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5,199자) · 서한결 · 8월 28일(토)

한가운데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820, 연료 분사 제어부 안에서 커넥터가 세 번째로 안 물렸다.

한결은 스물두 번째 전차 엔진룸 위에 엎드려 덮개 틈으로 팔을 어깨까지 넣고 있었다. 팔뚝에 닿는 쇠가 아직 미지근했다. 개울을 건널 때 스며든 경유가 접점을 번들번들하게 적셔서, 닦아도 닦아도 얇은 막이 남았다. 그는 헝겊을 접어 닦고, 접은 면을 바꿔 다시 닦았다. 헝겊에서 경유 냄새가 났고, 그 냄새 위로 풀 마르는 냄새가 올라왔다. 머리 위에서는 한자리에 선 소리가 한 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관측 드론이었다. 도는 것은 오는 것이고 서 있는 것은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은 그냥 두기로 한 지 오래였다.

0831, 접점이 말랐다. 커넥터가 딸깍 하고 물렸다. 한결은 한 번 더 눌러 보지 않고 덮개를 닫았다. 닫고 나서야 한 번 더 눌러 볼 걸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손은 궤도 쪽으로 가 있었다.

0844, 땅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비지원차가 능선 쪽에서 흙먼지를 끌고 돌아오고 있었다. 짐칸에서 표트르가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다. 한결이 손무전기를 들자 브란도프스키의 목소리가 먼저 왔다.

“정비지원차, 대열을 이탈했습니다. 이유를 말하십시오.”

운전병이 폴란드어로 길게 대꾸했다. 한결은 알아들은 단어가 둘이었다. 스물두 번째. 그리고 고장. 한결이 무전기를 이어받았다.

“대대장님, 정비 중입니다.”

“누구를요?”

“스물두 번째 차를요.”

무전기 속이 오래 조용했다. 발포 소리와 엔진 소리 사이에서 브란도프스키가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판 서,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이제 명령해도 됩니까?”

6월 11일에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날 한결은 대답을 못 했다.

“명령하십시오.”

“정보참모는 러시아 두 번째 제파(차례로 밀려오는 공격 물결)가 그 능선에 닿는 시각을 1200으로 봅니다. 그때까지입니다. 그 뒤에는 차를 버리고 능선을 넘으십시오. 명령입니다.”

“복창합니다. 1200까지. 그 뒤엔 넘습니다.”

“…넘는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한결은 말하고 나서 덧붙였다. “넘는 쪽이 어느 쪽인지는 그때 보겠습니다.”

*

0852, 벌 소리가 한 음 높아졌다. 한 대가 서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내려왔다.

자폭 드론이었다. 토마시가 정비지원차 지붕에 무릎을 세우고 있었고, 한결은 그것을 소리로 알았다. 토마시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는 조준선 속 점이 커지는 것만 봤다. 산탄이 나가고 점이 옆으로 튀었고, 드론이 스물두 번째 전차 앞 흙에 박혀 터졌다. 흙덩이가 포탑 옆면을 두드렸다. 한결은 엎드린 채 그 소리를 세었다. 한 대. 벌 한 마리가 먼저 내려올 때는 그 뒤에 나머지가 소리를 죽이고 기다린다는 것을, 그는 헛간 마당에서 쉰 대를 겪은 뒤로 알았다. 맞은 것이 아니라 간을 본 것이었다. 저쪽 손가락이 이쪽 마당의 크기를 재고 있었다.

0903, 동쪽 하늘 가장자리에 점이 아홉 떠올랐다. 높이는 나무 끝쯤이었고 간격은 일정했다. 다율이 정비지원차 뒤에서 노트북을 열고 요격 드론 둘을 올렸다. 공병대가 멧돼지 답례로 보내 준 마지막 둘이었다. 둘이 둘을 받아 떨어뜨렸다. 일곱이 남았다. 일곱은 둘로 갈라졌다. 넷은 전차로, 셋은 정비지원차로 왔다.

“차 뒤로 붙으십시오! 차체 뒤!”

