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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23,073자)

38선 돌파와 평양 전투 — 북으로, 끝이 보인다는 믿음

1950 · 네오

38선 돌파와 평양 진입로, 1950년 10월 1일~20일 — 양양 기사문리 38선(국군 제3사단 10월 1일 돌파)과 원산까지의 동해안 길, 개성–금천–남천점–서흥–사리원–황주–흑교리–평양으로 이어진 미 제1기병사단·영연방 제27여단의 길, 고랑포–시변리–수안–평양으로 이어진 국군 제1사단의 길, 예성강 다리와 한포리 차단진지, 동쪽에서 들어온 국군 제7사단 제8연대, 화천–원산–양덕–순천으로 돈 국군 제6사단, 대동강과 선교리, 김일성종합대학, 10월 20일 숙천·순천 공수 낙하, 북쪽으로 빠져나간 북한군과 북한 정부. 개략도,

1950년 10월 1일 오전, 강원도 양양군의 바닷가 마을 기사문리(현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 남쪽, 38선.

땅에는 아무 금도 그어져 있지 않았다.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제3대대의 병사 하나는 그게 이상했다1. 다섯 해 동안 남과 북을 갈라 온 선이라면 말뚝이라도 줄지어 박혀 있을 줄 알았다. 눈앞에는 바닷바람에 누렇게 마른 풀과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뻗은 흙길뿐이었다.

“분대장님, 선이 어디 있습니까?”

“저 언덕에 인민군 옛 참호 보이지. 거기서부터가 북이다.”

“그럼 참호까지만 가면 넘은 겁니까?”

“걱정 마라. 넘었는지는 총알이 먼저 알려 준다.”

이틀 전 오후, 국군을 돕던 미 군사고문단의 작전장교가 탄 경비행기가 삼척 상공을 낮게 돌며 쪽지를 담은 통신통 하나를 떨어뜨렸다. 강릉에 있던 제3사단 미군 고문관 에머리치에게 닿은 쪽지에는 명령이 한 줄 적혀 있었다. 38선을 넘어 되도록 빨리 원산으로 가라2. 정찰대는 전날 이미 선 너머에 다녀왔다.

정오가 되기 조금 전, 소총중대 둘이 일어섰다. 참호를 몇 걸음 앞두고 북쪽 언덕의 옛 진지에서 기관총이 울렸다. 병사들이 마른 풀에 얼굴을 묻었다. 분대장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봐라. 알려 주잖아.”

중대는 진지를 하나씩 덮쳐 나갔다. 대열 가운데에는 군화 없이 걷는 병사가 적지 않았다. 낙동강에서부터 해안길을 걸어 올라온 발이었고, 북쪽으로 갈수록 흙길에 붉은 발자국이 늘었다2. 이튿날 제3사단과 수도사단은 38선에서 13킬로미터 북쪽 양양에 지휘소를 열었다. 미국 기자들은 국군이 선을 넘으리라 짐작하고 미리 강릉에 날아와 있었고, 미국 신문은 맥아더 사령부의 공식 발표보다 하루 앞서 그 소식을 실었다2.

여섯 해 뒤, 정부는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3.

*

10월 3일 밤 열두 시 삼십 분, 베이징,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의 관저.

인도 대사 파니카(55)는 한 시간 반쯤 자다가 집사에게 흔들려 깼다. 중국 외교부 아시아국장 천자캉이 아래층 응접실에서 기다린다고 했다4. 총리가 지금 당장 대사를 보자고 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올라가자 부인이 잠옷 차림으로 그를 붙잡았다. 이 밤중에 외교부 관리를 따라나서면 체포나 추방이 아니냐는 얼굴이었다. 파니카는 대사를 납치하는 나라는 없다고 한참 달랜 뒤에야 집을 나섰다4.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틀 전 건국 1주년 경축 행사로 들끓던 도시였다. 차 안에서 파니카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천자캉과는 경축 행사의 질서와 규율 이야기만 나누었다.

저우언라이(52)는 늘 그렇듯 차를 내오고, 늦은 시각을 사과하는 인사로 이 분을 썼다. 그다음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5.

“미국 군대가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니카가 물었다.

“미군이 이미 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디서 넘었는지는 모릅니다.”

“남조선 군대만 넘는다면요?”

“남조선 군대는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이 북조선에 들어오면 중국의 저항에 부딪힐 겁니다.”

새벽 한 시 반, 대사관에서는 일등서기관과 암호 담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보는 그날 밤 안에 뉴델리로 떠났다4. 그 내용은 같은 날 오전 런던의 영국 외무부를 거쳐 미국 대사관으로 건너갔다6. 같은 날 유엔에서 인도 대표 베네갈 라우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2.

*

10월 4일 오후 네 시, 베이징, 중국 지도부가 머무는 중난하이.

중국 서북의 도시 시안에서 정오에 비행기를 탄 장군 펑더화이(52)는 회의가 이미 시작된 방에 들어섰다7. 출병을 하면 무엇이 불리한지 하나씩 꼽아 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옆자리에서 들었다. 공업은 약하고, 공군은 없고,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낸 해방 전쟁이 끝난 지 일 년이었다. 꼽을 것은 많았다. 그 말들을 다 들은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57)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말에도 다 이유가 있소. 그래도 남의 나라가 위급할 때 우리가 옆에 서서 보고만 있으면, 어떻게 말하든 마음이 편치 않을 거요.”

늦게 온 펑더화이는 그날 말하지 않았다. 숙소로 잡아 준 호텔 베이징반점 방에는 스프링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 까닭이 푹신한 침대 탓이라고 생각해 카펫 위에 내려와 누웠다7.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강 하나 건너 조선에 미군이 앉으면 중국 동북 지방이 위태롭고, 타이완의 미군은 상하이를 겨눈다. 호랑이는 사람을 먹는다. 언제 먹느냐는 호랑이 배 사정에 달렸지, 양보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튿날 오후, 중난하이 안의 건물 이녠탕에서 회의가 다시 열렸다8. 펑더화이가 일어섰다.

“출병해서 조선을 돕는 것은 필요합니다. 싸우다 나라가 부서지면 해방 전쟁이 몇 해 늦게 이긴 셈 치면 됩니다. 미군이 압록강 가와 타이완에 버티고 있으면, 중국을 칠 핑계는 언제든 찾아낼 겁니다.”

마오쩌둥은 그를 조선으로 보내기로 했다7. 회의가 끝나고 호숫가를 걷는데,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이 먹은 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나 보군.”

