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15,965자)
장사상륙작전 — 돌아갈 길은 바다뿐이었다
1950 · 네오
1950년 9월 14일 오후, 부산항 제4부두.
줄을 선 소년들에게 백설기가 한 덩이씩 돌아갔다. 이기일은 떡을 받아 들고 한참 내려다보았다. 황해도 벽성(현 북한 황해남도 벽성군)에서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동생 손을 잡고 서울로 온 것이 한 해 전이었다. 피란길이 경남 밀양에서 멈춘 곳에 학도병을 모집하는 군인들이 있었다. 그의 기억으로 그해 나이는 열여섯이었고, 걷고 서는 기본 동작을 익히는 제식훈련은 한 주를 채우지 못했다1.
부산에 닿은 뒤에는 봉투를 하나씩 받았다. 머리카락을 조금 자르고 손톱을 깎아 넣어 부대에 냈다1. 그 봉투가 어디에 쓰이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옷차림은 제각각이었다. 북한군 군복을 받은 아이가 있었고, 교복을 그대로 입은 아이가 있었고, 농사짓던 무명옷 차림도 있었다2. 손에 든 총은 더 제각각이었다. 카빈 소총, 일본군이 쓰던 99식 소총, 노획한 소련제 기관단총. 이기일이 속한 화기중대 제5중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받았는데, 그것도 북한군이 쓰던 물건이었다1. 한 사람 앞에 미숫가루 세 봉지와 수류탄 두 개, 실탄 300발이 돌아갔다1. 나흘을 버틸 양식이라고 했다.
대구 대건중학교 5학년 류병추는 8월에 과수원에서 부모의 사과 농사를 거들다가 모병 소식을 들었다3. 할아버지와 부모가 말릴 것을 알았기에 입은 옷 그대로 대구역으로 나갔다. 그의 말로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4. 밀양의 농장에서 보름 동안 강을 건너고 산을 타고 총을 쏘았다. 수저가 없어 밥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훈련 중에 교관이 집에 갈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류병추는 손을 들지 않았다4.
오후 네 시, 2,700톤급 전차상륙함 문산호가 부두를 떠났다5.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가 그 배에 타고 있었다. 대원 가운데 목적지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
같은 날 밤, 동해, 문산호 조타실.
선장 황재중(42)은 유리창에 부딪히는 물보라 너머로 앞서가는 미 해군 구축소해함, 기뢰도 치우는 구축함 엔디콧호의 불빛을 좇았다. 문산호는 1943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지은 상륙함이었다6. 해방 뒤 한국 정부가 사들였고, 대한해운공사가 석탄과 밀가루를 날랐다. 전쟁이 나던 날 황재중은 묵호항(현 강원 동해시)에서 석탄을 싣던 참이었다. 그날 그는 묵호경비부 대원들을 태워 포항으로 내려갔고, 7월 말에는 여수 부두에 배를 대 놓고 기다리다가 쫓겨 오는 육군 병력 600여 명과 차량을 실어 냈다7. 선장도 선원 마흔두 명도 군번이 없었다.
일본 규슈 앞바다에서 올라온 태풍 케지아가 동해를 휘젓고 있었다. 파도가 3미터를 넘었다2. 뱃머리가 들렸다가 떨어질 때마다 아래 선창에서 토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선창에서는 소문이 돌았다. 누군가 방금 한국과 일본 사이의 섬 쓰시마를 지났다고 했다1.
“일본 간다. 일본 가서 훈련받는 거다.”
“일본까지 가서 미숫가루 먹고 훈련받나?”
“가 보면 미국 사람들이 쌀밥 주겠지.”
이기일은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멀미가 위장을 뒤집어 놓았다. 일본이든 어디든 배에서 내리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산호는 일본 쪽으로 가지 않았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
9월 15일 새벽, 장사동(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앞바다.
장사동은 포항에서 북쪽으로 26킬로미터, 영덕에서 남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어촌이었다. 모래밭 뒤로 해송이 줄지어 섰고, 그 뒤로 200미터 남짓한 야산이 해안을 감쌌다. 한 달 전 국군 제3사단이 북한군에 밀려 배를 타고 빠져나간 독석동(현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해변이 고개 하나 너머에 있었다. 해안을 밝혀 주기로 했던 조명탄은 모자라서 출항 전에 지원이 취소되었다2. 바다와 해안이 안개 하나로 붙어 있었다.
대대장 이명흠 대위가 해안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황재중이 고개를 저었다.
“저기는 너무 위험합니다.”
“작전 지점이오. 저기 대시오.”
