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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17,705자)

남북 비정규전 — 전선 밖에도 전쟁이 있었다

1950 · 네오

전선 밖의 전쟁, 1950년 가을~1953년 — 지리산(천왕봉·대성리 의신·빗점골), 회문산·덕유산·백운산, 남원·전주, 거창 신원면·산청 금서면, 1950년 12월 남부군 남하 경로(평강 후평리~단양~제천), 1951년 12월 백야전전투사령부의 지리산 포위(북쪽 제8사단·남쪽 수도사단), 서북도서 대화도·탄도·가도·신미도와 백령도, 1951년 11월 중국군 상륙과 11월 30일 공중전, 동해안 TF KIRKLAND의 난도(알섬)·송도·고저와 후방 기지 주문진·속초, 비고호가 떠난 묵호.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0년 9월 하순 밤, 전주에서 전북 남쪽의 산 회문산으로 가는 길.

이태(28)는 수첩을 윗옷 안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석 달 전까지 그는 서울의 통신사 합동통신의 기자였다1.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그의 자리는 북한의 국영 통신사 조선중앙통신으로 바뀌었고, 일하는 곳은 전주지사가 되었다1. 이제 지사 건물은 등 뒤에 있었고, 그는 북한 집권당 조선노동당의 전북도당 유격사령부의 행렬 끝에서 걷고 있었다1. 서울 쪽 소식은 끊긴 지 여러 날이었다. 인천에 유엔군이 내렸다는 말이 돌았고, 북으로 올라가는 큰길이 막혔다는 말이 뒤따랐다.

행렬에는 도당 간부와 지방 청년, 총을 멘 인민군 낙오병이 섞여 있었다. 낙동강에서 올라오던 병사 하나가 이태 옆으로 붙었다. 군화 앞코가 벌어져 발가락이 보였다.

“동무, 평양 가는 길이 이쪽이 맞소?”

“이쪽은 산으로 가는 길이오.”

병사는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물었다.

“산 다음에는?”

이태는 대답하지 못했다. 앞에서 간부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낮게 일렀다. 기자 동무는 수첩보다 쌀자루를 챙기라고. 이태는 자기 어깨에 걸린 것이 쌀자루가 아니라 사진기 가방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웃음이 몇 군데서 새어 나왔다가 금세 꺼졌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던 그 가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군과 지방 조직원이 남쪽의 산으로 들어갔다. 국군 전사는 10월 무렵 그 수를 2만 5천 명쯤으로 셈했다2. 이태가 들어간 산은 전북 순창과 임실 사이에 솟은 회문산이었다1. 그는 훗날 그 산의 두 봉우리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1. “이듬해 3월 사령부가 소백산맥으로 이동할 때까지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의 메카였다.”

*

1950년 9월 27일, 경남 함양의 고개 대황재.

같은 주에 북한군은 다른 방식으로 물러났다. 진주형무소에 가두어 둔 우익 인사 300여 명이 트럭에 실려 함양 서하면과 지곡면 사이 고개로 끌려왔다3. 트럭이 고갯마루에서 멈추었고, 총소리가 이틀 동안 이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그 고개에서 숨진 사람을 약 500명으로 파악했다3. 하동 금성면 갈사리 연막마을에서는 지방 좌익이 꾸린 치안대가 엄씨 집안 남자들을 수협 창고에 가두었다가 바닷가 모래밭에 묻었다. 적어도 스물여덟 명이었다3.

전선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셈하는 전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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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하순, 태백산맥 능선.

눈이 정강이까지 쌓인 능선 위로 사람 800명이 한 줄로 늘어섰다. 11월 강원도 평강의 마을 후평리(현 북한 강원도 평강군)에서 꾸려진 ‘남반부인민유격대’였다5. 유리사단 400명, 인민여단 150명, 혁명지대 60명, 사령부와 직속부대 150명. 대열 앞쪽에 이현상(45)이 있었다6. 1948년 여수·순천의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간 뒤 산에서 유격대를 이끈 남한 공산당 남로당의 간부였다7.

12월 21일 그들은 태백산맥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2. 전선은 그 무렵 다시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고 있었고, 이 대열은 전선과 나란히 산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대원 하나가 언 주먹밥을 이로 깨물다가 이를 다쳤다. 옆 사람이 그 주먹밥을 받아 돌로 깨 주었다. 12월 말 충북 단양에 닿았고, 제천에서 부대 이름이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바뀌었다2. 사람들은 줄여서 남부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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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1일 아침, 경남 거창군 신원면의 골짜기 박산골(현 경남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전날 밤에도 마을 사람들이 산사람이라 부르던 공산 유격대가 내려왔다. 그들은 쌀과 옷가지를 가져갔고, 젊은 사람 몇을 짐꾼으로 데려갔다. 신고하면 밤에 보복이 오고, 신고하지 않으면 낮에 적에게 협력한 부역자가 되었다3. 산골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겨울을 났다.