*

10월 6일 밤 열 시 삼십 분, 베이징, 마오쩌둥 집무실.

소련 대사 로신이 소련 지도자 스탈린(72)의 답신을 읽어 내려갔다. 중국과 소련이 함께 미국과 싸운다는 대목에서 마오쩌둥의 얼굴이 밝아졌다9.

“전쟁을 할 거라면, 의심할 것 없이 지금 해야 합니다.”

그는 다섯이나 여섯 개 사단이 아니라 적어도 아홉 개 사단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숫자를 하나씩 꺼냈다. 그 사단들이 가진 포는 다 합쳐 108문이고 전차는 한 대도 없다. 조선 동지들 말로는 미군 군단 하나가 온갖 구경의 포를 1,500문쯤 가졌다. 미군 군단 하나를 깨려면 사람은 넷 대 하나, 장비는 셋 대 하나가 되어야 한다9. 사람은 얼마든지 댈 수 있으나 장비는 소련만 바라본다. 비행기가 없으면 상하이와 톈진과 선양 같은 큰 도시의 공장이 하늘에서 부서진다.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미군이 북쪽으로 더 깊이 들어오게 두는 편이 낫습니다. 흩어진 적은 하나씩 깨기 쉽습니다.”

자리에는 저우언라이와 통역 우슈취안, 소련 쪽 페도렌코가 있었다. 대화는 한 시간 사십오 분 걸렸다9.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와 장군 린뱌오를 이틀 뒤 스탈린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10월 8일, 중국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명의의 명령이 나왔다. “중국 동북을 지키던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고쳐, 즉시 조선 경내로 출동해 조선 동지들과 함께 침략자에게 맞서 싸우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라.” 중국군 말로 사령관인 사령원 겸 정치위원은 펑더화이였다10. 하루 전 유엔 임시 본부가 있던 뉴욕 레이크석세스에서는 유엔총회가 47 대 5, 기권 7로 결의안 하나를 통과시켰다11. 한국 전역에 안정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는 결의였다. 유엔군이 38선 북쪽으로 가는 길을 그 문장이 열어 주었다.

지원군은 새로 모은 의용군이 아니었다. 인민해방군 정규 부대인 제13병단과 그 아래 제38·39·40·42군이 이름만 지원군으로 바꿔 달았고, 변방포병사령부 아래 포병 제1·2·8사단도 같았다27. 유엔군의 싸움이 공식으로는 경찰 행동이었고, 중국도 미국·유엔과 드러내 놓고 전쟁하는 일을 피하려 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선전포고는 끝내 없었다27. 이 부대의 뿌리는 석 달 앞선 7월 13일 마오쩌둥의 명령이었다. 제4야전군 제13병단 등으로 동북변방군을 꾸리라는 명령이었고, 정원은 25만 5천여 명이었다27.

*

10월 9일 오후 세 시, 개성 서쪽 예성강 다리.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는 세 시간 동안 강 건너에 포탄을 퍼부은 뒤 C중대 1개 소대를 다리 위로 내보냈다. 길이 800야드짜리 철교는 반쯤 부서져 사람만 겨우 지날 수 있었다. 사단장 게이(56) 소장은 북한군이 일부러 다리를 남겨 둔 함정일까 봐 끝까지 망설였다. 연대장 해리스 대령과 작전장교 웨벨 대위가 매달려 허락을 받아 냈다12.

머리 위 철골이 박격포 파편을 막아 주었다. 포병이 사격을 멈추자 사상자가 빠르게 늘었다. 다리를 다 건너는 데 몇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 C중대에서만 일곱이 전사하고 서른여섯이 다쳤다12. 사흘 뒤 제7기병연대 제3대대는 황해도 금천(현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 북쪽 마을 한포리(현 북한 황해북도 평산군 한포리)의 다리를 쥐었다. 금천에 갇힌 북한군 제17·제19사단의 서쪽 출구가 닫혔다12.

사단 안에는 소문 하나가 입에서 입으로 돌았다. 평양이 마지막 목표다. 평양만 떨어지면 미군은 한국을 떠난다. 미국 명절 추수감사절 저녁은 일본에서 먹는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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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늦은 오후, 금천 동남쪽 갈림길.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30)이 지프에서 내렸을 때, 미 제5기병연대는 갈림길에서 북한군과 총을 주고받고 있었다. 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이 지도를 펼쳤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길을 나눴다. 제5기병연대가 서쪽 금천으로 꺾어질 때까지는 미군이 앞서 간다. 그다음부터 그 길은 국군 제1사단의 것이다. 제1사단은 황해도 마을 시변리(현 북한 황해북도 토산군)까지 올라가 거기서 북서쪽, 평양으로 머리를 돌린다12.

백선엽의 사단은 미군 제1군단 아래에 있었고, 군단에서 앞장서 치는 주공은 미 제1기병사단이었다. 제1사단은 트럭이 모자랐다. 보병은 능선을 타고 걸었고, 배속된 미 제6전차대대 C중대의 전차만 길로 갔다12. 백선엽은 그 방식을 한마디로 불렀다.

“노 스톱.”

나흘 뒤, 제1사단 선두는 평양에서 동남쪽으로 64킬로미터 떨어진 수안(현 북한 황해북도 수안군)에 들어섰다13. 미군 군단장 밀번(58) 소장은 그날 미 제1기병사단과 제24사단에 따로 말을 보냈다. 황해도 도시 사리원에 먼저 닿는 사단이 평양 공격의 선두를 맡는다13. 미군 두 사단이 서로를 앞지르려 길 위에서 범퍼를 맞대고 서 있는 동안, 걸어서 가는 국군 사단이 평양에 가장 가까이 가 있었다.

*

10월 12일 오후, 베이징, 중난하이.

소련 남쪽 바다 흑해 가의 스탈린 별장에서 전날 보낸 전보가 이날 오후에야 마오쩌둥의 책상에 올라왔다. 스탈린과 저우언라이가 함께 이름을 단 전보는 다섯 시간의 시차를 건너 밤중에 베이징에 닿았고, 소련 대사관과 당 중앙 사무실을 거치며 반나절을 더 보냈다14. 소련 공군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두 달이나 두 달 반은 지나야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중국도 소련도 당분간 군대를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14.

