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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17,530자)

원산상륙작전 — 바다가 길을 막았다

1950 · 네오

원산상륙작전, 1950년 10월 10일~26일 — 원산 시가와 갈마반도 비행장, 영흥만 입구의 려도(麗島)·웅도·신도·모도, 바로 들어가는 남쪽 항로와 려도 북쪽으로 도는 「러시아 항로」, 10월 12일 파이럿호·플레지호 침몰 지점, 신도 해안포, 10월 17일 일본 소해정 MS14 침몰 지점(려도 등대에서 244도 4,500미터), 10월 18일 한국 해군 YMS-516 침몰 지점(갈마반도 서쪽),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제3사단·수도사단)의 원산 진입, 10월 19일~25일 앞바다를 오르내린 상륙부대, 10월 26일 갈마반

1950년 10월 초, 일본 혼슈 서쪽 끝의 항구 시모노세키 부두, 일본 바다 경비 기관 해상보안청의 기뢰 쓸어 내는 배, 소해정 MS03.

오전 내내 시마다 요시타카(25)는 소총 두 정과 자동소총 한 정, 탄약 200발을 배에 싣고 기름을 먹였다1. 바다에서 소해정이 줄을 끊어 떠오르게 한 기뢰는 총으로 쏘아 터뜨렸다. 갑판 일을 맡은 갑판장 자리에서는 그 총이 연장이었다. 오후는 쉬는 시간이었다.

옆 소해정 MS14의 취사 담당 나카타니 사카타로(21)가 큰 접시를 들고 건너왔다. 항구 도시 고베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였다.

“시마다 군, 황새치를 구했어. 한잔하자.”

둘은 함교에 앉아 회를 한 점씩 집고, 소주를 잔에 그대로 따라 마셨다. 시마다가 네댓 살 위였고, 둘 다 장가를 들지 않았다. 일본은 아직 연합군 점령 아래 있었다. 해군은 없어졌고, 옛 해군 수병들은 해상보안청 나무배를 타고 미군이 전쟁 때 일본 바다에 떨어뜨린 기뢰를 건졌다. 소해정 선체에 붙어 있던 해상보안청 표지는 떼어 냈다. 일장기도 달 수 없었다. 돛대에는 끝이 제비 꼬리처럼 갈라진 국제신호 E기 하나만 올라갔다2.

며칠 전 시마다는 부하 열 명을 선실 바닥에 앉혀 놓고 행선지를 알렸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총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조선 바다에 나간다,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 싫은 사람은 전근 신청을 내라. 그리고 덧붙였다.

“만에 하나 죽으면 유족한테 돈이 나온다. 효도했다고 생각해라. 살아서 돌아오면 그 월급으로 대감 놀이나 하고.”

임무 동안 월급은 두 배였다1. 바닥에 앉은 부하들 가운데 빠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해군 밥을 먹어 본 사람들에게는 갈 데가 따로 없었다.

나카타니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건강하게 돌아오면 또 한잔하자.”

“그래, 또 하자.”

행선지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다만 시마다는 바다 지도를 만드는 도쿄 수로부에서 해도를 받아 온 사람이었다. 북조선 동해안 원산의 해도가 몇 벌 끼어 있었다1. 그는 그때 알았다. 적 앞에서 하는 소해였다.

*

10월 10일 새벽 다섯 시 반, 원산 동쪽 끝,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33) 준장은 사단 두 개에 원산을 갈라 맡겼다3. 제3사단은 시가 동쪽 고지들, 수도사단은 시가 서쪽에 우뚝 선 여왕산4. 두 사단이 고지를 잡은 다음 원산 한복판을 양쪽에서 조인다는 계획이었다.

제23연대는 자주포 다섯 대를 앞세우고 열차를 나누고 잇는 원산 조차장에서 73고지를 지나 비행장으로 이어지는 북한군 방어선에 뛰어들었다. 일곱 시, 연대 선두가 시가지에 들어섰다4.

같은 시각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1대대는 일본제 트럭에 사람을 가득 태우고 철판을 둘러 장갑차처럼 꾸민 채 달렸다. 과수원 언덕에 숨은 북한군 전차포 세 문이 트럭 대열을 막았지만, 대대는 옆으로 빠져 원산 앞바다로 뻗은 갈마반도의 비행장(현 원산갈마국제비행장)으로 돌진했다4.

여왕산 기슭에서는 다른 싸움이 벌어졌다. 수도사단장 송요찬(32) 준장과 제26연대장 이치엽 대령이 마주 섰다5. 둘 다 군사 지도가 없었다. 송요찬이 시중에서 파는 일반 지도 위에 겹쳐 선을 그은 투명 종이, 작전 투명도를 펼쳤고, 이치엽도 자기 것을 펼쳤다. 부대 구역을 가르는 두 장의 선이 맞지 않았다4.

“여기가 우리 지경선입니다.”

“그 선은 길 건너요.”

“길이 두 개 있는데 어느 길 말씀입니까?”

둘이 지도를 맞대고 있는 사이 제3사단과 수도사단 병력은 원산 시내에서 두 번이나 서로의 구역을 넘나들었다. 먼저 원산에 깃발을 꽂겠다는 경쟁이었다. 결국 제18연대가 여왕산을 계속 치고, 제26연대는 원산 서남쪽을 막기로 정리되었다4.

