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24/57

24화(14,860자)

운산 전투 — 구원은 오지 않았다

1950 · 네오

운산 전투, 1950년 10월 25일~11월 6일 — 운산 읍내(현 운산군 구읍리), 삼탄천 다리, 영변·입석·용산동, 구룡강 여울, 운산 남쪽 길목(갈림길), 남면천 다리와 미 제8기병연대 제3대대 지휘소, 용두동 능선(미군 이름 「나팔 언덕」), 용흥동·명당동. 중공군 제39군 제116사단(서북)·제117사단(동북)·제115사단(서남) 공격 방향,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 붕괴, 제5기병연대의 구출 공격과 저지선, 제3대대의 마지막 탈출 방향.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0년 10월 25일 오전, 평안북도 고을 운산(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 구읍리) 북동쪽, 냇물 삼탄천의 다리 앞.

다리에 박격포탄이 떨어진 것은 열한 시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1. 앞장서 운산 읍내를 지나온 미 제6중전차대대 D중대의 전차들이 멈췄고,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 병사들이 길 양옆 논둑으로 흩어졌다. 북쪽 산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삼십 분 뒤 앞선 중대가 보고했다. 산에 적이 삼백 명쯤 있다고 했다1.

정오가 되기 전, 병사들이 포로 하나를 끌고 내려왔다. 두껍게 누빈 솜옷을 입은 서른 줄의 사내였다2. 국군 병사가 조선말로 소속을 물었지만 사내는 눈만 껌벅였다. 일본말에도 대답이 없었다. 병사 하나가 사내의 솜옷 소매를 손끝으로 집어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북한군 군복이 언제부터 이불이 됐지?”

웃음이 터졌다가 금방 사그라들었다. 사내가 손가락으로 북쪽 산을 가리키며 무어라 길게 말했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 사내는 유엔군이 이 전쟁에서 사로잡은 첫 중국 공산군, 중공군 포로였다1.

*

10월 26일, 운산 남쪽 고을 영변(현 북한 평안북도 녕변군), 국군 제1사단 사령부.

사단장 백선엽(30) 준장은 평양의 축하 행사에 가 있다가 급히 돌아왔다. 그는 앞으로 나가 쓰러진 적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1. 일본이 만주에 세운 나라의 군대, 만주군에 있던 시절 그는 중국 사람들 틈에서 오래 지냈다. 얼굴과 옷과 신발을 다 보고 나서 그는 일어섰다.

“모두 중국 사람이다.”

미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58) 소장이 포로를 다시 심문하는 자리에서 백선엽이 중국말로 통역했다2. 뒷날 미국 기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정리한 문답은 이렇게 짧았다3.

“어디서 왔나?”

“중국 남쪽에서.”

“소속은?”

“39군.”

“싸워 본 적은?”

“국공내전 때 하이난섬에서 싸웠다.”

“중국에 사는 조선 사람인가?”

“아니다. 중국 사람이다.”

백선엽은 밀번에게 사단 정면에 중공군 1개 사단, 1만 명쯤이 있다고 말했다1. 북한군에 몇 명 섞인 중국인이 아니라 통째로 짜인 부대라고 했다. 그는 영어로 덧붙였다.

“많습니다. 아주, 아주 많습니다.”

그날 새벽 운산에는 그해 첫눈이 흩날렸다1. 평양의 미 제8군 정보 판단서는 중국인 병사들이 국경 접근로 방어를 돕기 위해 북한군 부대를 보강한 것이라고 적고, 「중공군이 공공연히 개입한 징후는 없다」고 맺었다1.

*

10월 말, 운산 북쪽과 서쪽 산속,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

한국전쟁에 들어온 중국군, 인민지원군의 제39군은 10월 중순 중국 도시 안둥(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낮에는 숲에 엎드려 비행기를 피했고, 밤에만 걸었다. 산마다 불을 놓아 연기로 골짜기를 덮었다. 미군 포병 중대장 잭 볼트 대위는 30일 운산 남쪽으로 올라오며 산불을 열 군데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1.

중국군 말로 군단장인 군장 우신취안(38)과 부대의 사상을 맡은 정치위원 쉬빈저우(38)는 지도 위에 세 갈래 화살표를 그었다. 제116사단은 서북쪽에서 삼탄천 양쪽 둔덕을 타고 읍내로 들어간다. 제117사단은 동북쪽에서 내려와 삼탄천 동쪽의 국군을 친다. 제115사단은 서남쪽으로 돌아 읍내 남쪽 길을 끊는다. 그 가운데 제343연대는 운산과 남쪽 마을 용산동(현 북한 평안북도) 사이 길을 막아, 남쪽에서 올라올 구원군을 붙든다4. 총공격 시각은 11월 1일 저녁 일곱 시 반이었다4.

