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14,698자)
마산·진동리 전투 — 부산으로 가는 서쪽 길
1950 · 네오
1950년 7월 말, 하동(현 경남 하동군)에서 진주로 가는 길.
북한군 제6사단의 병사 하나는 사흘째 주먹밥 반 덩이로 걸었다. 7월 말부터 쌀은 절반으로 줄었고, 하루를 통째로 거르는 날도 있었다1. 사단은 군산에서 전주로, 광주에서 목포와 여수로, 다시 순천에서 하동으로 남해안을 크게 돌아왔다. 전라도를 지나는 동안 앞을 막은 것은 경찰과 흩어진 국군 몇 백 명뿐이었고, 하동에서야 미군을 만났다1. 대열 앞쪽에는 중국 땅에서 국민당 군대를 쫓아 수천 리를 걸어 본 조선인 노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배고픔에도 행군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정치 일꾼이 대열 앞에서 사단장 방호산 소장의 말을 읽었다1.
“동무들, 적은 사기를 잃었다. 마산과 진주를 해방하는 것은 적의 숨통을 끊는 마지막 싸움이다.”
그 병사는 지도를 본 적이 없었지만 「숨통」이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마산(현 경남 창원시)을 넘으면 부산까지 사십 킬로미터 남짓이었다. 그는 허리띠를 한 칸 더 조였다.
*
8월 3일 아침, 진동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미 제27연대 본부.
진동리 학교는 마을 동북쪽 가파른 벼랑 바로 아래에 있었다. 교실에는 제27연대 본부가 들었고, 운동장에는 155밀리 곡사포가 포신을 하늘로 세우고 있었다. 전날 자정에 체크 중령의 제1대대가 서쪽 길에서 녹초가 되어 돌아와 학교 둘레에 쓰러지듯 잠들었다2.
연대장 존 마이클리스(38) 대령의 참모들이 아침을 막 끝냈을 때 열린 창문으로 총알이 날아들었다3. 탄알은 벼랑 꼭대기에서 왔다. 보초 몇은 졸고 있었고, 다른 보초 몇은 다가오는 북한군을 이웃 진지의 국군으로 여겼다2. 군화도 못 신은 미군 몇이 맨발로 비탈을 뛰어 내려왔다. 마이클리스는 참모들과 함께 지프와 트럭 밑으로 기어든 병사들의 발목을 잡아 끌어냈다.
“총 들어! 저 위다, 저 벼랑!”
A중대장 로건 웨스턴 대위가 벼랑으로 올라갔다. 그는 꼭대기의 기관총 두 정을 M1 소총으로 하나씩 잠재웠다. 허벅지에 총알이 박히자 응급처치만 받고 다시 올라갔고, 그 뒤로 두 번을 더 맞았다. 그는 끝내 후송을 거부했다2.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제8포병대대장 오거스터스 테리 중령의 관측병이 북쪽 함안(현 경남 함안군 함안면) 길을 가리켰다. 천 야드 밖에서 트럭 행렬이 멈추고 북한군 한 대대가 짐칸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포탄이 공중에서 터지도록 기폭 장치인 신관을 맞춘 사격이 그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한 시, 북한군은 진동리에서 물러났다2. 미군 순찰대는 북한군 시신 400구를 셌다2. 미군은 제1대대에서만 열세 명이 전사하고 마흔 명 가까이 다쳤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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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무렵, 진동리 서쪽 길목.
국군 해병대 김성은(26) 부대는 마산으로 오는 적을 진동리에서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와 있었다4. 부대는 미 제27연대에 배속되어 있었다5. 제7중대장 안창관(26)은 길가 비탈에 중대를 엎드리게 했다6. 길 저쪽에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정찰대대가 진동리 쪽으로 내려왔다.
안창관은 만주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6. 그는 전차가 비탈 바로 아래를 지날 때까지 손을 들어 중대원들을 붙잡아 두었다. 손이 내려가자 비탈 전체가 불을 뿜었다. 해병들은 북한군 9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전차 두 대와 무기 여러 점을 빼앗았다6.