국군은 이튿날 저녁까지 원산에 남은 저항을 쓸어냈다. 부둣가에 시체 수십 구가 누워 있었다. 여왕산 기슭 마을 신풍리(현 북한 강원도 원산시 신풍동)의 방공호에서 300여 구, 원산 앞바다에서 230여 구가 나왔다. 북한군이 물러나며 죽인 주민들이었다4. 원산에 남아 있던 시민 9만 명가량이 거리에 나와 국군을 맞았다4.

원산은 열흘 뒤 미 해병 제1사단이 상륙해 빼앗기로 되어 있던 항구였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는 맥아더에게 원산 뱃길의 기뢰를 걷어 보급을 열어 달라고 했다6. 육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바다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

*

10월 10일 해 질 녘, 원산 앞바다, 물 깊이 100길, 180미터 남짓한 선 안쪽.

중순양함 로체스터호에서 뜬 헬리콥터가 소해함 대열 앞을 낮게 날며 무전을 보냈다7.

“기뢰 줄 하나 보인다.”

조금 뒤 다시 들어왔다.

“둘이다.”

그리고 또.

“다섯 줄이다. 아주 촘촘하다.”

소해대 지휘관 리처드 T. 스포퍼드 대령은 그날 남쪽 항로에서 10마일을 쓸었고 줄에 매여 물속에 뜬 계류 기뢰 열여덟 발을 처리했다7. 그 앞에 다섯 줄이 더 있었다. 저녁 보고에서 스포퍼드는 원산 어귀를 막은 기뢰가 적어도 2,000발이라고 적었다6. 소련 해군 장교들은 10월 5일까지 원산에서 북한군에게 기뢰 학교를 열었다7. 북한 사람들은 작은 목선 삼판선이 끄는 바닥 평평한 짐배, 바지선 꼬리에서 기뢰를 한 발씩 굴려 떨어뜨렸다. 미 해군 기록은 북한군이 원산을 떠나며 기뢰를 깔던 삼판선 선원들, 기뢰 자리를 아는 민간인들을 죽였다고 적었다7.

스포퍼드는 남쪽 항로를 버렸다. 영흥만 어귀의 섬 려도 북쪽으로 34해리를 도는 길, 전쟁 전 소련 배들이 드나들어 「러시아 항로」라 부르던 길로 소해를 옮겼다7.

*

10월 12일 오전 열한 시, 려도 북쪽 「러시아 항로」, 미 소해함 파이럿호.

열한 시 십이 분, 대열이 아직 쓸지 않은 물에 들어섰다. 파이럿호가 맨 앞이었고, 오른쪽 뒤로 플레지호, 그 뒤로 인크레더블호가 비스듬히 줄을 섰다. 나무배 소해정 레드헤드호가 파이럿호 소해 줄 끝을 따라가며 쓸어 낸 길에 부표를 떨어뜨렸다. 파이럿호 함교에는 제32소해분대장 브루스 하이엇 소령과 함장 코닐리어스 매멀런 대위가 서 있었다. 규정대로 꼭 필요하지 않은 승조원은 모두 갑판 위로 올라와 서로 떨어져 섰다7.

“헬기에서 보고. 정면에 기뢰 밭, 양배추 밭처럼 깔려 있답니다.”

파이럿호의 줄 칼이 왼쪽에서 기뢰 다섯 발을, 오른쪽에서 한 발을 끊어 올렸다. 플레지호가 셋을, 인크레더블호가 넷을 더 올렸다. 뿔 달린 쇠공 열세 개가 물 위에서 까딱거렸다7. 하이엇과 매멀런은 지금 방향을 트는 편이 그대로 가는 편보다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8. 망대에서 고함이 났다.

“정면에 기뢰!”

열두 시 구 분, 배 한가운데, 갈비뼈처럼 선체를 받치는 62번 늑골 아래에서 폭발이 일었다. 뒷날 승조원들은 그 구멍이 차 두 대 들어가는 차고만 했다고 말했다. 매멀런은 삼십 초쯤 정신을 잃었다7. 눈을 떴을 때 배는 20도 기울었다가 잠깐 바로 섰고,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배 뒤쪽 고물은 벌써 물에 잠겨 있었다.

“퇴함! 전원 퇴함!”

함장 다음 자리인 부장 헨리 E. 데이비스 2세 중위는 함장 명령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물에 떠 있는 승조원들은 다치지 않았으면 넋이 나가 있었다. 데이비스는 그들을 하나씩 잡아 배에서 떼어 내 구명 뗏목까지 끌었다8. 함장과 부장이 맨 마지막으로 배를 떠났을 때 돛대가 물에 닿았다. 파이럿호는 사 분 만에 가라앉았다7.

그때 근처 섬 신도 쪽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아무도 몰랐던 북한군 해안포였다. 포탄이 멈춰 선 소해함과 물에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떨어졌다. 기관총탄과 파편이 물을 때렸다. 미국 네브래스카의 목장에서 자라 열여덟에 해군에 들어온 어빈 밴 뷰런(20)도 다친 몸으로 그 물에 떠 있었다8.

