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14,289자)
제2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 마지막 파도
1950 · 네오
1950년 8월 28일, 낙동강 서쪽 신반리(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북한군 제9사단 사령부.
참모가 작전명령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천막 안의 지휘관들은 지도에 그어진 붉은 선을 따라 눈을 옮겼다.
“밀양과 삼랑진 일대를 점령하여 대구와 부산 사이 적의 퇴로를 끊음으로써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본 사단의 임무다.”
사단장 박교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9사단은 국경경비대를 뼈대로 꾸린 부대였고, 이번이 전쟁에서 처음 맡는 공격이었다1. 군단은 포병대대와 고사포대대, 새로 내려온 제16기갑여단의 전차대대 둘을 붙여 주었다. 북쪽 강변에는 제2사단, 그 위에는 제10사단, 사단 뒤에는 8월에 이 강을 먼저 건넜다가 반을 잃고 돌아온 제4사단이 대기했다. 노획 문서에서 그들은 이 덩어리를 「제1군단의 주력」이라고 불렀다1.
명령서는 강 건너 적을 미 제24사단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 제24사단은 며칠 전 강변을 떠났다. 그 자리에는 인디언 머리 마크를 어깨에 단 미 제2사단이 들어와 있었다. 천막 안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
*
8월 31일 해 질 녘, 창녕 서쪽 낙동강 동쪽 기슭, 미 제23연대 B중대 제2소대.
윌리엄 M. 글래스고 중위의 소대원 마흔두 명은 2,400미터 강변에 흩어진 고지 일곱 개를 지켰다1. 연대가 이 강변을 넘겨받은 지 이틀째였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강 건너 산자락에서 불빛이 줄지어 나왔다. 횃불이었다. 횃불은 논둑을 따라 구불구불 강 쪽으로 내려왔다.
“저게 다 뭐야?”
“행진이죠. 횃불 행진.”
대답한 분대원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글래스고는 대대에 무전을 쳤다. 포병 관측장교는 불빛 수를 헤아려 2,000명쯤으로 잡았고, 피란민이라고 보았다1. 보고를 받은 연대장 폴 L. 프리먼(43) 대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쏴.”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횃불 몇 개가 꺼졌다. 꺼진 자리에 다른 횃불이 올라왔다. 행렬은 끊기지 않고 강가로 내려왔다.
밤 아홉 시, 미군 강변 진지로 북한군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포격 밑으로 북한군 보병이 강을 건너 비탈을 올라왔다. 열한 시에 포격이 그쳤고, 초록 신호탄 하나가 하늘에 걸렸다. 몇 분 뒤 글래스고의 참호로 수류탄이 비처럼 떨어졌다. 짧은 육박전 끝에 소대는 고지를 버리고 뒤로 뛰었다. 남쪽 부곡리(현 경남 창녕군) 길목의 C중대는 새벽 세 시까지 다 짓밟혔다. 중대장 시릴 S. 바솔디 대위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 뒤 낙오병까지 다 모였을 때 C중대에 남은 사람은 스무 명이 안 되었다1.
북한군 제2사단의 세 연대가 나란히 강을 건너, 우포늪 위아래로 창녕에 이르는 두 갈래 길을 함께 노렸다2.
*
같은 밤, 남쪽으로 20킬로미터, 마을 아곡(현 경남 창녕군, 남강 합류점 위쪽)의 기강나루.
어니스트 R. 쿠마(31) 중사가 퍼싱 전차를 몰고 아곡에 온 것은 저녁이었다. 포가 고장 난 전차와 자리를 바꾸러 온 길이었다. 그는 전차를 마을 서쪽, 나루에서 40미터 떨어진 자리에 세웠다. 밤 여덟 시에 강 위로 짙은 안개가 덮였다1.
아홉 시가 되자 강 건너에서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밤 열 시, 박격포탄이 미군 쪽 강변에 떨어졌다. A중대 병사 몇이 강 건너에서 물 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열 시 반, 안개가 갑자기 걷혔다. 쿠마의 눈앞에, 강 한복판까지 놓인, 배를 이어 만든 다리 부교가 있었다. 3분의 2가 이미 놓여 있었다1.
“90밀리, 다리에 맞춰!”
