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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16,668자)

온정리 전투 — 북진이 끊긴 자리

1950 · 네오

온정리 전투, 1950년 10월 24일~30일 — 평안북도 운산군 온정리(현 운산읍), 온정–북진 도로의 양수동·풍하동 골짜기와 동림산, 북진,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가 선 대유동, 고장(현 고풍군)·초산·압록강변 신도장, 희천·태평·구장동.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제3대대가 매복에 걸린 10월 25일의 북진 길, 제40군 제118·120사단의 온정리 협공(10월 26일 새벽), 제7연대 제1대대의 압록강 도달(10월 26일 오후)과 남하 중 차단(10월 29~30일), 제19연대와 제8사단 제10연대의 온정리 탈환 시도(10월 28

1950년 10월 24일 밤, 평안북도 운산군의 고을 북진(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로동자구) 서쪽, 마을 대동(현 북한 평안북도 동창군 대동리) 어귀, 중국인민지원군 제40군 제118사단.

닷새 밤을 내리 걸어온 길이었다. 제118사단은 10월 19일 밤 중국 도시 안둥(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압록강 다리를 건넌 뒤로 해가 뜨면 골짜기 숲에 숨고 해가 지면 걸었다1. 사단의 무전기는 꺼져 있었다2. 군과 사단 사이의 명령은 말을 탄 전령이 품에 넣고 날랐다3. 하늘은 미군 비행기 차지였고, 무전 한 번이면 만 명 넘는 대열의 자리가 들킬 수 있었다.

대동 어귀에서 대열 앞쪽이 멈췄다. 사단장 덩웨(32)와 부대의 사상을 맡은 정치위원 장위화(34)가 앞으로 불려 갔고, 그곳에 펑더화이(52)가 서 있었다4. 닷새 전 지원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군대보다 먼저 압록강을 건넌 사람이었다5. 그날은 그가 태어난 지 쉰두 해가 되는 날이었다5.

펑더화이는 인사를 길게 받지 않았다.

“적이 사방으로 날뛰고 있다. 사정이 아주 급하다. 너희는 곧장 온정 북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잡고 숨어라. 자루를 만들어 놓고 적을 대담하게 들여보내라. 들어오면 사납게 쳐서 기세를 꺾어 놓아라. 그래야 우리 주력이 모여서 펼칠 시간이 생긴다.”

그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6.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와 치르는 첫 싸움이다. 너희 사단이 맨 앞이다. 해낼 수 있는지 보겠다.”

중국은 이 군대를 나라의 군대라 부르지 않았다. 스스로 나선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인민지원군’이라 불렀다. 그러나 대열을 이룬 것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맞붙은 국공내전 내내 공산군의 큰 갈래인 제4야전군의 번호를 달고 만주에서 중국 남쪽 끝 하이난섬까지 싸워 내려간 제40군이었다7. 덩웨와 장위화는 다시 대열로 돌아가 남쪽으로 걸었다. 얼마 안 가 남쪽 마을 온정(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 운산읍) 쪽에서 둔한 포성이 울렸다3. 덩웨가 걸음을 멈추고 장위화를 돌아보았다.

“더 가지 맙시다. 우리가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게 낫겠소.”

손전등 빛 아래 군용 지도가 펼쳐졌다. 온정에서 북진으로 가는 길이 마을 양수동(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과 풍하동(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을 지나는 자리에 폭 1킬로미터 남짓한 골짜기가 길게 누워 있었다. 양쪽은 수십 미터에서 수백 미터까지 솟은 산줄기였고, 비탈마다 관목이 덮여 있었다3. 장위화가 연대장들을 불러 모았다8.

“나라 밖에서 치르는 첫 싸움이오. 마오 주석과 전국 인민이 우리를 보고 있소. 반드시 잘 싸워서 군의 위엄과 나라의 위엄을 보여 줘야 하오.”

제354연대장 추촨위가 맨 앞에서 걸으며 연대의 자리를 정했다3. 239.8고지, 216고지, 409.5고지. 병사들은 동이 트기 전에 삽을 놓았고, 그 위에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덮었다.

*

같은 날 저녁, 평안북도 운산군 온정리,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제3대대가 저녁 일곱 시에 먼저 마을에 들어갔다. 북한군 몇이 총을 쏘다 달아났고, 대대는 북한 경찰서인 마을 내무서를 덮쳐 서류 뭉치를 쓸어 담았다. 제1대대는 사십 분 뒤에 들어왔다9. 연대장 함병선 대령의 제2연대는 그날 아침 여덟 시에 남쪽 고을 구장동(현 북한 평안북도 구장군 구장읍)을 떠나 하루 만에 온정리까지 올라와 있었다9.

통신병 하나가 끊어진 북한군 전화선에 수화기를 물렸다. 잡음 사이로 북한 말씨가 오갔고, 몇 마디가 귀에 걸렸다.