황재중은 대대장의 얼굴을 잠깐 보다가 키를 돌렸다. 선원들이 선미 닻을 내렸다. 배를 해안과 직각으로 붙들어 두고, 상륙이 끝나면 배를 바다로 다시 끌어낼 닻이었다. 닻줄이 내려가자마자 끊어졌다2. 뱃머리가 모래에 닿는 순간 바람과 파도가 배를 옆으로 돌려 세웠고, 배 밑바닥이 바위 위로 끌려가며 찢어졌다.
그때 해안 양쪽 고지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탄알이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창 안까지 울렸다. 다섯 시 반, 이명흠의 상륙 명령이 떨어졌다6. 살아남은 대원들은 그 명령을 이렇게 기억했다.
“바다에 빠져 물고기밥이 되느니 육지에 올라가 까마귀밥이 되자.”
여섯 시쯤, 문산호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채 바위에 쐐기처럼 박혀 옆으로 누웠다5. 해변까지 50미터 남짓이었다6. 황재중은 기울어진 조타실 바닥에 발을 버티고 섰다. 그 배는 다시 바다로 나가지 못했다.
*
같은 새벽, 장사동 뒷산, 북한군 제5사단 제12연대.
북한군 분대장 하나가 참호 가장자리에 엎드려 안개 속을 노려보았다. 연대는 8월 내내 포항 북쪽에서 국군 제3사단과 싸웠고, 그 사단이 바다로 빠져나간 뒤 이 바닷가 마을에 들어와 쉬며 병력을 채우는 중이었다2. 지난달 적이 바다로 달아난 해안 바로 옆으로, 이번에는 적이 바다에서 오고 있었다.
회색 철판 덩어리가 모래밭 앞에 비스듬히 멈춰 서 있었다. 갑판에서 사람들이 물로 뛰어내렸다. 쌍안경을 든 병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대장 동무, 저기 우리 군복 입은 놈들이 있습니다.”
“우리 편이 왜 바다에서 오나. 쏴!”
기관총이 파도 위를 쓸었다. 물에 뜬 머리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
15일 아침, 장사동 해변.
밧줄이 먼저 바다를 건넜다. 헤엄칠 줄 아는 자들이 밧줄 끝을 몸에 감고 물로 뛰어들었다. 파도가 그들을 해안 쪽으로 밀었다가 다시 끌고 나갔다. 몇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으로 뛰어든 자들이 모래밭에 닿아 해송 둥치에 밧줄을 감았다. 배와 해안 사이에 밧줄 여러 가닥이 걸리자 엔디콧호의 5인치 함포가 고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2.
두 개 중대가 먼저 밧줄을 탔다. 류병추는 헤엄을 칠 줄 몰랐다. 상륙하라는 소리에 그는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총알을 피해 고개를 숙이다 밧줄을 놓쳤는데, 파도가 그를 해안 쪽으로 밀어 주었다. 모래밭에 닿자 그는 맨손으로 모래를 파고 그 안에 엎드려 고지를 향해 총을 쏘았다4. 옆에서 쓰러지는 친구들 사이로 누군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이기일은 기울어진 갑판에서 앞선 중대의 절반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보고도 밧줄을 잡았다. 밧줄을 타고 내려가는 사이 손바닥 살갗이 다 벗겨졌다1. 아프다기보다 뜨거웠다. 중간에 손이 미끄러졌다. 바다에 떨어지자 물을 먹은 배낭이 그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한두 걸음 헤엄쳐 나가면 파도 한 번에 서너 걸음씩 뒤로 밀렸다. 그는 배낭 끈을 풀었다. 미숫가루 세 봉지가 배낭과 함께 가라앉았다.
모래밭에 기어오른 것이 아침 여덟 시쯤이었다1. 소총은 모래를 먹어 노리쇠가 움직이지 않았다. 함포 소리가 잦아든 뒤 그는 모래밭에 떨어진 다른 총을 주워 들었다. 주인은 근처에 없었다.
아홉 시, 대원들이 모두 해안에 올랐다5. 사흘 치 식량과 탄약 대부분, 육군본부와 이어 줄 통신 장비가 바닷속에 남았다. 대대에 남은 무전기는 미군 고문 프레더릭 D. 쿠퍼 하사가 짊어진 휴대용 무전기 한 대뿐이었다2. 쿠퍼가 무전기를 붙들고 엔디콧호를 불렀다. 제1중대장 이영훈은 해안에 오르지 못했다.
*
15일 오후 세 시, 200고지.