플레지호 함장 리처드 O. 영 대위는 소해 줄을 끊고 배를 세워 구조 보트를 내렸다. 그리고 하나뿐인 3인치 포로 신도를 쏘았다8. 북한군 포는 플레지호로 겨누어졌다. 영은 포탄을 피해 키를 왼쪽 끝까지 돌렸다. 배가 30도쯤 돌았을 때, 열두 시 이십 분, 오른쪽 배 한가운데 앞쪽 기관실 옆에서 기뢰가 터졌다7. 배 밑바닥의 등뼈 용골부터 함교까지 갑판과 칸막이 격벽이 찢어졌다.

구축소해함 엔디콧호가 해안포에 불을 뿜었고, 항공모함 레이테호에서 날아온 비행기들이 로켓과 500파운드 폭탄, 네이팜을 신도에 쏟았다8. 그사이 인크레더블호는 기관 두 개가 다 멈춰 물 위에 섰다7.

고속수송함 디아첸코호의, 물속 장애물을 폭파하는 수중폭파대원 필립 E. 캐리코 수병은 총탄이 떨어지는 물에 뛰어들어 다친 사람 둘을 뗏목에 태워 끌었고, 다섯 사람을 더 뗏목으로 밀어 올렸다8. 파이럿호에서 여섯이 돌아오지 못했다. 서른 살 기관병 에이드리언 워런 존슨은 텍사스 휴스턴에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왔다8. 플레지호에서도 여섯이 사라졌고, 하나는 건져 낸 뒤에 숨졌다7.

*

같은 시각, 미 소해함 뒤쪽, MS03.

시마다는 함교 위에 있었다. 미군 소해함이 끊어 올린 기뢰를 따라가며 쏘아 터뜨리는 일이 일본 소해대 몫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기뢰를 그는 열셋으로 셌다1.

“처분 준비!”

시마다가 자동소총을 드르륵 당기자 고함이 났다.

“사격 중지!”

앞쪽 미군 배가 기뢰에 닿았다는 말이 들렸다. 시마다는 그 배를 보지 못했다. 곧 가까운 섬에서 따다닥 총탄이 날아왔고, 미군 구축함이 섬에 함포를 퍼부었다. 폭격기 한 대가 날아가 섬의 콘크리트 사격 진지 토치카를 때렸다. 쌍안경을 들여다보니 그 자리에 흰 깃발이 올라와 있었다1.

부상한 미군을 실은 구조정이 MS03 앞을 지나갔다. 담요를 덮은 미군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마다는 그 웃음을 뒷날에야 알아들었다. 이제 본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웃음이었다. 일본 소해정들은 뒤로 물러났다. 사격을 받았으니 특별 수당이 붙는다는 말이 돌았다1.

*

10월 12일 오후, 구축함 로언호.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아서 D. 스트러블 중장과 선발부대 사령관 앨런 E. 스미스 소장이 로언호를 타고 침몰 현장으로 달려왔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스미스가 워싱턴에 보낸 전문은 뒷날 해군 역사가들이 자주 인용했다7.

“해군도 없는 나라가 1차 세계대전 전에 나온 무기를, 예수가 태어날 무렵에나 쓰던 배로 깔았다. 그 기뢰에 우리가 바다를 내주었다.”

바다 밖에는 항공모함 넷과 전함 미주리호, 순양함과 구축함 수십 척이 떠 있었다. 그러나 원산 앞에서는 나무배 몇 척이 길을 내지 못하면 그 배들도, 해병과 육군 5만 명도 한 발짝 들어가지 못했다7.

*

10월 14일~16일, 원산 앞바다에 붙은 어느 어촌.

돈 C. 디포리스트 소령은 상륙정으로 해안을 돌다가 물 위로 떠오른 기뢰에 배를 부딪혔다. 기뢰의 뿔 다섯 개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 일련번호가 보일 만큼 가까웠다7. 11825.

그는 저격병이 숨어 있는 길을 지나 어촌까지 걸어 들어갔다. 마을은 비어 있었다. 북한군이 돌아와 보복할까 봐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 골목 끝에 여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디포리스트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밀었다. 아이가 받아 들자 여자들이 하나둘 나왔고, 그다음에 남자들이 나왔다.

디포리스트가 기뢰 그림을 펼쳤다. 뿔 달린 쇠공이 아니라 바다 밑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배가 지나가며 흔드는 자력을 느끼면 터지는 기뢰, 자기 기뢰였다. 한 어부가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더니 앞장서 걸었다. 그가 멈춘 곳은 짚더미 앞이었다. 짚을 헤치자 구리줄 감은 코일이 나왔다. 자기 기뢰의 속이었다. 담배와 전투식량을 받은 어부들은 그 뒤 제 배를 몰고 나가 기뢰를 찾아 알려 주었다7. 원산 앞바다에는 줄에 매달린 기뢰만이 아니라 바닥에 엎드린 기뢰도 있었다.

*

10월 17일 오후 세 시 이십일 분, 원산 앞의 큰 만 영흥만 어귀, 려도 앞.

