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66자)

용상 곁

왕의 고양이 · 강여울

동지가 가까워지자 해가 늦게 왔다⁠. 편전 동쪽 창호지가 밝아질 무렵이면 금손은 벌써 대전 섬돌에 나와 앉아 있었다⁠. 섬돌은 해가 닿는 자리부터 데워졌다⁠. 금손은 데워진 돌 위에서 앞발을 핥아 얼굴을 닦았다⁠. 오른쪽 눈가⁠, 왼쪽 눈가⁠, 수염 뿌리⁠. 마지막이 귀 뒤였다⁠. 귀 뒤는 앞발이 잘 닿지 않았다⁠. 늘 왕의 손가락이 대신 긁어 주던 자리였다⁠.

요즘은 왕의 손가락이 섬돌까지 나오지 않았다⁠. 침전에서 기침 소리만 나왔다⁠. 첫눈 오던 날보다 길었고⁠, 해가 지면 더 길어졌다⁠. 금손은 귀 뒤를 대충 닦다 말고 섬돌을 내려가 침전으로 갔다⁠. 침전 댓돌에 어의의 가죽신이 놓여 있었다⁠. 쓴 뿌리 냄새가 배어 있었다⁠. 금손은 가죽신 한 짝에 앞발을 넣어 보고 도로 뺐다⁠. 신 안이 따뜻했다⁠. 금손은 가죽신 두 짝 사이에 엎드려 기침 소리를 들었다⁠. 어의가 나올 때까지 비키지 않았다⁠. 어의는 맨버선으로 댓돌을 내려가야 했다⁠.

*

어의가 약 상자를 들고 침전에 들어왔다⁠. 상자에서 감초와 마른 도라지와 쓴 뿌리 냄새가 났다⁠. 어의가 뚜껑을 열어 두고 맥을 짚으려 돌아앉은 사이⁠, 금손은 상자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감초 위였다⁠. 달고 좋은 냄새였다⁠.

맥을 짚던 어의가 돌아보고 굳었다⁠.

“⁠전하⁠, 이 짐승이 어약 재료를⁠…⁠.⁠”

“⁠상자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오⁠.⁠”

왕이 웃다가 기침을 했다⁠. 어의가 금손을 들어내려고 손을 뻗었다⁠. 금손이 털을 부풀렸다⁠. 누런 털 몇 올이 날렸다⁠. 어의가 재채기를 했다⁠. 한 번⁠, 또 한 번⁠. 세 번째 재채기에 맥 짚던 손을 놓쳤다⁠.

“⁠전하⁠, 신이 감히 아뢰옵니다⁠.⁠”

어의가 소매로 코를 막고 말했다⁠.

“⁠기침이 이리 깊으실 때는 짐승 털이 큰 해가 되옵니다⁠. 침전에서만큼은 내보내시옵소서⁠.⁠”

“⁠내보내면 낫소⁠?⁠”

어의가 대답하지 못했다⁠. 어의의 숨에서 겁먹은 땀 냄새가 났다⁠. 친국 날 대전 뜰에서 대감에게서 맡은 냄새와 같았다⁠.

“⁠낫지 않을 거면 두시오⁠.⁠”

어의는 감초를 한 줌 덜어 버리고 상자를 닫았다⁠. 금손이 앉았던 감초였다⁠. 금손은 버린 감초 위로 옮겨 앉았다⁠.

*

이튿날 편전에 상소 두 장이 올라왔다⁠. 젊은 대신이 받들고 나왔다⁠. 조기 국물을 맞았던 대신이었다⁠. 국물 자국은 빨아 지웠지만 금손의 코에는 대신의 소매에서 아직 조기 냄새가 왔다⁠. 금손이 왕의 무릎에서 소매로 코를 내밀었다⁠. 대신이 소매를 등 뒤로 감추었다⁠.