전차포가 다리를 때렸고, 옆의 전차 한 대와 고사포 궤도차 두 대가 함께 쏘았다. 1분쯤 뒤 다리가 무너졌다. 부교를 받치던 배들이 풀려 떠내려갔고, 기관총이 그 배들을 하나씩 가라앉혔다. 총이 멎자 다시 개 짖는 소리만 남았다.
열한 시, 왼쪽에서 총격이 일었다. 2~3분 뒤 전차 옆 보병 분대에 야전전화가 울렸다. 중대가 능선으로 물러나니 너희도 물러나라는 명령이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전차병들, 우리 간다!”
보병이 떠나자 일곱 사람이 옛 중대 지휘소 쪽에서 뛰어왔다. 쿠마가 멈춰 세우자 그들의 어깨에 인디언 머리 마크가 보였다. 미 제2사단에는 그 무렵 국군에서 넘겨받은 한국인 병사들이 섞여 있었고, 그들도 같은 마크를 달았다. 하나가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큰 병력이 하류에서 건너오는 중이고, A중대는 거의 다 죽거나 잡혔다고 했다. 셋이 전차 위로 올라왔다.
신호 하나에 그들이 뛰어내리며 전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동시에 오른쪽 150미터 벼랑 위에서 기관총과 소총이 전차를 두드렸다. 쿠마는 포탑 안으로 굴러들어가 민가 문 안으로 수류탄 일고여덟 발을 던졌다. 그는 두 번 다쳤다. 고사포 궤도차 하나는 암호를 아는 무리에게 넘어갔다.
남은 전차 두 대는 사방이 트인 빈터로 나갔다. 북한군은 몇 번이고 달려들어 18미터 앞까지 왔다가 물러났다. 새벽 한 시 반, 옆 전차의 오스카 V. 베리 중사가 무전으로 엔진이 과열됐다고 알리고 물러났다. 1.6킬로미터 뒤에서 그 전차는 불이 붙었다.
쿠마는 혼자 남았다. 그는 아침 일곱 시 반까지 그 빈터를 지켰고, 날이 밝은 뒤에야 적진을 향해 총을 쏘며 아군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가 받은 명예훈장 공적문은 그날 밤 그가 적어도 250명을 죽였다고 적었다3.
*
같은 밤, 박진나루(현 경남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 박진교 자리), 209고지.
그날 밤 미 제9연대는 거꾸로 강을 건너갈 참이었다. 연대 정찰대가 강 건너 산에서 북한군 사단 지휘소로 보이는 곳을 찾아냈고, 연대장 존 G. 힐 대령은 중대 하나로 그곳을 치는 ‘만주 작전’을 짰다. 습격 부대는 연대 예비 E중대, 건너는 날은 8월 31일 밤이었다1.
중화기를 지원할 D중대 찰스 I. 콜드웰 중위와 H중대 에드워드 슈미트 중위가 아홉 시 넘어 부하들과 기관총을 메고 209고지 밑에 닿았다. 박격포 소대가 포를 받치는 쇠판인 포판을 내려놓았다. 고지 꼭대기 B중대에는 오후에 예배를 드리러 온 연대 군종 루이스 B. 신 대위가 있었다.
“물소리 들리지 않습니까?”
신 대위가 쌍안경을 눈에 대고 오래 강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긴 줄 하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북한군이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줄지어 강을 걸어서 건너오고 있었다.
그 줄은 고지 밑에서 포를 펴던 병사들을 덮쳤다. 많은 이가 죽거나 잡혔다. 힐 대령은 자정 직전에 빠져나왔고, 같이 있던 작전참모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 사단은 열한 시 오십오 분에 만주 작전을 취소했다1. 이미 비탈을 오르던 운반조는 그대로 꼭대기 아래 작은 봉우리까지 올라가 땅을 팠다.
북쪽에서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신호탄이 북쪽 하늘을 밝혔다. 총성 끝에 함성이 오를 때마다 B중대원들은 진지 하나가 또 넘어갔다고 짐작했다. 새벽 두 시, 고지 밑에 트럭 한 대가 멈추고 호루라기가 울렸다. B중대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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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아곡 뒤 능선, 미 제9연대 A중대.
