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79자)

털을 세우다

왕의 고양이 · 강여울

중전은 구덩이를 보고⁠, 왕의 진흙 묻은 버선을 보고⁠, 내관이 받쳐 든 붉은 베를 보았다⁠. 금손은 왕의 발치에 앉아 중전의 숨을 들었다⁠. 중전의 숨은 빠르지 않았다⁠. 크게 놀란 사람은 숨을 멈추었다가 길게 내쉰다⁠. 중전이 그렇게 내쉬었다⁠.

“⁠모르옵니다⁠.⁠”

“⁠중전의 감나무 밑이오⁠.⁠”

“⁠감나무는 소첩의 것이나 화분은 소첩이 놓지 않았사옵니다⁠. 사흘 전 제조상궁이 내전 마당을 손본다며 들여놓았사옵니다⁠. 전하께서 석 달 만에 소첩의 마당에 오셨는데⁠, 오신 까닭이 저 구덩이로군요⁠.⁠”

왕의 손이 등롱 자루를 고쳐 쥐었다⁠. 왕은 중전에게 한 걸음 다가가다가 멈추었다⁠. 버선 밑에서 진흙이 질척거렸다⁠.

“⁠중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고 내 앞에서 말할 수 있소⁠?⁠”

“⁠소첩이 말하면 믿으시겠사옵니까⁠?⁠”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중전도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구덩이가 빗물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담 위의 삼색이가 꼬리를 한 번 털었다⁠. 중전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어제보다 작았다⁠.

왕은 오래 마당에 남아 있었다⁠. 날이 밝아 오고 젖은 기와가 하나씩 제 빛을 찾았다⁠. 금손은 왕의 젖은 버선에 뺨을 문질렀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다⁠.

*

열쇠 소리가 회랑 끝에서 들려오자 금손의 등털이 먼저 일어났다⁠. 털은 목덜미에서 시작해 등뼈를 타고 꼬리 끝까지 차례로 섰고⁠, 꼬리는 평소의 세 배로 부풀었다⁠. 금손은 왕의 무릎에서 내려가 왕의 정강이 뒤로 돌아갔다⁠. 침전 바닥에는 새벽에 끌고 온 보따리가 펼쳐져 있었다⁠. 붉은 베와 나무토막과 녹슨 못⁠. 방 안 공기는 피와 쇠 냄새로 무거웠다⁠.

연옥이 문턱에서 엎드렸다⁠. 초록 저고리 등판이 바닥에 닿을 만큼 깊이 엎드렸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들어와 보아라⁠.⁠”

연옥이 무릎걸음으로 보따리 앞까지 왔다⁠. 금손은 왕의 정강이 뒤에서 하악 소리를 냈다⁠. 이빨을 다 드러내고 귀를 옆으로 눕힌 채⁠, 목 안쪽에서 끓는 소리를 길게 끌었다⁠. 연옥이 고양이를 보지 않고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으로 못 하나를 짚었다⁠.

“⁠사람 모양 나무에 쇠못을 박고 피 묻은 베로 쌌사옵니다⁠. 종이의 붉은 글씨는 전하의 생년월일이옵니다⁠. 누군가 전하를 해하려고 땅에 묻은 흉물이옵니다⁠.⁠”

금손의 하악질이 높아졌다⁠. 왕이 고개를 숙여 정강이 뒤를 보았다⁠.

“⁠이놈이 어째 자네만 보면 털을 세우는가⁠?⁠”

“⁠짐승은 냄새로 사람을 가리옵니다⁠, 전하⁠. 흉물을 싼 베에서 피 냄새가 나고⁠, 수라간을 맡은 소인의 손에서도 날마다 짐승 피 냄새가 납니다⁠. 같은 냄새를 같은 것으로 아는 것이지요⁠.⁠”

연옥의 목소리는 고르고 낮았다⁠. 숨도 고르고 길었다⁠. 금손은 연옥의 손을 맡았다⁠. 오늘 아침 손에서는 피 냄새가 나지 않았다⁠. 쑥물로 여러 번 씻은 손이었다⁠. 씻은 손에서 연옥의 말과 다른 냄새가 났다⁠. 덮고 또 덮은 흙의 냄새였다⁠.

