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86자)

그믐

왕의 고양이 · 강여울

낮에 금손은 빈 곳간 바람구멍에 엎드려 있었다⁠. 문 앞을 지키는 내관이 다른 내관과 주고받는 말이 벽을 타고 올라왔다⁠. 내일 그믐 새벽⁠, 해 뜨기 전⁠, 의금부⁠. 사약이라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곳간 안에서 짚을 움켜쥐는 소리가 났다⁠.

“⁠금손아⁠.⁠”

나인이 바람구멍 밑으로 기어 왔다⁠. 다리를 끌었다⁠. 매 맞은 자리에서 쑥 찜질 냄새가 났다⁠. 연옥이 일러 준 대로 다리를 펴고 맞은 다리였다⁠.

“⁠마마님이 내일 돌아가신대⁠. 나 때문에⁠.⁠”

나인은 주먹밥을 떼어 바람구멍으로 밀어 올렸다⁠. 금손은 받아먹었다⁠. 나인은 자기 몫을 먹지 않았다⁠.

“⁠마마님은 그믐마다 사기 사발 하나를 품에 넣고 어디를 다녀오셨어⁠. 밤늦게⁠. 물어보면 바람 쐬러 간다고만 하셨어⁠. 서른 해 동안 바람을 쐬셨나 봐⁠.⁠”

나인이 바람구멍 턱에 이마를 댔다⁠. 금손은 나인의 이마에 코를 대었다⁠. 짠 냄새가 났다⁠.

“⁠너는 파는 거 하나는 잘하잖아⁠. 땅을 파든 뭘 파든⁠. 마마님 묻은 거 다 파내더니⁠.⁠”

나인이 웃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

그믐 전날 밤에는 달이 뜨지 않았다⁠. 궁궐 지붕들이 하늘과 같은 빛이 되어 어디까지가 기와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사람 눈으로는 가를 수 없었다⁠. 금손의 눈에는 다 보였다⁠. 용마루마다 앉은 잡상의 등⁠,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기와골에 고인 낙엽⁠. 수염 끝으로 바람이 지나갔다⁠. 서리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침전에서 왕은 누워 있지 않았다⁠.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서안에는 아무것도 펼쳐져 있지 않았다⁠. 이틀 전 붓을 댄 종이는 의금부로 갔다⁠. 왕은 빈 서안을 내려다보며 기침을 했다⁠. 금손은 왕의 무릎에서 내려가 문 앞으로 갔다⁠. 꼬리를 높이 세우고 돌아보았다⁠.

“⁠또 가자는 게냐⁠.⁠”

왕이 일어났다⁠. 늙은 내관이 등롱을 들고 따라 나오다가 왕의 발을 보았다⁠.

“⁠전하⁠, 버선만 신으시고⁠…⁠. 서리가 내렸사옵니다⁠.⁠”

“⁠금손도 맨발이다⁠.⁠”

금손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왕이 따라왔다⁠. 내관이 등롱을 낮게 들고 헐떡이며 따라왔다⁠. 잠 못 드는 밤마다 왕이 혼자 걷던 길이었고⁠, 흉물을 물어 온 새벽에 등롱을 들고 걸었던 길이었다⁠. 수라간 뒤를 지나 중궁전 뒷담 문까지⁠.

중궁전 뒷담 문 앞에 사람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마에 붉은 줄 두 개가 아물어 가는 젊은 내관이었다⁠. 대감 집 사랑채의 향 냄새가 났다⁠. 젊은 내관은 고양이를 먼저 보았고⁠, 고양이 뒤의 버선발을 보았고⁠, 버선발 위의 곤룡포를 보았다⁠. 무릎이 먼저 땅에 닿았다⁠.

“⁠저⁠, 전하⁠…⁠.⁠”

“⁠누구를 기다리느냐⁠?⁠”

젊은 내관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금손은 젊은 내관 앞으로 가서 이마의 붉은 줄에 코를 대었다⁠. 겁먹은 땀 냄새가 났다⁠. 장작더미 뒤에서 맡던 냄새보다 진했다⁠. 젊은 내관이 뒤로 넘어질 듯 몸을 젖혔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소리 내지 말고 여기 있거라⁠. 네가 기다리는 분이 나오실 때까지⁠.⁠”

왕이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금손이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말 가운데 하나가 손가락이 되어 나왔다⁠. 쉿⁠.

