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37자)

획 하나

왕의 고양이 · 강여울

톱날이 뿌리를 켜는 소리는 날이 희붐해질 때까지 이어졌다⁠. 늙은 내관이 톱을 당기고 왕이 뿌리를 붙들었다⁠. 생나무 진 냄새가 은행 열매 냄새를 덮었다⁠. 금손은 구덩이 가장자리에 앉아 톱밥이 수염에 붙는 것을 앞발로 털었다⁠. 뿌리가 끊어지자 쇠 함이 흙에서 들렸다⁠. 쇠 함 밑바닥에 서른 해 동안 눌린 흙 자국이 네모나게 남았다⁠.

침전 서안 위에서 뚜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녹이 뚜껑과 몸통을 한 덩어리로 붙여 놓았다⁠. 내관이 끌을 대고 망치로 두드렸다⁠. 세 번째에 뚜껑이 떨어졌다⁠. 안에서 기름 먹인 종이 꾸러미가 나왔다⁠. 기름종이는 누렇게 굳어 있었고⁠, 펴자 안쪽 종이가 마른 잎처럼 바스락거렸다⁠. 오래된 먹 냄새가 피어올랐다⁠. 먹 냄새 밑에 아주 옅게 곶감 냄새가 남아 있었다⁠. 편지와 함께 넣어 둔 곶감 꼭지 하나가 돌처럼 말라 있었다⁠.

“⁠편지이옵니다⁠. 열두 통이옵니다⁠. 다 같은 손이옵니다⁠.⁠”

내관이 한 통을 펴서 읽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딸아⁠, 고을에 감이 익었다⁠. 네가 좋아하는 곶감을 한 꾸러미 보낸다⁠. 오라비들에게 다 빼앗기지 말고 막내와 나누어 먹어라⁠. 전하의 은혜로 고을 백성들이 올해는 굶지 않는다⁠…⁠.⁠”

“⁠막내와 나누어 먹어라⁠…⁠.⁠”

왕이 편지를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한 글자 위에서 멈추었다⁠. 오래 멈추었다⁠. 금손은 서안 모서리에서 왕의 손가락 끝을 맡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의금부에서 서른 해 전 국문 기록과 역모 편지를 가져오너라⁠. 그리고 사약을 멈춰라⁠. 죄인을 이 뜰로 데려와라⁠. 내가 직접 묻겠다⁠.⁠”

*

금손은 궐문 지붕에서 해 뜨는 것을 기다렸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전에 말발굽 소리가 궐문 밖 길을 달려 나갔다⁠. 늙은 내관이 보낸 사람이었다⁠. 한참 뒤 말발굽 소리가 돌아왔고⁠, 말발굽 뒤로 사람들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횃불 냄새와 짚 냄새와 쑥물 냄새⁠.

궐문이 열렸다⁠. 관원들 사이에 연옥이 있었다⁠. 연옥은 궐문을 지나며 고개를 들었다⁠. 지붕 위의 누런 고양이를 보았다⁠. 해가 막 궐문 기와 끝을 넘어와 금손의 등을 비추었다⁠. 주황 털의 옅은 줄무늬가 볕에 드러났다⁠. 연옥은 오래 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관원 하나가 연옥의 팔을 잡은 채 다른 관원에게 투덜거렸다⁠.

“⁠사약 사발을 들이기 직전이었소⁠. 반 각만 늦었어도⁠.⁠”

금손은 각이 무엇인지 몰랐다⁠. 관원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솟는 냄새는 알았다⁠.

*

임금이 죄인을 직접 묻는 친국은 대전 뜰에서 열렸다⁠. 해가 대전 지붕 위로 올라오자 뜰의 박석에 서리가 녹아 물기가 번졌다⁠. 월대 위에 왕의 자리가 놓였다⁠. 금손은 왕의 자리 옆 돌난간 위에 앉았다⁠. 내려다보면 뜰이 다 보였다⁠.

