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22,884자)
6·25 남침 전야 — 아직 전쟁은 오지 않았다
1950 · 네오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밤, 서울 용산, 육군 장교들의 클럽 장교구락부.
새 건물에서는 아직 페인트 냄새가 났다. 장교들이 모여 술과 식사를 하도록 지은 이 클럽은 그날 밤이 개관 연회였고, 천장 등이 하나도 빠짐없이 켜진 홀에서 흰 식탁보 위로 잔이 부딪쳤다1. 국방부 장관 신성모(59)가 마련한 자리였다2. 일선 사단장들까지 근무지를 비우고 올라와 있었다1.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34) 소장은 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전날 자정을 기해 육군본부는 몇 주째 이어 온 비상경계령을 풀었다1. 장교도 병사도 오랜만에 맞은 주말이었고, 외출과 외박이 나갔다3. 국군을 가르치고 돕는 미 군사고문단의 고문관들도 다수가 서울로 나와 쉬고 있었다.
“전방은 조용하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누군가 웃었다.
“조용할 때 쉬어 둬야지. 비상, 비상, 몇 주를 그랬으니.”
“그러다 정말 오면 어쩌시렵니까?”
“오면 막아야지. 막으라고 우리가 있는 거 아닌가?”
“막기 전에 이 술부터 막아 주시지요. 내일 아침 차 타고 내려가다 길에서 주무시겠습니다.”
웃음이 한 번 더 터졌고, 잔이 다시 부딪쳤다. 창밖 용산 거리는 어두웠다. 연회장 안은 담배 연기로 뿌옜고, 군악대 대신 축음기가 돌았다. 사단장 몇은 연회가 끝나면 그대로 서울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부대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38선을 맡은 네 개 사단과 한 개 연대 가운데, 그 시각 진지에 들어가 있는 것은 사단마다 한 개 연대뿐이었다3. 나머지 연대들은 38선에서 십육 킬로미터에서 사십팔 킬로미터 뒤 예비 진지에 있었다.
연회가 끝나자 채병덕은 몇 사람과 자리를 옮겨 한 잔을 더 했다. 그가 집 대문을 연 것은 새벽 두 시였다2.
*
같은 날 밤, 38선 북쪽 어느 골짜기.
북한군 병사들은 낮 동안 숲에 숨어 있었다. 집결지에 닿았을 때 장교들은 기동 훈련이라고 했다. 그러나 23일과 24일 사이, 길가에 늘어선 포와 끝없이 들어오는 부대를 본 병사들 대부분은 훈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3.
해가 지자 중대마다 땅바닥에 줄지어 앉았다. 소총을 무릎 사이에 세운 병사들 앞에 장교 하나가 서서 종이를 펼쳤다. 북한의 국방 장관인 민족보위상이 내린 정치 명령이었다4.
“남조선 군대가 38선을 넘어 도발해 왔다. 공화국 정부는 인민군에게 반공격을 명령한다.”
병사들은 아직 한 발도 쏘지 않았다. 그런데 명령문은 남쪽이 먼저 넘어왔다고 했다. 뒷줄의 한 병사가 옆 사람에게 입술만 움직였다.
“훈련이라더니.”
옆 사람은 대답하지 않고 총끈을 고쳐 맸다. 낭독이 끝나자 병사들은 일어나 배낭을 졌다. 앞사람 배낭에 묶은 흰 끈을 보며 어둠 속으로 걸었다. 자정까지 공격 출발 진지에 들어가야 했다4.
행군은 조용했다. 담배는 금지였고, 말소리도 금지였다. 수통이 소총 개머리에 부딪치는 소리마저 앞의 분대장이 돌아보게 만들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고, 비 냄새를 머금은 풀이 정강이를 적셨다. 산비탈 아래로 내려서자 미리 파 둔 포진지에서 포병들이 포신 덮개를 벗기고 있었다. 보병들은 그 옆을 지나며 처음으로 포가 몇 문인지 세어 볼 수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명령문을 누가 그대로 믿었는지는 아무 기록에도 없다. 병사들이 남쪽으로 걸었다는 것만 남아 있다.
*
한 달 전, 5월 29일, 평양.
김일성(38)은 자기가 청해 놓은 자리에서 소련 대사 테렌티 슈티코프(43)를 마주 보고 앉아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모스크바에서 약속받은 무기와 탄약은 거의 다 들어왔고, 새로 만든 사단들에 보내는 일도 6월 1일이면 끝난다고 했다. 보병 사단 열 개 가운데 일곱 개는 당장 공격할 수 있었다5. 전차 여단과 오토바이 연대도 준비가 되었다.
“6월 말에 시작하고 싶습니다.”
슈티코프는 받아 적었다. 김일성은 이유를 둘 댔다. 미루면 남쪽이 눈치를 채고 군대를 키울 것이다. 그리고 7월에는 장마가 온다. 큰비가 오면 공격을 9월로 넘겨야 하는데,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총참모장 말로는 부대를 모으는 데 열엿새가 걸리니, 6월 8일에서 10일 사이에는 움직여야 했다5.
“언제 시작하면 좋겠습니까?”
김일성이 그렇게 물었을 때 슈티코프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중대한 문제이니 군인들과 정치위원회에 물어 정하라고만 했다. 총참모장과 소련 군사고문 바실리예프 장군까지 셋이 함께 작전 계획을 보자는 청도 거절했다. 계획은 바실리예프에게서 따로 듣겠다고 했다. 회담 끝에 김일성은 다른 부탁을 꺼냈다. 휘발유 사정이 심각하니 6월과 7월에 기름 일만에서 일만 오천 톤을 보내 달라고 했다5.
김일성이 돌아간 뒤 슈티코프는 바실리예프와 포스트니코프 두 장군을 불렀다. 두 사람은 부대를 모으고 사단장·연대장들과 작전을 세세히 맞추려면 시간이 더 든다며 7월이 낫다고 했다. 슈티코프가 장마 이야기를 꺼내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보았다. 남쪽이 준비를 눈치채면 군대를 키울 것이라는 말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결국 두 장군도 6월 말로 기울었다5.
