇠통 같은 폭탄이 수십 개 떨어졌고, 기름이 붙은 불이 판잣집을 한꺼번에 덮었다. 참모 둘이 불 속에서 뛰어나왔다. 마오안잉과 가오루이신은 나오지 못했다. 타고 남은 시신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고, 소련제 손목시계의 잔해로 마오안잉을 가려냈다3.
군사비서 양펑안이 굴로 달려와 알렸다8. 펑더화이는 서 있지 못했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8. 그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안잉하고 루이신 동지가 죽었어. 죽었어….”
오후 네 시, 펑더화이는 사령부 이름으로 중국군을 이끄는 베이징의 중앙군사위원회와 동북 지방 군 사령부인 동북군구에 전보를 쳤다3. “우리는 오늘 일곱 시에 이미 방공굴에 들어갔다. 마오안잉은 참모 세 사람과 함께 집 안에 있었다. 열한 시 적기 네 대가 지나갈 때 네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적기가 지나간 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적기 네 대가 다시 와 소이탄 백 개 가까이를 떨어뜨려 집에 명중했다. 참모 두 사람은 뛰어나왔고, 마오안잉과 가오루이신은 미처 나오지 못해 불타 죽었다.”
전보를 받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52)는 공산당 부주석 류사오치와 의논한 뒤, 마오쩌둥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맏아들의 죽음을 편지로 전해 받은 것은 해가 바뀐 1월 2일이었다3.
그날 저녁, 펑더화이가 미뤄 두지 않은 공세가 시작되었다.
*
같은 날 오후 다섯 시, 평안남도 덕천 북쪽 — 청천강 상류 산골 고을 덕천을 사이에 두고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이 맞닿은 능선.
중국 공산군, 곧 중공군 제38군은 지난 공세에서 진격이 늦었다는 이유로 펑더화이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은 군대였다9. 이번에는 중국군 말로 군단장인 군장 량싱추(37)와 부대의 사상을 맡은 정치위원 류시위안(33)이 덕천의 국군 제7사단을 맡겠다고 먼저 나섰다10. 덕천은 서쪽의 미 제8군과 동쪽 미 제10군 사이, 유엔군 두 줄기가 맞닿는 이음매였다9. 지원군 부사령관 한셴추(37)가 제38군과 제42군의 지휘를 직접 맡았다2. 류시위안이 세운 순서는 먼 곳부터 끊고 가까운 곳은 나중에, 옆구리로 먼저 돌아 들어가고 정면은 맨 마지막에 친다는 것이었다9.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질 무렵, 제113사단이 국군 제7사단 오른쪽 끝의 수색중대를 덮쳤다. 중대는 순식간에 흩어졌고, 제7사단과 제8사단 사이에 팔백 미터쯤 되는 빈틈이 열렸다2. 제114사단은 그 왼쪽에서 제7사단의 제5연대와 제8연대를 밀어붙였다. 그 빈틈으로 중공군 두 사단이 줄지어 남쪽으로 빠져나갔다. 국군 진지의 기관총은 앞을 향하고 있었고, 등 뒤 골짜기로는 아무도 총을 돌리지 않았다.
동쪽에서는 제42군이 덕천 동쪽 마을 영동리(현 북한 평안남도)의 국군 제8사단을 붙들어 두고, 두 사단을 산길로 돌려 사단의 등 뒤로 보냈다. 국군 병사들은 추위를 견디려고 피운 모닥불 곁에 둘러앉아 있었다. 중공군은 그 불빛을 보고 산을 내려왔다2.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29) 소장에게 전선의 소식이 닿은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중공군이 국군의 등 뒤로 들어간 지 다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2.
이튿날 아침 여덟 시, 유재흥 곁에 있던 미 제9군단 연락장교가 군단 사령부에 무전을 보냈다6.
“여기 사정은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그 시각 제8사단의 제21연대는 이미 진지를 내주고 영동리로 내려오고 있었다6.