“⁠중궁전 마당에서 나왔다면 중궁전 사람들에게 물어야 하옵니다⁠.⁠”

“⁠누가 물을 것인가⁠?⁠”

“⁠내전의 일은 원래 중전마마께서 다스리시나⁠, 마마의 마당에서 나온 일을 마마께 맡길 수는 없사옵니다⁠.⁠”

왕이 대답하기 전에 바깥이 소란해졌다⁠. 문 앞을 지키던 내관이 막는 소리가 나고⁠, 막는 소리를 누르는 목소리가 났다⁠. 진피 냄새가 문틈으로 먼저 들어왔다⁠.

*

대감은 숨이 차 있었다⁠. 하얀 수염 끝이 젖어 있었고 갓끈이 비뚤어져 있었다⁠. 왕 앞에 엎드리면서도 눈은 바닥의 붉은 베에 가 있었다⁠.

“⁠전하⁠, 중궁전에서 흉물이 나왔다는 말이 벌써 궐 밖에 돌고 있사옵니다⁠. 누가 보았습니까⁠? 누가 중궁전 마당에서 그것을 파냈습니까⁠?⁠”

늙은 내관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전하의 고양이가 물어 왔사옵니다⁠, 대감⁠.⁠”

대감이 고개를 들고 처음으로 금손을 보았다⁠. 금손은 왕의 정강이 뒤에서 대감의 수염을 노려보았다⁠. 편전에서 쳐 보았던 수염이었다⁠.

“⁠짐승이 물어 왔다⁠. 짐승이⁠.⁠”

대감이 무릎을 고쳐 꿇었다⁠.

“⁠전하⁠, 짐승이 어디서 무엇을 물어 왔는지 짐승에게 물으시겠습니까⁠? 궁궐에 요망한 짐승이 들어와 밤마다 흉한 것을 물어 나른다 하면 그만입니다⁠. 저 고양이부터 없애소서⁠. 요물을 없애면 흉물도 요물의 장난으로 끝납니다⁠.⁠”

“⁠대감⁠.⁠”

연옥이 엎드린 채 말했다⁠. 대감이 연옥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대감의 눈은 금방 지나갔다⁠. 연옥의 눈은 지나가지 않았다⁠.

“⁠짐승은 흙을 팔 줄은 알아도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못을 박을 줄은 모르옵니다⁠. 묻은 자는 사람이옵니다⁠. 고양이를 죽이시면 묻은 사람만 편해집니다⁠.⁠”

“⁠제조상궁이 언제부터 고양이를 그리 아꼈소⁠?⁠”

“⁠소인은 고양이를 아끼지 않사옵니다⁠. 전하의 옥체를 아낄 뿐이옵니다⁠.⁠”

대감의 목덜미에서 시큼한 땀이 올라왔다⁠. 연옥의 목덜미는 조용했다⁠. 금손은 두 냄새 사이에서 꼬리를 바닥에 탁탁 쳤다⁠. 늙은 수고양이와 여우가 한 방에서 같은 먹이를 두고 울고 있었다⁠. 먹이를 물어 온 것은 금손이었다⁠.

왕이 오래 말이 없었다⁠. 기침을 한 번 하고⁠, 손을 내려 금손의 등을 쓸었다⁠. 부풀었던 털이 손바닥 밑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중전은 오늘부터 중궁전 문 밖으로 나오지 마시게 하라⁠. 중궁전 궁녀들은 제조상궁이 묻는다⁠. 대감은 물러가시오⁠.⁠”

“⁠전하⁠, 고양이는⁠…⁠.⁠”

“⁠내 고양이는 내 무릎에 둔다⁠.⁠”

대감이 물러가면서 문턱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금손을 보았다⁠. 진피를 씹는 소리가 회랑 끝까지 따라갔다⁠.

금손은 대감의 뒤를 밟았다⁠. 고양이를 죽이라고 한 수고양이가 어디로 가는지 보아 둘 필요가 있었다⁠. 대감은 대전 문을 나와 곧장 궐문으로 가지 않고 담 그늘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얼굴이 희고 손이 고운 젊은 내관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내관에게서는 대감 집 사랑채의 향 냄새가 났다⁠. 궁 안에서 나는 향이 아니었다⁠.