중대원 하나가 빼앗은 전차의 포탑을 두드리며 물었다.
“중대장님, 이거 해병대 겁니까, 미군 겁니까?”
“우리가 뺏었으니 우리 거지.”
“그럼 기름은 누가 넣습니까?”
비탈에 웃음이 번졌다. 얼마 뒤 정부는 그 부대원 모두에게 한 계급씩 올려 주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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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밤, 진동리, 제27연대 전화 교환대.
북한군은 마을 사이를 잇는 민간 전화선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미군 통신장교들이 연대 교환대에서 그 선을 땄고, 그날 밤 작전장교 하나와 통역 하나가 수화기에 귀를 댔다. 잡음 너머로 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통역은 받아 적던 연필을 멈추고 작전장교를 돌아보았다.
“사단장입니다. 제14연대장을 혼내고 있습니다. 사람을 왜 그렇게 많이 잃었느냐고요.”
“뭐라고 대답하나?”
“대답을 못 하게 합니다.”
수화기 저편의 북한군 제6사단장은 자기 목소리를 미군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2. 그날 아침 제14연대의 한 대대는 진동리에 길막이를 치러 왔고, 두 대대는 마산 쪽으로 더 깊이 돌아 들어갔다. 진동리에 보병이 없다고 믿었는데, 학교에는 밤새 돌아온 체크 대대가 자고 있었다. 일주일 사이에 북한군 제6사단은 절반 가까이로 줄어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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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오전, 야반산.
미 육군이 「폭스 고지」라고 부른 야반산은 해안 도로에서 1.6킬로미터쯤 북쪽, 서북산에서 진동리 쪽으로 흘러내린 긴 능선 끝의 342고지였다7. 그날 아침 미 제8군은 전쟁이 터진 뒤 처음으로 반격에 나섰다7. 미 제25사단장 윌리엄 킨(53)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부대, 병력은 2만 명쯤이었다8. 해병 제5연대는 해안길로, 보병 연대에 포병과 전차를 붙인 제5연대전투단은 가운데 길로, 제35연대는 북쪽 큰길로 진주를 향해 가기로 되어 있었다7.
해병 제5연대 제2대대가 열한 시에 야반산 비탈을 올랐다. 비탈은 60도에 가까웠고 그해 남쪽 지방에는 장맛비 대신 가뭄이 들어 있었다. 온도계는 화씨 112도, 섭씨로 44도쯤을 가리켰다7. 북한군도 같은 시각 같은 비탈을 내려오고 있었다. 미 육군 전사는 그날을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적었다7. 대대는 더위에 쓰러진 사람만 서른 명쯤을 냈다. 적의 총에 맞은 사람의 여섯 배였다7.
그 사이 제5연대전투단 제1대대는 서쪽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했는데 왼쪽으로 꺾었다. 정오 무렵 대대는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언덕에 올라 있었다. 해병대가 가야 할 길이었다. 갈림길을 내려다보는 고지는 빈 채로 남았다7.
같은 아침 진동리 뒤쪽에서도 일이 터졌다. 북한군이 밤사이 진동리를 돌아 마을 바로 동쪽의 255고지에 올라앉은 것이었다. 마산으로 가는 보급로가 그 고지 발밑을 지났다. 앞으로 나가려던 부대가 뒤를 막혔다. 제159포병대대의 두 포대는 이틀 동안 그 고지에 포탄 1,600발을 퍼부었다7. 해병 제5연대 제3대대와 제24연대의 병사들이 사흘째 정오가 지나서야 꼭대기에서 만났다. 해병 H중대는 그 이틀 동안 열여섯 명이 전사하고 서른여섯 명이 다쳤다7.
다음 날 오후, 킨 소장이 제5연대전투단 제2대대 진지에 올라왔다. 일주일 내내 야반산에서 싸운 대대에는 쓸 만한 중대가 둘 남아 있었다. 킨은 대대장 존 스록모턴(37) 중령에게 갈림길 서북쪽 고지를 가리켰다9.
“저 고지, 오늘 밤 안에 가져오게.”