“⁠전하⁠, 위의 한 장은 대신들이 함께 올리는 것이옵니다⁠. 전하께 아드님이 없으시니 아우 연창군을 세제로 세우시어 나라의 뒤를 정하시옵소서⁠.⁠”

“⁠아래의 한 장은⁠?⁠”

“⁠어의의 말을 따라 고양이를 침전에서 내보내시옵소서⁠. 짐승이 용상 곁에서 자는 것은 법도에 없는 일이옵니다⁠. 궐 밖 백성들은 벌써 대전 고양이가 임금의 숨을 빨아 먹는다고 수군거리옵니다⁠.⁠”

편전이 조용해졌다⁠. 금손은 왕의 무릎에서 내려가 대신이 계단 앞에 펼쳐 둔 상소 두 장 가운데 아래 장 위에 앉았다⁠. 종이가 따뜻했다⁠. 대신의 품에 오래 있던 종이였다⁠.

왕이 금손이 앉은 상소를 내려다보았다⁠.

“⁠위의 것은 받겠소⁠. 연창군을 세제로 세우오⁠. 오늘 교지를 쓰시오⁠.⁠”

“⁠황공하옵니다⁠. 하오면 아래의 것은⁠…⁠.⁠”

“⁠아래의 것은 고양이가 깔고 앉았소⁠. 내가 받을 수가 없소⁠.⁠”

뒷줄에서 누군가 웃음을 참다 기침으로 덮었다⁠. 젊은 대신은 웃지 않았다⁠.

“⁠전하⁠, 소신은 고양이가 미워서 이러는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숨이 걱정되어서이옵니다⁠.⁠”

“⁠알고 있소⁠.⁠”

왕이 말했다⁠.

“⁠경이 서른 해 전 일을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섰다는 것도 알고 있소⁠. 경 같은 사람이 남아야 연창군이 편하오⁠. 다만 이 일은 내 숨이니 내가 정하겠소⁠. 밤마다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자는 것은 경이 아니라 이놈이오⁠. 내 기침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이놈이 어의보다 먼저 아오⁠.⁠”

젊은 대신이 물러났다⁠. 금손은 상소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위의 장을 거두러 온 승지가 아래 장은 건드리지 못하고 돌아갔다⁠.

*

책봉 교지가 내려간 이튿날⁠, 연창군이 침전에 들었다⁠. 선왕보다 열두 해 아래인 아우였다⁠. 키가 컸고 걸음이 빨랐다⁠. 문턱을 넘자마자 연창군의 걸음이 멎었다⁠. 보료 끝에서 노란 눈 두 개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저것이 그 고양이입니까⁠?⁠”

“⁠인사하게⁠. 대전에서 나보다 먼저 앉는 놈일세⁠.⁠”

연창군이 한 걸음 물러났다⁠. 금손은 일어나 연창군의 버선발에 코를 대었다⁠. 말 땀과 활 시위 기름과 젊은 땀 냄새가 났다⁠. 대감의 진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금손은 연창군의 발등에 뺨을 한 번 문질렀다⁠. 연창군은 숨을 멈추고 천장만 보았다⁠.

“⁠형님⁠, 소신은 어려서 고양이에게 손등을 긁힌 뒤로⁠…⁠.⁠”

“⁠알고 있네⁠. 자네가 일곱 살 때 수라간 담에서 울던 일도⁠.⁠”

왕이 웃다가 기침을 했다⁠. 연창군이 엎드려 형의 등을 받쳤다⁠. 금손은 연창군의 소매 끝을 앞발로 두 번 건드리고 보료로 돌아갔다⁠. 연창군이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긁힌 자국은 없었다⁠.

“⁠저놈이 자네를 들였네⁠. 이 궁에서 저놈이 들이지 않은 사람은 오래 못 버티네⁠.⁠”

연창군은 웃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

밤에 왕은 잠들지 못했다⁠. 늙은 내관을 불러 서안 맨 아래 칸의 종이 한 장을 꺼내 오게 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였다⁠. 왕은 초를 가까이 당기고 금손을 무릎에 올렸다⁠.

