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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16,007자)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 강을 건너온 밤

1950 · 네오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1950년 8월 5일~19일 — 영산 서쪽 낙동강 굽이(돌출부), 오항 나루 도하(8월 6일 0시, 북한군 제4사단 제16연대 제3대대 800명), 기항(박진) 나루의 수중교(8월 10일 밤 완공), 영산–낙동강 도로를 가로지르는 클로버리프 고지(165고지)와 오봉리 능선(102·109·117·143·147·153고지), 고곡리 북한군 포진지, 영산 동쪽 북한군 도로차단과 미 제27연대의 남지 다리 북진(8월 11~13일), 미 제1해병임시여단의 오봉리 공격(8월 17일 08시)과 207·311고지 점령

1950년 8월 5일 자정, 낙동강 서쪽 기슭, 오항(현 경남 창녕군) 나루 맞은편.

빨간 조명탄과 노란 조명탄이 강 위에서 터졌다. 북한군 제4사단 제16연대 제3대대 병사들은 그 빛 아래에서 군복을 벗었다. 바지와 웃옷을 둘둘 말아 소총과 함께 묶고, 그 꾸러미를 머리에 얹었다. 뗏목을 엮은 병사들은 옷 보따리를 뗏목에 실었다. 박격포도 무거운 화기도 없었다. 맨몸의 사내 800명이 소리 없이 물에 들어갔다1.

강물은 어깨까지 찼다. 앞사람의 머리 위 꾸러미가 흔들릴 때마다 뒷사람도 숨을 멈췄다. 발바닥에 닿는 모래가 물살에 쓸려 나갔다. 키 작은 병사 하나가 발을 헛디뎌 물을 먹었고, 옆 병사가 그의 꾸러미를 붙잡아 올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단장 이권무 소장은 만주에서 태어나 중국 공산당 군대인 팔로군에서 싸운 사람이었고, 사단은 「서울 제4사단」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었다2. 7월 5일 오산에서 미군 스미스 부대를 처음 밀어낸 사단도, 대전을 무너뜨린 사단도 이 사단이었다. 김일성은 8월 15일을 최후 승리의 날로 정해 두었다1. 일본에게서 벗어난 지 다섯 해가 되는 날이었다. 남은 날은 열흘이었다.

동쪽 기슭에 닿은 병사들은 젖은 몸에 옷을 꿰었다. 소대마다 줄을 지어 골짜기로 들어섰다. 강가 높은 산에 미군 중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그러나 산을 치지 않았다. 산과 산 사이 빈 골짜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창녕군의 고을 영산(현 경남 창녕군 영산면)을 향해 걸었다.

*

8월 6일 새벽, 영산, 미 제34연대 지휘소.

제34연대장 찰스 E. 보샹 대령은 수화기를 들고 사단장에게 말했다. 다섯 시 이십 분이었다1.

“적이 강을 건넜습니다. 대규모입니다. 제 구역 한가운데입니다. 아직 어두워서 상황이 흐립니다. 날이 밝으면 예비대를 넣겠습니다. 새벽에 연락기 한 대를 띄워 주십시오.”

전화선 끝의 제24사단장 존 H. 처치(58) 소장은 북쪽을 지켜보던 참이었다3. 북쪽은 길이 나빠 막기도 돕기도 어려웠고, 처치는 적이 그쪽으로 오리라 보았다. 적은 남쪽으로, 그가 생각한 날보다 먼저 왔다.

연대가 맡은 강줄기는 15킬로미터 가까이 되었고, 그것을 대대 하나가 지켰다. 북쪽의 I중대와 가운데의 L중대 사이에 3킬로미터 넘는 빈틈이 있었다. 오항 나루는 바로 그 빈틈에 있었다1.

처치는 앞서 사단 구역 안 주민들에게 강에서 8킬로미터 안을 비우라고 명령해 두었다. 그 안에 남는 사람은 적의 첩자로 보고 보는 즉시 쏠 수도 있다고 했다1.

“여기를 지키려면 등 뒤에 적을 둘 수 없다.”

강가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은 그 명령을 들고 짐을 쌌다. 떠나지 못한 사람과 숨어든 적을 가려낼 방법은 명령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

8월 6일 아침, 영산–낙동강 도로, 쇠실(현 경남 창녕군) 마을 어귀.

제34연대 제1대대장 해럴드 B. 에어스 중령은 지프에서 내려 빈 지휘소를 둘러보았다. 새벽에 이곳을 지키던 제3대대 본부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4.2인치 박격포 진지도 넘어갔다. 그때 언덕 위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C중대를 태운 트럭들이 도착했다. 병사들이 짐칸에서 뛰어내리는 사이 총탄이 트럭 두 대를 맞혔다. 대대에는 전날 보충병 187명이 막 들어와 있었다1.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한 얼굴들이 흙바닥에 엎드렸다.

“애크리지! 저 언덕을 잡아!”