*
같은 날 밤, 구장동(현 북한 평안북도 구장군 구장읍) 북쪽 청천강 골짜기 — 청천강이 산 사이를 굽이쳐 내려오는 길목, 미 제2사단 정면.
미 제23보병연대장 폴 프리먼(43) 대령은 그날 낮 사단장 카이저(55) 소장의 명령을 받고 연대 본부와 1대대, 전차중대를 이끌고 올라왔다. 이튿날 아침 앞의 제9보병연대를 지나 북쪽으로 나갈 참이었다. 카이저가 교대를 하루 미루자, 프리먼은 제9연대 바로 뒤, 포병 세 대대의 포진지 사이에 진을 쳤다6.
해가 지고 나서 자정 사이, 중공군 두 연대가 강 양쪽으로 제9연대를 쳤다. 산 위에서 나팔이 울리면 줄지어 오던 중공군이 흩어져 돌격 대형으로 바뀌었다6. 한 갈래는 중대와 중대 사이 빈틈으로 스며들어 얼음장 같은 청천강을 걸어서 건넜다.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프리먼 바로 위쪽의 제61야전포병대대였다. A포대는 포대장이 전사하고 장교가 모두 다치자 포와 차량을 그대로 두고 달아났다6. 포병들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왔고, 그 뒤에 중공군이 섞여 왔다.
“쏘지 마! 우리 편이다!”
“뒤에 오는 놈들은 우리 편 아냐!”
프리먼의 대대는 아군과 적이 한데 엉킨 무리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했다. 대대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물러난 중공군은 프리먼 진지 북동쪽의 낮고 험한 산으로 올라갔다. 미군은 그 산을 생긴 모양대로 ‘중국인 모자’라고 불렀다6. 새벽 무렵 중공군은 그 산에서 다시 내려와 연대의 오른쪽을 쳤고, 날이 밝기 전에 또 산으로 돌아갔다.
그 동쪽, 제38보병연대 정면에서는 밤 열한 시 반에 세 번째 중공군 연대가 공격을 시작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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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6일, 덕천.
중국 쪽 기록은 그날 하루를 시각으로 적었다. 새벽 다섯 시, 제112사단이 덕천 서쪽 마을들을 차지해 덕천과 서쪽 마을 군우리(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군우동) 사이의 길을 끊었다9. 아침 여덟 시, 제113사단이 덕천 남쪽에 닿아 평안남도 순천으로 빠지는 길을 막았다. 열한 시, 제114사단이 덕천 북쪽을 차지하고 국군 제7사단의 곡사포 대대를 무너뜨렸다9. 덕천은 네 방향에서 묶였다.
덕천 안에는 군단 예비대로 올라왔던 국군 제6사단 제2연대가 갇혔다. 연대는 그날 아침 앞으로 나가다 제113사단과 부딪쳐 지휘소를 잃은 터였다2. 덕천으로 물러나려던 제7사단의 제5연대와 제8연대도 길목마다 숨어 있던 중공군에 걸려 산으로 흩어졌다. 맨 왼쪽의 제3연대만 서쪽으로 비켜나 미 제2사단 제38보병연대의 등 뒤로 들어갔다6.
중국 쪽 기록은 저녁 일곱 시에 덕천의 국군이 대부분 섬멸되었다고 적었다9. 미 육군 전사는 정오 무렵 제2군단의 전선이 접혔다고 적었다6. 해가 질 때 덕천은 중공군의 손에 있었다. 동쪽에서 내려온 중공군은 영동리를 넘어 고을 맹산(현 북한 평안남도 맹산군)까지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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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저녁 여섯 시, 소민동(현 북한 평안북도 구장군 소민리) — 구장동과 덕천을 잇는 산길 옆 마을, 미 제2사단 제38보병연대 진지.
조지 페플로 대령은 낮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알았다. 오른쪽에 있어야 할 국군이 없었다. 그의 연대가 제2사단과 제9군단의 오른쪽 끝이 아니라, 미 제8군 전체의 오른쪽 끝이 되어 있었다.
