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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18,360자)

서울 수복 전투 — 다시 넘는 문턱

1950 · 네오

서울 수복 전투, 1950년 9월 18일~28일 — 김포비행장, 행주 나루와 125고지(덕양산), 수색, 104고지와 연희고지(56·88·105고지 일대), 296고지(안산), 서대문형무소, 영등포, 마포 거리, 서울역, 남산, 신사리 나루와 서빙고, 중앙청, 348고지, 미아리고개. 미 제5해병연대·국군 해병 제1·2대대의 행주 도하와 서쪽 고지 공격, 미 제1해병연대의 영등포 점령과 마포 거리 진격, 미 제32연대·국군 제17연대의 한강 도하와 남산·348고지 공격, 9월 27일 새벽 국군 해병의 중앙청 태극기 게양, 북한군 제

1950년 9월 18일 새벽 세 시, 김포비행장(현 김포국제공항) 남쪽 끝.

활주로 남쪽 끝에서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는 세 덩어리로 흩어져 땅을 파고 있었다. 미군이 E중대를 부르는 이름인 이지 중대는 활주로 동쪽에, D중대인 도그 중대는 서쪽에, F중대인 폭스 중대는 남쪽에 엎드렸다1. 대대가 길이 1,800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활주로에 들어선 것은 전날 저녁이었다2. 대대장은 밤 여덟 시가 넘어 비행장을 「확보」했다고 보고했지만, 대대가 손에 쥔 것은 남쪽 절반뿐이었다.

활주로 너머 마을 소류리 쪽, 본진 앞에 나가 지키던 전초에서 총소리가 터졌다. 북한군 1개 중대가 데프툴라 소위의 소대로 밀려왔다. 리처드 마츠턴 병장이 참호에서 벌떡 일어나 “미 해병대다!” 하고 고함을 지르며 카빈 소총을 연발로 갈겼고, 앞줄의 북한군 열두어 명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1.

이지 중대장 재스킬카 대위는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총탄이 서쪽 도그 중대 쪽에서 온다고 여겼다. 그는 참호 밖으로 몸을 반쯤 세우고 소리쳤다.

“어이, 사격 중지! 여긴 이지 중대야!”

대답은 북한군 기관단총으로 돌아왔다. 재스킬카가 흙바닥에 도로 엎드리자 옆 참호의 병사가 말했다.

“중대장님, 도그 중대는 저런 총 안 씁니다.”

비행장을 지키던 북한군은 제1공군사단의 남은 병력과 몇 개 연대에서 긁어모은 부대였다. 그들의 보급중대는 며칠 전 병사들에게 흰 무명옷을 나눠 주었다. 일이 틀어지면 군복을 벗고 그 옷으로 갈아입어 마을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라는 것이었다1. 새벽까지 공격이 네 번 이어졌고, T-34 전차 한 대가 데프툴라의 소대를 밀어냈다. 날이 밝자 북한군은 남쪽에서 한 번 더 왔다가 물러났다. 오전 열 시, 해병대는 비행장 전체를 손에 넣었다1. 미 해병 넷이 전사하고 열아홉이 다쳤다1. 활주로 둘레에는 북한군 시체 백여 구가 남았다1.

*

9월 19일 밤 여덟 시, 서울 서쪽 한강의 옛 나루 행주 나루(현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대교 부근).

물은 미지근했다. 미 제1해병사단 수색중대장 케네스 호턴 대위는 속옷 바람으로 한강에 들어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천천히 평영으로 팔을 저었다. 강폭은 370미터쯤이었고, 오리발은 두세 켤레뿐이었다1. 수영조는 고무보트 두 척에 무기를 실어 끌었다. 건너편 강둑에서 포탄에 맞은 초가 한 채가 타고 있었고, 그 불빛이 검은 물 위에 붉게 번졌다1.

여덟 시 사십 분쯤 수영조가 북쪽 기슭에 기어올랐다1. 물가에서 한국 사람 둘과 마주쳤다. 통역으로 따라온 해군 장교 호러스 언더우드 대위가 우리말로 물으니, 둘은 서울에서 빠져나오는 길이라고 했다1. 둘레에 북한군이 보이지 않자 호턴은 무전기를 들었다.

“해병대가 상륙했다. 상황은 완전히 장악했다.”

남쪽 기슭에서 상륙장갑차들이 시동을 걸었다. 물에도 뜨고 뭍에도 오르는 궤도 차량 아홉 대의 엔진이 밤의 고요를 찢자, 강 건너 행주산성이 선 덕양산 125고지에서 박격포와 기관총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장갑차 네 대가 진흙에 박혔고, 나머지는 뱃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돌아갔다1. 붙잡혀 있던 한국 사람 둘은 달아나려다 총에 맞았다1. 해병대 쪽에서 쏜 박격포탄 하나가 짧게 떨어져 호턴을 쓰러뜨렸고, 어니스트 디파지오 중사가 수영조를 이끌고 다시 강을 헤엄쳐 건넜다1. 「완전히 장악했다」는 무전은 한 시간 만에 거짓말이 되었다.

