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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17,051자)

인천상륙작전 — 바다에서 열린 문

1950 · 네오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4일~20일 — 영흥도(X-ray 첩보대·클라크 기지, 9.14 북한군 기습), 팔미도 등대(9.15 0시 무렵 점화), 서수도(미군 이름 「날치 수로」)를 거슬러 오른 선견 공격대, 월미도 그린비치(06시 33분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와 소월미도, 레드비치(현 동구 만석동, 17시 31~33분 미 해병 제5연대 제1·2대대, 뒤이어 국군 해병대 제1연대)와 묘지 언덕·관측소 언덕(응봉산), 블루비치(현 미추홀구 용현동, 미 해병 제1연대), 간조 때 드러나는 갯벌, 북한군 제226독립육전연대·

1950년 9월 10일 아침, 인천항 앞의 섬 월미도(현 인천 중구, 매립으로 육지와 이어짐) 동쪽 마을.

열일곱 살 전씨 소년은 비행기 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나왔다. 갈매기 날개처럼 꺾인 날개를 단 미 해병대 전투폭격기 코르세어들이 바다 쪽에서 낮게 들어왔다1. 월미도 동쪽 기슭에는 120가구, 600명쯤이 살았다2. 섬 꼭대기 숲에는 북한군의 포가 숨어 있었다. 비행기들은 그 포를 가린 숲을 태우러 온 길이었다.

첫 비행기가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휘발유를 젤리처럼 굳혀 채운 네이팜탄이었다. 땅에 닿자마자 불이 퍼졌다. 소년은 뒷날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2. “폭탄이 떨어지자마자 불이 확 붙어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됐다.”

스물일곱 살 유씨 부인은 속옷 바람으로 집을 뛰쳐나와 갯벌로 달렸다. 비행기가 다시 돌아와 기관총을 쏘았다. 갯벌에 엎드린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과 등에 진흙을 발라 주었다. 흰옷이 하늘에서 보이지 않게 하려는 손길이었다. 그날 세 차례에 걸쳐 네이팜탄 95통이 섬의 동쪽에 떨어졌다2. 유씨의 시아버지는 머리에 파편 두 개가 박힌 채 숨졌다2. 집집이 시신을 마당 한구석에 얕게 묻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무덤을 다 돌보지 못한 채 섬을 떠났다.

*

9월 14일 새벽, 영흥도(현 인천 옹진군 영흥면).

영흥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25킬로미터쯤 떨어진 섬이었다. 국군 해군 첩보대가 8월 중순 이 섬에 들어와 한 달 가까이 인천을 들여다보았다. 작전 이름은 엑스레이였다. 적의 몸속을 사진처럼 들여다본다는 이름이었다3. 대원들은 인천의 해안포 자리와 병력 배치, 물길에 깔린 기뢰를 살펴 미군에 넘겼다3.

같은 섬에 미 해군 유진 F. 클라크(39) 대위도 있었다4. 그는 9월 1일 이 섬에 내려 열네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 섬 소년 150명쯤을 모아 경비를 세웠다1. 청년들은 어부로 꾸미고 인천에 들어가 월미도의 포를 세고 방파제 높이를 쟀다. 어느 밤에는 클라크가 직접 작은 배를 저어 인천 방파제 밑까지 갔다. 물이 빠지자 그는 갯벌에 들어가 허리까지 빠졌다. 그날 밤 그가 보낸 무전은 짧았다1. “인천의 갯벌로는 병력도 차량도 상륙할 수 없음.” 그 갯벌을 건너지 않고 물이 가장 높이 찰 때 배를 방파제에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도 이 섬을 가만두지 않았다. 어느 날 병사들을 가득 태운 배들이 북한군 동력선의 호위를 받으며 건너왔다. 클라크는 엔진 하나짜리 낡은 나무 거룻배 삼판선을 빼앗다시피 끌어내 섬 청년 셋과 함께 맞섰다. 북한군 배가 전차포를 몇 발 쏘았지만 빗나갔다. 클라크의 배가 50구경 기관총을 길게 긁었다. 북한군 동력선이 가라앉았고, 병사 열여덟 명을 태운 배 한 척이 더 부서졌다1. 그는 밤낮으로 손 닿는 곳에 수류탄 하나를 두었다1. 산 채로 붙잡힐 생각이 없었다.

썰물이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이웃 대부도(현 경기 안산시 단원구)에는 북한군 400명이 들어와 있었다. 철수 명령은 이미 내려와 있었다. 짐을 꾸리던 새벽, 북한군 대대 하나가 영흥도에 올랐다. 첩보대원 임병래(28) 중위가 대원들을 배 쪽으로 밀었다5.

“먼저 나가라. 우리가 붙잡아 둔다.”

“같이 가셔야 합니다.”

“배가 작다. 어서.”