대감이 계단 아래 오른편에 섰다⁠. 젊은 대신들이 왼편에 늘어섰다⁠. 의금부 관원들 사이로 연옥이 끌려 들어왔다⁠. 두 손이 앞으로 묶여 있었다⁠. 초록 저고리는 의금부 옥 바닥의 짚 냄새를 묻히고 있었다⁠. 자줏빛 치마 끝이 젖어 있었다⁠. 연옥은 뜰 한가운데 꿇어앉혀졌다⁠. 나인이 곳간에서 끌려 나와 뜰 한쪽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를 펴고 앉지 못해 한쪽으로 기울었다⁠. 월대 뒤에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발 너머에서 분과 먹 냄새가 났다⁠.

왕이 쇠 함을 뜰로 내려보냈다⁠. 내관이 연옥 앞에 쇠 함을 놓고 편지 꾸러미를 펼쳤다⁠.

연옥은 편지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묶인 손이 떨렸다⁠. 처음으로 연옥의 숨이 고르지 않았다⁠.

“⁠누가 팠사옵니까⁠?⁠”

“⁠내 고양이다⁠.⁠”

연옥이 돌난간 위의 금손을 올려다보았다⁠. 금손은 꼬리를 높이 세우고 있었다⁠.

“⁠꺼내지 않으려 했사옵니다⁠. 열한 살에 관비로 궁에 들어오던 날 품에 숨겨 온 것이옵니다⁠. 아비 글씨를 이 궁 사람들 손에 다시 넘기기 싫었사옵니다⁠. 서른 해 전에도 아비 글씨가 이 뜰에서 칼이 되었사옵니다⁠. 역적의 딸이 아비 편지를 내밀면 그 편지도 칼이 되리라 여겼사옵니다⁠.⁠”

“⁠이 편지들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

연옥이 고개를 들었다⁠. 숨이 다시 고르게 돌아왔다⁠.

“⁠아비는 선왕의 이름 글자를 쓸 때마다 획 하나를 뺐사옵니다⁠. 신하가 임금 이름자를 온전히 쓰지 않는 것은 예법이옵니다⁠. 공문에서는 누구나 그리하옵니다⁠. 아비는 어린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리했사옵니다⁠. 전하께서 손가락을 멈추신 그 글자를 보소서⁠.⁠”

관원이 의금부에서 가져온 역모 편지를 펼쳐 들었다⁠. 서른 해 전 이 뜰에서 칼이 되었던 종이였다⁠. 내관이 두 편지를 나란히 왕 앞에 올렸다⁠. 왕은 오래 내려다보았다⁠.

“⁠역모 편지에는 획이 다 있다⁠.⁠”

왕이 뜰 한쪽의 나인을 내려다보았다⁠.

“⁠수라간 나인⁠. 제조상궁이 그믐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아느냐⁠?⁠”

나인이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려다 손을 짚었다⁠.

“⁠소인이 수라간에 든 뒤로 일곱 해 동안⁠, 그믐 밤마다 마마님께서 사기 사발 하나를 품에 넣고 나가셨사옵니다⁠. 늦게 돌아오시면 치맛자락에 은행 냄새가 배어 있었사옵니다⁠. 소인은 마마님께서 은행을 싫어하시는 줄로만 알았사옵니다⁠. 늘 코를 찡그리시면서도 그믐이면 가셨사옵니다⁠.⁠”

“⁠늙은 상궁들 가운데 같은 것을 본 사람이 있느냐⁠?⁠”

월대 아래 늙은 상궁 하나가 엎드리며 말했다⁠.

“⁠소인이 침방에 있을 적에 보았사옵니다⁠. 스무 해도 넘었사옵니다⁠. 제조상궁이 어린 궁녀일 때부터 그믐이면 은행나무 밑에 물을 떠다 놓았사옵니다⁠. 소인들은 죽은 동무를 기리는 줄 알았사옵니다⁠.⁠”

연옥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묶인 손이 쇠 함 모서리를 만지고 있었다⁠. 녹이 손끝에 묻어났다⁠.

*

대감이 앞으로 나왔다⁠. 진피를 씹지 않았다⁠.