이튿날 아침 일곱 시 조금 전, I중대인 아이 중대가 포격 뒤에 장갑차를 타고 다시 강을 건넜다. 첫 물결의 장갑차들은 철판에 총탄을 이백 발쯤 맞았다1. 중대장 매멀런 대위는 다치고도 앞장섰고, 125고지는 아홉 시 사십 분에 떨어졌다2. 고지에는 군복을 벗고 흰 옷으로 갈아입다가 죽은 북한군이 섞여 있었다1.

국군 해병 제2대대는 그 뒤를 따랐다. 대대가 탄 수륙양용 트럭은 남쪽 강가 진흙에 바퀴가 빠졌고, 해병들은 통나무를 날라 진흙 위에 깔았다1. 그 대대 제6중대 제1소대장이 박정모(23) 소위였다3. 전라남도 도초 섬(현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서 태어나 해군 신병 1기로 들어왔고, 그해 1월 해병대 간부후보생 1기로 임관한 사람이었다3. 그는 통나무 끝을 어깨로 받치며 강 건너 연기를 보았다.

*

9월 20일, 김포읍의 마을 신리(현 경기 김포시) 앞 157고지.

국군 해병 제3대대는 서울로 가지 않았다. 대대는 김포반도에 남은 북한군을 쓸어 내는 일을 맡았다4. 제9중대에서 로켓을 쏘는 대전차 무기 바주카포를 맡은 사수 김병철(21) 일병은 제주의 마을 오등리(현 제주 제주시 오등동)에서 자랐다5. 그는 인천으로 가는 배 안에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35) 대령의 방송을 들었다5. 곧 상륙작전이 시작되니 용감히 싸우라는 말이었다.

157고지에서 북한군 제107연대와 맞붙었을 때 총탄이 김병철의 오른쪽 무릎 위를 뚫었다5. 중대는 밀려 내려갔고, 그는 혼자 남았다. 탄창에 남은 실탄은 다섯 발이었다. 그는 다섯 발을 아껴 가며 네 시간을 버텼다5.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짓가랑이를 적셨다가 말라붙었다. 해가 기울 무렵 비탈 아래에서 발소리가 났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사람 살려라!”

어둠 속에서 날 선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암호!”

피를 쏟는 사람에게 돌아온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그래도 그 목소리는 우리말이었다. 김병철은 김포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에 실려 일본 후쿠오카로 갔다5. 이틀 전 북한군이 흰 옷을 받아 둔 바로 그 활주로였다.

*

9월 21일 밤, 서울 서대문 쪽의 산 안산 296고지 남쪽 비탈, 북한군 제25여단.

기관총 사수는 비탈 안쪽으로 파 들어간 구덩이 속에 엎드려 있었다. 머리 위 흙이 처마처럼 튀어나와 공중에서 터지는 포탄 파편을 막아 주었다2. 일본군이 훈련장으로 쓰던 산이었고, 해방 뒤에는 국군이, 석 달 전부터는 인민군이 같은 비탈에서 훈련했다2. 콘크리트로 다진 굴 안에 탄약 상자가 쌓여 있었다2.

여단은 한 달 전 철원에서 만들어졌다2. 9월 15일 인천 소식이 오자 기차를 탔고, 나흘 뒤 서울에 내렸다2. 여단장 월기찬 소장은 소련에서 공부했다고 알려진 사람이었고,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의 나이를 마흔다섯으로 적었다2. 장교와 하사관 대부분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운 내전에서 싸워 본 사람들이었다2. 이 산줄기를 따라 중기관총 쉰 정이 넘게 박혀 있었고, 총구들이 서로의 사각을 메웠다2. 옆 능선에는 황해도 도시 사리원에서 온 제78독립연대가 들어왔다1. 서울 방어의 총책임은 서울방위사령관 최용건이 쥐고 있었다6.

강 건너 영등포(현 서울 영등포구)의 제18사단 진지에는 구호가 돌았다1. “영등포를 잃으면 서울도 떨어진다.” 9월 19일에는 탈영했다가 붙잡힌 병사들로 대대 하나를 새로 꾸려 전선에 보냈다1. 미 해병대 기록에 따르면 북한군은 그 대대를 「갱생대대」라고 불렀다1. 사수는 서쪽 동네 수색(현 서울 은평구 수색동) 쪽 들판을 내려다보며 노리쇠를 당겼다.

*

9월 23일 아침 일곱 시, 104고지, 국군 해병 제1대대.

대대장 고길훈 소령의 명령은 짧았다7. 104고지에서 나가 정면의 56고지를 쳐서 줄을 바로잡으라는 것이었다. 미 제5해병연대의 두 대대는 양옆에서 사격으로 거들기로 했다. 지금의 연희동과 신촌 사이에 엎드린 그 낮은 봉우리들을 한국 해병은 「연희고지」라고 불렀다7.