홍시욱(21) 하사가 소총을 들고 임병래 옆에 엎드렸다. 둘이 쏘는 사이 대원들이 탄 배가 섬을 떠났다. 퇴로가 끊기고 북한군이 둘을 에워쌌다6. 상륙은 하루 뒤였다. 붙잡혀 입을 열면 그 하루가 무너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5.

클라크도 기지를 버리고 배를 몰아 팔미도(현 인천 중구)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섬에 남은 주민 50명이 북한군에게 끌려가 총살되었다1.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있었다.

*

9월 14일 밤, 팔미도.

팔미도는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물길 어귀에 떠 있는 작은 섬이었다. 꼭대기에 등대가 서 있었다. 8월 20일 캐나다 구축함 애서배스컨호의 수병들이 이 섬에 올라 등대의 불과 무전기를 못 쓰게 만들어 놓았다7. 클라크는 며칠 전 이 섬을 둘러보고 등불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등대 계단 꼭대기에 앉아 기다렸다. 아래로 바다가 검었다. 함대가 올라올 물길은 미군 지도에 「날치 수로」라고 적힌 서수도였다. 좁고 구불구불했고, 물살이 셌고, 섬과 암초 사이를 뱀처럼 휘돌았다. 밤에 불 없이 그 길을 오르는 것은 눈을 감고 골목을 달리는 일과 같았다.

자정이 되자 클라크가 등대의 불을 내는 등명기에 불을 넣었다1. 렌즈가 돌며 빛줄기가 바다를 쓸었다. 한국 쪽 기록은 그 시각을 15일 0시 30분으로 적는다8.

새벽 두 시, 구축함 맨스필드호를 앞세운 배 열아홉 척이 수로 어귀로 들어섰다1. 함장들과 항해사들은 레이더 화면에 이마를 붙이다시피 하고 뱃길을 더듬었다. 가장 위험한 굽이에서 팔미도의 불빛이 깜박였다. 함교의 누군가가 그 불빛을 가리켰다. 영흥도에 남은 두 사람은 그 불빛을 보지 못했다.

*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 지휘함 마운트매킨리호.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70)는 함교의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작전을 밀어붙인 것은 그였다. 도쿄의 회의에서 해군은 조수와 갯벌과 좁은 수로를 들어 반대했고, 육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너무 멀다고 반대했다. 미 극동해군사령관 조이 제독은 성공 확률을 5,000분의 1로 보았다고 전해진다8. 그 반대를 넘어 9월 8일 워싱턴의 미군 최고 지휘 기구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아 낸 사람이 맥아더였다7. 상륙을 지휘하는 것은 해군 제독들과 해병 장군들이었다. 맥아더는 듣고 지켜보았다.

배들에 탄 병력은 7만 명에 가까웠다9. 함정 261척 가운데 국군 함정이 15척이었다8. 해안에 배를 올려 뱃머리 문을 열고 전차와 짐을 토해 내는 전차상륙함 47척 가운데 30척 남짓은 일본인 선원이 몰았다7. 뒷날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이 작전이 일본에서 「상식 작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말했다8. 맥아더는 도쿄의 기자들이 다 짐작하고도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인천 앞바다의 물은 하루 두 번, 9미터 넘게 오르내렸다8. 이날 아침 만조가 여섯 시 오십구 분, 저녁 만조가 일곱 시 십구 분이었다9. 물이 빠지면 넓은 곳은 4킬로미터나 되는 갯벌이 드러났고, 배는 한 척도 해안에 닿지 못했다8. 그래서 상륙은 두 번으로 나뉘었다. 아침 물에 월미도를 먼저 치고, 저녁 물에 시내를 친다7.

다섯 시 사십오 분, 순양함들의 포가 인천을 향해 주황색 불꽃을 뿜었다1. 여섯 시, 코르세어들이 월미도의 무전탑 언덕(현 월미산)에 로켓과 폭탄을 퍼부었다. 이어 배 바닥이 평평한 로켓함 세 척이 섬 바로 앞까지 다가와 로켓 수천 발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

같은 새벽, 월미도 북쪽 끝의 동굴, 북한군.

동굴 천장에서 흙이 쏟아졌다. 북한군 제226독립육전연대 제3대대와 제918해안포연대 일부, 400명쯤이 이 섬을 지키고 있었다1. 대부분 얼마 전 징집되어 총 쏘는 법을 겨우 배운 신병이었다. 해안포 몇 문은 이틀 동안 쏟아진 함포에 이미 부서져 있었다. 이틀 전 구축함들이 일부러 섬 앞 800야드까지 들어와 포를 쏘았고, 해안포가 응사하는 순간 그 자리가 드러나 하나씩 꺼졌다1.

병사 하나가 동굴 입구로 기어가 바다를 내다보았다. 앞판이 평평한 작은 배들이 하얀 물살을 끌며 줄지어 오고 있었다. 그는 기관총 옆의 동료를 돌아보았지만, 동료는 귀를 막은 채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고 있었다.