아침에는 국군이 왔다.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였다. 연대는 2월 2일 작전명령 제5호를 내렸고, 작전의 이름은 ‘견벽청야’였다8. 성벽을 굳게 지키고 들판을 비운다는 옛 병법의 말이었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골짜기로 데려갔다. 끌려가는 줄에는 아이가 많았다9. 골짜기 양쪽 비탈에 기관총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하나가 아이를 치마 속에 감싸고 엎드렸다. 총소리가 그쳤을 때 그 치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2월 7일 산청에서 시작해 함양을 거쳐 거창에서 끝난 닷새 동안, 산청·함양에서 705명이, 거창 신원면에서 719명이 죽었다10. 박산골 한 곳에서만 517명이었다10.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이 국회에서 사건을 폭로했다10. 정부가 국회에 낸 보고서에는 거창에서 187명이 죽었다고 적혀 있었고, 산청과 함양은 아예 빠져 있었다10. 연대장 오익경 대령과 대대장 한동석 소령은 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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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6월 2일 오후 세 시, 동해 묵호항(현 강원 동해시) 앞, 미 해군 고속수송함 비고호.

함장 아치 쿤츠 소령은 갑판에 모인 한국인 마흔다섯 명을 오래 지켜보았다. 북쪽 원산 남쪽 고저만 앞의 작은 섬 송도(현 북한 강원도 통천군)에 내려 줄 사람들이었다. 미 제8군이 국군에게서 넘겨받은 무리였고, 대부분은 지난겨울 흥남(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유엔군의 배를 타고 내려온 북한 사람이었다11. 누군가는 이들을 ‘밀양 유격대대’라고 불렀다11. 지난 9월 그 이름의 부대가 경북 영덕 장사동(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바닷가에 배를 대고 내렸었다.

쿤츠는 대원 하나의 수통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물이 아니라 일본 술 사케였다11.

“이걸로 섬에서 버티겠다는 거요?”

옆에 선 윌리엄 해리슨 중위가 수통을 돌려주었다. 그도 장사동에 고문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부상자와 함께 헬리콥터로 나온 사람이었다11.

“물은 섬에서 구하겠지요. 술은 거기 없을 테고.”

쿤츠는 그날 보고서에 이 한국인들이 규율이 없어 보이고 몇은 취해 있었으며 여러 수통에 물 대신 사케가 들어 있었다고 적었다11. 물속 장애물을 폭파하는 수중폭파대 헤엄꾼들이 먼저 섬을 살폈다. 적은 없었지만 상륙정을 댈 해변도 없었다. 해리슨과 무전병 둘, 한국인 마흔다섯 명이 고무보트로 바위에 붙었다. 3일 새벽 네 시에 섬에서 첫 무전이 들어왔다11. 장비 7톤을 다 올리는 데 하루가 더 걸렸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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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 중순, 전북 무주 덕유산.

산중 공터에 여섯 개 도에서 온 당 간부들이 둘러앉았다. 남부군을 이끌고 소백산맥을 넘어온 이현상이 가운데 있었고, 그 곁에 여운철이 있었다5. 이 회의 뒤로 이현상은 남한 일대의 유격부대를 총지휘하게 되었다5. 회의장 바깥에서는 대원들이 솥 하나에 감자를 삶았다. 서른 명 남짓이 그 솥을 바라보았다.

간부들이 무엇을 두고 다투었는지 회의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해 5월 5일자 빨치산, 곧 산에 든 공산 유격대의 신문 「승리의 길」 10호는 남부군 산하 부대가 충북의 수안보(현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와 칠성(현 충북 괴산군 칠성면), 청천(현 충북 괴산군 청천면)을 쳤다는 전과를 실었고, 지면의 나머지를 전투원을 북돋는 글로 채웠다12. 그 7월에 개성에서는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있었다. 산 위의 사람들 가운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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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초 자정 무렵, 송도.

조지프 울라토스키(23) 중위는 7월에 이 섬에 왔다13. 적 후방을 치는 특수부대 제5레인저중대에서 다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몸이었다. 송도는 길이 900미터, 폭 300미터의 눈물방울 모양 섬이었고, 뭍까지는 900미터였다11. 물은 늘 모자랐고 모기와 쥐가 밤을 차지했다. 본부가 있는 바위섬 난도(알섬, 현 북한 강원도 통천군)까지는 노 하나로 젓는 삼판으로 몇 시간이 걸렸다11. 그것도 바람과 물살이 허락할 때 이야기였다.

섬을 지키던 한 소령은 처음에는 울라토스키와 잘 지냈다. 보급이 오지 않자 그의 말이 날카로워졌다. 대원들에게 줄 돈을 달라고 했고, 울라토스키에게는 줄 돈이 없었다. 어느 날 낯선 동력선 한 척이 섬에 닿았다. 한 소령은 총을 든 채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떠난다고 말했다. 그 배와 작은 삼판까지 모두 떠났다. 섬에는 울라토스키와 트리츠 상병, 통역 박창운, 북한 피란민 일곱 명쯤이 남았다11.