지도 위의 적은 여전히 「남조선 제1사단」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이 운산 쪽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은 들어와 있었지만, 그 사단이 이미 국군의 참호에 들어앉았다는 것을 제39군은 몰랐다.

*

10월 31일, 운산 남쪽, 미 제8기병연대 지휘소.

미 제8기병연대는 29일 평양을 떠나 30일 운산에 닿았고, 31일 국군 제12연대의 진지를 넘겨받았다. 제1대대는 읍내 북쪽 삼탄천 가에, 제2대대는 서쪽 산줄기에, 제3대대는 남쪽 냇물 남면천 가에 반원을 그리고 앉았다. 그날 오후 밀번 군단장이 찾아왔을 때 연대는 모든 것이 괜찮다고 보고했다1.

국군 제1사단과 함께 열흘 가까이 운산에서 싸운 대공포 부대 미 제10고사포단의 단장 헤니그 대령이 연대 참모들 앞에서 말했다.

“저 앞에 있는 건 중공군이오. 북한군이 아니오.”

참모 하나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대령님, 중국 사람들이 이 산골까지 왜 오겠습니까? 우리는 크리스마스 전에 집에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연대 장교와 병사들 대부분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국군 장병과 고문관들에게서 이틀 내내 「중국」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그랬다.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56) 소장은 뒷날, 중공군 개입을 처음 안 것이 11월 1일 영변에서 백선엽을 만났을 때라고 말했다1.

*

11월 1일 오후, 용산동, 미 제1기병사단 지휘소.

게이는 포병 무전기 옆에 서 있었다. 155밀리 곡사포의 탄착을 보던 L-5 정찰기 관측병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갈라져 나왔다1.

“이렇게 이상한 광경은 처음 봅니다. 큰 보병 대열 둘이 명당동과 용흥동 근처 산길을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옵니다. 포탄이 대열 한가운데 떨어지는데, 놈들이 그냥 계속 걸어옵니다.”

같은 날 정오, 연대 부연대장 핼럿 에드슨 중령은 운산에서 내려오다 구룡강 굽이 근처에서 피란민 무리를 만났다. 흰옷 입은 사람들은 손으로 서쪽을 가리키며 중국 군대가 뒤따라온다고 했다1.

게이는 군단에 전화를 걸었다. 제7기병연대를 보내 달라고 했고, 제8기병연대를 운산에서 몇 마일 물리게 해 달라고 했다. 두 요청 다 거절당했다1.

그 사이 제5기병연대 정찰 소대가 운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거북 머리처럼 휘어 도는 구룡강 굽이 바로 남쪽, 길을 가로지른 능선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중국 측 서술은 그 능선을 용두동이라 부르고, 제343연대 제1중대가 오십 분 만에 그곳을 빼앗아 미군 1개 중대 백여 명을 섬멸했다고 적는다4. 미 육군 공식 전사는 증원된 B중대가 그날 밤 81밀리 박격포 넷을 잃고 밀려났다고 적는다1. 해가 지기 전에 제8기병연대 뒤쪽 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

11월 1일 오후 세 시 반, 운산 서북쪽, 제39군 지휘소.

“운산 바깥의 적이 움직입니다. 전차, 자동차, 보병이 뒤로 빠지고, 읍내 거리에도 오가는 차가 많습니다.”

관측병의 보고였다. 지원군 정치부 주임 두핑(42)은 뒷날 회고록에서 이 오후를 그렇게 적었다4. 국군 제1사단이 미군에게 자리를 넘기고 빠지는 움직임이었지만, 산 위에서는 적이 달아나는 것으로 보였다.

우신취안이 쉬빈저우를 보았다. 일곱 시 반까지 기다리면 적은 남쪽으로 다 빠져나갈 것이었다.

“앞당긴다.”

지원군 포병 제1사단장 원지는 그날 아침 짙은 안개를 틈타 포를 적 가까이 끌어다 놓았다5. 그의 회고로는 오후 네 시 사십 분에 신호탄이 올랐고, 제39군의 기록으로는 다섯 시에 포탄이 쏟아졌다. 십 분 뒤 제116사단과 제117사단 보병이 산에서 일어났다4.

*

11월 1일 밤, 삼탄천 동쪽, 국군 제15연대.

