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5,192자) · 서한결 · 8월 28일(토)
0400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359, 맨 앞 전차의 포탑 위에서 손전등 빛이 두 번 끊겨 깜박였다. 짧게, 쉬고, 짧게.
빛은 뒤 차로 넘어가고 또 뒤 차로 넘어갔다. 무전기는 어젯밤부터 입을 닫았고 여단은 종이와 손짓으로만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두 번씩 끊기며 대열을 따라 내려오는 모양이, 한결 눈에는 빨랫줄을 타고 물방울이 한 방울씩 굴러오는 것 같았다. 표트르가 혼자 쓰던 신호가 어느 사이 여단 전체의 신호가 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그것을 「두 바퀴」라고 불렀다. 사단 참모부 신호표에는 「손전등 2회 점멸」이라고 올라 있다고 했다. 이름을 안 붙인 쪽은 참모부뿐이었다. 표트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손전등은 어느 병사의 것이든 건전지 두 알이면 켜졌고, 두 알짜리 신호는 전파 방해로도 지울 수 없었다.
한결은 정비지원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는 운전병이, 뒷좌석에는 다율이 노트북을 무릎에 얹은 채 있었고, 짐칸 벤치에는 표트르와 토마시와 보충 포수가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 위쪽에 숫자 하나가 떠 있었다. 47. 여단 원래 전차 스물여섯에 되살린 스물하나를 더한 값이었다. 지휘소 벽에 꽂힌 참모부 종이에는 회랑 입구 돌파에 가동 전차 마흔다섯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유는 둘이었다. 한결은 그것이 넉넉한 둘인지 모자란 둘인지 따지지 않기로 했다.
앞에서 구난전차 엔진이 올랐다. 구난전차 뒤에는 굵은 쇠줄이 걸려 있었고, 쇠줄 끝에서 스물두 번째 전차가 빈 몸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한결의 가슴 주머니에는 어제저녁 브란도프스키가 건넨 종이가 접혀 있었다. 지시서가 아니라 부탁서라고 했다. 서는 차는 10분 기다린다. 10분이 지나면 대열은 간다. 그때까지 못 일으킨 차는 정비관의 몫이다.
“10분이면 충분합니까?”
운전병이 핸들을 쥔 채 물었다. 한결은 대답 대신 손목시계의 초침을 한 번 봤다.
“충분한 차도 있고 아닌 차도 있습니다.”
0404, 땅이 먼저 울렸다. 마흔일곱 대가 한꺼번에 선을 넘는 소리였다. 궤도가 흙을 물어뜯고, 대열 전체가 앞으로 쏠렸다. 한결은 조수석 창을 내리고 귀를 열었다. 포성보다 먼저 듣고 싶은 소리가 있었다. 벌 소리였다.
없었다.
0409, 다율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판 서님, 활공폭탄 경보 칸이 0입니다.”
“어제도 0이었습니다.”
“오늘은 뜻이 다릅니다.”
그는 화면 옆에 붙인 종이를 볼펜으로 짚었다. 참모부 예상표였다. 역습 첫 3시간, 러시아 근접 지원 출격 40회 안팎. 그 아래 칸이 비어 있었고, 다율은 거기에 숫자 하나를 적었다. 0. 볼펜 끝으로 한 번 더 덧쓴 뒤 말했다.
“저쪽 조기경보기도 안 뜹니다. 활주로 열상에도 시동 건 기체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설명이 없습니다.”
한결은 좋은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 8월 6일 밤 뒤로 하늘이 조용했던 것이 어떻게 끝났는지, 이 차 안의 세 사람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0411, 첫 접촉. 한결은 정비지원차 창으로 그것을 봤다. 능선 위에서 러시아 선두 전차의 포구 불꽃이 반짝였고, 이쪽 선두가 그 불꽃의 자리에 먼저 쐈다. 불꽃 하나가 오렌지색 공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검은 연기 기둥으로 서는 데 4초가 걸렸다. 같은 4초 사이에 이쪽 차 두 대가 연달아 쏘았고, 연기 기둥이 둘 더 섰다. K9 자주포 탄이 머리 위를 지나가며 공기를 찢었다. 운전병이 폴란드어로 짧게 욕을 하고, 곧 한국어로 바꿔 한 번 더 했다. 한결에게 배운 욕이 아니라 죽은 전차장 야누시에게 배운 것이었다고, 나중에 운전병이 털어놓았다.