고지 꼭대기 토치카에서 마지막 북한군이 손을 들고 기어 나왔다. 상륙한 지 열 시간 만이었다5. 중대장들의 보고가 이명흠 앞에 쌓였다.
“사살 서른아홉, 포로 셋입니다. 토치카 아홉 개를 부쉈습니다.”
“노획품은?”
“직사포 두 문, 포탄 450발, 지프 한 대, 기관총 마흔다섯 정, 박격포 한 문…….”
이명흠은 고개만 끄덕였다. 고지 아래로 해안도로가 지나갔다. 포항과 영덕을 잇는 그 길은 북한군 제2군단이 포항 앞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을 나르는 길이었다. 대원들이 다리를 끊고 길목을 막았다.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는 장사동에 상륙해 동대산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끊으라고 했다5. 이명흠은 서북쪽을 보았다. 동대산은 1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산줄기 너머에 있었다. 탄약은 바다 밑에 있었다.
모래밭에서 이영훈의 장례가 치러졌다. 이명흠은 죽은 이를 기리는 글인 조사를 읽었고, 뒷날 회고록에 그 문장을 남겼다5. “이렇게 우리 부대로 하여금 적의 보급로를 차단케 하고 아 국군 1군단의 반격작전을 용이케 할 뿐 아니라 전면적으로 유엔군 총반격작전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음에…” 조사를 듣는 대원들의 바지에서 아직 바닷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
15일, 삼척 앞바다, 미 해군 순양함 헬레나호.
찰스 C. 하트먼 소장의 함대는 전함 미주리호까지 거느리고 삼척 해안을 포격하고 있었다2. 그날 새벽 서해에서는 미 해병대가 인천 월미도(현 인천 중구, 매립으로 육지와 이어짐)에 올랐다. 동해의 포성은 북한군의 눈을 다른 해안으로 끌어 두려는 것이었다8. 엔디콧호의 전문이 올라오자 하트먼은 종이를 두 번 읽었다.
“그 상륙은 취소된 것 아니었나?”
며칠 전 유엔군사령부는 상륙부대에 미군 전차 중대를 붙여 달라는 국군의 요청을 거절하고, 상륙 전에 해안을 때리기로 한 포격도 취소했다2. 하트먼은 그 소식을 듣고 작전 전체가 없던 일이 되었다고 여겼다. 미군 쪽은 결정을 한국 육군본부에 넘겼고, 육군본부는 훈련이 덜 된 학도병들을 보내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상륙했습니다. 배는 해안에 좌초했고, 부대가 해안에 갇혔답니다.”
하트먼은 삼척을 겨누던 포를 거두고 함대를 남쪽으로 돌렸다.
*
9월 16일과 17일, 장사동.
16일 아침 일곱 시, 배를 끄는 해군 예인선 인왕호가 문산호 옆에 닿았다. 밧줄을 걸고 끌었지만 바위에 박힌 배는 꿈쩍하지 않았고, 인왕호는 해가 질 무렵 부산으로 돌아갔다5. 같은 날 미 육군 예인선 LT-636에서 상륙훈련센터의 프랭크 스피어 중령과 예인선의 민간인 선장 찰스 로이가 고무보트를 타고 해안에 올랐다2. 둘은 문산호의 찢어진 옆구리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건질 수 없는 배였다.
17일 새벽 다섯 시, 박격포탄과 전차포탄이 대대 진지에 떨어졌다. 여섯 시, 북한군이 대전리(현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 219고지 정면으로 올라왔다가 물러났다. 부상병은 늘어나는데 바다의 구축함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대는 거룻배 한 척에 부상병 스무 명과 경계병을 태워 구축함으로 보냈다. 거룻배는 파도에 뒤집혔다. 아홉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5.
그날 문산호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총을 잡았다. 배는 이미 움직이지 않았고, 기울어진 배에 남아 있는 것은 포탄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황재중은 선원들을 데리고 모래밭으로 내려가 학도병들과 같은 참호에 엎드렸다. 선장 황재중과 선원 여섯이 그 해안에서 돌아오지 않았다5.
17일 오후부터 식량이 떨어졌다.
*
17일, 장사동 남쪽 해안도로, 북한군.
전차 네 대가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왔다. 국군 기록에 따르면 북한군 제2군단은 포항 앞 전선에서 연대 둘과 전차 네 대를 빼내 장사동으로 돌렸다9. 바다 쪽 기록에는 그 무렵 평양방송이 국군 두 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알렸다고 남아 있다10. 모래밭에 있는 것은 군번도 없는 학생 칠백여 명이었다.
