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5,491자) · 소콜로프 · 8월 28일(토)
멈춤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1140, 학교 지하실. 탁자 한가운데에 회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빨간 덮개가 열려 있었다.
덮개 밑에 단추 하나가 있었다. 계단 밑 선반에는 광케이블 드론 서른둘이 날개를 편 채 줄지어 서 있었다. 삼백 상자가 이 지하실에 내려온 뒤로 하나씩 줄어 마지막으로 남은 서른둘이었다. 단추를 누르면 서른둘이 한꺼번에 올라가 실을 풀며 한 곳으로 간다. 고르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없다. 표적을 화면에서 확정하고 누르면 끝이었다. 소콜로프의 오른손 엄지가 덮개 위 한 뼘 높이에 떠 있었다.
모니터에서는 손이 철사를 접고 있었다. 전차 엔진이 막 걸린 참이었고, 부관이 옆에서 숫자를 읽었다.
“표적 확정. 전차 한 대, 사람 여섯.”
소콜로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관이 목소리를 낮췄다.
“소령님, 0610에 저 사람은 혼자였습니다. 개울 둑에 혼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열 대만 보냈어도 끝났습니다.”
“서른둘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서른둘은 0800에 모였습니다.” 부관은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뒤 세 시간 반 동안 지하실의 누구도 단추를 보지 않았다. 일리야는 관측 드론 조종기를 쥐고 한 번도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콜로프는 수첩 뒷장을 펴지 않은 채 그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기다린 것이 작전이었는지 구경이었는지, 그 질문은 부관이 입을 닫은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탁자 가장자리의 유선 전화가 울렸다. 소콜로프는 왼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대령이었다.
“봤다. 화면에 확정이라고 떴다지. 누르게.”
“한 대와 여섯 명입니다, 대령님. 서른둘이 끝입니다.”
“한 대가 아니다, 소령. 그 손이다. 자네가 석 달을 쫓은 손이 지금 화면 한가운데 있어. 모스크바는 저녁 방송에 쓸 사진을 원한다. 불타는 한국 전차 한 장이다.”
화면에서 일이 일어났다. 시동 걸린 전차의 해치에서 조종수가 손을 뻗어 작은 초록색 책자를 내밀었다. 손이 그것을 받았다. 받은 손이 가슴 쪽으로 올라가 주머니 단추를 잠그고, 잠근 자리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지하실 안에서 누가 숨을 멈췄다. 일리야였다. 일리야의 손이 자기 가슴 주머니 위에서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담뱃갑에서 찢은 종이가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본인은 그것을 모르는 채였다. 소콜로프는 두 손을 한꺼번에 봤다. 영상 속 손과 제 부하의 손이 같은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그는 다 보고 나서 빨간 덮개를 손바닥으로 닫았다. 딸깍 소리가 지하실에서 크게 울렸다.
“…소령?”
“화면이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10분이면 됩니다.”
“확인 따위 할 시간이 없다.”
“10분입니다.”
수화기 속에서 대령의 숨소리가 길게 났다. 곧 딸깍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1151, 화면 속 전차가 앞으로 움직였다. 1158, 전차는 실이 닿는 선을 넘었다. 소콜로프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부관이 보았다. 부관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손목시계를 안쪽으로 돌려 찼다.
*
1245, 대령이 계단을 내려오다 배관에 머리를 부딪쳤다. 이번에는 소리가 컸다. 대령은 이마를 한 번 쥐었다 놓고, 허리를 굽힌 채 탁자까지 와서 앉지 않고 말했다.
“전화 한 통 끊고 나니 내 이름이 올라가 있더군. 자네 이름 밑에 한 줄 더.”
“죄송합니다.”
“죄송은 사진이 못 된다. ‘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일 새벽까지는 밀어붙인다.’ 어제 모스크바가 그렇게 말했다. 오늘 새벽이 지났는데 증명은 안 끝났어. 저쪽이 내일 0500에 리투아니아로 첫 호송대를 낸다고 한다. 그 호송대 앞에서 자네 단추가 눌리는 것이 증명이다.”
“호송대는 식량 차와 연료 차입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대부분 민간입니다.”