중대를 맡은 지 며칠 안 된 클라이드 M. 애크리지 대위가 병사들을 일으켜 마른 개울 바닥으로 들어갔다. 위에서 쏘는 쪽이 수도 많았고 자리도 높았다. 애크리지는 세 번 총에 맞고서야 뒤로 실려 갔다1. 개울 바닥에 죽은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이 늘어 갔다.

에어스는 도로 밑 배수로에 몸을 숨기고 60밀리 박격포로 언덕을 쳤다. 일어서서 포탄이 떨어질 자리를 부르던 박격포 반장이 기관총 연사에 맞았다. 몸이 거의 두 동강 났다. 포탄이 바닥나자 에어스는 대대 참모 몇과 함께 논을 가로질러 뛰었다. 둘이 맞았고, 나머지는 건너편 오봉리(현 경남 창녕군) 능선 비탈에 닿았다.

*

8월 6일 낮, 도로 남쪽, 물방앗간.

같은 배수로에서 찰스 E. 페인 중위와 맥도널드 마틴 중위가 길 남쪽의 물방앗간으로 뛰었다. 마틴은 이미 다쳐 있었다. 몇 분 사이에 C중대 병사들이 하나둘 방앗간으로 굴러들어 왔다.

방앗간 벽은 흙과 돌로 쌓은 벽이었다. 북한군의 소총탄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북한군은 몇 번이나 수류탄이 닿을 거리까지 기어 왔다. 안에서 쏘는 총에 그때마다 물러났지만 쏠 사람은 줄어 갔다. 누군가 죽은 전우의 몸을 끌어다 벽에 기대 세웠다. 다른 병사가 말없이 그 옆에 다음 몸을 세웠다.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 앞에서 총알을 받았다1. 한낮의 더위 속에서 아무도 그 벽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오후 늦게 길 위에서 궤도 소리가 들렸다. 미군 경전차였다. 방앗간 안에서 누군가 웃음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전차의 포구가 방앗간을 향했다. 적이 들어앉은 집으로 본 것이었다1. 포탄이 벽을 뚫고 터졌다.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고, 둘이 치명상을 입었다. 페인은 정신을 잃었다.

전차를 뒤따라 A중대장 A. F. 알폰소 대위의 병사들이 뛰어들었다. 알폰소는 버려진 2.5톤 트럭 가운데 시동이 걸리는 것을 골라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을 실었다. 트럭마다 운전병 하나와 소총수 둘을 태워 총탄 속으로 돌려보냈다1.

페인은 누군가 자기를 짐칸에 던져 넣을 때 잠깐 눈을 떴다.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페인은 죽었어. 고등어처럼 뻣뻣하게.”

페인은 대꾸할 힘이 없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 뒤 트럭이 총탄 속에서 도랑에 처박혔을 때 그는 또 눈을 떴다. 이번에는 제 발로 기고, 걷고, 아군 진지까지 갔다. 대대장의 기억으로는 C중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서른다섯쯤이었다1.

*

8월 6일 밤~9일 새벽, 강가 고지, A중대와 L중대 일부.

알폰소의 A중대는 그날 저녁 여덟 시에 강가까지 밀고 나갔다. 아직 자리를 지키던 L중대 병사들과 합치니 아흔 명쯤이었다1. 그들은 잘 파 둔 원형 진지에 들어앉았다.

이틀 뒤 아침, 알폰소의 병사들은 발아래 강을 내려다보았다. 배 여섯 척이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한 척에 열에서 열둘씩 타고 있었다. 900미터 거리에서 중대의 50구경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1. 배에서 뛰어내린 북한군이 강둑에 흩어졌고, 그 위로 미군기가 내려왔다.

오후에 북한군 박격포탄 몇 발이 진지 둘레에 떨어지다 멎었다. 먼 데서 북한군 종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험 사격이야. 오늘 밤에 온다.”

알폰소는 밤 열한 시에 진지를 비우겠다고 무전으로 청했고, 대대와 연대가 허락했다. 열 시 반, 다친 병사들을 먼저 산 밑으로 내렸다. 중대가 길로 내려선 직후, 비어 있는 진지 위로 북한군의 포탄이 쏟아졌다. 북한군은 곧 진지가 비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포탄을 길로 옮겼다. 어둠 속에서 소대 하나가 길을 놓치고 오봉리 능선 북쪽 끝의 북한군 진지로 들어갔다. 그 소대는 거기서 많은 사람을 잃었다1.

*

8월 10일 밤, 낙동강이 휘돌아 만든 돌출부 한가운데, 기항 나루(박진 나루, 현 경남 창녕군 남지읍).

북한군 공병들은 이틀째 밤마다 같은 자리에서 물에 들어갔다. 모래를 채운 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가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 위에 통나무를 눕히고, 돌을 날라 눌렀다. 다음 사람이 그 위에 다시 가마니를 내려놓았다. 다리는 물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수면에서 30센티미터쯤 아래, 흙탕물 속에 길이 하나 생겼다1.

