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16,370자)
다부동 전투 — 더 물러설 곳은 없다
1950 · 네오
1950년 8월 5일 밤, 경상북도 상주 낙동리(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나루.
강물이 가슴에서 목으로 올라왔다. 북한군 제13사단 제19연대 병사들은 소총을 머리 위로 받쳐 들고 한 줄로 낙동강을 건넜다1. 그날 먼저 건넌 제21연대는 강 한가운데서 미군 비행기의 기총 사격을 받았고, 건너편 둑에서 날아온 국군 박격포탄이 물기둥을 세웠다. 그 물속에 몇 명이 남았는지 세어 본 사람은 없었다. 박격포와 차량은 서쪽 둑에 두고 왔다1. 젖은 탄띠가 어깨를 눌렀고, 발밑 모래가 걸음마다 쓸려 나가서 병사들은 앞사람의 뒷머리만 보고 걸었다.
강을 건너면 대구까지는 산이었다. 김일성(38)은 7월 20일 충청북도 수안보(현 충주시 수안보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다그쳤다2. 낙동강에 막힌 지금, 북한군의 목표는 광복절까지 대구를 점령하는 것으로 줄어 있었다3. 대구 북쪽과 서쪽에 북한군 다섯 개 사단이 모였다2. 광복절까지 열흘이 남아 있었다.
*
8월 13일 아침, 칠곡 동명국민학교(현 칠곡군 동명면 동명초등학교), 국군 제1사단 사령부.
교실 책상을 벽으로 밀어붙인 자리에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단장 백선엽(30)은 연필 끝으로 선 하나를 따라갔다4. 왜관(현 칠곡군 왜관읍) 북쪽 328고지에서 시작해 수암산과 유학산 능선을 타고, 동쪽 가산의 옛 산성까지 이어지는 20킬로미터 남짓한 선이었다5. 육군본부는 8월 11일 강변을 버리고 이 선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했고, 사단은 전날 밤 여덟 시부터 강변 진지를 비우고 내려왔다6. 백선엽은 이 선을 속으로 마지막 선이라고 정해 두었다3. 이 선이 뚫리면 다음 산은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도덕산이었고, 거기까지 밀리면 대구 시내가 북한군 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5.
“12연대 보고입니다. 유학산에 적이 먼저 올라가 있답니다.”
참모의 목소리가 낮았다. 사단은 강변에서 곧장 새 진지로 들어가지 않고 다부동(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뒤쪽에 일단 모였다가 다시 올라가는 순서를 밟았다. 그 몇 시간 사이에 북한군 제13사단이 유학산 꼭대기를 차지했다6. 제15연대가 328고지로,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으로, 제11연대가 다부동 북쪽 도로로 나갔을 때, 지키기로 한 산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적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선엽은 지도 위의 유학산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해발 839미터, 동서로 길게 누운 바위산이었고, 남쪽 사면에는 깎아지른 벼랑이 많았다5. 사단은 그 벼랑을 아래에서 위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
8월 14일 새벽 한 시, 왜관 북쪽 328고지.
328고지는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바위산이었다. 꼭대기에 서면 강 건너 고을 약목(현 칠곡군 약목면)의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고, 남쪽 능선을 타면 왜관까지 곧장 내려갈 수 있었다. 제15연대 제1대대가 그 바위 틈에 엎드린 지 하루가 채 안 된 밤이었다.
강 쪽에서 물 튀는 소리가 났다. 북한군 제3사단의 1개 연대가 마진나루(현 경북 칠곡군)에서 물 밑에 낮게 깔아 둔 길을 밟고 건너오고 있었다5. 기관총이 불을 뿜었지만 어둠 속에서 올라오는 대열은 끝이 없었다. 대대는 꼭대기를 내주고 뒷비탈로 물러났고, 북한군은 옆 270고지의 제3대대 진지까지 집어삼켰다5.
날이 밝자 두 대대가 다시 올라갔다. 적의 증원이 오기 전에 찔러야 했다. 오전 여덟 시, 대대는 꼭대기를 되찾고 앞비탈의 산 높이 칠 할쯤 되는 7부 능선까지 내려갔다. 그때 강 건너에서 북한군 포탄이 쏟아졌다. 바위에 맞은 포탄은 돌조각을 사방으로 튀겼고, 엎드린 병사들의 철모 위로 흙과 돌이 비처럼 떨어졌다. 대대는 다시 뒷비탈로 물러났다가 465고지까지 밀려났다5. 물러나면서 연대는 특공대 한 무리를 328고지 뒤쪽에 숨겨 두었다5.