일본 소해대가 처음으로 따로 맡은 바다였다2. 미군은 비행기로 훑어 보아 기뢰 줄이 없을 듯한 물을 일본 배에 나누어 주었다. 소해정 네 척이 두 척씩 짝을 지어 1킬로미터 와이어를 물속에 끌었다1. 와이어에 걸린 계류 기뢰를 얕은 데로 끌고 가 떠오르게 하는 일이었다. 시마다의 MS03 조에서 왼쪽 700미터 뒤를 나카타니의 MS14 조가 따라왔다1. 승조원들은 모두 갑판 위로 올라와 있었다.

시마다는 함교 위에서 와이어에 단 부표를 보고 있었다. 부표가 흔들리면 기뢰가 걸린 것이었다. 고개를 돌린 순간 뒤쪽 바다에서 물기둥이 50미터쯤 솟았다1. 물기둥은 잠깐 서 있다가 쏴아 하고 무너졌다.

“아, 당했다.”

20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시마다는 멍하니 서 있었다. 곧장 구하러 가야 했지만 MS03은 제 와이어를 끊거나 풀기 전에는 움직이지 못했다. 시마다가 와이어 고리를 붙들고 허둥대는 사이 미군의 작은 보트 단정이 먼저 달려왔다.

MS14는 고물에서 5, 6미터 앞쪽 오른쪽 배 밑바닥, 물 밑 3, 4미터에서 기뢰에 닿았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미군 단정과 엔진 달린 작은 배 내화정, MS06의 작은 배가 스물두 명을 건졌다. 열여덟 명이 다쳤다2. 한 사람이 올라오지 않았다. 해상보안청이 기뢰에 닿은 일을 적은 「MS14호 촉뢰 보고」는 그가 갑판 아래 식량 창고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었다1.

“행방불명 한 명.”

그 말을 듣자 시마다는 짐작이 갔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갑판 위에 있었을 것이었다. 취사 담당은 끼니 때가 아니어도 창고를 드나들었다. 나카타니 사카타로는 이틀 전에 스물한 살이 되었다1.

*

10월 17일 저녁~18일 오후, 영흥만, 일본 소해대 지휘관이 탄 배, 기함 유치도리호.

선실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2. 작은 배의 우두머리인 정장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냈다.

“미군 전쟁에 더는 끌려들어 가기 싫다. 소해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모노세키에서 들은 설명과 다르지 않습니까?”

출항 전 정장들이 받아 낸 조건은 넷이었다2. 북위 38도선 남쪽, 싸움이 없는 항구, 소해정의 안전을 충분히 살피는 방법, 정부의 보상. 원산은 38도선 북쪽이었다. 제2소해대 지휘관 노세는 미군 상륙정으로 얕은 물을 먼저 훑은 뒤에 일본 배가 들어가자는 안을 냈다1. 이튿날 아침 총지휘관 다무라가 그 안을 들고 미군에게 갔다. 선발부대 사령관 스미스 소장의 대답은 짧았다.

“지금 작은 배로 훑을 시간은 없다. 예정대로 바로 소해하라.”

오후에 다무라가 물러선 안을 들고 다시 찾아갔다. 대답은 더 짧아졌다.

“일본 소해정 세 척은 15분 안에 본국으로 돌아가라. 아니면 15분 안에 출항해 소해에 나서라. 출항하지 않으면 쏜다.”

노세와 정장들은 귀국을 정했다1. 다무라 총지휘관이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MS03의 정장이 갑판에 나와 말했다.

“내지로 돌아간다. 미군이 빨리 안 가면 쏜다고 했다.”

시마다는 일본 본토로 돌아간다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열을 고쳐 다시 들어가는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위험은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소해정 세 척은 수리 중인 MS17을 옆구리에 붙들어 매고 영흥만을 빠져나갔다2. 그 소해정들이 10월 20일 오후 두 시 시모노세키에 닿았을 때 원산 앞바다에는 다른 일본 소해대 다섯 척이 와 있었다1. 그들은 이튿날부터 미군 명령대로 만 안쪽 뱃길을 쓸었다2.

*

10월 18일 오후, 갈마반도 서쪽, 한국 해군 소해정 공주정(YMS-516).

미군 소해정 레드헤드호가 줄을 끌고 지나간 자리에서 바다가 두 번 솟았다. 레드헤드호 정장 하워드 중위는 뒷날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온 바다가 터져 오르기 시작했다.” 바닥에 엎드린 자기 기뢰였다7. 미군 배들은 줄을 끊고 천천히 빠져나갔다. 무전이 모자라 그 경고는 뒤따라오던 한국 해군에 제때 닿지 못했다.

한국 해군 대열은 지리산함(PC-704)에 탄 현시학 중령이 이끌었다7. 공주정이 맨 앞에 서기로 되어 있었지만 공주정은 거듭된 선두 명령에 답하지 않았다. 지리산함이 앞장섰고, 동력선 한 척 뒤에 공주정이 셋째로 따라왔다. 대열은 기관 하나로 삼분의 일 속도를 내며 나아갔다. 앞쪽 미군 배 뒤에서 물기둥 두 개가 솟는 것이 보였다.

이 분 뒤 공주정 밑에서 바다가 터졌다. 배는 두 동강이 나 곧장 가라앉았다. 넷이 죽고 열셋이 돌아오지 않았다7. 레드헤드호가 물에 뜬 한국 수병들을 건져 올렸다. 같은 날 원산의 북한군 기뢰 창고 자리에서 자기 기뢰 코일이 또 나왔다2. 스트러블 중장은 20일 상륙을 미루자고 올렸고, 맥아더는 상륙 날짜를 정하지 않고 미루도록 허락했다2.