제3중대의 신병 계급 견습수병 강대현은 둘레를 둘러보았다. 중대원 상당수가 제주에서 온 학도병이었고, 실탄을 사람에게 쏘아 본 적이 거의 없는 얼굴들이었다8. 공격이 시작되자 56고지 비탈의 구덩이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탄과 박격포탄이 그 위로 떨어졌다. 해병들은 바위 하나, 무덤 하나를 넘을 때마다 사람을 잃었다. 미 해병대 공식 전사는 그날을 이렇게 적었다. 한국 해병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곧 막혔고, 조금 나아간 대가로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다1. 그날 하루 대대에서 서른두 명이 전사하고 예순여덟 명이 다쳤다7. 전날에는 열한 명이 전사하고 마흔다섯 명이 다쳤다7.

오후에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가 그 자리를 넘겨받았다. 강대현은 고지를 넘은 뒤 지금 연세대학교인 연희대학교 교정에 들어갔다. 석조 건물 언더우드관 지하에 숨어 있던 북한군은 퇴로가 막히자 별 저항 없이 손을 들고 나왔다8.

*

9월 24일 오후, 56고지,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 도그 중대.

아침 안개 속에서 도그 중대의 선두는 북한군 참호에 코가 닿을 만큼 다가가서야 적을 보았다. 수류탄이 오갔다. 로버트 스미스 병장의 분대가 고지 남쪽 끝을 돌아 들어갔다가, 분대장과 여덟 명이 전사하고 다친 세 명만 기어 돌아왔다1. 칼 사이델 중위는 총탄 속을 다섯 번 오가며 탄약을 날랐다1. 안개가 걷히자 북한군의 자동화기와 박격포가 더 세졌다.

오후 들어 중대장 H. J. 스미스 중위가 남은 병력을 셌다.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 마흔네 명이었다1. 비탈 위 마지막 140미터를 서른세 명이 뛰어오르고, 열한 명이 기관총과 탄약을 들고 따르기로 했다. 신호는 하늘에서 오기로 했다. 갈매기 날개를 단 해병대 전투기 코르세어가 폭탄과 불붙은 기름을 쏟는 네이팜탄을 다 퍼붓고 나서, 쏘지 않고 낮게 두 번째로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기체가 고지를 스치자 서른세 명이 구덩이에서 튀어나와 가로로 90미터쯤 늘어선 줄을 지어 달렸다. 스미스 중위는 맨 앞에서 쓰러졌다. 나머지는 멈추지 않았고, 스물여섯 명이 꼭대기에 닿았다2. 북한군 일부는 뒤쪽 비탈로 달아났고, 일부는 죽은 척했고, 일부는 끝까지 쏘았다. 맨손으로 셋을 쓰러뜨린 웰던 해리스 상병은 후송을 두 번 거절했다가 그날 숨졌다1.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날 도그 중대 206명 가운데 176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었다2. 제1해병사단이 서울 작전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사람을 잃은 날이 9월 24일이었다2.

*

9월 24일 오후 두 시, 영등포 로터리.

길바닥 회의에는 천막도 의자도 없었다.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58) 소장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의 경계를 바꾸고, 제7사단 제32연대가 국군 제17연대를 붙여 내일 아침 여섯 시에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2.

제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57) 소장은 말이 없었다. 전날 알몬드는 그에게 해병이 정면 공격만 고집하지 말고 강 남쪽으로 돌아 들어가라고 했고, 스미스는 해병 연대들을 강 북쪽에서 한데 묶겠다며 거절했다. 알몬드는 하루를 더 주겠다고 했다. 그 하루가 지났다2. 맥아더는 서울을 되도록 빨리 대한민국 정부에 돌려주고 싶어 했고, 인천에 내리기 전 알몬드에게 닷새면 서울에 들어갈 것이라고 장담한 적이 있었다2. 회의는 몇 분 만에 끝났고 지휘관들은 흩어졌다.

9월 25일 아침 여섯 시 반, 한강 남쪽의 옛 나루 신사리 나루(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미 제32연대 제2대대가 상륙장갑차를 타고 안개 덮인 강으로 들어갔다. 건너편은 한강 북쪽 기슭 서빙고(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였다.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북쪽 기슭에 닿은 대대는 벼랑을 기어올라 남산으로 붙었고, 오후 세 시 꼭대기를 쓸어 냈다2. 그 뒤를 국군 제17연대장 백인엽(27) 대령의 연대가 건넜다. 연대는 서울 동쪽으로 돌아 밤 아홉 시 오십 분 348고지로 밤새 공격을 시작했다2. 이튿날 오후, 348고지와 292고지에 국군이 올라섰다2.

*

9월 25일 밤 여덟 시 사십 분, 제1해병사단 지휘소.

전신 타자기 텔레타이프가 찍어 낸 종이를 작전참모 알파 바우저 대령이 찢어 들었다. 군단장 명의의 긴급 전문이었다. 적이 서울에서 북쪽 길로 달아나고 있으니 즉시 목표 끝까지 공격을 밀어붙여 적을 최대한 섬멸하라는 내용이었다2. 바우저는 적이 달아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군단 작전참모에게 전화를 걸었고, 명령대로 공격하라는 답을 들었다2.