중궁전 마당에 불빛이 있었다⁠. 중전의 방에 등잔이 켜져 있었고 창호지에 그림자 둘이 비쳤다⁠. 진피 냄새가 마당까지 나와 있었다⁠. 금손은 툇마루 밑으로 들어갔다⁠. 왕이 툇마루 기둥 뒤에 멈추었다⁠. 내관이 등롱을 넓은 소매로 덮었다⁠.

*

“⁠밤에 아비를 부른 까닭이 무엇이냐⁠.⁠”

대감의 목소리였다⁠. 마루 널 틈으로 떨어졌다⁠. 금손은 툇마루 밑 마른 흙에 배를 붙이고 귀를 세웠다⁠.

“⁠아버님께 여쭐 것이 있어 젊은 내관을 보냈사옵니다⁠.⁠”

“⁠근신이 풀린 지 사흘이다⁠. 전하께서 너를 다시 보신다⁠. 지금은 몸을 낮출 때다⁠.⁠”

“⁠서른 해 전 제조상궁의 집안 일을 아버님이 하셨사옵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피 씹는 소리가 멈추었다⁠.

“⁠네가 알 일이 아니다⁠.⁠”

“⁠제조상궁이 소첩을 죽이려 한 까닭이 아버님이라면 소첩은 알아야 하옵니다⁠. 소첩은 사흘 동안 이 방에 갇혀 먹만 갈았사옵니다⁠. 먹을 갈며 유모가 들려준 새벽을 떠올렸사옵니다⁠. 소첩이 태어나기 전 해⁠, 아버님이 흰 도포에 피를 묻히고 사랑채로 들어오셨다는 새벽을⁠.⁠”

“⁠…⁠.⁠”

“⁠그 피는 누구의 피였사옵니까⁠?⁠”

대감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루 널이 삐걱였다⁠. 대감이 자리를 고쳐 앉는 소리였다⁠.

“⁠그 집 주인이 먼저 나를 탄핵하려 했다⁠. 선왕 앞에 올릴 글을 다 써 두었다⁠. 그 글이 올라갔으면 우리 집이 몰살당했다⁠. 너도⁠, 네 어미도⁠, 네 오라비도⁠. 나는 먼저 베었다⁠. 편지 한 장으로⁠.⁠”

“⁠편지를 아버님이 쓰셨사옵니까⁠?⁠”

“⁠글씨 잘 쓰는 서리를 하나 두었다⁠. 그 집 주인의 글씨를 석 달 동안 흉내 내게 했다⁠. 서리는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방 안에서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먹이 구르는 소리였다⁠.

“⁠그 피 위에서 너는 중전이 되었다⁠. 우리 집이 살아남았기에 네가 이 방에 앉아 있는 것이다⁠. 조정은 그런 피를 하나하나 따지지 않는다⁠.⁠”

“⁠그 피에 어린아이의 피도 있었사옵니까⁠?⁠”

대감은 대답하지 않았다⁠. 금손은 툇마루 밑에서 기둥 쪽으로 기어갔다⁠. 기둥 뒤의 왕에게서 차가운 땀 냄새가 났다⁠. 왕의 버선발이 금손의 코앞에 있었다⁠. 버선발이 서리 내린 흙을 꾹 눌렀다⁠.

*

왕이 문을 열었다⁠.

방 안의 등잔불이 흔들렸다⁠. 대감이 돌아보았고⁠, 중전이 일어났다⁠. 중전의 치마 앞자락에 먹물이 튀어 있었다⁠. 금손은 툇마루로 올라가 문턱에 앉았다⁠.

대감은 오래 왕을 올려다보았다⁠. 놀란 사람의 숨이 아니었다⁠. 대감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하얀 수염이 가슴께에서 멈추었다⁠.

“⁠들으셨사옵니까⁠, 전하⁠.⁠”

“⁠들었소⁠.⁠”

“⁠들으신 대로이옵니다⁠. 신이 했사옵니다⁠.⁠”

대감은 숨기지 않았다⁠. 숨기지 않는 사람의 목덜미는 조용했다⁠. 금손은 대감의 냄새가 연옥과 닮아 있는 것을 맡았다⁠. 오래 들고 다닌 것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의 냄새였다⁠.