*
0412, 고도 3,000미터. 고샤는 스로틀을 당겨 놓고 아래 들판을 훑었다.
방공 레이더가 안 붙었다. 경고음이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채 일 분이 갔고, 계기판 가장자리의 녹색 숫자만 줄어들었다. 평소의 3분짜리 지원이면 지금쯤 기체 머리를 돌려야 했다. 그녀는 돌리지 않았다. 아래에서 러시아 선두 전차들이 연기를 끌고 능선을 오르고 있었고, 그 위로 우리 전차 마흔일곱이 짧은 간격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무엇이 하늘을 이렇게 비웠는지 몰랐다. 모르는 채로 쓰기로 했다.
“보베르, 연료.”
“돌아갈 만큼보다 조금 더 남았습니다.”
“그 말 또 하네.”
“사실이라서요, 대위님.”
0415, 첫 번째 진입. 능선 오른쪽의 전차 셋이 조준경 안에서 한꺼번에 불꽃을 뱉었다. 0419, 두 번째. 0424, 세 번째. 3분이 12분이 되는 동안 하늘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날이 오면 좋은 일인 줄 알았다. 막상 오자 좌석이 조금 넓게 느껴졌다.
*
0431, 대열 왼쪽에서 전차 한 대가 속도를 잃었다. 포탑에 분필로 쓴 11이 보였다. 배기구 연기가 흰색으로 변했다가 끊겼다.
“대열이 안 섭니다.”
운전병이 말했고, 한결은 시계를 보며 문을 열었다. 서 있는 차는 어디서든 표적이었다. 정비지원차가 대열을 비껴 나가 11호차 옆에 멈추자, 저쪽 포가 그 서 있는 것 둘을 찾아 들판 건너편에서 대답했다. 첫 탄이 100미터 앞에 떨어졌다. 흙이 차 지붕을 두드렸다.
엔진 덮개를 열자 탄내가 났다. 12일 아침 마이크로파에 반쯤 탄 배선이 있었다. 보기에는 멀쩡해서 그동안 아무도 열어 보지 않은 것이었다. 피복이 진동에 벗겨져 차체에 닿아 있었다. 한결은 닿은 선을 떼어 두 바퀴 감아 묶었다. 끝을 안으로 접었다. 점화가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닫으려다 손을 멈췄다. 옆 가닥의 피복도 같은 색으로 눌어 있었다. 눈으로는 멀쩡했다. 손가락으로 훑자 껍질이 부스러졌다.
“판 서님, 걸렸습니다. 가시죠.”
“40초만 더요.”
표트르가 엔진 덮개 위에서 한결을 봤다. 두 번째 탄이 왔다. 이번에는 50미터였다. 한결은 옆 가닥에도 두 바퀴를 감았다. 한 번 더 확인하는 데 쓴 40초였다. 11호차가 대열로 돌아갔고, 한결은 정비지원차로 뛰었다. 시계를 보니 6분 20초가 지나 있었다.
0439, 다율의 화면에서 47이 46으로 바뀌었다. 곧이어 45가 되었다.
“17호가 섰습니다. 앞에서 400미터요.”
“마흔다섯이군요.”
“딱 마흔다섯입니다. 한 대 더 서면 종이 아래입니다.”
운전병이 액셀을 밟았다. 정비지원차가 흙길 위에서 뛰었다. 17호차는 포탑을 옆으로 튼 채 연기를 뱉고 있었다. 연료 배관 끝의 조임쇠가 풀려 경유가 엔진 위로 흘러내렸다. 불이 붙기 전에 한결이 조임쇠를 새로 물렸다. 낡은 조임쇠가 말을 안 들어 전화선을 꺼냈다. 두 바퀴. 끝을 안으로.
“이 사람, 전화선 없으면 전쟁을 어떻게 합니까?”
토마시가 소리가 안 들리는 귀 대신 입 모양을 읽고 웃었다. 0448, 17호차 엔진이 돌았다. 10분 가운데 9분 50초였다. 한결은 지시서의 10분을 지켰다. 지킨 것이 아니라 간신히 넘지 않은 것이었다.
*
0605, 해가 능선 위로 회색으로 올라왔다. 회랑 한가운데 개울을 건널 때였다.