“중국…… 들어왔다고……?”

통신병은 수화기를 귀에 더 바짝 붙였다. 말은 금세 끊겼다. 첩보는 대대에서 연대로 올라갔고, 대대는 마을 뒤 326고지에 경계병을 올렸다9. 그 첩보가 다음 날 아침의 명령을 바꾸지는 못했다. 내일은 북진, 그다음은 압록강변 벽동(현 북한 평안북도 벽동군 벽동읍)이었다10. 야포와 대전차포를 붙인 제3대대가 트럭을 타고 맨 앞에 서기로 되어 있었다.

*

1950년 10월 25일 오전, 양수동 북쪽 483고지 아래 외딴집, 제118사단 지휘소.

사단 정치부 주임 류전화(29)는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있었다11. 지휘소로 쓰는 외딴 농가 마당에서 남쪽 골짜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1. 아홉 시가 조금 못 되어 온정 쪽 마을 어귀에 흙먼지가 일었다3. 처음에는 보병 두 줄이 길 양쪽을 따라 걸어왔고, 곧 트럭 행렬이 그 가운데를 지나 앞으로 나섰다.

중국 쪽 기록은 뒷날 그 행렬을 이렇게 그렸다. 트럭에서 내려 살피는 병사가 없었고, 앞쪽 산을 향해 떠보는 총 한 방도 없었다. 병사들은 사과를 베어 물고 껌을 씹으며 유행가를 흥얼거렸다3. 이긴 쪽이 남긴 묘사였다.

열 시, 전화벨이 울렸다1. 제354연대장 추촨위였다.

“적 1개 대대와 포병 중대 하나가 포위 안에 다 들어왔습니다.”

덩웨는 수화기를 든 채 지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쳐라.”

골짜기 양쪽 비탈이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제1대대는 마을 장동(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과 212고지에서, 제3대대는 부흥동(현 북한 평안북도 운산군)과 북산에서, 제2대대는 풍하동에서 쏘았다3. 사단 수색중대가 맨 앞 트럭을 멈춰 세웠다6. 연대가 미리 정해 둔 셈법은 셋이었다. 머리를 막는다. 꼬리를 자른다. 허리를 벤다. 돌격 나팔이 울리자 비탈의 병사들이 길로 쏟아져 내려갔다. 서른 대 남짓한 트럭 행렬이 세 토막으로 끊겼다1.

류전화의 망원경 속에서 사람들이 트럭 짐칸에서 뛰어내려 길옆 도랑으로 굴러 들어갔다. 트럭이 끄는 견인포는 포를 받치는 다리, 포가를 펼 틈도 없이 길 위에 서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 제353연대의 두 개 대대가 오른쪽에서 밀고 들어왔다. 뒤따라오던 국군 두 개 대대는 제354연대 제4중대가 길목에서 막았다3. 앞선 대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

같은 날, 온정–북진 도로, 국군 제2연대 제3대대.

트럭이 멈춘 것은 앞쪽 산에서 총탄이 날아왔을 때였다. 대대장 송대후 소령은 병사들을 차에서 내리게 했다9. 이런 사격은 북진 내내 숱하게 겪었다. 길목을 막은 북한군 패잔병 몇이 쏘다가, 산을 타고 오르면 달아났다.

이번에는 달아나지 않았다. 동림산을 등진 능선마다 총구가 있었고, 길 건너 구룡강 너머 도리산 쪽에서도 불이 날아왔다9. 산을 타고 오르던 소대가 비탈 중턱에서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길 뒤쪽에서도 총소리가 났다. 퇴로가 막히고 있었다.

대대에 붙은 미 군사고문단 고문관 글렌 C. 존스 중위가 무전기를 찾았다. 사단마다 연대마다 미군 장교가 한둘씩 붙어 국군 지휘관에게 조언하고 미군 항공기와 포병을 불러 주던 때였다. 무전병은 트럭 아래 쓰러져 있었다. 존스는 그날 해가 지기 전에 포로가 되었고, 끝내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오지 못했다12.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대대 750명 가운데 400명쯤이 오후 늦게 산을 타고 온정리로 돌아왔다고 적었다12. 중국 쪽 기록은 국군 480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았고, 그 가운데 포로가 161명이었다고 적었다6. 트럭 38대와 포 12문이 길 위에 남았다3.

*

25일 오후, 온정리 북쪽 산자락, 국군 제2연대 제2대대.

제3대대를 도우러 나선 제2대대의 수색대가 산에서 병사 하나를 끌고 내려왔다. 누빈 솜옷 차림이었다. 수색대원 하나가 그를 땅에 앉히고 물었다.

“인민군 몇 사단이냐?”