마오쩌둥은 곧바로 전보 두 통을 내보냈다. 받는 사람 가운데에는 펑더화이와, 중국 동북 지방의 당과 군을 함께 쥐고 있던 가오강(45)이 있었다. 압록강을 건널 채비를 하라던 10월 9일 명령은 당분간 실행하지 않는다. 군단 여럿을 묶은 큰 부대 제13병단은 제자리에서 훈련을 계속하고 움직이지 않는다14. 중국군 총참모장 대리 녜룽전(51)은 전보가 이 손 저 손을 거치다 늦을까 봐 저녁 일곱 시쯤 군사위원회 작전부 당직실로 뛰어 들어갔다. 수화기 너머에서 받은 사람은 안둥의 압록강 가에서 군대가 건널 나루를 살피고 있던 펑더화이였다. 녜룽전은 사정이 바뀌었으니 베이징으로 와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고만 했다14.

이튿날 정오, 펑더화이와 가오강이 베이징에 내렸다. 오후에 마오쩌둥은 여드레 전 펑더화이가 일어섰던 이녠탕으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정치국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14. 이번에 따질 것은 소련 비행기 없이도 강을 건너느냐 하나였다. 회의는 소련 공군의 도움이 당분간 없더라도 군대를 보낸다고 정했다14.

회의가 끝나자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에 가 있는 저우언라이에게 전보를 쳤다. 정치국 동지들과 의논한 결과 다들 우리 군이 조선으로 나가는 편이 이롭다고 보았다. 처음에는 남조선 군대만 상대한다. 소련이 두 달이나 두 달 반 안에 공군을 보내 준다면, 그사이 미군 폭격에 입는 손실은 견딘다. 저우언라이에게는 모스크바에 며칠 더 머물며, 무기를 어떤 방식으로 받을지와 소련 공군이 언제 어떻게 나설지를 매듭지으라고 했다14.

“싸워야 하오. 반드시 싸워야 하오. 싸우면 얻는 것이 아주 크고, 안 싸우면 잃는 것이 아주 크오.”

중국 쪽 글들은 이 문장을 이 무렵 마오쩌둥의 결심으로 옮겨 싣는다15. 그날 밤 마오쩌둥은 로신을 다시 불렀다. 미군이 중국 국경까지 올라오면 조선은 늘 중국 옆구리의 불안한 그늘이 되고, 동북은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고 했다. 지난번에 동지들이 망설인 것은 국제 정세와 소련의 원조와 하늘을 지켜 줄 비행기 문제가 분명하지 않아서였는데, 이제는 다 분명해졌다고 했다16. 첫 제대로 아홉 개 사단을 보낸다. 무기는 형편없지만 이승만의 군대와는 싸울 수 있다. 공군은 아무리 늦어도 두 달 안에 와 주기를 바란다. 무기 값은 지금 현금으로 치를 수 없으니 외상으로 달라고 했다16.

*

10월 13일 밤, 평양.

평양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43)는 모스크바에서 온 전보를 들고 김일성(38)을 찾아갔다. 북한 외무상 박헌영(50)이 함께 앉았다. 슈티코프는 전보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16. 스탈린은 흑해에서 저우언라이, 린뱌오와 만난 이야기를 적었다. 중국은 아직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북조선을 비우고, 남은 군대를 북쪽으로, 중국과 소련 땅으로 물리는 편이 낫다고 했다. 슈티코프에게는 철수 계획을 함께 세워 주라고 했다16.

김일성과 박헌영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몹시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그런 권고가 왔으니 따르겠다고 했다16. 그는 슈티코프에게 실무 권고를 하나하나 읽어 달라고 했고, 박헌영에게는 그것을 받아 적으라고 했다. 철수 계획을 같이 짜 달라는 부탁도 했다16. 그날 밤의 일을 적은 슈티코프의 전보가 평양을 떠난 것은 14일 새벽 세 시 십오 분이었다16.

그 새벽, 흑해 별장의 스탈린에게는 베이징에서 로신의 전보 두 통이 와 있었다16. 스탈린은 슈티코프에게 보낼 전보를 손으로 썼다. 중국 공산당 중앙이 다시 의논해, 중국군의 무장이 모자라도 조선 동지들에게 군사 원조를 하기로 했다. 그러니 어제 보낸 북조선 철수 전보는 잠시 미뤄 두라16. 그리고 14일, 그는 다시 전보를 보냈다. 중국 동지들이 망설임과 몇 차례의 임시 결정 끝에 마침내 군대로 조선을 돕기로 정했다. 나는 기쁘다. 앞서 알린 중국과 소련 지도자들의 회담 권고는 없던 것으로 하라. 중국군에 필요한 무기는 소련에서 보낸다16.

*

10월 11일, 평양.

김일성이 마이크 앞에서 방송 연설을 했다. 제목은 「피로써 조국의 한 치의 땅이라도 사수하자」였다. 미국이 태평양의 병력까지 끌어들여 인민군은 싸우면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인민군에게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조국의 한 치 땅을 지키라고 했다. 소련과 중국 대표 없이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는 무효라는 말도 했다25.

평양을 지킬 방어사령부는 이틀 뒤인 10월 13일에야 세워졌다. 연설 여드레 뒤인 10월 19일 평양은 넘어갔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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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 평양.

김일성(38)의 명령서가 전군에 내려갔다. 일부 지휘관이 새로운 정세 앞에서 갈피를 잃고, 명령도 없이 무기를 버리고 진지를 떠났다고 명령서는 적었다. “한 걸음도 더 물러서지 말라. 이제 우리에게는 물러설 땅이 없다.” 선동하는 자와 탈주하는 자는 직위를 가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라고 했다. 사단마다 다음 날까지 싸움에서 공을 세운 병사들로 물러나는 아군을 쏘아 막는 독전대를 꾸리라고 했다12.

그 명령이 내려가기 이틀 전, 평양 시민들은 정부 고관들의 차가 북쪽 길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17. 도시는 하루하루 비어 갔다. 북쪽으로 가는 두 갈래 길에는 짐을 진 피란민과 병사들이 한데 엉켜 있었다18. 형무소 쪽에서는 갇혀 있던 미군 포로들이 며칠 전에 밤길로 끌려 나갔다는 말이 돌았다17. 대동강 남쪽에서 포성이 가까워지는 밤이면, 문을 걸어 잠근 집 안에서 사람들은 등잔을 끄고 귀를 세웠다.

*

10월 15일 아침, 태평양 웨이크섬.

트루먼(66) 대통령이 맥아더(70) 원수에게 물었다. 중국이나 소련이 끼어들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맥아더는 숫자를 들었다. 중국군은 만주에 30만 명이 있다. 그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올 수 있는 것은 오륙만 명이다19. 한국에 공군 기지가 생겼으니 중국군이 평양까지 내려오려 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살육이 될 것이다. 그는 추수감사절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주한 미 지상군 제8군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고 싶다고 했다19.