*

10월 19일 오후 다섯 시 조금 넘어, 원산 앞바다, 미 해병 제1사단 수송선단.

배 250척에 소문이 돌았다.

“전쟁 끝났다! 부산으로 돌아가서 본국 가는 배 탄단다!”

나침반도 소문 편이었다. 선단은 정말로 남쪽으로 돌아섰다. 이튿날 아침 선단은 다시 북쪽으로 돌았다. 그날 오후에는 또 남쪽으로 돌았다. 열두 시간마다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이었다9. 자기 기뢰를 다 걷어 낼 때까지 배들은 동해안 앞바다를 오르내렸다. 해병들은 이 일을 「요요 작전」이라 불렀다9.

아내와 애인에게 쓰는 편지는 날마다 두꺼워졌고, 추리소설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았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갔고, 비좁은 배에 위장염과 이질이 번졌다. 수송선 마린 피닉스호 한 척에서만 앓아누운 사람이 750명이었다9.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58) 소장은 기다리지 않았다10. 20일 그는 미주리호의 헬리콥터를 타고 원산으로 날아가 지휘소를 차렸다9. 해병 전투비행대는 14일부터 원산 비행장에서 날고 있었다. 10월 24일 저녁 그 비행장에서 코미디언 밥 호프(47)와 배우 메릴린 맥스웰이 위문 공연을 열었다11. 호프는 아직 바다에서 요요를 하고 있는 해병들을 두고 농담을 쏟아 냈다9. 객석이 뒤집어졌다. 바다 위 수송선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

10월 26일 새벽, 미군이 노란 해안·파란 해안이라 이름 붙인 갈마반도의 상륙 지점.

전날 오후 세 시 상륙부대가 쓸어 놓은 뱃길로 들어왔고, 저녁에 상륙함 다섯 척이 먼저 갈마반도 모래에 배를 댔다7. 첫 햇빛이 비치자 해병들이 그물을 타고 상륙정으로 내려갔다. 일곱 시 반, 물속 도하 장비를 단 전차들이 모래를 헤치고 올라왔다. 아홉 시, 제1해병연대 대대들이 노란 해안에 내렸다9.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해안에는 보름 전부터 원산에 있던 국군 장병들의 환영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 현수막 하나가 더 있었다7.

“이 해안은 모두 여러분 것입니다. 제3소해전대 드림.”

알몬드는 해병들이 상륙하던 이날을 상륙일을 뜻하는 디데이 대신 「도일 데이」라고 불렀다. 상륙부대 사령관 제임스 H. 도일 소장의 이름을 따서였다9. 그날 저녁까지 해병 제1사단 2만 5천 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병력과 차량 2,000대가 뭍에 올랐다7. 상륙은 처음 정한 날보다 엿새 늦었다. 함흥과 흥남(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은 국군이 아흐레 전에 이미 들어간 도시였다.

*

1950년 10월 하순, 일본 야마구치현 야시로섬, 나카타니의 집.

아들이 죽은 지 한 주쯤 지나, 혼슈와 시코쿠 사이의 바다 세토 내해의 한적한 섬마을에 미군 장교 둘과 통역 하나, 해상보안청 직원 둘이 찾아왔다. 아버지와 누나가 그들을 맞았다. 어머니는 그해 여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

장교들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드님은 조선 바다에서 기뢰를 쓸다 기뢰에 닿아 행방불명되었다. 일본은 헌법에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적은 나라다. 이 일이 알려지면 나라 사이의 문제가 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누가 소식을 물으면 세토 내해에서 소해하다가 기뢰에 닿아 시신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답해 달라1.

오사카에서 일자리를 찾던 형은 누나의 편지를 받고 섬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게 알려지면 친척들까지 미군에게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힌다.”

가족은 입을 닫기로 했다. 장례는 해상보안청 장례로 치러졌지만 사망을 알리는 종이 한 장 오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보상은 없었고, 미국 쪽에서 큰 조의금이 왔다. 형은 그 돈을 입막음 값으로 받았다1.

형은 아우를 이렇게 기억했다. 호탕하고, 식구 걱정을 놓지 않았다. 열한 식구가 사는 집에 다달이 3,000엔쯤을 부쳤다1. 조선 바다로 나가기 반년쯤 전, 일자리를 찾던 형을 고베의 소해정에 재워 주었다. 시커멓게 때 묻은 나무배였다. 아우는 형에게 밥을 지어 주었고, 돌아가는 형의 배낭에 쌀을 몰래 넣어 주었다. 형은 그 쌀로 굶주림을 넘겼다. 형은 아우가 살아 있었다면 자기를 찾아 오사카로 와서 식당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9년 10월 30일, 스물아홉 해가 지나서야 파견 때 해상보안청 장관이던 오쿠보 다케오가 형의 집을 찾아왔다1. 나카타니 사카타로에게 전몰자 훈장이 내려졌다2. 신문 발표는 없었다.

“이제 겨우 아우의 전사를 인정받았구나. 이제 남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겠구나.”

형은 그날 그렇게 생각했다.