포로는 고개를 저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중국말이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불려 오고 나서야 대답이 이어졌다. 자기는 중국 군인이고, 부대는 10월 17일부터 북진 둘레의 산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12. 길 앞쪽에서 크게 다친 중국 병사 하나가 더 잡혔다.

수색대원들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아침까지 그들이 상대한다고 믿었던 것은 무너져 도망치는 북한군이었다. 해가 지자 중국군이 대대와 온정리 사이를 끊었다. 대대는 길을 버리고 산을 넘어 남쪽으로 돌아서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

25일 밤, 대유동(현 북한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로동자구),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북진 서쪽 산골짜기였다. 그날 펑더화이는 이곳에서 지원군 사령부가 섰다고 알리고 첫 작전회의를 열었다2. 오후 세 시 오십 분, 제40군에 온정을 치라는 명령이 내려갔다13. 제118사단은 북쪽에서, 제120사단은 남쪽에서 마주 들어가기로 했다.

밤이 되자 펑더화이는 베이징에 전보를 쳤다. 군 하나와 사단 하나씩 길을 나눠, 적 한 개 연대와 두 개 연대를 각각 없애겠다고 했다2. 마오쩌둥(57)의 답전이 왔다. 적 몇 개 연대부터 없애며 차츰 넓혀 가라는 방침이 옳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에 축전이 따로 왔다6.

“첫 싸움에서 이긴 것을 축하한다.”

*

10월 26일 새벽, 온정리.

밤새 마을 뒤 157고지와 온정중학교 운동장에 패잔병이 모여들었다. 제3대대는 학교 교사 처마 밑에서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새벽, 사방의 산에서 함성이 일었다. 나팔 소리와 피리 소리가 함성에 섞였다. 중국군은 밤사이 구룡강을 건너 동남쪽 535고지 앞까지 돌아 들어와 있었다9.

157고지 진지 한쪽이 먼저 꺼졌다. 이어 학교 운동장에 수류탄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총구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1대대 병사들은 대검을 꽂고 맞붙었다9. 장교들이 마을 동남쪽 끝에서 겨우 대열을 붙들어 세웠지만, 여섯 시에 그 줄도 뚫렸다12.

연대는 동쪽으로 빠졌다. 5킬로미터쯤 갔을 때 길이 막혀 있었다. 중국군이 먼저 와 있었다. 그때 연대에는 온전한 중대가 하나도 없었다12. 병사들은 길을 버리고 산으로 흩어졌다. 연대 고문관 로이 M. 그램링 소령과 다른 고문관 하나는 남동쪽 고을 희천까지 빠져나갔고, 폴 V. S. 라일스 대위는 붙잡혔다12. 지원군이 26일 아침 온정을 손에 넣었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었다6.

미 육군 공식 전사는 연대 3,100명 가운데 2,700명쯤이 끝내 남쪽의 큰 강 청천강까지 내려왔다고 적었다12. 그 숫자를 두고 전사는 연대가 처음 중국군을 만나 끝까지 버티며 싸우지는 않았다고 평했다.

*

10월 26일 오후 두 시 십오 분, 평안북도 초산군 신도장(현 북한 자강도 초산군) 마을, 압록강변.

제7연대 제1중대를 앞세운 제1대대가 강가에 닿았다10. 경북 화산(현 영천시 화산면)에서 시작해 문경, 원주, 춘천, 원산, 순천, 희천, 고장(현 북한 자강도 고풍군), 초산을 지나온 북진길이 이 강에서 끝났다. 중대장은 이대용(25) 대위였다14. 강 위에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가 만주 쪽으로 걸려 있었고, 다리 위에 피란민 수백 명이 가득했다. 이미 건너간 사람들은 줄을 지어 강 건너 중국 마을 통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14.

대대장 김용배(29) 중령이 이대용을 불렀다.

“이 중대장, 물 좀 떠라. 대통령께 보낸다.”

이대용은 수통 마개를 열고 강가에 무릎을 꿇었다15. 물은 차가웠다. 수통 주둥이에서 거품이 몇 번 올라오다가 멎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를 비는 물이었다14. 그 옆에서 중대원들이 군화를 강물에 담그고 손을 씻었다. 한 일병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채 고개를 들었다.

“중대장님, 그 물이 대통령께 가는 거면 좀 위에서 뜨십시오. 여긴 제가 방금 발을 담갔습니다.”

강가에 웃음이 터졌다. 이대용은 대꾸하지 않고 마개를 닫았다. 대대에 붙은 57밀리 대전차포가 철판을 뚫는 철갑탄으로 뗏목다리를 끊었다14. 네 시쯤 대대 주력은 서남쪽으로 10리 떨어진 초산읍으로 내려갔고, 제1중대만 강가에 남았다.