울라토스키는 난도의 대장 코쿠멜리 소령에게 무전을 쳤다. 여기서 매달려 있다고.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이틀만 더 매달려 있게. 도움을 구해 보지.”

박창운은 그 대답을 우리말로 옮겨 달라는 피란민들 앞에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훗날 본부가 있는 난도를 ‘아무도 없는 섬’이라고 불렀다11. 며칠 뒤 해군의 12미터짜리 동력선 한 척이 섬 바다 쪽에 묶였다11.

자정이 조금 지나 섬 북쪽에서 폭발음이 났다. 소총 소리와 비명이 뒤따랐고, 곧 남쪽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울라토스키는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누가 못 봤어? 누가 안 쐈어? 누가 소리 안 질렀어?”

대답 대신 총알이 바위를 때렸다. 정찰이 아니었다. 셋은 소총을 쏘며 비탈을 내려가 동력선에 뛰어올랐고, 남은 피란민들이 뒤따랐다. 트리츠가 무기고에 미리 감아 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배가 섬을 벗어날 무렵 섬 한가운데서 탄약이 터졌다. 뒤이어 군함의 포탄이 섬에 떨어졌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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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늦가을, 고저(현 북한 강원도 통천군) 앞바다 난도.

난도는 북위 39도선 조금 아래, 뭍에서 16킬로미터쯤 떨어진 바위섬이었다11. 울라토스키는 처음 그 섬을 보았을 때 바다에서 솟은 거대한 바위 같다고 생각했다. 사방이 깎아지른 벼랑이었고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군사 기지보다는 감옥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도 섬 꼭대기에 서면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산줄기와 바닷가의 초가 몇 채까지 또렷이 보였다.

그해 가을 코쿠멜리 소령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실려 나갔다11. 유격대 사령부에서 새뮤얼 코스터 중령이 섬에 와서 새 소령을 보내겠다고 했다. 울라토스키가 말했다.

“저를 그냥 지휘관으로 두시지요. 집에 갈 점수는 진작 채웠습니다. 지휘를 맡겨 주시면 남겠습니다.”

코스터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스물넷의 중위가 동해 유격대를 맡았다13. 그가 세어 본 대원은 마흔에서 쉰 명쯤이었고, 그 수도 정확하지 않았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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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1월 29일 자정 직전, 압록강 어귀 남동쪽 바다, 대화도(현 북한 평안북도 철산군).

영국 육군 레오 애덤스액턴 소위는 해안 참호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해 6월 낙하산으로 북쪽 산에 내렸다가 살아 나온 스핏파이어 작전의 참가자였고, 이제는 이 섬을 지키는 유격대의 지휘관이었다14. 11월 초 근처 섬 가도(현 북한 평안북도 철산군)와 탄도(현 북한 평안북도)에서 밀려난 유격대가 고깃배를 타고 이 섬으로 왔다15. 며칠 전에는 북동쪽 섬 소화도(현 북한 평안북도)에 있던, 미군이 지휘하는 한국인 유격대 동키 13부대가 쫓겨 왔다15. 애덤스액턴은 그들을 모두 진지에 넣었다. 보름 넘게 밤마다 중국 폭격기가 섬을 두드렸고, 그는 그 순서를 보고 다음에 올 것을 알았다.

물 위로 접는 나무배들이 다가왔다. 박격포와 로켓을 실은 삼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영국 해병대 포격관측병 둘이 무전기를 들고 참호를 따라 뛰었다. 앞바다의 영국 구축함 코사크호가 그들이 부르는 좌표대로 4.5인치 포탄을 떨어뜨렸다15. 포탄이 해안에 몰린 사람들 한가운데 떨어졌다. 중국군은 쓰러진 자리를 넘어 계속 올라왔다. 싸움은 밤을 넘겨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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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1월 30일 오후, 대화도 상공.

중국 조종사 양주쿠이는 소련제 Tu-2 폭격기 안에서 가장 어린 승무원이었다. 한국전쟁에 들어온 중국군인 인민지원군의 공군 제8사단은 생긴 지 한 해가 안 된 부대였고, 조종사들이 받은 전투 훈련은 스무 시간이 안 되었다16. 섬에 오른 지상군이 낮 폭격을 청했고, 프로펠러 폭격기들이 압록강 북쪽 기지를 떠나 섬으로 향했다. 그 곁을 라-11 프로펠러 전투기 열여섯 대가 지켰다. 중국 쪽 보도는 그 섬을 미군과 남한의 정보 거점이라고 불렀다16.

구름 뒤에서 은빛 제트기가 쏟아져 나왔다. 미 공군 F-86 세이버 서른한 대였다15. 무전기에서 미군 편대장 벤저민 프레스턴 대령의 목소리가 터졌다. “내려가서 잡아.” 양주쿠이는 동료 비우빈이 탄 폭격기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다. 그 폭격기는 낙하산을 펴지 않고 섬 쪽으로 계속 날아가 폭탄을 떨어뜨렸다16. 중국 쪽 기록은 공중전이 구 분 남짓 이어졌다고 적는다16. 미 공군은 Tu-2 여덟 대, 라-11 세 대, 소련제 제트기 미그-15 한 대를 떨어뜨렸다고 보고했다15. 중국 쪽은 이 싸움에서 조종사와 승무원 열아홉 명을 잃었고 폭격 임무는 마쳤다고 적는다16.