“⁠허나 전하⁠, 들으신 것은 증좌가 아니옵니다⁠. 밤중에 딸과 나눈 말이옵니다⁠. 선왕께서 국문하여 정하신 일을 아비가 딸에게 한 말로 뒤집으시겠사옵니까⁠? 그 일을 뒤집으시면 선왕께서 죄 없는 사람을 베신 것이 되고⁠, 그 국문 뒤로 자리를 얻은 조정의 절반이 무너지옵니다⁠. 북쪽 고을이 굶고 있고 국경 너머에 오랑캐 기병이 어른거리옵니다⁠. 지금 조정을 무너뜨리시겠사옵니까⁠?⁠”

“⁠경이 무너뜨린 집은 어찌하오⁠?⁠”

“⁠이미 무너진 집이옵니다⁠. 서른 해 전에⁠.⁠”

대감이 고개를 들었다⁠.

“⁠내일 새벽 제조상궁에게 사약이 내려가옵니다⁠. 그 뒤로 서른 해 전 일을 아는 사람은 신 하나뿐이옵니다⁠. 신은 입을 열지 않겠사옵니다⁠. 서른 해 묻힌 증좌가 하룻밤 사이에 나오겠사옵니까⁠?⁠”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중전이 바닥의 먹을 주워 들었다⁠. 손가락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중전은 먹을 쥔 채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님⁠, 물러가소서⁠.⁠”

대감이 일어났다⁠. 왕에게 절하고 문을 나갔다⁠. 금손 옆을 지나갔다⁠. 수염이 금손의 귀 위에서 흔들렸다⁠. 금손은 앞발을 들지 않았다⁠.

중전이 먹을 내려놓고 왕 앞에 엎드렸다⁠. 먹 묻은 손가락이 방바닥에 검은 자국을 남겼다⁠.

“⁠전하⁠, 소첩을 폐하소서⁠. 아비가 벤 집의 피 위에 놓인 자리이옵니다⁠. 제조상궁이 감나무 밑에 묻은 것은 흉물이었으나⁠, 소첩이 깔고 앉은 것은 사람이었사옵니다⁠.⁠”

“⁠지금은 아니오⁠.⁠”

“⁠그럼 언제이옵니까⁠?⁠”

“⁠중전이 무엇을 깔고 앉았는지 조정이 다 안 다음에⁠. 그때 다시 말하시오⁠. 그때도 같은 말을 하시면 듣겠소⁠.⁠”

중전은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금손은 문턱에서 일어나 중전의 손가락 끝을 맡았다⁠. 먹 냄새 밑에 짠 냄새가 있었다⁠. 금손은 혀끝으로 손가락을 한 번 핥았다⁠. 쓴맛이 났다⁠. 중전이 고개를 들지 않고 손가락을 오므렸다⁠.

*

왕은 중궁전 마당에 오래 서 있었다⁠. 중전이 방 안에서 등잔을 껐다⁠. 금손은 툇마루에서 내려와 뒷담 문으로 걸었다⁠. 꼬리를 세우고 돌아보았다⁠. 왕이 따라왔다⁠.

금손은 수라간으로 가지 않았다⁠. 침방 뒤로 꺾었다⁠. 그믐이었다⁠. 그믐마다 열쇠 소리가 이 길로 왔고⁠, 사기 사발 하나가 은행나무 뿌리 사이에 놓였다⁠. 오늘은 열쇠 소리도 사발도 없었다⁠. 금손의 몸은 그믐을 몰랐다⁠. 달이 사라진 밤에 연옥이 여기 왔다는 것만 알았다⁠.

침방 뒤뜰로 들어서자 늙은 내관이 비명을 삼켰다⁠. 발밑에서 무언가 터졌다⁠.

“⁠아이고⁠, 은행을⁠…⁠.⁠”

고약한 냄새가 버선 밑에서 피어올랐다⁠. 내관이 한 발로 깡충거리며 버선을 털었다⁠. 털수록 냄새가 퍼졌다⁠. 왕이 소매로 코를 막았다⁠. 막은 소매 너머로 기침 같은 웃음이 새었다⁠.