이대용은 이장원 소위의 제1소대를 신도장 경찰지서에 두어 압록강 가 고을 위원(현 북한 자강도 위원군)으로 가는 길을 막게 했다. 김덕출 소위의 제2소대와 박상호 상사의 제3소대가 강기슭을 따라 하류로 길게 늘어섰다. 중대는 강 건너 만주 땅을 바라보며 1,600미터에 걸쳐 국경을 지켰다14.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잃은 뒤 35년, 남북으로 갈린 뒤 5년, 합쳐 40년이었다. 이대용은 그날을 40년 묵은 족쇄가 풀리는 첫날로 여겼다. 그날 밤 보초들은 강 건너 불빛을 오래 보았다.

미 육군 공식 전사의 기록은 조금 다르다. 연대 고문관 해리 플레밍 소령이 그날 증강된 수색소대와 함께 초산에 들어갔다12. 만주로 건너가는 북한군을 멈추려고 기관총을 걸었는데, 총탄이 강 건너 중국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총탄이 날아가는 길, 사선을 틀었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 수색소대를 전쟁 내내 미 제8군 지휘 아래 국경에 닿은 유일한 부대로 적었다12.

*

26일 저녁, 초산 남쪽 고을 고장, 제7연대 본부.

연대장 임부택(31) 대령은 다음 날 아침 연대 주력을 초산에 넣을 계획을 짜고 있었다. 무전병이 종이를 들고 왔다. 제6사단의 전문이었다. 제2연대가 패해 흩어졌으니 제7연대는 곧장 남쪽으로 내려와 사단에 합류하라는 내용이었다12.

플레밍이 무전기를 잡았다.

“휘발유와 식량, 탄약을 받기 전에는 연대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연대의 트럭들은 압록강까지 오느라 기름을 다 썼다. 연대와 사단 사이의 온정리 길목에는 이제 중국군이 앉아 있었다. 보급품은 이틀 뒤 28일 오전 열한 시에야 하늘에서 떨어졌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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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온정리 동쪽 고개,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

제2군단장 유재흥(29) 소장은 희천에 있던 제19연대와 제8사단 제10연대를 서쪽으로 돌려 보냈다16. 제2연대가 버린 트럭과 포를 되찾고 온정리를 다시 잡으라는 명령이었다12. 제19연대장은 박광혁 대령이었다. 연대의 제3대대는 이틀째 501고지를 붙들고 서쪽에서 몰려오는 중국군을 밤마다 되밀었다9.

28일 오후, 앞선 부대가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온정리가 발아래 내려다보였다. 마을 길가에 버려진 트럭들과 포 몇 문이 그대로 서 있었다.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그날 밤 지원군 제119사단과 제120사단이 두 연대를 덮쳤다13. 이튿날까지 두 연대는 트럭과 포병 세 개 포대, 가진 것을 전부 잃었다12.

*

10월 28일 오후 다섯 시, 신도장.

초산읍 대대본부에서 전령이 왔다. 이대용은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14.

“온정 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해 물러나는 중이다. 이를 구하려고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 온정을 향해 남하한다. 제1중대는 오늘 저녁 일곱 시까지 초산읍에 모여라.”

국경을 지킨 지 이틀이었다. 중대원들은 말없이 강기슭의 참호에서 나왔다. 여섯 시 사십오 분, 벌써 어두웠다. 제1중대는 트럭 다섯 대에 나눠 타고 압록강을 떠났다14. 수통은 이대용의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

10월 29일, 고장 남쪽 풍장 골짜기, 제7연대.

새벽 다섯 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트럭 한 대가 먼저 초산읍을 떠났다. 여섯 시 반, 대대가 트럭을 타고 뒤따랐고, 고장에서 연대 본부와 합쳤다. 중국군은 고장 남쪽 풍장 일대에서 길을 막고 있었다14. 아침밥을 먹고 나서 제2대대와 제3대대가 한꺼번에 돌파에 나섰다.

전투기들이 날아와 중국군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퍼부었다. 중국군은 조금 밀려나는 듯했지만, 길을 내주지는 않았다. 골짜기 폭은 50미터에서 150미터였고, 양쪽 산줄기는 가팔랐다14. 길은 하나뿐이었다. 플레밍은 뒷날 그날을 이렇게 돌아보았다12.

“근접 항공 지원이 엄청나게 도와준 덕에 낮 동안은 버텼다. 그러나 밤이 되어 전투기들이 떠나자 적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달이 없는 밤이었다. 자정, 중국군이 산에서 내려왔다14. 앞쪽 부대가 먼저 무너졌다. 앞에서 흩어진 병사들이 하나뿐인 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왔다. 뒤로 물러나 대열을 다시 짜려 했지만, 뒤쪽에서도 다른 중국군 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흩어져 더 뒤로 가도 사정은 같았다.