이튿날 슈티코프는 모스크바 외무성에 특급 전문을 보냈다. 끝에 자기 의견을 한 줄 붙였다. 김일성이 6월 말을 원하고 그때까지 준비가 끝날 수 있으니, 그 날짜에 동의해도 되겠다는 의견이었다. 외무상 박헌영(50)이 남쪽에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문서를 만드는데 도와 달라고 한다는 말도 적었다. 모스크바에 남은 전문 사본 아래에는 손글씨가 두 줄 붙었다. 소련 공산당 지도부인 정치국이 제안을 승인했다는 것, 그리고 「스탈린의 승인이 여기 있다」는 메모였다5.
북한군은 6월 12일부터 23일 사이 38선 가까이로 모였다. 사단마다 작전 계획과 지형 정찰에 소련 고문관들이 함께했다. 24일에는 사단장마다 공격하는 날과 시각이 적힌 명령을 받았다4.
*
그보다 보름 앞선 5월 14일 오후, 베이징.
김일성과 박헌영은 13일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에 평양에서 비행기를 탔다6.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57)을 만나 남쪽을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했고,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7. 마오쩌둥은 그 말을 그대로 받지 않았다. 그날 밤 총리 저우언라이(52)를 시켜 소련 대사에게 물었다. 스탈린 동지가 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 직접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8.
이튿날 오후 두 시 사십 분, 소련 대사 로신이 마오쩌둥 앞에 전문 한 장을 내밀었다7. 스탈린이 「필리포프」라는 가명으로 보낸 답이었다. 국제 정세가 바뀌었으니 통일에 나서겠다는 조선 동무들의 제안에 동의한다고 했다. 다만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 동무들이 함께 최종 결정해야 하고, 중국 동무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다시 논의할 때까지 미룬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8.
마오쩌둥은 전문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이제 그의 몫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마오쩌둥은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 이주연에게 미국은 이렇게 작은 땅 때문에 세 번째 세계대전에 뛰어들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김일성이 슈티코프에게 그렇게 전했다6. 마오쩌둥은 로신에게 조선 동무들의 정세 판단과 남북의 전력 비교에 동의한다고 했다7. 그리고 한마디를 보탰다.
“통일이 끝나면 두 나라가 우호동맹조약을 맺읍시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들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언제 칠지, 어디로 칠지는 아무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중국 역사학자 선즈화는 스탈린이 군사 행동의 내용과 계획을 중국에 조금도 알리지 않았다고 본다9. 북한으로 가는 소련 무기도 중국 땅을 지나는 철도 대신 바닷길로 갔다9. 6월 25일 새벽 베이징이 언제 어떻게 개전 소식을 들었는지는 지금까지도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
6월 25일 새벽, 38선 남쪽, 국군 경계진지.
참호에는 둘씩 짝을 지은 경계병이 서 있었다. 비상이 풀린 첫 주말 밤이었다. 밤새 비가 오다 그치다 했고, 철모 끝에서 떨어진 물이 목덜미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꾸벅이면 다른 사람이 옆구리를 찔렀다. 담뱃불은 손바닥 안에 감췄다.
“몇 시냐?”
“네 시 다 됐다.”
“교대는?”
“다섯 시. 한 시간만 더 버텨.”
짝이 하품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밝으면 일요일 아침이었다. 외박 나간 동기들은 지금쯤 서울이나 고향 집에서 자고 있을 것이었다. 참호 바닥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고, 군화 속 양말은 벌써 축축했다.
북쪽 산등성이는 조용했다. 그 산 뒤에 북한군 사단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경계병들은 보지 못했다. 북한군은 소리를 죽이고 걸었고, 포는 미리 파 둔 진지에 들어앉아 남쪽을 겨누고 있었다.
네 시를 조금 넘겨 북쪽 산등성이 너머에서 북한군 포들이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포구의 불빛이 먼저 보였고, 포성은 몇 초 뒤에 따라왔다. 그 몇 초 동안 경계병들은 참호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포탄이 참호 앞 흙을 뒤집었고, 전화선이 끊겼다. 흙먼지 속에서 한 경계병이 짝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기침 소리가 들렸고, 흙투성이 손 하나가 그의 팔을 잡았다.
포격은 쉬지 않았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며 겨누어 쏘는 포가 이십 분에서 사십 분을 두들겼고, 마지막 십 분은 모든 포가 한꺼번에 퍼부었다4. 포성이 뚝 그친 자리로 함성이 내려왔다. 경계병은 흙을 뒤집어쓴 소총을 참호 턱에 걸쳤다. 빗물과 흙이 섞인 진창 속에서 노리쇠가 한 번에 당겨지지 않았다.
포격은 서쪽 끝 옹진(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강령군)에서 먼저 시작되어 동쪽으로 번졌다. 미국 기록은 첫 포격을 네 시쯤으로 적었고, 슈티코프는 모스크바에 현지 시각 네 시 사십 분이라고 보고했다4. 다섯 시 이십오 분, 동해안에서는 북한군이 배에서 뛰어내렸다4.
*
6월 25일 새벽 다섯 시, 개성(현 북한 개성시).
포성에 잠이 깬 조지프 다리고 대위는 처음 몇 초 동안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개성 북동쪽 끝, 송악산 아래 셋집이었다. 개성을 내려다보는 송악산 마루를 따라 38선이 지나갔고, 그 마루는 오래전에 북한군이 차지해 진지로 만들어 놓았다. 다리고는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에 붙은 미 군사고문단 부고문관이었고, 그날 아침 38선 위에 있던 단 한 명의 미군 장교였다3.
포탄 파편과 총알이 집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다리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바지만 꿰었다. 신발과 셔츠는 손에 쥔 채 계단으로 뛰었다. 계단 중간에서 그를 깨우러 뛰어 올라오던 한국인 집안일꾼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대위님! 북쪽에서—”
“알아. 지프!”