스미스 소장이 군단 참모장 러프너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도 적이 서울을 떠난다고 보지 않았고, 처음 보는 큰 도시에서 밤에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러프너는 알몬드가 그 문장을 직접 불러 주었다고 했다1. 밤 열 시, 스미스는 제1해병연대장 루이스 풀러(52) 대령과 제5해병연대장 레이먼드 머리(37) 중령에게 명령을 넘겼다. 밤에도 알아볼 수 있는 큰길을 따라가고, 연대끼리 반드시 손을 잡으라는 말을 붙였다2.

새벽 한 시 오십삼 분, 제1해병연대 제3대대가 급전을 보냈다2. 전차를 앞세운 적이 막 덮쳐 오고 있었다. 북한군 칠백여 명이 전차 열두 대와 제 힘으로 달리는 대포 자주포 두 대를 앞세워 큰길 한복판으로 내려왔다. 해병의 포탄이 길을 덮었고, 앞선 전차는 해병이 길에 깐 지뢰를 밟았다. 불타는 건물들이 거리를 대낮처럼 밝혔다. 날이 밝았을 때 길 위에는 북한군 시체 이백오십 구와 부서진 전차 넷, 자주포 둘이 남았다2. 그 밤 북한군 제18사단의 남은 오천여 명은 의정부 길을 따라 북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2. 반격은 그 철수를 덮는 칼이었다.

자정 무렵 알몬드는 이미 서울 해방을 발표했다2.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 지 꼭 석 달째 되는 날이었다. 26일 오후 두 시 십 분, 맥아더는 서울이 다시 우방의 손에 들어왔다는 유엔군사령부 발표문에 서명했다2. 그 시각 마포(현 서울 마포구) 거리에서는 해병들이 한 블록씩 피를 흘리고 있었다.

*

9월 26일, 마포 거리.

이삼백 미터마다 길을 가로막는 벽이 서 있었다. 흙을 채운 쌀가마니를 사람 키보다 높게, 두께 1.5미터로 길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쌓아 올린 벽이었다1. 그 뒤에서 대전차포가 길을 겨누었고, 지붕과 창문에서 저격수가 쏘았다. 벽 앞 길바닥에는 대전차 지뢰가 깔려 있었다. 해병은 차례를 정해 하나씩 부쉈다. 공병이 지뢰를 걷어 내는 동안 보병이 옆에서 엄호했고, 지뢰가 걷히면 M26 퍼싱 전차 두세 대가 다가가 포로 벽을 허물었다. 벽 하나에 대대 하나가 한 시간씩 묶였다2.

길 양쪽 건물이 타면서 뿜어내는 열기가 철모 아래로 스며들었다. 무너진 벽돌 더미 속에서는 몸을 웅크린 서울 사람들이 자꾸 나왔다1. 여자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해병들은 그들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가 내리기를 되풀이했다. 풀러 대령은 그날 진척이 고통스러울 만큼 느리다고 보고했다1.

서울 서북쪽 거리에서는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G중대인 지 중대가 기관총에 묶여 엎드려 있었다. 탄약수 유진 오브레곤(20) 일병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란 멕시코계 청년이었다9. 길 한복판에 전우 하나가 맞아 쓰러졌다. 오브레곤은 권총 한 자루만 쥐고 뛰어나가, 한 손으로 권총을 쏘며 다른 손으로 전우의 팔을 잡아 길가로 끌어냈다. 그가 상처를 감는 사이 북한군 1개 소대가 다가왔다. 오브레곤은 쓰러진 전우의 카빈을 집어 들고 그 앞에 자기 몸을 방패처럼 세운 채 쏘았다. 기관총탄이 그를 쓰러뜨렸다9. 뒤따라온 해병들이 끌어낸 부상자는 살았다. 버트 존슨 일병이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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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새벽, 광화문 뒤의 정부 청사 중앙청(현 경복궁 흥례문 자리).

박정모 소위의 품에는 접힌 태극기가 있었다10. 대대장 김종기(24) 소령이 신현준 사령관의 허락을 받고 붓으로 글씨를 써서 건넨 깃발이었다11.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 대한민국 만세.」 중앙청은 미 제5해병연대가 맡은 구역이었다12. 종군기자 박종환은 이승만(75) 대통령이 중앙청에는 국군이 먼저 태극기를 꽂기를 바란다는 말을 그에게 전했다13.

박정모의 소대는 밤을 틈타 광화문 쪽으로 파고들었다. 전날부터 중앙청 안팎에서 불길과 연기가 솟아 건물에 다가가기가 어려웠다10. 소대장과 부사관 계급 이등병조 양병수, 최국방 견습수병이 연기 속 계단을 더듬어 꼭대기 돔으로 올랐다3. 일본이 조선총독부로 지은 그 석조 건물의 돔 양쪽에서는 북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은 돔 난간에 태극기를 묶었다. 여섯 시 십 분이었다3. 서울을 내준 지 석 달 만에 그 돔 위로 태극기가 올라갔다14.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중앙청에 들어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광화문 네거리의 마지막 바리케이드를 화염방사 전차가 태워 버리자, 지 중대는 넓은 길을 걸음이 닿는 대로 빨리 걸어 중앙청 앞뜰로 들어갔다. 오후 세 시 팔 분, 그들은 앞뜰 양쪽 게양대에서 북한 깃발을 끌어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2. 건물 안에는 따뜻한 밥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2. 미 해병대 공식 전사는 이날을 해병대 두 부대의 「깃발 올리기 경쟁」이라고 불렀다1. 그 경쟁은 마포 쪽 미 제1해병연대가 프랑스·소련·미국 영사관에 차례로 성조기를 올린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2. 같은 책에 국군 해병의 태극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1.