15일 새벽, 숨어 있던 특공대와 두 대대가 앞뒤에서 들이쳐 328고지와 270고지를 되찾았다5. 오후 네 시쯤 미군 비행기가 강 건너 언덕을 두드렸다. 꼭대기에는 불붙은 젤리 기름을 뿌리는 네이팜탄에 탄 북한군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날 밤 열한 시, 북한군이 다시 올라왔고 대대는 또 산을 내주었다5.
열이틀 동안 328고지의 주인은 열다섯 번 바뀌었다5. 바뀔 때마다 수류탄이 먼저 날아갔다. 바위 뒤에 엎드린 병사가 안전핀을 뽑아 던지면, 바위 너머에서 같은 소리가 되돌아왔다.
*
8월 16일 열한 시 오십팔 분, 낙동강 서쪽 약목 부근.
북한군 제2군단 통신대의 소령급 장교인 소좌 김윤문은 하늘이 낮게 울리는 소리를 먼저 들었다. 소리는 한 대의 엔진이 아니라 수십 대의 엔진이 겹쳐 만든 울림이었다. 고개를 들자 은빛 동체에 날개 밑으로 엔진 네 개를 단 미군의 대형 폭격기 B-29가 줄지어 오고 있었다.
일본 요코타와 오키나와 가데나 비행장에서 뜬 B-29 98대가 이십육 분 동안 폭탄 960톤을 쏟아부었다6. 폭탄은 낙동강 서쪽 강변에 그어 놓은 남북 12킬로미터, 동서 5.6킬로미터의 네모 칸 안에 떨어졌다1. 땅이 들려 올라갔다가 내려앉았다. 김윤문이 붙들고 있던 전화선은 한꺼번에 끊겼다. 그는 뒷날 이렇게 증언했다6.
“3사단과 15사단의 예비대와 지원 포병, 공병과 전차, 탄약이 다 부서졌습니다. 유선이 모조리 끊겨서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군단장 무정 동지를 비롯해 군단 간부들은 그때부터 흔들렸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피해는 입 밖에도 못 내게 했습니다.”
같은 시각, 폭격기 부대를 지휘한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 오도널 소장은 두 시간 넘게 목표 상공을 돌았다. 그는 땅 위에서 움직이는 적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1. 이튿날 한국의 미 지상군을 지휘하던 미 제8군의 사령관 워커 중장은 연기와 먼지 때문에 폭격의 효과를 가늠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1. 폭격 구역을 살피러 강을 건너간 미군 수색대는 그 땅에 닿지 못했다1. 미군은 나중에 포로들에게서, 폭격 구역에 있으리라던 북한군 사단들이 이미 강을 건너 동쪽 산속에 들어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 폭격으로 북한군 병사 한 명이라도 죽었다는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1. 다만 그 뒤 한동안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진지로 떨어지는 북한군 포탄이 눈에 띄게 줄었다1. 19일로 잡혀 있던 두 번째 폭격, 넓은 땅을 빈틈없이 덮는 융단폭격은 취소되었다6.
*
8월 18일 새벽, 대구역.
포탄 일곱 발이 역 부근에 떨어졌다. 기관차를 돌려 넣는 둥근 기관고가 부서졌고, 구내에서 객차를 옮기던 기관차 한 대가 망가졌다. 주민 하나가 죽고 여덟이 다쳤다1. 가산 쪽으로 숨어든 북한군이 쏜 포탄이었다2.
그날 경상북도는 대구 시민에게 피란령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를 부산으로 옮겼다6. 평소 30만 명이 살던 도시에는 피란민이 몰려들어 70만 명이 북적이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보따리를 이고 남쪽 길로 쏟아져 나왔다1. 군용 트럭이 길 가운데 멈춰 섰다. 피란령은 곧 거두어졌지만, 대구에서 다부동까지 남은 거리는 22킬로미터였다5.
*
8월 18일 오후 한 시, 다부동 북쪽 상주–대구 도로.
미 제27연대장 존 마이켈리스(38) 대령은 트럭에서 내려 북쪽을 보았다7. 미 제25사단 소속인 이 연대는 낙동강 돌출부 남쪽에서 북한군을 쓸어낸 직후 미 제8군의 예비대로 경산에 불려 왔고, 17일 정오에 다부동 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1. 길 양쪽에 미루나무가 줄지어 섰고, 길 서쪽으로 개울이 나란히 흘렀다1. 서쪽에는 유학산의 바위 능선이, 동쪽에는 가산 쪽 산줄기가 솟아 있었다. 양쪽 높은 데서 국군과 북한군이 맞붙은 총소리가 계곡 바닥까지 내려왔다.
“전차 앞으로. 보병은 길 양쪽 낮은 능선으로.”