두 사람은 집을 뛰쳐나와 지프에 올랐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에는 군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국군도 북한군도 없었는데, 총성만 사방에서 커지고 있었다. 다리고는 문산(현 파주시 문산읍)으로 가는 길을 타고 임진강까지 내려가기로 했다.
지프가 개성 시내 한복판 원형 교차로에 들어섰을 때 소총탄이 바퀴 옆 길바닥을 튀었다. 다리고는 고개를 서쪽으로 돌렸다. 팔백 미터쯤 떨어진 개성역이 훤히 보였고, 거기 열차가 서 있었다. 열다섯 칸쯤 되는 객차에서 군복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몇은 벌써 시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3.
북한군이었다. 38선 북쪽에서 걷어 냈던 철로를 밤사이 다시 깔고, 열차째 개성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리고는 내리는 병력을 두세 개 대대, 어쩌면 한 개 연대로 어림했다.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였다3. 국군 제12연대의 두 개 대대는 개성 북쪽 진지에서 송악산의 포탄을 맞고 있었다. 열차는 그 진지들의 등 뒤에 병사들을 내려놓았다.
다리고는 핸들을 꺾었다. 교차로를 돌아 나오는 동안 등 뒤에서 총성이 이어졌다. 그는 맨발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옆자리의 집안일꾼은 한 손으로 차체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다리고의 셔츠와 신발을 무릎에 눌러 안았다. 개성을 벗어나 남쪽 길로 접어들자 보따리를 진 사람들이 하나둘 길가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프는 그 사람들을 비켜 가며 달렸다. 임진강을 건너 문산에 닿았을 때에야 다리고는 신발을 신었다.
개성은 아홉 시 반이 되기 전에 북한군 손에 넘어갔다. 개성과 그 서쪽 고을 연안(현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에 있던 제12연대 병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붙잡혔다. 이튿날 사단 본부에 닿은 것은 두 개 중대뿐이었다3.
*
같은 아침, 서울, 미국인 주택 단지.
제1사단 고문관 록웰 중령은 날이 밝은 지 얼마 안 되어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주말을 서울 집에서 보내던 참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문을 여니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30) 대령이 참모 몇과 함께 서 있었다3. 사단장은 개성이 아니라 서울에 있었다.
“개성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사단으로 가야 합니다.”
백선엽은 록웰의 집 전화로 사단 본부를 불렀다. 서울 서북쪽 수색(현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 있던 제11연대에 당장 문산과 임진강 나루 고랑포(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로 올라가 미리 정해 둔 진지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사이 록웰은 군복 단추를 채우며 지도부터 찾았다. 제1사단의 연대들은 넓게 흩어져 있었다. 제12연대는 개성과 서쪽 연안에, 제13연대는 고랑포에, 제11연대와 사단 본부는 수색에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전에 의논을 끝내 둔 터였다. 북한군이 쳐 오면 이 사단이 지킬 수 있는 선은 임진강 남쪽뿐이었다3. 사단장과 고문관이 문산으로 차를 모는 동안 개성은 떨어지고 있었다.
*
같은 아침 다섯 시, 서울, 채병덕의 집.
전화벨이 울렸을 때 채병덕은 잠든 지 세 시간이었다. 육군본부 상황실이었다.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공격해 오고 있었다2.
채병덕은 비상조치를 내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들어 육군본부 부서들을 차례로 불렀다. 받는 곳보다 안 받는 곳이 많았다. 일요일 새벽이었다. 작전국장 장창국의 집에는 아예 전화가 없었다10.
국방부 장관에게도 알려야 했다. 신성모의 집으로 건 전화는 부관이 받았다10.
“장관님은 일요일에는 아무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채병덕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차를 불렀다. 그가 신성모의 집 대문 앞에 선 것은 일곱 시쯤이었다2. 전쟁은 세 시간째였다. 서울 곳곳의 집 대문을 전령들이 두드리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면 잠옷 차림의 장교가 나왔고, 전령의 말을 듣고 나면 장교는 군화부터 찾았다. 전날 밤 연회에서 돌아온 사단장들도 그 대문들 뒤에 있었다. 서울의 하늘은 흐렸고, 이따금 가는 비가 뿌렸다.
*
6월 25일 오전 열 시, 서울, 주한 미국 대사관.
대사관 무관은 이미 아홉 시 이십오 분에 워싱턴 육군부 정보참모부로 긴급 전문을 띄웠다3.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50)는 그보다 조금 늦게 국무부로 보낼 925호 전문을 불러 주었다11. 그는 한국군 보고와 고문관들의 현장 보고를 맞대어 보며 한 문장씩 끊어 말했다.
“새벽 네 시쯤 공격이 시작되었다. 옹진이 북한군 포격을 받았다.”
여섯 시쯤 북한군 보병이 옹진, 개성, 춘천에서 38선을 넘었다. 강릉 남쪽 해안에는 상륙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개성은 아침 아홉 시에 떨어졌고, 북한군은 전차 열 대쯤을 앞세웠다11. 무초는 마지막 문장에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공격의 성격과 시작된 방식으로 보아,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전면 공세로 보인다.”
무초가 서명하자 전문은 암호실로 넘어갔다. 암호병은 문장을 숫자 묶음으로 바꾸었고, 그 숫자들이 태평양을 건너갔다. 대사관 창밖 서울 거리에는 일요일 아침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그 시각 도쿄에서는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 라이트 대령이 교회 예배에 앉아 있었다. 전날 밤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아내를 태워 보내러 일본에 건너온 길이었다3. 전령 하나가 신도석 사이로 들어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이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6월 24일 토요일 밤, 미국 워싱턴, 국무부.
서울의 오전 열 시는 워싱턴의 토요일 밤 아홉 시였다3. 그보다 한 시간쯤 앞서 미국 통신사들의 서울발 기사가 워싱턴에 닿기 시작했다. 통신사 UP의 서울 특파원 잭 제임스가 쓴 기사가 아시아를 맡은 국무부 극동국에도 들어왔다. 북한군이 전면 공세에 나섰고, 중전차를 썼고, 한국군 1개 사단이 무너졌다는 내용이었다12.
