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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15,309자)

대전 전투 — 사단장이 사라진 날

1950 · 네오

대전 전투, 1950년 7월 14일~20일 — 금강선(공주~대평리), 7월 14일 공주 아래로 건넌 북한군 제4사단과 무너진 제63포병대대, 7월 16일 대평리로 건넌 북한군 제3사단과 두만리 남쪽 도로 차단, 갑천 동쪽 유성 진지의 미 제34연대, 7월 20일 새벽 유성 쪽에서 대전으로 들어온 T-34, 논산에서 남쪽으로 돌아 금산 길과 옥천 길을 끊은 북한군 제4사단 제16·18연대, 대전 시가(충남도청·대전역·보문산), 세천 터널 앞에서 막힌 철수 행렬, 금산 길로 잘못 든 딘 사단장 일행과 낭월 북쪽 산, 옥천 앞 고지의 미

1950년 7월 7일, 미국 뉴욕,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4호가 채택되었다. 한국에 군대를 보내는 회원국의 병력을 미국이 지휘하는 통합사령부 아래 두라는 내용이었다15. 이튿날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그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7월 24일 도쿄에서 유엔군 사령부가 문을 열었다15. 유엔 깃발을 단 군대의 첫 병력은 이미 금강으로 나가 있었다.

*

1950년 7월 14일 아침, 공주, 금강 남쪽 강둑.

밤새 내린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 미 제24사단 제34연대 L중대의 감시병은 강 하류 3킬로미터쯤에서 거룻배 두 척을 보았다1. 한 척에 서른 명쯤이 타고 있었다. 배는 강을 건너 남쪽 기슭에 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감시병은 손가락을 꼽다가 그만두었다. 여덟 시부터 아홉 시 반까지 그렇게 건너온 북한군이 오백 명쯤이었다1.

중대에는 제대로 켜지는 무전기가 없었다. 건전지는 구할 수 없었고 전화선도 동이 났다. 감시병의 보고는 사람의 다리로 중대장에게 갔다1.

하늘에는 제63포병대대의 연락기가 떠 있었다. 관측장교가 무전으로 좌표를 불렀다.

“작은 배 두 척, 사람을 싣고 남쪽으로 건너는 중.”

대대 작전장교 찰스 바터 소령은 지도에 그 좌표를 짚었다가 손을 뗐다.

“배 두 척에 포탄을 쓰지 않는다. 더 큰 표적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더 큰 표적이 나오기 전에 붉은 별을 단 소련제 야크 전투기가 나타나 연락기를 쫓아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눈이 사라지자 포성도 멎었다. 열한 시가 조금 못 되어 L중대는 진지를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1.

*

같은 날 오후 한 시 반, 공주 남쪽 5킬로미터, 제63포병대대 진지.

솔숲 비탈 사이 좁은 길을 따라 105밀리 곡사포가 늘어서 있었다. 기관총 초소에서 연락이 왔다. 사람들이 비탈을 올라오고 있다고 했다. 대답은 이랬다. 아군일지 모르니 먼저 쏘지 마라1.

올라온 사람들은 초소를 덮치고 그 기관총을 돌려 본부 포대에 쏘았다. 첫 박격포탄은 교환대에 떨어졌고, 다음 탄은 의무반에, 그다음은 무전 트럭에 떨어졌다1. 대대가 바깥과 이어진 줄은 그 몇 분 사이에 모두 끊겼다. 탄약 트럭이 터지자 포탄이 사방으로 튀었다.

A포대에서는 로런스 레이 상병이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끌어안고 엎드려 있었다. 두 번 맞았지만 그는 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동료들이 그 등 뒤로 빠져나갔다. 박격포탄이 옆에서 터져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레이는 도랑으로 기어 들어갔다. 도랑에는 포병 열다섯 명이 웅크리고 있었다. 레이는 그들의 손을 하나씩 보았다. 총을 쥔 손은 하나도 없었다1.

한 시간 반 만에 대대는 곡사포 열 문과 차량 예순에서 여든 대를 잃었다. 장교 열한 명과 사병 백스물다섯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1. 대대장 대리 윌리엄 드레슬러 소령을 그날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해 반이 지나서야 그의 유해가 진지 자리 참호 속에서 에드워드 매콜 상병의 유해와 나란히 발견되었다1.

그날 오후 네 시 사십 분, 사단장 윌리엄 딘(51) 소장은 무너진 연대에 전문을 보냈다1.

“있는 것을 다 붙들고 있으라. 형편이 어떤지 알아낼 때까지.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그리로 간다.”