미군의 M26 퍼싱 전차가 길을 따라 나갔고, 길버트 체크 중령의 제1대대가 길 왼쪽을, 고든 머치 중령의 제2대대가 오른쪽을 맡았다. 첫 한 시간 동안은 총알이 거의 날아오지 않았다1. 다부동에서 3킬로미터쯤 올라갔을 때 무전이 왔다. 양쪽 산 위의 국군 두 연대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마이켈리스는 진격을 멈추고 두 대대를 길 양쪽에 둥글게 묻었다1. 전차 두 대는 길 위에, 두 대는 개울 바닥에 섰다. 바주카, 그러니까 어깨에 메고 쏘는 3.5인치 로켓포를 든 여섯 개 조가 진지 앞 길가와 개울에 엎드렸다1.
진지 앞 1.5킬로미터, 천평동(현 칠곡군 가산면 천평리)에서 길이 둘로 갈라졌다. 왼쪽 길은 상주로, 오른쪽 길은 군위(현 대구 군위군)로 갔다. 갈림길 너머 상주 쪽 굽잇길에는 신주막(현 경북)이라는 작은 마을이 언덕 뒤에 숨어 있었다. 북한군 전차는 낮 동안 거기 숨어 있다가 밤에 나왔다1.
해가 지자 북한군 박격포와 포가 진지를 두드렸다. 신주막 쪽에서 전차 두 대와 자주포 한 대가 나왔고, 그 뒤를 트럭과 보병이 따랐다. 포병 관측장교 루이스 밀렛(30) 중위는 참호 앞 45미터 거리까지 들어온 소련제 T-34 전차를 보면서 무전기에 좌표를 불렀다8. 포탄이 자주포와 트럭 두 대를 뒤집었다. 바주카 한 조가 두 번째 전차를 잡았고, 맨 앞 전차는 로켓 두 발을 맞고도 터지지 않았지만 승무원들이 전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뒤따라오던 전차 석 대가 멈추더니 전조등을 켜고 차를 돌려 북쪽으로 돌아갔다1.
참호 속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불까지 켜고 가네. 퇴근하나 보다.”
웃음이 낮게 번졌다. 그 밤이 일곱 밤 연달아 이어질 싸움의 첫 밤이었다1.
*
8월 19일 밤, 동명국민학교.
부관이 백선엽의 어깨를 흔들었다. 운동장 쪽에서 다발총과 기관총 소리가 났고,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교실 유리창을 떨게 했다. 북한군 돌격대가 사단 사령부를 덮쳤고, 통신병들이 전화기 앞에서 쓰러졌다. 돌격대는 사단장을 산 채로 잡아가려고 왔다. 마침 그날 운동장에는 육군본부가 제1사단에 붙여 준 제8사단 병사들이 숙영하고 있었다. 그 병사들이 잠결에 총을 잡고 돌격대를 몰아냈다3.
뒷날 백선엽은 그 밤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김일성이 자기를 잡아 오는 인민군에게 1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했다3.
“평양에 들어가 보니 소 한 마리가 100원이더군요. 내 목숨이 소 천 마리 값이었던 셈이지요.”
*
8월 20일, 유학산 남쪽 비탈.
지게가 줄을 지어 산을 올라갔다. 대대마다 노무자가 쉰 명에서 예순 명씩 붙어 있었다6. 그들은 주먹밥과 물통과 탄약 상자를 지게에 얹고 벼랑 사이로 난 길을 올라갔고, 내려올 때는 같은 지게에 부상병을 얹었다. 수암산 쪽에서는 노무자가 하루에 쉰 명에서 예순 명씩 죽었다3. 그들의 이름은 어느 부대의 명부에도 올라가지 않았다.
제11연대 의무지대장 강성모 중위는 하루에 예순에서 일흔 명을 치료했다3. 대대 하나가 150명에서 200명이던 때였다. 먹는 약은 아스피린뿐이었고, 바르는 약은 알코올과 붕대가 전부였다3. 그는 계급 순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 살 가망이 없는 중상자를 맨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는 뒷날 이렇게 말했다3.
“총알이 폐를 뚫어 속에서 피가 나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았습니다. 싸움이 사람을 초인으로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사단은 날마다 600명에서 700명을 잃었다6. 신병과 학도병이 그 자리를 메웠다. 사단의 최병형 소령은 이렇게 기억했다. 하루에 보충병 500명에서 600명을 받아도 한 번 싸우고 나면 절반밖에 남지 않았고, 시체를 땅에 묻을 시간이 없어서 그대로 두고 싸웠다3.
그날 밤 북한군 쪽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유학산 북서쪽에 있던 제15사단을 빼내 동쪽 영천 방면으로 돌렸다6. 유학산 앞에는 제13사단과 제3사단 일부가 남았다. 그 낮에 다부동 전선을 둘러본 워커 중장은 대구는 이제 틀림없이 살았다고 말했다1.