전차 위의 북한군 병사들은 바다를 흘끔거렸다. 수평선에 잿빛 군함들이 늘어서 있었다. 포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
9월 18일, 200고지와 헬레나호.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헬레나호의 헬리콥터가 해안 위를 세 번 오가며 미군 전투식량 1,100개를 떨어뜨렸다5. 헬리콥터는 그 며칠 동안 중상자들을 바다로 실어 날랐다. 쿠퍼 하사와 또 한 명의 미군 고문 윌리엄 해리슨 중위도 그렇게 실려 갔다2.
아홉 시, 북한군이 200고지 동남쪽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백운붕 부관이 남은 탄약을 세어 보고했다. 소총탄 8만 발, 수류탄 900발, 82밀리 박격포탄 130발, 다발총탄 1,000발가량. 사흘 작전을 셈하고 실은 탄약은 상륙하던 날 대부분 바다에 잃었다. 오후 두 시 오십 분, 대대는 고지를 내려와 해안도로를 따라 포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5.
그 길 위에 헬리콥터가 내려앉았다. 이명흠은 헬리콥터를 타고 헬레나호로 갔다. 한국 해군 연락장교 조종익 소령이 하트먼 옆에서 말을 옮겼다.
“탄약과 식량, 그리고 함포가 필요합니다.”
“내일 아침 여섯 시 반까지 LST 한 척을 보내겠소. 식량을 보내고, 철수할 때 포로 덮어 주겠소.”
이명흠은 다시 헬리콥터에 올랐다. 부대는 200고지에서 3킬로미터 남쪽, 지경리(현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리) 125고지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부대를 돌려 문산호 쪽으로 모이게 했다5.
오후 세 시, 비행기 한 대가 날아와 전단을 뿌렸다. LST가 곧 갈 테니 배 근처를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네 시, 대대의 움직임을 눈치챈 북한군이 해안 고지에서 총을 쏘았다. 십여 분 뒤 앞바다의 유엔 함정 여덟 척이 한꺼번에 포를 쏘았고, 제트기 편대가 200고지 일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5. 저녁 일곱 시, 대대가 장사동 해안에 다시 모였다. 사흘 전 기어올랐던 그 모래밭이었다.
*
9월 19일, 장사동 해변.
아침 바다에 한국 상선 LST 조치원호가 나타났다. 조치원호는 해안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멈췄고, 더 들어오지 않았다.
스피어가 조치원호에 올랐다.
“문산호에서 북쪽으로 400야드, 해안에서 30미터까지 붙이시오.”
민간인 선장은 고개를 저었다.
“배가 바위에 얹히면 이 배도 끝입니다. 저기 저 배를 보십시오.”
모래밭 앞에 문산호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스피어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조타실로 들어가 직접 배를 몰아 해안 30미터 앞까지 붙였다5. 그러고는 밧줄을 타고 해안에 내려가 철수를 지휘했다.
배와 해송 사이에 다시 밧줄이 걸렸다. 뗏목이 밧줄을 따라 오갔다.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물기둥을 세웠고, 앞바다의 군함들이 고지를 향해 포를 퍼부었다. 비행기가 해안 위를 낮게 지나갔다.
“다 버려라. 몸만 타라.”
이기일은 총을 내려놓고 밧줄을 잡았다. 나흘 전 그 밧줄에서 벗겨진 손바닥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 파도가 그를 밀었다가 당겼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류병추는 갑판에 올라 해안을 돌아보았다. 모래밭에는 아직 사람들이 있었다. 밧줄에 매달려 오는 사람도 있었다.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뒷날 이렇게 말했다4. “바닷물이 썰물로 바뀌자 더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미군이 출항을 결정하면서 배 문을 닫아 버렸죠.”
헬레나호의 항해일지에는 오후 한 시 삼십삼 분에 탑승을 마쳤다고 적혔다. 같은 날 구축함 브러시호의 항해일지에는 한 시 사십오 분에 출항했다고 적혔다5. 미국 쪽 기록들은 해안에 남은 서른두 명이 뗏목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남았다고 적었다. 살아 돌아온 대원들은 배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마흔에서 쉰 명이었다고 기억했다1. 해안에 남은 사람들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고, 몇은 빠져나와 뒷날 북진하는 국군에 합류했다11.
조치원호가 바다로 물러났다. 모래밭이 멀어졌다. 류병추는 끝까지 그 모래밭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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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부산항.
조치원호에는 부상자 110명을 포함해 725명이 타고 있었다5. 부두에 내린 대원들은 거기서 처음으로 인천 소식을 들었다. 유엔군이 닷새 전 인천에 올랐고, 서울로 들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유엔군도 16일부터 반격에 나서 있었다.