제15연대는 낮부터 맞고 있었다. 저녁 다섯 시, 삼탄천 건너편 미군 제1대대 쪽으로도 박격포탄이 날아갔다. 그 뒤를 이어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트럭에 실은 발사관 네 개에서 소련제 82밀리 로켓탄이 줄지어 날아와 미군 대대 지휘소의 탄약 트럭을 불태웠다1.

제15연대 병사들은 중국 표시가 찍힌, 포탄 뒤로 가스를 뿜어 반동을 지우는 57밀리 무반동총 두 정을 빼앗았다. 아홉 시, 국군을 받쳐 주던 미 제10고사포단 트럭 행렬이 불을 끄고 남쪽으로 떠났다1. 열한 시가 넘자 연대 진지가 하나씩 꺼졌다. 자정을 조금 넘겨 제15연대는 싸우는 부대로서 사라졌다1. 빠져나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

11월 1일 밤, 운산 읍내 서북쪽, 중국인민지원군 제116사단.

나팔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산을 타고 내려왔다. 제116사단 병사들은 미군 제1대대와 제2대대 사이, 아무도 지키지 않는 산줄기를 찾아내 그 길로 쏟아져 들어갔다6. 참호에 뛰어든 병사들의 손전등 불빛에 커다란 군화와 철모, 낯선 얼굴이 잡혔다.

“미국 놈이다!”

그 외침이 참호에서 참호로 건너갔다. 제39군은 총공격을 시작하고 적진에 뛰어든 뒤에야 맞선 상대가 미군이고, 그것도 미군의 자랑인 제1기병사단이라는 것을 알았다4. 사단장 왕양은 뒷날 그 밤을 이렇게 돌아보았다4.

“함성이 사방에서 일고 총검이 붉어졌다. 미군은 그렇게 빠른 돌격을 본 적이 없었고, 가까이 붙는 백병전에도 익숙지 않았다. 차츰 대열이 무너져 군대의 꼴을 잃었다.”

제116사단 제347연대가 두 대대 사이 틈으로 읍내에 들어갔다1. 미 제1대대장 존 밀리킨 소령의 병사들은 기본 휴대 탄약을 다 쏘고, 연대가 올려 보낸 예비 탄약까지 거의 다 썼다1.

*

11월 1일 밤 여덟 시, 청천강 가의 도시 안주, 미 제1군단 사령부.

탁자 둘레에 밀번과 게이, 백선엽이 앉았다. 밀번이 결정을 내렸다. 부산에서 반격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군단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로 돌아선다1. 제8기병연대와 국군 제15연대는 곧장 운산에서 남쪽으로 20킬로미터 가까이 물러난다.

철수 명령은 열한 시쯤 연대장 레이먼드 파머 대령에게 닿았다1. 갈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운산 남쪽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꺾어 구룡강 여울을 건너 마을 입석(현 북한 평안북도)과 영변으로 가는 길이었다. 갈림길을 지키던 에드슨 앞으로 트럭과 전차가 줄지어 지나갔다.

2일 새벽 두 시 이십 분, 볼트가 105밀리 곡사포 여섯 문을 끈 차량 스무 대를 이끌고 갈림길을 돌아섰다. 이백 야드쯤 갔을 때 그는 둘째 차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보고 지프를 세웠다. 왼쪽 논 위로 달빛을 받으며 한 줄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보병이 내려오는군.”

볼트가 운전병에게 말했다. 오륙십 미터 앞에서 그 줄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볼트의 지프는 굽잇길 위에 선 중국 병사 열댓 명 사이를 기관단총을 쏘며 뚫고 나갔다. 바로 뒤 2.5톤 트럭이 둑 아래로 뒤집혔고, 트럭이 끌던 곡사포가 길을 가로막았다. 두 시 반, 운산에서 나가는 마지막 길이 닫혔다1. 볼트의 지프가 그 길을 빠져나간 마지막 차였다.

*

11월 2일 새벽 세 시, 운산 남서쪽 남면천 다리, 미 제8기병연대 제3대대 지휘소.

제3대대 쪽은 밤새 조용했다. 차량들이 범퍼를 맞대고 길 위에 줄지어 서서 출발 명령을 기다렸다. 병사들 일부는 참호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남쪽에서 1개 중대쯤 되는 대열이 다리로 다가왔다. 다리를 지키던 M중대 두 개 분대는 그들을 국군으로 여기고 지나가게 두었다1. 대열이 대대 지휘소 옆에 이르렀을 때, 앞장선 사람이 나팔을 불었다6.