중대장 애덤 B. 로드리게스 중위는 낮 동안 능선에서 버텼다. 대대는 밤에 능선을 버리고 나오라고 했다.
해가 지자 중대는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비탈 끝에서 앞선 병사들이 손을 들었다. 180미터 아래 길로 북한군 400명쯤이 바퀴 달린 기관총을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중대는 길을 피해 돌았고, 논으로 내려섰을 때 더 큰 무리와 부딪쳤다.
화기분대장 루서 H. 스토리(18) 일병은 낮에 사수가 쓰러지자 기관총을 잡고 강을 건너오던 북한군 대열에 쏘아 붙였다. 공적문은 그 총구 앞에서 100명쯤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었다3. 물러나는 길에서는 탄약 수레를 끄는 북한군 트럭이 다가왔다. 스토리는 길 한가운데 서서 트럭 짐칸에 수류탄을 던졌고, 수류탄이 떨어지자 분대로 기어가 더 가져와 다시 던졌다.
논에서 그는 크게 다쳤다. 곁의 병사가 그의 팔을 잡았다.
“일어나. 같이 가.”
“나 데리고는 못 빠져.”
스토리는 다음 진지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남은 총을 다 쥐고 중대가 빠지는 길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본 사람들은 그가 다가오는 북한군에게 손에 잡히는 무기를 다 쏘고 있었다고 전했다. 로드리게스 중위와 중대 대부분이 그 논에서 가까운 거리의 총격에 전사했다. 아군 진지로 돌아온 사람은 열 명쯤이었다.
스토리는 조지아주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열여섯 살에 입대하려 하자 어머니가 생년월일을 한 해 앞당겨 적어 주었다4.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뒤처진 제2소대장 앨버트 J. 펀 중위는 이튿날 새벽 25미터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 나침반 하나로 열아홉 명을 끌고 영산(현 경남 창녕군 영산면)까지 걸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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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아침, 밀양 가는 길 무안리(현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미 제2사단 사령부.
사단장 로런스 B. 카이저(55) 소장 앞으로 들어오는 보고는 낱낱이 끊긴 조각이었다5. 연대에서 강변 중대로 가는 선이 거의 다 끊겼다.
조각이 모이자 그림이 나왔다. 사단 한가운데 폭 10킬로미터, 깊이 13킬로미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북한군은 창녕과 영산을 잇는 남북 도로까지 나와 사단을 둘로 잘라 놓았다1.
“북쪽은 헤인스 장군이 맡는다. 남쪽은 브래들리 장군.”
열 시 이십 분, 북쪽 두 연대와 포병은 사단 포병사령관 로열 M. 헤인스 준장이, 영산 쪽 제9연대와 공병·전차는 부사단장 조지프 S. 브래들리 준장이 맡았다.
정오에 제8군 사령관 월턴 H. 워커(61) 중장이 사단으로 날아왔다. 그는 지도 앞에서 짧게 말했다.
“사수하든지, 여기서 죽든지.”
워커의 손에 남은 예비는 많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산(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마산회원구) 북쪽 창원에서 부산항으로 떠날 짐을 싸던 제1해병임시여단이었다. 도쿄가 상륙작전에 쓰려던 부대였다. 오전 내내 망설이던 워커는 열한 시 무렵 여단장 에드워드 A. 크레이그(54) 준장에게 곧바로 움직일 채비를 하라고 일렀다. 해병은 다시 낙동강 돌출부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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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밤, 박진나루.
나루 물속에는 수면 바로 밑으로 걸어서 건너는 길이 숨겨져 있었다. 어두워지고 삼십 분이 지나자 그 조금 아래쪽에 쇠로 만든 부교가 놓였다. 부교는 날이 새기 전에 다시 걷혔다1. 낮에는 미군 비행기가 강을 내려다보았다.
부교 위로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쉰 명에 군인 넷이 한 조였다. 쉰 명은 군복을 입지 않았다. 등에는 탄약 상자와 쌀자루가 얹혀 있었고,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며 걸었다. 뒤에서 군인이 낮게 다그쳤다.
“늦추지 말라. 날 새기 전에 세 번 더 건너야 한다.”