날이 밝으면 공병들은 강가 덤불로 흩어졌다. 미군 조종사들이 흙탕물을 내려다보아도 거기에는 강물밖에 없었다. 제9연대장 존 G. 힐 대령에게는 8일부터 북한군이 밤에 강에서 무언가를 짓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1.

10일 밤, 물속의 다리가 완성되었다4. 트럭이 바퀴 반을 물에 잠근 채 강을 건넜다. 중박격포가, 야포 열두 문쯤이 건넜다1. 전차 몇 대도 그 길을 건넌 것으로 보였다. 강을 건너온 지 닷새째 아침, 맨몸으로 시작한 강 건너 발판인 교두보에 대포가 들어앉았다.

이튿날 아침, 힐의 부대가 돌출부의 북한군을 강으로 밀어붙이려고 나섰을 때, 미군이 클로버리프라고 부른 고지와 오봉리 뒤 1.6킬로미터쯤 고곡리(현 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쪽에서 북한군 포가 여섯 문, 네 문, 네 문씩 무리 지어 불을 뿜었다. 공격은 출발선에서 멈췄다1. 오후에 처치는 명령을 「공격」에서 「땅을 파고 버텨라」로 바꿨다.

*

8월 11일~13일, 영산 동쪽, 밀양 가는 길.

영산에 처음으로 북한군 포탄이 떨어졌다. 클로버리프와 오봉리를 비켜 돌아 들어온 북한군 무리가 영산 동쪽 길을 막았다. 남쪽에서는 북한군이 남지(현 창녕군 남지읍) 다리를 지키던 K중대의 분대 하나를 덮쳐 몰살시켰다1. 제24사단과 마산(현 경남 창원시) 쪽 제25사단을 잇는 하나뿐인 찻길이 끊겼다.

12일 새벽, 참모 하나가 힐을 흔들어 깨웠다.

“영산 동쪽 3킬로미터에서 구급차와 트럭 여러 대가 매복에 걸렸습니다.”

밀양에서는 사단 본부중대장 조지 B. 해프먼 대위가 사람을 모았다. 여덟 개 부대에서 135명쯤이 나왔다1. 서기, 제빵병, 헌병, 수색중대 병사들이었다. 해프먼은 그들을 데리고 영산–밀양 길의 심곡리(현 경남 창녕군) 고개에 올라섰다.

빵 반죽을 하던 손이 탄띠를 찼다. 병사 하나가 탄창을 거꾸로 끼우다가 옆 사람에게 손등을 맞았다.

“빵은 이렇게 구우면 타.”

“빵은 거꾸로 넣어도 익어.”

웃음 속에서 탄창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들은 전차 두 대와 함께 그 오후 내내 고개를 지켰다. 장갑차가 세 번 총탄 속을 뚫고 와서 물과 밥과 탄약을 내려놓았다1.

남쪽에서는 마산의 제27연대 제2대대가 남지 다리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왔다. 길은 피란민으로 막혀 있었다. 피란민 수레 하나가 넘어졌다. 이불 보따리 사이에서 소총 열다섯 자루쯤과 탄약 자루가 쏟아졌다. 피란민 행렬에 섞여 수레를 끌던 북한군 열둘쯤이 들판을 가로질러 달아났다. 병사들이 그중 여덟을 쓰러뜨렸다1. 넘어진 수레 옆에 진짜 피란민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보따리를 끌어안고 땅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않았다.

13일 낮, 힐은 처치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사단 지휘소로 갔다.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61) 중장이 기다리고 있었다5.

“도로차단을 걷어낼 수 있나?”

“방금 그 위를 날아왔습니다. 오늘 밤까지 걷어내겠습니다.”

그날 오후 제27연대와 영산의 부대가 손을 잡았다. 길은 다시 열렸다1.

*

8월 15일 아침, 오봉리 능선 남쪽 끝.

14일 새벽 세 시부터 비가 내렸다. 비행기 100대가 능선을 때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한 대도 뜨지 못했다1. 클로버리프에서는 하룻밤 사이 진지가 몇 번씩 주인을 바꿨다. 제9연대 E중대의 워런 H. 조던 상사는 10일부터 17일까지 다섯 번이나 중대를 맡았다1. 그때마다 중대의 장교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더위에 쓰러졌다.

15일 아침, 제34연대 A중대 제2소대장 로이 E. 콜린스 중사는 능선이 낮게 잘록해진 안부 너머의 봉우리를 보았다. 소대는 서른다섯 명이었다1.

“간다!”

