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15,544자)
포항·기계 전투 — 바다를 등진 사람들
1950 · 네오
1950년 8월 9일 저녁, 포항여자중학교(현 포항여자고등학교).
트럭 짐칸에서 뛰어내린 학생들은 운동장 흙을 밟자마자 교사 쪽부터 쳐다보았다. 교실 문에는 「제3사단 후방지휘소」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대구에서 학도병 모집 격문을 보고 모인 학생 87명 가운데 71명이 그 운동장에 섰다1. 경북 의성(현 의성군)에서 수도사단을 따라다니던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2. 수도사단장 김석원(57) 준장이 제3사단장으로 옮겨 간다는 소식을 듣자, 71명은 집 대신 포항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3.
학교에는 연락장교 몇과 군악대원 스무 명 남짓이 남아 있었다2. 사단 주력은 북쪽 영덕(현 경북 영덕군)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싸우는 중이었다. 장교 하나가 M1 소총을 한 자루씩 나눠 주고, 실탄을 250발씩 세어 주었다2. 「제3사단 직할 학도의용군 중대」4. 학생들은 그 이름을 몇 번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중대장은 투표로 뽑았다. 칠판에 이름 몇 개가 올라갔고, 분필 자국이 가장 많이 붙은 이름은 서울사범대학 2학년 김용섭이었다2. 소대는 둘로 나누었고 소대장 하나는 유명욱이 맡았다4.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은 손바닥으로 M1의 개머리판을 쓸어 보았다. 뒷날 신문은 그의 나이를 열일곱으로 적었다2. 총은 그의 팔 길이만 했다.
복도 끝에서 군악대원 하나가 나팔을 닦고 있었다. 학도병 하나가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아저씨들은 총 대신 그걸로 싸웁니까?”
“총은 너희가 쏘고, 우리는 너희를 깨운다. 기상나팔은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그럼 내일은 좀 늦게 불어 주십시오.”
복도에 웃음이 퍼졌다. 그날 밤 학생들은 총을 분해해서 닦고, 다시 맞춰 보고, 교실 마룻바닥에 누웠다. 이우근은 낮에 빨아 둔 내복을 꺼내 입었다. 젖은 기운이 덜 가신 천이 살갗에 붙었다.
*
8월 10일, 연일비행장(현 포항경주공항), 포항 남쪽.
제3사단에 붙은 미국 군사고문단 고문관 롤린스 에머리치 중령은 순양함 헬레나호에서 빌린 헬리콥터를 타고 활주로에 내렸다. 프로펠러 바람에 흙먼지가 일었다.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이 제5공군사령관 패트리지 소장, 군사고문단장 패럴 준장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5.
“3사단이 갇혔습니다.”
에머리치가 지도를 펼쳤다. 그날 북한군 제5사단 병사들이 국군 제3사단을 산으로 돌아 넘어 포항 북쪽 8킬로미터의 흥해(현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서 해안 도로를 끊었다5. 전날 새벽 다섯 시에는 영덕의 바닷가 마을 강구(현 영덕군 강구면)에서 오십천 다리가 무너졌다. 제22연대장이 미군 고문관의 승인 없이 다리를 폭파시키는 바람에, 강 북쪽에 남아 있던 국군 350명쯤이 바다로 흘러드는 깊은 하구를 헤엄쳐 건너야 했고 많은 수가 물에 빠져 죽었다5. 사단 지휘소는 포탄을 피해 바닷가 마을 장사동(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으로 내려앉았다. 이틀 전 밤에는 사단장이 박격포 사격 속에서 참모들과 함께 산비탈 엄폐호에 숨어 있다가 고문관들의 손전등에 발견되었고, 에머리치는 다음 날 아침 사단장 교체를 요구했다5.
워커는 지도 위 장사동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 자리에 버티게 하게. 5사단의 전차와 포가 해안 도로로 내려오면 이 비행장은 끝이야.”
에머리치는 다시 헬리콥터에 올라 장사동으로 돌아갔고, 새 사단장 김석원에게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제3사단은 장사동 북쪽 6킬로미터에서 남쪽 11킬로미터까지 바닷가를 따라 둥글게 진지를 쳤다5. 등 뒤가 바다였다.
*
8월 11일 새벽 세 시, 포항여중.