스록모턴은 전차 석 대와 박격포를 앞세워 밤에 올라갔다. 고지는 그날 밤 미군 손에 들어왔다7. 병사들은 꼭대기에 닿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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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정오 무렵, 경남 고성(현 고성군 고성읍) 하늘.
해병 항공대의 콜세어 넉 대는 바다 위 작은 항공모함인 호위항공모함 바동 스트레이트에서 떠올라 정찰을 나왔다. 고성 서쪽 갈림길 근처에 미 해병 포병의 포탄이 떨어졌고, 나뭇가지로 덮어 둔 북한군 차량들이 들켰다고 여기고 한꺼번에 길로 쏟아져 나왔다. 북한군 제105기갑사단 제83모터사이클연대의 트럭과 지프와 오토바이, 200대쯤이었다7.
선두기의 조종사가 기수를 숙였다. 기관총탄이 행렬을 따라 길게 그어졌다. 트럭끼리 들이받았고 오토바이는 도랑으로 처박혔다. 북한군은 길가에 엎드려 소총과 기관총으로 맞쏘았고, 콜세어 두 대가 맞아 한 대는 불시착하고 한 대는 추락했다7. 다음 편대가 와서 일을 마쳤다. 오후에 해병 보병이 그 길에 닿았을 때 트럭 31대, 지프 24대, 오토바이 45대가 부서지거나 버려져 있었다7. 도쿄의 대변인은 북한군이 「패주」하고 있다고 말했고, 기자들은 「추격전」이라고 썼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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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새벽, 봉암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암리).
봉암리는 진흙벽에 초가를 얹은 집 스무 채쯤이 갈림길에 모인 마을이었다. 북쪽 서북산 광산 마을 덕곡(현 경남)에서 흙길 하나가 내려와 마을 서쪽 콘크리트 다리에서 큰길과 만났다. 그 다리 밑과 개울가에 제555포병대대의 105밀리 곡사포가, 그 서쪽에 제90포병대대의 155밀리 곡사포가 있었다. 병사들이 「트리플 니켈」이라고 부르던 제555대대였다7.
제5연대전투단장 고드윈 오드웨이 대령은 전날 밤 아홉 시에 타자로 친 사단 무전 명령을 받았다. 제2대대와 포대 하나만 고개를 넘기고 나머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제자리에 두라는 명령이었다7. 오드웨이는 그 명령이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 보았다. 사단에 항의하려고 무전기를 붙들었지만 사단은 응답하지 않았다7. 그는 사단장만 아는 「큰 그림」이 있으리라고 스스로 달래고 명령을 따랐다.
새벽 한 시가 지나 제1대대장 대리 롤롭스 중령이 오드웨이를 불렀다. 북쪽 능선의 C중대가 연락이 끊겼고, 그쪽에서 총소리와 조명탄이 보인다고 했다7.
“연대장님, 지금 빼야 합니다. 날이 밝으면 늦습니다.”
“사단은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네.”
“사단은 저 능선을 못 봅니다.”
오드웨이는 다시 사단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약속한 제24연대 대대도 오지 않았다. 네 시, 오드웨이는 명령을 어기기로 했다7.
“치중대부터 출발. 다음 포병, 1대대가 맨 뒤.”
이십 분이면 고개를 넘어야 할 행렬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무중대 구급차 한 대가 대열에 끼어들다 도랑에 바퀴가 빠졌고, 그 뒤의 모든 차가 멈췄다. 한 시간 넘게 오드웨이 눈앞의 어떤 차도 한 번에 3미터 이상 가지 못했다7.
먼동이 트자 능선에서 총탄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롤롭스는 길 한가운데 서서 차들을 손짓으로 밀어 보내다가 골짜기 아래에서 꼬리를 끌며 날아가는 불줄기를 보았다. 다리 위의 트럭 한 대가 버섯 모양 불길을 올리며 터졌다. 덕곡 흙길에서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가 마을과 포진지에 대고 쏘고 있었다. 그 길목을 지키던 전차 두 대와 A중대 소대는 새벽에 대열에 섞여 빠져나와 있었다.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롤롭스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7.
