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5,368자) · 서한결 · 9월 3일(금)

품목란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540, 헛간 터 앞 국도. 트레일러 첫 대가 후진하며 경적을 두 번 울렸다.

폴란드군 전차 수송 트레일러가 여덟 대씩 세 번 오기로 되어 있었다. 스물두 대를 바르샤바 남쪽 정비창으로 실어 가 처음부터 다시 뜯는다고 했다. 6월에 저쪽이 이 차들을 실어 가려고 부른 것도 트레일러였다. 그 트레일러는 끝내 오지 않았고, 오늘 온 것은 폴란드 국장인 흰 독수리를 문에 단 쪽이었다. 첫 열이 0630에 떠나야 둘째 열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한결은 부엌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천막은 어제 걷혔고, 석 달 동안 작업대로 쓰던 탁자는 할리나의 부엌으로 돌아와 있었다. 탁자 위에 종이 넷과 번호판 하나가 모서리를 맞춰 서 있었다. 열린 창으로 트레일러 경적과 경유 연기가 같이 들어왔고, 그 냄새 밑으로 화덕에서 막 꺼낸 빵 껍질 냄새가 깔려 있었다. 회랑 쪽에서는 둔한 폭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공병이 역습 전날 저쪽 포가 길 위에 흩뿌린 지뢰를 하나씩 찾아 터뜨리는 소리였고, 폭음이 울릴 때마다 탁자 위 종이들이 한 번씩 떨었다. 그는 종이를 하나씩 내렸다.

0.2가 먼저였다. 마레크가 죽은 날 오후, 중고 커넥터의 접점을 세 번에 나눠 펴서 얻은 숫자였다. 그는 그것을 접어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0602, 스물두 번째 전차가 트레일러 경사판 앞에 섰다. 밤새 내린 이슬에 경사판 철판이 젖어 번들거렸다. 표트르가 조종석에서 궤도를 한 번 굴리자 쇠와 쇠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차체가 한 뼘 옆으로 비틀렸다. 한결은 경사판 아래에서 두 손을 들어 왼쪽 궤도 쪽을 가리키고, 손바닥을 천천히 아래로 눌렀다. 표트르가 회전을 낮췄다. 젖은 철판 위에서 궤도판이 한 칸씩 물리며 올라갔고, 차가 트레일러 위에서 숨을 내쉬듯 내려앉았다.

한결은 경사판을 밟고 올라가 조종석 해치를 열었다. 선반 왼쪽에 금이 두 줄 간 안경이 있었다. 그는 접은 종이를 안경 옆에 세웠다. 0.2. 표트르는 그것을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숫자가 나온 날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정비창까지 따라가십니까?”

“아니요. 저는 할 일이 남았습니다.”

표트르가 해치 위로 손을 내밀었다. 악수가 아니었다. 손가락 둘을 펴 허공에 원을 두 번 그렸다. 한결도 같은 손짓으로 받았다.

0630, 첫 열이 떠났다. 다율은 둘째 열 트레일러 옆에 서 있었다. 노트북 대신 렌치 하나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 트레일러 끝에는 공병대 트럭이 어젯밤 회랑에서 끌어온 지뢰 제거기가 묶여 있었다. 옆구리의 멧돼지 그림은 흙에 반쯤 지워졌고 쟁기 날은 한쪽으로 휘어 있었다. 끊어진 실 한 토막이 아직 단자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한결은 탁자로 돌아와 둘째 종이를 들고 나왔다. 소각로 실험의 여섯 줄이었다.

“이건 다율 씨 겁니다. 다율 씨가 적은 거니까요.”

다율은 종이를 받아 한참 봤다. 6월의 자기 글씨였다.

“판 서님, 저 이제 렌치도 있습니다.”

“압니다. 그래도 화면은 버리지 마십시오. 손으로 못 하는 것도 있습니다.”

다율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노트북이 들어 있던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둘째 열이 시동을 걸었다. 그는 트레일러 사다리에 한 발을 올렸다가 돌아보며 말했다. 정비창 주소는 운전병이 안다고.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올라탔다.

브란도프스키는 셋째 열과 함께 떠날 사람이었다. 그는 반쯤 빈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고 한결 앞에 섰다.