이 나루 하나에서 그렇게 짐을 나른 사람이 800명에서 1,000명이었다1. 그들 뒤로 건너온 제4사단의 병사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8월에 반을 잃은 사단은 훈련받지 못한 새 병력으로 다시 채워져 있었다. 북한군 전체로 보면 셋에 하나가 남쪽에서 강제로 끌려와 훈련 없이 전선에 선 신병이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하루 한두 끼로 버텼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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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새벽 세 시, 영산 남쪽 고지, 미 제2공병대대 D중대.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길로 내려옵니다.”
리 E. 빌러 중위의 진지에서 보면 영산 읍내와 그 너머 밀양으로 나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흰옷 행렬이 A중대 길목에 다가오자 보초가 소리쳐 누구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총알이 날아왔다. 북한군 대대 하나와 전차 네 대가 이미 영산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전날 오후 읍 남쪽에서는 사단 수색중대의 찰스 W. 터너(29) 중사가 전차 위 포탑 바깥 기관총을 잡고 북한군 기관총 일곱 정을 부순 뒤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3. 전차에는 쉰 발 넘는 탄이 박혀 있었다.
공병들에게는 포병도 박격포도 붙지 않았다. 대신 바주카가 있었다. 새 3.5인치가 아홉 정, 묵은 2.36인치가 아홉 정이었다. 빌러는 전차를 잡으라고 받은 바주카 열여덟 정을 사람에게 겨누게 했다. 영산 남쪽 비탈과 읍 가장자리가 쓰러진 북한군과 부서진 장비로 덮였다. 싸움은 오전 열한 시까지 갔다. 중대 장교 가운데 죽거나 다치지 않은 사람은 빌러 하나였다1. 오후 세 시, 강변에서 쫓겨 내려온 병사 800명을 추스른 제9연대 제2대대가 전차와 함께 영산을 되찾았다. 밀양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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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4일, 209고지 남쪽 봉우리.
봉우리 위의 사람은 예순에서 일흔 명이었다. 슈미트 중위가 지휘를 맡았다. 무전기 한 대, 성한 중기관총 한 정, 경기관총 두 정, 자동소총 한 정, 소총 스무 자루쯤, 나머지는 카빈과 권총이었다1. 1일 오후 두 시부터 북한군이 올라왔고, 밤에는 세 번 올라왔다.
2일 아침 아홉 시, H중대의 트래비스 E. 왓킨스(30) 상사가 진지 밖 45미터에서 북한군 둘을 쏘아 쓰러뜨렸다. 수류탄이 바닥나 있었다. 왓킨스는 구덩이에서 뛰어나가 시체 쪽으로 갔다. 숨어 있던 셋이 일어나 쏘았다. 왓킨스는 셋을 다 쏘고 다섯 사람의 총과 탄약을 안고 돌아왔다. 한 시간 뒤 여섯이 기관총 진지 23미터 앞까지 기어와 수류탄을 던졌다. 이미 머리를 다친 왓킨스가 다시 일어섰고, 북한군 기관총이 그의 왼쪽 옆구리를 꿰뚫었다. 등뼈가 부러졌다. 그는 쓰러지기 전에 여섯을 다 쏘았다. 허리 아래가 움직이지 않았다3.
오후에 떨어진 보급품은 대부분 비탈 아래 북한군 쪽으로 굴러갔다. 저녁 일곱 시 두 번째 투하에서 그들은 카빈 탄 한 상자, 기관총 탄 두 상자, 수류탄 열한 발, 전투식량 두 상자 반, 약 꾸러미 반쪽, 그리고 맥주 스물한 캔을 건졌다1.
“물은 안 주고 맥주를 줘?”
“사단 보급관이 우리를 아직 사람으로 보는 거지.”
물통도 떨어졌다. H중대 조지프 R. 우엘렛(20) 일병이 진지 밖으로 기어 나가 물통을 찾았다. 물통은 다 깨져 비어 있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북한군 시체에서 탄약과 수류탄을 거두었고, 덤벼든 북한군 하나를 맨손으로 죽였다3.