윌리엄 C. 힐 중위는 뒷날 그 소리를 이렇게 말했다1.

“꿈인 줄 알았다. 멀리서 나팔이 진혼곡을 불고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연기 속에서 나온 것처럼 그림자들이 보이는 대로 쏘고 찔렀다.”

다른 병사도 누군가 자기를 흔들어 깨우며 말 떼가 달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참호 속에서 누군가 대꾸했다.

“우리가 기병인데 말은 다 텍사스에 두고 왔잖아.”

그 대꾸가 끝나기도 전에 수류탄이 터졌다. 중국 병사들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부채꼴로 흩어져 차량마다 수류탄과 폭약 꾸러미를 던졌다. 줄지어 선 트럭들이 차례로 불길에 휩싸였다.

작전주임 필모어 맥에이비 대위는 대대장 로버트 오먼드 소령과 함께 땅굴 지휘소에서 뛰어나갔다가 왼쪽 어깨뼈에 총탄을 맞았다. 그가 피를 흘리며 돌아오는 길에 도랑에서 중국 병사 셋이 일어나 총검으로 그를 찔러 보았다. 셋은 저희끼리 무어라 다투다가 그냥 길을 따라가 버렸다. 그는 같은 일을 한 번 더 겪고서야 땅굴에 닿았다1. 군의관 클래런스 앤더슨 대위와 군종 신부 에밀 카폰(34) 대위가 부상병 하나를 끌고 막 땅굴로 들어온 참이었다.

부대대장 모리아티 소령은 땅굴 밖에서 털모자를 쓴 그림자 서넛을 보았다. 그는 맥에이비를 땅굴로 밀어 넣고 권총을 뽑았다. 반 시간 동안 지휘소 둘레 곳곳에서 총구가 맞닿을 거리의 싸움이 벌어졌다. 날이 밝았을 때 오먼드는 크게 다친 채 발견되었다1. 대대 참모들은 다치거나 사라졌다.

*

같은 새벽, 운산 남쪽 길목, 중국인민지원군 제115사단 제345연대.

중국 측 서술은 이 다리 일대를 「제인교」라 부른다. 제345연대가 먼저 그곳을 차지해 남쪽 퇴로를 끊었다고 적는다4. 날이 밝자 갇힌 미군은 전차 십여 대를 앞세워 연대의 진지로 거듭 밀고 나왔다.

제2대대 제4중대 제1소대 제3분대의 진지가 뚫렸다. 분대장 저우더구이는 미군 병사와 엉겨 땅바닥을 굴렀다. 미군 다섯이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는 수류탄 끈을 당겼다. 중국의 공식 서술은 그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적병의 귀 한쪽을 이로 물고 있었다고 전한다4.

*

11월 2일 낮, 남면천 가 들판, 제3대대가 둥글게 두른 진지, 원진.

제3대대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장교 여섯에 병사 이백 명쯤이었다1. 그들은 세 대 남은 전차를 가운데 두고 폭 이백 야드의 둥근 진지를 팠다. 그 둘레 오백 야드 안에서 부상병 백칠십여 명을 끌어 들였다1. 산 사람의 수는 세었지만, 죽은 사람은 세지 못했다.

날이 밝고 한 시간쯤 지나 정찰기와 전폭기가 날아와 하루 종일 둘레 산을 때렸다. 헬리콥터 한 대가 진지 위로 내려앉다가 총탄을 맞고 그대로 떠나갔다. L-5 정찰기 한 대가 모르핀과 붕대를 담은 우편 행낭 하나를 떨어뜨렸다1.

진지 안의 부상병 백이십오 명가량은 밤새 아무 치료도 받지 못했다7. 의약품은 전부 트럭 한 대에 실려 있었는데, 그 트럭은 지난밤 싸움 통에 진지 밖 칠십오 야드 들판에 버려져 있었다7. 적이 훤히 내려다보는 자리였다.

제8기병연대 의무 중대의 클래런스 E. 포슬스웨이트 하사가 앤더슨 앞으로 왔다.

“제가 가겠습니다.”

앤더슨은 그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슬스웨이트는 몸을 낮춰 진지를 넘었다. 저격병의 총알이 흙을 튀기는 사이로 트럭까지 달려가 붕대와 약을 품에 안았다. 돌아오는 길, 진지 가장자리에 거의 닿았을 때 수류탄 파편이 그를 덮쳤다7. 그가 품고 온 붕대는 부상병들에게 갔다.