구난전차가 먼저 건넜다. 쇠줄이 물속에서 팽팽해졌다가 소리 없이 끊겼다. 스물두 번째 전차가 개울 둑에서 옆으로 미끄러졌다. 왼쪽 궤도가 기동륜에서 벗겨져 풀어졌고, 궤도판 몇 개가 흙 위로 길게 눕혀졌다. 구난전차는 끊긴 줄을 단 채 서지 않았다. 서면 다음 포탄이 그 자리로 온다는 것을 구난전차 운전병도 알았다.
0606, 처음으로 무전이 열렸다. 선두가 접촉선을 넘어서자 여단이 침묵을 풀었다. 한결의 귀에 브란도프스키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판 서, 대열은 계속 갑니다. 스물두 번째는 정비관 책임입니다. 정비지원차도 앞으로 붙이십시오. 큰 차는 표적입니다.”
“알겠습니다. 차는 보내겠습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압니다.”
표트르가 내리려 했다. 한결은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표트르 자리에는 아직 차가 없었다. 차가 서야 표트르가 앉는다. 차가 서려면 한결 혼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표트르는 한참 한결을 보다가 정비지원차 짐칸으로 돌아갔다. 다율이 문에서 노트북을 안고 내리다가 도로 올라갔다. 운전병이 시동을 걸었다. 차는 연기와 이삭 먼지 속으로 멀어졌다.
한결은 개울 둑에 선 스물두 번째 전차를 올려다봤다. 개울물은 얕고 맑아서 끊어진 궤도판의 쇠 빛이 바닥 자갈 사이에서 갈색으로 비쳤다. 물가 부들 줄기에는 거미줄이 걸려 있었고, 줄마다 아침 이슬이 둥글게 맺혀 늘어서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 이 둑은 러시아 포병 관측병이 쓰던 자리였을 것이다. 풀이 한 평쯤 눕혀진 자리에 담배꽁초 셋이 놓여 있었다. 끊어진 궤도의 틈은 한 군데였다. 한 군데면 핀 하나로 이을 수 있었다.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나. 왼쪽 주머니에는 야누시의 둘이 있었다. 그건 세는 핀이 아니었다.
연료 분사 제어부 덮개부터 열기로 했다. 덮개를 떼자 고무 패킹 가장자리에 경유가 번져 있었다. 개울을 넘을 때 차체가 기울며 스며든 것이었다. 그의 등 뒤로 대열의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0742, 손무전기가 치직거렸다. 운전병이 두고 간 것이었다.
“지상 부대, 여기는 고샤. 이 주파수를 듣는 사람 있습니까?”
한결은 제어부 덮개 밑에서 손을 빼 무전기를 집었다. 기름 묻은 손으로 송신 단추를 눌렀다.
“여기는… 들립니다.”
“목소리가 맞네요. 아무도 아닌 정비관, 들립니까?”
한결은 대답하기까지 조금 걸렸다. 그 말은 할리나가 한 말이었다. 고샤가 트럭 문을 닫기 직전에 들은 말이었다.
“들립니다. 고샤 대위님.”
“우리 비행단 정비대가 이제 그 말을 별명으로 씁니다. 고쳐서 돌려보낸 사람은 전부 ‘아무도 아닌 사람’이라고요. 저는 처음 쓴 사람한테 허락을 안 받았네요.”
“허락합니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이라, 할머니께 받으셔야 합니다.”
무전 속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났다. 머리 위로 날개 그림자가 한 번 지나갔다. 아주 낮았다. 기체가 기울며 한결 쪽을 한 번 봤다.
“혼자예요?”
“차 한 대하고요.”
“그게 혼자 맞네요.” 웃음이 사라졌다. “연료가 없어요. 돌아갑니다. 그런데 동쪽에서 소리가 여럿 올라오고 있습니다. 제 센서에 점이 많아요. 낮고 느립니다.”
“벌 소리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말로는 떼입니다.” 고샤의 목소리가 한 번 끊겼다가 이었다. “물어보지 않을게요. 도망가라고도 안 하고. 보베르, 고도.”
날개 소리가 멀어졌다. 하늘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하늘 한구석에서 가늘고 높은 소리가 하나, 둘, 곧 여럿으로 불어났다.
한결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오른쪽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하나였다. 위에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손바닥의 핀은 그 소리에도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