“회랑에서는 명령을 드렸습니다. 이제는 다시 못 드립니다.”

“그럼 부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 부탁드립니다. 다음에 제 차가 서면, 10분 안에 와 주십시오.”

한결은 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브란도프스키도 웃지 않았다. 둘 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셋째, 보일러 도면은 가슴 주머니로 들어갔다. 넷째, 날짜 칸이 빈 철수 권고서는 접어서 빈 탄약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날짜 칸은 끝까지 비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번호판만 남았다.

*

1000, 부엌. 전화기가 울렸다. 8월 29일 밤부터 하루에 한 번씩 오던 번호였다. 한결은 여섯 번째에 받았다.

“서한결 씨.”

박 팀장의 목소리 뒤로 사무실 소리가 들렸다. 서울은 금요일 오후 다섯 시였다. 누가 의자를 밀어 넣는 소리, 복사기가 마지막 장을 뱉는 소리가 났다.

“감사 결과가 나왔어. 5월 결속 건. 내가 지시자 칸에 들어가 있는 거, 자네 여권 건하고 한 책상에 올라갔어.”

“압니다.”

“미안하다. 6월에 날짜 적어서 보내라고 한 거, 72시간, 법무팀이 명단 넘긴 거. 나는 회사 사람이라 회사 쪽 문장만 골랐어. 그거 사과하려고 엿새를 걸었어.”

한결은 의자를 빼지 않고 선 채로 들었다. 창밖에서는 할리나가 불탄 헛간 기둥 사이에 노끈을 대고 문틀 너비를 재고 있었다. 한결은 탁자 위 번호판을 봤다. 둘째 자리 숫자가 열에 부푼 채였다. 그는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사과는 안 받겠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복사기 소리도 멎었다.

“…그래. 그럴 만해.”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팀장님 이름을 결속 지시자 칸에서 빼 주십시오. 그 칸엔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자네 앞에 한 줄이 더 붙어. 여권법에 회사 지시 위반까지.”

“이미 붙을 만큼 붙었습니다. 한 줄 더 붙어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날 롤러에 선을 감은 건 제 손이었습니다.”

“나는 내년에 나가는 사람이야. 나가는 사람 이름에 붙는 건…….”

“그래서입니다. 나가실 때 그 칸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박 팀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고, 볼펜 뚜껑을 여닫는 소리가 두 번 났다.

“월요일에 고쳐서 올릴게.”

“감사합니다.”

“언제 와? 아니, 올 수는 있어?”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할리나가 노끈을 감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박 팀장도 더 묻지 않았다.

“하나만 더. 정 반장, 다음 달에 라인으로 돌아가. 그 끝자리 3 번호, 석 달 동안 아무것도 안 찍었대. 자네한테 전해 달래.”

한결은 소리 내어 웃었다. 수화기를 쥔 손이 웃음에 흔들렸다. 박 팀장도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

1510, 국도에서 헛간 터로 내려오는 비탈. 빨간 트랙터 하나가 짐수레를 달고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 우체부에게 빌린 트랙터였다. 할리나가 운전석에 앉았고, 짐수레에는 새 판자가 쌓여 있었으며, 그 판자 꼭대기에 주자가 올라앉아 있었다. 헛간 문을 새로 짤 판자였다. 한결은 비탈 아래에서 손을 흔들었다.

트랙터가 비탈 중간의 패인 자리를 넘을 때 쇠 소리가 났다. 짧고 높은 소리였다. 트랙터는 계속 내려왔는데 짐수레가 따라오지 않았다. 견인 연결부가 떨어져 있었다. 짐수레가 멈칫하더니 뒤로 구르기 시작했다. 비탈 위는 국도였고, 국도 위로 군용 트럭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주자가 판자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한결은 이미 뛰고 있었다. 비탈의 흙이 발밑에서 무너졌다. 그는 짐수레 옆으로 따라붙어 바퀴 앞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판자 무게가 어깨를 밀어붙였고 정비화 바닥이 흙 위에서 반 뼘씩 밀려 올라갔다. 그는 왼손으로 길가의 돌을 끌어다 바퀴 밑에 박았다. 바퀴가 돌을 타고 넘으려다 섰다. 국도까지 4미터였다. 트럭 한 대가 경적을 길게 울리며 지나갔고, 그 바람에 판자 위의 마른 톱밥이 한결의 얼굴로 쏟아졌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어깨를 빼지 않았다. 할리나가 트랙터를 세우는 소리가 비탈 아래에서 났다.