페플로는 연대의 줄을 구부렸다. 왼쪽 대대는 구장동으로 가는 길 위에 그대로 두고, 나머지를 소민동에서 꺾어 덕천 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늘어세웠다. 위에서 보면 말발굽 같은 모양이었다. 저녁 여섯 시에 이동이 끝났다6. 전날 밤 연대 A중대는 진지 앞 강 건너에서 포위되었다가 겨우 몇 사람만 돌아왔고, G중대는 장교 하나에 병사 예순 명으로 줄어 있었다6.
그날 밤 미 제8군 정보참모부는 맞은편 중공군의 추정 병력을 오만 사천에서 십만 천으로 고쳤다6. 그러면서도 적이 지금의 선에서 ‘강한 국지 반격을 곁들인 적극 방어’를 하리라고 내다보았다. 도쿄의 정보참모 윌러비(58) 소장은 낮에 워싱턴으로 보고를 보냈다6.
“적이 내륙 골짜기에서 싸우기로 한다면, 유엔군의 공세가 다소 느려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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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7일 황혼부터 28일 아침까지, 덕천 남쪽 산길에서 순천 북쪽 길가의 작은 마을 삼소리(현 북한 평안남도)까지.
해 질 녘, 량싱추가 펑더화이의 명령을 받았다11. 군 주력은 서쪽 군우리로 치고, 한 갈래는 남서쪽 삼소리로 들어가 미군이 남쪽으로 빠지는 길을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량싱추는 그 일을 제113사단에 맡겼다. 덕천에서 이틀을 싸운 사단은 아직 한숨도 쉬지 못했다. 가진 무기는 박격포 열 몇 문과 대전차 수류탄 조금이 전부였다11.
제338연대장 주웨칭은 출발 전에 묽은 죽 한 그릇을 받아 들었다12. 젓가락으로 죽을 저으려다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죽이 군복 앞섶으로 쏟아졌다. 옆의 참모가 어깨를 흔들자 그는 눈을 뜨고, 젖은 앞섶을 손바닥으로 훔치고, 일어섰다.
“가자.”
사단은 무전기를 껐다12. 그 순간부터 지원군 사령부도 군 사령부도 제113사단을 부를 수 없었다. 병사들은 줄지어 걸었다. 쉴 때는 길 한가운데 드러누웠다12. 잠이 들어도 대열이 다시 움직이면 뒤에 오는 발에 밟혀 깨어날 수 있었다. 해발 천이백오십 미터의 장안산을 넘을 때는 간부들이 맨 앞에서 길을 뚫었고, 병사들은 서로 손을 잡아 사람 사슬을 만들어 고개를 끌어 올렸다11. 포와 탄약을 짊어진 포병과 수송대는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보병 뒤를 따랐다. 걷다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 병사도 있었다11.
날이 밝자 미군 비행기가 대열 위에 떴다. 숨고 뛰고 다시 숨기를 되풀이하다가는 날이 저물 판이었다. 사단은 위장을 벗고 큰길로 나섰다. 대열 위를 몇 바퀴 돈 조종사는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국군 부대로 보았다12.
28일 아침, 제113사단의 선두가 삼소리에 닿았다13. 덕천 남쪽을 떠난 지 열네 시간, 지도 위의 직선으로만 칠십 킬로미터가 넘는 길이었다11. 병사들은 그대로 길 양쪽 높은 데로 흩어져 엎드렸다.
한 시간 반쯤 뒤, 군우리 동쪽 고을 개천에서 순천으로 내려오던 미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의 정보수색소대가 그 길로 들어섰다. 길가 고지에서 백 명쯤 되는 중공군이 소총과 기관총을 쏘았다. 소대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소대 선임하사와 병사 셋이었다6. 뒤따라온 대대가 길 양쪽 능선으로 올라 길을 뚫으려 했지만 더 큰 병력에 막혔다. 기병연대는 그 마을을 피해 다른 길로 순천에 들어갔고, 밤이 깊어서야 겨우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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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8일 밤, 일본 도쿄 — 유엔군 총사령부.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의 미군 최고 지휘 기구 합동참모본부에 전보를 쳤다6.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마주했다.”