시마다 요시타카는 1954년 새로 생긴 일본의 해군 격인 해상자위대로 옮겨 배를 탔다1. 그는 원산에서 잃은 친구를 이렇게 기억했다. 키가 크고 잘생겼고, 떠나기 전에 회를 들고 건너온 친구였다.

“취사 담당만 아니었으면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1952년 가가와현의 신사 고토히라궁에 소해 순직자를 기리는 비가 섰다. 나카타니 사카타로의 이름은 다른 순직자 일흔여섯 명과 함께 그 돌에 새겨졌다. 어디서, 언제 죽었는지는 새겨지지 않았다2.

그가 가라앉은 자리는 원산 앞바다, 려도 등대에서 244도 방향으로 4,500미터였다2. 해병들이 그 바다를 지나 해안에 내린 것은 아흐레 뒤였다.

사료 출처

1. 森信弘(고베신문), 「シリーズ戦争と人間 第9部 極秘裏の掃海隊」(2016.12), kobe-np.co.jp/rentoku/sensou/201612/ — 시마다 요시타카(嶋田好孝)·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郎)·나카타니의 형(中谷藤市)의 회고. 【1】(시모노세키 집결, 해도), 【2】(1940년 15세 취업, 1943년 18세 해군 지원), 【5】(부하에게 한 말, 두 배 월급), 【6】(MS03, 총과 탄약 200발, 황새치 회와 소주, 해상보안청 표지 제거, E기), 【7】(10월 8일 출항, 12일 기뢰 13개·사격 중지·섬의 사격·흰 깃발·웃으며 손을 흔든 미군 부상자·사격 수당), 【8】(해상보안청 「MS14호 촉뢰 보고」: MS03 조 왼쪽 700미터 뒤, 1킬로미터 와이어, 려도 앞, 15시 21분, 물기둥 50미터, 200미터 거리, 고물 5~6미터 앞 오른쪽 바닥 수심 3~4미터, 구조 22·부상 18, 「入庫中ならずやと思考す」, 「烹炊員じゃなければ助かった」, 이틀 전 21세), 【9】(노세 지휘관 수기, 스미스 소장의 15분 통첩, 정장의 말, 10월 20일 14시 시모노세키 귀항), 【10】(미군 장교 2·통역 1·해상보안청 직원 2의 방문, 입막음, 「세토 내해에서」, 아버지의 말, 어머니의 여름 사망, 장례, 조의금, 다달이 3,000엔, 고베 소해정과 쌀), 【11】(1979.10.30 오쿠보의 훈장 전달), 【12】(해상자위대 이후). 2. 鈴木英隆, 「朝鮮海域に出撃した日本特別掃海隊―その光と影―」, 일본 방위연구소, nids.mod.go.jp/publication/mh_tokushu/pdf/mh001_04.pdf(자료모음 JP01) — 1952년 고토히라궁 소해 순직자 비(이름은 순직자 76명과 함께 새겨졌으나 장소·시기 표시 없음), 10월 2일 대규모 파견 명령과 「특별소해대」 이름, 10월 6일 GHQ 지령(E기만 게양, 급여 두 배), 출항 전 네 조건(38도선 남쪽, 전투 없는 항구 등), 제2소해대(노세 지휘관, MS 4척·PS 3척) 10월 8일 시모노세키 출항·10일 원산 도착, D일 10월 20일, 12일 미측 침몰 2척·전사 실종 13·부상 79, 17일 14시 30분 영흥만 소해 명령, 15시 21분 려도 등대 244도 4,500미터 MS14 침몰, 행방불명 1·중경상 18, 17일 저녁 유치도리호 긴급 회의와 정장들의 말, 18일 스미스 소장의 거부와 「15분」 통첩, MS17을 옆에 낀 귀국, 18일 자기 기뢰 코일 발견과 YMS516 침몰, 스트러블의 연기 상신과 맥아더의 무기한 연기 허가, 20일 제3소해대 도착과 21일 소해, 25일 항로 개통·26일 상륙, 백지 보상과 GHQ의 조의, 「瀬戸内海の掃海中に死んだことにしよう」(형의 증언), 1979년 훈장(훈8등 백색동엽장), 일본 소해대 원산 처분 기뢰 8개·사망 1·부상 18. 3. 인천광역시, 호국인물 소개(전쟁기념관 자료), incheon.go.kr/IC010305/1421534 — 김백일 1917년생. 4. 「원산탈환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집필 2013, 최종수정 2024.6.27), encykorea.aks.ac.kr/Article/E0040699 — 10월 10일 새벽 공격, 김백일 군단장의 목표 부여(제3사단 시가 동단 고지군, 수도사단 여왕산), 제23연대 05시 30분 공격·자주포 5대·원산조차장~73고지~원산비행장 방어선·07시 시가전,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일제 트럭 장갑차 가장 제1대대의 비행장 돌진, 전차포 3문, 두 사단의 경쟁과 두 차례 교차 진출, 송요찬·이치엽의 여왕산 기슭 지경선 다툼(군사지도 없이 일반지도 위 작전투명도), 제18연대·제26연대 정리, 학살 시체 약 600구(부둣가 수십, 신풍리 방공호 300여, 앞바다 230여), 잔류 시민 약 9만 명. 참고문헌: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9(2012) 등. 5. 영문 위키백과, 「Song Yo-chan」 — 송요찬 1918~1980. 