부두에서 맞은 지휘부의 첫마디를 류병추는 오래 잊지 못했다.
“어떻게 살아 돌아왔느냐?”
그는 뒷날 그 말을 이렇게 풀었다. 학도병과 화물선을 보낸 것을 보면, 희생돼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6.
*
그 뒤.
북한이 펴낸 역사책 『조선전사』는 이 해안에서 “괴뢰군의 대부분은 소멸되고 나머지 일부 력량이 18일 미제침략군 해군함선들의 함포사격의 엄호 밑에 겨우 빠져나갔다”고 적었다5. 미 극동해군사령부의 보고서는 이 작전을 “전술적으로 완벽하게 실패한 작전”이라고 적고, 앞으로는 작은 상륙이라도 해군의 지휘를 받게 하라고 건의했다5. 1960년, 맥아더는 이명흠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내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그들이 수행한 작전은 혁혁한 것이었다”고 썼다5. 같은 해안을 두고 세 갈래 말이 남았다.
1980년 7월 14일, 살아남은 대원들이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를 만들었다5. 1997년 3월 6일, 해병대 제1사단 수색대원들이 장사리 앞바다 갯벌에서 문산호의 선체를 찾아냈다5. 2016년 해군은 문서고에서 1950년 9월 16일에 작성된 문산호 선장과 선원 열한 명의 명단을 찾아냈다12. 2018년 황재중에게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7. 훈장은 외손녀 고양자가 받았다7. 2019년에는 선원 열 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12. 이찬석, 이수용, 권수헌, 부동숙, 박시열, 윤은현, 안수용, 이영룡, 한시택, 김일수. 2020년 6월 5일, 장사리 앞바다 위에 문산호를 본뜬 전승기념관이 문을 열었다13.
학도병들의 명부는 그렇게 남지 못했다. 몇 명이 배에 탔는지부터 기록마다 달랐다. 1970년, 이기일은 국방부에 요청해 문서 한 장을 받았다. 학도병 718명 가운데 제대가 확인된 사람은 180명이었다1. 나머지 이름 옆에는 전사, 실종, 결번, 불명이 적혀 있었다. 지원할 때 낸 집 주소가 적힌 서류는 찾을 수 없었다.
부산항을 떠나기 전에 낸 봉투들도 찾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과 손톱이 든 그 봉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1.
사료 출처
1. 경인일보, 「[인터뷰]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이기일 전 무공수훈자회 옹진군지회장」(2025.6.22), kyeongin.com/article/1743769 — 황해도 벽성 출신, 1949년 상경, 밀양에서 입대, 제식훈련 한 주 미만, 머리카락·손톱 봉투, 백설기, 미숫가루 세 봉지·수류탄 두 개·탄약 300발, 카빈·99식·소련식 기관단총, 제5중대(화기중대)와 북한군 것과 같은 박격포·기관총, 쓰시마 소문과 일본 훈련설, 멀미, 「그해 16살」, 선원들이 헤엄쳐 밧줄을 나무에 묶음, 앞선 중대 절반 희생, 밧줄에 손이 까짐(「아프다기보다 뜨거웠다」), 배낭을 버림, 아침 8시쯤 도착, 모래 먹은 총과 주운 총, 「모든 것을 버리고 몸만 배에 타라」, 40~50명 미승선, 1970년 국방부 문서(718명 중 제대 확인 180명), 봉투의 행방 불명. 2. Donald W. Boose Jr., 「Over the Beach: US Army Amphibious Operations in the Korean War」(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08), 183~185쪽과 주 63~72(자료모음 문서 NS04, 「The Miryang Battalion's Jangsa-dong Operation」) — 제8군 기획과 레인저중대·제3사단 대신 이명흠 부대 선정, 학생 지원병과 북한 출신 귀순자, 소련제·일본제 무기와 농민복·교복·군복 차림, 조명탄 부족으로 조명 지원 취소, 유엔군사령부의 사전 포격 취소와 하트먼의 오해, 9월 14일 출항·772명·미군 고문 William Harrison 중위와 Frederick D. Cooper 하사(SCR-300 무전기 한 대), 태풍 케지아와 10피트 파도·해 뜬 뒤 도착, 북한군 제5사단 제12연대가 해안 내려다보는 마을에 주둔해 휴식 중, 선미 닻줄 절단·좌초·밧줄 상륙·엔디콧 5인치 함포·4시간 교전, 하트먼이 미주리 포함 TG 95.2의 삼척 포격을 멈추고 남하, 헬기로 이명흠을 기함으로 데려옴, 중상자와 Harrison·Cooper 헬기 후송, 16일 Frank Spier 중령과 예인선 LT-636 선장 Charles Roy의 고무보트 정찰, 19일 조치원호(LST-665), 20일 부산 귀환, 「the professionalism of their commander」와 「difficult to find any salutary aspect」 평가. 1차 출처로 Karig·Cagle·Manson 『Battle Report: The War in Korea』(1952) 243~255쪽, 함명수 「바다로! 