*

11월 2일, 운산 남쪽 구룡강 굽이, 미 제5기병연대.

제5기병연대장 해럴드 K. 존슨(38) 중령은 이 구출전을 남의 일로 여길 수 없었다. 두 달 전 미국 매사추세츠의 육군 기지 포트 디븐스에서 이 대대를 데리고 한국에 왔고, 낙동강 돌파전 내내 직접 지휘한 그의 대대였다1.

존슨의 두 대대가 능선을 향해 올라갔다. 닿을 수 있는 포는 155밀리 곡사포 두 문뿐이었고, 상급 부대는 가벼운 포를 앞으로 올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전폭기가 능선을 때렸지만 산불 연기가 짙어 조종사들은 표적을 보지 못했다. 땅을 파고 들어앉은 중국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로잡힌 중국 병사 하나가 그 능선에 다섯 개 중대가 있다고 말했다1. 제5기병연대는 이 밤과 낮에 사상자 삼백오십 명가량을 냈고, 그 능선을 「나팔 언덕」이라 불렀다1.

오후 세 시, 밀번이 게이에게 사단을 물리라고 말로 지시했다1. 두 사람은 지금 있는 병력으로는 길을 뚫을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 해 질 무렵, 게이는 제5기병연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제3대대는 남겨 두었다. 게이는 뒷날 그것을 평생 내린 가장 어려운 결정이라고 했다1.

해 지기 직전 사단 연락기가 제3대대 원진 위로 명령을 담은 통신통을 떨어뜨렸다. 어둠을 틈타 빠져나오라는 명령이었다. 전차장 엘머 L. 밀러 중사의 무전기로도 비슷한 말이 들어왔다. 이제 너희 스스로 판단해 빠져나오라고 했다. 진지 안 사람들은 의논 끝에 그 밤을 버티기로 했다1.

*

11월 2일 밤, 제3대대 원진.

어두워지자 중국군이 낮 동안 끌어다 놓은 120밀리 박격포가 진지를 두드렸다. 밀러의 전차들은 포탄을 끌어 가려고 진지 밖으로 나갔다. 전차마다 두세 발씩 맞았고, 한 대에 불이 붙어 끄던 승무원 하나가 전사했다1. 탄약도 기름도 바닥난 밀러가 무전으로 말했다.

“우리가 여기 있어 봐야 보탬이 안 되겠소.”

보병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전차 세 대는 남서쪽으로 사라졌다.

중국 보병이 박격포를 뒤따라 들판을 건너왔다. 진지 안 병사들은 버려진 차량에 어깨에 메고 쏘는 로켓 발사기 바주카를 쏘아 불을 붙였다. 불타는 차량을 등진 중국 병사들의 몸이 검게 드러났다. 그 밤 동안 사백 명쯤 되는 무리가 여섯 번 달려들었고, 여섯 번 다 물러났다1.

옛 지휘소 땅굴에는 크게 다친 부상병 오륙십 명이 누워 있었다1. 해 질 녘 카폰은 원진을 떠나 그 땅굴로 갔다. 새 원진에서 백오십 야드 바깥이었다. 저녁 일찍 중국군이 땅굴 앞 기관총 두 자리를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부수고 땅굴로 들이닥쳤다.

카폰은 부상병들 틈에 누운 다친 중국군 장교 하나를 보았다. 그는 장교 곁에 무릎을 꿇었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남아 있지 않다. 그 장교가 미군의 투항을 안전하게 받아 주도록 중국군과 말을 맞추었다는 것만 훈장 공적서에 남았다8.

중국군은 부축하면 걸을 수 있는 부상병 열다섯 명을 데리고 남면천 쪽으로 나갔다1. 맥에이비와 카폰도 그 안에 있었다.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 땅굴에 남겨졌다. 끌려가는 길에 그들은 시체 위를 기어 넘어야 했다. 맥에이비는 진지 가장자리에 중국 병사의 시체가 세 겹으로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포로가 된 직후, 중국 병사 하나가 다친 허버트 A. 밀러 상사에게 총을 겨누었다. 카폰이 걸어가 그 병사를 옆으로 밀쳤다8. 그러고는 밀러를 일으켜 세웠다.

*

11월 4일 오후 두 시 반, 제3대대 원진.