극동국 공보 담당 브래들리 코너스는 서울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12. 연결되지 않았다. 코너스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서울에 보낼 전문 초안을 썼다. 기사 내용을 옮기고 끝에 「급히 알려 달라」는 한마디를 붙인 짧은 전문이었다. 코너스가 그 초안을 쓸 때 무초의 925호는 아직 그의 손에 오지 않았다. 국무부 기록에는 925호를 받은 시각이 워싱턴 시각 아홉 시 이십육 분으로 남았고, 코너스의 전문은 밤 열 시에 서울로 나갔다11.
해독된 925호가 나오자 토요일 밤의 국무부에 불이 켜졌다. 열 시 십오 분 코너스와 공보 담당자들에게 알렸고, 열 시 삼십 분 육군부에 넘겼다11. 같은 시각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와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가 국무부 건물에 들어섰다13. 한 시간 안에 유엔 담당 차관보 히커슨, 순회대사 제섭을 비롯한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열한 시, 925호 사본 두 부가 백악관으로 갔다11.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메릴랜드 시골집에 있었다. 그는 전화로 전문 내용을 듣고 대통령에게 직접 알리겠다고 했다. 국무부 사람들은 이 일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곧 전쟁과 평화를 다루는 유엔의 열한 개국 회의에 올리자고 애치슨에게 건의했다13.
*
같은 밤, 미국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대통령 해리 트루먼(66)은 그 주말 워싱턴을 떠나 고향 집에 와 있었다. 미국 한가운데, 미주리주의 작은 도시였다. 긴 하루를 보낸 트루먼은 아홉 시쯤 잠자리에 들 채비를 마쳤다14. 워싱턴 시각으로 밤 열한 시 이십 분, 미주리 시각으로는 아홉 시 이십 분이었다. 트루먼의 전기를 쓴 데이비드 매컬로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아홉 시 이십 분쯤, 복도의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는 애치슨이었다.
“대통령 각하, 아주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트루먼은 복도에 선 채 그 말을 들었다. 그는 당장 워싱턴으로 가겠다고 했다. 애치슨이 말렸다. 밤 비행기를 띄울 위험을 질 까닭이 없고, 대통령이 한밤중에 돌아오면 온 나라가 놀랄 것이라고 했다14. 애치슨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를 소집하자고 했고, 트루먼은 그러자고 했다13. 십 분 뒤 히커슨이 유엔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에게 전화를 걸었다13.
한국은 트루먼이 서 있는 복도에서 지구 반 바퀴 떨어진 나라였다. 그 나라의 일요일 아침은 이미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트루먼의 손이 한동안 전화기 위에 머물렀다. 그는 이튿날 저녁에야 워싱턴에 내렸다14.
그 시각 서울은 일요일 낮 열두 시 이십 분이었다. 38선의 국군은 여덟 시간 넘게 싸우고 있었다.
*
6월 25일 오후, 미국 뉴욕,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뉴욕의 일요일 오후 두 시,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다. 서울은 그 시각 월요일 새벽 세 시였다. 소련 대표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결의 82호는 북한군의 공격을 평화를 깨뜨린 행위라고 판정했고, 싸움을 멈추고 군대를 38선까지 물리라고 요구했다. 찬성 아홉 표, 기권 한 표였다30. 전쟁은 이미 둘째 날로 넘어가고 있었다.
*
6월 25일, 평양, 북한군 총참모부.
무전병들이 사단마다 호출 부호를 불렀다. 대답이 없는 사단이 있었고, 대답이 와도 몇 시간 전의 위치를 알려 오는 사단이 있었다. 처음 세 시간 동안 부대들은 삼 킬로미터에서 오 킬로미터를 나아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4. 낮 열두 시가 지나자 남쪽 군대가 제법 짜임새 있게 버티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뒤따랐다. 상황판의 부대 표시는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남쪽으로 옮겨졌지만, 그것이 지금 그 부대가 선 자리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몇몇 지휘관은 윗선에 알리지도 않고 지휘소를 옮겼다4.
이튿날 슈티코프가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에는 두 가지가 나란히 적혔다. 인민군은 첫날 옹진과 개성, 동쪽의 마을 신유리를 점령했다4. 그리고 첫날부터 총참모부는 어느 사단과도 연락을 제대로 잇지 못해 싸움을 지휘하지 못했다. 동해안으로 내려간 여단과 제12사단과는 이튿날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4.
북한군은 빠르게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평양은 자기 부대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날 오전 평양방송은 남쪽이 먼저 쳐들어왔다고 발표했다. 전날 밤 골짜기에서 병사들이 들은 명령문과 같은 말이었다.
그날 오후 세 시 오십오 분, 서울의 무초가 국무부에 931호 전문을 보냈다. 평양방송의 그 발표를 터무니없는 선전이라고 적었고, 이날 벌어진 일 자체가 남쪽이 먼저 쳤다는 말을 뒤집는다고 덧붙였다27.
그 뒤 오랜 세월이 흘러 소련 문서가 열렸다. 1994년 러시아가 한국 대통령에게 문서 216건을 넘겼고, 이를 파고든 연구자들은 북한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데 의문이 없다고 정리했다28. 북한은 지금도 해마다 6·25 무렵이면 남쪽이 먼저 공격했다는 방송을 내보낸다. 주민 가운데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내부 소식통의 보도가 있다29.
*
열흘 뒤, 7월 2일, 베이징.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가 로신 대사를 마주 앉혔다. 저우언라이의 말은 불평에 가까웠다. 마오쩌둥이 미리 경고했는데도 북한 지도부가 미국이 끼어들 가능성을 너무 가볍게 보았다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조언도 전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수 있으니 그 일대에 단단한 방어선을 치라는 말이었다.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군이 조선 사람 옷을 입고 싸우겠다고도 했다. 만주의 큰 도시 선양 일대에는 이미 3개 군, 십이만 명이 모여 있었다15.