“⁠일곱 해 전 겨울에 쓴 글이다⁠. 네 어미가 죽던 날⁠.⁠”

금손은 종이 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먹과 후원 흙 냄새가 났다⁠.

“⁠누런 털 금덕아⁠. 굶주려 내 섬돌에 왔다가 배불러 갔구나⁠. 네가 쬐던 볕은 내일도 섬돌에 올 터인데 너는 오지 않겠구나⁠. 장작더미에 두고 간 새끼는 수라간 아이들이 거둘 것이니 염려 말고 가거라⁠.⁠”

왕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거둔 아이가 있었구나⁠. 쌀뜨물로 너를 살린 아이가⁠. 금덕아⁠, 약조는 지켜졌다⁠.⁠”

금손은 금덕이라는 말을 몰랐다⁠. 왕의 목소리가 낮아질 때 무릎이 따뜻해지는 것은 알았다⁠. 금손은 종이 위에 앞발 하나를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왕은 종이를 빼지 않았다⁠.

*

밤이 되자 늙은 내관이 침전 문 앞에서 금손을 안아 들었다⁠.

“⁠오늘 밤만 저리 가 있거라⁠. 어의 영감이 오늘 밤이 고비라 하니⁠.⁠”

저리 가⁠. 금손이 아는 말이었다⁠. 내관은 금손을 회랑 끝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금손은 회랑을 돌아 침전 뒤 들창으로 갔다⁠. 들창 문풍지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가을에 금손이 앞발로 낸 구멍이었다⁠. 금손은 구멍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구멍이 조금 커졌다⁠. 어깨가 끼었다⁠. 금손은 숨을 내쉬고 어깨를 밀었다⁠. 문풍지가 찢어지면서 금손이 용상 곁 보료 위로 굴러떨어졌다⁠.

왕이 눈을 떴다⁠.

“⁠왔구나⁠.⁠”

금손은 왕의 가슴께로 올라가 귀를 대었다⁠. 가슴 속에서 숨이 오르내렸다⁠. 오를 때 막혔고⁠, 내릴 때 끊겼다⁠. 금손은 목을 울렸다⁠. 가르릉 소리가 왕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왕의 숨이 가르릉 소리를 따라 조금 고르게 되었다⁠.

내관이 문을 열었다⁠. 찢어진 들창과 왕의 가슴 위에 엎드린 고양이를 번갈아 보았다⁠. 내관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다⁠. 이튿날 아침 들창 문풍지는 새로 발라져 있었다⁠. 고양이 머리 하나 들어갈 구멍만 남기고⁠.

*

사흘 뒤 새벽⁠, 금손은 수라간 장작더미에서 들쥐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이 오른 겨울 들쥐였다⁠. 금손은 들쥐를 물고 회랑을 달려 침전 들창 구멍으로 들어갔다⁠. 용상 곁 보료 위⁠, 왕의 베개 옆에 들쥐를 내려놓았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큰 영역의 주인에게 바친다⁠. 수라간 나인에게 하던 대로였다⁠.

아침 맥을 짚으러 온 어의가 베개 옆을 보았다⁠. 들쥐 꼬리가 베개 끝에 늘어져 있었다⁠. 어의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약 상자를 떨어뜨렸다⁠. 감초가 마룻바닥에 쏟아졌다⁠. 금손은 쏟아진 감초 위로 내려가 앉았다⁠.

왕이 눈을 떴다⁠. 베개 옆의 들쥐를 보고⁠, 감초 위의 고양이를 보고⁠, 바닥에 주저앉은 어의를 보았다⁠. 왕의 어깨가 흔들렸다⁠. 기침인 줄 알았던 내관이 달려왔다가 멈추었다⁠. 왕은 웃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나에게도 혼수를 넣는구나⁠. 이 나이에 장가를 다시 들라는 게냐⁠.⁠”

어의가 떨리는 손으로 들쥐 꼬리를 집어 들창 밖으로 던졌다⁠. 금손은 들창을 올려다보았다⁠. 혼수를 버리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금손은 어의의 약 상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어의는 상자를 두고 빈손으로 맥을 짚었다⁠. 이날 아침 왕은 미음을 반 그릇 비웠다⁠. 이레 만에 처음이었다⁠.