이대용은 중대원 이름을 부르며 비탈을 올랐다. 싸움에 들어가기 전 그가 거느린 사람은 중대원 160명쯤에 중기관총반 열 명, 귀순한 북한군 포로 남녀 스물다섯 명쯤,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두 명, 청년단원 열 명쯤이었다. 총을 쥘 수 있는 사람은 185명쯤이었다. 동이 틀 무렵 60명쯤이 대답하지 않았다14. 연대는 수백 대의 트럭과 사단 포병의 야포 6문, 대전차포를 골짜기에 버리고 산속으로 흩어졌다14.

*

같은 밤, 풍장 골짜기 양쪽 능선, 중국인민지원군.

능선 위의 병사들은 낮 동안 머리 위를 지나가는 전투기 소리를 들으며 엎드려 있었다. 해가 지자 그들이 일어났다. 낮에는 하늘이 국군 편이었고, 밤에는 산이 그들 편이었다. 중국 쪽 기록은 이 밤을 제118사단의 몫으로 적었다. 제40군의 사단 하나가 고장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의 대부분을 없앴다는 것이다2.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다르게 적었다. 1951년 3월에 노획한 중국군 제125사단 제373연대의 손그림 작전도로 보아, 그 연대의 대대 하나가 덫을 놓고 제7연대를 무너뜨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12. 어느 쪽이든 덫은 같은 꼴이었다. 길 양옆에서 기다리다가 퇴로를 먼저 자르고, 앞과 옆에서 동시에 들이쳤다17.

30일 아침 여섯 시 반, 플레밍이 붙잡혔다12. 몸에 열다섯 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그날 싸움에서 살아남은 미군은 그 하나뿐이었다. 그는 거의 세 해 뒤인 1953년 가을 포로 교환 때 미국으로 돌아갔다12.

*

10월 말, 청천강 북쪽.

연대 3,552명 가운데 875명쯤이 평안남도 마을 군우리(현 북한 평안남도 개천시 군우동)까지 빠져나와 사단에 다시 섰다12. 연대에 소령부터 대령까지의 영관급 장교가 여덟 있었는데,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과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 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 연대 정보주임 김재강 소령이 포로가 되었다9.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고, 연대 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붙잡힌 뒤 죽임을 당했다14. 임부택과 김용배는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12.

11월 1일 오후, 제8군을 이끄는 워커(61) 중장이 미 제1군단장 밀번에게 전화를 걸었다18. 국군 제2군단은 더는 조직을 갖춘 전투 부대가 아니었고, 제8군의 오른쪽 옆구리는 비어 있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29) 준장의 사단이 압록강에 닿은 지 엿새 만이었다.

1951년 8월 28일, 마오쩌둥은 지원군 정치부의 제안에 따라 10월 25일을 지원군이 나라 밖으로 나가 싸우기 시작한 날로 기리자는 안에 서명했다6. 중국은 지금도 그날을 항미원조 기념일, 곧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도운 싸움을 기리는 날로 지낸다.

*

1950년 11월 9일 오후 세 시, 평안남도 고을 덕천 남쪽, 국군 제6사단 사령부.

이대용은 덕천 동쪽 마을 송정리(현 북한 평안남도)에서 대동강을 건넜고, 마을 남중리에서 마지막으로 중국군과 맞붙은 뒤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열하루 동안 산을 탔다. 높은 산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국군을 만나면 싸우거나 달아났다. 남쪽으로 아무리 걸어도 보이는 것은 중국군뿐이었다.

사령부 앞마당에 군악이 울렸다. 이대용은 병사 스무 명을 세 줄로 세우고 맨 끝에 간호학생 박태숙과 정정훈을 세웠다. 그는 대열 여섯 걸음 앞 가운데에 섰다. 사단장은 장도영 준장으로 바뀌어 있었다14.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신고하는 장교는 그가 처음이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적 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 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 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압록강에서 강물을 뜬 지 열나흘 만이었다. 대열 뒤에서 누군가 코를 훌쩍였다. 군 위문 공연단 군예대의 여가수가 다가와 그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 주었다14. 그는 스무 명의 얼굴을 한 번 돌아보고 손을 내렸다.