열하루 전 베이징에서는 펑더화이가 카펫 위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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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밤, 황해도 사리원.

영국·호주 대대로 꾸린 영연방 제27여단의 스코틀랜드 부대 아가일 대대는 그날 오후 폭격에 반쯤 무너진 사리원에 들어섰다. 길가에는 굶주린 북한군 병사들이 항복할 차례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기름이 떨어진 소련제 트럭이 길섶에 버려져 있었다13.

해가 지자 도시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남쪽에서 미 제24사단에 쫓겨 올라온 북한군 대열은 사리원이 이미 떨어진 줄 몰랐다. 북한군은 영국군을 소련군으로 알았고, 영국군은 북한군을 국군으로 알았다. 북한군 한 무리가 “동무!” 하고 외치며 달려와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등을 두드리고 담배를 건넸다. 모자에서 붉은 별을 떼어 기념품으로 쥐여 주기까지 했다13.

박격포 소대장 페어리 중위는 골목을 돌다가 북한군 무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러시아 사람을 일컫는 말을 되뇌었다.

“루스키, 루스키.”

북한군 몇이 그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페어리는 다음 모퉁이를 돌자마자 뛰었다.

그날 밤 사리원 북쪽 길목에서 호주 제3대대 퍼거슨 소령은 전차 위에 올라가 어둠 속 대열에게 너희는 포위되었다고 외쳤다. 잠깐의 침묵 끝에 맨 앞의 부대가 총을 내려놓았다. 호주군은 그 길목에서 포로 1,982명을 받았다13. 밤 열한 시에는 북쪽에서 전조등을 켠 미 제7기병연대 제1대대가 포로 1,700여 명을 끌고 내려왔다. 호주 병사 하나가 옆 사람에게 투덜거렸다.

“이게 뭐야. 내일 아침 공격 준비 다 해 놨더니, 빌어먹을 양키들이 한밤중에 불까지 켜고 북쪽에서 내려오네. 북한군 전부를 포로로 달고서.”

*

10월 19일 새벽, 평양 동남쪽 마을 고저동(현 북한 평양시) 앞.

밤새 비가 내렸다. 백선엽의 사단은 전날 하루 종일 싸워 3킬로미터를 나아갔고, 평양까지는 13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미 제1기병사단의 선두는 그 무렵 50킬로미터 가까이 뒤에 있었다. 북한군은 수도에 더 가까운 국군 쪽에 더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길에는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가 깔려 있었다13.

날이 밝은 지 한두 시간 뒤, 사단은 밤새 버티던 거점 하나를 넘었다. 평양 10킬로미터 앞 고저동에서 다시 기관총이 길을 막았다. 미군 전차들이 양쪽으로 돌아 들어가 자주포를 부수고 참호를 타고 넘었다. 궤도가 기관총과 사람을 함께 짓눌렀다. 그 자리에서 죽은 북한군이 300명 가까이 되었다13.

열한 시가 조금 못 되어, 제12연대 제2대대가 대동강 남쪽 둑에 닿았다. 대동강을 건너는 다리 대동교 남쪽 입구, 선교리(현 북한 평양시 선교구역) 로터리에 다다랐을 때, 서쪽에서 미 제5기병연대 제2대대의 선두가 거의 같은 시각에 들어왔다20. 열한 시 이 분, 미 제5기병연대 F중대는 평양 남쪽 시내 무진천에 닿았다. 둑 뒤에 숨은 대전차포 세 문이 다리를 막았고, 박격포가 포수들을 쫓아낼 때까지 중대는 삼십 분쯤 묶여 있었다. 미군이 대동교 쪽으로 다가가자 북한군이 대동교의 기둥 사이 가운데 경간을 폭파했다13. 강물 위로 철근과 콘크리트가 내려앉았다.

다리를 잃은 제5기병연대 병사들은 강을 따라 동쪽으로 여울을 찾아 나섰다. 몇 킬로미터를 올라가 여울에 닿았을 때,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이미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20. 뒷날 크롬베즈가 백선엽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여울을 찾았습니까?

“나는 평양 사람입니다. 여울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그날 저녁 다섯 시, 동쪽에서 들어온 국군 제7사단 제8연대가 시내 북쪽 김일성종합대학을 손에 넣었다13. 제8연대 제3대대 제9중대장이던 김호규는 뒷날, 자기 연대가 하루 앞선 18일 저녁에 이미 대학을 점령했다고 증언했다20. 누가 먼저 들어갔느냐는 다툼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진다.

*

10월 19일 저녁 일곱 시께, 중국 도시 안둥(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다리.

가는 비가 내렸다. 강 건너에서 총포 소리가 이따금 울렸다. 한국전쟁에 들어온 중국군, 중국인민지원군 제40군의 한 중대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중대의 사상 교육을 맡은 정치지도원 왕펑허 옆에서 산둥 동향인 부지도원 왕저허우가 걸음을 늦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21. 등 뒤로 안둥 시내의 불빛이 빗속에 번져 있었다.

“이제 막 해방이 됐는데, 우리나라 산하를 아직 다 보지도 못했어.”

왕펑허가 그의 어깨를 쳤다.

“그게 뭐 대수야. 이 싸움 이기고 오면 같이 비행기 타고 보고, 기차 타고 보자고. 중국 땅 끝에서 끝까지, 질릴 때까지.”

그날 밤 제38·39·40·42군과 포병 부대가 안둥과, 그 위쪽 강가의 창뎬허커우(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족자치현 창뎬진)와 지안에서 압록강을 건넜다22.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걷는 행군이었다. 펑더화이도 그 길 위에 있었다7. 중대 정치지도원 하나가 출정에 앞서 쓴 결의문의 첫 줄은 뒷날 노래가 되었다23. “기세 높게, 당당하게, 압록강을 건너간다.”

왕저허우는 조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21.

그 결정을 중국은 지금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 부른다.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고 집과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2020년 10월 23일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대회에서 시진핑은 조선의 요청에 따라 그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고, 한 주먹을 제대로 쳐 두면 백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28.

같은 연설은 전쟁의 시작을 1950년 6월 25일 조선에서 내전이 터졌다고만 적고 누가 먼저 쳤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미국이 무력 개입을 정하고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보냈으며, 10월 초 미군이 중국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전쟁을 국경까지 끌고 왔다고 적는다28. 북한이 먼저 남쪽을 쳤다는 것은 열린 소련 문서가 보여 준다(1화).