*

15일 여섯 시 삼십삼 분, 미군이 그린비치(현 월미도 선착장 부근)라 이름 붙인 월미도 북쪽 해안.

로버트 D. 태플릿(32) 중령의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그린비치의 해수욕장에 올랐다10. 부서진 배 조각이 모래밭을 덮어 내릴 자리는 50야드도 되지 않았다1. 병사들은 아코디언처럼 몸을 오므려 좁은 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총알 몇 발이 날아왔을 뿐이었다. 전차상륙정 세 척이 미군 중전차 M26 퍼싱과 불도저 전차를 내려놓았다.

여섯 시 오십오 분, 앨빈 E. 스미스 중사가 무전탑 언덕 꼭대기의 포탄에 찢긴 나무에 성조기를 묶었다1. 마운트매킨리호의 스피커가 그 소식을 전하자 맥아더가 회전의자에서 일어났다1. “됐군. 커피나 한잔하지.”

섬 북쪽 해안 절벽에서는 아직 싸움이 남아 있었다. 예비중대 앞에 수류탄이 쏟아졌다. 북한군 한 소대가 굴에서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고는 다시 숨었다. 중대의 통역병이 굴 쪽으로 기어가 소리쳤다.

“나와라! 다 끝났다! 나오면 산다!”

대답은 수류탄이었다. 중대장이 불도저 전차를 불렀다. 전차의 삽날이 흙과 돌을 밀어 굴 입구를 하나씩 막았다. 다른 굴에서는 전차가 포탄 두 발을 쏘아 넣자 검은 연기와 함께 북한군 서른 명이 손을 들고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1.

일곱 시 사십오 분, 태플릿의 무전이 지휘함에 닿았다1. “포로 45명. 저항 미약.” 여덟 시, 섬이 넘어갔다1. 맥아더는 선실로 내려가 해군 제독에게 전문을 썼다. “해군과 해병대가 오늘 아침보다 더 빛난 적은 없었다.” 해병대는 옛 유원지의 수영장에 철조망을 둘러 포로를 몰아넣었다1.

섬 남서쪽 끝에는 등대가 선 작은 섬 소월미도(현 월미도 남서쪽 매립지)가 750야드 길이의 좁은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열 시 무렵 존 D. 카운설먼 소위가 분대 하나와 전차 몇 대를 이끌고 둑길 입구로 다가가자 맞은편에서 기관총이 쏟아졌다. 북한군 한 소대가 끝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코르세어가 내려와 소월미도를 네이팜으로 덮었고, 박격포탄이 머리 위로 날아갔다. 전차를 앞세운 분대가 몸을 숨길 데 없는 둑길을 한 줄로 건넜다. 열 시 사십팔 분에 건너편에 닿았고, 열한 시 십오 분에 큰 싸움이 끝났다. 열아홉 명이 손을 들었고 열일곱 명이 전사했다. 죽은 사람 가운데에는 뭍까지 헤엄쳐 가려다 물에 잠긴 병사들도 있었다. 그날 월미도와 소월미도에서 포로 136명이 나왔고 북한군 108명이 전사했다. 굴과 참호에 묻힌 사람은 150명쯤으로 셈해졌다. 해병대는 열일곱 명이 다쳤고 죽은 사람은 없었다1.

*

15일 낮, 월미도 무전탑 언덕.

한 시가 되자 물이 빠졌다. 섬은 끝없는 갯벌 한가운데 남았다. 지원 함정들은 포를 멈춘 채 수로에 떠 있었고, 다음 물이 들어올 때까지 태플릿의 대대는 혼자였다. 북한군 전차가 시내에서 튀어나와 둑길로 몰려올 수도 있었다. 태플릿은 시내가 너무 조용하다고 보고, 전차와 보병을 묶어 둑길을 건너 시내 쪽 상륙 지점 레드비치(현 인천 동구 만석동)를 먼저 치게 해 달라고 무전을 쳤다. 지휘함의 대답은 「불가」 한마디였다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함포 사격을 부르는 연락장교 조지프 R. 웨이어스키 소위는 쌍안경으로 시내를 살폈다. 배를 대는 안쪽 선거 둘레에서 사람들이 무리 지어 움직였다. 그는 함포 사격을 요청했다. 다시 보니 그 사람들은 쌀 더미에 달려든 주민들이었다. 그는 사격을 곧바로 취소했다1. 쌀자루를 진 사람들이 잿빛 거리로 흩어졌다.

*

15일 오후 다섯 시 반, 레드비치 앞 상륙정.

오후 들어 비가 뿌렸다. 시내가 타는 연기와 빗구름이 엉겨 하늘이 저녁처럼 어두워졌다. 다섯 시 오 분, 로켓함들이 이십 분 동안 로켓 6,000여 발을 레드비치와 그 남쪽 상륙 지점 블루비치(현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 쏟았다1.