*

7월 15일 저녁, 대평리(현 세종시 대평동) 맞은편, 금강 북쪽, 북한군 제3사단.

강 남쪽에서 날아온 포탄이 마을 초가에 떨어졌다. 흙벽과 짚으로 엮은 지붕은 금방 타올랐고, 강물이 불빛을 받아 붉게 번들거렸다. 북한군 병사들은 과수원과 집 그늘에 숨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낮에는 미군 비행기가 길 위에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쏘았다. 포와 트럭은 길에 나서지 못했고 병사들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몸을 움츠렸다.

병사들의 사상을 맡은 정치 일꾼이 병사들 사이를 돌았다.

“대전만 떨어뜨리면 길게 쉰다. 대전이 떨어지면 미국 놈들은 손을 든다.”

병사 하나가 강 건너 불타는 마을을 보며 물었다.

“거기까지 가면 정말 쉽니까?”

정치 일꾼은 대답 대신 강 건너를 가리켰다. 그 무렵 강 북쪽 둑에는 흙을 파고 몸을 묻은 T-34 열한 대가 포신만 내밀고 남쪽 기슭을 겨누고 있었다1.

*

7월 16일 일요일 새벽 세 시, 대평리, 금강 남쪽 둑.

북한군 비행기 한 대가 강 위로 날아와 조명탄을 떨어뜨렸다. 하얀 빛이 강물 위에 퍼지는 순간 북쪽 둑의 포와 전차가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제19연대장 가이 멜로이(47) 대령은 뒷날 그 포화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겪은 어느 포격에도 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1. 그 불빛 아래로 북한군이 배와 뗏목을 타고, 헤엄치고, 목까지 차는 물을 걸어서 건너왔다.

미군의 155밀리 곡사포 한 문은 밤새 강 위에 조명탄을 쏘아 올리는 일을 맡고 있었다. 제1대대가 조명 위치를 조금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포반은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포 다리를 통째로 들어 옮겨야 하는 방향으로 포를 돌렸다. 가장 급한 시간에 강 위가 캄캄해졌다. 대대장 오토 윈스테드 중령은 뒷날 강둑을 잃은 까닭으로 무엇보다 그 어둠을 꼽았다1.

200고지 C중대에서 헨리 맥길 중위가 제1소대장 토머스 마허 중위를 전화로 불렀다.

“그쪽은 어떤가?”

“잘 버티고 있습니다.”

삼십 초 뒤 마허는 머리에 따발총 탄을 맞고 쓰러졌다. 네 번째 돌격에 소대 진지가 넘어갔다. 소대 선임하사관이 데리고 나온 병사는 열두 명쯤이었다1.

아침이 되자 북한군은 둑 뒤의 대대 지휘소까지 들어왔다. 멜로이와 윈스테드는 취사병과 운전병, 정비병과 서기병을 모아 총을 쥐여 주었다. 전차 한 대와 기관총 넷을 얹고 앞은 바퀴로 뒤는 궤도로 굴러가는 반궤도 차량 한 대가 그 앞에 섰다. 아홉 시, 그 사람들이 가동리(현 세종시) 고지를 되찾았다. 대대 부대대장 존 쿡 소령과 인사장교 앨런 해킷 대위가 그 반격을 이끌다 전사했다1.

*

7월 16일 낮, 두만리(현 세종시 금남면 두만리) 남쪽, 경부국도.

기온이 화씨 100도, 섭씨로 38도까지 올랐다1. 강둑 서쪽으로 건너온 북한군 한 무리가 산줄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두만리 아래 국도가 꺾이는 곳에 기관총을 걸었다. 길 서쪽은 용수천으로 떨어지는 12미터 낭떠러지였고 동쪽은 가파른 산비탈이었다. 차가 비켜 갈 자리가 없었다. 탄약을 싣고 내려가던 지프가 맨 먼저 멈췄고, 그 뒤로 트럭들이 줄줄이 섰다.

멜로이가 그 자리에 닿았을 때 병사들은 도랑에 엎드려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띄엄띄엄 총을 쏘고 있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갈 사람들을 모으다 총에 맞았다2. 기관총 진지로 올라가던 오십 명은 몇백 걸음 만에 둘로 줄었다1. 아군 F-51 넉 대가 날아와 그 비탈을 쏘자 남은 사람들도 미끄러지듯 길로 내려왔다.

그 길 남쪽 끝에서 제19연대 G중대가 트럭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2.5톤 트럭 한 대가 미친 듯이 내려왔다. 앞 흙받기에 걸터앉은 헌병 장교가 소리쳤다.