*
8월 21일 아침, 제11연대 정면.
반격을 시작하기로 한 아침이었는데 북한군이 먼저 들이쳤다. 제11연대 제1대대가 고지를 내주고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사단 사령부에 들어왔다. 바로 옆 골짜기의 미 제27연대도 술렁였다. 미군은 한국군이 물러나 자기들의 퇴로가 끊기게 생겼으니 늦기 전에 철수하겠다고 미 제8군에 보고했다. 곧 미 제8군 사령부에서 전화가 왔다6.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생각이 있는 군대입니까?”
백선엽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지프에 올랐다. 제11연대 정면에 이르자 보고 그대로였다. 병사들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비탈을 내려오고 있었다. 백선엽은 대대장 김재명(25) 소령을 불렀다9.
“어떻게 된 일이냐?”
김재명의 얼굴도 흙빛이었다.
“병사들이 밤낮없이 싸워 지쳤습니다. 보급이 끊겨서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셨습니다.”
백선엽은 잠깐 말이 없었다10. 그러고는 내려오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앉아라.”
병사들이 비탈에 주저앉았다. 누군가 수통을 거꾸로 들고 흔들었지만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백선엽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도 물러설 곳이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후퇴하면 나라가 망한다. 저기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먼저 물러나서야 되겠나? 다시 싸우자.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그는 권총을 빼 들고 비탈 위로 걸어 올라갔다. 사단장의 등을 보고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함성이 비탈을 타고 올라갔고, 대대는 고지를 되찾았다6. 그 광경을 본 마이켈리스는 나중에 백선엽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며, 사단장이 직접 앞장서는 한국군은 귀신 같은 군대, 곧 「신병」이라고 말했다6. 이 이야기는 백선엽 자신의 회고로 전해진다10.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같은 무렵을 다르게 적었다. 마이켈리스는 왼쪽의 한국군이 무너졌고 싸우지 않는다고 미 제8군에 급히 보고하며 공중 지원을 청했다1. 백선엽은 그 말에 몹시 분개했다. 그는 자기 사단이 탱크와 포병의 지원을 다 받으며 골짜기를 지킬 테니, 미군 연대가 소총만 들고 산에 올라가 밤 싸움을 해 보라고 했다1. 미 제8군 참모부와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국군 제1사단의 진지를 하나하나 돌았다. 국군 부대는 모두 백선엽이 말한 자리에 있었다1. 미군 전사는 국군 병사들이 낮이면 먹을 것을 찾아 골짜기로 내려와 개울에서 몸을 씻었다가도, 해가 지기 전에 늘 산꼭대기로 돌아갔다고 덧붙였다1.
*
8월 21일 밤~22일 새벽, 천평동 남쪽 계곡.
자정 무렵까지 북한군 포탄이 미군 진지 일대에 떨어졌다. 미군은 해 질 녘에 길과 개울 바닥 140미터 앞에 대전차 지뢰와 대인 지뢰, 건드리면 불이 켜지는 조명 장치를 묻었고, 그 앞에 지뢰 한 줄을 땅 위에 더 깔아 두었다1.
길 왼쪽 높은 데 있던 C중대장이 대대에 전화를 걸었다. 앞에서 전차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조명탄이 하늘에서 터지자 계곡 바닥이 하얗게 드러났다. 중대장은 길 위에 줄지어 오는 차량을 셌다. 열아홉 대였다1. 그 양쪽 비탈로 북한군 보병이 올라왔고, 같은 시각 다른 부대가 양쪽 높은 능선의 국군을 덮쳤다.
미군 퍼싱 전차는 쏘지 않고 기다렸다. 맨 앞 T-34가 110미터쯤 앞까지 왔을 때 퍼싱의 90밀리 포가 그 전차를 멈춰 세웠다. F중대 바주카 조가 세 번째 차량인 자주포를 잡았고, 두 대 사이에 갇힌 두 번째 전차도 바주카에 맞아 승무원들이 버리고 달아났다. 북한군 보병은 지뢰밭에 들어서서야 기관총을 맞았다. 북한군은 공격 신호로 초록 조명탄을 썼는데, 미군은 같은 초록 조명탄을 구해 두었다가 자기들의 가장 단단한 진지 위로 쏘아 올렸다. 그 빛을 보고 몰려온 북한군이 가장 많이 쓰러졌다1.
T-34는 미군 전차를 노리고 철판을 뚫는 철갑탄을 길을 따라 똑바로 쏘았다. 불덩이가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을 따라 미끄러져 갔고, 포성이 양쪽 산벽에 부딪혀 되울렸다. F중대 병사들은 그 모습이 볼링 레인을 따라 핀을 향해 굴러가는 공 같다고 했다. 그날 밤부터 미군은 그 골짜기를 「볼링장」이라고 불렀다6.