나팔이 울리기 전에 총성이 먼저 왔다. 학교에서 북쪽으로 2킬로미터, 포항에서 흥해로 넘어가는 고갯길 소티재 쪽이었다4. 이우근은 마룻바닥에서 튀어 일어나 총을 더듬어 쥐었다.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기상나팔보다 빠르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사단 사령부는 이미 학교를 떠나 있었다4. 남은 것은 학생 71명과 행정병들, 그리고 교실마다 쌓인 보급품과 서류 상자였다.
김용섭이 두 소대를 교문 앞 담장과 교사 앞 도랑에 엎드리게 했다. 네 시가 넘어 날이 희붐하게 밝아 올 무렵, 운동장 너머 길에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산길로 포항 뒤편까지 돌아 들어온 북한군 특수부대인 제766부대, 그리고 제5사단의 병사들이었다.
“아직 쏘지 마라.”
김용섭의 목소리가 엎드린 줄을 따라 건너갔다. 그림자들은 학교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는 듯 대열을 지어 걸어왔다. 쉰 미터, 서른 미터. 군화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이십 미터에서 김용섭이 외쳤다2.
“쏴!”
71자루의 M1이 한꺼번에 터졌다. 앞줄이 무너졌고, 뒷줄은 길가 도랑으로 흩어졌다. 정규군이 학생들에게 기습을 당했다. 이우근은 클립 하나를 다 비우고 나서야 손가락이 방아쇠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북한군은 물러났다가 다시 왔다. 두 번째에는 박격포가 먼저 떨어졌고, 세 번째에는 장갑차 한 대가 앞장섰다6. 철판에 맞은 소총탄이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같은 시각 학교 뒷산에서는 행정병 예순 명 남짓이 보급품과 기밀 서류 상자를 지고 비탈을 올라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7. 학생들이 버티는 동안만 그 길이 열려 있었다.
*
같은 날 아침, 포항 시내.
국군 쪽 보고에 따르면 북한군 300명쯤이 포항역(현 포항시 북구, 옛 포항역 자리)을 차지했다5. 그들은 몇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영일만에 떠 있던 미 해군 함정의 포탄이 역 구내로 떨어졌고, 연일비행장에서 뜬 F-51 전투기들이 지붕 높이로 내려와 기관총을 쏘았다. 그날 출격한 조종사 하나는 뒷날 이렇게 말했다. “바퀴를 접기도 전에 벌써 기총 사격을 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역을 버리고 둘레 언덕으로 흩어졌다5. 포항은 그날부터 낮에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밤에는 양쪽 정찰대가 번갈아 드나드는 도시가 되었다.
피란민들은 남쪽 형산강으로 몰렸다. 보따리를 인 아낙과 아이 손을 잡은 노인들이 강둑을 메웠다. 그 행렬의 맨 뒤, 북쪽 끝에 포항여중이 있었다.
*
8월 11일 한낮, 포항여중.
정오를 넘기자 해가 운동장을 달구었다. 이우근은 도랑에 엎드린 채 수첩을 꺼냈다. 공격과 공격 사이, 총성이 잠깐 멎은 틈이었다. 연필 끝이 떨렸다. 그는 어머니에게 쓰기 시작했다8.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몇 줄 아래에는 이렇게 썼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옆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탄약이 떨어져 간다는 말이었다. 이우근은 수첩을 접어 군복 윗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오후 한 시쯤 탄약과 수류탄이 바닥났다. 학생 몇이 탄약 창고로 달려가 개머리판으로 자물쇠를 부쉈다2. 안에서 나온 실탄은 많지 않았다. 북한군이 던진 수류탄이 도랑으로 굴러 들어오면, 터지기 전에 주워 도로 던지는 학생도 있었다2.
“사령부는? 지원은 언제 온답니까?”
무전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용섭은 무전기를 등에 메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높은 데서라면 사령부에 닿을 것 같았다. 사령부는 이미 형산강 남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뒷산 비탈에서 총탄 한 발이 김용섭의 목을 뚫었다4. 유명욱도 팔에 총을 맞았다4. 학생들은 누구의 명령을 들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각자 제 앞의 적을 쏘았다.