“전차다, 전차!”

중대장 마이클 바르슈치 대위는 지프를 길 한가운데 가로로 세웠고, 중대원들은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몇 분이 지나도 전차는 오지 않았다. 도랑에서 고개를 든 병사 하나가 흙을 털며 말했다.

“전차는 저 헌병 혼자 봤나 봅니다.”

“그럼 저 양반이 우리보다 눈이 좋은 거지. 걸어서 간다.”

딘은 그날 오후 그 길 남쪽 끝에 서 있었다. 도로 차단을 뚫으러 가자는 명령에 경전차 두 대가 보병 없이는 모퉁이를 돌지 않겠다고 버텼다1. 포병 장교 하나가 딘에게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딘은 고맙지만 없다고 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저 전차병들한테 용기를 조금 나눠 줄 수 있다면 모를까.”

저녁 아홉 시, 길 북쪽에 갇힌 오백 명은 트럭 백 대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뒤 동쪽 산으로 올라갔다1. 산꼭대기에서 더 업고 갈 수 없게 된 중상자 서른 명 곁에 군종신부 허먼 펠회터(37) 대위가 남았다3. 그는 의무장교 린턴 버트리 대위에게 먼저 가라고 재촉했다. 버트리는 발목에 총을 맞고도 빠져나갔다. 멀리서 쌍안경을 든 하사관 하나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신부와 누운 부상병들에게 북한군 병사들이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1.

그날 강가에 있던 제19연대 장병 900명 가운데 이튿날 대전에서 대답한 사람은 434명이었다1.

*

7월 17일~18일, 대전.

인구 13만의 대전은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였다4.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리는 역 앞에는 피란 보따리가 쌓였고, 보름 넘게 정부가 머물던 충남도청(현 대전근현대사전시관)은 비어 가고 있었다.

대흥동(현 대전 중구 대흥동) 골목에서 물을 긷던 아낙 하나가 옆집 사람에게 목소리를 낮췄다.

“형무소에서 또 트럭이 나갔대유. 산내 쪽으로.”

옆집 사람은 대답하지 않고 두레박줄만 감았다. 6월 말부터 군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좌익에서 돌아선 사람들을 묶어 둔 보도연맹의 회원들을 트럭에 실어 대전 남동쪽 산내(현 대전 동구 산내동)의 골짜기 골령골(현 대전 동구 낭월동)로 데려가 쏘았다. 2010년 과거사를 조사하는 국가 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는 그 골짜기에서 죽은 사람을 적어도 1,800명으로 추정했고, 유족과 민간 조사는 7,000명까지 헤아린다5. 북한군이 오기 전에 대전 사람들은 이미 다른 공포 속에 있었다.

18일 정오 무렵,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61) 중장이 대전 비행장에 내렸다6. 그는 제1기병사단이 그날 아침부터 포항에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4.

“그 사단이 올라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틀이 필요하네.”

딘은 이튿날 대전을 비울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는 그 계획을 하루 미뤘다4. 대구로 돌아간 워커는 참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딘은 싸움꾼이야. 할 수만 있으면 한 치도 내주지 않을 사람이지.”

*

7월 20일 새벽, 대전 서쪽 끝, 유성(현 대전 유성구) 길과 논산 길이 만나는 삼거리.

제34연대장 찰스 뷰챔프 대령은 끊긴 전화가 답답해 지프를 몰고 직접 나섰다. 삼거리에서 어둠 속에 전차 한 대가 불쑥 나타났다. 전차 기관총이 불을 뿜는 순간 뷰챔프는 지프에서 뛰어내렸다. 총알 하나가 몸을 스쳤고 지프는 불탔다.

그는 몇백 미터를 기어서 돌아가다 공병 바주카조와 마주쳤다. 병사가 어깨에 멘 것은 길이 1.5미터에 무게 7킬로그램쯤 되는 알루미늄 관이었다. 난로 연통처럼 생긴 관이었다. 맥아더가 미국 본토에서 비행기로 실어 오게 한 이 새 3.5인치 바주카는 여드레 전에야 대전에 처음 닿았고, 병사들은 그날부터 쏘는 법을 배웠다4. 뷰챔프가 그들을 삼거리로 데려갔다.

“저거다. 옆구리를 노려.”

로켓이 철판을 뚫었다. 전차에서 불이 솟았고, 승무원들은 손을 들고 기어 나왔다. 3.5인치 바주카가 T-34를 잡은 첫 기록이 대전 서쪽 삼거리에서 나왔다4.