“그래서 사진이 된다.” 대령은 이마를 한 번 더 문질렀다. 위협이 아니었다. 그도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고 있었다. “2000에 이 단추를 다시 본다. 표적을 호송대 집결지로 옮겨 놓게. 그때까지 확인이 끝나 있어야 해. 안 끝나 있으면 부관이 쥔다.”
부관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소콜로프는 부관을 보지 않고 말했다.
“코드는 저만 압니다.”
“그럼 코드를 말하게 하지.” 대령은 그 말을 하고 처음으로 소콜로프의 눈을 봤다. 두 가지를 센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전선과 손. 오늘은 전선 쪽 저울이 올라가 있었다. 둘 다 옳았다. 옳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단추를 누르게 되는 것이었다.
*
1334, 첫 탄이 학교 운동장에 떨어졌다.
0934에 마이크로파 트럭이 마을 어귀에서 한 번 켜졌고, 저쪽 레이더가 그 전파를 거꾸로 풀어 자리를 찾았다. 트럭은 이미 떠난 뒤였다. 탄은 그 자리 옆의 학교로 왔다. 지하실 천장 배관에서 녹 비늘이 쏟아졌고 모니터 둘이 꺼졌다. 두 번째 탄은 25초 뒤였다. 천장의 흙이 한 줌씩 떨어져 탁자 위 회색 상자에 쌓였다. 소콜로프는 상자로 몸을 던졌다. 배관 조각이 덮개를 건드려 열면 단추가 눌린다는 것을, 생각보다 먼저 몸이 계산했다.
그의 등 위로 누군가 올라탔다. 부관이었다. 부관은 상자 반대편을 두 팔로 감싸고 있었다. 누를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람과 누르지 않으려는 사람이 같은 상자 위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서로 말하지 않았다. 셋째와 넷째 탄이 이어서 왔고, 일리야는 탁자 밑에서 두 손을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1351에 포격이 멎었다. 공기에서 화약과 젖은 석고 냄새가 났다. 천장 합판 한 장이 늘어져 있다가 누가 숨을 내쉬자 먼지를 한 줄 떨구었다. 선반의 서른둘은 모두 서 있었다. 지난주 소콜로프가 계단 밑으로 흩어 놓으라고 시킨 대로였다. 운동장에 구덩이 셋이 파였고 철봉이 하나 더 휘어 있었다. 부관은 상자 위에서 내려와 옷의 먼지를 털었다. “이 배관은 이제 대령님 머리를 알아봅니다.” 그는 그 말만 하고 제자리로 갔다. 소콜로프는 웃지 않았지만, 입가가 한 번 움직였다.
*
1420, 계단 밑에서 열아홉 살 둘이 서른둘의 날개를 닦고 있었다. 한 달 전 조종기에 배터리를 반대로 넣었다가 일리야가 말없이 바로잡아 준 아이가 그중 하나였다. 아이는 헝겊으로 날개 끝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이거 누르면 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한 곳으로.”
“그럼 안 누르면요?”
일리야는 잠깐 생각했다. 소콜로프처럼 짧게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제 말로 했다.
“여기 서 있는다. 닦아 둬. 서 있는 것도 일이야.”
아이는 헝겊을 접어 날개 끝을 한 번 더 닦았다. 일리야는 아이의 손톱 밑을 봤다. 때가 아니라 기름이 끼어 있었다. 전기공 학교를 다니다 온 아이였다. 그 손으로 닦은 날개는 조명 아래서 한 줄로 반짝였다.
*
1950, 모니터에 집결지가 떴다. 리투아니아로 가는 첫 호송대의 출발선이었다. 관측 드론 하나가 전날부터 거기에 눈을 두고 있었다. 트럭 서른여덟이 들판에 길게 늘어서 있었고, 운전석 지붕마다 낡은 방수포가 덮여 있었다. 몇 대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한 대에서는 누군가 가스 버너 위에 주전자를 올리고 있었다. 부관이 표적 확정 창을 열어 놓았다. 확정 단추 위에 커서가 깜박였다.
“2000입니다.”
“안다.”
“확정하시겠습니까?”
“아직이다.”
소콜로프는 탁자 곁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화면 속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운전석 창이 열리고, 사람 손이 컵 두 개를 내밀었다. 옆 차의 사람이 그것을 받았다. 일리야가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말했다.