쉰여덟 해 뒤, 여든세 살의 박정모는 라디오 기자에게 말했다12. “그때 내 생각은 우리 심장부인 중앙청에 외국군 손에 의해서 태극기를 게양하면 국민들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그래서 내가 우군의 동의 없이 미리 앞질러 가서 태극기를 게양한 거에요.”

같은 날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들어간 미 해병 이지 중대에게 한 서울 사람이 다가왔다. 닷새쯤 전까지 이 감옥에 미군 포로 사백여 명이 갇혀 있었는데, 인민군이 모두 북쪽으로 끌고 갔다고 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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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정오, 중앙청 국회의사당.

맥아더는 군악대도 의장대도 부르지 않았다1. 군악대원들은 이미 소총을 들고 있었다. 의사당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오스트리아 태생의 부인 프란체스카, 각료와 유엔군 장성들이 앉았다. 둘레를 풀러 연대의 해병들이 굳은 얼굴로 둘러쌌다1. 그날 새벽에도 서울 동북쪽 132고지에서는 북한군이 해병 진지를 덮쳤다. 적의 기척을 귀로 살피는 맨 앞 초소에 혼자 남은 스탠리 크리스천슨(25) 일병이 일곱을 쓰러뜨리고 전사했다15.

맥아더는 오 분쯤 말했다. 그는 유엔군사령부를 대표해 이 정부 청사를 대통령에게 돌려드리니 여기서 헌법이 맡긴 책임을 다해 달라고 했다2. 그가 말하는 동안 금이 간 유리 천장에서 유리 조각이 떨어졌다. 연기와 재가 의사당 안으로 흘러들었고, 멀리서 소총 소리가 연설 사이를 끊었다1. 연설이 끝나자 맥아더는 참석자들과 함께 기독교의 기도문인 주기도문을 외웠다2.

이승만이 일어섰다. 그는 준비한 원고에서 눈을 떼고, 두 손을 내밀어 쥐었다 폈다 하며 미군 쪽을 보고 말했다. “여러분에게, 그리고 한국 국민에게 이 끝없는 고마움을 내가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시 삼십오 분, 맥아더는 김포에서 도쿄로 날아갔다2.

*

9월 하순~10월, 서울 북쪽 동네 정릉리(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37)은 피란을 가지 못했다. 한강 다리가 끊긴 뒤 석 달을 정릉 골짜기 집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그는 그 석 달을 날마다 일기에 적었다16. 명륜동 어귀에서 본 인민재판도 거기 적혔다. 인민군 병사가 끌려 나온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반동분자요, 아니요?” 하고 묻자, 군중 속에서 “악질 반동분자요” 하는 소리가 나왔다17. 9월 첫날 그는 이렇게 썼다18. “이 한여름을 살아낸 일을 생각하니 꿈같다. 꿈 중에도 악몽이다.”

그 악몽은 끝날 무렵 가장 짙었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북한군이 서울에서 쫓겨나기 전 국군 장병과 경찰, 유격대원의 가족에게 끔찍한 보복을 했다고 적었다2. 미 해병들은 서울역 한구석에서 처형당한 여자와 아이들의 시신을 찾았다1. 1952년 정부가 만든 북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명부인 피랍치자 명부에는 8만 2,959명의 이름이 올랐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서울에서 그해 여름과 가을에 끌려갔다19.

국군이 돌아오자 칼끝이 반대로 돌았다. 한강을 건너 피란했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애국자 대접을 받았고,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은 적에게 협력하는 부역을 했는지 따지는 심사대에 섰다20. 국군과 경찰은 부역 혐의자를 잡아들였고, 재판 없이 쏘아 죽인 일도 있었다21.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했고, 11월 중순까지 오만여 명이 붙잡혔다22. 김성칠도 대학의 부역 심사를 거쳐서야 강단으로 돌아갔다. 10월 9일, 교수들의 심사위원회를 지켜본 그는 일기에 썼다18.

“문리대여, 너는 그러고도 대학의 대학임을 자랑하려느냐.”