할리나가 트랙터에서 내려 비탈을 올라왔다. 주자는 판자를 끌어안은 채 내려오지 못했다. 한결이 팔을 내밀자 아이가 그 팔에 매달려 내려왔다. 아이의 신발 한 짝이 판자 사이에 끼어 남았다.

견인 연결부의 구멍이 비어 있었다. 고정 핀이 패인 자리에서 튀어 나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결은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비어 있었다. 지난 토요일부터 그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그는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두 개가 손끝에 닿았다. 야누시가 창고 선반 구석에서 찾아내 자기 몫이라며 가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핀이었다. 둘 중 하나는 머리가 긁혀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오래 만지작거린 자리였다.

하나를 구멍에 넣어 보았다. 헐거웠다. 짐수레가 흔들리면 다시 빠질 굵기였다. 그는 두 개를 나란히 겹쳐 밀어 넣었다. 구멍이 꽉 찼다. 망치 대신 돌로 핀 머리를 두 번 두드렸다. 핀 머리가 연결부와 나란해졌다. 한 번 더 눌러 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주자가 그의 바지 주머니 두 개를 번갈아 봤다.

“아저씨 주머니에 이제 뭐 남았어요?”

한결은 두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실밥 몇 가닥과 마른 사탕무잎 한 조각이 떨어졌다. 할리나가 그것을 보고 폴란드어로 한마디 했다. 지나가던 운전병이 옮겼다. 그는 정비창으로 가는 셋째 열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핀 값은 빵으로 치겠답니다. 빵 값에서 빼 준답니다.”

“얼마나 빠집니까?”

“그건 안 알려 준답니다.”

1640, 헛간 터에 새 문틀이 섰다. 한결은 판자 문을 두 팔로 받쳐 들고 서 있었고, 할리나가 경첩에 못을 박았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문이 한 번씩 떨렸고, 그 떨림이 한결의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마지막 못이 들어가자 할리나가 손바닥으로 문을 밀어 보았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주자가 판자 사이에서 찾아낸 신발을 도로 신고 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뛰어나왔다. 문은 다시 닫혔다.

*

2100, 부엌. 할리나는 자러 들어갔고 화덕의 불은 재 밑에서 붉게 숨만 쉬고 있었다.

한결은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번호판 하나뿐이었다. 탁자 끝에 할리나가 행주를 덮어 둔 빵이 하나 있었는데, 누구 몫인지는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 주머니에서 접힌 감열지 한 장을 꺼냈다. 8월 23일 아침 유선 팩스로 온 화물 목록 사본이었고, 열하루 동안 주머니를 옮겨 다니는 사이 접힌 자리가 하얗게 바래 있었다. 가슴 주머니에는 그것 말고도 효력이 정지된 여권과 보일러 도면과 배터리를 끼운 전화기가 들어 있었다. 무엇 하나 그를 어디로 데려다주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탁자 위에 펴고 양 끝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여섯 줄이었다. 점화부, 퓨즈, 냉각수 호스, 윤활유, 배선 묶음. 다섯 줄 위의 글자는 그새 연해져 있었다. 여섯째 줄은 처음부터 품목란이 비어 있었다. 중량 칸에만 숫자가 있었다. 71,400킬로그램.

한결은 그 숫자를 한참 봤다. 소수점이 밀린 것이라고 생각했던 숫자였다. 지금 보니 밀린 데가 없었다. 전차 한 대보다 무거운 무엇이 품목도 없이 그 종이에 붙어 왔다. 무엇인지는 서울만 알 것이다. 물어볼 사람을 떠올리다가 그만두었다. 박 팀장의 칸이 아니라고 했던 줄이었다.

그는 목록을 다시 접었다. 이번에는 세로로 한 번 접어 바닥이 서게 했다. 탁자에 올려놓자 감열지는 한쪽으로 기울었고, 그는 손가락 끝으로 한 번 바로잡았다. 창밖 헛간 터에서 새 문이 바람에 한 번 덜컹했다.

목록은 번호판 옆에 섰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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