섬의 참호에서 유격대원 하나가 바다로 떨어지는 폭격기의 연기를 보고 손뼉을 쳤다. 애덤스액턴은 손뼉을 치지 않았다. 하늘의 싸움은 끝났지만, 중국군은 이미 섬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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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 1일 새벽 두 시, 대화도 남쪽 끝.

구축함 코케이드호가 코사크호 곁에 와서 포를 보탰다15. 영국 해병 둘은 참호를 옮겨 다니며 포탄을 끌어당겼다. 그래도 유격대는 섬 남쪽 끝 한 귀퉁이로 밀려났다.

두 시를 조금 넘겨 섬이 떨어졌다15. 유격대원들은 배를 타거나 뗏목을 엮어 나갔다. 배를 못 구한 사람들은 썰물에 드러난 암초를 밟고 남쪽으로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걸었다. 애덤스액턴과 영국 해병 둘, 미군 찰스 브록 중사는 엄폐호에 갇혀 나오지 못했고 포로가 되었다15. 그 무렵 개성의 휴전회담장에서는 군사분계선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그 선을 그은 문서에는 서북쪽 섬들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았다15.

유격대는 한 달 안에 섬을 되찾았고, 한 해 동안 지켰다. 정전을 앞두고 그들은 그 섬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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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 2일 새벽, 지리산 북쪽 기슭.

국군 제8사단의 병사 하나가 철모 끈을 조였다. 산 남쪽은 수도사단이 맡았고, 길목마다 경찰과 저지부대가 퇴로를 막았다2. 지휘는 11월 말 전주에 사령부를 차린 빨치산 토벌 사령부 백야전전투사령부의 백선엽(30) 소장이었다17. 사람들은 이 작전을 ‘쥐잡기’라고 불렀다17. 병사가 받은 명령에는 민가 가까이에 숙영하지 말라는 줄이 있었다18.

능선 위로 올라가는 동안 병사는 불탄 집터를 셋 지났다. 주민을 마을에서 내보내는 소개령으로 주민이 떠난 마을이었다. 네 번째 마을에는 사람이 있었다. 떠나지 못한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분대장이 그들을 오래 쳐다보다가 길 아래로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무렵 토벌대가 소개 뒤 마을에 남은 노인과 여성과 아이들, 산으로 피란한 가족 단위의 주민을 빨치산으로 몰아 쏘았다고 결정했다8. 결정문은 그 살해를 법적 절차 없는 명백한 위법이라고 적었다8.

1기 작전은 12월 14일까지였다8. 1952년 1월 초 3기, 2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4기가 이어졌다17. 지리산, 백운산, 회문산, 덕유산, 백아산이 다시 뒤집혔다17. 남부군의 주력은 거기서 무너졌다19.

사령부 천막에서 참모 하나가 전과를 읽어 내려갔다. 사살 몇천, 생포 몇천. 미군 고문이 물었다.

“그중 총을 가진 사람은 몇이었소?”

참모는 노획 무기 수를 다시 읽었다. 숫자는 사람 수의 몇 분의 일이었다5. 그날 천막 안에서 그 물음에 답한 사람은 없었다. 기록마다 남은 숫자도 서로 달랐다.

그 겨울과 봄 사이 어느 날, 이태는 지리산에서 붙잡혔다. 회문산에 든 지 열일곱 달째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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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7일, 원산 남쪽 고저 부근의 눈 덮인 골짜기.

미 해군 해리 에팅어 중위는 오래된 나무 건물 앞 눈밭에 발로 삼각형을 밟아 그렸다. 그리고 신호 불을 피웠다11. 두 달 전 그가 몰던 해군 프로펠러 공격기 스카이레이더가 대공포에 맞았고, 마을 사람들이 그를 북한군에 넘겼다. 평양 심문소를 거쳐 다시 원산 근처로 끌려온 참이었다11. 동해안 유격대를 부르는 미군 작전명 커클랜드의 한 유격조가 그를 데리고 있다고 무전을 쳤고, 난도는 그 말을 믿었다11.

동쪽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날아왔다. 조종사는 순양함 로체스터호의 듀안 소린 상사였고, 커클랜드 부대장 앨버트 네일러풋 중위가 함께 타고 있었다. 네일러풋은 불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에팅어가 비틀거리며 뛰어왔고, 네일러풋이 그의 옷깃을 잡아 끌어올렸다. 헬리콥터는 조금 떠오르다가 옆으로 떨어졌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셋은 북한군 순찰대에 붙잡혔다11.

그 뒤 육지에 나가 있던 유격조들이 하나둘 소식을 끊었다. 울라토스키는 그 조들이 이미 넘어갔다고 판단했고, 구하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훗날 그 결정을 두고 ‘포도덩굴에서 말라 죽게 내버려 두었다’고 말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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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가을, 강원도 속초리(현 강원 속초시), 커클랜드 후방 기지.