엿새 뒤 스탈린의 전문이 베이징에 왔다. 조선 사람들이 중국 대표가 없다고 불평하니 사람을 서둘러 보내라는 내용이었다15. 5월에 김일성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였던 중국은, 그 계획이 언제 시작되는지 듣지 못한 채 전쟁을 맞았다. 평양에는 아직 중국 대표가 한 사람도 없었다.
*
다섯 해 전, 1945년 8월 8일 저녁, 모스크바.
모스크바 시각 오후 다섯 시,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가 일본 대사를 불렀다. 소련이 이튿날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간다는 선전포고문이 대사의 손에 쥐어졌다23. 극동의 시계는 모스크바보다 여섯 시간 앞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밤 열한 시였고, 자정을 넘겨 8월 9일이 되자 소련 극동군이 국경을 넘었다.
제25군은 태평양함대와 손을 맞춰 한반도 북동쪽을 훑어 내려갔다. 8월 11일부터 20일 사이에 웅기, 나진, 청진이 소련군 손에 들어갔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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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해 전, 1945년 8월 10일 밤, 미국 워싱턴.
국무부와 전쟁부, 해군부가 함께 쓰는 조정위원회 회의실에서 두 사람이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군 대령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었다. 일본이 곧 항복할 것 같았고, 일본군의 항복을 어디서 누가 받을지 밤새 정해야 했다. 두 사람은 지도 위에 38도선을 짚었다. 그 선 북쪽의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남쪽은 미군에게 항복하게 하자는 건의였다24.
그 건의는 일반명령 제1호에 그대로 들어갔다. 38선을 그은 쪽은 미국이었다. 소련은 그 선을 받아들였다. 러스크는 훗날 메모에 소련이 그 선을 받아들인 데 조금 놀랐다고 적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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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해 전, 1945년 10월 14일, 평양 시내 공설운동장.
운동장은 둘레 둑까지 사람으로 찼다. 일본이 항복하고 두 달째였다. 소련군은 8월 26일 평양에 총사령부를 세웠고, 9월 초에는 38선 북쪽 땅을 모두 손에 넣었다16. 그날 대회에는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17.
앞줄에 끼지 못한 사내 하나가 앞사람 어깨 사이로 고개를 뺐다. 단상에는 소련군 장교들이 서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서른세 살의 김일성이었다.
“저이가 장군이오?”
“장군이라더니 우리 집 큰애보다 몇 살 위도 안 돼 보이누만.”
“쉿. 소련 사람들 앞이오.”
“저 사람들이 조선말을 알아듣겠소?”
옆 사람은 대답 대신 사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사내는 입을 다물었고, 박수가 터지자 그도 손바닥을 마주쳤다.
운동장의 누구도 그 젊은 사람이 어떤 길로 평양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소련 극동군 안의 부대인 88여단에 있었다. 해방 무렵 그 여단 1,354명 가운데 조선인은 103명이었다16. 김일성 일행은 소련 극동의 항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군함을 타고 9월 19일 원산(현 북한 강원도 원산시)에 내렸다16. 원산에 내린 뒤에는 소련군 대위 군복을 입고 북쪽 고을들을 돌았다17. 소련 군부는 그때부터 그를 믿었고, 이날처럼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를 앞에 세웠다18. 이 운동장이 김일성이 북한 정치무대에 공식으로 처음 오른 자리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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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8일, 평양.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문을 열었다. 위원장은 김일성이었고, 부위원장은 김두봉, 서기장은 강량욱이었다. 이 위원회는 이듬해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바뀔 때까지 북쪽의 가장 높은 행정기관이었다25.
3월 5일에는 토지개혁 법령이 나왔다. 지주의 땅을 값 없이 거두어 값 없이 나눠 준다는 법이었고, 한 달쯤 걸려 끝났다25. 소련군이 들어온 지 반년 만에 북쪽은 군정 아래에서 제 정부의 틀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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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8일, 평양.
열병식 행렬이 사열대 앞을 지났다. 기관총과 박격포를 멘 보병 뒤로 대전차포와 고사포, 곡사포와 야포가 끌려 나왔다. 하나같이 소련제였다. 사열대 위에서 총사령관 최용건이 행렬을 받았다19. 그날 나온 병력을 미군 정보는 뒤에 1만에서 2만 5천 명으로 어림했다19.
사열대 옆의 소련 장교 하나는 지나가는 포의 바퀴를 눈으로 셌다. 1946년 12월부터 훈련 부대마다 그 같은 소련 장교가 고문으로 붙어 지냈다19. 처음 넘겨준 무기는 철수하는 소련 부대가 쓰던 것이었고, 그 무기를 내준 소련 병사들이 조선 병사들에게 직접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19. 두 해 동안 이 군대는 「보안간부훈련소」라는 이름 아래 길러졌다. 미군 정보는 그 이름을 가면이라고 불렀다19.
이날 그 가면을 벗었다. 조선인민군이 창건됐고, 북쪽에는 아직 정부가 없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물러날 날에 대비해 평양은 군대를 먼저 세웠다20.
단상에 선 김일성이 연설했다.
“조선 인민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군대를 가졌습니다. 이 군대는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내전을 하려는 군대가 아닙니다. 반동이 그런 짓을 꾀하면 미리 막을 것입니다. 자기 군대가 없는 나라는 독립한 주권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통역이 「내전」이라는 말을 러시아말로 옮기는 동안 소련 장교는 언 발을 녹이려고 군화 뒤축을 맞부딪쳤다. 미군 정보는 이 연설을 영어로 옮겨 기록에 남겼다19.
정부는 일곱 달 뒤인 9월 9일에 섰다.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20. 그해 12월 25일 북쪽의 소련군은 철수를 마쳤다21. 고문관들은 남았다. 이듬해 8월에도 인민군 보병 사단과 여단은 소련 장교 고문관의 감독 아래 훈련받았다22.