날이 밝았을 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이백 명쯤, 부상병은 이백오십 명쯤이었다1. 3일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오지 않았다. 남은 식량은 부상병들에게 돌렸다. 밤마다 중국군을 물리친 뒤에는 병사들이 진지 밖으로 기어 나가 중국 병사 시체에서 총과 탄약을 거두었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빠져나가 보기로 했다. 월터 메이오 중위와 필립 피터슨 중위가 사병 둘을 데리고 논도랑을 기어 북쪽 마을과 여울을 살피고 왔다1.

군의관 앤더슨이 남겠다고 했다. 그는 부상병들을 데리고 투항하기로 했다.

떠나는 사람들이 진지 동쪽 가장자리로 모였다. 그때 중국군의 백린탄이 진지 전체에 쏟아져 하얀 연기가 들판을 덮었다. 오 분 안에 이백 명이 동쪽 빈 들판으로 빠져나갔다1. 연기 속에 누운 부상병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고,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뒷날 말했다. 그들이 남긴 말은 하나였다.

“지원군 데리고 돌아와서 우리 꺼내 줘.”

*

11월 6일 오후 네 시, 영변 부근 산속.

탈출한 무리는 빗속을 밤새 걸었다. 6일, 미군 포탄이 터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거리에서 중국군이 그들을 둘러쌌다. 장교들은 무리를 작은 조로 나누어 흩어지게 했다. 네 시쯤, 제3대대는 부대로서 끝났다1. 대부분이 그날 죽거나 사로잡혔다.

*

1950년 11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 제66군 사령부.

「운산 전투 경험의 기본 결론」이라는 소책자가 인쇄되었다1. 미군의 박격포와 전차, 포병, 비행기를 높이 쳤고, 보병은 이렇게 적었다. 「운산에서 그들은 며칠 동안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뒤가 끊기면 겁을 먹는다.」 그 며칠 동안 남면천 가 들판에서는 여섯 번의 돌격이 여섯 번 물러났다.

중국 측은 운산에서 적 2,046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았고, 그 가운데 미군이 1,840여 명이라고 발표했다4. 미 육군 공식 전사는 처음에 제8기병연대에서 1,000명 넘게 실종되었다가 낙오병이 돌아온 뒤 손실이 600명쯤으로 정리되었다고 적었다1. 제3대대에서 돌아온 사람은 장교 열 명과 사병 이백 명이 조금 못 되었다. 대대장 오먼드는 포로로 잡힌 뒤 상처로 죽어 운산 북쪽 길가에 묻혔다고 살아 돌아온 포로들이 전했다1.

국군 제15연대의 손실은 끝내 정확한 숫자로 남지 않았다. 11월 22일 중국군은 선전을 겸해 포로 스물일곱 명을 풀어 주었는데, 그 가운데 열아홉 명이 운산에서 잡힌 제8기병연대 병사였다1. 두 주가 지나도록 미군 전차 정찰대는 주민들이 숨겨 주고 돌봐 준 부상병들을 하나둘 실어 왔다.

포슬스웨이트에게는 1956년 미 육군에서 명예훈장 다음가는 수훈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7. 공적서는 그가 운산에서 치명상을 입었다고 적었고, 포로 기록은 그가 사로잡혀 1950년 12월 31일 무렵 상처로 죽었다고 적었다9. 그의 유해는 돌아오지 않았다10.

카폰은 압록강 가 벽동(현 북한 평안북도 벽동군) 포로수용소에서 동료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 나르고 미사를 올렸다. 1951년 5월 23일 그는 그곳에서 죽었다11. 2013년 4월 11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추서했다8. 하와이 국립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 있던 그의 유해는 2021년에야 신원이 밝혀져 고향 캔자스로 돌아갔다11.

그가 일으켜 세운 허버트 밀러는 살아서 전쟁 끝을 보았다.