레드비치에는 모래밭이 없었다. 높은 돌 방파제가 바다를 막고 있었고, 물이 다 차지 않은 시각이라 방파제는 상륙정 앞판보다 1미터 넘게 솟아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사다리를 들고 왔다. 일본 항구 도시 고베에서 알루미늄 사다리를 주문했는데 다 만들지 못해 나머지는 나무로 짰다1.

상륙정 안에서 해병 하나가 사다리 끝의 갈고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무슨 중세 성 공격이야?”

“그럼 끓는 기름 조심해.”

“투구는 안 주나?”

“철모 쓰고 있잖아.”

웃음이 터지기도 전에 배가 방파제에 부딪혔다. 다섯 시 삼십일 분, 오른쪽의 E중대가 먼저 벽에 닿았다1. 사다리가 올라갔고, 수류탄이 벽 너머로 날아갔다. 폭발음이 그치자 병사들이 하나씩 벽을 넘었다. 출렁이는 배에 걸친 사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

같은 시각, 레드비치 북쪽, 미군 지도에 묘지 언덕이라 적힌 언덕 밑.

다섯 시 삼십삼 분, A중대의 배들이 묘지 언덕 아래 방파제에 닿았다1. 왼쪽 참호와 바로 앞 벙커에서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먼저 넘은 병사 몇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남은 병사들은 벽 아래 좁은 땅에 몸을 붙였다.

두 번째 물결로 제3소대장 볼도메로 로페스(25) 중위가 올라왔다11. 그가 사다리를 딛고 벽을 넘는 모습이 사진에 남았다. 그는 벙커 옆으로 다가가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다. 던지려는 순간 총알이 그를 쓰러뜨렸다. 수류탄이 손에서 빠졌다. 일어나 다시 던질 힘이 없었다. 로페스는 그 수류탄을 몸 밑으로 끌어안았다11.

화염방사기를 멘 해병 둘이 벙커로 달려들었다가 둘 다 쓰러졌다. 중대장이 부중대장 프레드 F. 유뱅크스 중위에게 소리쳤다.

“왼쪽 맡아! 정리해서 움직이게 해!”

유뱅크스는 벙커 안의 북한군과 수류탄을 주고받다가 화염방사기를 다시 불렀다. 그 사이 프랜시스 W. 뮤첼 소위의 소대가 언덕 남쪽 비탈로 돌아 올라갔다. 꼭대기의 참호에서 북한군 제226연대 박격포중대원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포격에 넋이 나간 그들은 총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묘지 언덕을 넘겨받는 데 십 분이 걸렸다1.

다섯 시 오십오 분, 묘지 언덕에서 노란 신호탄이 올랐다. 해안에서 보낸 반 시간 동안 A중대는 여덟 명이 전사하고 스물여덟 명이 다쳤다1.

*

15일 저녁, 레드비치와 블루비치.

여섯 시 반, 탄약과 식량을 실은 전차상륙함 여덟 척이 레드비치로 밀고 들어왔다. 미군 지도에 관측소 언덕(현 인천 중구 응봉산 자유공원)이라 적힌 시내 언덕에서 기관총이 번쩍이자 함상의 포수들이 40밀리 기관포를 마구 쏘았다. 그 탄이 방금 내린 제5연대 제2대대 병사들을 덮쳤다. 한 명이 전사하고 스물세 명이 다쳤다1. 일곱 시 무렵 여덟 척이 모두 방파제에 배를 댔다. 배들은 물이 빠진 갯벌에 그대로 앉아 밤새 탄약을 내리고 다친 병사를 받았다.

남쪽 블루비치에서는 미 해병 제1연대가 물에 뜨는 상륙장갑차를 타고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의 조종사들 눈에도 블루비치는 보이지 않았다. 몇 대는 길을 잃고 염전 둑에 닿았다. 그쪽 방파제도 높이가 4.5미터였다7. 병사들은 장갑차에서 내려 사다리로 벽을 넘었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 병사들도 그 저녁 미 해병대를 따라 뭍에 올랐다12. 제3대대 제10중대 1소대 1분대장 이봉식(19)은 분대원 열두 명을 데리고 내렸다13. 분대마다 흩어져 방공호를 팠다. 밤 아홉 시쯤 그는 처음으로 전투식량을 뜯었다14. 연대에는 그해 여름 제주에서 뽑은 3기·4기 신병이 많았다14.

이날 상륙 부대의 손실은 전사 20명, 부상 후 사망 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이었다1. 다음 날 새벽 한 시 반, 해병대는 그날의 목표선을 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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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인천 시내.

아침이 되자 두 해병 연대가 시내 바깥에서 손을 맞잡았다. 인천 안에 남은 북한군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미 해병대는 시내를 돌아 동쪽으로 나아갔고, 시내 안쪽 소탕은 국군 해병대가 맡았다1.