제90대대의 155밀리 곡사포는 포신을 그만큼 낮출 수 없었다. 제555대대의 포는 탁 트인 개울가에서 적이 곧장 겨누어 쏘는 직사를 맞았다.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 보병이 세 방향에서 몰려왔다. 제90대대 본부포대의 윌리엄 바움가트너 일병은 트럭에 단 기관총을 쏘다가 총에 직격탄이 떨어져 정신을 잃고 굴러떨어졌다. 깨어나자 그는 소총을 집어 들고 다시 쏘았다7. 제555대대의 곡사포 석 문은 아홉 시 무렵까지 불을 뿜다가 넘어갔다7.
군종 프랜시스 카피카 신부가 부상병을 가득 태운 지프를 몰고 나왔다. 그는 롤롭스에게 찾을 수 있는 부상병은 다 실었다고 말했다. 고갯마루에서 롤롭스는 C중대를 만났다. 180명 가운데 23명이었다7. 동쪽에서 달려온 사단 수색중대 전차의 포탑 위에서 로버트 테드퍼드 상사가 몸을 다 드러낸 채 기관총을 쏘다가 쓰러졌다7.
제555대대는 곡사포 여덟 문을 모두 잃었다. 제90대대 A포대는 여섯 문을 모두 잃었다. 이튿날 제555대대 병사 가운데 근무에 나온 사람은 다섯에 하나였다7. 병사들은 그 골짜기를 「피의 골짜기」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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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16일, 진동리.
일주일 뒤 킨 특수임무부대는 거의 떠났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해병대는 낙동강 돌출부로 불려 갔다. 제5연대전투단은 13일 밤 진동리 동쪽 마른 개울 바닥에 뒤섞여 내려섰고, 날이 밝을 때까지 아무도 누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8월 16일 오후 세 시 오십 분, 미 제8군은 무전 한 통으로 킨 특수임무부대를 해체했다7. 진주 고개는 끝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일주일 동안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북쪽 전선에서 분대 하나 빼 오지 않았다7. 다만 마산을 치러 오던 북한군 제6사단의 공세도 그 일주일에 꺾였다.
다섯 주 뒤 미 제25사단이 봉암리 바로 옆 마을 대정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를 되찾았을 때, 집 한 채 안에서 제555대대 병사 55명의 시신이 나왔다. 제90대대 병사 20명의 시신도 나왔다. 모두 머리에 총을 맞았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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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진주와 마산 사이 산중, 북한군 제6사단.
8월 중순 진주에 새 병사 2,000명이 도착했다7. 서울 일대에서 끌려온 남쪽 청년들이었다. 사단은 그들에게 수류탄을 나눠 주고 총은 싸움터에서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에게서 주워 쓰라고 했다10. 그 가운데 한 사람은 13일에 진주에 닿아 19일에 처음 싸움에 나갔다. 이틀 뒤 그는 일기장에 적었다10.
“퍼붓는 포격과 공습에 몹시 괴롭다. 먹을 것도 물도 없다. 나는 지금 마산 가까운 언덕에 있다.”
8월 24일, 방호산은 사단에 새 명령을 내렸다. 마산과 부산을 며칠 안에 해방하라는 명령이었다11. 그는 진주 작전에서 얻었다는 교훈을 덧붙였다. 해가 지자마자 공격을 시작하라. 자정이 지나면 적에게 100미터에서 150미터까지 다가붙어라. 그러면 날이 밝아도 적의 비행기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가리지 못한다11. 일기를 쓴 청년이 그 명령을 들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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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 서북산.
서북산은 해발 739미터로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12. 꼭대기에 서면 함안 들판과 마산과 멀리 진주까지 보였다12. 제5연대전투단 제1대대 A중대는 서북산 서남쪽 고지를 빼앗아 이미 꼭대기에 올라선 B중대와 줄을 이으려 했다.
중대장 로버트 리 티몬스(31) 대위가 앞장섰다13. 그는 공격 중에 크게 다쳤지만 뒤로 빠지지 않았다. 일어설 힘이 없어지자 그는 들것에 누운 채로 박격포 사수들에게 거리와 방향을 불러 주었다13. 들것 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중대원 하나가 그의 입가에 귀를 대고 숫자를 받아 사수들에게 다시 외쳤다.