“⁠전하⁠, 역심을 품은 자가 임금 이름자를 공경할 까닭이 있겠사옵니까⁠? 획을 다 쓴 것이 오히려 그 편지가 역적의 진짜 마음이라는 증좌이옵니다⁠. 그리고 저 편지들은 역적의 딸이 서른 해 동안 궁에 살며 아비 글씨를 흉내 내어 만들어 묻었을 수도 있사옵니다⁠.⁠”

“⁠은행나무 뿌리가 손목 굵기로 쇠 함을 감고 있었소⁠. 서른 해를 자란 뿌리였소⁠. 내가 손으로 톱질했소⁠.⁠”

“⁠짐승이 판 구덩이에서 나온 것을⁠…⁠.⁠”

“⁠경은 내 고양이를 요물이라 했소⁠. 요물이 서른 해 묵은 뿌리를 기르오⁠?⁠”

뒷줄에서 웃음이 새었다가 금방 삼켜졌다⁠. 대감의 목덜미에서 처음으로 시큼한 땀이 올라왔다⁠.

젊은 대신 하나가 줄에서 한 걸음 나왔다⁠. 편전 문밖에 엎드려 관복에 조기 국물을 맞았던 대신이었다⁠.

“⁠전하⁠, 역모 편지를 쓴 손이 따로 있었다면 그 손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옵니다⁠. 서른 해 전 국문 기록에 그 편지를 처음 찾아냈다는 사람의 이름이 있을 것이옵니다⁠.⁠”

관원이 국문 기록을 넘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뜰에 길게 났다⁠. 관원이 한 줄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대감을 보았다⁠. 대감은 관원을 보지 않았다⁠.

연옥이 묶인 손을 들어 편지 꾸러미 맨 아래를 가리켰다⁠.

“⁠맨 아래 편지를 보소서⁠. 날짜가 있사옵니다⁠.⁠”

내관이 맨 아래 편지를 펼쳤다⁠. 다른 편지보다 종이가 거칠었다⁠. 급히 쓴 글씨였다⁠.

“⁠역모 편지가 쓰였다는 날로부터 열이틀 뒤⁠, 포졸들이 들이닥치기 이틀 전에 쓴 편지이옵니다⁠. 외직 고을에서 집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이옵니다⁠. 역모를 꾸미는 사람이 열한 살 딸에게 곶감 이야기를 쓰면서 임금 이름자 획을 빼겠사옵니까⁠? 남에게 보이는 글은 꾸밀 수 있사옵니다⁠. 딸에게 쓰는 글은 손이 쓰옵니다⁠. 손은 마음보다 오래가옵니다⁠. 서른 해 수라상을 차린 소인의 손이 꿈에서도 상을 차리듯이⁠.⁠”

왕이 마지막 편지를 받아 들었다⁠. 같은 글자를 찾았다⁠. 손가락이 멈추었다⁠. 획이 하나 빠져 있었다⁠.

*

뜰이 조용한 동안 금손은 돌난간에서 내려왔다⁠. 왕 앞 서안 위에 두 편지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하나는 바스락거리는 오래된 종이였고⁠, 하나는 의금부 창고 냄새가 나는 두꺼운 종이였다⁠. 금손은 두꺼운 종이 위에 올라가 앉았다⁠. 상소 더미 위에 앉을 때처럼 앞발로 두어 번 누르고 몸을 말았다⁠.

관원이 손을 뻗다가 멈추었다⁠.

“⁠전하⁠, 고양이가 증좌를⁠…⁠.⁠”

“⁠두어라⁠. 그 편지는 이제 깔고 앉아도 된다⁠.⁠”

젊은 대신 하나가 소매로 입을 가렸다⁠. 대감은 웃지 않았다⁠.

*

발이 걷혔다⁠.

중전이 월대로 나왔다⁠. 상궁들이 말렸지만 중전은 발을 걷고 계단 끝까지 걸어 나왔다⁠. 손가락이 먹으로 새까맸다⁠. 대감이 딸을 올려다보았다⁠.