네 번째 공격이 왔을 때 총검을 꽂은 북한군이 담장을 넘어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학생들도 총검을 꽂았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총을 쥔 사람들이 서로 몸을 부딪쳤다. 탄알이 없는 총은 몽둥이가 되었다6.
새벽 네 시에 시작된 싸움은 오후 세 시를 넘겨서야 멎었다. 열한 시간이었다7. 71명 가운데 48명이 전사했다9. 13명이 다쳤고, 10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대부분 빠져나와 돌아왔다9. 그 열한 시간 동안 사단의 행정병과 서류가 빠져나갔고, 형산강 다리를 건넌 피란민의 행렬이 강 남쪽으로 길게 이어졌다2.
이우근의 수첩은 그의 윗주머니에서 나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나 있었다8.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편지는 부쳐지지 않았다8.
*
8월 13일, 연일비행장.
정오 무렵 활주로 끝에 명령이 내려왔다. 비행기를 일본으로 빼라. 북한군이 남쪽과 서남쪽 언덕에서 멀찍이 쏘는 총탄은 활주로에 아무 피해도 내지 못했다. 그래도 극동공군은 박격포와 대포가 곧 올라올 것을 두려워했다. 활주로에는 포탄 구멍 하나 없었다. F-51 마흔다섯 대가 그 멀쩡한 활주로를 차고 올라 규슈의 쓰이키 기지로 날아갔다5.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그 소식을 오후 네 시에 미국 통신사 기사로 처음 들었다. 제8군에 전화를 걸어 보니 활주로에 박격포탄이 떨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맥아더와 참모장 알몬드가 「몹시 언짢아했다」고 적었다5. 비행장에는 미 보병과 전차가 그대로 남았고, 비행장은 그 뒤로도 북한군의 실제 포격을 받지 않았다. 남은 것은 휘발유 드럼통이었다. 고장 난 전투기가 이따금 내려앉아 연료를 넣고 다시 떴다.
*
8월 13일~17일, 장사동과 독석동(현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해안.
북한군 제5사단은 바다에 등을 댄 제3사단을 지워 버리려 했다. 진지는 날마다 좁아졌고, 사단 지휘소는 장사동에서 남쪽으로 6킬로미터 내려가 독석동의 물가에 닿았다. 미 고문관들이 상륙함이 모래톱에 댈 수 있다고 본 곳이었다. 바다 쪽에서 헬레나호와 구축함 세 척이 진지 둘레의 산을 포탄으로 덮었다5.
13일, 부상병 313명을 실은 보급 상륙함이 독석동 앞에서 바위에 걸려 배 밑창이 찢어졌다. 높은 파도 속에서 다른 상륙함으로 널빤지 다리를 걸쳤다. 들것을 든 병사들이 흔들리는 널빤지 위를 한 발씩 건넜다. 가장 위중한 86명은 수륙양용 트럭에 실려 500야드 앞바다의 한국 병원선으로 갔다5.
15일, 제8군이 명령을 내렸다. 제3사단은 바다로 빠져 영일만 남쪽 곶의 구룡포(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에 내린다5.
16일 밤, 독석동 모래밭에 상륙함들이 뱃머리를 대고 문을 열었다. 병사들은 소총과 탄약 상자를 이고 줄지어 배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관 1,200명이 그 뒤를 따랐고, 짐을 나르던 노무자들과 피란민들이 또 그 뒤를 따랐다. 함포가 해안 둘레 능선에 불의 띠를 쳤다.
그때 북한군 박격포탄이 모래밭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륙함 한 척이 문을 닫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물가에 남은 병사들이 보았다. 배가 그들을 두고 떠나고 있었다.
병사 스무 명 남짓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군복을 입은 채 파도를 헤치고 배 옆구리에 매달렸다. 갑판으로 기어오른 몇이 권총을 뽑아 들었다. 한 사람이 선장을 향해 외쳤다.
“배 다시 대!”
선장은 총구를 보았고, 모래밭에 남은 사람들을 보았다. 배가 다시 뱃머리를 돌렸다4.