태풍 캐런이 지나간 뒤 보급 장부에는 잃어버린 물건이 줄줄이 적혔다. 삼판 두 척, 천막 다섯 동, 밀 스물다섯 포대, 쌀 서른 포대, 그리고 한국 담배 천 갑. 미군 하사 하나가 장부를 넘기다 마지막 줄에서 손을 멈추었다.

“쌀은 다시 오는데, 담배는 누가 물어 준답니까?”

11월 21일 부대 이름이 바뀌었다. 커클랜드는 유엔 유격군 제3유격보병연대가 되었고, 본부는 속초리로 옮겼다11. 10월에 275명이던 한국인 대원은 이듬해 2월 3,416명, 4월에는 4,500명을 넘었다11. 연대장 앤서니 스캐넌 중령은 11월 11일 상관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상대하는 사람들은 열렬한 애국자도 산적도 아니며, 특히 새로 온 사람들은 국군에 징집되는 것보다 덜 나쁜 쪽을 골랐을 뿐이라고11. 섬에서 삼판을 타고 달아나는 사람이 늘었고, 헤엄쳐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울라토스키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뒤 고향을 되찾겠다는 북한 출신 대원들의 열기가 눈에 띄게 식었다고 기억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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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9월 18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의 골짜기 빗점골.

계곡 바위 옆에 시신 하나가 누워 있었다. 토벌대는 그것이 이현상이라고 확인했다20. 정전협정이 맺어진 지 일곱 주가 지나 있었다. 그해 여름 북에서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면서 그는 자리를 잃었다고 전해진다12. 시신은 서울로 옮겨져 사람들 앞에 놓였다가 섬진강 가에서 태워졌다6.

판문점의 서명은 산골의 총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주한 미 후방관구사령부(KComZ)는 1952년 8월 남한과 제주도에 빨치산 1,629명이 남았다고 셈했고, 그중 967명이 무장했다고 보았다17. 1953년 4월에도 1,166명이 남았고, 그달 습격이 290건이었다17. 토벌 보고는 정전 뒤 반년이 넘도록 올라왔다17.

섬과 바다의 유격대는 1953년 6월 38선 북쪽의 섬에서 모두 물러났다11. 애덤스액턴은 정전을 열하루 앞둔 7월 16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려다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었다15. 1952년 1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낙하산으로 북쪽에 떨어진 한국인 유격대원은 400명이 넘었다14. 돌아온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14.

1954년 2월, 살아남은 동키부대 지휘관 49명이 국군 장교로, 대원 460명이 사병으로 들어갔다21. 그 전에 죽거나 다친 대원에게는 군번이 없었다21. 그들의 시신은 북쪽 산골짜기나 바닷가 모래밭에 묻혔다21.

반세기가 넘게 지나 백령도(현 인천 옹진군 백령면)의 마을 진촌리의 노인 김양모는 기자 앞에서 말했다21.

“쌀과 무기만 지급받은 채 공산군에 대한 미움 하나로 목숨걸고 싸웠지만 보상은커녕 60년이 다 되도록 제대로 평가조차 받지 못해 서글프다.”

그는 백령도 전적비 앞에서 해마다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제를 지낸다고 했다21. 지리산 아래 함양 마천 사람들은 그 전쟁을 두고 다르게 말했다3. “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전쟁은 능선만큼 길고, 골짜기만큼 깊었다.” 남한의 마지막 빨치산이 붙잡힌 것은 1963년 11월이었다19.