같은 시각, 갑천 동쪽 제34연대 제1대대 진지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새벽 세 시, 북한군 제4사단 제5연대가 전차를 앞세워 대대 오른쪽을 말아 올렸다7. 대대는 연대에 보고할 틈도 없이 남쪽 산으로 흩어졌다. 그 뒤 연대 무전기에는 1대대의 상태가 양호하다는 목소리가 들어왔다. 뒷날 미 육군 전사는 북한군이 빼앗은 대대 무전 지프로 거짓 보고를 보냈을 것이라고 적었다4.

*

20일 아침 다섯 시 반, 대전 시내, 제34연대 지휘소.

딘은 총소리에 잠을 깼다. 부관 클라크 중위가 침낭을 말다가 말했다.

“오늘 밤엔 여기서 못 잘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날 오전 대전 시내로 들어온 전차는 보병 없이 하나씩 다녔다. 갑판에 매달려 온 북한군 병사들이 건물 속으로 흩어져 저격을 시작했다. 전차 한 대가 의무중대 앞에서 지프 두 대를 쏘고, 길에 쓰러진 부상병 하나를 궤도로 깔고 지나갔다4. 수색중대의 잭 로 일병과 로버트 왓킨스 상병이 바주카를 메고 그 뒤를 쫓았다. 한 대는 대전역 앞에서 궤도가 벗겨진 채 멈췄다.

오후 두 시 무렵, 딘은 바주카를 멘 상병 하나와 탄약수, 소총수 두셋을 데리고 담과 울타리를 넘으며 전차 한 대를 한 시간 넘게 쫓았다4. 그들은 뒷마당으로 상가 건물에 들어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창가에서 내려다보니 전차가 바로 아래 서 있었다. 딘은 뒷날 포구가 열두 자 거리였고 침을 뱉으면 포신 안에 들어갈 것 같았다고 썼다4.

“쏴.”

첫 로켓이 들어가자 전차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두 번째에 비명이 잦아들었고, 세 번째에 조용해졌다. 클라크는 화염병을 쥐고 건물 모퉁이에 서 있다가 연기가 오르는 전차를 보았다. 그날 대전 군인들 사이에 사단장의 말이 돌았다. “전차 한 대 잡았지.”

*

20일 낮, 대전 남쪽, 금산(현 충남 금산군) 길.

북한군 제4사단 제16·18연대의 대열에는 전차도 포도 없었다. 병사들은 논산에서 남쪽으로 꺾어 산길을 탔다7. 소총과 박격포, 기관총을 메고 걸었다. 대열 앞의 분대장이 대전 쪽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가리켰다.

“시내는 3사단과 5연대가 두드린다. 우리는 뒷문을 닫는다.”

정오 무렵 그 대열이 금산 길로 내려섰다. 길 위쪽 덤불 속에는 이미 무너진 제34연대 제1대대장 해럴드 에어스 중령이 숨어 있었다. 함께 가던 『타임』 기자 윌슨 필더는 북한군과 마주친 그 비탈에서 사라졌고, 몇 달 뒤 주검으로 발견되었다4. 에어스는 대대 하나 규모의 북한군이 금산 길을 따라 대전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시내에 알릴 무전기는 없었다.

시내 지휘소로는 관측병의 전화가 들어왔다. 동쪽에서 큰 대열이 다가오는데 분명히 적이라고 했다. 뷰챔프는 옥천(현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 있던 제21연대가 철수로를 지키러 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4.

“아군이다. 쏘지 마라.”

오후 세 시쯤 뷰챔프도 지휘소에서 사라졌다. 그는 철수로를 살피러 동쪽으로 나갔다가 시내 동쪽 고개를 지키려 그 자리에 남았고, 다시 시내로 돌아오지 않았다4.

*

20일 오후 네 시 이십 분, 충북 이원역(현 옥천군 이원면).

대전운전사무소 기관사 김재현(27)이 증기기관차 미카 3-129호의 속도를 다루는 조절간을 당겼다8. 부기관사 현재영과 황남호가 불을 때는 화실에 석탄을 퍼 넣었다. 대전역에는 탄약을 실은 화차 열 량이 기관차 없이 서 있었다. 그 열차를 몰던 기관사들은 기관차만 떼어 남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딘이 사단에 기관차를 보내라고 전화했고, 이원역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올라가게 되었다9. 열차에는 미군 서른 명쯤이 탔다8.

세천(현 대전 동구 세천동) 터널 앞에서 총탄이 기관차를 때렸다. 물탱크에 구멍이 났다. 김재현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대전역으로 들어갔다. 역에서도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이 기관차로는 화차를 끌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앞뒤를 바꾸는 역진기를 뒤로 넣었다. 기관차는 뒷걸음으로 대전역을 빠져나갔다.