사료 출처

1. Lynn Montross·Nicholas A. Canzona,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ume II: The Inchon-Seoul Operation」(미 해병대 역사과, 1955, 18화 출처와 같은 책), 전문 gutenberg.org/cache/epub/65008, 쪽수는 원본 인쇄 쪽 — 157~164쪽 김포(세 중대 거점, 소류리 전초, 마츠턴 병장의 외침 「United States Marines!」, 재스킬카 대위의 외침 「Hey! Cease fire, you guys, this is Easy Company!」, 북한군 제1공군사단 잔여와 흰 옷 지급, 네 차례 공격과 T-34, 18일 10시 확보, 해병 전사 4·부상 19, 북한군 사망 100·포로 10), 187~200쪽 행주 도하(강폭 약 400야드, 미지근한 물, 속옷 차림, 오리발 두세 켤레, 고무보트 두 척, 불타는 초가, 20시 40분 상륙, 서울에서 빠져나오던 한국인 둘과 통역 언더우드 대위, 호턴의 무전 「The Marines have landed and the situation is well in hand.」, LVT 시동 뒤 사격, 네 대 좌초, 포로 둘 사망, 호턴이 아군 4.2인치 박격포탄에 쓰러짐, 디파지오 중사, 20일 아이 중대 06시 50분·첫 물결 약 200발 피탄·매멀런 대위 부상·흰 옷으로 갈아입던 북한군, 국군 해병 제2대대의 수륙양용 트럭 좌초와 통나무 길), 204쪽 국군 해병 제1대대의 104고지, 205쪽 영등포 구호(원문: If Yongdungpo is lost, Seoul also will fall), 233~250쪽 제78독립연대(박한린 대령)·제25여단(4,000~5,000명)·23일 07시 국군 해병의 56고지 공격(원문: Although the KMCs made a valiant effort, they were soon stopped cold. Only slight gains resulted at an excessive cost in casualties)·24일 도그 중대(로버트 스미스 병장 분대 9명 전사·3명 생환, 사이델 중위 탄약 다섯 차례, 44명, 26명, 해리스 상병), 261~263쪽 25일 밤 전문과 스미스의 반대, 271~272쪽 「Battle of the Barricades」(200~300야드마다, 높이 약 8피트·두께 약 5피트 쌀가마 벽, 공병·전차·보병, 불타는 건물의 열기와 잔해 속 민간인, 풀러 보고 「progress was agonizingly slow」), 273쪽 서울역의 여성·어린이 시신, 277~279쪽 27일(15시 08분 중앙청, 「flag-raising contest」), 283~284쪽 29일(맥아더가 군악대·의장대 취소, 포니 대령의 기록 「Occasional falls of glass from the dome and drifting smoke and ashes were part of the scene… Unheeded noise of rifle shots punctuated the talks. Grim Marines from Puller's regiment surrounded the seated audience」), 부록 H 북한군 편성(제18사단 「서울 방어 사단」, 9월 19일 탈영병 「Rehabilitation Battalion」). 2.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1화 출처와 같은 책),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18화가 쓴 장의 끝부분: 김포비행장(9월 17일 18시 도착, 지뢰 없음, 18일 02시~새벽 중대 규모 역습, 오전 확보, 활주로 6,000피트), 북한군 제18사단·제70연대의 서울 투입. 제26장 「The Capture of Seoul」: 맥아더의 닷새 장담과 아몬드의 두 주 답변, 수영조 14명(19일 20시), 아이 중대 06시 45분 도하·125고지 09시 40분, 제25여단(한 달 전 철원 창설, 15일 기차 출발·19일 도착, 여단장 월기찬 45세·소련 유학, 약 2,500명, 장교·하사관의 중공군 경력, 안쪽으로 판 구덩이·콘크리트 굴·중기관총 50정 이상, 일본군 훈련장), 제78독립연대, 22일 국군 해병 대대의 손실과 제25여단 하루 손실 40퍼센트(포로 진술), 24일 도그 중대(안개, 분대 전멸, 코르세어 두 번째 빈 비행 신호, 33명 돌격·26명 도달, 스미스 중위 전사, 206명 중 176명 사상), 23일 아몬드의 24시간 통고, 24일 14시 영등포 로터리 야외 회의, 25일 06시 30분 제32연대 제2대대 신사리 나루 도하(무손실, 안개)·15시 남산 정상·제17연대 21시 50분 348고지 야간 공격·26일 348·292고지 점령, 25일 20시 40분 군단 긴급 전문(인용문 요지)·바우저·러프너·22시 하달, 01시 53분 급전·북한군 약 700명·전차 12대·자주포 2대·시체 250구·포로 83명, 제18사단 약 5,000명의 의정부 길 철수와 엄호 역습, 25일 자정 전 아몬드의 해방 발표, 26일 14시 10분 유엔군사령부 발표문 제9호, 바리케이드(가슴 높이·교차로·대전차 지뢰)와 부수는 순서·벽 하나에 대대 한 시간, 27일 광화문 네거리 화염방사 전차·지 중대 「as fast as they could walk」·15시 08분 성조기·사자 뜰 양쪽 게양대·따뜻한 음식, 프랑스 대사관(11시 직전)·소련 대사관(15시 30분)·미국 대사관(7분 뒤)과 뉴욕 타임스 기자 존스턴의 안내, 서대문형무소 미군 포로 약 400명(닷새 전 이송, 한국 민간인 진술), 29일 10시 김포 도착·12시 국회의사당·프란체스카·주기도문·유리 조각·이승만 발언(원문: How can I ever explain to you my own undying gratitude and that of the Korean people?)