나흘 전 ‘거대한 압축 포위’라는 말을 쓴 사람의 전보였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방어로 바꾸겠다고 적었다. 동쪽 함경남도 산속의 저수지 장진호에서도 미 제10군단이 공격을 받고 있었다. 맥아더는 그날 밤 워커와 제10군단장 알몬드(58)를 도쿄로 불렀다6.
워커는 먼저 미 제8군의 형편을 보고했다. 오른쪽 국군 제2군단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메우려 보낸 터키여단은 마을 와원(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조양동)에서 중공군과 부딪쳤으며, 제1기병사단은 순천 동쪽에서 북쪽을 막고 있었다. 정찰기는 덕천 위쪽 골짜기마다 남쪽으로 끝없이 내려오는 사람의 줄을 보았다고 보고했다6. 맥아더는 미 제8군이 포위되기 전에 빠져나오라고 했다.
전날 밤 제8군 작전참모 대브니 대령은 벌써 이렇게 적어 두었다. 11월 24일의 유엔군 공세는 비슷한 규모의 적 공세를 이틀쯤 앞질렀을 뿐이다6. 워커는 이튿날 한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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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9일 새벽, 평안남도 북창(현 북한 평안남도 북창군 북창읍) 남쪽 — 덕천에서 순천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장터 마을 북창, 그 아래 고갯길.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이대용(25) 대위는 한 달 사이에 연대가 한 번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는 것을 보았다14. 10월 말 압록강 가까운 초산(현 북한 자강도 초산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부연대장과 대대장 여럿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 연대장 임부택(31)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이 11월 22일까지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14. 빈자리에는 갓 뽑은 신병과 장교를 짧게 길러 내던 육군종합학교를 막 나온 소위들이 채워졌고, 연대는 11월 25일에 다시 꼴을 갖췄다14. 그 연대가 곧바로 덕천 남쪽 북창으로 올라갔다.
북창과 마을 가창(현 북한 평안남도 북창군 연류리) 사이의 미럭고개에서 이대용은 신병들을 산비탈에 엎드리게 했다14. 총을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은 병사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팔이 울렸다. 중공군 제42군 제125사단이 북창 아래의 국군 제6사단 진지를 덮쳤다6.
“쏘아라! 고개 들지 말고 쏘아!”
신병들은 쏘았다. 탄창을 갈아 끼우는 손이 얼어서 자꾸 헛돌았다. 국군은 고개를 내주고 남쪽 마을 월포리(현 북한 평안남도)까지 물러났고, 그곳에서도 옆으로 돌아 들어온 중공군에 밀려 남쪽 미 제7기병연대의 진지로 흩어져 내려갔다. 피란민이 병사들과 함께 내려왔다. 미군은 그 사람들을 붙잡아 세우느라 아침 여섯 시 반까지 진지를 추스르지 못했다6.
이대용은 다섯 달 전 6월 장맛비 속에서, 발에 맞는 군화가 없어 겨울 방한화를 신고 춘천에서 싸웠다. 이제 그 신발이 제철을 만났다. 발은 그래도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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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30일 오후, 평안남도 안주 — 청천강 하류의 고을, 강을 건너는 다리 두 개.
워커의 명령은 29일 밤늦게 내려왔다6. 미 제8군 전체가 군우리에서 삼십 킬로미터 남쪽, 평양에서 오십 킬로미터 북쪽의 숙천(현 북한 평안남도 숙천군)·순천·성천(현 북한 평안남도 성천군)을 잇는 선으로 물러난다. 엿새 전 압록강을 향해 출발했던 군대가 이제 청천강을 등지고 남쪽으로 돌아섰다.
미 제1군단은 새벽부터 강을 건넜다. 아침 여섯 시에 국군 제1사단이 먼저 움직였고, 한 시간 뒤 미 제25사단이 뒤를 따랐다6. 미 제5연대전투단이 안주와 근처 고을 신안주(현 북한 평안남도 안주시) 사이 여울목과 다리 둘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강 북쪽에 남았다. 강물 가장자리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다.