“⁠누런 고양이다⁠. 대전에서 사는 놈⁠.⁠”

“⁠예⁠, 대감마님⁠.⁠”

“⁠전하께서 무릎에 두시는 동안은 손대지 마라⁠. 무릎에서 내려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내려오거든 자루에 넣어 아무도 모르게 연못에 던져라⁠. 짐승 하나 없어지는 일을 누가 묻겠느냐⁠.⁠”

금손은 처마 끝에 엎드려 있었다⁠. 자루와 연못이라는 소리는 몰랐다⁠. 젊은 내관의 손바닥에서 겁먹은 땀이 솟는 냄새는 알았다⁠. 대감은 진피를 뱉고 궐문으로 걸어갔다⁠. 젊은 내관은 대감이 가고 나서도 한참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금손은 꼬리를 거두어들이고 기와골 사이로 납작하게 몸을 붙였다⁠.

*

낮이 되자 편전에 상소가 쌓였다⁠. 젊은 대신들이 올린 것이었다⁠. 늙은 내관이 두 팔로 안고 들어와 서안 옆에 내려놓자 종이 냄새와 먹 냄새가 한꺼번에 일었다⁠. 중궁전에서 흉물이 나왔으니 중전을 폐하라는 글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같은 말이었다⁠. 금손은 종이 더미 위로 올라가 앉았다⁠. 종이는 따뜻했고 바스락거렸고⁠, 앉으면 엉덩이 모양대로 꺼졌다⁠. 금손은 두어 번 앞발로 꾹꾹 누르고 몸을 말았다⁠.

“⁠전하⁠, 상소를⁠…⁠.⁠”

“⁠금손이 깔고 앉았다⁠. 오늘은 못 읽겠구나⁠.⁠”

내관이 맨 아래 종이를 슬그머니 빼내려 하자 금손이 앞발로 내관의 손등을 덮었다⁠. 발톱은 내지 않았다⁠. 내관이 손을 거두었다⁠.

“⁠전하⁠, 이놈이 상소를 지키옵니다⁠.⁠”

“⁠그래⁠, 나보다 낫다⁠.⁠”

왕은 웃지 않았다⁠. 창밖으로 중궁전 지붕을 오래 보았다⁠. 중궁전 담 위에서 삼색이가 울고 있었다⁠. 삼색이의 마당에 낯선 발소리가 하루 종일 들고 났다⁠.

*

해가 기울자 중궁전 마당에 궁녀들이 무릎을 꿇었다⁠. 금손은 대전 지붕에서 중궁전 담까지 건너가 처마 그늘에 엎드렸다⁠. 연옥이 마당 가운데 서서 한 사람씩 불렀다⁠. 맨 끝에 중전이 친정에서 데리고 들어온 늙은 본방상궁이 끌려 나왔다⁠.

“⁠감나무 밑에 손을 댄 사람이 이 마당에 있느냐⁠?⁠”

“⁠마마께서는 감나무 밑에 손끝 하나 대지 않으셨소⁠! 화분을 들여놓은 것은 제조상궁 아니오⁠?⁠”

본방상궁의 목소리가 마당을 찢었다⁠. 연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쇠꾸러미를 한 손으로 쥐고 본방상궁 앞에 한 걸음 다가갔다⁠.

“⁠그 말은 문초하는 자리에서 하시오⁠. 오늘은 이름과 들어온 해만 묻소⁠.⁠”

본방상궁이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처마 그늘의 금손을 찾아냈다⁠.

“⁠저 짐승이오⁠! 저 누런 것이 밤마다 마마의 마당을 파헤쳤소⁠. 요물이 판 구덩이에서 나온 것을 어찌 마마의 허물이라 하오⁠?⁠”

마당의 궁녀들이 일제히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금손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품을 했다⁠. 연옥만 지붕을 보지 않았다⁠.

중궁전 문은 닫혀 있었다⁠. 문 안에서 먹 가는 소리가 났다⁠. 아주 천천히⁠, 끊기지 않고 오래⁠.