*

중전이 침전에 왔다⁠. 손에 마른 북어를 들고 있었다⁠. 중궁전 감나무에 감이 다 떨어진 뒤였다⁠. 중전은 북어를 잘게 찢어 보료 끝에 놓았다⁠. 금손은 북어를 먹었다⁠.

“⁠전하⁠, 연창군 책봉 교지가 내려갔사옵니다⁠.⁠”

“⁠잘 되었소⁠.⁠”

왕이 금손의 등을 쓸었다⁠.

“⁠중전⁠, 부탁이 하나 있소⁠.⁠”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가거든 이놈이 어디로 가든 막지 마시오⁠. 나인을 따라가겠다면 보내고⁠, 남겠다면 두시오⁠. 다만 내쫓지는 마시오⁠. 금덕은 내 손으로 후원에 묻었소⁠. 이놈은 내가 묻어 줄 수가 없으니⁠.⁠”

중전이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지키겠사옵니다⁠.⁠”

금손은 북어를 다 먹고 수염을 핥았다⁠. 왕의 손가락이 귀 뒤로 왔다⁠. 섬돌에서 다 닦지 못한 자리였다⁠. 손가락이 귀 뒤에서 멈추었다⁠. 금손은 귀를 손가락으로 기울였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아주 느렸다⁠.

*

동지 지나 사흘째 밤이었다⁠. 침전의 초가 반쯤 타 있었다⁠. 금손은 왕의 가슴 위에 엎드려 있었다⁠.

가슴 속 숨이 오르다가 멈칫했다⁠. 멈춘 채로 오래 있었다⁠. 금손은 고개를 들었다⁠. 숨이 한 번 내려갔다⁠. 다시 오르지 않았다⁠.

금손은 기다렸다⁠. 들쥐가 숨을 멈추면 기다리면 된다⁠. 죽은 척하던 들쥐는 결국 다시 숨을 쉰다⁠. 금손은 앞발로 왕의 턱을 건드렸다⁠. 수염이 꺼칠했다⁠. 대감의 수염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침향 냄새가 났다⁠. 날마다 나던 냄새였다⁠. 침향 밑에 깔려 있던 따뜻한 냄새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창호지 틈으로 찬바람이 새어 드는 만큼씩⁠.

금손은 왕의 손으로 내려갔다⁠. 손등을 핥았다⁠. 귀 뒤를 손가락 밑에 들이밀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금손은 한 번 더 들이밀었다⁠. 손가락은 차가웠다⁠.

내관이 들어왔다⁠. 초를 갈러 온 걸음이었다⁠. 내관은 문턱에서 멈추었다⁠. 초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내관이 무릎으로 기어 와 왕의 손을 잡았다⁠. 내관의 목에서 소리가 나왔다⁠. 금손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들개가 우는 소리보다 낮았다⁠.

소리는 회랑으로 번졌다⁠. 회랑에서 대전 마당으로⁠, 마당에서 중궁전 담 너머로⁠. 궁궐 안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같은 소리를 냈다⁠. 금손은 귀를 납작하게 눕혔다⁠.

새벽에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침전을 채웠다⁠. 사람들이 금손을 보료에서 내리려 했다⁠. 금손은 내려가지 않았다⁠. 용상 곁 보료 끝에 몸을 말고 엎드렸다⁠. 늙은 내관이 손을 내저었다⁠.

“⁠두게⁠. 선왕께서 두라 하셨네⁠.⁠”

해가 떴다⁠. 기미상궁이 조기를 한 마리 발라 접시에 담아 보료 끝에 놓았다⁠. 가시를 하나씩 빼고 살만 모았다⁠. 왕이 하던 대로였다⁠.

금손은 접시를 보지 않았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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