산 아래로 옮겨지던 들것에 북한군의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티몬스는 그 들것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이듬해에야 수습되었다14. 경남 지역 신문은 그때 일곱 살이던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어, 뒷날 주한 미 제8군 사령관으로 이 땅에 왔다고 적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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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전투산.
필봉에서 북서쪽으로 1.6킬로미터, 서북산 산줄기가 다시 솟은 665고지를 미군은 「전투산」이라고 불렀다10. 불붙는 기름 폭탄 네이팜에 나무가 다 타 버린 꼭대기를 보고 「대머리 영감」이라고도 했다12. 꼭대기에 서면 서쪽으로는 북한군이 숨은 오곡(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곡재 부근)·덕곡의 광산 갱도가, 동쪽으로는 함안 골짜기의 미군 지휘소와 포진지가 내려다보였다. 북한군은 서쪽에서 산 중턱까지 난 길로 올라왔고, 미군은 동쪽에서 밧줄을 잡고 서너 시간을 기어올랐다. 다친 병사 하나를 들것으로 내리는 데 여섯 명이 붙었다10.
산을 지킨 것은 제24보병연대였다. 흑인 병사들로 꾸리고 장교는 대부분 백인인 연대였다. 북한군은 밤마다 올라왔고 연대는 낮에 되찾았다. 8월 29일 밤 C중대 왼쪽 진지의 병사들이 「뚫렸다!」고 외치며 산을 뛰어 내려갔다. 중대장 로런스 코코런 대위 곁에는 부상병까지 열일곱 명이 남았다10. 제1대대 정보 부사관의 셈으로 꼭대기의 주인은 열아홉 번 바뀌었다10. 제3대대장 존 코얼리(36) 중령은 상부에 써 보냈다15.
“중대가 적과 맞붙으면 소대 크기로 줄어든다. 장교를 두 배로 달라. 한 사람은 앞에서 이끌고, 한 사람은 뒤에서 몰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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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함안.
8월 31일 자정을 조금 앞두고 북한군 제6사단이 함안 서쪽 고개로 쏟아져 들어왔다. 방호산의 명령대로 해가 진 뒤였다11. 제24연대 제2대대 E중대장 찰스 엘리스 중위는 왼쪽 소대가 진지를 떠나는 것을 보고 소대장의 발 사이에 권총을 한 발 쏘았다. 오른쪽 소대도 떠나고 있었다. 날이 밝았을 때 산 위에는 엘리스와 열한 명이 남아 있었다11. 그들은 이틀을 버텼다. 엘리스는 물러나는 길에 지뢰밭에 들어가 다친 병사 하나를 업어 나왔다11.
같은 밤 북쪽 시비당산에서는 제35연대 B중대가 북한군 제13연대의 두 대대를 맞았다. 북한군은 미군 참호 150미터 앞까지 기어 와 있다가 일어섰다. 새벽 두 시 반, B중대 소총수들은 기관총 탄띠를 풀어 탄알을 한 발씩 소총에 먹이고 있었다11. 산 아래 C중대 1소대가 탄약 상자를 지고 사십오 분 만에 비탈을 기어올라 왔다11. 날이 밝자 꼭대기 바로 아래 비탈에 경기관총 서른 정과 중기관총 석 정이 버려져 있었고, 그 사이에 제13연대장의 시신이 있었다11. 봉암리의 포병 진지를 덮친 바로 그 연대였다.
북한군 두 연대 가까이가 5킬로미터 폭의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11. 함안이 불탔다. 오후 네 시 반, 마산에서 달려온 제27연대 제1대대가 다시 체크 중령을 앞세우고 함안으로 들어갔다16. 서쪽 능선의 기관총에서 초록 예광탄이 날아왔다. 한 병사는 그 예광탄이 「논에 심은 모만큼 빽빽했다」고 했다16. 이튿날 정오 체크 대대는 제24연대가 버린 참호를 되찾았다. 참호 안에는 기관총과 박격포가 놓아둔 그대로 있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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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14일, 마산항.