·맥아더 발언(원문: In behalf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I am happy to restore to you, Mr. President, the seat of your government that from it you may better fulfill your constitutional responsibilities)·13시 35분 출발, 북한군의 보복(원문: the North Koreans had taken ghastly revenge on men, women, and children in the families of South Korean soldiers, policemen, and guerrillas), 제1해병사단 피해(24일 하루 285명이 최대). 3. 무적해병신문, 「해병대정신으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다」(2019.9.16, 전쟁기념관 2019년 9월의 호국인물), rokmc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4220 — 박정모 1927.3.20 전남 무안군 도초면(현 신안군) 출생, 해군 신병 1기, 1950.1 해병대 간부후보생 1기 소위,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 27일 06시 10분 돔 난간 게양, 함께한 대원 양병수 이등병조·최국방·정영검 견습수병. 4. 무적해병신문(2022.5.25), rokmc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6370 — 국군 해병 제3대대의 김포반도 소탕 임무. 5. 무적해병신문(2021.8.2), rokmc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5862 — 김병철 1929년 6월 제주 오등리 출생, 제3대대 제9중대 화기소대 바주카포 사수, 「신현준(대령)」의 함내 방송, 9월 20일 김포읍 신리 앞 157고지 북한군 제107연대와 교전, 오른쪽 무릎 위 총상, 실탄 5발·네 시간, 「사람 살려라」와 「암호!」, 김포비행장에서 후쿠오카로 후송. 6. 한국학중앙연구원, 「KRPIA 인물 정보」 최용건, krpia.co.kr/knowledge/people/main?idx=19098 — 최용건의 서울방위사령관 직위. 7. 김희철, 뉴스투데이(2020.9.17), news2day.co.kr/article/20200917160817 — 국군 해병 제1대대 대대장 고길훈 소령, 연희고지, 첫날 전사 11·부상 45, 이튿날 전사 32·부상 68·실종 1. 8. 연세춘추(2024.5.6), 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31162 — 강대현(당시 견습수병, 제1대대 제3중대), 제주 출신 학도병, 언더우드관 지하 북한군의 항복. 9. 미국 명예훈장 공적서 유진 오브레곤(영문 위키백과 「Eugene A. Obregon」에 실린 전문, 미 해병대 역사과 출처) — 9월 26일 서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지 중대 탄약수, 권총, 부상한 전우를 길가로 끌어냄, 소대 규모 적, 전우의 카빈과 몸으로 막음, 기관총탄에 전사, 구조된 전우 버트 존슨 일병. 10. 월간중앙(2009.3.20), 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289 — 김종기 대대장이 신현준 사령관 허가를 받아 태극기에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 대한민국 만세」를 써서 건넴, 전날부터의 불길과 연기. 11. 국가보훈부, 「2026년 9월의 6·25전쟁영웅」 김종기(뉴스핌 2026.8.31 newspim.com/news/view/20260831000900, 한국경제 2026.8.31 hankyung.com/article/2026083145411 보도) — 김종기 1926년생. 12. 박성우, 자유아시아방송(2008.9.26), rfa.org/korean/in_focus/seoul_recover-09262008153646.html — 박정모 본인 인터뷰(본문 인용문, 「중앙청은 미 해병 5연대의 바운더리였어요」, 「제가 올해 83세입니다」). 13. 뉴데일리(2024.3.22), newdaily.co.kr/site/data/html/2024/03/22/2024032200057.html — 종군기자 박종환이 전한 이승만의 바람. 14. 뉴시스(2022.9.28), newsis.com/view/NISX20220927_0002028823 — 박정모 소대의 중앙청 태극기 게양. 15. 미국 명예훈장 공적서 스탠리 크리스천슨(영문 위키백과 「Stanley R. Christianson」) — 9월 29일 새벽 132고지 청음초, 일곱 명 사살 뒤 전사. 16. 김성칠, 「역사 앞에서」(창작과비평사, 1993; 창비 개정판) — 정릉에서 쓴 1950년 일기. 17. 김용삼, 「자유를 빼앗기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매일신문, 2025.6.10), imaeil.com/page/view/2025060813301673285 — 『역사 앞에서』 99쪽 명륜동 인민재판 인용. 18. 김호기, 「“살아낸 게 악몽” 사학자 김성칠이 일기로 쓴 한국전쟁」(한국일보, 2019.4.8), hankookilbo.com/news/article/201904071475317789 — 9월 1일 일기와 10월 9일 일기 인용. 19.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 「6·25전쟁납북자 현황」, abductions625.go.kr/home/dta/dta01/dta01_02.jsp — 1952년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 82,959명. 20. 김영미, 「서울 정릉리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 『서울과 역사』 107(2021), KCI ART002688693 — 수복 뒤 잔류 주민과 도강파. 21.