소대가 안부를 건너 뛰었다. 봉우리 바로 뒤 비탈에 북한군이 엎드려 있었다. 수류탄이 오가고, 열 걸음 거리에서 소총이 오갔다. 북한군 병사 하나가 능선 너머에서 몸을 날려 콜린스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았다. 콜린스는 함께 나뒹굴며 상대의 목을 찾았다. 그런데 상대는 콜린스를 놓지 않은 채 두 손을 들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항복하려는 사람이었다. 총알이 오가는 능선 위에서 손을 드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콜린스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포로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웃지 못할 장면도 오래가지 않았다. 오십 분 만에 서른다섯 명 가운데 스물다섯이 죽거나 다쳤다1. 성한 열 명이 물러설 때, 에드워드 O. 클리본 일병은 한 발만 더 쏘겠다며 자리에 남았다. 그는 그 한 발을 쏘려다 목숨을 잃었다1. 열 명은 다친 아홉을 업고 내려왔다. 그 아홉 가운데 셋이 구호소에 닿기 전에 숨을 거뒀다.

*

8월 15일 오전, 처치 소장 지휘소.

워커는 화가 나 있었다. 이틀 전 처치가 북한군 제4사단 전부가 강을 건너왔다고 했을 때 워커는 짧게 잘랐다.

“내가 받은 정보는 그렇지 않네.”

처치는 물러서지 않았다. 뒷날 정보는 처치가 옳았다고 확인했다1. 15일 오전, 워커가 처치의 지휘소로 들어섰다.

“해병여단을 주겠네. 이 상황을 정리해. 빨리.”

그날 오후 한 시쯤, 마산에서 밀양으로 가던 해병여단장 에드워드 A. 크레이그(54) 준장이 지프에 앉아 있었다6. 제8군 참모 윌리엄 A. 콜리어 대령이 그 옆에 앉아 워커의 지시를 전했다. 크레이그는 바로 여단 본부에 야영을 걷고 영산으로 가라고 명령했다1.

*

같은 날, 돌출부 안쪽, 북한군 제4사단.

강을 건너온 지 열흘이 지났다. 8월 15일은 승리의 날이 아니었다. 밥이 모자랐다. 제18연대는 14일에 받은 탄약이 마지막이었다1. 상처가 가벼운 병사는 붕대 한 번 감고 다시 참호로 보내졌다. 무거운 부상자는 대부분 손을 쓰지 못하고 죽었다.

그날 평양은 최고사령관 명령 제82호를 냈다. 「미제 침략자들을 소탕하고 조국의 완전 해방을 달성하자」는 제목이었다. 김일성은 지금까지 적 2만 9,215명을 죽이고 4만 명 넘게 사로잡았으며, 패한 미군과 국군은 남쪽 땅 전체의 십 분의 일쯤만 쥐고 있다고 주장했다10. 시한으로 삼았던 8월 15일은 그렇게 지나갔고 북한군은 대구에도 닿지 못했다. 2만 9,215명이라는 수와 4만 명이라는 수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다른 곳에 없다11.

빈자리는 남쪽 마을에서 끌려온 청년들이 채웠다4. 그 가운데 절반은 총이 없었다. 그들은 참호를 파고, 탄약 상자를 지고, 먹을 것을 찾아 마을을 뒤졌다. 포로들은 뒷날 보충병의 4할쯤이 달아났다고 말했다1. 중국 팔로군에서 넘어온 분대장과 소대장들만 끝까지 눈빛이 꺾이지 않았다.

오봉리 능선은 제18연대장 장기덕 대령의 연대가 맡았고, 제16연대의 대대 하나가 거기 붙었다1. 능선 뒤 비탈에는 깊은 참호가 두 줄로 파여 있었다.

*

8월 17일 아침 여덟 시, 오봉리 능선.

오봉리 능선은 3킬로미터 가까이 남동쪽으로 휘며 이어졌다. 102고지에서 시작해 109, 117, 143, 147, 153고지로 갈수록 높아졌다7. 109와 117 사이 골짜기 꼭대기에는 붉은 진흙이 무너져 내린 자리가 상처처럼 벌어져 있었다. 해병들은 그 능선을 「붉은 칼자국 고지」라고 불렀고, 기자들은 「이름 없는 능선」이라고 불렀다7.

해병 제5연대장 레이먼드 L. 머레이(37) 중령은 제2대대에 맨 앞을 맡겼다8. 대대장 해럴드 S. 로이스(34) 중령이 관측소에서 쌍안경을 들었다9. 일곱 시 사십 분, 해병 전투기 코르세어 18대가 능선을 때렸다1. 처치는 그 광경을 「능선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여덟 시, D중대 제3소대장 마이클 J. 싱카 소위가 소대를 이끌고 300미터 논으로 들어섰다7. 논을 건너는 동안 이상하게 조용했다. 소대가 비탈 중턱에 이르렀을 때 능선 위와 길 건너 두곡(현 경남 창녕군) 마을에서 기관총 수십 정이 한꺼번에 터졌다.