오후 두 시 반, 강 북쪽에 있던 제1군단 병력이 모두 남쪽으로 건너왔다6. 다리 위에 폭약을 감은 공병 하나가 강 북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엿새 전 그쪽으로 건너간 트럭들의 바퀴 자국이 둑길 위에 아직 얼어붙어 있었다.
“더 오는 사람 없나?”
“없습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안주의 다리 하나가 무너졌다. 저녁 여섯 시께 나머지 하나가 폭음과 함께 강물로 내려앉았다6. 시커먼 연기가 얼음 낀 수면 위로 낮게 깔렸다.
강 상류 쪽 군우리에는 아직 미 제2사단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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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일, 중공군 제38군 사령부.
무전병이 받아 적은 전보를 량싱추와 류시위안이 함께 읽었다.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손수 쓰고 부사령관 덩화와 함께 이름을 올린 전보였다11. 지난 공세 때 그 군대를 꾸짖던 사람이었다. 전보는 이렇게 끝났다9.
“중국인민지원군 만세! 제38군 만세!”
중국 쪽 기록은 제38군이 이 싸움에서 유엔군 만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자동차 천오백 대를 빼앗았다고 적었다9. 그 무렵부터 중국에서는 그 군대를 ‘만세군’이라고 불렀다.
전보에 이름을 올린 펑더화이는 엿새 전 대유동의 불길 이야기를 아직 베이징의 아버지에게 직접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그날도 맏아들이 살아 있는 줄 알았다3.
사료 출처
1.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1화 출처와 같은 책) 마지막 장 끝부분 — 11월 24일 맥아더·스트레이트마이어·윌러비 일행과 통신사 지국장들의 방문, 밀번의 운산 경고, 처치의 정오 브리핑, 앨런 참모장의 말(원문: I think the attack will go. General MacArthur would not have come over if he did not think so.), 24일 공보문 두 건(massive compression envelopment, Our losses were extraordinarily light), 공격 개시 열 시, 23일 추수감사절. 2.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the Ch'ongch'on River」(2026년 10월 열람) 각주를 따라 확인한 내용 — 수색중대 격파와 0.5마일 간격(Appleman 『Disaster in Korea』 1989, 79쪽; 채한국·정석균·양영조 『The Korean War』 2권, 2001, 232쪽), 제113·112사단의 침투와 한셴추의 직접 지휘(중국 군사과학원 『抗美援朝战争史』 영역 인용 92·95쪽), 제42군과 모닥불(Appleman 1989, 85쪽), 유재흥이 다섯 시간 늦게 앎(Appleman 1989, 80쪽), 제6사단 제2연대 지휘소 상실(채한국 외 242쪽), 소총중대의 철모·대검 투기와 탄약(Appleman 1989, 64~65쪽), 겨울옷 부족, 113사단 삼소리 점령 07시(군사과학원 102쪽), 맥아더 발언 인용(Appleman 1989, 57쪽, 원문: Well, if they go fast enough, maybe some of them can be home by Christmas). 『Disaster in Korea』와 군사과학원 원서는 직접 보지 못하고 위키백과 각주로만 확인했다. 3. 