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5,257자) · 서한결 · 8월 29일(일)
안 뚫렸다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500, 호송대 선두 트럭이 시동을 걸었다. 짐칸에는 밀가루 포대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트럭은 서른여덟이었다. 밀가루와 경유와 인슐린 상자와 발전기를 싣고 리투아니아로 가는 첫 줄이었다. 아스팔트 국도 위에 헤드라이트가 길게 이어져 있었고, 맨 뒤에 한결의 정비지원차가 붙어 있었다. 호송대장은 중위였다. 한결과 동갑쯤 되어 보였고, 지도 위 도로를 손가락으로 한 번 훑은 뒤 말했다. 24킬로미터, 시속 40으로 36분. 가는 길에 멈추는 차는 없다고 했다.
0541, 열아홉 번째 트럭이 멈췄다.
앞차들은 계속 갔고, 뒤차 열아홉이 그 차 뒤에 줄줄이 섰다. 도로가 일직선이라 서 있는 것은 어디서든 보였다. 호송대장이 무전에 대고 한 번 짧게 욕을 했다. 한결이 정비지원차에서 내려 그 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뛰지 않았다. 달리는 사람은 먼 데서도 눈에 띄고, 걷는 사람은 그냥 길에 선 사람이었다.
“정비관, 얼마나 걸립니까?”
“10분 주십시오.”
“10분은 저쪽 박격포 한 문이 우리를 겨냥하기에 충분합니다.”
“압니다. 그래서 걸어왔습니다.”
0544, 정말로 첫 탄이 왔다. 도로 왼쪽 밀밭에 흙기둥이 섰다. 러시아군이 물러난 길 뒤에는 박격포 둘이 남아 있었다. 후위였다. 호송대장이 소리쳐 차 간격을 벌리라고 했다. 선 차들이 두세 대씩 시동을 걸고 갓길로 흩어졌다. 한결은 트럭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공기 호스의 이음매가 풀려 있었다. 조임쇠가 부러져 있었다. 가방에는 전화선이 없었다. 마지막 한 토막은 어제 커넥터에 감아 두고 왔다. 그는 신발끈을 풀어 이음매에 두 바퀴 감았다. 끝은 안으로 접었다. 신발은 발에서 반쯤 벗겨진 채 달랑거렸다.
0549, 두 번째 탄이 50미터 앞에 떨어졌다. 한결은 신발끈을 다시 한 번 당겨 보았다. 세 번째 탄은 고개를 들 수도 없는 가까이에서 터졌다. 파편이 트럭 짐칸 포대를 때리자 밀가루가 하얀 연기처럼 피어올라 도로 위로 퍼졌다. 열아홉 번째 트럭 운전사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한결이 알아들은 것은 한마디였다. 밀가루.
시동이 걸렸다. 한결은 신발을 반쯤 끌며 정비지원차로 뛰었고, 이번에는 뛰었다. 열아홉 번째 트럭이 일어나 달리기 시작하자 뒤차가 하나씩 따라붙었다. 네 번째 탄은 줄이 지나간 자리에 떨어졌다. 아무도 맞지 않았다. 0552, 서쪽 숲 너머에서 K9 자주포 세 발이 대답했다. 박격포가 쏜 자리를 거꾸로 짚어 낸 대답이었다. 그 뒤로 밀밭에서는 흙기둥이 다시 서지 않았다. 밀가루 구름이 한참 도로 위에 남아 호송대 뒤꽁무니를 하얗게 지웠다.
0742, 호송대는 푯말 하나를 지나갔다. 풀밭 가운데 비스듬히 선 작은 푯말이었다. 여기부터 리투아니아라고 두 나라 말로 적혀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로 이 길을 지나간 민간 호송대는 처음이었다. 길가 첫 마을에서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트럭마다 경적이 울렸다. 한결의 정비지원차도 한 번 울렸다. 운전병이 울린 것이었다.
*
0820, 여단 지휘소 벽의 화면은 아직 켜져 있었다.