무너진 골목마다 국군 해병대가 문을 두드렸다. 두 달 넘게 북한군 치하에 살았던 사람들이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누가 북한이 세운 행정 기관 인민위원회에 나갔는지, 누가 북한군에게 밥을 해 주었는지 가려내는 일이 골목마다 벌어졌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날의 소탕을 이렇게 적었다9. “국군 해병대가 인천의 소탕을 맡았고,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항구 도시에서 적이든 아군이든 안전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청년이 크게 다친 할아버지를 손수레에 싣고 텅 빈 큰길을 내려왔다2. 미 해군 수술팀은 상륙 첫날부터 그 무렵까지 군인 42명과 민간인 32명을 치료했다1.

같은 날 아침, 서울 쪽 큰길에서 북한군 T-34 전차 여섯 대가 인천을 향해 내려왔다. 코르세어 편대가 네이팜과 폭탄을 퍼부었다. 땅에서 쏜 탄에 윌리엄 F. 심프슨 대위의 비행기가 맞아 불타는 전차 옆에 떨어졌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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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 새벽, 부평(현 인천 부평구)의 옛 미군 보급기지 아스콤 시티 서쪽, 미 해병 제5연대 제2대대.

다섯 시 사십오 분, D중대 본진 앞에 나가 지키던 전초 소대가 동쪽 길에서 흐릿한 전차 그림자 여섯 개를 보았다. 전차 위에 북한군 보병이 올라타 있었다. 전차들은 숨어 있는 전초 바로 옆을 지나갔다. 여섯 시, 75야드 거리에서 어깨에 메고 쏘는 로켓 발사기 바주카포가 첫 전차에 불을 붙였다. 퍼싱 전차와 포탄 뒤로 가스를 뿜어 반동을 지우는 무반동총이 함께 쏘았다. 오 분 만에 전차 여섯 대가 모두 불탔고 따라오던 보병 250명 가운데 200명이 전사했다9. 해병대는 한 명이 다쳤다9.

그날 아침 맥아더가 처음으로 뭍에 올랐다. 그는 장군들과 함께 지프를 타고 그 자리까지 와서 아직 연기를 내는 전차들을 내려다보았다9.

그날 저녁 여섯 시, 제2대대가 김포비행장(현 김포국제공항) 가장자리에 닿았다. 활주로를 지키던 북한군 400~500명은 활주로에 지뢰 하나 묻지 않았다9. 밤사이 북한군이 중대 규모로 몇 차례 되받아쳤다가 물러났다. 18일 오후 두 시 구 분, 해병대 코르세어 한 대가 김포 활주로에 바퀴를 내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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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아침, 인천시청(현 인천 중구청) 앞.

포탄 자국이 남은 시청 현관에 700명쯤이 모였다1. 미 해병 제1사단장이 인천의 임시 시장을 세우는 날이었다. 북한군 치하에서 갇혀 지내던 표양문(43)이 단 위에 섰다2. 해병대 통역관이 선창하자 사람들이 애국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포고문이 한국말과 영어로 두 번 읽혔다1.

같은 무렵 미 육군 제7사단이 인천항에 내렸고, 그 사단에 붙은 국군 육군 제17연대가 뒤따랐다8. 시내에서는 죽은 사람을 묻고 고아를 거두고 쌀과 옷을 나누는 일이 시작되었다. 9월 7일부터 이어진 폭격에 시내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2. 그 폭격에 몇 명이 죽었는지는 지금도 셈해지지 않았다.

*

9월 20일, 서울 서쪽 한강의 옛 나루 행주나루(현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대교 부근).

미 해병 제5연대가 한강을 건넜다. 국군 해병대 대대 하나가 그 뒤를 따랐다1. 강 건너는 서울이었다. 낙동강 전선의 유엔군은 16일부터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중이었고, 9월 26일 오산 근처에서 남북 두 부대의 선두가 만났다8. 그리고 9월 28일, 서울이 다시 국군과 유엔군의 손에 들어왔다8.

*

그 뒤.

북한은 이 해안을 다르게 기억한다. 1982년에 만든 북한 영화 「월미도」에서는 해안포 중대장 리대훈과 포병들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며 사흘 동안 상륙을 막는다15. 2016년 북한의 대남 웹사이트는 해안포 4문을 가진 중대 하나가 맥아더의 대군을 “3일간이나 좌절시켰다”고 적었다16. 미국 쪽 기록에서 월미도는 상륙 한 시간 반 만에 넘어갔다1.

그 기억의 뿌리는 1950년 9월 27일 김일성의 연설에 있다. 도당위원장 협의회에서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와 당 단체들의 과업」이라는 이름으로 한 연설이었다. 그는 인천과 서울을 지키던 인민군이 여러 날 미군을 막았고, 월미도 해안포 진지의 병사들은 수십 배 수백 배의 적과 육박전까지 벌였다고 말했다.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라는 말을 처음 쓴 것도 이 연설이었다20. 석 달 뒤 별오리의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예비대가 없었고 인천에서 앞뒤가 잘렸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훗날 북한은 인천 뒤의 패주를 계획된 전략적 후퇴라고 부르게 되었다21.