중국어 위키백과, 「毛岸英」(2026년 10월 열람) — 24일 오후 정찰기 선회와 사령부의 「새벽 네 시 전 식사, 날 밝기 전 입굴」 명령, 마오쩌둥의 당부 전보, 25일 11시 B-26 네 대와 네이팜(武立金 『毛岸英在朝鲜战场』 作家出版社 2006 인용), 소련제 손목시계로 신원 확인, 「류 비서」라는 호칭, 오후 16시 펑더화이 전보 원문(본문에 우리말로 옮김), 저우언라이·류사오치가 알리지 않기로 하고 1951년 1월 2일 편지로 알림. 전보 원문은 위키백과가 옮긴 것을 따랐고 원 문헌은 보지 못했다. 4. 중국어 위키백과, 「抗美援朝第二次战役」(2026년 10월 열람) — 지원군의 기만 후퇴(낡은 장비 유기, 포로 석방과 「식량 부족·곧 철수」 소문). 5. Roe, 『The Dragon Strikes』(2000) 234~235쪽(영문 위키백과 인용) — 지원군의 기만 후퇴(낡은 장비 유기, 포로 석방과 「식량 부족·곧 철수」 소문). 6.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미 육군 군사사센터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총서, 1990) 제4장 「The Battle of the Ch'ongch'on」(62~83쪽)·제5장 첫머리(84쪽)·제6장 「Disengagement in the West」 일부, koreanwar.org 게재본 PDF koreanwar.org/kwp2/cmh/ebb_and_flow.pdf — 24일 공격 배치, 25일 저녁 국군 제2군단 전선 상황, 26일 오전 여덟 시 연락장교 보고(원문: things are slightly confused), 26일 덕천 봉쇄와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고립, 제3연대의 서쪽 이동, 정오 무렵 제2군단 전선 붕괴, 맹산·북창 방어 계획, 25일 밤 제9·23보병연대 정면의 중공군 두 연대, 프리먼의 위치(카이저가 교대를 미룸), 나팔 신호와 대형 변경, 강을 걸어 건넌 중공군, 제61야전포병대대 A포대가 포대장 전사·장교 전원 부상 뒤 포와 차량을 버림, 중국인 모자(Chinaman's Hat) 산, 제38보병연대 정면 밤 열한 시 반 공격, 24일 돌빈 특수임무부대가 풀려난 제8기병연대 포로 서른 명을 거둠, 페플로의 말발굽 진지(오후 여섯 시 완료)와 A·G중대 손실, 정보참모부의 추정 병력 54,000→101,000과 「적극 방어」 판단, 윌러비 보고(원문: should the enemy elect to fight in the interior valleys, a slowing down of the United Nations offensive may result), 28일 오전 제5기병연대 정보수색소대 피습(소대 선임하사와 셋만 탈출)과 대대 공격 실패, 덕천 위쪽 「끊이지 않는 행렬」 공중 관측, 맥아더의 28일 아침 합참 전보(원문: We face an entirely new war)와 28일 밤 도쿄 회의, 작전참모 대브니의 27일 판단(원문: the UN offensive of 24 November had merely anticipated a similar full-scale enemy offensive by about two days), 29일 새벽 제42군 제125사단의 국군 제6사단 공격과 월포리 후퇴·제7기병연대(여섯 시 반), 29일 밤 숙천·순천·성천선 철수 명령, 30일 제1군단 도하(국군 제1사단 여섯 시, 제25사단 한 시간 뒤, 오후 두 시 반 완료), 한 시간 안에 안주 다리 하나·여섯 시께 나머지 하나 폭파. 7. 양펑안(펑더화이 군사비서) 회고, 『解放军生活』 게재분, 중국수자시대 재게재 2014.4.19, chinadigitaltimes.net/chinese/343118.html — 훙쉐즈가 펑더화이를 끌고 나간 일(「我不走」), 덩화가 굴에서 기다림, 마오안잉·가오루이신이 난로에 아침밥을 데움, 청푸 등 탈출. 8. 