세계로!」 국방일보 2006.3.22~4.3, Evanhoe 『Dark Moon』(1995) 25~30쪽을 든다. 3. 경북매일, 홍성식 기사(2022.4.6) — 류병추가 대구 대건중학교 5학년이었다는 대목. 4. 국방일보,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5) 류병추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장」(2023.7.10), kookbang.dema.mil.kr/newsWeb/20230711/1/ATCE_CTGR_0020010019/view.do — 대구 과수원,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대구역 집결, 「나이는 고작 18세」, 밀양 농장 보름 훈련, 수저 없는 식사, 「집에 갈 사람은 손들라」, 헤엄 모름, 줄을 놓쳤으나 파도에 밀려 상륙, 모래를 파고 사격, 「대한민국 만세」, 상대가 2군단 5사단이라 들었다는 진술, 썰물과 「배 문을 닫아 버렸죠」 인용. 5. 박종상(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6·25전쟁 시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재검토」, 『동북아역사논총』 69호(동북아역사재단, 2020.9.29), 243~282쪽, KCI ART002629194, DOI 10.23037/dyn.2020..69.006, 원문 contents.nahf.or.kr/id/NAHF.dn.d_0069_0060 — 육본 작명 제174호(1950.9.10 16:00)와 임무 문구(「동대산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1군단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 9월 14일 16:00 부산항 제4부두 출항·선장 황재중·엔디콧 호위, 15일 02:30 도착·05:30 선미 파괴·06:00 좌초(좌초 좌표 북위 36도 16분 30초, 동경 129도 22분 36초)·09:00 상륙 완료·15:00 200고지 점령과 노획 목록, 16일 진지 배치(125고지·219고지·봉황산), 17일 05:00 포격·06:00 219고지 공격 격퇴·전마선 전복 9명 익사·선원 상륙과 선장 이하 7명 전사, 북한군 제2군단 2개 연대와 전차 4대 반격, 18일 05:00 지휘소 이동·09:00 공격·잔여 탄약·14:50 남하·헬기로 헬레나함 이동·조종익 소령 통역·하트먼 약속·15:00 전단·16:00 교전과 함정 8척 함포·제트기 1개 편대·19:00 해안 집결, 06:40 K-레이션 1,100개 3회 투하, 인왕호(16일 07:00 도착, 일몰 철수), 조치원호와 스피어의 조함, 725명(부상 110명 포함) 구조·32명 잔류(헬레나함·브러시함 항해일지, NARA 문서 원문 인용), 13:33 탑승 완료·13:45 출항, 「전술적으로 완벽하게 실패한 작전」(NARA RG 127 문서), 미 극동해군사령관의 건의, 『조선전사』 26(1981) 인용문, 맥아더 1960.10.31 답신 문구, 이영훈 장례 조사 인용(이종훈 『무명용사의 열혈전투실기』 1958, 105쪽), 이명흠·이종훈 개명, 동지회 1980.7.14 결성, 1997.3.6 문산호 발견. 장사동은 1988년 장사리로 바뀌었고 본문은 당시 지명을 썼다. 6. 월간조선, 최우석 기사(2017.9.15), 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427&Newsnumb=2017091427 — 문산호 1943년 인디애나주 제퍼슨빌 건조, 1947년 한국 정부 매각, 함미닻 투묘, 이명흠이 가리킨 접안 지점을 황재중이 위험하다고 한 대목, 상륙 명령 문구와 05:30, 해변까지 50여 m·파고 4~5m, 1950.9.16 작성 선장·선원 11명 명단, 류병추의 「어떻게 살아 돌아왔느냐」와 「희생돼도 그만」 회고. 7. 