월미도의 동쪽 마을은 다시 서지 못했다. 2008년 과거사를 조사하는 국가 기구 진실화해위원회는 그날 폭격으로 민간인이 적어도 100명 죽었다고 밝히고, 위령 사업과 주민들의 귀향을 권고했다2. 위령비가 서기까지 13년이 더 걸렸다17. 비문에 「미군」이라는 두 글자를 새길지를 두고 오래 다툰 끝에 그 글자가 들어갔다17. 귀향 권고는 2023년까지도 이행되지 않았다.

1953년 미국은 임병래와 홍시욱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주었고, 이듬해 한국 정부는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18. 2012년 해군은 새 유도탄고속함 두 척에 두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19.

팔미도 등대는 지금도 서 있다. 그 불이 다시 켜진 밤, 영흥도의 두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사료 출처

1. Lynn Montross·Nicholas A. Canzona,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ume II: The Inchon-Seoul Operation」(미 해병대 역사과, 1955), 제4장 「The Planning Phase」·제5장 「Embarkation and Assault」·제6장 「Hitting the Beaches」·제7장 「Securing the Beachhead」·제8장 「On to Kimpo」, Project Gutenberg 전자책 65008(gutenberg.org/cache/epub/65008/pg65008.txt) — 알루미늄 사다리 주문과 나무 사다리 대체, 클라크의 영흥도 상륙(9월 1일)·14~18세 소년 약 150명·갯벌 시험과 무전 문구(원문 Inchon not suitable for landing either troops or vehicles across the mud)·영흥도 주민 50명 학살·「14일 자정」 등대 점화, 9월 10일 VMF-214·323의 네이팜 공격, 13일 구축함 800야드 접근과 해안포 노출, 15일 02시 선견 공격대 19척(맨스필드 선두)과 팔미도 불빛, 05시 45분 함포·06시 항공 공격, 06시 33분 그린비치 상륙·50야드 미만 해안, 06시 55분 앨빈 E. 스미스 중사의 성조기, 맥아더의 말(원문 That's it. Let's get a cup of coffee.), 예비중대(I중대)와 통역병의 투항 권고·불도저 전차·굴에서 나온 30명, 07시 45분 태플릿 무전(원문 Captured 45 prisoners. Meeting light resistance.), 08시 점령, 맥아더가 스트러블 제독에게 보낸 전문(원문 The Navy and Marines have never shone more brightly than this morning.), 소월미도(750야드 둑길, 카운설먼 소위, 네이팜, 10시 48분 도착·11시 15분 종료, 투항 19·사살 17, 헤엄쳐 달아나려던 병사), 클라크의 해상 교전(37밀리 전차포, 50구경 기관총, 동력선 격침, 18명 탄 배 파괴)과 늘 지닌 수류탄, 태플릿의 둑길 돌파 건의와 지휘함의 거절(원문 a firm “negative”), 수영장 포로수용소, 포로 136·사살 108·매몰 추정 약 150·부상 17, 수비대 약 400명(제226연대·제918해안포연대 제2대대 2개 중대, 신병), 13시 간조, 웨이어스키 소위가 쌀 더미 주민을 보고 함포 요청을 취소한 일, 17시 05분 로켓 6,000여 발, 방파제가 상륙정 앞판보다 약 4피트 높음, 17시 31분 E중대·17시 33분 A중대, 로페스의 전사, 유뱅크스에게 내린 명령(원문 take over on the left and get them organized and moving), 뮤첼 소대의 묘지 언덕 점령(약 10분)과 제226연대 박격포중대 투항, 17시 55분 신호탄, A중대 전사 8·부상 28, 18시 30분 LST 8척과 오인 사격(전사 1·부상 23), D데이 손실 전사 20·부상 후 사망 1·실종 1·부상 174, 수술팀의 군인 42명·민간인 32명 치료, 16일 국군 해병대의 시내 소탕, 18일 시청 임시시장 취임식(약 700명, 애국가, 국문·영문 포고문), 9월 20일 10시 행주 부근 한강 도하와 국군 해병대 제2대대의 후속 도하. 2. 박경호, 「인천상륙작전, 빛과 그림자」 상·하(경인일보, 2023.4.10·2023.4.24, 전북일보 재게재), jjan.kr/article/20230410580123·jjan.kr/article/20230424580177 — 레드비치 현 동구 만석동·블루비치 현 미추홀구 용현5동, 표양문(1907~1962) 임시시장, 국군 해병대 제3대대의 부평역 일대 교전, 월미도 동쪽 마을 120가구 약 600명, 9월 10일 미 해병 항공기의 3차례 폭격과 네이팜 95통,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과 최소 100명 희생, 전씨(당시 17세)·유씨(당시 27세) 증언, 시아버지의 파편 두 개, 9월 7~21일 시내 폭격, 9월 16일 르포의 손수레 장면. 3. 한국어 위키백과, 「엑스레이 작전」 — 작전 이름의 뜻과 첩보 내용. 4. 