싸움은 다섯 시간 동안 이어졌다. 제2대대를 받친 105밀리 곡사포 포대 하나가 1,661발을, 4.2인치 박격포 소대가 902발을, 81밀리 박격포 소대가 1,200발을 쏘았다. F중대는 60밀리 박격포탄 385발을 쏘았다1. 포탄과 전차포가 T-34 일곱 대와 자주포 세 대, 트럭 여러 대를 더 부수었다1.
날이 밝자 순찰대가 진지 앞을 걸었다. 그들은 쓰러진 사람의 수를 보고 북한군 사상자를 1,300명쯤으로 어림했다1. 붙잡힌 포로 열한 명은 자기 부대가 그 밤에 넷 가운데 하나만 남았다고 말했다1.
*
8월 22일 오전 열 시, 다부동 북쪽 5킬로미터.
북한군 제13사단 포병연대장으로 중령급인 중좌 정봉욱(26)은 흰 천을 단 막대기를 들고 국군 진지 쪽으로 걸었다11. 어깨에는 가죽 지도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1. 사단장은 다부동을 포격하지 못한다고 그를 꾸짖었다. 정봉욱이 보기에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의 포탄은 다부동까지 닿을 수 없었다. 그는 포병연대를 두고 혼자 산을 내려왔다1.
국군 초병이 총구를 들이댔다. 정봉욱은 흰 천을 더 높이 들었다.
“쏘지 마시오. 지도가 있소.”
가방 속 지도에는 그의 포가 숨은 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다부동에서 북쪽으로 7킬로미터쯤 떨어진 유학산 북쪽 작은 골짜기의 과수원에, 아직 쓸 수 있는 122밀리 곡사포 일곱 문과 76밀리 포 열세 문이 위장망을 덮고 있었다1. 그날 미군 전폭기들이 그 과수원에 네이팜탄을 퍼부었고, 미군 포병이 같은 자리를 두드렸다1. 그때까지 붙잡히거나 넘어온 북한군 가운데 정봉욱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유학산에서만 제13사단의 사상자가 1,500명에 이르렀고, 사단 전체로는 3,000명을 잃었다고 진술했다6.
*
8월 22일 밤, 유학산.
제12연대는 열흘 가까이 유학산 벼랑을 기어올랐다. 여덟 번을 올라가서 여덟 번 밀려 내려왔다. 그날 밤 연대는 처음으로 해가 진 뒤에 몰래 올라가는 기습을 택했다6. 병사들은 바위틈을 손으로 더듬어 올라갔고, 꼭대기 바로 아래에서 수류탄을 한꺼번에 던졌다. 아홉 번 주인이 바뀐 끝에 유학산은 국군의 손에 남았다5. 연대는 그 산 하나를 되찾는 데 1천여 명을 잃었다3.
*
8월 23일~28일, 가산과 볼링장 계곡.
북한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군위 쪽에서 막 내려온 북한군 제1사단 제1연대가 동쪽 높은 능선을 타고 미군 진지 뒤로 돌아 들어왔다. 22일 오후에는 미 제8포병대대 사격지휘소에 포탄 두 발이 곧장 떨어져 장교 넷과 부사관 둘이 전사했다1. 23일에는 북한군이 국군 제10연대가 지키던 741고지를 빼앗고 가산까지 스며들어 제11연대 지휘소를 덮쳤다6. 미 제23연대와 국군 제10연대·제15연대가 능선을 훑어 그들을 몰아냈고, 741고지를 다시 찾았다6.
23일 오후 한 시 삼십오 분, 마이켈리스가 미 제8군에 보고했다. 북한군 제13사단이 앞길을 폭파하고 지뢰를 묻은 뒤 물러나고 있었다1. 25일 새벽, 제27연대가 볼링장 계곡에서 맞은 마지막 공격이 왔다. 두 개 중대에 전차 몇 대가 따른 공격이었고, 미군 포병이 전차 두 대를 더 부수었다1. 그날 저녁 여섯 시부터 이튿날 새벽 세 시 사십오 분까지 국군 제1사단이 계곡의 미군 진지를 넘겨받았다1. 미군이 일주일 동안 확인한 북한군 손실은 T-34 열세 대, 자주포 다섯 대, 차량 스물세 대였다1. 제27연대는 마산(현 경남 창원시)으로 돌아갔다.
28일, 제12연대가 열흘 전에 빼앗긴 수암산을 되찾았다6. 사단이 8월 12일에 들어가기로 했던 선을 다 손에 넣은 것은 그로부터 16일 뒤였다6.
*
그 무렵, 제15연대 정면, 270고지 아래.