동아일보, 손효주, 「민간인 6·25영웅, 68년만에 훈장 받다」(2018.6.26), 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154452 — 황재중 1908~1950, 대한해운공사 소속 문산호 선장, 묵호경비부 철수, 7월 여수 철수(육군 600여 명·차량), 외손녀 고양자가 2018.6.25 세종대왕함에서 충무무공훈장 대리 수령. 8. 양영조, 「6·25전쟁 초기 장사상륙작전의 전개과정과 성격」, 『군사』 79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41~72쪽, KCI ART001558608 — 영문 초록만 확인: 9월 12일 군산 양동, 9월 14~15일 삼척 일대 항공 공격, 9월 15일 새벽 명부대 상륙과 LST 좌초, 목적 달성 평가.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9. 매일신문, 김대호·배형욱 기사(2022.12.29) — 「포항지구 정예 2개 연대·전차 4대 차출, 17일 오전 5시 공격」. 10. 국제뉴스(2016.9.12, 네이버 뉴스 검색 요약으로만 확인) — 해군 쪽이 전하는 평양방송 「2개 연대 상륙」 보도. 11. 최용성, 「장사상륙작전」(디지털영덕문화대전), yeongdeok.grandculture.net/yeongdeok/toc/GC08500377 — 9월 14일 부산 출발·15일 새벽 도착, 6일간 전투, 19일 철수·20일 부산 귀환, 전사 139·부상 92·포로 39, 북한군 270여 명 사살·4명 생포. 12. 경북매일, 이동구 기사(2019.6.27) — 2019.6.27 선원 10명 화랑무공훈장, 명단, 2016년 해군 문서고 발견. 13. 매일신문, 김지수 기사(2020.6.24) — 류병추가 대구 대건중학교 5학년이었다는 대목, 2020.6.5 전승기념관 개관.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황재중 1908년생(동아일보 2018.6.26 「1908∼1950」). 이기일·류병추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괄호 나이를 달지 않고, 본인들이 말한 1950년 당시 나이(열여섯, 열여덟)를 본문에 「그의 기억으로」「그의 말로」로 적었다(이기일은 2025년 기사에 92세, 류병추는 2023년 기사에 91세). 이명흠, 이영훈, 백운붕, 조종익, Charles C. Hartman, Frank Spier, Charles Roy, William Harrison, Frederick D. Cooper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날짜 — 이명흠 회고록과 참전자 증언, 영덕군 간행물은 9월 13일 출항·14일 새벽 상륙으로, Karig·미 해군 전사·국방부 공간사·NARA 제8군 G-3 일지는 14일 출항·15일 새벽 상륙으로 적는다. 박종상은 회고록 날짜가 하루씩 앞당겨졌다고 보았다. 본문은 15일 상륙을 따랐다. 류병추(국방일보 2023)는 13일 출항, 이기일은 14일 오후 2시께 승선·15일 오전 4시께 도착을 말했다. [자료 충돌] 도착 시각 — 박종상은 02:30 도착, 월간조선은 04:30 도착·05:30 상륙 명령, 매일신문 2022는 04:30, Boose는 파도에 늦어져 「해가 한참 뜬 뒤」 도착했다고 적었다. 본문은 「새벽」과 05:30 상륙 명령, 06:00 좌초만 적었다. [자료 충돌] 인원 — 772명(이명흠 회고·백운붕 증언·Boose), 760명 편성표·828명 탑승(이명흠 회고), 841명(매일신문 2015·경북일보 2019, 772명+선원 42명+미군 2명+통신병 12명 등), 718명 학도병(이기일 증언, 추정치), 764명(박종상의 NARA 대조 결론). 「제772부대」는 1951년 정훈 제1대대의 통상명칭이라는 것이 박종상의 판단이다. 본문은 「칠백여 명」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사상자 — 위령탑 전사 139·부상 92·행방불명 수십, 『인천상륙작전』(1983) 전사 129·잔류 39, Karig 사망 39·잔류 32, Boose 전사·익사 39·잔류 39·부상 110, NARA 문서 유격대 사상 60·선원 사망 10·실종 5, 디지털영덕문화대전 포로 39. 참전자들은 실제 전사자가 200명이 넘는다고 말한다(매일신문 2000.7.28). 본문은 숫자를 하나로 정하지 않았다. [자료 충돌] 잔류 경위 — 헬레나함·브러시함 항해일지와 NARA 문서는 32명이 뗏목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남았다고 적었다. 류병추는 썰물에 미군이 배 문을 닫았다고, 이기일은 시간 관계로 40~50명이 타지 못했다고, 매일신문 2000·2015는 함장이 밧줄을 끊고 떠났다고 적었다. 