*

10월 20일 오전 열 시, 평양 시청 앞.

국군 제1사단은 시청과 도청, 북한 행정 기관 인민위원회의 청사를 다 확보했다고 보고했다13. 지키던 북한군은 포와 참호를 버리고 흩어진 뒤였다. 백선엽은 수색대를 데리고 정부 청사와 소련군 주둔지를 돌았다. 김일성 수상 집무실 벽에는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24. 그는 주인이 떠난 책상 뒤에 잠깐 앉아 보았다.

평양 형무소는 달랐다. 안마당에 얼마 전에 죽은 수감자들의 시신이 가득 쌓여 있었다24. 냄새가 지독했다. 백선엽은 그곳에서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정오가 되기 전, 공병 보트로 대동강을 건넌 미 제5기병연대가 강 북쪽에 올라섰다. 교회들이 종을 쳤다13. 문을 걸어 잠갔던 집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길로 나왔다. 백선엽에게는 고향 가까운 도시였고, 제5기병연대 F중대에게는 96일 전 한국에 내릴 때 200명 가까웠던 중대원 가운데 다섯만 남아서 닿은 도시였다13.

*

10월 20일 오후 두 시, 평안남도 숙천(현 북한 평안남도 숙천군) 상공.

낙하산 부대 미 제187공수연대가 C-119와 C-47 수송기 113대에 나눠 타고 날아왔다17. 대공 사격은 없었다. 숙천 동남쪽 들판에 낙하산이 피었다. 연대는 북쪽으로 달아나는 북한 정부 요인과 군대를 끊고, 밤에만 천천히 북으로 움직인다는 미군 포로 열차를 붙잡을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전용기에서 낙하를 내려다본 뒤 평양 비행장에 내렸다. 기자들에게 그는 북한군 3만 명이 덫 안에 갇혔다고 말했다17.

“이것으로 적을 가두는 덫이 닫혔습니다.”

이튿날 도쿄에서 그는 전쟁이 머지않아 확실히 끝나 간다고 했다17. 낙하산이 내려앉은 들판 북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북한군 주력은 이미 평양 북쪽의 큰 강 청천강을 건넜거나 건너는 중이었고, 북한 정부는 압록강 가 만포진(현 북한 자강도 만포시)과 강계 쪽 산속으로 옮겨 간 뒤였다17. 그리고 그보다 더 북쪽, 압록강 남쪽 기슭의 숲에서는 전날 밤 강을 건넌 병사들이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료 출처