사료 출처

1. 「抗美援朝第一仗:温井之战」, 신화망 2017.8.11, xinhuanet.com/politics/2017-08/11/c_1121470392.htm — 류전화 회고. 10.19 출정 서약과 안둥 압록강 다리 통과, 낮에 숨고 밤에 걷기, 무전 정지, 24일 밤 북진군 서쪽 대유동을 지나며 적 접근 소식, 25일 04시까지 진지 점령 명령, 483고지 아래 외딴집 사단 지휘소, 25일 10시 추촨위의 전화와 덩웨의 출격 명령, 30여 대 차량 세 토막, 두 시간 남짓 교전, 당일 밤 온정 점령. 2. 「打赢了一场“世界战争史上少有的遭遇战”」, 인민망 당사 2021.6.28, dangshi.people.com.cn/n1/2021/0628/c436975-32142147.html — 펑더화이의 전 군 무전 봉쇄, 25일 대유동에서 지원군 사령부 성립 선포와 첫 작전회의, 25일 밤 펑더화이의 결심 보고(군과 사단이 길을 나눠 적 1개 연대와 2개 연대를 섬멸)와 마오의 동의 회전, 양수동 484명, 29일 밤 제118사단이 고장 지구에서 국군 제7연대 대부를 섬멸. 3. 장싱더(张兴德), 「首战两水洞:由此开始抗美援朝战争第一次战役」, 『学习时报』, 중국군망 2024.2.19, 81.cn/js_208592/16286048.html — 무전 침묵과 기병 전령, 10월 24일 밤 대동에서 펑더화이를 만남과 그의 지시, 덩웨·장위화가 온정 쪽 포성을 듣고 멈춤, 1,000여 미터 골짜기와 수십~수백 미터 산줄기, 239.8·216·409.5고지, 장위화의 말, 제354연대장 추촨위, 08:50께 온정 마을 어귀의 흙먼지, 사과·껌·유행가 묘사, 10:20께 첨병 접촉, 장동·212고지·부흥동·북산·풍하동의 세 대대, 「拦头、截尾、斩腰」, 제353연대 투입, 제354연대 제4중대의 저지, 5시간 교전, 480여 명·포 12문·차량 38대·총 163정, 「美军顾问赖勒斯少校」 포로. 4. 중국어 위키백과, 「邓岳」 — 덩웨 1918년생. 5. 중국어 위키백과, 「彭德怀」 — 1898.10.24 출생, 10.19 17시 30분 안둥에서 입조. 6. 가오원젠(高文俭)·한쥔치(韩俊奇), 「志愿军入朝第一仗:这一仗打出来一个纪念日」, 중국군망 2020.7.30, 81.cn/2020zt/2020-07/30/content_9865288.htm — 펑더화이의 지시(「出国后的第一仗,你们师是打头阵的,看看你们行不行」), 25일 05:00 진지 점령, 08:00께 첨병의 사단부 진입과 수색중대 저지, 돌격 나팔, 25일 밤 제118·120사단의 온정 협공과 26일 새벽 점령, 사살 325·포로 161·차량 38·유탄포 12·총 163, 마오쩌둥 축전 「庆祝你们的初战胜利」, 1951.8.28 지원군 정치부 제의를 마오가 비준해 10월 25일을 기념일로 정함. 7. 이인준, 「[6·25 60주년] 기억해야 할 전쟁사⑮ ‘온정리 전투’」, 뉴시스 2010.7.5, newsis.com/view/NISX20100705_0005590974 — 동림산 기슭 교전, 처음에는 북한군으로 여김, 상대는 제4야전군 예하 제40군. 8. 양청완바오(羊城晚报) 계열 보도, news.ycwb.com/ikimvkotki/content_54044614.htm(검색 결과로 확인) — 장위화 생애, 「1916—2017」. 9. 「온정리 전투」, 한국어 위키백과(2026.10.9 열람), ko.wikipedia.org/wiki/온정리_전투 — 국방부·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사』를 주 출처로 한 일자별 경과. 24일 제2연대 08:00 구장동 출발, 제3대대 19:00·제1대대 19:40 온정리 진입, 내무서 서류 노획, 북한군 유선 도청으로 중공군 첩보 처음 입수, 326고지 경계, 25일 제3대대(송대후 소령) 차량화 기동대대, 장동 부근 접적, 동림산(1165고지)과 구룡강 건너 도리산(841고지)의 매복, 26일 157고지·온정중학교, 535고지 쪽 우회, 제1대대 백병전, 28일 제19연대(박광혁 대령) 제3대대의 501고지 방어, 7연대 영관 장교 피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온정리 전투」 독립 항목을 찾지 못했다. 10. 박동찬, 「초산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종수정 2024.11.25), encykorea.aks.ac.kr/Article/E0057013 — 10월 20일 국경 진출 명령, 23일 공격 제대 편성(제7연대 풍장·고장–초산, 제2연대 온정–북진–벽동), 26일 07:00 마지막 진격, 초산 남쪽 6킬로미터에서 북한군 제8사단 혼성부대 격퇴, 14:15 첨병소대 압록강 도달, 반격 41일 만의 국경 도달. 참고문헌 『6·25전쟁사』 7(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0). 11. 중국어 위키백과, 「刘振华 (上将)」 — 류전화 1921.7.8 출생, 제40군이 1950년 충저우 해협(琼州海峡)을 건너 하이난섬 작전에 나선 일. 12.