본문은 양쪽을 다 적었다. [자료 충돌] 철수 시각 — 국방부 『인천상륙작전』(1983)·『6·25전쟁사』 6권(2009)은 13:30 철수 완료, 육군본부 『한국전쟁과 유격전』(1994)·『모래톱에 묻힌 충혼』(1995)·『영덕군지』(2002)는 15:30. 본문은 미 함정 항해일지(13:33 탑승 완료, 13:45 출항)를 따랐다. 부산 도착은 박종상 20일 20:00, 매일신문 2015는 20일 06:00이라 본문은 날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스피어 — Boose는 중령(제8206부대 상륙훈련센터 부지휘관), 박종상은 소령으로 적었다. Karig는 스피어가 조치원호 선장 머리에 권총을 겨눴다고 적었고, 함명수(국방일보 2006)는 선장이 배를 상하게 할 뜻이 없었다고만 적었다(Boose 주 70). 박종상은 스피어가 직접 배를 몰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박종상을 따랐다. 매일신문 2015·월간조선의 「피어드 소령」은 같은 인물로 보이나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헬레나함의 탄약 — Boose는 헬레나함 탄약고에 우연히 보관 중이던 노획 소련제 탄약(고문단이 아이스크림 등 보급의 답례로 보낸 전리품)을 유격대에 보냈다고 적었고, 박종상은 구경이 달라 탄약 지원은 불가능했고 식량과 의약품만 보냈다고 적었다. 본문은 이명흠의 요청만 적고 탄약을 보냈는지는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선원 전사 — 해군 기록(박종상 인용)은 17일 선원들이 상륙해 싸우다 선장 이하 7명 전사, NARA 문서는 선원 사망 10·실종 5, 월간조선은 선장과 선원 전원 전사, 명단은 11명이다. 명단 작성일(9월 16일)이 17일 전사 기록보다 앞선다. 본문은 「선장과 선원 여섯」(해군 1954년 기록)으로 적었다. 월간조선은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도 전사했다고 적었으나 다른 자료로 확인하지 못해 본문에서 뺐다. [자료 충돌] 선원 이름 — 경북매일 2019와 해군 발표 보도는 「박시열」, 월간조선 2017·2018은 「박시필」로 적었다. 본문은 2019년 서훈 보도를 따랐다. [자료 충돌] 북한군 부대 — Boose 제5사단 제12연대, 월간조선 「2군단 예하 101보안부대」, 류병추 「2군단 5사단」, 국군 자료 「2개 연대와 전차 4대」. 본문은 해안 주둔 부대를 Boose대로, 17일 반격을 국군 자료대로 적었다. [자료 충돌] 성격 — 국방부 『6·25전쟁사』 6권(2009)과 양영조(2011)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기만으로, 박종상(2020)은 크로마이트 계획 어디에도 없는 제8군 사령관 워커의 지시에 의한 보급로 차단 작전으로 보았다. 본문은 작전명령 문구와 하트먼 함대의 삼척 포격만 적었다. [자료 충돌] 1997년 — 박종상·월간조선·경북매일은 해병대 제1사단이 수색 중 발견했다고, 뉴스톱 2019.9.25(임영대)는 영덕군과 동지회가 보훈처 지원으로 계획한 인양 작업에 해병대 수색대 12명이 참여한 것이라고 적었다. 같은 기사는 1982~83년 『민족의 증언』 등에 이미 작전이 실려 있었다고 지적했다. 2019년 문산호 인양은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부두에서 백설기를 내려다보는 몸짓, 황재중이 조타실에서 엔디콧호 불빛을 좇는 장면, 선창의 일본행 소문 대화(소문 자체는 이기일 증언), 이명흠과 황재중의 접안 지점 대화 문장(다툼 자체는 월간조선), 북한군 분대장과 병사의 대화와 참호 장면 전부, 200고지의 보고 대화, 조사를 듣는 대원들의 모습, 백운붕이 탄약을 세어 보고하는 대목(탄약 수량은 이명흠 회고록 135쪽, 박종상 인용), 해리슨·쿠퍼 후송을 18일 장면에 둔 것(Boose는 날짜를 적지 않았다), 하트먼과 참모의 대화, 스피어와 문산호를 들여다보는 장면, 황재중이 참호에 엎드리는 장면, 17일 전차 위 북한군 병사의 시선, 헬레나함의 이명흠·하트먼 대화 문장(요청과 약속의 내용은 박종상), 스피어와 조치원호 선장의 대화 문장, 이기일이 철수 밧줄을 놓치지 않는 대목, 류병추가 갑판에서 모래밭을 끝까지 보는 대목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이명흠의 상륙 명령 문구는 참전자 기억으로 전하는 말이며 자료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