킨은 마산의 주민을 내보내기로 했다. 경찰과 공무원, 철도와 전기를 맡은 사람과 그 가족만 남기라는 명령이었다. 9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상륙함이 마산 부두에서 주민 12,000명 남짓을 실어 냈다16. 보따리를 인 아낙이 아이 손을 잡고 상륙함의 넓적한 앞문을 걸어 올라갔다. 배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한 번 서쪽 산을 돌아보았다. 포성은 그 산 너머에서 울리고 있었다.
같은 주, 산 위의 미군에게는 다른 소식이 내려왔다. 본국의 금주 단체들이 들고일어나, 9월 12일을 끝으로 병사들에게 공짜 맥주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6. 의회의 한 의원은 맥주 편을 들며 말했다고 했다.
“한국의 물은 총알보다 더 위험합니다.”
참호 속의 한 병사는 신문 쪼가리를 접으며 투덜거렸다.
“싸우는 건 우린데. 맥주 한 캔에 죽은 사람은 없다고.”
14일 새벽, 북한군 400~500명이 필봉을 쳤다. 전투산 꼭대기는 이미 북한군 손에 있었고, 필봉도 넘어갔다16. 그러나 산 아래 철조망과 지뢰밭 뒤에 미군 포가 겨누고 있었고, 북한군은 그 너머로 내려오지 못했다. 방호산이 「며칠 안에」라고 했던 마산 부두에는 아직 상륙함이 드나들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멀리 북쪽 인천 앞바다에 미군 함대가 들어섰다.
부산으로 가는 서쪽 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사료 출처
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3장 첫머리,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북한군 제6사단의 서남부 우회, 7월 말 식량 반감, 방호산의 「숨통」 훈시. 2.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4장 「The Affair at Chindong-ni」,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학교 본부, 아침 식사 뒤의 사격, 졸던 보초와 국군으로 오인, 맨발의 병사, 마이클리스·체크, 웨스턴 대위의 세 차례 부상, 테리 중령의 시한신관 사격, 13시 철수, 시신 400구·사상 600 추정, 미군 제1대대 전사 13·부상 약 40·전체 60, 제14연대 두 대대, 민간 전화선 감청과 사단장의 질책, 사단 병력 절반. 3. 영문 위키백과 「John H. Michaelis」 — 1912년 8월 20일생. 4. 「김성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23.2.7 최종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74796 — 1924년 3월 14일 창원 출생, 하얼빈 농업대학, 7월 31일~8월 11일 진동리 전투와 전 부대원 1계급 특진. 5. 「진동리지구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2023.2.7 최종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54657 — 마산 서부지역 전투 8월 2일~9월 14일, 8월 3일 진동초등학교의 제27연대 본부와 체크 대대 기습, 북한군 600여 명 사망, 김성은 부대의 제27연대 배속과 봉암리 교전, 8월 6일 야반산 탈취, 전 장병 1계급 특진. 참고문헌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5 — 낙동강선 방어작전』(2008). 6. 뉴데일리,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의 주인공」(2011.7.29, 국가보훈처 8월의 6·25전쟁영웅 선정 보도), newdaily.co.kr/site/data/html/2011/07/29/2011072900043.html — 안창관 1924년 1월 8일생, 하얼빈 공립사범학교 졸업 뒤 소학교 교사, 김성은 부대 제7중대장, 8월 3일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6사단 정찰대대 기습, 90여 명 살상·전차 2대 노획, 전 부대원 1계급 특진. 7.