「解放军报头版刊文:对毛岸英烈士牺牲经过的调查」, 解放军报 2015.7.14, 신화망 게재, xinhuanet.com/politics/2015-07/14/c_128019703.htm — 마오안잉의 직책(지원군 사령부 러시아어 통역 겸 비서), 판잣집 작전실, 양펑안의 보고, 펑더화이가 서 있지 못하고 「岸英和瑞欣同志牺牲了,牺牲了」라고 중얼거린 일, 펑더화이가 직접 전보를 씀. 9. 「“万岁军”政治委员刘西元中将」, 学习时报, 인민망 재게재 2023.10.30, cpc.people.com.cn/n1/2023/1030/c443712-40105936.html — 1차 전역의 지체와 펑더화이의 비판, 량싱추·류시위안의 자청, 덕천이 동서 두 전선의 결합부, 「먼저 먼 곳 뒤에 가까운 곳, 먼저 측면 우회 뒤에 정면 공격」, 26일 112사단 05시·113사단 08시·114사단 11시(국군 제7사단 곡사포대대 섬멸), 19시 대부분 섬멸, 28일 삼소리·29일 아침 용원리, 전과 1만 1천여 명·자동차 1,500대·대포 389문, 표창 전보 끝 구절. 10. 중국어 위키백과, 「梁兴初」「刘西元」「江拥辉」 — 량싱추 1913~1985, 류시위안 1917년생, 장융후이의 『三十八军在朝鲜』(辽宁人民出版社 1989) 서지. 11. 黎旋·张苗, 「人民军队的“铁脚板”」, 学习时报, 인민망 재게재 2023.2.7, cpc.people.com.cn/n1/2023/0207/c443712-32618983.html — 11월 25일 서부전선 개시, 26일 덕천 탈취 뒤 주력은 원리·군우리로, 일부는 삼소리로, 27일 황혼 량싱추가 명령 받음, 박격포 십여 문과 대전차 수류탄, 14시간 72킬로미터(지도 직선거리), 28일 아침 여덟 시께 도착, 해발 1,250미터 장안산의 사람 사슬, 포병·수송대, 쓰러진 병사, 12월 1일 펑더화이·덩화 연명 표창, 덩화의 「기적」 평가, 제38군 전과(섬멸 8,000여·포로 3,600여·자동차 1,500여·화포 300여·전차 14). 12. 「14小时强行军72.5公里,为何说志愿军是“陆战之王”?」, 长安街知事 위챗 계정, 京报网 재게재 2023.7.17, news.bjd.com.cn/2023/07/17/10498030.shtml — 제338연대장 주웨칭이 죽 그릇을 든 채 잠든 일, 길 가운데 누워 쉰 병사들, 무전 침묵, 위장을 벗고 큰길로 나서자 미군 조종사가 국군 후퇴 부대로 여김. 통속 기사라 「5분 먼저 도착」 대목은 본문에 쓰지 않았다. 13. 刘媛媛, 「三所里战斗:穿插迂回作战的范例」, 解放军报 2020.1.7, 중국사회과학망 재게재(cssn.cn) — 27일 밤 덕천 남쪽에서 출발, 14시간 70여 킬로미터, 28일 08시께 점령. 14. 이대용 회고, 「내가 겪은 6·25」 하, 서울신문 1991.6.28, m.seoul.co.kr/news/1991/06/28/19910628005001 — 10월 28일 초산의 포위, 부연대장·대대장들의 포로·전사, 임부택·김용배가 11월 22일까지 탈출, 신병과 신임 소위 보충, 11월 25일 재편성, 덕천 남쪽 북창 이동, 북창과 가창 사이 미럭고개 싸움, 신병들이 버티기 어려웠다는 회고, 평양·상원·서흥으로 후퇴.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맥아더 1880년생, 워커 1889년생, 밀번 1892년생, 처치 1892년생, 카이저 1895년생, 프리먼 1907년생, 알몬드 1892년생, 윌러비 1892년생, 유재흥 1921년생(이상 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펑더화이 1898년생, 마오안잉 1922년생, 훙쉐즈 1913년생, 덩화 1910년생, 량싱추 1913년생, 류시위안 1917년생, 한셴추 1913년생(이상 중국어 위키백과 인물 항목), 마오쩌둥 1893년생, 저우언라이 1898년생(영문 위키백과), 이대용 1925년생·임부택 1919년생(3화 [나이]와 같은 근거). 마오안잉은 신화망 소전에 「28세」로 나온다. 