육군본부에서 중령 하나를 반장으로 한 조사단이 사단 사령부에 내려왔다. 제1사단은 부대마다 날마다 올려야 하는 인원 보고인 일보를 몇 날째 내지 않고 있었다. 조사단은 인사 기록을 맡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에서 나온 사람들이었고, 규정 위반을 따지러 왔다6.
사단은 그들을 제15연대 전투 현장으로 보냈다. 대대장은 규정을 읊는 조사단에게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직접 가 보시면 압니다.”
대대장은 그들을 데리고 270고지로 올라갔다. 길목마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8월의 볕이 바위를 달구었고, 그 열기가 냄새를 더 짙게 끌어 올렸다. 조사단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지만 숨을 쉴 수 없었다. 꼭대기에 다 오르기 전에 반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조사단은 아무 말 없이 산을 내려갔다. 그 뒤로 육군본부는 일보를 내라고 재촉하지 않았다6.
일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신병이 오면 명단을 적을 틈도 없이 중대에 밀어 넣었고, 하룻밤 싸우고 나면 총원의 3할에서 4할이 사라졌으며, 이튿날 다시 신병이 그 자리를 채웠다. 중대장도 소대장도 자기 부대에 지금 몇 명이 있는지 몰랐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분대원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여름에 죽은 병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무명용사로 한꺼번에 처리되었다6.
뒷날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국군 병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그 병사는 누군가 정성 들여 묻어 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3. 그를 묻어 준 사람도 아마 그의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
사료 출처
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9장 「The Taegu Front」 중 「The North Koreans Cross the Naktong for the Attack on Taegu」「Carpet Bombing Opposite Waegwan」「Bowling Alley—The Sangju-Taegu Corridor」,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북한군 제13사단의 8월 4~7일 낙동리 도하(제21연대 5일, 제19연대 목까지 물에 잠겨 무기를 머리 위로, 중화기·차량 두고 옴), 제15사단 유학산 집결, 대구 인구 30만→70만, 18일 아침 포탄 일곱 발(기관고 파손, 구내 기관차 1대 파괴, 주민 1명 사망·8명 부상), 폭격 구역(가로 3.5마일·세로 7.5마일), 오도널의 두 시간 비행, 워커의 효과 판정 불가 보고, 수색대 미도달, 「한 명이라도 죽였다는 증거를 보일 수 없었다」, 북한군 포격 감소, 제27연대 경로(경산 예비대, 17일 칠곡), 18일 13시 공격과 정지, 포진(전차·바주카 여섯 조), 미루나무 길과 개울, 천평동 갈림길과 신주막, 첫 야간 공격(밀렛 중위, 50야드의 T-34, 전조등 켜고 돌아간 전차 석 대), 일곱 밤 연속 공격, 초록 조명탄, 지뢰, 20일 워커의 「대구는 확실히 구해졌다」, 21일 지뢰 매설(150야드), C중대장의 열아홉 대, 125야드 격파, F중대 바주카, 다섯 시간, 사격량(1,661·902·1,200·385발), 사상 1,300명 어림과 포로 열한 명, 「볼링장」 이름, 마이켈리스의 보고(「those people are not fighting」)와 백선엽의 반박·제8군 조사, 국군 병사의 낮 목욕, 22일 16시 5분 포격과 사격지휘소 직격(장교 4·부사관 2 전사), 정봉욱 중좌 귀순(22일 10시, 흰 깃발, 가죽 지도 가방, 122밀리 7문·76밀리 13문, 과수원, 네이팜), 23일 13시 35분 보고, 25일 마지막 공격, 25일 18시~26일 03시 45분 교대, 확인 손실(T-34 13대·자주포 5대·차량 23대), 제1연대 400명. 2. 양영조, 「다부동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2023.2.7 고침), 항목 번호 E0013458 — 김일성의 7월 20일 수안보 독촉(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 대구 북방 북한군 5개 사단, 8월 11일 방어선 축소, 융단폭격이 북한군 지휘관에게 준 심리적 충격, 18일 대구역 포탄, 20일 제15사단 전환으로 위기 해소. 참고문헌: 군사편찬연구소 『낙동강선방어작전』(2008),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다부동전투』(1981). 3. 