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6장 「The First American Counterattack - Task Force Kean」 전체,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병력 약 2만, 세 갈래 길, 112도의 더위와 60도 비탈, 해병 제2대대 일사병 약 30명, 「Who Attacks Whom?」, 제5연대전투단 제1대대의 갈림길 착오, 킨의 「I want that hill tonight」, 진동리 동쪽 255고지 길막이와 제159포병대대 1,600발, 해병 H중대 전사 16·부상 36, 고성 서쪽 제83모터사이클연대 행렬 약 200대와 콜세어 넉 대, 트럭 31·지프 24·오토바이 45, 「rout」「pursuit」, 봉암리 지형과 포진지, 오드웨이가 받은 21시 타자 명령, 롤롭스의 보고, 04시 출발 명령, 구급차, 덕곡 길목 전차·소대의 철수, 제13연대의 세 방향 공격, 바움가트너, 카피카 군종, C중대 180명 중 23명, 테드퍼드, 곡사포 8문·6문 손실, 근무 인원 20퍼센트, 다섯 주 뒤 대정리 시신 55구와 제90대대 시신 20구, 8월 16일 15시 50분 해체, 북쪽에서 분대 하나 옮기지 않음, 2,000명 보충병. 8. 영문 위키백과 「William B. Kean」 — 1897년 7월 9일생. 9. 영문 위키백과(스록모턴 항목) — 1913년생. 10.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20장 「Stalemate West of Masan」,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서울 징집 보충병과 수류탄, 일기, 필봉·전투산 지형, 오곡·덕곡 갱도, 6명 들것조, 19회 주인 교체, 코코런의 17명, 코얼리의 보고. 1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23장 「Midnight Near Masan」,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방호산의 8월 24일 명령, 22시 공격 명령과 자정 직전의 공격, 엘리스와 11명, 함안 3마일 구멍, 시비당산 B중대와 기관총 탄띠, C중대 1소대의 45분 탄약 운반, 경기관총 30·중기관총 3정과 제13연대장 시신. 12. 경남신문 기획 「한·미 동맹군 45일간 대혈전…」(전북일보 2023.2.27 공동 게재, jjan.kr/article/20230227580210)과 같은 기획의 「마산방어전투 기념관」 기사(같은 공동 게재 2023.9.25, jjan.kr/article/20230925580265) — 서북산 해발 739미터와 조망, 「고지의 주인이 19번」, 네이팜으로 민둥산이 된 꼭대기, 티몬스 대위의 부상·후송 중 전사와 일곱 살 아들, 해병대진동리지구 전첩비·서북산 전적비. 13. Military Times Hall of Valor, 로버트 리 티몬스 은성무공훈장 공적서, valor.militarytimes.com/?p=133243 — Robert Lee Timmons, 1919년생, 제5연대전투단 제1대대 A중대, 1950년 8월 23일 서북산 공격, 부상 뒤 후송 거부, 들것에서 박격포 사격 지휘 중 치명상. 14. 코리아타임스, 「Late US captain named Korean War hero of August」(2026.7.31) — 국가보훈부 2026년 8월의 6·25전쟁영웅 티몬스, 후송 중 전사, 이듬해 시신 수습, 알링턴 안장. 15. 영문 위키백과(코얼리 항목) — 1914년생. Appleman도 「36세」로 적었다. 16.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24장 「Counterattack at Haman」「Battle Mountain and Sobuk-san」,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체크 대대 16시 30분 공격, 초록 예광탄, 버려진 참호, 마산 소개와 9월 10~11일 LST 1만 2천여 명, 공짜 맥주 9월 12일 종료와 의원·병사의 말, 9월 14일 필봉 상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김성은 1924년(백과사전), 안창관 1924년(뉴데일리·보훈처), 마이클리스 1912년, 킨 1897년, 스록모턴 1913년, 코얼리 1914년, 티몬스 1919년(Hall of Valor). 