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1화 출처와 같은 책) 제33장 「The Chinese Intervene」(673~676쪽 상당) 중 「ROK Troops Reach the Yalu」「Chinese Strike the ROK II Corps」 — 6사단 23일 밤 희천 도착, 7연대의 24~25일 밤 온정 통과와 고장 숙영, 26일 플레밍 소령과 증강 수색소대의 초산 진입(만주 쪽으로 사선이 가지 않게 기관총 배치), 수색소대가 제8군 지휘 아래 국경에 닿은 유일한 부대, 25일 제2연대 제3대대가 온정 서쪽 8마일에서 매복에 걸림(750명 중 약 400명 귀환, 존스 중위 포로·수용소 사망), 제2대대 수색대가 잡은 중국군 포로의 진술(17일부터 북진 둘레 산에서 대기), 0330 온정 공격·0600 돌파·동쪽 3마일 차단·온전한 중대 없음, 그램링 소령 탈출·라일스 대위 포로, 연대 약 3,100명 중 약 2,700명 청천강 도달, 유재흥 소장이 제19연대와 제10연대를 온정으로 보냄(28일 온정을 내려다봄, 이튿날 차량과 포병 3개 포대 상실), 26일 저녁 사단 무전과 플레밍의 회신, 28일 1100 공중 보급, 29일 고장 남쪽 약 20마일 차단, 플레밍의 회고(원문: with the tremendous help of the close air support we received, we were able to hold our own during the daylight hours, but after night fell and without the support of the fighter planes we could not hold the enemy off), 제125사단 제373연대 작전도, 플레밍의 열다섯 군데 부상과 0630 포로·1953년 송환, 3,552명 중 약 875명 군우리 귀환, 연대장 임부택 생환. 13. 「温井战斗」, 중국어 위키백과(2026.10.9 열람) — 25일 15:50 제40군 온정 공격 명령, 제119·120사단의 28~29일 공격, 제353연대의 룽구둥(龙谷洞) 매복. 『抗美援朝战争史』 2(军事科学院, 2000)를 출처로 든다. 14. 이대용 회고, 서울신문 연재(3화 출처와 같은 연재) 1991년 6월 26일 자(19910626005002)·6월 28일 자(19910628005001) — 북진 경로, 10.26 14:15 신도장 도착, 뗏목다리의 피란민과 중국 마을 통천구,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수통에 뜬 압록강 물(남북통일 축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낼 물), 57밀리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뗏목다리 절단, 군화를 적시고 손을 씻음, 16시께 대대 주력의 초산읍 이동, 이장원·김덕출·박상호·서근석과 1,600미터 경계, 1910년 이후 40년의 소회, 10.28 17시 명령(인용문은 회고 문장을 다듬음)과 18:45 트럭 다섯 대 철수, 29일 05시 수색대·06:30 출발, 풍장의 차단, 아군 전폭기 근접 지원, 폭 50~150미터 골짜기, 자정 야간 공격, 트럭 수백 대·야포 6문 유기, 지휘 인원 구성과 약 60명 손실, 영관 장교 피해, 11.9 15시께 장도영 사단장에게 신고(신고문 인용),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 하늘색 머플러. 10월의 계급은 11월 9일 신고문의 「대위」를 따랐다(3화의 6월에는 중위). 15. 국가기록원, 「6·25전쟁의 진행 과정 — 중공군 개입과 유엔군 재반격」, theme.archives.go.kr/next/625/process/china-intervention.do — 1차 공세 10.25~11.7, 「1950년 10월 26일 제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는 장면」 사진. 16. 영문 위키백과, 「Yu Jae-hung」 — 유재흥 1921년생, 10월 하순 육군 참모차장으로 옮김. 17.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같은 책 제36장 「The Chinese Appraise Their First Phase Korean Action」 — 중국군이 10월 13·14일~20일에 압록강을 건너 낮에 숨고 밤에 행군, 제40군이 온정에서 6사단을 사실상 괴멸, V자 매복 전법. 18.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같은 책 제34장 「Unsan」 — 11월 1일 워커가 밀번에게 국군 제2군단이 조직된 전투 부대가 아니게 되었고 우익이 무방비라고 전화함.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덩웨 1918년생(중국어 위키백과), 장위화 1916년생(양청완바오 계열 보도 「1916—2017」), 펑더화이 1898년생(10월 24일 생일, 중국어 위키백과), 류전화 1921년생(중국어 위키백과 1921.7.8, 신화망 2017은 당시 「28세」), 마오쩌둥 1893년생, 이대용 1925년생(3화 [나이]와 같은 근거), 김용배 1921년생·임부택 1919년생·김종오 1921년생(3화 [나이]와 같은 근거), 유재흥 1921년생(영문 위키백과), 워커 1889년생(11화 [나이]와 같은 근거). 