사료 출처

1. 전북일보(2021.11.1), jjan.kr/article/20211101743188 — 이태 1922~1997, 본명 이우태, 합동통신 기자, 조선중앙통신 전주지사, 1950년 9월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를 따라 회문산 입산, 독수리부대를 거쳐 남부군 편입, 17개월, 1952년 생포, 『남부군』(1988) 인용문. 2. 박재광, 「지리산 공비토벌작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최종수정 2024.6.11), encykorea.aks.ac.kr/Article/E0054157 — 9월 총반격 뒤 낙오병 산악 잠적, 10월 무렵 2만 5천여 명 추정, 평강 일대 11월 중순 재편, 12월 21일 태백산맥 남하, 12월 말 단양 도착, 제천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 개칭, 1950.10.4~1953.5.1 토벌, 제8사단 북쪽·수도사단 남쪽·저지부대. 3. 진실화해위원회, 「경남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특별페이지(결정 2009.11.17), jinsil.go.kr/KoreanWar/31.do — 대황재(1950.9.27~28, 인민군, 진주형무소 수감자 300여 명 이송, 약 500명 희생), 하동 갈사리 연막마을(1950.8 말, 지방좌익 치안대, 최소 28명), 빨치산의 밤 식량 징발과 신고 보복, 마천애향회 인용문, 1963년 마지막 빨치산. 4. 자료모음 기획, 「특집 남북 비정규전」 자료 폴더(확인 2026.9.27) — 「남북_비정규전_에피소드와_쟁점」(조직 구분, 실종과 전사 구별, 주민 피해의 가해 주체 구분), 「출처와_원문안내」, 「북한_빨치산_전시문서_추적목록」(노획문서는 목록 수준만 확보, 본문에 인용하지 않음), 이미지 출처카드(IR07 대화도 주변지도, IR08 KIRKLAND 작전구역도, IR09 1953년 4월 빨치산 상황도를 전황도 위치 확인에 씀). 5. 양영조, 「남부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최종수정 2026.4.29), encykorea.aks.ac.kr/Article/E0066310 — 1950.11 후평리 남반부인민유격대 편성(유리사단 400·혁명지대 60·인민여단 150·사령부와 직속 150, 약 800명), 12월 제천 개편, 1951년 7월 중순 여운철과 6개 도당회의·이현상의 남한 유격부대 총지휘, 백야사 전과 1만 6천여 명·노획 무기 3천여 정. 6. 한국어 위키백과, 「이현상」 — 1905.9.27 금산 출생, 1953.9.17 빗점골 사살 추정·다음 날 발견, 시신 전시 뒤 섬진강 화장. 7. 주간경향,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weekly.khan.co.kr/article/18919 — 이현상의 이력. 8.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 사건」 특별페이지(진실규명 결정 2010.6.29), jinsil.go.kr/KoreanWar/33.do — 11사단 9연대 작전명령(1951.2.2), 견벽청야, 백야사 1기 1951.12.2~12.14,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 소개 뒤 남은 노인·여성·아이, 가족 단위 피란민을 빨치산으로 몰아 사살, 「명백한 위법」 결론, 백야사 전과 1만 3,721명(사살 6,606·생포 7,115)을 민간인 희생과 구분. 9. 매일신문(2004.9.7) 계열 보도, imaeil.com/page/view/2004090715595904602 — 거창 희생자 719명 가운데 14세 이하 어린이 385명. 10. 손호철, 「'작전명령 5호'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프레시안, 2021.3.24), 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2318150663165 — 1951.2.7~11 산청→함양→거창, 산청·함양 705명·거창 719명, 박산골 517·청연골 84·탄량골 100, 오익경·한동석·신중목, 정부 보고 187명(산청·함양 누락), 징역형 뒤 사면. 11. Jared M. Tracy, 「Working with what you have: The Challenges of Guerrilla Warfare on the Korean East Coast, 1951–1953」, Veritas 8(2)(2012), 49~61쪽, arsof-history.org/articles/pdf/v8n2_working_with_what.pdf(자료모음 IR08) — 1951.4 주문진에서 TF KIRKLAND 편성과 네 임무, 난도(남도·알섬), 「Miryang Guerrilla 'Battalion'」과 흥남 철수 북한 출신 대원(Bok 증언), 1951.6.2 비고호(함장 Archie C. Kuntze) 묵호 출발·송도 상륙·사케 수통(Kuntze 「Action Report」 1951.6.13), 6.3 04시 무전, 7톤 장비, 송도의 크기·물·모기·쥐·삼판, 한 소령의 이탈, Coccumelli와의 무전(「hang out for a couple of days」), 8월 초 자정 넘은 남북 양면 습격, 동력선 탈출·Tritz의 도화선·함포, 난도 묘사·코쿠멜리 심장마비·코스터 방문과 울라토스키의 잔류 요청, 1951년 12월 대원 40~50명, 1952.2.7 Ettinger 구조 시도(눈 위 삼각형·신호 불·소린·네일러풋·옷깃·추락·포로), 유격조 변절 의심과 「die on the vine」, 태풍 캐런(1952.9) 피해 목록, 1952.11.21 제3유격보병연대 개편과 속초리 본부, 대원 수(275·3,416·4,500 이상), 스캐넌 서신(1952.11.11), 탈영, 휴전회담 뒤 열기 저하, 1953.4.13 모집 중지·6월 38선 이북 도서 철수, 1954.3까지 국군 편입. 