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jinsil.go.kr/KoreanWar/02.do — 도강파·비도강파, 국군 해병대·제17연대·서울 경찰의 부역 혐의자 살해. 22. 강원도민일보, 「부역자 색출과 한 많은 미아리고개」(2019.4.27), 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965153 —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검거 시작, 11월 13일까지 약 5만 명.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박정모 1927년생(무적해병신문 2019), 김종기 1926년생(뉴스핌·한국경제 2026), 김병철 1929년생(무적해병신문 2021), 신현준 1915년생(한국어 위키백과), 백인엽 1923년생(한국어 위키백과), 김성칠 1913년생(한국어 위키백과), 유진 오브레곤 1930년생, 스탠리 크리스천슨 1925년생, 루이스 풀러 1898년생, 레이먼드 머리 1913년생, 올리버 스미스 1893년생, 에드워드 아몬드 1892년생(이상 영문 위키백과, 미 해병대·육군 자료 인용), 이승만 1875년생. 월기찬은 Appleman이 「forty-five years of age」라고 적은 것을 본문에 그대로 옮기고 괄호 나이는 달지 않았다. 박정모는 2008년 인터뷰에서 「올해 83세」라고 했다(세는나이). 고길훈은 1922년생이라는 위키백과 기록에 출처가 없어 나이를 적지 않았다. 강대현은 2024년 기사에 91세로 나오나 셈법이 밝혀져 있지 않아 적지 않았다. 재스킬카, 데프툴라, 마츠턴, 호턴, 언더우드, 디파지오, 매멀런, H. J. 스미스, 로버트 스미스, 사이델, 해리스, 바우저, 러프너, 양병수, 최국방, 박종환, 버트 존슨, 최용건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중앙청 깃발 — 국군 해병대 자료는 27일 06시 10분 박정모 소대가 돔 난간에 태극기를 올렸다고 적고, Montross와 Appleman은 같은 날 15시 08분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중앙청을 확보하고 성조기를 올렸다고 적으며 국군 해병의 태극기는 적지 않았다. 시각과 자리(돔 난간과 앞뜰 게양대)가 달라 본문은 둘 다 적었다. 이세종경제(e-sejo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27) 일부 기사는 「9월 28일 6시 10분」, 경향신문 2010.4.26(khan.co.kr/article/201004261751455)은 AP 기자 회고를 들어 28일 경찰학교 김몽경 경사가 중앙청 3층 난간에 깃발을 꽂았다고 적었다. [자료 충돌] 함께 오른 대원 — 무적해병신문 2019는 양병수·최국방·정영검, 이세종경제 2023.5.25(e-sejo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05)는 양병수·김칠용·최국방, 월간중앙 2009는 양병수·최국방, 박정모 본인(2008)은 「세 사람」이라 했다. 문화일보 2026.2.11(munhwa.com/article/11567931)은 이상웅(1930년생)도 게양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모든 자료에 나오는 양병수·최국방만 적었다. [자료 충돌] 서쪽 고지 — Appleman은 중앙의 국군 해병을 「제2대대」, 목표를 66·88고지로, Montross는 「제1대대」, 목표를 56고지로 적었다. 국내 자료(뉴스투데이 2020)는 제1대대로 적어 본문은 제1대대와 56고지를 따랐다. 도그 중대 인원도 Appleman은 33명 돌격·26명 도달·206명 중 176명 사상, Montross는 44명으로 공격해 26명이 남았다고 적었다. 제25여단 병력은 Appleman 약 2,500명, Montross 4,000~5,000명이다. 서울에 도착한 날은 Appleman 19일, Montross 20일. 연희고지 전투 날짜는 9.21~23(뉴스투데이), 9.22~25(연세춘추)로 다르다. [자료 충돌] 시각 — 행주 도하 첫 물결은 Appleman 06시 45분, Montross 06시 50분(본문은 「일곱 시 조금 전」). 25일 밤 군단 긴급 전문 도착은 Appleman 20시 40분, Montross 20시 09분(본문은 Appleman). 서울역 점령은 Appleman 27일 오전, 시신 발견은 Montross 26일 쪽 서술이라 본문은 날짜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납북자 수 — 1950년 공보처 통계국 서울시 피해자 명부 2,438명, 1952년 명부 82,959명, 1953년 명부 84,532명(서울 20,738명, 서울신문 1995.10.30), 가족 단체 집계 96,013명(서울 22,348명). 본문은 1952년 명부의 수를 적었다. [재구성] 재스킬카 옆 참호 병사의 대사, 호턴이 헤엄치며 본 것의 순서, 박정모가 통나무를 받치며 강 건너를 보는 몸짓, 「그래도 그 목소리는 우리말이었다」는 문장, 제25여단 기관총 사수의 장면 전부(부대 편성·진지·구호는 기록), 고길훈의 명령 문장과 강대현이 둘레를 보는 장면, 도그 중대가 병력을 세는 장면, 영등포 로터리 회의의 몸짓과 스미스의 침묵, 바우저가 종이를 찢어 드는 몸짓, 마포 거리에서 해병이 총구를 돌렸다가 내리는 몸짓, 박정모 소대가 계단을 더듬어 오르는 장면, 의사당 장면의 배치, 김성칠이 정릉에서 지낸 석 달의 묘사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군단 전문, 맥아더 발언, 이승만 발언, Montross가 인용한 영문 기록은 뜻을 살려 우리말로 옮겼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

1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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