함병선은 한국어 위키백과에 1920년생 「함병선」 항목이 있으나 1950년 제2연대장과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추촨위, 송대후, 박광혁, 장도영, 존스, 그램링, 라일스, 플레밍, 이장원, 김덕출, 박상호, 최영수, 김종수, 조현묵, 김재강, 조한섭, 조윤재, 박태숙, 정정훈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펑더화이와 제118사단이 만난 날 — 『学习时报』(81.cn 2024)는 24일 밤 대동, 81.cn 2020은 23일 저녁으로 적었다. 류전화 회고는 24일 밤 대유동을 지나며 적 접근을 알았다고 했다. 본문은 24일 밤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접촉 시각 — 중국 측은 08:00께(81.cn 2020) 또는 10:20께(『学习时报』) 첨병 접촉, 10시 연대장 전화(류전화)로 적었고, 한국어 위키백과(『한국전쟁사』)는 제3대대가 11:00에 온정리를 떠나 12:00께 장동 부근에서 접적했다고 적었다. 본문은 중국 쪽 장면에만 시각을 넣었다. [자료 충돌] 교전 시간 — 류전화 회고는 두 시간 남짓, 『学习时报』는 5시간, 다른 중국 자료는 약 1시간. [자료 충돌] 양수동 피해 — 중국 측은 480여 명(『学习时报』), 484명(인민망 2021), 사살 325·포로 161(81.cn 2020), 470여 명(기념일 해설 자료)으로 적었다. Appleman은 대대 750명 가운데 약 400명이 온정리로 돌아왔다고 적었다. [자료 충돌] 미군 고문관 포로 — 중국 측은 양수동에서 「라일스 소령」을 사로잡았다고 적었다. Appleman은 양수동에서 잡힌 고문관을 존스 중위로, 라일스는 대위로서 26일 온정 함락 뒤 붙잡힌 것으로 적었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온정 야습 시각 — Appleman 03:30, 한국어 위키백과 04:00. 본문은 「새벽」으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압록강 도달 — 백과사전과 이대용 회고는 제7연대 제1대대(첨병 제1중대)가 26일 14:15 신도장에 닿았다고, Appleman은 26일 증강 수색소대만 초산에 들어가고 연대 주력은 고장에 남았다고 적었다. 같은 날 같은 강가의 서로 다른 기록으로 보고 둘 다 적었다. 수통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실제로 전해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국가기록원 사진 설명은 「7연대 병사」로만 적는다). [자료 충돌] 제7연대를 친 부대 — 중국 측은 제40군 제118사단(인민망 2021, 중국어 위키백과는 제353연대), Appleman은 제125사단 제373연대의 1개 대대로 보았다. 이대용은 「중공군 제40군 예하 1개 사단」이라 적었다. 차단 지점도 고장 남쪽 풍장(이대용), 고장 남쪽 약 20마일(Appleman), 룽구둥(중국어 위키백과)으로 다르다. 전황도는 위치를 추정으로 표시했다. [자료 충돌] 제7연대 붕괴 시각 — 이대용은 29일 자정 야습, Appleman은 29일 밤 흩어져 30일 새벽 저항이 끝나고 플레밍이 06:30 포로가 되었다고 적었다. 중국어 위키백과는 플레밍 포로를 30일로 적었다. 본문은 30일 아침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제2군단장 — Appleman은 유재흥 소장이 제19·10연대를 온정으로 보냈다고 적었고, 중국어 위키백과는 군단장을 백선엽(뒤에 유재흥)으로 적었다. 영문 위키백과는 유재흥이 10월 하순 육군 참모차장으로 옮겼다고 적는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재구성] 모든 대화의 문장(펑더화이·장위화·추촨위·덩웨의 말은 중국 측 기록의 뜻을 살려 다듬음, 덩웨가 장위화에게 한 말은 기록의 「건의」를 대사로 바꿈, 김용배의 지시, 강가 일병의 농담, 플레밍의 무전 회신은 Appleman의 서술을 대사로 바꿈, 명령서 문장은 회고를 다듬음), 도청하던 통신병과 그가 들은 말, 손전등 아래 지도, 류전화의 망원경 장면과 그가 본 것, 존스 중위가 무전기를 찾는 몸짓, 포로 신문 장면과 포로의 옷차림, 대유동 판잣집 풍경, 온정중학교 처마 밑에서 머릿수를 세는 장면, 나팔과 피리 소리, 이대용이 수통에 물을 뜨는 몸짓과 거품, 보초들이 강 건너 불빛을 보는 장면, 수통이 허리에 매달린 모습, 이대용이 이름을 부르며 비탈을 오르는 장면, 능선 위 중국군 병사들의 모습, 신고 장면에서 코를 훌쩍인 사람과 이대용이 얼굴을 돌아보는 몸짓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그날 밤 보초들은」「낮에는 하늘이 국군 편이었고」 같은 문장도 그렇다. 중국군 병사 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2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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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리 전투 — 북진이 끊긴 자리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