그날 오후 북한군이 미군 포로 하나를 봉우리로 올려 보냈다. 포로는 쪽지 대신 말을 전했다. “한 시간 안에 항복하지 않으면 산산조각 내겠답니다.” 사십오 분 뒤 대전차포가 봉우리를 때리고, 위쪽 기관총 두 정이 진지를 쓸었고, 이웃 능선의 박격포가 해 질 때까지 떨어졌다1.
3일 일요일은 무더웠다. 물은 없었고 식량은 한 사람에 깡통 하나였다. 북한군은 박격포와 돌격을 번갈아 스무 번쯤 보냈다. 파편이 무전기를 부수어 바깥과 이어진 줄이 끊겼다. 우엘렛은 제 구덩이에 떨어진 수류탄을 피해 여섯 번 뛰어나왔고, 여섯 번째에 쓰러졌다3. 슈미트 중위도 박격포탄에 전사했다. 지휘는 D중대의 레이먼드 J. 맥도니얼 중위에게 넘어갔다.
그날 저녁에 비가 왔다. 맥도니얼은 보급품에 딸려 온 모포 두 장을 펴서 빗물을 받았다가 쥐어짰다. 20리터 깡통 하나가 찼다1. 병사들은 옷을 벗어 짜서 수통을 채웠다.
4일 해 질 녘, 남은 탄은 한 사람에 한 탄창, 살아 있는 장교는 맥도니얼과 콜드웰 둘이었다. 맥도니얼은 밤에 네 명씩 흩어져 내려가기로 했다. 북한군 쪽에서 “만세!” 하는 고함이 들렸지만 수류탄 몇 발만 날아왔다. 그들도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왓킨스는 그동안 식량을 받지 않았다. 싸울 수 없는 사람이 먹을 것은 아니라고 했다. 떠날 시간이 되자 병사들이 그를 들어 올리려 했다. 왓킨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 업고는 아무도 못 내려가.”
그는 카빈에 탄을 채워 달라고 했다. 병사들이 카빈을 그의 가슴 위에 얹었다. 총구는 그의 턱 밑에 놓였다. 왓킨스는 내려가는 전우들에게 웃어 보이며 잘 가라고 했다.
밤 열 시, 스물아홉 명이 봉우리를 내려갔다. 콜드웰은 이틀 뒤 북한군에게 잡혔다. 그들은 그의 군화와 인식표를 벗기고 돌로 머리를 내리친 뒤 벼랑 아래 낙동강에 던졌다. 콜드웰은 죽은 척 물에 떠 있다가 밤에 빠져나왔고, 9월 10일 제72전차대대 진지로 걸어 들어왔다. 스물아홉 명 가운데 스물두 명이 돌아왔다1. 많은 이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강을 따라 걸어 제25사단 진지까지 내려갔다.
*
9월 3일 아침, 영산 서쪽 논.
해병 제5연대장 레이먼드 L. 머리(38) 중령의 대대들이 새벽 세 시부터 영산 북쪽과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선 고지를 밤새 다 잡지 못한 공병 A중대의 프랭크 M. 리드 대위는 동틀 녘 꼭대기 90미터 앞에서 날아든 수류탄을 부하들 반대쪽으로 던지려다 파편을 맞았다. 해병 전차가 쏘아 주어 중대는 꼭대기를 차지했다.
여덟 시 오십오 분, 해병이 논을 건너 서쪽으로 나아갔다. 다음 능선에서 내려오던 북한군 증원군은 트인 논 한가운데서 포와 기관총에 걸렸다. 길 북쪽의 제2대대는 116고지 끝에서 막혔다. 그날 해병은 서른네 명이 전사하고 백쉰일곱 명이 다쳤다1. 대부분이 제2대대 D중대였다. 그날 밤 퍼부은 비가 참호를 채웠다.
4일 아침은 맑았다. 북한군은 밤사이 116고지에서 빠져나가 있었다. 길 남쪽 제1대대는 천막이 그대로 서 있는 북한군 제9사단 지휘소로 들어갔다. 멀쩡한 T-34 두 대가 버려져 있었다. 그날 해병과 제9연대는 5킬로미터를 더 나아갔다.