터널 앞에서 다시 총탄과 수류탄이 쏟아졌다. 김재현이 쓰러졌다. 현재영이 조절간을 넘겨받았다가 왼팔에 총을 맞았고, 황남호가 기관차를 몰아 옥천까지 내려갔다8. 대전역 화차 옆에서 기관차를 기다리던 사단 수송장교 레이먼드 해트필드 대위는 다음 기관차가 오기 전에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4.

*

20일 오후 다섯 시 오십오 분, 제34연대 지휘소 정문.

딘은 지프에 오르며 시계를 보았다. 부연대장 워들링턴 중령이 행렬 맨 앞에 섰다. 제3대대를 맡아 L중대로 지휘소 둘레를 지키던 잭 스미스 대위가 물었다.

“얼마나 버티면 됩니까?”

“사십오 분. 그리고 빠져나와.”

딘은 사단에 보낼 전문을 다시 써서 암호 없이 그대로 치게 했다4.

“기갑 부대를 보내라. 대전 동쪽 끝에 적의 도로 차단. 딘.”

여섯 시 몇 분, 행렬이 움직였다. 시내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저격병을 몰아내려고 쏜, 불붙는 백린을 채운 로켓에서 시작된 불이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들을 타고 번져 있었다. 연기가 길을 덮었고, 불타는 탄약 트레일러와 쓰러진 전봇대가 길을 막았다. 앞쪽 트럭 쉰 대는 철도 굴다리를 잘못 지나 막다른 학교 운동장에 갇혔다4. 남은 행렬은 양쪽에서 불길이 치솟는 거리를 지나 옥천 길로 빠졌다.

대전에서 동쪽으로 3킬로미터쯤, 세천 마을부터 터널까지 1.6킬로미터 길이 좁은 골짜기를 지났다. 그 양쪽 비탈에 북한군의 박격포와 기관총이 있었다. 맨 앞 차가 불타고, 그것을 밀어낸 반궤도 차량의 운전병이 전사했다. 논에서 일어선 북한군이 따발총으로 행렬을 훑었다. 사람들이 도랑에 몸을 던졌다. 오십 미터 사방에 이백오십 명이 엎드려 해가 지기만 기다렸다4.

공병 하사 조지 리비(31)는 타고 가던 트럭에서 혼자 살아남았다10. 그는 두 번이나 길을 건너가 부상병을 싸맸고, 지나가던 포병 견인차를 세워 부상병들을 실었다. 운전병은 하나뿐이었고, 그가 죽으면 아무도 그 차를 몰 수 없었다. 리비는 적이 있는 쪽, 운전병 옆자리에 올라앉아 총을 쏘았다. 견인차는 차단선을 두 번 지났고, 그때마다 리비가 총알을 받았다. 부상병을 실은 견인차는 아군 진지에 닿았다. 리비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졌다10.

*

20일 저녁, 대전 남쪽, 금산 길.

딘의 지프는 불타는 사거리를 너무 빨리 지났다. 클라크가 돌아보며 외쳤다.

“옥천 길을 지나쳤습니다!”

돌아설 수 없었다. 사거리마다 기관총이 길을 가로질렀다. 지프는 금산 길로 계속 내려갔다. 시내에서 1.6킬로미터쯤 가자 트럭 한 대가 도랑에 뒤집혀 있었고 부상병 몇이 그 안에 있었다. 딘은 차를 세우고 부상병들을 자기 지프 두 대에 옮겨 실은 뒤 손짓해 먼저 보냈다. 그는 뒤따라오던 포병 반궤도 차량에 매달렸다. 앞서 간 지프에서 클라크가 어깨에 총을 맞았다4. 다시 1.6킬로미터 앞, 부서진 트럭이 길을 막았고 기관총이 쏟아졌다.

그들은 도랑으로 굴러 콩밭과 채마밭을 기어 대전천 둑까지 갔다. 해가 질 때까지 둑 아래 엎드려 있었다. 어두워지자 냇물을 건너 낭월(현 대전 동구 낭월동) 마을 북쪽의 가파른 산을 올랐다4. 일행 가운데 크게 다친 병사 하나가 있었다. 딘과 다른 사람들이 번갈아 그를 부축해 끌어올렸다.

부상병이 물을 찾았다. 딘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려가서 물을 떠 오지.”

클라크가 팔을 붙들었다.