17일 아침 일곱 시, 마지막 상륙함이 모래밭을 떠났다5. 사단 병력 9,000여 명과 경찰관 1,200명, 노무자 1,000명이 무기와 탄약을 거의 다 챙겨 배에 올랐다5. 해가 뜬 뒤에는 미 공군기가 빈 해안 둘레에 불을 뿌렸다. 열 시 반, 상륙함들이 구룡포에 닿았다10. 사단은 그날로 짐을 풀었고, 다음 날 포항 남쪽 전선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
8월 17일 밤, 포항 서북쪽 고을 기계(현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북쪽 산길, 북한군 제12사단.
밤 여덟 시, 사단 명령이 내려왔다. 모든 부대는 기계를 거쳐 북쪽 도평동(현 경북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으로 물러난다5.
제12사단은 한때 중국 군대에서 싸우던 조선인 노병들로 짜인 사단이었다. 안동에서 낙동강 상류를 건너 길 없는 산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사람과 포를 잃었다. 포병연대 한 대대는 포탄을 받지 못해 포를 단양(현 충북 단양군)으로 돌려보냈다5. 7월 말부터 병사들은 일제 99식 소총을 반납하고 국군에게서 빼앗은 미제 M1과 짧은 소총 카빈을 들었다5. 탄은 있다고 했지만 앞까지 오지 않았다.
12일 이후로는 밥도 오지 않았다. 뒷날 붙잡힌 장교 하나는 그 닷새 동안 밤마다 마을에 내려가 먹을 것을 뒤져 먹었다고 말했다. 병사들은 몸이 말라 더는 싸울 수 없었다고 했다. 제1연대 제2대대의 하사관 하나는 630명이던 대대에서 18일에 스무 명이 살아 있었다고 말했다5. 제2연대의 대위는 17일에 250명이 넘는 대대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5.
대열은 낮에 미군 전투기를 피해 숲에 엎드려 있다가 어두워지자 걸었다. 해안 쪽에서는 함포 소리가 밤새 이어졌다. 그 무렵 평양 방송에서 김일성(38)은 이달 안에 미군과 국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명령했다5. 그 명령이 이 산길까지 닿았는지는 기록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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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오후, 기계.
국군 수도사단 제17연대가 이틀 전 기계 남쪽 고지를 되찾았고, 제1연대는 안강(현 경주시 안강읍) 서북쪽에서 밀고 올라갔다. 제18연대와 기갑연대는 서쪽 구산동(현 경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 기계를 남북에서 죄었다11. 뒷길이 막힐 것을 두려워한 북한군은 비학산 쪽으로 빠졌다. 18일 오후, 수도사단이 기계에 들어갔다12.
같은 날 새벽, 민기식이 이끄는 민부대가 포항 시내로 들어가 북한군 180명을 포로로 잡았다13. 19일에는 구룡포에서 짐을 푼 제3사단이 민부대와 자리를 바꾸어 포항 북쪽으로 올라갔다10.
수도사단은 기계에서 북한군 1,245명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전쟁이 시작된 뒤 국군이 거둔 가장 큰 전과였다13. 안강 용운사에는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이 골짜기에서 죽은 사람 스무 명 남짓의 이름을 새긴 위령비가 그해 음력 7월 7일, 양력 8월 20일에 섰다12.
비학산 762미터 꼭대기에서 제12사단은 몸을 다시 추슬렀다. 산길로 함께 내려왔던 제766부대는 이름을 잃고 사단의 세 연대에 나뉘어 들어갔다11. 새로 받은 보충병 2,000명과 766부대원 1,500명쯤을 더해 사단은 5,000명이 되었다5. 사기는 낮았다. 그래도 달아나는 병사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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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포항.
에머리치는 김석원과 마주 서 있었다. 전날 그는 반격하기 좋은 때라고 보고 김석원에게 반격을 권했다. 김석원은 거절했다5. 오늘 김석원은 사단 지휘소를 포항 밖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고문관단은 포항에 남겠습니다.”
에머리치가 말했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 말을 들은 김석원이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당분간 남기로 했다고 적었다5. 같은 날 워커는 국군 장병 모두에게 성명을 보냈다. “적은 지금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대한민국 육군 장병들에게 부탁한다. 한 몸처럼 일어나 눈앞의 적을 그 자리에서 멈춰 세우라.”
김석원이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말은 미군 고문관 쪽 기록에만 있다. 국군 쪽 기록에서 김석원은 9월에 미 군사고문단과 의견이 맞서다 한직으로 밀려난 사단장이다3.