회랑 차단 예상 60시간. 5월 17일부터 그 자리에 박혀 있던 글자였다. 그 아래 다율이 한 달 뒤에 장난으로 붙여 둔 경과 시간 칸이 있었고, 칸의 숫자는 이제 2,500이었다. 그 숫자는 방금 막 2,500이 되었다. 브란도프스키가 화면 앞에 서서 한참 올려다봤다. 정보참모가 옆에서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끄는 단추는 없습니다.” 다율이 말했다. “전원선을 뽑으셔야 합니다.”
“미국의 군사 연구소 랜드가 11년 전에 만든 예측이라고 하더군요.” 브란도프스키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이 도로가 이틀 반이면 끊긴다고 계산했습니다. 우리는 104일을 했습니다.”
그는 화면 뒤로 손을 넣어 전원선을 잡아 뽑았다. 화면이 한 번 검게 꺼졌다. 검은 판 위에 방 안의 형광등 불빛이 비쳤고, 그 안에 지휘소 사람들이 서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정보참모가 태블릿을 열고 한 줄을 입력했다. 그가 입력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0830, 여단 무전망이 열렸다. 여단장의 목소리가 한결의 손무전기에도 들어왔다.
“여단 전 부대. 여기는 여단장. 수바우키는 안 뚫렸다. 반복한다. 수바우키는 안 뚫렸다.”
잡음 속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어느 중대에서 누가 총을 쏘아 올려 정비소 옆 천막이 흔들렸다. 다율이 자기 전화기를 한결 앞에 내밀었다. 화면에 서울통신 기사가 떠 있었다. 서울 시각 오후 3시에 나간 기사였다. 제목이 여단장의 문장과 같았다. 수바우키는 안 뚫렸다. 필자는 배소현이었다. 한결은 그 제목을 한 번 읽었다. 읽는 동안 입 모양이 같은 문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
1400, 한결은 가슴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배터리를 끼웠다. 다율이 러시아 쪽 탐지 전파가 꺼졌다고 알려 준 뒤였다. 전화기는 이틀 치 신호를 한꺼번에 토해 냈다. 진동이 세 번 이어졌고, 누르기도 전에 다시 울렸다. 서울 번호가 아니었다. 바르샤바였다.
“서한결 씨 본인이십니까? 주폴란드 대한민국 대사관 영사입니다.”
“예.”
“어제 서울에서 결정이 내려왔습니다. 여행금지 지역 체류에 관한 여권법 위반으로, 서한결 씨의 여권 효력 정지 절차가 시작됩니다. 통지는 이 통화로 갈음합니다. 귀국하시는 대로 입국 시점에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한결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주머니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안에 초록색 책자가 있었다. 어제 오전 회랑 한가운데서 표트르가 건네준 그 무게였다.
“정지가 되면, 이 폴란드 안에서 저는 누가 됩니까?”
“…여권 효력이 정지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보호를 요청하실 수 있는 문서가 없습니다.”
“서류상으로는요?”
“서류상 없는 분이 되십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대사관은 오늘 안으로 자진 출석을 권고합니다.”
“들었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주머니 안의 책자를 꺼내 보지 않았다. 무게는 그대로였고, 표지의 감촉도 같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 안에 든 것이 이제 사람 대신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만 달랐다. 종이가 되었다. 그는 단추를 다시 채웠다.
1420, 브란도프스키가 천막으로 들어왔다. 손에 여단 정비 일지가 들려 있었다. 어제 회랑에서 한결이 손댄 차가 넷이었고, 일지에는 차마다 정비자 칸이 있었다. 석 달 동안 그 칸에는 민간 계약자라고만 적혀 왔다.
“이 칸에 무엇을 적을지 여쭈러 왔습니다. 계약은 6월에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한결은 방금 끊은 전화를 작업대에 엎어 놓았다. 서류상 없는 사람이 된 지 20분이 지나 있었다.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서한결입니다.”
브란도프스키는 한글을 몰랐다. 한결이 종이 귀퉁이에 세 글자를 크게 써 주자, 그는 그 모양을 보고 네 칸에 차례로 그렸다. 획이 하나씩 삐뚤었고, 네 번째 칸의 글자가 첫 칸보다 조금 나았다.
*
1900, 불탄 헛간 터에 전차가 줄을 섰다.