“안 됩니다, 장군님. 내려가면 못 올라오십니다.”

딘은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자정이 조금 지나 클라크가 앞장서 오르다 돌아보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되돌아가 보니 몇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잠들어 있었다. 클라크가 장군을 찾았다. 누군가 대답했다.

“물 뜨러 가셨습니다.”

클라크는 짐 없는 사람이 산 아래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데 한 시간쯤 걸리리라고 셈했다. 그는 두 시간을 기다렸다4. 새벽 세 시 십오 분, 그는 잠든 사람들을 깨웠다. 일행은 꼭대기에 올라 하루 내내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딘은 돌아오지 않았다.

*

7월 22일 정오, 영동(현 충북 영동군).

미 제24사단은 영동 앞 진지를 제1기병사단에 넘겼다. 19일과 20일 대전에 있던 3,933명 가운데 1,150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사라졌다. 사라진 사람이 874명이었다4. 마지막까지 시내를 지킨 L중대는 153명 가운데 107명을 잃었다4. 미 제8군은 존 처치 소장에게 사단을 맡겼다. 사단장은 실종자 명단에 올랐다.

그 이튿날인 7월 23일, 평양에서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이 나왔다. 대전 해방 전투에 참가한 인민군 부대들에게 보내는 명령이었다. 7월 20일 열두 시에 대전을 해방했고 이 싸움에서 미 제24사단을 섬멸했다고 했다. 공을 세운 부대로는 제4서울사단과 제105서울전차사단, 제4사단 제18연대를 꼽았다12. 명령에는 딘 소장의 이름이 없었다.

기록은 달랐다. 미 제24사단은 섬멸되지 않았다. 금강과 대전, 두 싸움을 합쳐 전사 819명, 부상 481명, 실종 480명을 냈고, 실종 가운데에는 포로가 된 사람이 들어 있었다. 모두 합쳐 1,780명쯤이었다13.

딘은 그날 밤 물을 찾아 내려가다 비탈에서 굴러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머리가 찢어지고 어깨뼈가 부러져 있었다. 그는 서른여섯 날을 산속에서 헤맸다11. 8월 25일, 길을 안내해 주겠다던 한국인 둘이 그를 진안(현 전북 진안군) 근처에서 북한군의 매복 속으로 이끌었다11. 86킬로그램이던 몸이 59킬로그램으로 줄어 있었다4. 그가 판문점을 지나 돌아온 것은 1953년 9월 4일이었다11.

딘이 북한에 살아 있다는 사실은 열여섯 달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1951년 12월 21일 오스트레일리아 기자 윌프레드 버쳇이 북한에서 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12월 24일 사진과 함께 그 소식이 세계에 실렸다14. 미 제8군이 딘을 실종자 명단에 올려 둔 지 한 해 반이 지난 뒤였다.

일곱 해 반이 지나 딘은 그날을 이렇게 돌아보았다4.

“나는 나무에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 숲을 보지 못했다. 금산 길로 접어들어 길가에 파고든 북한군을 만나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사료 출처