이영욱, 「[낙동강방어선전투] 인천상륙작전 토대된 ‘칠곡 다부동전투’」, 매일신문(2022.12.26), imaeil.com/page/view/2022122112354405208 — 북한군 목표의 수정(광복절까지 대구 점령), 백선엽의 「마지막 선」 술회, 19일 밤 동명국민학교 습격과 8사단 병사, 현상금 10만 원과 「소 천 마리」, 11연대 의무지대장 강성모 중위(하루 60~70명, 아스피린·알코올·붕대, 중상자 나중, 「초인」), 최병형 소령 회고, 노무자 하루 50~60명 희생(수암산), 12연대 1천여 손실, 가산산성 전투 현장의 국군 유해(「전우가 정성껏 묻어준 것으로 추정」). 회고문은 뜻을 살려 다듬었다. 4. 영문 위키백과 「Paik Sun-yup」 — 1920년 11월 23일생. 5. 김일수, 「다부동 전투」·「328고지 전투」·「674고지 전투」·「6·25전쟁 호국격전지 낙동강과 유학산」, 디지털칠곡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chilgok.grandculture.net/chilgok/toc/GC02300832, GC02300827, GC02300828, GC02301900 — 다부동은 60여 가구 마을, 대구에서 22킬로미터, 328고지–유학산(839미터)–741고지–902고지(가산) 약 20킬로미터 방어선, 도덕산(660미터)까지 10킬로미터, 12일 밤 여덟 시 철수 시작, 사령부 동명초등학교, 328고지 전투 경과(14일 01시 마진나루 수중 가도 도하, 270고지 상실, 08시 탈환, 7~8부 능선, 강 건너 포격, 465고지 철수, 특공대, 15일 새벽 탈환, 16시 네이팜, 23시 재상실, 열다섯 번), 유학산 아홉 번, 55일간 북한군 2만 4천여 명·국군 1만여 명 사상. 6. 양영조(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6·25 결정적 전투들 ② 다부동 전투 — “대구를 사수하라!” 사상 첫 한미연합작전 눈부신 전과」, 국방일보(2010.6.8),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재게재 korea.kr/news/examPassView.do?newsId=148695114 — 8월 11일 육군 명령(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 선), 12일 야간 이동, 13일 15·12·11연대 배치, 후방 집결 뒤 역진입으로 유학산을 선점당한 경위, 15일 북한군 총공격, 16일 B-29 98대(11시 58분부터 이십육 분, 960톤, 요코타·가데나 출격, 19일 2차 폭격 취소), 김윤문 소좌 증언, 18일 대구역 박격포탄·정부 부산 이동·피란령, 미 제23연대(두전동)·국군 제10연대(가산) 증원, 하루 600~700명 손실, 대대마다 노무자 50~60명, 20일 밤 제15사단 영천 방면 이동, 21일 밤 전차전과 「볼링장」 이름의 유래, 전차 9대·자주포 4문·시체 1,300여 구, 정봉욱 귀순(다음날 오전)과 진술(유학산 1,500명, 총 3,000명), 12연대 첫 야간 기습으로 유학산 탈환, 23일 적 제1사단 제1연대의 741고지·가산 침투와 11연대 지휘소 기습, 28일 수암산 탈환(피탈 10일 만), 「16일 후에야 점령」, 백선엽 회고(8월 21일 아침 11연대 1대대, 미 8군의 항의 전화, 김재명 대대장, 「모두들 앉아라」,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권총, 마이켈리스의 사과와 「신병(神兵)」), 고급부관실 조사단과 270고지, 무명용사 일괄 처리. 7. 영문 위키백과 「John H. Michaelis」 — 1912년 8월 20일생. 8. 영문 위키백과 「Lewis Millett」 — 1920년 12월 15일생. 9. 한국어 위키백과 「김재명 (1925년)」 — 육사 2기, 1925.9.21 출생, 다부동 전투 참전. 10. 인보길, 「백선엽의 다부동 결전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쏘라”」, 뉴데일리(2024.3.2), newdaily.co.kr/site/data/html/2024/03/02/2024030200021.html — 김재명 대대장의 답(「이틀째 물 한 모금 못 마셨다」),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대륙연구소, 1990)를 참고문헌으로 듦. 11. 한국어 위키백과 「정봉욱」 — 제13사단 포병연대장, 1924년생 분류.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백선엽 1920년 11월 23일생(영문 위키백과 「Paik Sun-yup」), 존 H. 마이켈리스 1912년 8월 20일생(영문 위키백과 「John H. Michaelis」), 루이스 밀렛 1920년 12월 15일생(영문 위키백과 「Lewis Millett」), 김재명 1925년 9월 21일생(한국어 위키백과), 정봉욱 1924년생(한국어 위키백과 분류), 김일성 1912년생. 김윤문·강성모·최병형·체크·머치·오도널·워커는 태어난 해를 찾지 못해 괄호를 비워 두었다. [자료 충돌] 유학산을 먼저 차지한 북한군 — 국방일보(양영조)는 제13사단, 매일신문은 제12연대와 아홉 차례 백병전을 벌인 상대를 제15사단으로 적는다. Appleman은 제13사단이 먼저 유학산에서 국군 제1사단과 싸웠고 제15사단이 12~16일 유학산 부근에 모였다고 적는다. 