싱카는 빗물이 파 놓은 얕은 도랑을 타고 올랐다. 꼭대기 가까이에서 도랑은 엎드린 사람 하나를 겨우 가릴 만큼 얕아졌다. 소대가 109고지 꼭대기의 빈 참호에 굴러들었을 때, 오른쪽에서 기관총이 땅바닥을 쓸었다. 몇 미터 아래 뒤 비탈의 두 번째 참호 줄에서 북한군이 벌떡 일어나 수류탄을 던졌다.

싱카는 소대를 내렸다. 다친 병사들은 비옷 판초에 실려 끌려 내려갔다. 열한 시, 코르세어가 다시 능선을 훑고 지나갔다. 남은 열다섯 명으로 싱카는 다시 올라갔다. 꼭대기를 잡았다. 그러나 왼쪽 143고지에서 쏟아지는 총탄이 그치지 않았고, 기다리던 탄약은 오지 않았다7.

“부상자와 무기를 다 챙겨서 내려간다.”

비탈 4분의 3 지점에서 엄폐물을 찾아 머릿수를 세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여섯이었다7. 싱카는 혹시 꼭대기에 두고 온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러 다시 기어 올라갔다.

109고지 꼭대기, 조금 전 그들이 들었던 참호에서 해병 하나가 두 시체 사이에 누워 있었다. 숨이 붙어 있었다. 싱카가 그의 두 겨드랑이 밑에 팔을 넣어 참호 밖으로 끌어내는 순간, 총알이 싱카의 턱을 부쉈다.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숨이 막혔다. 그는 비탈을 기어오르는 북한군에게 수류탄 하나를 던지고, 그것이 터지는 것도 보지 않은 채 다시 그 해병의 겨드랑이를 붙잡았다. 산꼭대기에서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자리까지 그를 끌고 내려왔다.

두 번째 총알이 오른팔을 때렸다. 싱카의 몸이 빙글 돌았고, 그는 비탈을 한참 굴러 내려가서야 멈췄다. 그는 얼굴과 팔에 붕대를 감은 채 걸어서 대대 구호소까지 갔다7. 열두 시, 제2대대는 네 시간 만에 23명이 전사하고 119명이 다쳤다7.

*

8월 17일 저녁 여덟 시, 오봉리와 클로버리프 사이 고갯길.

오후 네 시, 클로버리프에 포탄이 비처럼 떨어진 뒤 제9연대가 그 고지를 잡았다1. 그제야 두곡 마을과 클로버리프에서 해병의 옆구리로 쏟아지던 총탄이 잦아들었다. 해병 제1대대 B중대가 능선 북쪽 끝을 돌아 다섯 시 십 분에 102고지를, 다섯 시 이십오 분에 109고지를 잡았다7.

해 질 무렵, 102고지에서 참호를 파던 해병들이 서쪽 길을 보았다. T-34 전차 세 대가 고갯길로 오고 있었다. 네 번째 전차와 보병 종대가 그 뒤를 따랐다. 코르세어가 내려와 네 번째 전차를 부수고 보병을 흩었다. 앞의 세 대는 멈추지 않았다.

길이 꺾이는 모퉁이에서 3.5인치 로켓 한 발이 첫 전차의 오른쪽 궤도를 끊었다. 전차는 마구 쏘며 굴러왔다. 폴 R. 필즈 소위의 75밀리 무반동총이 왼쪽 궤도와 앞 철판을 뚫었다. 불붙은 전차가 비틀거리며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 앞에 세실 R. 풀러턴 기술중사의 미군 중전차 M26 퍼싱이 서 있었다. 90밀리 포탄 두 발에 T-34가 터졌다7. 승무원 하나가 기어 나왔다가 총에 맞고 불타는 차체 밑으로 들어가 죽었다7.

두 번째 전차도, 세 번째 전차도 같은 모퉁이에서 멈췄다. 오 분이었다7. 고갯길에 불기둥 셋이 섰다.

*

8월 18일 새벽 두 시 반, 오봉리 능선 117고지 아래.

초록색 조명탄이 올랐다. 117고지 쪽에서 북한군이 일어났다. 분대 하나가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고, 몇 걸음 달려 기관단총을 쏘고, 다시 엎드렸다. 그 뒤의 분대가 똑같이 했다. 81밀리 박격포 조명탄이 그 움직임을 하얗게 비췄다1.

A중대 제2소대는 세 배가 넘는 적과 삼십 분을 맞섰다. 소대를 이끄는 프랭크 J. 로슨 기술중사는 세 번 총에 맞고도 후송을 거부했다7. 세 시쯤 소대가 무너졌다. 기관총 소위 프랜시스 W. 뮤첼은 총에 맞고 참호에서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 깨어난 그는 혼자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며 마주친 북한군과 싸웠다7. B중대는 사십오 분 싸움 끝에 진지를 지켰다. 날이 밝기 전에 공격이 멎었다.