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0장 「Disaster at the Kum River Line」,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7월 14일 공주 아래 거룻배 두 척(척당 약 30명, 08~09시 30분 약 500명), 무전기·건전지·전화선 부족, 바터 소령이 사격을 보류함, 야크기가 연락기를 쫓음, L중대 11시 전 철수, 제63포병대대(13시 30분, 「먼저 쏘지 마라」, 교환대·의무반·무전 트럭 피격, 레이 상병과 무기 없는 15명, 105밀리 10문·차량 60~80대 상실, 장교 11·사병 125 실종, 드레슬러와 매콜의 유해), 딘의 16시 40분 전문, 15일 저녁 불타는 마을과 북한군 제3사단의 공습 피해·정치 일꾼의 약속(적 측 자료), 전차 11대 매설, 16일 03시 조명탄 신호와 멜로이의 비교, 조명탄 곡사포 착오와 윈스테드의 평가, 마허 중위(「We're doing fine」, 30초 뒤 전사), 가동리 반격과 쿡·해킷 전사, 화씨 100도, 두만리 아래 도로 차단(12미터 둑과 용수천), 멜로이 부상, 50명이 2명으로 줄어든 공격, 아군 F-51 오폭, 바르슈치 대위와 「Tanks, Tanks!」, 전차병에 대한 딘의 말, 약 500명·차량 약 100대 소각(21시), 펠회터 신부와 버트리, 900명 중 434명. 2. 영문 위키백과 「Guy S. Meloy Jr.」 — 1903.9.4생, 1950.7.16 중상. 3. 영문 위키백과 「Herman G. Felhoelter」 — 1913년생, 1950.7.16 두만리 위 산에서 전사, 부상병 약 30명. 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 육군 군사사센터(1961), 제11장 「Taejon」,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대전 인구 13만, 워커의 18일 방문과 이틀 요청, 워커의 말(「Dean is a fighter」), 20일 03시 제1대대 붕괴, 거짓 무전 추정, 뷰챔프와 삼거리 전차, 3.5인치 바주카(최초 확인 사용, 7월 8일 트래비스 출발·10일 도착·12일 첫 지급과 교육, 알루미늄·약 15파운드·5피트 연통 모양), 05시 30분 클라크의 말, 의무중대 앞 전차, 로·왓킨스, 14시 딘의 전차 사냥(12피트, 침, 클라크의 증언, 「I got me a tank」), 대전 시내 전차 격파 수, 백린 로켓에서 번진 불, 에어스와 필더, 관측병 전화와 뷰챔프의 착오, 뷰챔프 실종 경위, 이원발 기관차(16시 20분 출발, 터널 앞 피격, 기관사 전사, 화부가 옥천까지), 해트필드 전사, 17시 55분 출발, 45분 엄호, 「Send armor」 평문 전문, 학교 운동장 막다른 길(차량 약 50대), 세천 부근 차단(대전 동쪽 약 3킬로미터, 터널까지 1.6킬로미터), 250명, 리비, 딘의 금산 길(부상병을 지프에 태움, 클라크 부상, 콩밭, 대전천, 낭월 북쪽 산, 물, 03시 15분), 3,933명 중 1,150명(전사 48·부상 228·실종 874), L중대 153명 중 107명, 7월 22일 처치 소장, 딘의 회고 인용. 5. 최규화, 「흰 단추」, 주간경향(2022.7.22), weekly.khan.co.kr/article/202207221116081 — 산내 골령골, 1기 진실화해위원회(2010) 최소 1,800명 추정, 민간 추산 최대 7,000명, 경찰·헌병대. 본문의 「6월 말부터」는 「1950년 6월 28일부터 군인과 경찰이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을 집단 학살했다」는 보도(희생 4,000~7,000여 명 추정)를 검색 요약으로만 확인해 날짜를 뭉뚱그린 것이다. 원문 기사는 열어 보지 못했다. 6. 영문 위키백과 「Walton Walker」 — 1889.12.3생. 7. 박동찬, 「대전지구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2023.10.19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14745 — 제34연대 갑천 동쪽 배치, 제21연대 옥천, 7월 16일 제3사단 대평리 점령, 제4사단 15일 논산 점령·1개 연대 금산 방향 우회, 20일 03시 공격, 제34연대 제1대대·제19연대 제2대대의 보문산 철수, 3.5인치 로켓포 8대·야포 2대 격파, 15시경 철수 명령, 세천터널 매복, 진안에서 포로, 인명피해 전사 465·부상 325·포로 175·실종 130. 8. 대전일보 이다온 기자, 「[한국전쟁 정전 70년] 대전전투의 영웅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미래」, 전북일보 공동 게재(2023.11.20), jjan.kr/articleAmp/20231120580205 — 김재현(1923~1950, 논산 출신), 미카 3-129호, 미군 30여 명, 8발 총상, 현재영 왼팔 부상, 황남호 탈출. 9. 박승기 기자, 「한국전쟁 숨겨진 ‘철도 영웅들’」, 서울신문(2015.9.18), m.go.seoul.co.kr/news/2015/09/18/20150918029026 — 김재현·현재영·황남호의 대전운전사무소 소속, 이원역 출발, 대전역 동광장 동상. 10. 영문 위키백과 「George D. Libby」 — 1919.12.4생, 제3공병대대 C중대, 1950.7.20, 명예훈장. 11. 영문 위키백과 「William F. Dean」 — 1899.8.1생, 36일, 8월 25일 진안 매복, 1953.9.4 귀환. 12. 