할리나는 부엌 문턱에 서 있었고 주자는 닭장 옆 나무 상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아이는 들어오는 포탑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두 손을 다 접고 나서는 펴면서 다시 셌다. 할리나는 앞치마에 손을 닦지도 않고 그 손가락만 봤다.
한 대씩 들어왔다. 궤도가 마른 재를 밟고 하얀 먼지를 올렸다. 열둘째, 열셋째. 차대 번호를 분필로 쓴 포탑이 노을 속에서 붉게 지나갔다. 스물두 대가 헛간 터 한 줄로 나란히 서는 데 8분이 걸렸다. 앞 열에서 한결이 서 있었다. 정비복이 흙투성이였고 한쪽 신발은 끈이 없었다.
첫 전차의 해치에서 전차장이 몸을 일으켰다. 한결 앞을 지날 때 그는 팔을 올려 거수경례를 했다. 입을 열었다.
“서한결!”
판 서가 아니었다. 차대번호도 아니었다. 이름이었다. 폴란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그 세 음절은 모음이 하나씩 틀려 있었다. 다음 전차장도 그렇게 불렀다. 그다음도. 어떤 이는 이름 뒤에 폴란드어로 한마디를 붙였고, 어떤 이는 이름만 크게 부르고 지나갔다. 서한결, 서한결. 이름이 줄지어 한결 앞을 지나갔다. 한결은 한 번도 손을 내리지 않았다.
열아홉 번째 전차장이 해치에서 말했다. 한결이 8월 12일 새벽에 엔진 위에서 손으로 점화를 일으켜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름을 부르고 나서 덧붙였다.
“정비관님, 우리가 이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제대로 부르려고 연습 중입니다.”
“충분히 제대로 들립니다.”
스물두 번째 전차가 맨 끝에 섰다. 주자가 상자 위에서 마지막 손가락을 접고 영어로 크게 말했다. 스물둘. 이번에는 한 번만 셌다. 선반에 마레크의 안경이 있었다. 표트르가 조종수 해치에서 한결을 내려다보며 두 손가락을 이마에 한 번 댔다.
*
2030, 모스크바 외곽의 아파트. 일리야의 어머니는 부엌 식탁에 앉아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젯밤 11시에 온 문자였다. 엄마, 나 돌아가. 엄마, 밥 먹어. 읽고 또 읽어서 화면 글자가 자기 손에 눌려 닳은 것 같았다. 옆집 여자가 건너와서 방송에서 회랑에서 물러났다는 말이 나왔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했다. 방송은 물러났다고 하지 않았다. 증명을 마쳤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스 불에 올린 냄비를 보았다. 아들이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것이 보르시였다. 그녀는 냄비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둘이 먹을 양이었다. 숟가락을 놓으며 문자에 답을 썼다. 쓰고 지우고, 다시 썼다. 알았어. 아직 안 먹었어. 보내기를 눌렀다. 문자는 가지 않았다. 아들의 전화는 아직 부관의 상자 안에 있거나, 이미 꺼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전화기를 식탁 위 숟가락 옆에 올려 두었다.
*
2100, 한결은 천막 안 작업대에 앉아 전화기를 켰다. 음성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그저께 저녁, 사탕무밭에서 온 것이었다. 지금껏 듣지 않았다.
“한결 씨, 소현입니다. 받지 않으실 걸 알고 남깁니다. 오늘 밤 일이 어떻게 되든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수바우키는 안 뚫렸다. 이 문장이 사실이 되는 날에 제가 기사에 써도 되겠습니까. 한결 씨 이름은 안 쓰겠습니다. 문장이 한결 씨 허락을 받았다는 것만 제가 알고 있겠습니다.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안 하시면… 그래도 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건강히.”
한결은 그 음성을 두 번 들었다. 그리고 글자를 쳤다. 써도 됩니다. 보냈다. 곧 화면에 답이 올라왔다. 알고 있었습니다. 기사는 열세 시간 전에 나갔습니다. 한결은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작업대 위 번호판이 그 소리에 흔들렸다.
웃음이 끝나기 전에 전화기가 한 번 떨렸다. 소현의 문자 아래로 다른 이름이 올라왔다. 한결은 그 이름을 오래 봤다. 화면이 꺼지려 할 때마다 엄지로 한 번씩 닿았다.
박 팀장 번호가 화면에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