“⁠중전⁠, 들어가소서⁠. 여기는 친국 자리이옵니다⁠.⁠”

“⁠전하⁠, 소첩이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중전은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왕을 보았다⁠.

“⁠어젯밤 소첩의 방에서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사옵니다⁠. 서른 해 전 그 집안의 일은 아버님이 하셨다고⁠. 글씨 잘 쓰는 서리를 두어 그 집 주인의 글씨를 석 달 동안 흉내 내게 했다고⁠. 서리는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고⁠. 소첩이 들었사옵니다⁠.⁠”

뜰이 술렁였다⁠. 대감이 한 걸음 계단으로 다가갔다⁠.

“⁠중전⁠, 아비를 베시겠사옵니까⁠?⁠”

“⁠아버님께서 베신 집의 딸이 저 뜰에 꿇어앉아 있사옵니다⁠. 소첩이 저 자리에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사옵니다⁠. 아버님이 먼저 베지 않으셨으면 그 집 주인이 아버님을 베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그 집에는 어린아이들이 있었사옵니다⁠.⁠”

대감이 오래 딸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수염이 흔들리지 않았다⁠. 대감은 무릎을 꿇었다⁠. 계단 아래 박석 위에⁠.

“⁠전하⁠.⁠”

대감의 목소리는 무겁고 느렸다⁠. 끝까지 무거웠다⁠.

“⁠신 하나를 베소서⁠. 서른 해 전 일은 신이 했사옵니다⁠. 허나 선왕의 국문은 덮으소서⁠. 선왕께서 틀리셨다 하시면 이 조정에 선왕의 손으로 자리를 얻은 자가 절반이옵니다⁠. 저기 서 있는 젊은 대신들의 아비들도 그 국문으로 벼슬을 얻었사옵니다⁠. 신을 베시고 일을 끝내소서⁠. 그래야 내일도 조정이 서 있사옵니다⁠.⁠”

젊은 대신들의 줄이 흔들렸다⁠. 서로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도 있었다⁠. 엿새 동안 중전을 폐하라고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었다⁠.

연옥이 묶인 손을 박석에 짚었다⁠.

“⁠전하⁠, 소인의 목은 드리겠사옵니다⁠. 중전마마를 모함한 죄는 소인이 지었사옵니다⁠. 다만 아비의 이름만 돌려주소서⁠. 서른 해 동안 소인은 아비 이름을 버리고 살았사옵니다⁠. 죽을 때는 아비의 딸로 죽고 싶사옵니다⁠.⁠”

뜰의 두 사람이 각자 제 목을 내놓았다⁠. 한 사람은 제 목으로 서른 해 전 일을 덮으려 했고⁠, 한 사람은 제 목으로 서른 해 전 일을 열려 했다⁠. 금손은 두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늙은 수고양이의 냄새는 시큼했고⁠, 여우의 냄새는 조용했다⁠. 둘 다 오래 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 냄새였다⁠.

왕이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내일 아침 편전에서 정하겠다⁠. 그때까지 죄인 연옥은 대전 뜰 행각에 두고⁠, 대감은 집으로 가지 말고 궐 안에 머무시오⁠.⁠”

*

관원들이 연옥을 일으키려 다가갔다⁠. 금손은 역모 편지 위에서 일어났다⁠. 서안에서 뛰어내려 월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일곱⁠, 박석 위로 서른 걸음⁠. 대신들이 길을 비켰다⁠. 관원들이 손을 멈추었다⁠.

금손은 꼬리를 높이 세우고 연옥 앞에 멈추었다⁠. 연옥의 묶인 손에 뺨을 문질렀다⁠. 한쪽 뺨⁠, 다른 쪽 뺨⁠. 손등에 냄새를 남겼다⁠. 같은 무리에게 하는 일이었다⁠.

연옥이 묶인 손을 오므렸다⁠. 금손의 턱 밑을 손가락 하나로 긁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금손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뜰의 사람들은 아무도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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