*
9월 3일 새벽, 안강 남쪽 고지.
한 시 반, 북한군 제12사단이 기계 골짜기 남쪽 산줄기로 쏟아져 내려왔다. 334고지와 438고지에서 제18연대가 밀렸고, 445고지에서 제17연대가 밀렸다. 날이 밝을 무렵 북한군은 안강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대구–포항 도로에 닿아 있었다. 북한군은 하룻밤에 8킬로미터를 뚫고 내려왔다. 수도사단은 거의 무너졌다5.
다음 날 새벽 두 시 이십 분, 박격포탄이 쏟아진 뒤 북한군이 안강 읍내로 들어왔다. 한 시간 뒤 수도사단 지휘소가 읍내를 떠났다. 네 시에는 미군 전차들이 사격을 멈췄다. 국군과 북한군이 어둠 속에서 뒤섞여 버렸다5. 미 제21연대 제2대대장 지네스 페레스 중령은 그 밤을 이렇게 말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가릴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았을 때 미군 G중대는 안강 읍내에 혼자 남아 있었다. 국군은 보이지 않았다5.
그날 저녁 경주에서 국군 제1군단장이 도시를 비우자고 했다. 북한군이 북쪽 5킬로미터 언덕에 있고, 오늘 밤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제8군 부사령관 존 콜터 소장은 고개를 저었다.
“지휘소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경주에 남는다.”
콜터는 지휘소 건물 둘레에 전차 넉 대를 세웠다. 길에는 고문관들을 내보내 흩어진 국군 병사들을 모아 읍내 가장자리에 다시 세웠다. 고문관 소령 하나는 권총을 뽑아 남쪽으로 달아나는 병사들을 막아 세웠다. 그 밤 북한군은 경주를 치지 않았다. 동쪽으로 틀어 길을 건너 연일비행장 쪽으로 갔다5.
5일 밤에서 6일 새벽 사이, 포항의 제3사단 지휘소 근처에 포탄 열 발이 떨어졌다. 지휘소를 옮겼는데도 포탄은 새 자리를 따라왔다. 북한군 관측병이 어딘가에서 보고 있었다. 6일, 포항은 다시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다. 국군은 제1군단장과 제3사단장을 함께 갈았다5.
*
9월 17일~18일, 형산강.
16일, 전함 미주리호가 포항 앞바다에 나타났다. 16인치 포가 형산강 북쪽 제방의 북한군 진지에 1톤 가까운 포탄을 떨어뜨렸다. 제방이 흔들렸지만 북한군 기관총은 살아 있었다5.
제3사단 제22연대의 분대장 연제근 이등중사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14. 다리는 북한군 기관총이 겨누고 있었다. 다리로 건너려던 국군이 쓰러졌다. 미군 기록에 남은 부상자만 144명이었다5.
“물로 간다.”
연제근의 분대가 강으로 들어갔다. 물이 허리까지, 가슴까지 차올랐다. 제방 위 기관총이 물 위를 긁었다. 분대원 절반이 강물에 쓰러졌다. 연제근도 어깨에 총탄을 맞았다14. 그는 남은 분대원과 함께 맞은편 제방에 기어올라 기관총 진지에 수류탄을 던졌다. 기관총이 멎었고, 뒤에 오던 국군이 그 틈으로 강을 건넜다. 연제근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14.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같은 강에서 서른한 명의 국군 병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다리로 뛰어들었다고 적었다5. 전투기들이 실탄 없이 제방 위로 내려와 쏘는 시늉을 했다. 서른한 명 가운데 열아홉이 다리 위에서 쓰러졌다5. 강 북쪽에 발을 디딘 몇 사람 뒤로 다른 병사들이 따라 건넜다. 그들은 제방 진지에서 몸이 진지에 묶인 채 죽어 있는 북한군 기관총 사수들을 보았다5.
*
9월 22일, 기계.
북한군 제12사단은 산으로 물러나며 고갯마루마다 버텼고, 22일에야 기계를 수도사단에 내주었다5. 한때 중국에서 싸운 노병들로 짜였던 사단은 2,000명쯤 남아 안동 쪽으로 걸어갔다. 국군 사단들도 지쳐 있었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동쪽 끝의 두 군대를 기진맥진한 씨름꾼에 견주었다5. 어느 쪽도 상대를 더 밀어붙일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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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8월 11일, 포항 탑산.