사료 출처

1.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1화 출처와 같은 책) 제33장 「The Chinese Intervene」의 「Unsan—Prelude」, 제34장 「Unsan」, 제36장 「The Chinese Appraise Their First Phase Korean Action」 — 10.25 삼탄천 다리 박격포(11시 전)·중공군 300명·첫 중공군 포로(10,000명 진술), 10.26 첫눈, 미 제8군 정보 판단 문구, 백선엽의 시체 확인과 「many, many Chinese」, 10.29~31 제8기병연대 이동과 배치, 헤니그 대령과 연대 참모의 불신, 게이의 「11월 1일 처음 알았다」, 볼트 대위의 산불 열 곳, 에드슨이 만난 피란민, L-5 관측병 무전(본문은 뜻을 살려 옮김), 게이의 요청 거절, 제5기병연대 B중대의 박격포 4문 손실, 82밀리 로켓, 제10고사포단 21시 철수, 제15연대 23시 이후 붕괴, 제1군단 20시 회의와 방어 전환, 철수 경로, 볼트 지프와 02시 30분 도로 차단, 03시 제3대대 지휘소 기습(국군으로 오인, 나팔), W. C. 힐 중위와 병사 증언, 맥에이비·모리아티·오먼드, 앤더슨·카폰, 원진(장교 6·병사 200, 부상 170여), 헬리콥터·L-5 모르핀 행낭, 존슨과 「his own battalion」, 155밀리 2문, 연기, 포로 진술(중국군 5개 중대), 제5기병연대 사상 약 350명과 「Bugle Hill」, 15시 밀번 지시와 게이의 결정, 통신통과 밀러 전차 무전, 120밀리 박격포·전차 이탈, 여섯 차례 약 400명 돌격, 땅굴 부상병 50~60명과 15명 연행, 11.4 상황(200·250), 메이오·피터슨 정찰, 앤더슨 잔류, 백린탄, 부상병의 말, 11.6 16시 해체, 오먼드 사망과 매장 증언, 손실 약 600명·귀환 장교 10명과 사병 200명 미만, 두 주 뒤 부상병 귀환, 11.22 포로 27명 석방, 제39군 제116사단·제347연대·제115사단, 제66군 사령부 소책자(1950.11.20) 인용. 2. 김용출, 「『콜디스트 윈터』 핼버스탬…」, 세계일보 2024.7.6, segye.com/newsView/20240705504611 — 첫 포로 문답: 30대 광둥 출신, 누빈 군복, 「39군」, 하이난섬 전투, 밀번 재심문과 백선엽 통역. 3. 데이비드 핼버스탬, 『The Coldest Winter』(2007) 앞부분 — 첫 포로 문답. 4. 李涛(군사과학원 해방군 당사·군사연구센터), 「云山之战:中美王牌军首次对决」, 中国军网-解放军报 2020.10.10, 81.cn/2022zt/2020-10/10/content_10205017.htm — 39군 세 갈래 공격(116사단 서북, 117사단 동북, 115사단 345연대 남쪽, 343연대 차단), 원래 공격 시각 19시 30분, 杜平 회고(오후 세 시 넘어 적 후방 이동 관측), 吴信泉·徐斌洲의 공격 앞당김, 17시 포격과 10분 뒤 돌격, 총공격 뒤에야 미군인 줄 앎, 汪洋 회고(본문은 뜻을 살려 옮김), 343연대 1중대 50분 만에 용두동(龙头洞) 점령·미 제5기병연대 1개 중대 100여 명 섬멸과 지원군 사령부 통령가장, 345연대의 诸仁桥 방어, 邹德贵 분대장, 중국 측 전과(2,000여 명, 미군 1,840여 명, 비행기 격추 3·노획 4, 전차 28, 자동차 176, 포 119). 5. 「抗美援朝百岁老兵、志愿军炮兵第1师师长文击」, 人民日报 2020.10.29, paper.people.com.cn/rmrbwap/html/2020-10/29/nw.D110000renmrb_20201029_1-11.htm — 아침 안개, 오후 세 시 반 적 이동, 16시 40분 신호탄. 6. 「雲山戰鬥」, 중국어 위키백과(2026.10 열람) — 116사단이 제1·2대대 틈으로 4개 대대 투입, 116사단 1개 중대가 국군으로 위장해 제3대대 지휘소 침투, 345연대가 제3대대를 원진으로 몰아넣음(중국군사과학원 『抗美援朝戰爭史』 2권 인용). 7. 미 육군 의무사료(AMEDD Center of History & Heritage), 한국전쟁 수훈십자훈장 명단, achh.army.mil/regiment/dsc-korean-korean-lz/ — 포슬스웨이트: 의무중대, 1950.11.2 운산, 부상병 약 125명, 75야드 밖 트럭, 수류탄 파편, 육군부 일반명령 1956년 51호, 고향 펜실베이니아 이리. 8. 미 육군, 에밀 카폰 명예훈장 공적서(2013.4.11), army.mil/article/100859 — 11.1~2, 부상병과 잔류, 다친 중국군 장교를 통한 투항 교섭, 허버트 A. 밀러 상사 처형 저지. 9. Military Times Hall of Valor, valor.militarytimes.com/?p=168183 — 포슬스웨이트의 포로·사망일. 10. 