*

저녁에 연옥은 나인을 제 처소로 불렀다⁠. 금손은 처소 마루 밑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마루 밑은 거미줄과 마른 흙 냄새가 났고⁠, 마루 널 틈으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대전 고양이를 오늘 밤 궁 밖에 내다 버려라⁠.⁠”

“⁠마마님⁠, 전하의 고양이입니다⁠. 전하께서 무릎에 두신다고⁠…⁠.⁠”

“⁠전하의 고양이가 내일 또 무엇을 파낼지 아느냐⁠? 다음에는 네 소매에 밴 닭 피 냄새까지 파낼 것이다⁠.⁠”

“⁠약에 쓰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약이다⁠. 서른 해 묵은 병에 쓰는 약⁠.⁠”

마루 널이 삐걱거렸다⁠. 나인이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못 하겠습니다⁠. 일곱 해를 제가 먹였어요⁠. 장작더미에서 눈도 못 뜬 걸 제가 쌀뜨물 찍어 먹여서⁠…⁠.⁠”

“⁠은수저⁠.⁠”

연옥은 한 낱말만 말했다⁠. 마루 위가 조용해졌다⁠.

“⁠두 해 전 네가 수라간에서 은수저 한 벌을 품에 넣고 나갔을 때⁠, 수라간 은붙이를 세는 날이 사흘 뒤였다⁠. 나는 사흘 안에 같은 수저를 맞춰 넣었다⁠. 그 일이 드러나면 네 목이 남지 않는다⁠. 묻은 것은 묻은 사람이 꺼낼 수도 있다⁠.⁠”

“⁠…⁠.⁠”

“⁠죽이라는 것이 아니다⁠. 멀리⁠, 궁궐 담 냄새가 닿지 않는 데로⁠. 네 손으로 해라⁠.⁠”

금손은 마루 밑에서 제 이름을 기다렸다⁠.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대전 고양이라는 소리가 세 번 났고⁠, 버려라라는 소리가 두 번 났다⁠. 둘 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

밤에 나인은 생선 대가리를 들고 수라간 뒷문에 쪼그려 앉았다⁠. 금손이 장작더미에서 내려와 사발에 고개를 박자 나인의 두 손이 금손의 겨드랑이를 잡았다⁠. 금손은 버둥거렸다⁠. 나인의 손은 놓지 않았다⁠. 대나무로 엮은 광주리에 무청이 깔려 있었다⁠. 금손은 광주리 안으로 내려앉혀졌고⁠, 광주리 뚜껑이 닫혔다⁠. 뚜껑 틈으로 나인의 눈물 냄새가 떨어졌다⁠. 짠 냄새였다⁠.

수라간 남새 대문 앞에 소달구지가 서 있었다⁠. 날마다 궁에 무와 배추를 대는 남새 장수의 달구지였다⁠. 나인이 남새 장수 손에 엽전을 쥐여 주었다⁠.

“⁠강 건너 나루까지 가서 풀어 주세요⁠. 꼭 강 건너요⁠.⁠”

“⁠궁 고양이를 뭐 하러 내다 버린대⁠?⁠”

“⁠묻지 마세요⁠.⁠”

광주리가 달구지 위로 올라갔다⁠. 무 냄새와 소똥 냄새와 흙 묻은 배추 냄새가 금손을 에워쌌다⁠. 금손은 광주리 틈에 발톱을 걸고 울었다⁠. 나인이 광주리에 이마를 댔다⁠.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면 너도 나도 죽는다⁠.⁠”

달구지 바퀴가 굴렀다⁠. 남새 대문을 지나자 등 뒤에서 무거운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침향 냄새가 멀어지고⁠, 수라간 장작 연기가 멀어지고⁠, 삼색이가 뺨을 문지른 담 모서리 냄새가 멀어졌다⁠. 금손의 영역이 바퀴 소리 하나에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광주리 틈으로 궁궐 담이 검은 띠가 되어 밤하늘 아래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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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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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줄2026.10.31· 3화

    중전 숨소리로 놀라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는 금손, 사람보다 눈치가 빨라요.

    • 강여울작가2026.10.31

      고양이는 숨을 먼저 들어요. 금손이 들은 숨이 이야기의 실마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