포항여중 싸움 일곱 해 뒤, 포항 용흥동(현 포항시 북구 용흥동) 언덕에 전몰학도 충혼탑이 섰다15. 그날 죽은 48명 가운데 이름을 찾은 사람은 열이었고, 그들의 유해는 1964년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뒤에 함께 묻혔다15. 2018년까지 나머지 서른여덟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2.
충혼탑 광장에는 검은빛 돌인 오석 하나가 서 있다16. 돌에 새긴 글씨는 어머니를 부르며 시작해 이렇게 끝난다.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사료 출처
1. 세계일보, 「[6.25전쟁 발발 60돌] ⑥ 잊혀진 학도병」(2010.6.22), segye.com/newsView/20100622003406 — 대구 격문과 87명, 의성에서 포항으로, 독립중대 편성, 네 차례 공격. 2. 김민석,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포항여중 전투 학도병들,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2018.6.8), 다음뉴스 v.daum.net/v/oUqLtlhvyZ — 수도사단 학도병 87명과 귀가 명령, 71명이 김석원을 따라 포항으로, 학교의 연락장교와 군악대 20여 명, M1과 실탄 250발, 투표로 뽑은 중대장, 2개 소대, 20미터 사격, 오후 한 시 탄약 소진과 창고 문 부수기, 수류탄 되던지기, 무전기를 메고 뒷산에 오른 중대장, 총검과 육박전, 이우근 「17세」 동성중 3학년, 피란민 20만여 명, 전사자 중 신원 확인 10명, 생존자 손주형(본명 손용길, 당시 경기중 4학년). 3. 이은희, 「김석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6 집필·2023.7.6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09415 — 1893.9.29 출생, 7월 수도사단장 복귀, 8월 제3사단장, 9월 미 군사고문단과 대립 뒤 전시특명검열관. 4. 조향래, 「낙동강 전선—포항 공방전」, 매일신문(2000.7.21), imaeil.com/page/view/2000072114090962039 — 8월 9일 저녁 71명 도착, M1 지급과 「제3사단 직할 학도의용군 중대」, 11일 새벽 세 시 소티재 총성, 사령부 철수, 소대장 유명욱(팔)·중대장 김용섭(서울사대 2년, 목) 부상, 최기영 회장이 전한 전사 48·부상 13·포로 10, 독석리 철수 때 배를 다시 대게 한 20여 명과 권총, 철수 인원(사단 약 9천·경찰 약 1,200·민간인 약 1,000), LST 4척. 5.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8장 「Battle for the Eastern Corridor to Pusan」 전체, 제22장 「Perimeter Battle」 중 「Action in the East — Task Force Jackson」, 제27장 「Breaking the Cordon」의 동부 전선 부분,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강구 다리 폭파(8월 9일 05시, 북쪽 잔류 약 350명), 8월 7일 밤 사단장 수색과 교체 요구, 10일 흥해 차단, 에머리치가 헬레나호 헬리콥터로 연일비행장에 가 워커를 만난 일과 워커의 지시, 장사동 진지(북쪽 4마일~남쪽 7마일), 11일 포항역에 들어온 약 300명과 함포·공습, 조종사의 말(원문: I barely had my wheels up before I started my strafing runs), 13일 연일비행장 철수(활주로에 구멍 없음, F-51 45대 쓰이키로, 16시 UP 기사, 맥아더·알몬드 much upset), 13일 부상병 313명과 좌초한 상륙함, 위중자 86명과 500야드 앞 병원선, 15일 해상 철수 명령, 16일 밤~17일 07시 철수와 9,000여 명·경찰 1,200·노무자 1,000·부상자 125명, 10시 30분 구룡포, 17일 20시 제12사단 철수 명령(도평동), 비학산 재편성(보충 2,000·766부대 약 1,500, 합 약 5,000), 포로 진술(12일 이후 급식 없음, 630명 중 20명, 대대당 250명 이하), 12사단의 M1·카빈 전환과 99식 반납, 포병 대대의 단양 반송, 김일성 방송, 8월 28·29일 에머리치와 김석원, 워커 성명(원문 일부 의역), 9월 3일 01시 30분 공격과 334·438·445고지, 4일 02시 20분 안강 진입, 페레스의 말(원문: We couldn't tell friend from foe), G중대, 경주의 콜터(원문: 지휘소를 옮기지 않고 모두 남는다)와 전차 4대·권총 든 고문관 소령, 5~6일 포항 상실과 군단장·사단장 교체, 9월 16일 미주리호, 다리 공격 부상자 144명, 31명 결사대 중 19명, 묶인 기관총 사수, 9월 22일 기계, 2,000명, 기진맥진한 씨름꾼(원문: exhausted wrestlers). 