북한은 지금도 이 시절을 다르게 가르친다. 소련군이 조국을 해방했고,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세운 항일 무장대가 당과 나라와 군대의 뿌리라고 한다. 그래서 군대를 세운 날도 바뀌었다. 건군절은 2월 8일이었다가 1978년에 4월 25일로 옮겨졌고, 2018년에 다시 2월 8일이 되었다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주장을 김일성의 혁명 전통에 맞추려 한 과장이라고 평가한다26. 군대를 만든 쪽은 소련 군부였다는 앞의 기록과 놓고 보면 두 이야기는 같은 땅에 나란히 서 있다.
1950년 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평양의 슈티코프 앞으로 전문이 왔다. 보낸 사람은 스탈린이었고, 김일성에게 전하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남조선을 상대로 한 그런 큰일에는 큰 준비가 필요하다. 위험이 너무 크지 않게 짜야 한다. 나를 만나 의논하고 싶다면 언제든 받겠다. 이 일에서 그를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전하라.”
같은 전문 끝에는 부탁이 하나 붙어 있었다. 해마다 납 2만 5천 톤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22.
사료 출처
1.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1100) — 6월 23일 자정 비상경계령 해제, 24일 밤 일선 지휘관의 장교구락부 개관 연회 참석. 비상경계 해제를 24일로 적은 글도 있다. 2. 윤태옥, 오마이뉴스 연재(ohmynews.com, CNTN_CD=A0002964854) — 신성모 주최, 채병덕 새벽 두 시 귀가, 다섯 시 보고, 일곱 시 신성모 집 방문. 2차 자료이며 군사편찬연구소 전사와의 대조가 남아 있다. 3.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제3장(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history.army.mil/books/korea/20-2-1/sn03.htm) — 25일 새벽 38선의 비와 서울의 흐린 날씨, 주말 외출, 사단마다 1개 연대 배치와 예비 연대 10~30마일 후방, 북한군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기동 훈련이라고 했으나 23~24일에 대부분 전쟁임을 알았다는 점, 다리고 대위의 새벽(송악산 아래 숙소, 집안일꾼과 함께 지프로 탈출, 원형 교차로의 소총탄, 개성역 열차 약 15량, 2~3개 대대 또는 1개 연대 어림, 문산 길, 1953.8.5 면담 근거), 송악산 능선의 38선, 북한군 제6사단 제13·15연대, 개성 아홉 시 반 함락, 제12연대에서 두 개 중대만 이튿날 귀환, 록웰의 집 문을 두드린 백선엽과 참모들, 백선엽의 제11연대 이동 전화, 임진강 남쪽 방어 구상, 대사관 무관의 09시 25분 긴급 전문, 워싱턴에 첫 보도가 닿은 시각(토요일 밤 여덟 시쯤), 라이트 대령의 도쿄 교회 일화(16번 주석), 서울–워싱턴 시차. 4. 슈티코프, 「자하로프에게 보낸 보고」(1950.6.26), CWIHP Bulletin 6/7, 39~40쪽(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media/documents/publication/ACF1A6.pdf) — 6월 12~23일 집결, 사단급 작전 계획·정찰에 소련 고문관 참여, 24일 D일·H시 명령, 정치 명령 낭독, 24일 24시까지 출발 진지 진입, 네 시 사십 분 개시, 직접 조준 사격 이십~사십 분과 십 분 집중 포격, 첫 세 시간 3~5킬로미터 전진, 열두 시 이후 조직적 저항, 다섯 시 이십오 분 동해안 상륙, 첫날 점령지(옹진·개성·신유리), 총참모부가 어느 사단과도 확고한 연락이 없었다는 점, 지휘소 무단 이동, 동해안 여단·제12사단과 연락 두절. 5. 슈티코프, 「5월 29일 김일성 면담 전문」(1950.5.30), NKIDP 『New Evidence on the Korean War』 문서 12, PDF 48쪽(자료모음 문서/17); CWIHP Bulletin 14/15 PDF 5쪽(자료모음 문서/18) — 무기 도착과 6월 1일 지급 완료, 10개 사단 중 7개 준비, 6월 말 개시 희망과 두 가지 이유(남쪽의 대비, 7월 장마와 9월 연기), 집결 16일과 6월 8~10일 이동, 슈티코프의 직답 회피와 공동 회의 거절, 기름 1만~1만 5천 톤 요청, 바실리예프·포스트니코프의 7월 의견과 6월 말 수용, 슈티코프의 동의 의견, 박헌영의 평화통일 제안 문서, 정치국 승인 메모와 「Here is Stalin's approval」 손글씨. 6. 슈티코프, 전문(1950.5.12), CWIHP Bulletin 6/7, 39쪽, 문서 13 — 김일성·박헌영 13일 다섯 시 이십 분 출발, 이주연 대사가 전한 마오쩌둥의 말(미국은 이 작은 땅 때문에 3차 세계대전에 들어오지 않는다). 7. 로신, 보고(1950.5.14), NKIDP 『New Evidence on the Korean War』 문서 10, PDF 46쪽 — 오후 두 시 사십 분 전달, 13일 저녁 회담, 정세·전력 평가 동의, 통일 후 조약 제안. 8. 「필리포프」(스탈린), 비신스키 전달 전문 제8600호(1950.5.14), Wilson Center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5976) — 변한 국제 정세를 들어 동의, 중국과 조선이 함께 최종 결정하고 중국이 반대하면 미룬다는 조건,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통해 스탈린의 직접 설명을 요청했다는 점. 문서 요약 단계에서 확인했고 원문 전체는 열지 못했다. 9. 朱正, 北京日报 2010.10.20(sinoss.net/c/2010-10-20/526805.shtml) — 선즈화의 견해(사전 통보 없음, 해상 운송). 10. 김국헌, 아시아엔 2018.6.25(kor.theasian.asia/archives/188868) — 신성모 부관의 말, 장창국 작전국장 집에 전화가 없었다는 일화. 11. 미 국무부,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1950』 vol. VII, 문서 59 — 무초 925호(서울 6월 25일 오전 열 시 발신, 워싱턴 24일 밤 아홉 시 이십육 분 수신),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59 — 네 시 공격 개시, 옹진 포격, 여섯 시 옹진·개성·춘천 월경, 강릉 남쪽 상륙 보고, 개성 아홉 시 함락과 전차 약 10대, 「전면 공세」 판단, 10:15 코너스·화이트 통보, 10:30 육군부, 11시 백악관 사본 두 부. 무초 전문은 뜻을 살려 옮겼다(원문: “Action was initiated about 4 a.m. Ongjin blasted by North Korean artillery fire.” “It would appear from nature of attack and manner in which it was launched that it constitutes all out offensive against ROK.”). 