영문 위키백과, 「Eugene F. Clark」 — 1911.7.18~1998.6.26. 5. 인천광역시, 「호국인물 임병래」, incheon.go.kr/IC010305/1421756 — 1922년 평양 출생, 1950년 4월 해군소위 임관, 9월 14일 북한군 1개 대대의 공격, 대원을 먼저 탈출시키고 권총으로 자결. 6. 한국어 위키백과, 「홍시욱」 — 1929.5.27~1950.9.14, 1948년 해군 신병 10기. 7. Donald W. Boose Jr., 「Over the Beach: US Army Amphibious Operations in the Korean War」(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08, 17화 출처와 같은 책), 「Operation CHROMITE」 161~178쪽과 지도 15·16·19 — 32피트 조수와 갯벌, 방파제와 사다리, 그린비치를 먼저 잡고 저녁 물에 레드·블루비치를 치는 두 단계 계획, 전차상륙함 47척 중 30척 일본인 승조, 8월 20일 애서배스컨호 수병의 팔미도 등명기·무전기 파괴, 클라크·연정·계인주의 트루디 잭슨 작전, 9월 14일 북한군 공격과 팔미도 점등, 06시 33분 상륙과 325피트 무전탑 언덕, 블루비치 15피트 방파제와 미 육군 제56상륙전차대대 A중대, 9월 8일 합동참모본부의 승인 전문. 8. 구자룡, 「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집념, 인천상륙작전」(동아일보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8회, 2023.7.5), v.daum.net/v/20230705110013899 — 팔미도 등대 9월 15일 00시 30분 점화, 조이 제독의 5,000분의 1, 함정 261척(국군 15척), 국군 해병 제1연대·육군 제17연대 참가, 조차 약 9미터·갯벌 최대 4킬로미터, 영흥도 해군 8명·대한청년단 6명 전사, 애치슨이 전한 「상식 작전」 별명, 9월 26일 오산 합류·28일 서울 수복. 9.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1화 출처와 같은 책),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제25장 「The Landing at Inch'on」 — 15일 조차 31.2피트, 아침 만조 06시 59분(일출 45분 뒤)·저녁 만조 19시 19분(일몰 27분 뒤), 13일 구축함 교전과 스웬슨 중위 전사, 투입 병력 약 7만 명, 월미도 수비대(제226독립육전연대 제3대대·제918포병연대), 인천 수비대 약 2,000명, 국군 해병대의 소탕(원문 The ROK Marines now took over mop-up work in Inch'on and went at it with such a will that hardly anyone in the port city, friend or foe, was safe.), 16일 T-34 6대와 심프슨 대위 전사, 17일 05시 45분 전차 매복·75야드 바주카·5분 만에 6대 격파·보병 250명 중 200명, 맥아더의 상륙과 현장 방문, 17일 18시 김포 도착·수비대 400~500명·지뢰 미매설, 18일 14시 09분 코르세어 착륙. 10. 영문 위키백과, 「Robert Taplett」 — 1918.12.10~2004.12.17. 11. 영문 위키백과, 「Baldomero López」 — 1925.8.23~1950.9.15, 명예훈장 공적서. 12. 강승훈, 세계일보(2023.9.28), segye.com/newsView/20230926517731 — 세 해안의 현재 위치와 표지석, 국군 해병대의 15일 레드비치 후속 상륙. 13. 연합뉴스(2024.3.23, 위키트리 재게재), wikitree.co.kr/articles/937188 — 이봉식 1931.2.19 충북 보은 출생, 해병대 1기, 제1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 1분대장, 분대원 12명. 14. 홍성식, 경북매일(2022.9.14), kbmaeil.com/article/202209140343847 — 이봉식의 9월 10일께 제주 출발, 오후 다섯 시 상륙 지시, 분대별 방공호, 밤 아홉 시 전투식량, 제주 출신 3·4기. 15. Wilson Center 블로그, 「Inchon Landing on the Big Screen」 — 북한 영화 「월미도」 줄거리(사흘 지연). 16. 정영, 「북한의 황당한 ‘월미도 방어’ 주장」(자유아시아방송, 2016.8.3), rfa.org/korean/weekly_program/media_in_out/MediaInandOut-08032016100307.html — 우리민족끼리 2016.7.30 글의 「1개 해안포병중대가 단 4문의 해안포로」 「3일간이나 좌절시켜」, 영화 「월미도」의 리대훈 중대장. 17. 박경호, 경인일보(2021.11.26), kyeongin.com/article/1573267 — 월미도 위령비 건립까지 13년, 비문의 「미군」 명기를 둘러싼 갈등. 18. 김필재, 뉴데일리(2016.7.30), newdaily.co.kr/site/data/html/2016/07/30/2016073000014.html — 임병래·홍시욱 1953.7.6 미국 은성훈장·1954.1.4 을지무공훈장, 유도탄고속함 임병래함·홍시욱함. 19. 