5일 새벽, 다시 쏟아지는 비 속에서 북한군이 해병 오른쪽 제9연대 G중대를 쳤다. 본진 앞에 나가 지키는 전초에 있던 로런 R. 코프먼(27) 중사가 소대를 끌고 중대로 돌아오다 능선에서 중대를 에워싸려는 북한군과 마주쳤다. 그는 맨 앞 척후를 총검으로 찌르고 뒤따르던 무리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소대는 그 틈으로 G중대에 닿았다. 코프먼은 그날 총검으로 넷을 더 찔렀고, 기관총 진지 하나를 부쉈다3.
5일 오후 두 시 반, 오봉리(현 경남 창녕군) 능선과 클로버잎 고지 사이 고갯길. 8월에 해병과 제9연대가 처음 피를 흘린 바로 그 땅이었다. 도곡(현 경남 창녕군) 마을에서 북한군 300명쯤이 쏟아져 나왔고, T-34 두 대가 앞선 해병 퍼싱 전차 두 대를 잡았다. 불타는 퍼싱이 총포를 쏠 길인 사선을 막았다. B중대와 제1대대 바주카조가 뛰어나가 T-34 둘과 그 뒤의 장갑차까지 잡았다.
그날 하루 부산 방어선 전체에서 미군 사상자는 1,245명이었다1. 워커는 해병을 빼지 말아 달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일 새벽 영 시 십오 분, 해병은 오봉리 능선 앞 진지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1. 북한군 제9사단과 제4사단의 남은 병력이 아직 오봉리와 클로버잎 고지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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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 새벽 두 시 반, 창녕 서쪽, 미 제23연대 진지.
연대는 흩어진 대대들을 부곡리–창녕 길목 한곳에 모았다. 1,100명이던 제1대대는 600명으로 줄어 있었다. 북한군 제2사단이 포격을 앞세우고 F중대를 뚫었다. F중대의 장교가 모두 쓰러졌다.
제2대대 부관 랠프 R. 로빈슨 중위가 중대를 넘겨받았다. 북한군은 이미 중대 진지 안쪽과 뒤로 스며들고 있었다. 로빈슨은 어둠 속에서 그들 사이를 지나 450미터 떨어진 A중대로 갔다.
“예비 소대 좀 빌려 주시오. 지금.”
그는 그 소대를 데리고 같은 길을 되짚어 와서, 쏟아지는 비 속에서 F중대의 뚫린 자리에 밀어 넣었다.
북한군은 그날 밤 또 왔고, 9일 낮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중대에서 부상병이 끊이지 않고 내려왔다. 본부중대와 특수부대원을 분대로 묶어 가장 급한 곳으로 올려 보냈다. 한때 연대 예비는 여섯 명이었다. 정오가 지나 공격이 그쳤을 때 연대의 전투력은 38퍼센트로 떨어져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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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 부곡리, 북한군 제2사단 야전병원.
며칠 뒤 미군에 잡힌 북한군 제2사단 제17연대 군의관은 이 병원을 이렇게 말했다. 사단은 밤마다 300명쯤을 이곳으로 실어 보냈다. 9월 첫 두 주 동안 창녕 서쪽에서 사단은 1,300명이 전사하고 2,500명이 다쳤다. 9월 1일 사단 병력은 6,000명쯤이었다1.
북쪽 현풍(현 대구 달성군 현풍읍) 앞 409고지에는 제10사단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그 까닭을 끝내 알지 못했다. 포로들은 대구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라는 명령이었다고도, 지휘부가 무능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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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무안리, 미 제2사단 사령부.
적의 등 뒤로 상륙이 곧 있다는 말은 방어선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날 새벽 인천에서 상륙이 시작되었다. 카이저는 반격 명령서에 서명했다. 강 동쪽에 남은 북한군을 강 건너로 밀어내고 나루마다 교두보를 잡으라는 명령이었다. 이튿날 제9·23·38연대가 왼쪽부터 나란히 나아가기로 되어 있었다2.
북한군 4개 사단은 강을 건넜으나 밀양에 닿지 못했다6. 박진나루의 부교는 그날 밤에도 놓였다가 걷혔다.
9월 17일, 낙동강 동쪽 오봉리에서 본초리(현 경남 창녕군)까지 북한군은 보이지 않았다2. 209고지 남쪽 봉우리에 왓킨스를 두고 내려온 병사들은 그를 다시 찾지 못했다. 논에 남은 스토리도 돌아오지 못했다.