12. 미 국무부, FRUS 1950 vol. VII, 문서 60 — 국무장관 명의 612호(24일 밤 열 시 발신),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60 — UP 잭 제임스 기사 인용, 코너스가 서울 대사관에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925호 접수 전에 기안. 13. 미 국무부, FRUS 1950 vol. VII, 문서 61(편집자 주),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61 — 10:30 러스크·페이스 도착, 한 시간 안에 매슈스·히커슨·제섭 등 합류, 애치슨 전화 보고와 안보리 건의, 11:20 애치슨의 대통령 전화와 트루먼의 동의, 11:30 히커슨의 트뤼그베 리 통화. 14. David McCullough, 『Truman』(1992), 개전 대목, 온라인 사본 erenow.org/common/truman/70.php — 아홉 시쯤 잠자리 채비, “At about 9:20, the telephone rang in the hall.”, 애치슨이 메릴랜드 시골집에서 걸었다는 점, “I have very serious news. The North Koreans have invaded South Korea.”, 트루먼이 곧장 돌아가려 했고 애치슨이 밤 비행의 위험과 국민의 동요를 들어 말렸다는 점, 25일 저녁 일곱 시 십오 분 워싱턴 내셔널 공항 도착. 트루먼 회고록은 「열 시 조금 넘어」로 적었다고 하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15. Evgueni Bajanov, CWIHP Bulletin 6/7, 88~89쪽 — 7월 2일 저우언라이–로신 회담(미국 개입 과소평가, 인천 방어선 조언, 38선을 넘으면 조선인으로 위장한 중국군 참전, 선양 일대 3개 군 12만 명), 7월 8일 스탈린 전문. 16.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52권 「(1) 소련군의 북한 진주」(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50_0020_0010_0010) — 8월 26일 평양 총사령부 설치, 9월 초 38도선 이북 전 지역 점령(각주 688·689), 1945년 8월 25일 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1,354명 가운데 조선인 103명(각주 690), 김일성 일행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소련 군함으로 9월 19일 원산에 닿았다는 점(각주 692, 와다 하루키). 17.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북한 정권의 탄생」(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2320&code=kc_age_50) —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와 김일성의 첫 공식 등장, 원산 상륙 뒤 소련군 대위 군복 차림의 북부 순회. 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빨치산파」(encykorea.aks.ac.kr/Article/E0066493) — 88여단에서 활동하다 해방과 함께 들어와 소련 군부의 신임을 받았다는 점, 소련 군부가 환영 대회 같은 행사로 김일성에게 힘을 실었다는 점. 19.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1952.6.6, 비밀 해제), Commons 사본(commons.wikimedia.org/wiki/File:HISTORY_OF_THE_NORTH_KOREAN_ARMY.pdf) 3·13~14·22~23쪽 — 「보안간부훈련소」라는 이름과 미군 정보가 그 이름을 가면이라 부른 점, 1946년 12월 첫 무기 인도와 철수하는 소련 부대의 무기, 소련 병사들의 사용법 교육, 1946년 12월부터 훈련 부대마다 소련 장교 상주 고문, 1948년 2월 8일 열병식(1만~2만 5천 명, 소련제 기관총·박격포·대전차포·고사포·곡사포·야포, 최용건 사열), 김일성 연설. 연설은 이 문서의 영어 번역을 뜻을 살려 옮겼다. 20.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52권 「(2) 북한에서의 분단정부 수립」(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50_0020_0050_0020) —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정부 수립 전에 군을 먼저 만든 것이 미·소 양군 철수에 대비한 조치였다는 점,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21.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북한 연표 1948년 12월 26일 항목 — 북한 주둔 소련군이 12월 25일 철수를 마쳤다는 발표. 22. 5번 출처와 같은 문서집(NKIDP 『New Evidence on the Korean War』, 자료모음 문서/17) — 문서 4(1949.9.15 슈티코프 보고, PDF 26쪽: 1949년 8월 보병사단·여단이 소련 장교-고문관의 감독 아래 훈련), 문서 7(1950.1.30 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낸 전문, AVPRF F.059a Op.5a D.3 P.11 l.92; CWIHP Bulletin 6/7, 36쪽: 큰 준비와 위험 관리, 언제든 만나겠다는 말, 「그를 도울 준비가 돼 있다」, 해마다 납 2만 5천 톤 요청). 전문은 뜻을 살려 옮겼다. 2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52권 「(1) 소련군의 북한 진주」(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50_0020_0010_0010), 각주 688(유리 바닌) — 소련군이 8월 9일 대일 전쟁에 들어섰고 제25군이 8월 11일부터 20일 사이에 웅기·나진·청진 등을 점령했다는 대목. 8월 8일 모스크바 시각 오후 5시 몰로토프의 선전포고 통보는 영문 위키백과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24. 미 국무부,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1945』 vol. VI, 문서 771(history.state.gov) — 1945년 8월 10~11일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SWNCC)의 38도선 건의와 일반명령 제1호(38도선 이북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군이 받는다), 소련의 수락. 