다율이 소리쳤다. 한결은 이미 전차 옆면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55톤 강철이 드론이 오는 쪽 하늘을 반쯤 가렸다. 표트르가 짐칸에서 산탄총 두 자루를 번갈아 쏘았다. 보충 포수가 탄을 밀어 넣었다. 스무 살이었고, 손이 떨려 탄 두 알을 땅에 떨어뜨렸다. 표트르는 아무 말 없이 그 떨어진 탄을 발로 포수 쪽으로 밀어 주었다. 산탄이 흙과 하늘을 번갈아 쓸었다. 넷 가운데 셋이 떨어졌다. 하나는 전차 위를 지나 한결의 어깨 위 흙벽에 박혔는데, 터지지 않았다. 신관이 불량이었다. 한결은 그 불발탄이 식을 때까지 숨을 쉬지 않았다.

*

0921, 낮은 풀 위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토마시의 눈이 먼저 그것을 봤다. 풀잎 위에서 가는 선 하나가 반짝였다.

“실입니다!”

토마시가 소리쳤지만 정작 자기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는 드론이 아니라 선을 겨누었다. 산탄이 풀 위 한 뼘 높이를 쓸었고, 선이 끊겼고, 선 끝에서 날아오던 것이 허공에서 힘을 잃고 풀숲에 굴러 박혔다. 야누시가 도로 위에서 하던 방식이었다. 토마시는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고 했다. 다만 정비지원차 지붕에서 내려올 때 손이 한 번 떨렸다. 한결은 그것을 봤고, 봤다고 말하지 않았다.

0934, 소리가 바뀌었다.

벌 소리가 아니었다. 무엇이 모래를 체에 거르는 것 같은 소리가 한결의 손무전기에서 났다. 다율의 노트북 화면이 흰 눈으로 덮였다. 그가 띄워 놓았던 요격 드론 한 대가 조종을 잃고 공중에서 몇 바퀴 돌더니 정비지원차 앞 흙에 박혔다.

“전자전입니다.” 다율이 노트북을 한 번 치고 닫았다. “전 주파수를 한꺼번에 눌렀습니다. 이제 저쪽 대대 전부가 이 근처에 모여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전도 화면도 없습니다.”

“무전이 없으면 뭐가 남습니까?”

“손전등이 남습니다.”

표트르가 짐칸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하늘에 대고 두 번 끊어 켰다. 어느 능선에서도 대답은 오지 않았다. 닿는 곳이 있다고 믿고 한 번 더 켰다.

“그 신호 쓰지 마십시오.” 운전병이 말했다. “저쪽도 이제 압니다. 뜻을 아는 건 아니지만, 불빛이 나는 곳이 사람이 있는 곳이란 건 압니다.”

그는 말을 마치기 전에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정비지원차가 시동이 걸렸고, 운전병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한국어로 소리쳤다.

“저를 따라오게 하겠습니다! 이쪽은 시끄러운 차가 하나뿐입니다!”

차가 급하게 방향을 틀어 들판 가운데로 달렸다. 경적이 울렸다. 드론 여섯이 전차를 버리고 그 소음을 따라갔다. 차 뒤꽁무니가 들판을 지그재그로 그으며 점점 작아졌다.

1006, 정비지원차가 들판 끝에서 돌아왔다. 지붕에는 구멍이 일곱이었고 사이드미러 하나가 없었으며, 운전병의 모자가 앞 유리에 걸려 있었다. 운전병은 차에서 내려 한참 서 있다가 한국어로 말했다.

“이탈한 게 아닙니다. 돌아왔습니다. 보고서에 그렇게 적어 주십시오.”

“정비지원차 이탈 없음.”

한결이 그 문장을 받아 말하자 운전병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다가 무릎이 풀려 바퀴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다율이 물통을 건넸다. 물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더 많았다. 드론 여섯은 그 차가 그린 지그재그 끝에서 연료가 떨어졌거나 서로 부딪쳤거나, 어쨌든 돌아오지 않았다.

*

1018, 한결은 궤도 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끊어진 궤도판 양쪽 끝을 구난 도르래로 당겨 맞물려 놓은 것이 한 시간 걸렸다. 이제 핀 하나만 박으면 되었다. 그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핀을 꺼냈다. 하나였다. 열넷으로 시작했던 주머니의 마지막이었다. 손바닥 위의 핀은 차가웠고 머리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망치 소리는 멀리 간다. 드론은 소리로 사람을 찾는다. 한결은 그 둘을 한꺼번에 알았고, 알면서 망치를 들었다. 토마시가 옆에서 산탄총을 들고 한결의 얼굴을 봤다. 한결은 망치를 한 번 들어 보이고, 손가락 하나를 폈다가 접었다. 토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리를 못 듣는 대신 박자를 알았다.