6. Donald W. Boose Jr., 『Over the Beach: US Army Amphibious Operations in the Korean War』(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08) 제6장 「Eighth Army Moves into North Korea」「TAILBOARD (Wonsan/Iwon), 29 October–4 November 1950」, 222~226쪽, govinfo.gov/content/pkg/GOVPUB-D110-PURL-LPS113721/pdf/GOVPUB-D110-PURL-LPS113721.pdf(자료모음 NS04) — 국군 제1군단 10월 1일 이후 동해안 북진과 9일 원산 접근, 맥아더의 함흥 대안과 조이의 반대, 10월 10일 원래 계획 확정, 같은 날 국군 원산 진입·11일 확보, 워커의 소해 요청, 10일 소해 개시와 헬리콥터가 본 다섯 줄 기뢰, 「적어도 2,000발」, 12일 미 소해함 두 척·17일 일본 계약 소해정 한 척 침몰, 웨이크섬 회담(10월 15일). 7. Samuel J. Cox(미 해군역사유산사령부 NHHC 국장), 「H-055-1: Wonsan: October–November 1950」, H-Gram 055 첨부 1(2020.10), history.navy.mil/about-us/leadership/director/directors-corner/h-grams/h-gram-055/h-055-1.html(2023년 웹 보관본 web.archive.org로 열람, 자료모음 NS03) — 기동부대 편성(스포퍼드 대령 TG 95.6, 일본 계약 소해정 8척, 한국 해군 YMS 3척), 소련 장교의 10월 5일까지 기뢰 학교·삼판선과 바지선 부설·약 4,000발 가운데 3,000발 이상 원산·삼판선 선원 처형, 10일 로체스터호 헬기와 한 줄·두 줄·다섯 줄 보고, 10마일·18발, 「러시아 항로」, 12일 11시 12분 미소해 수역 진입, 대열(파이럿·플레지·인크레더블, 레드헤드·카이트, 엔디콧), 「cabbage patch」, 기뢰 13개, 12시 09분 62번 늑골 폭발·「two-car garage」·함장 30초 기절·20도와 15도 기울기·4분 침몰, 신도 해안포, 12시 20분 플레지호 피뢰와 45분 뒤 침몰, 레이테호 항공기, 인크레더블호 기관 정지, 파이럿호 77명 중 실종 6·부상 43, 플레지호 실종 6·구조 후 사망 1, 스트러블·스미스의 로언호 행, 스미스 전문(원문: “We have lost control of the seas to a nation without a Navy, using pre-World War I weapons, laid by vessels that were utilized at the time of the birth of Christ.”), 디포리스트 소령(기뢰 일련번호 11825, 초콜릿과 소녀, 짚더미 속 코일, 어부들의 기뢰 신고), 17일 MS-14 침몰과 맥아더의 보도 통제, 18일 레드헤드호 하워드 중위(원문: “suddenly the whole ocean started to erupt”)와 YMS-516(현시학 중령 Commander Sihak Hyun, 지리산함 PC-704 선두, 전사 4·실종 13), 「Operation Yo-Yo」, 250척·5만 명, 마린 피닉스호 이질, 25일 15시 진입, 26일 노란·파란 해안, 현수막(원문: “This beach is all yours courtesy of Mine Squadron THREE.”), 아몬드와 밥 호프, 26일 저녁 2만 5천 명 중 절반 이상·차량 2,000대, 엿새 지연. 8. Korean War Educator, 「Loss of the USS Pirate (AM 275)」, thekwe.org/topics/branch_accounts/navy/p_uss_pirate.htm — 하이엇·매멀런의 직진 판단, 플레지호 영 대위의 3인치 포와 키 조작, 레이테호 항공기의 네이팜·로켓·500파운드 폭탄, 파이럿호 전사 6명 명단(에이드리언 워런 존슨 포함)과 생존자 명단, 밴 뷰런 부고, 데이비스 중위 은성무공훈장 공적문(뗏목까지 끌어낸 일), 캐리코 수병 동성무공훈장 기사(All Hands 1952.2), 하이엇·매멀런 은성무공훈장, 아처 중령 공적문. 9. Lynn Montross·Nicholas A. Canzona,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ume III: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미 해병대 본부 역사과, 1957) 제2장 「ROK Army Captures Wonsan」「Two Weeks of Mine Sweeping」「Operation Yo-Yo」「Marine Air First at Objective」「Landing of 1st Marine Division」, Project Gutenberg 전자책 65009, gutenberg.org/cache/epub/65009/pg65009-images.html — 10월 10일 08시 15분 국군 제1군단 원산 진입, 원산 기뢰 약 2,000발, 12일 두 소해함 전사 13·부상 87, 19일 17시 넘어 「War's over!」 소문과 열두 시간마다의 반전, 「Operation Yo-Yo」 이름, 편지와 추리소설, 위장염·이질과 마린 피닉스호 환자 750명, 베이필드호 천연두, 아몬드의 20일 헬기 상륙과 지휘소, 10월 24일 저녁 밥 호프·메릴린 맥스웰 공연과 해병을 놀린 농담, 해병 항공대가 12일 앞서 원산 도착, 25일 저녁 LST 5척, 26일 「Doyle Day」, 39개 파, 07시 30분 전차, 09시 노란 해안. 10. 