뒷날 해병들은 그 밤 북한군이 남기고 간 미군 무전기 한 대를 찾았다. 다이얼이 해병 제1대대의 주파수에 맞춰져 있었다1. 그 밤 A중대와 B중대가 주고받은 말을 북한군은 다 듣고 있었다. A·B중대 진지 둘레에서 북한군 시신 183구가 나왔다. 저녁에 190명이던 B중대는 아침에 110명, 185명이던 A중대는 90명이었다1.

*

8월 18일 아침, 117고지에서 153고지까지.

117고지에서 북한군 기관총 하나가 침묵을 깼다. A중대장 존 R. 스티븐스 대위가 무전으로 항공 지원을 불렀다. 코르세어 한 대가 제3소대 머리 위로 미끄러져 내려와 500파운드, 230킬로그램쯤 되는 폭탄을 기관총 진지에 꽂았다1. 폭탄이 너무 가까워 공격하려던 해병들이 모두 바닥에 나뒹굴었다. 흙과 돌이 가라앉자 제3소대가 일어나 뛰었다. 다섯 분 만에 117고지가 해병 손에 들어왔다7.

소대장 조지 C. 폭스 중위는 스무 명으로 143고지를, 이어 147고지를 잡았다. 147고지 너머 서쪽 비탈 중턱에 북한군 150명쯤이 네 줄 종대로 내려가고 있었다7. 해병의 총탄이 닿자 줄은 흩어져 사람 떼가 되었다. 153고지 뒤 비탈에서는 덤불이 벌떡 일어나 아래로 달렸다. 소나무 가지를 몸에 꽂은 북한군이었다. 해병들은 숲이 걸어오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떠올렸다7.

*

8월 18일 오후~19일, 낙동강.

정오 무렵 돌출부 곳곳에서 북한군이 강을 향해 내려갔다. 해병 제3대대가 오봉리 다음 능선인 207고지를 잡았다. 강가에는 사람들이 백 명 단위로 몰려 있었다. 오항 고지의 미군들은 열에서 열다섯 명씩 무리 지어 강에 들어가는 북한군을 보았다. 포병은 물속을 헤엄치는 사람을 노려 물속에 들어간 뒤 터지게 하는 지연신관 포탄을 강에 쏘았다1. 전투기들은 오후 내내 강 위를 훑었다.

열사흘 전 머리에 옷 보따리를 이고 건너온 강이었다. 물은 여전히 어깨까지 찼다.

19일 아침, 해병과 제34연대 병사들이 낙동강 가에서 만났다. 오후에 강까지 내려간 정찰대는 북한군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미 제24사단은 북한군 시신 1,200구 넘게 묻었다1. 해병 병기반은 북한군 포 34문을 거두었고, 그 가운데 18문이 영산–낙동강 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1. 7,000명쯤으로 강을 건넌 북한군 제4사단은 3,500명쯤으로 강을 다시 건넜다1. 연대마다 300~400명이 남았다고 포로들은 말했다. 다친 사람의 절반은 치료를 받지 못해 죽었다고 했다1.

같은 날, 북한군 제4사단 사령부에 평양의 명령서가 닿았다. 대전 전투의 공을 기려 사단에 「근위사단」 칭호를 준다는 명령이었다. 사단은 그 명령을 강 서쪽에서 받았다1.

해병여단은 그날 오후 제24사단의 지휘에서 풀려 마산 동쪽 창원으로 내려갔다. 해병은 돌출부에서 66명이 전사하고 278명이 다쳤으며 1명이 실종되었다7.