1. 국가기록원, 「전선의 변화」, theme.archives.go.kr/next/625/warChange01.do — 10월 1일~11일 군단별 38선 돌파, 10월 19일 평양 탈환. 2.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1화 출처와 같은 책) 제29장 「The Plan for Complete Victory」 — 9월 27일 합참 지시, 10월 1일 저우언라이 연설, 10월 3일 인도 대표 라우의 발언과 파니카 보고, 9월 29일 오후 삼척 상공 경비행기 통신문이 강릉의 에머리치(KMAG 제3사단 수석고문, Appleman 표기 Colonel)에게 전달, 9월 30일 정찰대 38선 월경, 10월 1일 정오 직전 소총중대 둘 월경과 옛 진지의 사격, 10월 2일 제3사단·수도사단 지휘소 양양(38선 북쪽 8마일) 개설, 미국 언론의 하루 앞선 보도와 강릉의 기자들, 제3사단 하루 약 15마일 북진·북한군 제5사단 패잔병 약 2,400명·지뢰, 「신발 없는 병사들이 피 흘리는 발로 걸었다」, 10월 10일 원산 진입. 3. 서울기록원, 「10.1 국군의 날」, archives.seoul.go.kr/photo/collection/detail/32 — 국군의 날 제정(1956). 4. K. M. Panikkar, 『In Two Chinas: Memoirs of a Diplomat』(1955) 「Korea」 장, archive.org 디지털 사본 — 10월 2일 자정 집사가 깨움, 천자캉, 부인의 걱정, 0시 20분 출발, 경축 행사 이야기, 0시 30분 저우언라이 관저, 차와 2분간의 인사, 경고 문장과 문답, 1시 30분 귀가와 전보. 5. 「周恩來與潘尼迦談話記錄」, 『周恩來外交文選』(1990) 25~27쪽, Wilson Center 디지털 아카이브 문서 260505 목록 — 저우언라이·파니카 면담의 중국 측 기록. 6. 미 국무부, FRUS 1950 제7권 문서 589(런던발 10월 3일 오전 11시),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589 — 파니카 보고의 영국 외무부 경유 전달. 7. 펑더화이, 『Memoirs of a Chinese Marshal』(1984, 『彭德懷自述』 영역본) 「Dispatching Troops to Korea」, marxists.org/archive/peng-dehuai — 10월 4일 정오 시안의 비행기, 오후 4시 중난하이 도착, 불리한 점을 꼽게 한 회의, 마오쩌둥의 말, 베이징반점 스프링 침대와 카펫, 호랑이 비유, 5일 오후 이녠탕 발언, 호숫가에서 들은 말, 10월 18일 황혼 도강. 8. 인민망, 「彭德懷大事年表(1950年—1959年)」, cpc.people.com.cn/GB/67481/71472/4844882.html — 1950년 52세, 10월 4~5일 정치국 확대회의, 10월 8일 임명. 9. 로신, 스탈린에게 보낸 암호 전보(1950.10.7), CWIHP Bulletin 14/15(자료모음 문서 18) — 10월 6일 22시 30분 면담, 「싸운다면 지금」, 9개 사단, 포 108문·전차 없음, 미 군단 포 약 1,500문, 4대1·3대1, 깊이 끌어들이기, 공군 요청, 저우언라이·린뱌오 파견, 배석자, 1시간 45분. 10. 解放軍報 2020.6.24, 共產黨員網 재게재, 12371.cn/2020/06/24/ARTI1592965770794799.shtml — 10월 8일 중국인민지원군 편성 명령 문구. 11. 미 국무부, FRUS 1950 제7권 문서 640·641,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640 — 유엔총회 결의 376(V) 10월 7일 채택, 47 대 5, 기권 7, 「All appropriate steps be taken to ensure conditions of stability throughout Korea」. 12.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같은 책 제30장 「Eighth Army and X Corps Enter North Korea」 — 10월 9일 09시 게이 소장의 공격 명령, 제7기병연대의 예성강 다리 도하(3시간 준비사격, 15시 C중대 소대 도하, 800야드 철교, 철골이 파편을 막음, 제1대대 사상 78명, C중대 전사 7·부상 36), 게이의 함정 우려와 해리스·웨벨의 설득, 10월 12일 제3대대 한포리 다리 확보, 같은 날 크롬베즈와 백선엽의 갈림길 합의(제5기병연대가 서쪽으로 꺾을 때까지 우선 통행, 이후 국군 제1사단은 시변리에서 북서쪽으로), 국군 제1사단 지원 미 제6전차대대 C중대, 10월 14일 김일성 명령(인용문·즉결 처형·독전대 편성), 10월 15일 웨이크섬 회담. 13.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같은 책 제31장 「The Capture of P'yongyang」 — 「no stop」 발언, 10월 16일 수안 진입(평양 동남쪽 직선 40마일), 밀번의 사리원 경쟁 조건, 국군·미군 사단 간 경쟁, 미 제1기병사단의 「추수감사절은 일본에서」 소문, 10월 17일 사리원의 밤(아가일 대대, 「Comrade!」와 붉은 별, 페어리 중위의 「Rusky, Rusky」, 호주 제3대대 퍼거슨 소령과 포로 1,982명, 제7기병연대 제1대대가 받은 포로 1,700여 명과 간호원 13명, 호주 병사의 말), 10월 18일 밤 국군 제1사단이 평양 8마일 앞·미군 선두 약 30마일 뒤, 북한군이 국군 쪽에 더 강하게 저항, 지뢰, 고저동(평양 6마일 앞) 전차 양익 포위와 북한군 약 300명 사망, 백선엽이 말한 제12연대 제2대대의 11시 직전 대동강 도착, 제5기병연대 F중대 11시 02분 무진천, 대동교 중앙 경간 폭파, 제15연대의 여울 도하와 백선엽의 말(원문: I am a native of P'yongyang. I know the fords.), 제7사단 제8연대 17시 김일성대학, 10월 20일 10시 시청·도청·인민위원회 청사 확보 보고, 공병 보트 도하와 교회 종소리, 10월 21일 F중대 사열(96일 전 약 200명 가운데 다섯). 14. 沈志华, 『毛泽东、斯大林与朝鲜战争』(2003) 제19장, 中文馬克思主義文庫 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szh-2003/19.htm — 10월 11일 스탈린·저우언라이 연명 전보(소련 공군은 두 달이나 두 달 반 뒤에야 출동, 중·소 모두 당분간 출병하지 않음, 리하이원·장시의 연구를 인용)와 시차 다섯 시간·12일 오후 전달, 마오쩌둥의 12일 전보 두 통(「10월 9일 명령은 당분간 실행하지 않는다」 「제13병단 각 부대는 제자리에서 훈련하고 출동하지 않는다」), 녜룽전의 저녁 일곱 시께 전화와 안둥에서 나루를 살피던 펑더화이, 13일 정오 펑더화이·가오강 베이징 도착과 오후 이녠탕 정치국 긴급회의의 결정, 13일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보(출동이 유리하다는 일치된 의견, 처음에는 남조선 군대만 상대, 두 달이나 두 달 반 안의 소련 공군, 모스크바에 며칠 더 머물 것), 스탈린이 13일 오후 김일성에게 보낸 철수 권고 전보의 요지(원문을 인용하지 않고 만수로프의 서술을 따름). 15. 求是網, 2020.10.20, qstheory.cn/laigao/ycjx/2020-10/20/c_1126632867.htm — 「應當參戰,必須參戰。參戰利益極大,不參戰損害極大。」(문서 이름과 날짜는 밝히지 않음). 같은 문장을 1950년 10월 13일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보의 끝 문장으로 옮긴 영어 번역, commonprogram.science/documents/13-10-1950.pdf. 『建國以來毛澤東文稿』 원문과는 대조하지 못했다. 인용문은 뜻을 살려 옮겼다. 16. 