본문은 선점을 제13사단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백선엽의 돌격 — 날짜는 국방일보가 8월 21일 아침, 뉴데일리(인보길)는 미 23연대가 증파된 19일의 「다음 날」로 적고 탈환한 고지를 488고지라 한다. 말은 국방일보가 「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뉴데일리가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매일신문이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로 적는다. 셋 다 백선엽 본인의 뒷날 회고에서 나온 말이고 당시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마이켈리스의 계급은 Appleman과 국방일보가 대령, 뉴데일리가 중령. 김재명의 직책은 국방일보가 제11연대 제1대대장, 위키백과가 개전 초 제11연대 제3대대장으로 적어, 8월의 대대가 어느 쪽인지 다르게 읽힌다. 본문은 국방일보를 따랐다. 김재명의 계급은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마이켈리스의 「싸우지 않는다」 보고 — 백선엽 회고는 21일 아침 11연대 1대대가 밀린 일과 그 뒤의 사과로 끝나고, Appleman은 21~22일 밤 전투 무렵 마이켈리스가 그렇게 보고했고 백선엽이 분개했으며 제8군 조사 결과 국군은 제자리에 있었다고 적는다. 둘이 같은 일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은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21~22일 밤 전과 — 전차 9대·자주포 4대는 국방일보·매일신문과 Appleman(맨 앞 전차·바주카에 버려진 전차·뒤의 7대, 바주카에 맞은 자주포·뒤의 3대)이 같다. 1,300은 국방일보·매일신문이 「시체 1,300여 구 확인」으로, Appleman이 순찰대가 시신을 보고 「어림한 사상자」로 적는다. 본문은 Appleman의 「어림」을 따랐다. [자료 충돌] 정봉욱 귀순 — Appleman은 22일 오전 열 시, 혼자, 사단장이 다부동을 포격하지 못한다고 꾸짖어서라고 적는다. 국방일보는 21일 밤 전차전 「다음날 오전」(22일), 한국어 위키백과 「다부동 전투」는 21일 오전으로 적고, 위키백과 「정봉욱」은 사단장의 명령으로 쏜 포탄이 아군에 떨어진 책임을 떠넘겨서라고, 당번병 김유각과 함께 넘어왔다고 적는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피란령 — Appleman은 미 제8군의 후방 교통로 경비 책임자가 강하게 막아 중지시켰다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거리에 나가 피란령을 취소했다고 적는다. 본문은 「곧 거두어졌다」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전체 손실 —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은 55일간 북한군 2만 4천여 명·국군 1만여 명 사상(「낙동강과 유학산」 항목은 북한군 1만 7천여 명), 뉴데일리는 제1사단 전사 2,300명(장교 56명)·북한군 사망 5,690명, 한국어 위키백과는 국군 1만 명·북한군 2만 4천 명 사상으로 적는다. 집계 기간과 범위가 서로 달라 본문에는 넣지 않았다. 병력은 매일신문이 북한군 2만 1,500명 대 국군 7,600명, 포 670문 대 172문으로 적는다. [자료 충돌] 328고지 기간 — 디지털칠곡문화대전 「328고지 전투」의 기간은 2020년 수정 때 「8월 13~24일」에서 「8월 14~30일」로 바뀌었다. [재구성] 기록에 없는 것 — 대화 전부(백선엽 참모의 보고, 마이켈리스의 명령 문장, 참호 속 「퇴근」 농담, 정봉욱과 초병, 270고지 대대장의 말은 국방일보 기사 문장을 옮김), 낙동리 나루에서 앞사람 뒷머리만 보고 걷는 몸짓, 동명국민학교 교실의 지도와 연필, 328고지의 수류탄이 되돌아오는 모습, 김윤문이 전화선을 붙들고 하늘을 보는 장면(증언 내용은 국방일보 인용을 다듬음), 대구역의 피란 행렬과 멈춰 선 트럭, 계곡의 미루나무·개울을 본 마이켈리스의 시선, 비탈에 주저앉은 병사가 수통을 흔드는 몸짓, 백선엽이 비탈을 걸어 올라가는 순서, 유학산 야간 기습에서 수류탄을 한꺼번에 던지는 장면, 270고지 조사단의 손수건과 멈춘 걸음, 「그를 묻어 준 사람도 그의 이름을 몰랐을 것」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북한군 병사·지휘관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백선엽·김재명·강성모·최병형·김윤문의 말은 뒷날 회고를 뜻을 살려 다듬었다. Appleman의 영어 문장은 의역했다(원문: those people are not fighting / Taegu "certainly is saved"). [수치] 거리는 Appleman의 마일·야드를 미터로 바꾸어 어림했다(50야드≈45미터, 125야드≈110미터, 150야드≈140미터, 4.5마일≈7킬로미터, 3마일≈5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