6. 황영우, 경북일보(2021.6.30), 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8684 — 장갑차를 앞세운 재공격과 운동장 백병전. 7. 이화종, 리버티코리아포스트(2022.1.12), lkp.news/news/articleView.html?idxno=18581 — 새벽 네 시부터 약 11시간, 행정병 60여 명이 뒷산을 점령하고 보급품·기밀문서 후송. 8. 김별아, 「싸움터엔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2015.6.19), mediahub.seoul.go.kr/archives/880965 — 편지 본문 인용(「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전투에서 전사한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서 발견된 부치지 못한 편지」). 9. 이상원, 매일신문(2015.12.16), imaeil.com/page/view/2015121601385660949 — 48 전사·13 부상·10 포로(대부분 탈출). 10. 박동찬, 「포항지구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2023.2.7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60218 — 8월 10일 북한군 제12사단의 흥해 점령과 제3사단 퇴로 차단, 11일 학도의용군 71명이 약 11시간 저지, 15일 민부대 투입, 17일 독석동 해상 철수와 구룡포, 18일 민부대 포항 탈환, 19일 임무 교대, 31일까지 흥해 일대 공방. 참고문헌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낙동강선 방어작전』(2008) 등. 11. 양영조, 「안강지구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2023.5.4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34487 — 수도사단의 8월 9일~9월 14일 방어전, 제1연대 안강 이동, 제18연대·기갑연대의 구산동 남하와 기계 남북 포위, 18일 오후 기계 탈환, 비학산 재편성과 제766부대 해체, 8월 26일 밤 기계 재점령, 9월 2일 전차를 앞세운 주공, 곤계봉 쟁탈전, 운제산, 9월 12일 밤 곤계봉 탈환. 본문에는 곤계봉 쟁탈전을 따로 쓰지 않았다. 12. 김도훈, 「안강전투를 기억합시다」, 매일신문(2019.8.19), imaeil.com/page/view/2019081916205977935 — 8월 9일 기계 점령, 13일 제1연대 안강, 16일 제17연대, 18일 오후 탈환, 어래산, 용운사 위령비(단기 4283년 7월 7일 = 1950.8.20, 20여 명의 이름). 13. 매일신문, 「한국전쟁 정전 70년 낙동강 방어선 전투(상)」(2023.3, 전북일보 jjan.kr/article/20230313580184 게재) — 수도사단 전과 1,245명 사살(전쟁 발발 뒤 국군 최대 전과), 17일 오전 여섯 시쯤 제3사단 철수, 18일 새벽 민부대 진입과 포로 180명. 14. 이재범, 「연제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5 집필·2023.2.7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36897 — 제3사단 제22연대 분대장, 이등중사, 9월 17일 형산강 수중 도하, 분대원 절반 손실, 어깨 관통상, 기관총 진지 파괴, 과다 출혈로 전사, 1950.12.30 을지무공훈장. 15. 김도형, 「형산강만이 붉은 강물을 기억하리라」, 경북매일(2022.11.3), kbmaeil.com/article/202211020347224 — 새벽 네 시, 11시간 반, 전몰학도 충혼탑 1957.8.11 제막, 신원 확인 10명의 1964.4.13 국립현충원 안치, 포항 13개 마을 민간인 550여 명 희생(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16. 경기일보(2018.11.14), kyeonggi.com/article/201811141024834 — 「포항시 용흥동 전몰학도 충혼탑 광장에 이 편지가 검은 오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김석원 1893년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일성 1912년생. 