일흔세 해가 지난 2023년 4월,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은 하와이 국립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 있던 유해 하나가 루서 스토리라고 밝혔다7. 그해 미국의 전몰장병 추모일인 메모리얼 데이에 그는 고향 조지아의 앤더슨빌 국립묘지에 다시 묻혔다8.
사료 출처
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1화·9화 출처와 같은 책) — 제21장 「August Build-up and September Portents」 끝부분(북한군 9월 공세 편성 13개 사단, 9월 1일 총병력 약 97,850명·제2사단 6,000·제4사단 5,500·제9사단 9,350·제10사단 7,500, 다섯 공격집단과 제2집단 목표 밀양, 제1군단 공격 시각 8월 31일 23시 30분, 제16기갑여단 T-34 43대, 보급 부족과 하루 한두 끼, 9월 중순 개인화기 보급 중단), 제23장 「North Korean Breakthrough in the South」 중 「Agok」 「Task Force Manchu Misfires」 「The North Koreans Split the U.S. 2d Division」 「General Walker's Decisions on 1 September」, 제24장 「The North Korean Great Naktong Offensive」 중 아곡 A중대 철수·「The End of Task Force Manchu」·「The Battle of Yongsan」·「The 23d Infantry in Front of Changnyong」·「A North Korean Puzzle」, 장 끝 「15 September」 서술. 박교삼 명령문(8월 28일), 북한군이 미 제24사단을 상대로 적은 일, 제9사단의 국경경비대 기원과 제3연대 인천 잔류, 노획 문서의 「main force」 표현, 횃불 행렬과 관측장교 추산 2,000명, 쿠마 회고문(인용 부분), 만주 작전 계획·취소(23시 55분), 신 군종, 209고지 남쪽 봉우리의 인원·무기·투하 품목(맥주 21캔 포함)·항복 요구·빗물·29명 하산과 22명 귀환, 콜드웰 피랍과 9월 10일 귀환, 박진나루 수중 도로·야간 부교·운반대(50명에 병사 4명, 800~1,000명), 공병 D중대 바주카 18정과 사상자, 영산 탈환 15시, 해병 3일 사상자(34명 전사·157명 부상), 4일 북한군 제9사단 지휘소, 5일 도곡 전차전과 그날 사상자 통계, 해병 6일 0시 15분 이탈, 제23연대 1대대 병력 감소, 8~9일 전투·예비 6명·전투력 38퍼센트, 제17연대 군의관 진술, 제10사단의 409고지 정지와 그 이유에 대한 포로 진술. 2. 박재광, 「창녕전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종수정 2024.11.19), encykorea.aks.ac.kr/Article/E0055367 — 전투 기간 8월 31일~9월 17일, 제9연대 영산 정면(부곡리~남지)·제23연대 창녕 정면·제38연대 현풍 정면 배치, 북한군 제9사단(영산)·제2사단(창녕)·제10사단(현풍), 오봉리~주매리·본초리 선 저지와 창녕·영산 두 지구 분할, 9월 15일 케이저의 반격 결심과 16일 세 연대 병진 공격, 17일 강 동쪽 적 소멸. 참고문헌: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3(1981) 등. 3. 미 육군 군사사센터, 「Medal of Honor Citations」(영문 위키백과 각 인물 문서 재수록) — 쿠마(아곡, 8.31~9.1, 적 최소 250명), 스토리(아곡 부근 9.1, 기관총으로 약 100명, 길 한가운데서 트럭에 수류탄, 부상 뒤 엄호), 왓킨스(9.2~9.3), 우엘렛(8.31~9.3), 코프먼(9.4~9.5, G중대), 터너(9.1 영산). 4. 영문 위키백과, 「Luther H. Story」 — 출생 1932.7.20, 조지아주 부에나비스타, 소작농 집안, 열여섯에 입대하며 어머니가 생년을 1931년으로 적음. 5. 영문 위키백과, 지휘관 각 인물 문서 — 카이저·크레이그·워커·프리먼·머리의 직책과 경력(Appleman과 함께 씀). 6. 