『CWIHP Bulletin』 6/7호(1995/96, 1화 출처 4와 같은 호), 호 전체 PDF 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media/documents/publication/CWIHP_Bulletin_6-7.pdf — 문서 18(슈티코프가 핀시[스탈린]에게, 1950.10.14, 「13일 자 지시에 따라」 김일성을 만나 박헌영이 있는 자리에서 전보를 읽음, 두 사람이 놀람, 「몹시 어렵지만 그런 권고이니 따르겠다」, 실무 권고를 읽어 달라 하고 박헌영에게 받아 적게 함, 계획 수립 도움 요청, 평양 발신 14일 03시 15분), 문서 19(로신이 필리포프[스탈린]에게, 1950.10.13 자 제2408호, 모스크바 수신 14일 01시 38분, 남쪽의 스탈린에게 전송: 미군이 국경에 오면 조선은 중국에 「어두운 점」이 되고 동북은 늘 위협받는다, 지난날의 망설임은 국제 정세·소련 원조·공중 엄호가 분명하지 않아서였고 이제 다 분명해졌다, 출병은 중국의 절대적 의무, 9개 사단의 첫 제대, 공군은 늦어도 두 달 안에, 무기는 외상으로), 문서 20(핀시가 슈티코프를 거쳐 김일성에게, 1950.10.13 자, 스탈린 손글씨: 중공 중앙이 무장 부족에도 군사 원조를 결정, 「어제 보낸 북조선 철수와 조선 군대의 북쪽 후퇴에 관한 전보」의 시행을 잠시 미루라), 문서 21(핀시가 김일성에게, 1950.10.14, 제4829호: 망설임과 몇 차례 임시 결정 끝의 최종 결정, 「기쁘다」, 중·소 지도자 회담의 권고를 취소, 중국군 무기는 소련에서). 같은 호의 만수로프 논문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 13일 오후 철수 전보(원문은 갖고 있지 않고 문서 18·20·21의 언급으로 존재를 판단, 각주 46), 13일 밤 늦게 슈티코프의 면담, 14일 03시 20분 스탈린의 로신 전보 수신, 문서 20은 14일 새벽에 써서 13일로 날짜를 앞당겼다는 판단(각주 49), 마오쩌둥이 동북의 출병 준비를 모두 멈춤. 같은 호의 바자노프 논문 「Assessing the Politics of the Korean War」 — 스탈린이 10월 12일 김일성에게 중국이 다시 거절했으니 철수해야 한다고 알림. 17. 미 육군 공식 전사, Appleman 같은 책 제32장 「Up to the Ch'ongch'on」 — 10월 20일 제187공수연대(C-119·C-47 113대, 첫 비행 약 2,800명, 14시께 숙천 낙하, 대공 사격 없음, 포로 열차 정보), 맥아더의 평양 발언(3만 명, 원문: This closes the trap on the enemy)과 이튿날 도쿄 발언(the war is very definitely coming to an end shortly), 북한군 주력은 이미 숙천·순천 북쪽, 시민들이 말한 10월 12일 정부 고관 만포진 이동, 미군 포로 대부분 사전 북송. 18. AP 종군기자 돈 화이트헤드 기사 등, The Charlotte News 1950.10.19, wjcash.org/WJCash18/Charlotte,News.Articles/10-19-50.htm — 북쪽 두 길을 메운 피란민과 병사, 거의 빈 수도, 속옷 차림으로 손을 들고 나온 북한군. 19. 미 국무부, 「Substance of Statements Made at Wake Island Conference」, FRUS 1950 제7권 문서 680,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680 — 「Very little」, 「We are no longer fearful of their intervention」, 만주 30만·압록강 도하 5~6만, 「the greatest slaughter」, 추수감사절·크리스마스. 20. 김준옥, 「6·25 '평양 최초 입성' 백선엽 아니었어?」, 노컷뉴스 2012.11.5, nocutnews.co.kr/news/4289253 — 선교리 로터리 합류 지점과 오전 11시께 도착(백선엽 회고, 중앙일보 2010.4.28 인용), 육군사관학교 『한국전쟁사 부도』(2005) 104쪽의 제15연대 도하, 김호규 증언(2010.2.16), 유재흥·정일권 증언, 국방부의 「의견이 분분」 정리. 21. 신화사 선양 2021.10.19 기사(孫仁斌·丁非白·李宇佳), 中國新聞網 재게재, chinanews.com.cn/gn/2021/10-19/9590264.shtml — 19시께 압록강 다리, 가랑비와 건너편 포성, 왕펑허·왕저허우의 대화(인용문은 뜻을 살려 옮김), 왕저허우 전사. 22. 新浪, 대사기, news.sina.com.cn/world/2000-06-23/100149.html — 압록강 도강 부대·지점. 23. 麻扶搖, 「雄赳赳,氣昂昂,跨過鴨綠江」, 共產黨員網 2020.6.24 — 출정 결의문과 노래. 24. Charles H. Briscoe, 「Republic of Korea General Paik Sun-yup」, Veritas 6권 2호(미 육군 특수전사령부 전사실), arsof-history.org/articles/pdf/v6n2_rok_sunyup.pdf — 백선엽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 김일성 집무실의 스탈린 초상화와 책상, 평양 형무소 안마당의 시신(원문: The smell was very bad), 수도에서 하룻밤만 묵음. 25. 김일성, 「피로써 조국의 한 치의 땅이라도 사수하자」(1950.10.11 방송 연설), 『Kim Il Sung Works』 vol. 6, 116~121쪽(1981) — 미국이 태평양 병력을 끌어들였다는 주장,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소련·중국 대표 없이 채택된 안보리 결의는 「무효」라는 주장. 북한의 주장이다. 26. 안문석, 「무정 숙청의 정치적 원인과 무정의 대응」, 『통일정책연구』 24권 1호(2015)가 인용한 『조선전사』 26권 79쪽 — 평양방어사령부는 1950년 10월 13일에 창설되었다. 평양 함락 날짜는 이 화의 [자료 충돌] 참조. 27. 영문 위키백과, 「China in the Korean War」 — 1950.7.13 마오쩌둥의 동북변방군 편성 명령, 지원군이라는 이름의 까닭, 중국과 미국 사이에 선전포고가 없었다는 점. 10.8 명령 본문(aisixiang.com/data/28442.html)은 『毛泽东军事文集』과 대조하지 못했다. 28. 시진핑,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대회 연설」(2020.10.23, 신화사; court.gov.cn/xinshidai/xiangqing/265561.html, 원문 확인) —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역사적 결단, 「한 주먹을 제대로 쳐 두면 백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다」, 전쟁의 시작과 38선 월경에 대한 중국 쪽 서술. 중국 공식 서술이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백선엽 1920년생(Veritas), 파니카 1895년생, 저우언라이 1898년생, 펑더화이 1898년생(인민망 연표의 「1950년 52세」), 마오쩌둥 1893년생, 스탈린 1878년생, 게이 1894년생(Hobart R. Gay, 출생일은 5월 16일과 8월 16일 두 설), 밀번 1892년생(위키백과 프랑스어판 계열, 미 육군 공식 자료로는 확인하지 못함), 김일성 1912년생, 트루먼 1884년생, 맥아더 1880년생. 천자캉, 로신, 우슈취안, 페도렌코, 에머리치, 해리스, 웨벨, 크롬베즈, 페어리, 퍼거슨, 김호규, 왕펑허, 왕저허우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나이] 이번에 더한 인물 — 가오강 1905년생, 녜룽전 1899년생(영문 위키백과·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전거), 슈티코프 1907년생(영문 위키백과, 1화와 같음), 박헌영 1900년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Article/E0021357, 1화와 같음). 