미 전쟁기념물위원회(ABMC), 한국전 명단, abmc.gov/korean-honor-roll/281504 — 포슬스웨이트의 포로·사망일. 11. 영문 위키백과, 「Emil Kapaun」 — 공로훈장 공적서(벽동 수용소 1950.11.4~1951.5.23), 2021년 신원 확인과 위치토 안장.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백선엽 1920년생, 밀번 1892년생, 게이 1894년생, 해럴드 K. 존슨 1912년생, 카폰 1916년생(이상 영문 위키백과), 우신취안 1912년생, 쉬빈저우 1912년생, 두핑 1908년생(이상 중국어 위키백과). 왕양, 원지(2020년 기사에 102세로 나오나 셈법이 밝혀져 있지 않다), 저우더구이, 헤니그, 볼트, 에드슨, 파머, 밀리킨, 오먼드, 맥에이비, 모리아티, 앤더슨, 포슬스웨이트, 힐, 엘머 밀러, 허버트 밀러, 메이오, 피터슨, 첫 포로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남쪽 도로 차단 부대 — Appleman은 제116사단 제347연대가 갈림길 동쪽 길을 막았다고, 중국어 위키백과는 제348연대가 02시 30분 갈림길에서 매복했다고, 中国军网은 제115사단 제345연대가 诸仁桥를 먼저 차지해 퇴로를 끊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제347연대가 읍내에 들어간 것과 제345연대의 诸仁桥 방어를 각각의 자료대로 적고, 길을 막은 부대 번호는 단정하지 않았다. 诸仁桥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은 중국 서술의 「제3대대 지휘소와 갇힌 미군」 대목에 맞춰 남면천 다리 일대로 두었다(위치 추정). [자료 충돌] 공격 시각 — 中国军网은 17시 포격·10분 뒤 돌격, 원지 회고는 16시 40분 신호탄, Appleman은 17시 첫 탐색 공격과 19시 30분 전면 공격(제1대대 정면)을 적었다. 19시 30분은 중국 측의 원래 계획 시각과도 같다. [자료 충돌] 용두동 — 中国军网은 제343연대 1중대가 50분 만에 미 1개 중대 100여 명을 섬멸했다고, Appleman은 제5기병연대 B중대가 밀려나며 81밀리 박격포 4문을 잃었고 이 밤낮 싸움에서 두 대대 사상자가 약 350명이라고 적었다. [자료 충돌] 손실 — 중국 측 2,046명(미군 1,840명), Appleman 약 600명(제8기병연대, 처음 실종 1,000명 이상), 영문 위키백과 미군 1,149명(Ecker 2005)·국군 530명(Chae 외 2001). 중국군 손실은 중국어·영문 위키백과의 표기가 서로 엇갈려 본문에 적지 않았다. 맥에이비의 「적 시체 1,000구」 추정은 Appleman이 과장으로 보아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포슬스웨이트 — 수훈십자훈장 공적서는 의무중대 소속으로 「치명상」을 입었다고, Military Times와 ABMC는 제8공병대대 C중대 의무병으로 11.2 포로가 되어 12.31 무렵 상처로 죽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첫 포로 날짜 — Appleman은 10.25, 백선엽의 중앙일보 연재(Korea JoongAng Daily 2010.2.16 영역)는 10.24로 적었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포로의 하이난섬 참전 진술은 핼버스탬이 전한 대로 적었고, 제39군의 하이난 참전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The Chinese Appraise』 장의 PDF 글자 인식본은 일부 군 번호를 「38th」로 잘못 읽었다. 본문은 같은 책 제34장 끝의 「39th Army」를 따랐다. [재구성] 첫 포로를 둘러싼 국군 병사들의 대화와 농담, 백선엽이 시체를 들여다보는 몸짓과 「모두 중국 사람이다」 문장(뜻은 Appleman), 헤니그 대령과 참모의 대화 문장(불신 자체는 Appleman), 제39군 지휘소의 보고·「앞당긴다」 문장(결정은 中国军网), 제116사단 병사의 「미국 놈이다」 외침과 손전등 장면, 「우리 보병이 내려오는군」(볼트가 운전병에게 한 말의 뜻은 Appleman), 「말은 다 텍사스에 두고 왔잖아」 대꾸, 포슬스웨이트와 앤더슨의 짧은 대화와 몸짓(자원 사실은 공적서), 밀러의 무전 문장(뜻은 Appleman), 카폰이 다친 중국군 장교 곁에 무릎을 꿇는 몸짓과 밀러를 일으켜 세우는 몸짓, 제3대대 원진 장면의 세부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첫 포로, 저우더구이, 중국 병사들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2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