러스크의 1950년 7월 12일 메모(소련이 받아들여 「조금 놀랐다」)를 인용한 대목. 2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encykorea.aks.ac.kr/Article/E0070131);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북한 정권의 탄생」(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2320&code=kc_age_50) 및 사료 「1946년 북한 토지 개혁에 대한 법령」 —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강량욱)으로 발족, 3월 5일 토지개혁 법령(무상몰수·무상분배), 한 달쯤 걸려 끝남. 법령 날짜는 대백과가 3월 8일로 적어 갈린다. 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민혁명군」(encykorea.aks.ac.kr/Article/E0070134)·「빨치산파」(E0066493); 주간경향 「정권 입맛대로 ‘고무줄’…수시로 바뀌는 북한군 창건일」 — 북한이 소련군의 해방과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세운 항일 무장대를 건당·건국·건군의 뿌리로 내세워 왔다는 것, 건군절이 2월 8일에서 1978년 4월 25일로, 2018년 다시 2월 8일로 바뀐 것, 대백과가 이 주장을 「김일성 혁명전통에 입각한 과장」으로 평가한 것. 27. 미 국무부, FRUS 1950 vol. VII, 문서 68(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68) — 무초 대사의 931호 전문(서울 6월 25일 15시 55분 발신): 평양방송 11시 발표를 「터무니없는 선전」이라 하고, 이날 벌어진 일이 대한민국 선제 침공설을 뒤집는다고 적었다. 28. 코리아타임스, 2007.5.27 칼럼 「Who started the war?」(koreatimes.co.kr/opinion/20070527/227-who-started-war) — 1994년 러시아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넘긴 소련 문서 216건을 연구한 웨더스비·바자노프 등이 북한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데 의문이 없다고 정리했다는 대목(2차 자료). 29. 자유아시아방송(RFA), 2021.6.25(rfa.org/english/news/korea/625-06252021155957.html) — 북한이 해마다 6·25 무렵 남쪽이 먼저 공격했다는 방송을 내보내고, 주민 가운데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내부 소식통 보도. 소식통 보도이므로 「보도가 있다」로만 쓴다. 30.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2호(S/RES/82, 1950.6.25), 유엔 디지털 도서관(digitallibrary.un.org) — 북한군의 무력 공격이 평화 파괴라고 판정하고, 적대 행위를 멈추고 군대를 38도선까지 물릴 것을 요구한 결의. 찬성 9, 기권 1(유고슬라비아), 소련 대표는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신성모 1891, 채병덕 1916, 김일성 1912, 슈티코프 1907, 박헌영 1900, 마오쩌둥 1893, 저우언라이 1898, 백선엽 1920, 무초 1900, 트루먼 1884(위키백과 한국어·영어판). 다리고, 록웰, 라이트, 코너스, 러스크, 페이스, 히커슨, 제섭, 애치슨, 로신, 이주연, 바실리예프, 포스트니코프, 최용건, 스탈린은 출생연도를 대조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1945년 장면의 「서른세 살」은 1945년에서 김일성의 출생연도 1912를 뺀 나이다. [자료 충돌] 공격 개시는 미국 쪽 네 시, 슈티코프 네 시 사십 분. 개성 함락은 무초 아홉 시, 애플먼 아홉 시 반. 북한군 보병의 월경은 무초 전문이 여섯 시쯤, 애플먼(옹진)이 포격 삼십 분 뒤로 적었다. 채병덕이 보고받은 시각은 다섯 시(오마이뉴스)와 일곱 시 전군 비상(다른 자료)이 갈린다. 북한군 집결 기간은 슈티코프 6월 12~23일, 애플먼 6월 15~24일. 트루먼이 그날 밤 돌아가려 한 것을 애치슨이 말렸다는 매컬로의 서술과 달리, 애치슨이 먼저 주말을 마저 보내라고 했다고 적은 글도 있다. 1945년 10월 14일 대회 이름은 우리역사넷이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 대백과가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로 적었다. 김일성의 원산 상륙일은 우리역사넷이 9월 19일,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가 9월 25일로 적었다. 소련군 평양 진주는 우리역사넷이 공수 8월 24~25일·총사령부 8월 26일로, 다른 보도가 8월 22일로 적었다. 소련군 철수는 대백과 「한국전쟁」이 10월 시작으로 적었고, 완료는 12월 25일 발표를 따랐다. 창군 열병식 인원은 미군 정보 문서 안에서도 1만에서 2만 5천 명까지 폭이 있다. [재구성] 모든 대화와 장면 속 몸짓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연회 대화와 술 농담, 골짜기의 정치 명령 낭독과 「훈련이라더니」 한마디, 병사들이 포와 부대를 보고 알아챘다는 계기, 행군과 자정 무렵의 빗방울, 김일성이 손가락을 꼽는 모습과 「언제 시작하면 좋겠습니까?」라는 말(기록에는 슈티코프가 날짜 질문에 직답을 피했다고만 있다), 두 소련 장군이 서로 바라보는 모습, 마오쩌둥의 말투와 몸짓, 38선 경계병과 짝의 대화·흙투성이 손·노리쇠, 다리고와 집안일꾼의 대화와 차 안의 모습, 길가의 피란민, 문산에서 신발을 신는 모습, 백선엽과 록웰의 대화, 채병덕의 전화와 전령, 무초의 구술 모습, 암호실과 창밖 거리, 라이트 대령 귀에 속삭인 말(애플먼 원문 “You had better get back to Korea.”를 옮김), 코너스가 전문을 쓰는 모습, 트루먼이 수화기를 쥔 모습, 총참모부 상황실, 저우언라이와 로신의 자리가 여기에 든다. 정치 명령, 슈티코프의 전문과 보고, 스탈린 전문, 무초 전문, 매컬로의 문장과 애치슨의 말은 기록의 뜻을 살려 옮겼다. 1945년 공설운동장과 1948년 열병식 장면에서는 둑까지 찬 군중, 앞사람 어깨 사이로 고개를 뺀 사내와 옆 사람의 대화(김일성이 젊어 보인다는 말 포함)·팔꿈치·박수, 단상에 소련군 장교들이 서 있고 그 사이에서 김일성이 나온 모습(기록은 소련 군부가 이런 행사로 그에게 힘을 실었다는 것까지다), 행렬이 사열대 앞을 지나는 모습, 포의 바퀴를 세는 소련 장교와 언 발·군화 뒤축, 통역이 「내전」을 옮기는 순간이 여기에 든다. 김일성의 1948년 연설과 스탈린의 1950년 1월 30일 전문은 기록의 뜻을 살려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