궤도 틈에 꽂아 둔 쇠가 햇볕에 달아 있어서 손바닥의 새살이 한 번 움찔했다. 한결은 장갑을 끼지 않았다. 핀 머리를 맞히는 손은 쇠의 온도를 알아야 했다.

망치가 떨어졌다. 같은 순간 토마시의 총이 하늘로 나갔다.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같았다. 쇠 소리 위에 총소리가 얹혀서 어느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하늘에서는 가려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6월 22일 밤 창고 안에서 토마시가 발전기로 하던 일이었다. 남은 산탄은 여섯 발이었다.

1052, 핀이 박혔다. 한결은 핀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보고 일어났다. 오른쪽 주머니에 습관처럼 손이 갔다. 비어 있었다. 손가락 끝에 바지 안감이 닿았다. 그는 손을 도로 뺐다.

*

1104, 한결은 시동 단추를 눌렀다. 기동기가 돌았지만 엔진은 걸리지 않았다. 1106, 두 번째. 기침 소리가 났다가 멎었다. 1108, 세 번째.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결은 조종석 해치에 한 손을 얹고 가만히 있었다. 표트르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봤다. 한결은 0831의 자신을 떠올렸다. 한 번 더 눌러 볼 걸 하고 생각했던 자신이었다. 그는 말없이 다시 엔진룸 덮개를 열었다. 팔을 어깨까지 넣었다. 커넥터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딸깍 소리의 반쯤에서 멈춰 있었다. 눈으로는 물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유 막이 마르면서 접점을 반 밀어낸 것이었다.

그때 그의 손등 위로 그림자가 떨어졌다. 드론 한 대가 덮개 위 하늘에서 한 번 멈췄다. 높이가 사람 키의 두 배였다. 한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팔을 뺄 시간도 없었다. 토마시의 마지막 산탄이 나갔다. 드론이 옆으로 튕겨 나가 풀밭에 떨어졌다. 터지는 소리가 늦게 왔다.

한결은 커넥터를 엄지로 눌렀다. 딸깍. 이번에는 끝까지 갔다. 그는 커넥터 몸통에 전화선을 두 바퀴 감고 끝을 안으로 접었다. 해치로 내려와 시동 단추를 눌렀다.

1111, 네 번째에 걸렸다.

엔진이 낮게 돌기 시작했다. 한 달 넘게 창고에서 식어 있던 쇠가 천천히 데워지는 소리였다. 한결은 해치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기름 묻은 열이 올라왔고, 귀 안쪽이 오랜만에 엔진 소리로 가득 찼다. 3시간 가까이 벌 소리에 눌려 있던 귀였다. 표트르가 조종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계기를 보다가 선반 앞에서 손을 멈췄다. 선반에 안경이 있었다. 마레크의 안경이었다. 그 옆에 초록색 표지의 여권이 놓여 있었다.

표트르는 안경은 놔두고 여권만 집어 해치 위로 내밀었다.

“판 서님 거랍니다.”

“그건 선반에 두기로 했습니다. 차를 따라가라고요.”

“선반은 차 자리입니다. 주머니는 사람 자리입니다. 판 서님이 사람이라서요.”

한결은 한참 그것을 받지 못했다. 표트르가 해치 위에서 팔을 내민 채 기다렸다. 옆에서 토마시가 빈 산탄총을 어깨에 걸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척했다. 한결은 여권을 받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그 안에는 브란도프스키가 준 부탁서와 배터리를 뺀 전화기가 이미 있었다. 단추를 채우는 손이 한 번 헛돌았다.

*

1140, 골다프 동쪽 마을의 옛 학교 지하실. 모니터 한가운데 손 하나가 크게 잡혀 있었다.

관측 드론이 세 시간 넘게 한자리에서 본 영상이었다. 엔진룸 덮개 안으로 들어간 손이 한 번 나와서 커넥터에 철사를 감고 있었다. 감고, 한 번 더 감고,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화면 한가운데에서 철사 두 바퀴가 풀리지 않은 채 반짝였다.

3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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