주 8의 Harrison 은성무공훈장 공적서(1950.9.14 장사동). 12. 서울신문, 「빨치산의 최후」(1995.10.23) — NARA 소장 빨치산 신문 「승리의 길」 10호(1951.5.5) 소개, 이현상의 강등 시기(1953년 4월). 13. Vashon Beachcomber 부고, 「Joseph Raymond Ulatoski Brig. Gen. (ret.) June 2, 1927 – March 20, 2026」(2026.4.22) — 울라토스키 1927년생. 14. Michael E. Krivdo, 「Operation SPITFIRE: No Lessons Learned」, Veritas 9(1)(2013), 19~21쪽(자료모음 IR06) — Adams-Acton의 6월 26일 제2진 낙하, 1952.1.22~1953.5.19 한국인 유격대원 400명 넘게 낙하·귀환 확인 없음. 원문은 「none were ever seen again」이며, 본문은 쟁점 문서의 원칙대로 「돌아온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로 적고 전원 사망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15. Michael E. Krivdo, 「Fight for the Northwestern Islands: September–December 1951」, Veritas 9(1)(2013), 26~27쪽, arsof-history.org/articles/pdf/v9n1_fight_northwestern.pdf(자료모음 IR07) — 11월 5일 밤 가도·탄도 상륙(Tu-2 9대·La-11 16대·MiG-15), 유격대 10마일 고깃배 철수, 11월 15일 주간 폭격, TF TAEHWA-DO 지휘관 Adams-Acton(스핏파이어 참가), 코사크호와 영국 해병 포격관측병 둘, 24~25일 가도 습격, 소화도 Donkey 13 철수, 29일 자정 직전 접는 나무배·삼판 상륙, 30일 F-86 31대와 Benjamin S. Preston Jr. 대령(「Come down and get 'em」), Tu-2 8·La-11 3·MiG-15 1 격추(미측 보고), 코케이드호, 주 9의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179~181쪽(휴전회담의 분계선 논의가 서북 도서를 언급하지 않음), 12월 1일 02시 직후 함락·배·뗏목·암초 도보 철수, Adams-Acton·영국 해병 둘·Charles B. Brock Jr. 중사 포로, 한 달 안 재점령·1년 유지 후 정전에 따라 철수, 주 11의 1953.7.16 제2수용소 탈출 시도 중 사살. 16. 央视新闻, 「70年前的今天,中美空军血战大和岛」(共产党员网 2021.11.30 게재), 12371.cn/2021/11/30/ARTI1638242328043276.shtml — 공군 제8사단 창설 1년 미만·전투훈련 20시간 미만, 오후 3시 12분께 F-86 30여 대, 약 9분(본문 「구 분 남짓」) 공중전, 비우빈(毕武斌)이 낙하하지 않고 폭탄을 떨어뜨림, 양주쿠이(杨注魁)가 최연소 승무원으로 이를 봄, 19명 희생, 제50군 대·소화도 점령 주장. 중국 측 다른 회고 기사(검색 요약)는 출동 시각을 14시 20분, 손실을 「4대 손실·4대 손상」으로 적는다. 17. 이동원, 「6·25전쟁기 후방의 탄생과 피난민의 현실: KComZ 자료를 중심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수집 NARA 기록물 리뷰』 2025 Vol.2, 10~14쪽(자료모음 IR09, 원 기록 RG 554, Entry #1333(A1), Box #203-1 및 Entry #1316(A-1), Box #2) — 1951년 11월 말 전주에 백야전사령부 설치, 12월 초~1952년 1월 초 두 차례 작전, 재잠입 산악(지리산·백운산·회문산·백아산·덕유산·운장산), 3기 1,867명 사살·1,155명 포로, 4기 2월 초~3월 중순, 「쥐잡기 작전」, 사살 5,009·생포 3,968, KComZ 1952.8.27 1,629명(무장 967·비무장 662), 1953.4.26 1,166명, 4월 습격 290건·연인원 4,464명, 정전 뒤 6개월 이상 토벌 보고. 18. psywarrior.com, 「The Republic of Korea's PSYOP Battle」 — 「민가 근처 숙영 금지」 교전 규칙. 19. 영문 위키백과, 「Operation Rat Killer」, en.wikipedia.org/wiki/Operation_Rat_Killer — 수도사단·제8사단·경찰·미 고문 약 60명, 한국 측 사살 5,800·생포 5,700, 미국 측 사살 9,000, 마지막 빨치산 생포·사살 1963년 11월. 20. 서울신문, 「빨치산 토벌(대한민국 50년:13)」(1998.3.28) — 9월 18일 새벽 작전과 이현상 사살. 21. 서울신문, 「1·4후퇴에도 백령도 사수 '군번없는 유격대'」(2010.2.6), m.seoul.co.kr/news/2010/02/06/20100206013010 — 동키부대 1951.2 중순 창설, 1954.2 지휘관 49명 장교·460명 사병 편입, 군번 없음·보상 없음, 시신을 산골짜기·모래밭에 묻음, 김양모 발언 원문, 전적비 충혼제.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이태 1922년생(전북일보 2021.11.1), 이현상 1905년생(한국어 위키백과), 백선엽 1920년생(서울신문 2020.7.11 부고 계열 보도 「1920년 11월 23일」), Ulatoski 1927년생(부고). 