사료 출처

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7장 「The First Battle of the Naktong Bulge」 전체, 원문 236~288쪽 상당,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제34연대 제3대대 배치(I·L·K중대, 3킬로미터 넘는 빈틈, 대대 정면 15,000야드), 처치의 주민 소개 명령과 인용문, 8월 5일 자정 빨간·노란 조명탄과 제16연대 제3대대 800명 도하(옷과 무기를 머리에 이고 어깨 깊이 물), 김일성의 8월 15일 시한, 이권무의 경력·「서울 제4사단」 칭호, 사단 병력 약 7,000·연대당 1,500, 보샹의 05시 20분 보고(인용문), 에어스·애크리지(세 번 부상)·박격포 반장, 보충병 187명, 페인·마틴과 물방앗간(시신을 벽에 기댐, 아군 전차 오인 사격, 「Payne is dead as a mackerel」), 알폰소의 트럭 후송, C중대 생존 약 35명, A중대와 L중대 약 90명, 여섯 척의 배·50구경·8일 밤 철수와 소대 손실, 8월 10일 밤 기항(박진) 나루 수중교 완공(모래주머니·통나무·돌, 수면 아래 약 1피트, 트럭·중박격포·야포 약 12문), 11일 고곡리 포 6·4·4문, 영산 첫 포격, 남지 다리 K중대 분대 몰살, 해프먼 대위의 135명(서기·제빵병·헌병), 심곡리 고개, 장갑차 세 차례 보급, 제27연대 머치 대대의 피란민 수레(소총 약 15정, 북한군 약 12명 중 8명 사살), 워커와 힐의 문답(인용문), 14일 새벽 3시부터 비·100대 공습 취소, 조던 상사의 다섯 차례 중대 지휘, 15일 콜린스 소대(35명 중 25명 사상, 50분, 항복하려 태클한 북한군), 클리본 일병, 워커의 「That is not my information」「I am going to give you the Marine brigade…」, 콜리어와 크레이그의 지프 대화, 북한군 제4사단 실정(식량 부족, 제18연대 14일 마지막 탄약 보급, 보충병 탈영 약 40퍼센트, 절반은 무기 없이 노역, 중공군 출신 분대·소대장), 장기덕 대령의 제18연대와 제16연대 1개 대대, 17일 0735 포격·코르세어 18대·처치의 「was floating」, 싱카(30명 중 20명, 다시 15명 중 9명), 제2대대 23명 전사·119명 부상, 오후 4시 클로버리프 탈취, 102고지 17시쯤, T-34 네 대와 퍼싱, 18일 0230 초록 조명탄과 북한군의 약진 방식, 시신 183구, B중대 190→110·A중대 185→90, 500파운드 폭탄, 18일 정오 북한군 철수와 지연신관 포격, 오항 고지에서 본 도하 무리, 19일 낙동강에서 해병·제34연대 합류, 1,200구 매장, 포 34문(도로 따라 18문), 사단 3,500명·연대당 300~400명, SCR300 무전기, 19일 「근위사단」 명령, 해병여단 창원 이동. 2. 영문 위키백과 「Lee Kwon-mu」 — 1914~1986. 3. 영문 위키백과 「John H. Church」 — 1892년 6월 28일생. 4. 영문 위키백과 「First Battle of Naktong Bulge」, en.wikipedia.org/wiki/First_Battle_of_Naktong_Bulge — 8월 5~19일, 영산(창녕군), 제24사단 병력 14,540명, 남한 마을에서 강제로 끌려온 보충병과 탈영, 첫 수중교 8월 10일 완공. 한국어 위키백과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는 영문판 번역으로 보여 따로 근거로 쓰지 않았다. 5. 영문 위키백과 「Walton Walker」 — 1889년 12월 3일생. 6. 영문 위키백과 「Edward A. Craig」 — 1896년 11월 22일생. 7. Lynn Montross·Nicholas A. Canzona,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ume I: The Pusan Perimeter』, 미 해병대 역사과(1954), 제9장 「The Battle of the Naktong」·제10장 「Obong-ni Ridge」, Project Gutenberg 전자책 65007, gutenberg.org/files/65007/65007-h/65007-h.htm — 102·109·117·143·147·153고지, 붉은 흙이 무너진 자리와 「Red Slash Hill」「No Name Ridge」라는 이름, 300야드 논, D중대 싱카 소대의 진로와 11시 공습 뒤 두 번째 돌격(15명), 싱카 본인의 회고(탄약 미도착, 싸울 수 있는 6명, 두 시체 사이의 부상병, 턱과 오른팔 부상, 걸어서 구호소), 제2대대 4시간 만에 23명 전사·119명 부상, B중대의 102고지 17시 10분·109고지 17시 25분 점령, 20시 T-34 접근, 필즈 소위의 75밀리 무반동총, 풀러턴 기술중사의 M26, 승무원의 최후, 「다섯 분」, 18일 0230 A중대 제2소대 30분 항전과 로슨 기술중사(세 번 부상, 후송 거부), 뮤첼 소위, 18일 아침 스티븐스 대위·폭스 중위의 117·143·147·153고지 점령, 네 줄 종대 150명, 소나무 위장과 맥베스의 버넘 숲 비유, 해병 손실 66명 전사·1명 실종·278명 부상, 한국인 노무자의 보급·후송. 8. 영문 위키백과 「Raymond L. Murray」 — 1913년 1월 30일생. 9. 영문 위키백과 「Harold S. Roise」 — 1916년 2월 27일생. 10. 김일성, 「미제 침략자들을 소탕하고 조국의 완전 해방을 달성하자」(최고사령관 명령 제82호, 1950.8.15), 『Kim Il Sung Works』 vol. 6, 45~49쪽(1981) — 적 29,215명 사살·4만여 명 포로, 남반부 면적의 「약 10분의 1」 주장. 