영문 위키백과, 「Second Battle of Naktong Bulge」(2026.10 열람) — 참전 병력 추정(유엔군 21,788·북한군 28,350), 미 제2사단 부산 방어선 기간 손실(전사 1,120·부상 2,563·포로 67·실종 69), 제1해병임시여단 방어선 기간 손실(전사 185·부상 약 500). 각주는 Appleman, Fehrenbach 『This Kind of War』(2001), Millett 『The Korean War』 1권(2000), Ecker 『Battles of the Korean War』(2004) 등. 7. 한미 정상 공동성명(2023.4.26) — 루서 스토리 유해 신원 확인 발표. 8. AP(2023.5.29), nbcnews.com/news/us-news/medal-honor-recipients-remains-buried-georgia-identified-73-years-late-rcna86636 — 73년 만의 신원 확인, 메모리얼 데이 앤더슨빌 국립묘지 재안장.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쿠마 1919년생, 스토리 1932년생, 왓킨스 1920년생, 우엘렛 1930년생, 코프먼 1923년생(1951.2.10 전사), 터너 1921년생, 카이저 1895년생, 크레이그 1896년생, 워커 1889년생, 프리먼 1907년생(이상 위키데이터·영문 위키백과), 머리 1912년생(영문 위키백과). 박교삼, 글래스고, 바솔디, 베리, 힐, 콜드웰, 슈미트, 신, 로드리게스, 펀, 헤인스, 브래들리, 빌러, 맥도니얼, 리드, 로빈슨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스토리의 나이 — 공적문은 1931년 7월 20일생, 위키백과·AP는 실제 1932년생이며 어머니가 한 해 앞당겨 적었다고 한다. 본문은 1932년을 따라 열여덟로 적었다(공적문을 따르면 열아홉). [자료 충돌] 왓킨스의 최후 — Appleman은 9월 4일 밤 열 시 생존자들이 내려갈 때 왓킨스가 아직 살아 카빈을 가슴에 얹어 달라고 했다고 적었고, 위키백과는 9월 3일 그가 철수를 명령하고 곧 죽었다고 적는다. 공적문은 「30명」이 고립되었다고, Appleman은 60~70명이라고 적었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터너의 날짜 — Appleman은 9월 1일 영산 남쪽 전투로, 위키데이터는 사망일을 9월 2일로 적었다. [자료 충돌] 박진나루 고지 번호 — Appleman은 B중대 고지를 209고지로, 백과사전은 9월 16일 탈환한 박진 나루터 통제 고지를 208고지로 적었다. 같은 고지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북한군 상대 부대 — 백과사전 도입부는 상대를 「제4사단」으로 적고 본문은 제9·2·10사단을 적는다. Appleman은 제9·4·2·10사단 넷을 제2공격집단으로 적는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9월 북한군 제2사단장은 위키백과 정보란이 이청송, Appleman은 9월 말 사단장을 최현으로 적어, 본문에는 사단장 이름을 넣지 않았다. [자료 충돌] 반격 날짜 — 백과사전은 9월 15일 반격 결심·16일 공격 개시, Appleman은 이 무렵을 다음 장(방어선 돌파)에서 다룬다. 본문은 백과사전 날짜를 따랐다. [수치] 마일·야드는 미터법으로 바꾸어 적었다(2,600야드→2,400미터, 6×8마일→10×13킬로미터, 5갤런→20리터 등). 아곡과 박진나루의 거리 「20킬로미터」는 창녕 정면에서 아곡까지의 개략 거리다. [재구성] 모든 대화(신반리 명령 낭독 장면의 분위기, 글래스고 소대원의 농담, 프리먼의 「쏴」, 쿠마의 사격 명령, 신 군종의 말, 스토리와 전우의 말, 카이저의 지휘 분할 문장, 워커의 「사수하든지, 여기서 죽든지」는 「stand or die」를 옮긴 말, 맥주를 둘러싼 농담, 운반대를 다그치는 병사, 빌러 진지의 보고, 왓킨스의 「나 업고는」, 로빈슨의 말), 운반대원의 차림과 걸음, 9월 15일 사령부 장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항복 요구 문장과 왓킨스가 식량을 거절한 까닭은 Appleman 기록을 옮겼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