울라토스키는 1951년 8월 송도에서 만 스물넷이었으나 괄호 나이는 1950년 기준 셈을 따랐다. 박창운(Bok), 한 소령, Harrison, Kuntze, Coccumelli, Tritz, Adams-Acton, Brock, Ettinger, Thorin, Naylor-Foote, 오익경, 한동석, 신중목, 김양모, 양주쿠이, 비우빈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김양모는 2010년 기사에 85세, 비우빈은 중국 보도에 당시 21세, 양주쿠이는 당시 18세로 나온다). [자료 충돌] 백야전전투사령부 전과 — IR09는 사살 5,009·생포 3,968, 진실화해위원회는 사살 6,606·생포 7,115(합계 1만 3,7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살·포로·투항 합쳐 1만 6천여 명과 노획 무기 3천여 정, 영문 위키백과는 한국 측 사살 5,800·생포 5,700과 미국 측 사살 9,000을 적었다. 집계 기간·부대·민간인 포함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본문은 숫자를 하나로 정하지 않았다. [자료 충돌] 백야사 사령부 위치와 시작 — IR09는 1951년 11월 말 전주, 서울신문 1995.10.23은 11월 말 남원에 「토벌전투사령부」를 두었다고 적었다. 백과 「월비산전투」는 수도사단이 11월 16일부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IR09의 전주를 따랐다. [자료 충돌] 대화도 — 미측(IR07)은 중국군 주 상륙을 11월 29일 자정 직전, 함락을 12월 1일 02시 직후로 적었고, 중국 측 보도는 30일 폭격 뒤 제50군이 상륙해 섬을 점령했다고 적었다. 공중전 시각은 중국 측 기사끼리도 15시 12분과 14시 20분으로 다르고, 손실은 미측 격추 주장(12대)과 중국 측 「4대 손실·4대 손상」·「19명 희생」이 맞지 않는다. 중국 측 보도의 11월 6일 첫 폭격 「적 소장 지휘관 사살」 주장은 확인하지 못해 본문에 넣지 않았다. 미측 공중전 성과가 섬 방어의 성공이 아니었다는 점은 본문에 그대로 두었다. [자료 충돌] 이현상의 사망 — 9월 17일 사살·18일 발견(위키백과), 9월 18일 새벽 작전 중 사살(서울신문 1998), 「1953년 8월」(서울신문 1995)로 갈린다. 토벌대가 사살했다는 설과 북측 자객 설이 있고 안재성 『이현상평전』은 토벌대 사살로 본다. 경찰과 국군이 공을 다퉜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은 18일 시신 확인으로 적었다. 강등 시기도 1953년 4월(서울신문 1995)과 「휴전 이후」(위키백과)로 다르다. [자료 충돌] 거창 희생자 수 — 719명이 널리 쓰이는 수이나, 프레시안이 든 골짜기별 수(84·100·517)를 더하면 701명이고 나머지 18명은 연행 도중 희생(다른 보도)으로 셈한다. 정부의 1951년 국회 보고는 187명이었다. [자료 충돌] 이태 생포 — 전북일보는 1952년이라고만 적었다. 본문의 「그 겨울과 봄 사이」는 「17개월」을 1950년 9월 입산에서 센 추정이다. [자료 충돌] 송도 습격 대원과 유격조 이름 — Bok과 울라토스키는 송도 습격을 8월 초 02시께 시작된 탐색 공격과 그 뒤의 대습격으로 따로 기억했다. 에팅어를 데리고 있다고 무전한 조를 에팅어·네일러풋은 DARBY, 울라토스키는 BIG BOY로 기억했다. 본문은 조 이름을 적지 않았다. [확인 못 함] 「Park Chang Am」(TF KIRKLAND 초대 지휘관 해리슨의 한국인 상대 지휘자)이 5·16에 참여한 박창암(1921~2003)과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지 못해 본문에 넣지 않았다. 통역 「Pak Chang Oun(Bok)」의 한글 이름 「박창운」은 로마자에서 옮긴 것으로 원 표기를 확인하지 못했다. 한 소령(MAJ Han)의 이름도 기록에 없다. 대화도 상륙 중국군 부대(제50군 예하)의 연대 번호, 국사편찬위원회 노획문서 원문은 확보하지 못했다. [재구성] 이태가 수첩을 넣는 몸짓, 낙오병과의 대화, 간부의 쌀자루 농담과 사진기 가방, 대황재 고갯마루 장면의 묘사, 태백산맥 행군의 주먹밥 대목, 박산골의 전날 밤 장면과 치마 속 아이 대목(희생자 가운데 아이와 여성이 많았다는 기록 위에 쓴 장면), 쿤츠와 해리슨의 수통 대화(사케 기록 자체는 Kuntze 보고서), 박창운이 통역을 멈추는 대목, 울라토스키의 외침을 섬 위의 외침으로 둔 것(원래는 2011년 면담에서 한 말 「Who didn't see them? Who didn't fire? Who didn't yell?」), 양주쿠이가 비우빈의 폭격기를 보는 시선의 세부, 애덤스액턴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과 손뼉 치는 유격대원, 제8사단 병사와 분대장·노인들 장면, 사령부 천막의 참모와 미군 고문의 대화, 네일러풋의 속생각(「불이 너무 크다」는 Veritas가 전하는 그의 우려), 빗점골 바위 옆 시신의 묘사, 덕유산 회의장 밖 감자 솥 장면, 난도 꼭대기에서 본 풍경을 울라토스키의 눈으로 둔 것(풍경 묘사 자체는 울라토스키 서신과 Bok 서신), 코스터와의 대화 문장(뜻은 IR08 인용), 속초리 하사의 담배 농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이현상과 빨치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 「포도덩굴에서 말라 죽게」는 「die on the vine」을 옮긴 말이다.

2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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