북한의 주장이다. 11. 양영조, 「다부동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Article/E0013458); 매일신문 2023.3.27 — 8월 15일이 지나도 북한군이 대구를 점령하지 못했다는 기록과 북한 주장 수치의 반박. [지명] 1950년 지명(오항·기항/박진 나루, 고곡리, 쇠실, 두곡(모리실), 강리, 심곡리, 남지)은 Appleman과 해병대 전사의 로마자 표기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고곡리·남지·박진은 현재 지명(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남지읍, 박진 나루와 박진전쟁기념관)과 맞춰 보았다. 오봉리·클로버리프·오항 나루·두곡·쇠실·심곡리의 정확한 현재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처치 1892년생, 크레이그 1896년생, 머레이 1913년생, 로이스 1916년생, 워커 1889년생(이상 영문 위키백과). 이권무는 영문 위키백과가 1914년생으로, Appleman은 1950년 8월 당시 「마흔 살」로 적어 네 살이 어긋나므로 나이를 적지 않았다. 보샹, 에어스, 애크리지, 페인, 마틴, 알폰소, 힐, 해프먼, 콜린스, 클리본, 조던, 장기덕, 콜리어, 싱카, 필즈, 풀러턴, 로슨, 뮤첼, 스티븐스, 폭스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첫 도하 병력 — Appleman은 제16연대 제3대대 800명(제1대대도 함께 건넜다는 정황 있음), 해병대 전사는 「1,000명 교두보」로 적었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싱카 소대 — Appleman은 첫 돌격에서 30명 중 20명이 꼭대기에 닿았다가 수류탄 반격으로 물러났고, 두 번째에는 15명으로 시작해 9명이 닿았으며, 싱카가 부상병을 찾으러 기어 올라갔다가 턱과 오른팔을 맞았다고 적었다. 해병대 전사(싱카 본인 회고)는 11시 공습 뒤 15명으로 109고지를 점령했고, 탄약 부족으로 물러나 6명이 남았으며, 두 시체 사이의 부상병을 끌어내다 맞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두 번째 돌격 15명과 본인 회고를 따랐다. [자료 충돌] 17일 해병 손실 — Appleman은 하루 205명(전사 23·부상 후 사망 2·부상 180), 해병대 전사는 제2대대만 정오까지 4시간에 전사 23·부상 119명(Appleman은 같은 숫자를 「7시간」, 15시 기준으로 적음). 본문은 해병대 전사의 4시간을 따랐다. [자료 충돌] 제1해병여단의 고지 이름 — Appleman은 B중대가 102고지를 17시쯤 잡은 뒤 「109·107고지」를 잡았다고 적었으나 해병대 전사의 고지 목록에는 107고지가 없다. 본문은 해병대 전사의 102·109를 따랐다. [자료 충돌] 수중교 완공 — Appleman 원문 PDF는 날짜 숫자가 깨져 「night of 710 August」로 보이고, 같은 문단의 「다섯째 날 아침(11일)」과 영문 위키백과의 8월 10일에 맞춰 10일 밤으로 적었다. 해병대 전사는 8일까지 한 개 연대가 뗏목과 걸어서 건넜다고만 적었다. [자료 충돌] 미군 손실 — 영문 위키백과는 정보 상자에 미군 전사 600·부상 및 포로 1,200, 본문 부대별 합계로 약 1,800명 사상을 적어 서로 맞지 않는다. 본문에는 쓰지 않았다. [재구성] 모든 대화(보샹의 보고와 워커의 두 말, 처치의 주민 소개 말, 힐과 워커의 문답은 기록의 인용문을 옮긴 것이고, 에어스의 명령, 알폰소의 「시험 사격」, 싱카의 철수 명령, 참모의 보고, 해프먼 부대 병사들의 빵 농담은 재구성), 도하하는 북한군 병사들의 몸짓(발을 헛디딘 병사), 처치 명령과 북한군 옷차림을 잇는 대목, 물방앗간 안에서 시신을 벽에 세우는 몸짓과 전차를 보고 터진 소리, 콜린스와 포로가 뒤엉킨 장면의 세부, 수중교를 쌓는 공병의 손동작과 낮에 덤불로 흩어지는 모습, 피란민이 엎드린 모습, 북한군 진지 안쪽의 풍경, 도하하던 강을 다시 건너는 대목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북한군 측 내면과 이권무·장기덕의 말은 기록에 없어 쓰지 않았다. 「근위사단」 명령이 강 서쪽에서 닿았다는 대목은 Appleman의 「패배가 확정된 19일 그 명령을 받았다」를 옮긴 것이다. [자료 충돌] 조던 상사의 소속 — Appleman 원문 PDF는 그 밤 북한군이 「제8연대」 진지로 스며들었다고 적고 바로 앞 문장에서 「제4연대전투단」을 적는데, 둘 다 같은 자리의 제9연대(제9연대전투단)를 잘못 찍은 글자로 보인다. 본문은 제9연대로 적었다. 같은 PDF는 18일 오항 고지의 부대를 「제18연대」로 적어 제19연대의 오기로 보이며, 본문은 「오항 고지의 미군들」로만 적었다. [표기] 장기덕은 Appleman의 로마자 「Chang Ky Dok」을 옮긴 것으로, 한자·한글 표기를 북한·국내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다. 보샹(Beauchamp)·싱카(Shinka)·클리본(Cleaborn)도 원문 표기를 소리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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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 강을 건너온 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