김일성은 새로 넣은 10월 13일 밤 장면에서 처음 나오므로 그 자리에 나이를 달았다. [자료 충돌] 평양 최초 입성 — Appleman은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가 11시 직전 대동강에 닿았다는 백선엽의 말을 적으면서 미 제5기병연대 선두도 「거의 같은 시각」 로터리에 왔다고 적었다. 미국 신문(1950.10.19)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군보다 「세 시간」 먼저 들어갔다고 썼다. 국방일보(2003.10.9)·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상(1995)은 국군 제1사단을 유엔군 최초로 본다. 제7사단 측(김호규 증언, 칠성전우회)은 제8연대가 18일 저녁 김일성대학을 먼저 점령했다고 하고, Appleman은 19일 17시로 적었다. 유재흥은 제8연대가 먼저였다고 생각한다고, 정일권은 19일 11시 제1사단 주력과 「거의 같은 시각」 제8연대가 진입했다고 말했다. 본문은 셋을 다 적고 판정하지 않았다. [자료 충돌] 평양 함락 날짜 — 국가기록원·국방일보는 10월 19일, 매일신문 2022.5.12(김정식)는 10월 20일 새벽 제1사단의 대동강 도하와 시내 진입으로 적었다. Appleman은 19일 대동강 남쪽 진입·일부 도하, 20일 10시 시내 전역 확보 보고로 나눠 적었다. 본문은 Appleman의 순서를 따랐다. [자료 충돌] 10월 1일 돌파 부대 — 군 기념일 자료와 언론은 「제3사단 제23연대」, 일부는 「제3대대」로 적는다. 대대장·중대장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돌파 명령도 Appleman은 9월 29일 KMAG 통신문(에머리치 경유)으로, 국내 일부 정리는 9월 30일 정일권 총참모장의 강릉 구두 명령으로 적는다. 본문은 Appleman의 통신문만 적었다. [자료 충돌] 저우언라이·파니카 면담 날짜 — 파니카 회고는 「10월 2일 자정」에 깨어 0시 30분 면담, Wilson Center 목록과 FRUS는 10월 3일, 『周恩來外交文選』 원문 머리는 「十月二日」로 읽힌다는 지적이 있다. 자정을 넘긴 면담이라 본문은 「10월 3일 밤 열두 시 삼십 분」으로 적었다. 면담 장소를 파니카는 「총리 관저」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마오쩌둥의 10월 2일 전보 — 중국이 먼저 공개한 판본은 출병 결정을 알렸고, 러시아 대통령문서고에서 나온 판본(로신 경유)은 당분간 출병하지 않겠다고 했다. CWIHP는 중국 판본을 보내지 않은 초안으로 본다. 본문은 이 전보를 쓰지 않고 10월 6일 면담과 10월 8일 명령만 적었다. [자료 충돌] 압록강 도강 — 중국 공식 서술은 10월 19일 저녁(펑더화이 비밀 입조도 19일), 펑더화이 회고록 영역본은 「10월 18일 황혼」에 선두 부대와 건넜다고 적는다. 본문은 날짜를 밝히지 않고 「그 길 위에 있었다」로만 적었다. 결의문을 쓴 마푸야오의 직책을 共產黨員網은 「제26연대 제5중대 지도원」으로, 다른 보도는 「포병 지도원」으로 적는다. 본문은 「정치지도원 하나」로 적었다. [자료 충돌] 제5기병연대 F중대 — Appleman은 무진천 도착을 11시 02분, 시내 진입을 「11시 조금 지나」로 적었다. 맥아더의 F중대 사열은 10월 21일이다. 본문은 사열 장면을 쓰지 않고 숫자만 20일 장면에 두었다. [자료 충돌] 스탈린의 철수 권고 전보 — 전보 원문은 공개된 문서집에 없다. 만수로프(CWIHP 6-7호)와 선즈화는 문서 18·20·21의 언급을 근거로 10월 13일 오후에 보냈다고 보고, 같은 호의 바자노프는 10월 12일로 적는다. 손글씨 전보(문서 20)는 13일 자로 「어제 보낸」 전보를 말하지만, 만수로프는 이 전보를 14일 새벽에 쓰고 날짜를 앞당겼다고 본다. 본문은 13일 밤 면담만 날짜를 박고, 철수 전보를 보낸 날은 적지 않았다. 「저항을 계속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문장은 원문으로 확인하지 못해 쓰지 않았다. 김일성이 이 전보를 받은 곳은 밝히지 못했다. 슈티코프의 답 전보는 평양에서 나갔고, 만수로프는 김일성의 사령부가 이 무렵 강계 가까운 고산진으로 옮겨 갔다고 적는다. [자료 충돌] 흑해 회담 — 선즈화가 인용한 중국 쪽 연구는 10월 11일 스탈린·저우언라이 연명 전보가 소련 공군의 출동을 두 달이나 두 달 반 뒤로 미루었다고 적고, 스탈린이 소련 공군은 중국 땅 위에만 머문다고 못 박은 것은 13일 마오쩌둥의 전보를 받은 뒤 몰로토프를 거쳐 보낸 답이라고 적는다. 만수로프는 회담 날짜를 10월 9~10일로, 스탈린이 공군 엄호를 「주저 없이」 약속했고 연명 전보도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로신의 10월 12일 전보(제25544호, Wilson Center 디지털 아카이브 목록 요지 — 원문 미열람)는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저우언라이가 서명한 전보를 받고 그 결정에 동의했다고 적는다. 같은 날 로신 전보 제25553호(목록 요지 — 원문 미열람)는 마오쩌둥이 도강 계획을 멈추라고 명령했다고 적는다. 본문은 연명 전보와 두 달·두 달 반만 적고, 「중국 땅 위에만」은 쓰지 않았다. [재구성] 10월 1일 병사와 분대장의 대화 전부, 마른 풀과 흙길 풍경, 피 묻은 발자국 묘사(사실의 뼈대는 Appleman의 「bloody feet」), 파니카가 차 안에서 묻지 않은 마음(회고록의 서술을 줄임), 저우언라이와의 문답 문장(회고록의 간접화법을 직접화법으로 옮김), 이녠탕 발언과 마오쩌둥의 말의 한국어 문장(영역본과 중국어 보도를 대조해 옮김), 펑더화이의 밤 생각을 줄인 부분, 로신 면담에서 마오쩌둥의 표정과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이하 직접화법(전보의 간접화법을 옮김), 개성 장병들의 소문 장면 배치, 백선엽과 크롬베즈의 몸짓, 10월 14일 평양 시민들의 장면 전부(고관 이동·피란 행렬·포로 북송은 기록, 등잔을 끄는 모습은 재구성), 웨이크섬 문답의 대화 형식(문서는 진술 요지), 사리원 장면의 몸짓과 「다음 모퉁이를 돌자마자 뛰었다」, 호주 병사 말의 한국어 표현, 고저동과 선교리의 몸짓, 크롬베즈가 물은 때와 자리, 압록강 다리 위 두 사람의 몸짓, 김일성 책상에 앉은 장면의 표현(회고는 「다른 미군들처럼 책상 뒤에 앉아 보았다」), 형무소 앞에서 오래 서 있지 않았다는 대목, 문을 열고 나오는 시민들, 마지막 압록강 남쪽 숲의 장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 [재구성] 10월 12~13일 장면에서 전보가 책상에 올라온 모습, 녜룽전이 당직실로 뛰어 들어간 몸짓, 「이번에 따질 것은」 문장의 정리, 마오쩌둥 인용문의 말투(15번 출처의 문장을 뜻을 살려 옮김), 로신 면담의 「불안한 그늘」(문서 19의 「어두운 점」을 의역), 10월 13일 밤 김일성과 박헌영이 서로를 본 몸짓, 슈티코프가 전보를 소리 내어 읽는 모습(문서 18은 「읽어 주었다」까지), 스탈린 전보 세 통의 내용은 문서의 간접화법을 줄여 옮긴 것이다.

2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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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돌파와 평양 전투 — 북으로, 끝이 보인다는 믿음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