“차 같습니다. 저희 대대에서 끓이는 것과 같은 냄새가 날 겁니다.”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2001이 지났다. 2010이 지났다. 부관은 확정 창을 닫지 않았고 열린 창을 누르지도 않았다. 커서만 깜박였다. 2040, 소콜로프가 마른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부관이 그 소리에 반사처럼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지하실 전체가 시계 하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낮에는 누구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모두가 초침만 보고 있었다.
2104, 유선 전화가 울렸다. 대령이었다. 소콜로프가 수화기를 들자 대령은 인사 없이 물었다.
“코드를 넣었나?”
“확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홉 시간째 확인이다, 소령. 헌병 차가 방금 사단을 떠났다. 50분이면 그 학교에 닿는다. 그 전에 단추가 안 눌리면 자네는 그 차를 타고 나온다. 부관은 남는다.”
전화가 끊겼다. 부관이 소콜로프를 봤다. 소콜로프는 수첩 앞장 한 귀퉁이를 찢어 무언가를 적고, 접어서 자기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이 코드였는지 아닌지 부관은 묻지 않았다. 일리야는 계단 쪽을 봤다. 운동장으로 차가 들어오면 바퀴가 자갈을 씹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먼저 내려올 것이다. 지하실 사람들은 이제 초침과 계단을 번갈아 봤다.
2152, 유선 전화가 울렸다. 대령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단 통신 장교였다. 그는 전문을 읽는 속도로 말했다. 전문지 맨 위에 발신 시각이 있었다. 2230 모스크바. 이 마을 시계로는 한 시간 이른 시각이었다. 소콜로프는 그 한 시간을 한참 봤다. 모스크바는 한 시간 먼저 사는 곳이었다. 통화가 끝나 갈 무렵 운동장에 바퀴 소리가 들어왔다. 헌병 차는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철봉 옆에 섰다가, 운전석 창 너머로 무전 한 마디를 받더니 그대로 돌아 나갔다. 아무도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다.
*
2230 모스크바, 안보회의실. 긴 탁자 위에 식은 차가 놓여 있었다. 창 너머로 강 건너 건물들이 하나씩 불을 켜고 있었고, 구석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소리를 줄인 채 흘렀다. 화면 속 아나운서는 회랑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창가에 선 사람의 뒷모습이 불빛 속에 있었다. 아무도 그의 앞으로 가지 않았다. 배석자 하나가 종이를 읽었다.
“어제 새벽까지는 밀어붙인다고 했습니다. 그 새벽이 지났습니다. 동쪽에서 어제부터 일이 나고 있습니다. 서쪽에서 증명하는 동안 동쪽에서 잃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밤 회랑에서 물러납니다. 사진은 필요 없습니다.”
창가의 뒷모습은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한 손이 창틀을 한 번 짚었다가 내려왔다. 그 손짓이 결정이었다. 배석자는 종이를 접어 옆 사람에게 넘겼다. 방 안의 누구도 서쪽 들판에서 그 문장이 어떤 종이로 바뀌어 도착하는지 알지 못했다.
*
2200, 지하실 구석에서 부관이 상자 속 전화기를 돌려주기 시작했다. 개인 전화 금지가 풀렸다. 일리야는 제 전화기를 두 손으로 받아 한참 켜지 못했다. 소콜로프는 그가 전원 단추를 누르는 것을 보고 등을 돌렸다. 일리야가 화면에 한 줄을 쳤다. 엄마, 나 돌아가. 지우고, 한 줄 더 쳤다. 엄마, 밥 먹어. 보내기를 눌렀다.
소콜로프는 수첩을 폈다. 뒷장에 두 바퀴 목격이 일곱 줄로 적혀 있었다. 그는 새 줄 하나를 긋고 그 옆에 숫자 8을 적었다. 그리고 그 위에 볼펜으로 가로줄을 한 번 그었다. 더 세지 않기로 한 줄이었다.
2300, 그는 학교 운동장에 올라갔다. 트럭 열이 동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지평선 위가 한 겹 희끄무레했다. 마을 불빛이 구름에 반사된 것이었다. 해가 뜰 시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한참 동쪽을 봤다. 어느 쪽 동쪽에서 무슨 일이 시작됐는지 그는 아직 몰랐다.
수첩 속표지에는 번역 사전에서 따라 그린 한국어 세 글자가 있었다. 그 글자 밑에는 줄이 한 번 그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