이우근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괄호에 넣지 않았고, 중앙일보 2018 기사가 적은 「17세」를 「뒷날 신문은 열일곱으로 적었다」로만 옮겼다. 김용섭·유명욱·손용길(손주형)·연제근·민기식·에머리치·패트리지·패럴·페레스·콜터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Appleman은 제17연대장 김희준 대령을 「스물여덟 살」로 적었으나 본문에 넣지 않았다. [자료 충돌] 학도병 도착일 — 매일신문 2000은 8월 9일 저녁, 중앙일보 2018은 8월 10일 대기, 세계일보 2010은 10일 편성으로 적었다. 본문은 9일 저녁 도착으로 두었다. [자료 충돌] 개전 시각 — 매일신문 2000은 새벽 세 시 소티재 총성, 세계일보는 오전 세 시부터 11시간, 리버티코리아포스트·경북매일은 새벽 네 시, 중앙일보는 네 시 30분경 북한군 진입으로 적었다. 본문은 세 시 총성, 네 시 넘어 교전으로 나누었다. [자료 충돌] 학도병 손실 — 전사 48·부상 13·포로 10(매일신문 2000·2015, 경북일보), 전사 48·부상 또는 실종 23(경북매일·중앙일보), 전사 47·실종 4·포로 13(그 가운데 11명 탈출, 리버티코리아포스트), 전사 47·부상 6·실종 4(경북매일 2013 계열), 「71명 전멸」(일부 기사). 본문은 48·13·10을 따랐다. [자료 충돌] 포항여중을 친 부대 — 학도병 자료는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5사단, 백과사전 「포항지구 전투」는 흥해를 점령한 부대를 제12사단으로 적었고, Appleman은 흥해를 끊은 것을 제5사단, 포항 서쪽 도로를 끊은 것을 제766독립연대로 적었다. [자료 충돌] 독석동 철수 — Appleman은 상륙함 척수를 적지 않고 9,000여 명·경찰 1,200·노무자 1,000·부상자 125명, 마지막 배 07시, 구룡포 10시 30분으로 적었다. 매일신문 2000은 LST 4척과 「민간인 약 1,000명」, 전북일보 게재 기사는 「오전 여섯 시쯤」으로 적었다. 배를 다시 대게 한 20여 명 이야기는 매일신문 2000에만 있다. 지명은 국군 자료 「독석동·독석리」, Appleman 「Toksong-ni」. [자료 충돌] 형산강 도하 — 백과사전 「연제근」은 9월 17일, Appleman의 31명 결사대는 미주리호 첫 포격(16일) 「이틀 뒤」로 18일께다. 연제근 분대와 31명 결사대가 같은 무리인지는 확인하지 못해 따로 적었다. [자료 충돌] 편지 — 서울시 게재본은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매일신문 2000은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로 적어 문구가 다르다. 서울시 게재본도 편지 전문이 아니라 줄인 본으로 보인다. 본문은 서울시 게재본을 따랐다. 편지를 쓴 날을 8월 10일로 적은 자료도 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편지가 처음 발견된 곳을 「수첩」「주머니」「옷 속 수첩」으로 자료마다 달리 적는다. [자료 충돌] 김석원과 에머리치 — 8월 28~29일 장면과 9월 5~6일 사단장이 「아팠다(got sick)」는 서술은 미군 고문관 쪽 기록(Appleman)에만 있다. 국군 쪽 백과사전은 「미 군사고문단과 의견이 대립」했다고만 적는다. [재구성] 모든 대화(군악대원과 학도병, 「기상나팔보다 빠르네」, 김용섭의 사격 명령, 「사령부는?」, 워커와 에머리치의 문장, 「배 다시 대!」, 「고문관단은 포항에 남겠습니다」, 「물로 간다」), 학도병들이 교실 문 종이를 읽고 칠판으로 투표하는 모습, 내복을 입는 몸짓(편지의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에서 가져옴), 이우근이 정오 무렵 도랑에서 편지를 쓰고 수첩을 윗주머니에 넣는 장면(기록은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일 때 썼다」「수첩·주머니에서 발견」까지다), 학생들이 엎드린 자리, 피란민 행렬의 모습, 상륙함 선장과 권총을 든 병사들의 몸짓, 제12사단 병사들의 행군 장면, 연제근이 강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워커의 8월 28일 성명과 페레스·콜터의 말은 Appleman의 영어 원문을 의역했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