“⁠전하⁠, 웃으실 일이 아니옵니다⁠. 이 냄새는 사흘을 가옵니다⁠.⁠”

“⁠금손도 사흘을 갔다⁠.⁠”

*

금손은 은행나무 밑동에 코를 대었다⁠. 연옥의 손바닥 냄새가 흙에 남아 있었다⁠. 한 달 전에 부은 물 냄새⁠, 해마다 부은 물이 흙을 적시고 마른 냄새⁠. 물 냄새 밑에⁠, 아주 깊이⁠, 흙과 거의 하나가 된 쇠 냄새가 있었다⁠.

감나무 밑의 쇠는 연옥이 묻은 쇠였다⁠. 장방 이불 속의 쇠도 연옥이 넣은 쇠였다⁠. 연옥의 손바닥이 닿은 땅 밑에는 늘 쇠가 있었다⁠. 금손은 연옥이 묻은 것을 다 파냈다⁠. 이것만 남아 있었다⁠. 여우가 묻은 마지막 먹이였다⁠.

금손이 흙을 긁기 시작했다⁠. 서리 내린 흙은 단단했다⁠. 발톱이 미끄러졌다⁠. 감나무 밑을 팔 때는 비가 흙을 풀어 주었다⁠. 오늘은 비도 없었고 같이 파 줄 삼색이도 없었다⁠. 앞발 하나가 지치면 다른 앞발로 바꾸었다⁠. 발바닥 살이 쓸려 따끔거렸다⁠. 금손은 은행 열매를 앞발로 걷어 내고 다시 긁었다⁠. 은행 냄새가 발에 묻었다⁠. 사흘이 갈 냄새였다⁠. 금손은 멈추지 않았다⁠.

“⁠무얼 하는 게냐⁠, 금손아⁠.⁠”

왕이 쪼그려 앉았다⁠. 내관이 등롱을 내려 비추었다⁠. 흙이 한 뼘 파였다⁠. 굵은 뿌리가 드러났다⁠. 금손은 뿌리 사이로 앞발을 넣었다⁠. 발톱 끝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돌이 아니었다⁠. 긁으면 소리가 났다⁠. 둔하고 짧은 소리⁠, 녹이 슨 쇠의 소리⁠.

왕이 손을 뻗어 금손이 판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왕의 손끝이 쇠에 닿았다⁠. 왕의 숨이 멎었다⁠.

“⁠호미를 가져오너라⁠. 아니⁠, 사람을 깨우지 마라⁠. 네가 가져오너라⁠.⁠”

내관이 은행 냄새를 끌고 뛰어갔다⁠. 왕은 버선발로 흙 위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흙을 헤쳤다⁠. 곤룡포 소매에 흙이 묻었다⁠. 금손은 왕 옆에서 같이 팠다⁠. 사람 손과 고양이 발이 한 구덩이를 팠다⁠.

내관이 호미를 들고 돌아왔다⁠. 호미 날이 뿌리에 부딪혔다⁠. 흙을 다 걷어 내자 등롱 불빛에 쇠 함이 드러났다⁠. 손바닥 두 개만 한 쇠 함이었다⁠. 녹이 슬어 흙빛이 되어 있었다⁠. 은행나무 뿌리 하나가 쇠 함을 감고 자라 있었다⁠. 손목만 한 굵기로 뚜껑을 휘감고⁠, 뿌리 끝이 쇠 함 밑으로 다시 땅에 박혀 있었다⁠.

왕이 뿌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오래 쓸었다⁠.

“⁠이 뿌리가 몇 해를 자랐겠느냐⁠?⁠”

“⁠나무 일은 모르오나⁠… 손목만 하면 스무 해는 넘을 것이옵니다⁠. 서른 해쯤⁠…⁠.⁠”

왕이 일어났다⁠. 무릎에 흙이 묻어 있었다⁠. 동쪽 하늘은 아직 검었다⁠. 그믐 새벽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다⁠. 한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톱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의금부에 사람을 보내라⁠. 날이 밝기 전에⁠.⁠”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