레븐 앨런, 페플로, 가오루이신, 양펑안, 주웨칭, 김용배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근거가 약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김용배는 3화 [나이]에 1921년생으로 적었으나 이 화에서는 이름만 나온다). [자료 충돌] 마오안잉이 죽은 시각 — 펑더화이의 당일 전보와 武立金은 오전 열한 시, 해방군보 2015년 조사 기사는 「9시께 두 사람이 휴식하던 굴에서 사무실로 돌아왔다」고 적었다. 본문은 전보의 열한 시를 따랐다. 폭탄 수도 「수십 개」(신화망)와 「백 개 가까이」(전보)로 다르다. 작전실에 남은 까닭도 아침밥을 데웠다는 회고(양펑안)와 서류를 처리하고 먹을 것을 찾았다는 회고(자오난치) 등으로 갈린다. [자료 충돌] 삼소리 도착 시각 — 군사과학원(위키백과 인용)은 28일 07시, 해방군보·학습시보는 08시께. 본문은 「28일 아침」으로만 적었다. 거리도 70여 킬로미터·72킬로미터·72.5킬로미터로 다르고, 학습시보는 72킬로미터가 지도 위 직선거리이고 실제로는 훨씬 길었다고 적었다. 「미군보다 5분 먼저 도착」은 통속 기사에만 있어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덕천 함락 — 미 육군 전사(Mossman)는 26일 정오 무렵 제2군단 전선이 접히고 해 질 때 덕천이 중공군 손에 있었다고, 중국 측은 26일 19시에 덕천의 국군이 대부분 섬멸되었다고, 영문 위키백과(Appleman 1989 인용)는 26일 오후 함락으로 적었다. 같은 날의 서로 다른 시점으로 보고 셋 다 적었다. [자료 충돌] 제38군의 전과 — 학습시보 2023.2.7은 「섬멸 8,000여·포로 3,600여·자동차 1,500여·화포 300여·전차 14」, 학습시보 2023.10.30은 「섬멸·포로 1만 1천여·자동차 1,500·대포 389」. 본문은 「만 천여 명」을 중국 쪽 주장으로 적었다. 미 제2사단 손실은 영문 위키백과가 인용한 Appleman 1989에 4,037명, 12월 1일 집계로 4,940명(11월 후반 전투 손실)으로 나온다. 이 수치는 군우리–순천 도로의 손실을 포함하므로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제38군이 맡은 국군 사단 — 중국 측은 덕천의 「南朝鲜第7师」를 섬멸했다고 적고, 미 육군 전사는 제7사단 일부와 제6사단 제2연대가 무너지고 제7사단 제3연대는 서쪽으로 빠져 미 제38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미 전사의 부대별 경과를 따랐다. [자료 충돌] 북창 싸움의 날짜 — 이대용 회고에는 날짜가 없다. 미 육군 전사가 적은 29일 새벽 제125사단의 국군 제6사단 공격과 같은 싸움으로 보고 그 날짜에 두었으나, 미럭고개와 월포리가 같은 장소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쏘지 마! 우리 편이다!」로 시작하는 포병과 보병의 대화, 앨런 참모장의 말을 뺀 24일 사령부 장면의 몸짓, 「철모는 왜 버렸어?」로 시작하는 병사들의 대화, 펑더화이의 「나는 안 간다」를 뺀 대유동의 몸짓과 불길 묘사(폭탄·화재·시계는 기록), 류시위안의 작전 순서를 뺀 덕천 북쪽 국군 진지의 모습, 「여기 사정은 약간 혼란스럽습니다」를 뺀 유재흥 사령부 장면, 페플로가 「낮 열두 시 전에 알았다」는 대목의 심리, 주웨칭이 죽을 쏟은 뒤의 몸짓과 「가자」라는 말, 강행군 대열의 세부(길에 누운 병사·사람 사슬·위장 해제는 기록), 도쿄 회의의 대화 순서, 미럭고개의 나팔 소리, 이대용이 한 명령과 얼어붙은 손, 방한화 대목(3화의 방한화를 이어 받은 소설적 연결), 안주 다리의 공병과 대화, 강가의 얼음과 바퀴 자국, 제38군 사령부에서 전보를 읽는 장면, 마지막 두 문장에서 펑더화이의 심경(마오쩌둥이 1951년 1월 2일에야 알았다는 사실은 기록)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