김일성, 「대전 해방 전투에 참가한 인민군 부대들에게」(최고사령관 명령, 1950.7.23), 『Kim Il Sung Works』 vol. 6, 37~38쪽(1981) — 7월 20일 12시 대전 해방과 「미 제24사단 섬멸」 주장, 제4서울사단·제105서울전차사단·제4사단 제18연대 표창. 북한의 주장이다. 13.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Taejon」(Ecker, 『Korean War Chronology』 인용) — 미 제24사단의 금강·대전 두 전투 손실(전사 819, 부상 481, 실종 480, 포로 포함). 4번 출처의 대전 19~20일 손실 집계와 범위가 다르다. 1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1961), 177쪽; 영문 위키백과 「William F. Dean」; UPI 1981.8.25 딘 부고(upi.com/Archives/1981/08/25/) — 1951.12.21 윌프레드 버쳇(프랑스 공산계 신문 『스 수아르』)의 딘 인터뷰와 12.24 보도. 1950년 당시 북한이 딘의 생포를 발표했다는 원문은 찾지 못했다. 딘이 포로가 된 날은 Appleman 8월 25일, UPI 8월 20일로 갈린다. 15.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4호(S/RES/84, 1950.7.7), 유엔 디지털 도서관(digitallibrary.un.org) — 회원국이 보내는 병력을 미국 지휘 아래의 통합사령부에 두고 사령관을 지명하라는 권고; 트루먼의 맥아더 지명(7.8)과 도쿄 유엔군 사령부 개설(7.24)은 미 국방부·유엔사령부 연표. 정확한 날짜는 원자료로 확인이 더 필요하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딘 1899년생, 멜로이 1903년생, 펠회터 1913년생, 리비 1919년생, 워커 1889년생, 김재현 1923년생(위 각 근거). 바터, 레이, 드레슬러, 매콜, 윈스테드, 맥길, 마허, 쿡, 해킷, 바르슈치, 버트리, 뷰챔프, 클라크, 로, 왓킨스, 에어스, 필더, 해트필드, 워들링턴, 잭 스미스, 현재영, 황남호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기관차 날짜 — 국내 보도는 김재현의 운행을 7월 19일로(서울신문 2015), 또는 날짜 없이 대전전투 중으로 적고, Appleman은 이원발 기관차가 7월 20일 16시 20분에 떠났다고 적었다. 목적도 국내 보도는 「딘 소장 구출과 군수물자 수송」, Appleman은 탄약 화차 열 량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적었다. Appleman은 기관사를 이름 없이 「한국인 기관사」로 적었고 터널 앞에서 기관사가 죽고 부상한 화부가 옥천까지 몰았다고 했다. 이 기관차를 김재현의 기관차로 본 것은 두 기록의 경위(이원역 출발, 기관사 전사, 부상한 동료가 끝까지 운전)가 같아서이고, 본문은 Appleman의 시각을 따랐다. 미군 인원(30여 명·33명 순직)은 국내 보도의 수다. [자료 충돌] 피해 — Appleman 3,933명 중 1,150명(전사 48·부상 228·실종 874), 백과사전 전사 465·부상 325·포로 175·실종 130(실종자 가운데 뒤에 전사가 확인된 수를 반영한 집계로 보인다). 본문은 Appleman의 수를 적었다. [자료 충돌] 딘의 전차 격파 — Appleman과 클라크의 증언은 바주카 로켓 세 발, 명예훈장 공적서는 「수류탄 한 발만 들고 혼자 전차를 공격했다」.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몸무게 — Appleman 190파운드에서 130파운드, 영문 위키백과 210파운드에서 130파운드. 본문은 Appleman(86킬로그램→59킬로그램)을 따랐다. [자료 충돌] 철수 명령 시각 — Appleman 14시 무렵 낮 철수 지시·15시 무렵 각 부대 수령·18시 몇 분 본대 출발, 백과사전 15시경 철수 명령·딘 16시경 철수. 본문은 Appleman을 따랐다. [재구성] 모든 대화의 문장(감시병·관측장교·바터, 북한군 정치 일꾼과 병사의 문답, 바르슈치 중대원의 농담, 뷰챔프의 사격 지시, 금산 길 북한군 분대장의 말, 딘과 스미스의 문답, 딘과 클라크가 산에서 나눈 말), 대흥동 아낙 두 사람과 그 대화, 레이가 도랑에서 손을 보는 몸짓, 북한군 제16·18연대 병사의 시점, 김재현이 역진기를 넣는 판단과 세 기관사의 손놀림, 리비가 「적이 있는 쪽」에 앉는 모습의 세부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Appleman의 기록은 클라크가 딘이 물 뜨러 내려가려는 것을 한 번 말렸다는 것까지이고, 실제로 내려간 것은 클라크가 앞장선 사이였다. 「저 전차병들한테 용기를…」, 「오늘 밤엔 여기서 못 잘 것 같습니다」, 「딘은 싸움꾼이야」, 「잘 버티고 있습니다」, 「기갑 부대를 보내라」, 딘의 회고는 기록에 남은 영어 원문을 의역했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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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 — 사단장이 사라진 날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