영문 위키백과, 에드워드 M. 아몬드 항목 — 에드워드 M. 아몬드 1892~1979. 11. 영문 위키백과, 밥 호프 항목 — 밥 호프 1903~2003.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나카타니 사카타로 1929년생(고베신문 【8】 「1950년 10월 17일 이틀 전에 21세가 됨」), 시마다 요시타카 1925년생(고베신문 【2】의 1940년 15세·1943년 18세, 2016년 12월 91세가 모두 1925년을 가리킨다), 어빈 밴 뷰런 1930년생(Korean War Educator에 실린 부고, 1930.4.27 출생·1948년 3월 해군 입대), 에이드리언 워런 존슨 1920년생(같은 페이지, 1920.4.23 출생; 본문에 「서른 살」로 적음), 김백일 1917년생, 송요찬 1918년생, 아몬드 1892년생, 밥 호프 1903년생. 메릴린 맥스웰은 영문 위키백과가 1921년, IMDb가 1920년으로 달라 나이를 적지 않았다. 이치엽, 스포퍼드, 하이엇, 매멀런, 영, 데이비스, 캐리코, 스트러블, 앨런 E. 스미스, 디포리스트, 하워드, 현시학, 노세, 다무라, 도일, 나카타니의 형, 오쿠보 다케오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대조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원산 진입 시각 — 백과사전은 10월 10일 05시 30분 공격·07시 시가전, 몬트로스는 10일 08시 15분 진입, Boose·H-Gram은 10일 진입·11일 확보로 적었다. 본문은 「10일 들어가 11일 저녁까지 소탕」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원산 기뢰 수 — Boose와 몬트로스는 약 2,000발, H-Gram과 Korean War Educator는 3,000발 이상으로 적었다. 본문은 스포퍼드 보고의 「적어도 2,000발」만 적었다. [자료 충돌] 12일 사상자 — H-Gram은 두 함정 합쳐 13명(실종 12, 구조 후 사망 1), 파이럿호 부상 43명, 몬트로스는 전사 13·부상 87, 鈴木 논문은 전사·실종 13·부상 79, Korean War Educator는 사상 92·실종 14와 파이럿호 부상 51로 적었다. H-Gram은 플레지호 전사자를 아홉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고 밝혔다. 본문은 파이럿호 6명, 플레지호 실종 6과 구조 후 사망 1로 적었다. [자료 충돌] MS14 침몰일과 YMS-516 침몰일 — 鈴木 논문·고베신문·H-Gram은 MS14 10월 17일, YMS-516 10월 18일, 몬트로스는 각각 18일, 19일로 적었다. 1950년 10월 22일 아사히신문은 미 해군 대변인 말로 「19일 한 척 침몰, 사망 17~18명」이라고 잘못 보도했다(鈴木 논문 주 80). 본문은 17일, 18일을 따랐다. [자료 충돌] 자기 기뢰 코일 — H-Gram은 디포리스트 소령이 어촌 짚더미에서 찾았다고(날짜는 14~16일, 기록마다 순서가 다르다고 밝힘), 鈴木 논문은 18일 북한군 기뢰 저장소 자리에서 발견되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밥 호프 공연 — 몬트로스는 10월 24일 저녁 공연, H-Gram은 26일 아몬드와 함께 해병을 맞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24일 공연만 적었다. 공연에서 한 농담의 정확한 문장은 찾지 못했다. [자료 충돌] 마린 피닉스호 — 몬트로스는 환자 750명, H-Gram은 2,000명 중 700명(입원 84명)으로 적었다. 본문은 몬트로스를 따랐다. [자료 충돌] 나카타니 장례일 — 鈴木 논문은 10월 25일 해상보안청장, 고베신문 【10】은 10월 27일 구레에서 치렀다고 적었다. 본문은 날짜를 적지 않았다. [재구성] 시마다와 나카타니의 대화는 고베신문의 시마다 회고(「元気で帰ったらまた一杯やろう」)를 대사로 옮겼다. 시마다가 부하에게 한 말, 정장의 「처분 준비」「사격 중지」, 「내지로 돌아간다」, 유치도리호 회의의 정장들 말, 스미스의 두 통첩, 나카타니 아버지의 말, 형의 1979년 소회는 기록의 뜻을 살려 다듬었다. 송요찬과 이치엽의 대사, 헬리콥터 무전의 문장, 파이럿호 함교의 보고와 「퇴함」 구령, 디포리스트와 마을 사람들의 몸짓, 와이어 고리를 붙든 시마다의 몸짓, 해병들의 「전쟁 끝났다」 외침 뒤 문장, 밥 호프 공연장의 반응, 야시로섬 마을 묘사, 원산 시가전 장면, 신도 쪽 「불빛」, 스미스 전문의 우리말 의역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밴 뷰런이 그날 물에 떠 있던 모습은 부상하고 배가 가라앉았다는 부고의 기록에서 그렸다. 북한군 해안포 쪽 기록은 찾지 못했다.

2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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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상륙작전 — 바다가 길을 막았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