뉴데일리(2012.11.20), newdaily.co.kr/site/data/html/2012/11/20/2012112000042.html — 유도탄고속함 임병래함·홍시욱함 함명 제정. 20. 김일성,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와 당 단체들의 과업」(도당위원장 협의회 연설, 1950.9.27), 『Kim Il Sung Works』 vol. 6, 108~115쪽(1981) — 인천·서울 방어 「여러 날」, 월미도 해안포 진지의 육박전,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라는 표현. 연설은 상륙을 「지난 13일」로 적었으나 실제 상륙은 9월 15일이고 13일은 함포 사격이 시작된 날이다. 북한의 주장이다. 21. 자유아시아방송(RFA), 2021.6.25(rfa.org/english/news/korea/625-06252021155957.html) — 북한이 인천 뒤의 패주를 계획된 전략적 후퇴로 다시 꾸몄다는 평가. 별오리 보고의 자기비판은 3화 출처 3.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클라크 1911년생, 임병래 1922년생(인천시 호국인물), 홍시욱 1929년생(한국어 위키백과), 맥아더 1880년생(영문 위키백과), 태플릿 1918년생(12월생이라 1950년 9월에는 만 서른하나), 로페스 1925년생, 이봉식 1931년생(2월생이라 만 열아홉), 표양문 1907년생(경인일보 2023.4.10). 전씨·유씨는 기사에 성과 당시 나이만 나와 그대로 적었다. 앨빈 E. 스미스, 웨이어스키, 유뱅크스, 뮤첼, 심프슨, 조이 제독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팔미도 점등 시각 — Montross는 「14일 자정」, 동아일보 2023은 「15일 00시 30분」. 본문은 자정에 불을 넣었다고 쓰고 한국 쪽 시각을 함께 적었다. [자료 충돌] 일본인 승조 LST — Boose는 47척 중 30척, Appleman은 47척 중 37척. 본문은 「30척 남짓」. [자료 충돌] 조차 — Appleman 31.2피트(약 9.5미터, 최대 33피트), Boose 32피트, Montross 「30피트 이상」, 동아일보 약 9미터. 본문은 「9미터 넘게」. [자료 충돌] D데이 손실 — Montross·Appleman 전사 20(부상 후 사망 1 별도)·실종 1·부상 174, 동아일보 전사 21·실종 1·부상 174. 부상 후 사망을 전사에 넣었는지의 차이로 보인다. [자료 충돌] 월미도 점령 — Montross·Boose는 08시 점령, 경인일보는 「3시간 만에」. 국군 해병대 제1연대장 — Montross의 편성표는 「Col SHIN」(신현준), Boose는 「Lieutenant Colonel Kim Sung Eun's 3,000-man 1st KMC Regiment」. 본문은 연대장 이름을 적지 않았다. 국군 해병대 상륙 시각 — Boose는 9월 16일 상륙, 이봉식 회고와 세계일보는 15일 레드비치 후속 상륙. 본문은 이봉식 회고를 따라 15일 저녁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표양문 — 경인일보는 「전직 인천시장」, Montross는 「지난 선거에서 시장에 낙선한 정치범」(원문 the losing candidate for the mayoralty in the last election)으로 적었다. 본문은 북한군 치하에서 갇혀 지냈다고만 적었다. [자료 충돌] 영화 「월미도」 제작 연도 — 대한지리학회지 논문과 Wilson Center 블로그는 1982년, 자유아시아방송은 「1983년경」. 본문은 1982년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월미도 함락 — 북한(우리민족끼리 2016, 영화 「월미도」)은 사흘 저지, 미 해병대 전사는 상륙 한 시간 반 만에 섬 장악. 둘 다 적었다. [재구성] 전씨 소년이 마당으로 나오는 대목과 갯벌의 몸짓, 영흥도에서 임병래와 대원들의 대화 문장(대원을 먼저 탈출시킨 사실은 인천시 자료), 홍시욱이 임병래 옆에 엎드리는 장면, 클라크가 등대 계단에서 기다리는 장면, 함교에서 불빛을 가리키는 몸짓, 북한군 병사의 동굴 장면 전부, 통역병의 투항 권고 문장(권고 사실은 Montross), 클라크와 함께 배에 탄 「섬 청년 셋」(원문 three friendly Koreans), 웨이어스키가 쌀자루를 보는 장면의 묘사, 상륙정 안의 사다리 농담, 로페스의 마지막 몸짓 가운데 수류탄이 손에서 빠지는 순서(공적서와 Montross의 요지에 따름), 국군 해병대가 골목에서 문을 두드리는 장면, 시청 앞 장면의 세부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흰옷이 하늘에서 보이지 않게」라는 까닭은 증언에 없는 해석이다. 레드비치의 「묘지 언덕」은 미군 지도의 Cemetery Hill, 「관측소 언덕」은 Observatory Hill(현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으로 보임)을 옮긴 말이다.

1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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