방호산은 영문 위키백과가 1906년과 1916년 두 설을 함께 적고 미군 통역반 신문 보고서가 1950년에 「40세」로 적어 나이를 넣지 않았다. 체크, 웨스턴, 테리, 오드웨이, 롤롭스, 바움가트너, 카피카, 테드퍼드, 엘리스, 코코런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야반산 — 백과사전은 김성은 부대가 8월 6일 「적에게 점령당한 진동리의 야반산」을 빼앗았다고 적고, Appleman은 야반산(폭스 고지, 342고지)을 8월 3일 밤부터 미 제5연대 F중대가 지키다 8월 8일 해병 제5연대 제2대대가 빼앗아 교대했다고 적는다. 같은 능선의 다른 봉우리일 수 있으나 확인하지 못해 본문에는 미군 기록의 야반산만 장면으로 쓰고 해병대의 야반산 탈취는 이 줄에만 남겼다. [자료 충돌] 진동리 전투 날짜 — 백과사전 인물 항목은 김성은 부대의 진동리 전투를 7월 31일~8월 11일, 뉴데일리는 안창관의 기습을 8월 3일로 적었다. 같은 날 아침의 학교 기습과 안창관의 기습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같은 북한군 부대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19번」 — 경남신문은 서북산(739미터)의 주인이 19번 바뀌었다고 적고, Appleman은 필봉에서 북서쪽 1마일의 전투산(665고지)이 바뀐 횟수를 두고 제24연대 정보 부사관의 셈(19번)을 적으며 「정확한 횟수에 합의가 없다」고 했다. 영문 위키백과는 20번으로 적는다. 본문은 전투산의 19번을 따랐다. 한국 쪽 자료의 서북산과 미군 기록의 Sobuk-san·P'il-bong·Battle Mountain이 봉우리마다 어떻게 맞물리는지도 자료마다 다르다. [자료 충돌] 사상자 — 진동리 학교 기습의 북한군 손실은 Appleman 시신 400구·사상 600 추정, 백과사전 사망 600여 명. 피의 골짜기 미군 포병 손실은 Appleman이 「정확히 셈한 적이 없다」며 제555대대 전사 75~100·부상 80 추정을 적었고, 영문 위키백과 「Bloody Gulch massacre」는 포로 75명 살해로 적는다. 경남신문은 마산방어전투 전체를 국군·미군 1천여 명, 북한군 4천여 명 전사로 적었다. [자료 충돌] 제24연대 — 본문의 도주 장면은 Appleman(1961)을 따랐다. 미 육군 군사사센터가 1996년에 낸 Bowers·Hammond·MacGarrigle 『Black Soldier, White Army: The 24th Infantry Regiment in Korea』는 인종 분리와 편견이 부대 결속과 지휘를 무너뜨렸다고 보고, 연대의 공적이 잊혔다고 적는다. 엘리스와 열한 명, 코코런의 열일곱 명도 같은 연대다. [자료 충돌] 티몬스의 아들 — 경남신문은 일곱 살 아들이 뒷날 주한 미 제8군 사령관이 되었다고 적었다. 영문 위키백과의 리처드 F. 티몬스(1942년 워싱턴 출생, 1994~1997 제8군 사령관)와 티몬스 대위의 본적(워싱턴)은 들어맞으나, 두 사람이 부자라는 것을 다른 자료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본문은 신문의 서술로 적었다. [지명] Appleman의 Taejong-ni를 「대정리」로, Tundok을 「덕곡」으로, Ogok을 「오곡」으로 옮긴 한글 표기는 소리를 따른 추정이다. Pongam-ni는 봉암리로 적었고 정확한 현재 행정구역은 확인하지 못했다. Haman은 필봉에서 동북쪽 3마일이라는 Appleman의 서술에 맞춰 지금의 함안면 일대로 보았다. [재구성] 모든 대화(정치 일꾼의 낭독은 Appleman이 옮긴 방호산 훈시를 다듬은 것, 마이클리스의 외침, 해병 중대원과 안창관의 문답, 통신장교와 통역의 문답, 킨의 말은 기록 문장을 옮긴 것, 오드웨이와 롤롭스의 문답과 출발 명령의 문장, 참호 병사의 말은 Appleman이 옮긴 병사의 말을 다듬은 것), 북한군 병사의 주먹밥과 허리띠, 안창관이 손을 들었다 내리는 몸짓, 콜세어 조종사의 시선, 티몬스의 숫자를 받아 외친 중대원, 상륙함에 오르는 아낙과 아이, 일기를 쓴 청년이 방호산 명령을 들었는지에 대한 문장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방호산의 질책 전화에서 통역이 옮긴 말의 내용은 「사람을 많이 잃었다」는 기록의 요지만 따랐다. 함안 전투의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