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5,470자) · 서한결 · 8월 27일(금)
2100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2041, 사탕무밭 가장자리에서 첫 엔진이 깨어났다. 해가 지고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한 대가 걸리자 옆 차가 걸렸고, 그 옆 차가 걸렸다. 하루 꼬박 식어 있던 쇠가 한꺼번에 데워지면서 위장망 밑에서 경유 탄내와 마른 사탕무잎 냄새가 섞여 올라왔고, 그물 끝에 맺힌 이슬이 엔진 떨림에 후드득 떨어졌다. 한결은 맨 끝 스물두 번째 차의 견인 고리 옆에 서서 시동 소리를 셌다. 스물이 걸렸다. 한 대가 남았다.
스무 번째 차였다. 스타셰크 상사가 해치에서 몸을 반쯤 내밀고 손바닥을 펴 보였다. 기동기가 딸깍거리기만 하고 돌지 않았다. 한결은 밭고랑을 뛰어 건너가 엔진실 옆 축전지 덮개를 열었다. 손전등을 입에 물자 단자 하나가 보였다. 단자 둘레에 하얀 녹 가루가 피어 있었고, 하루 종일 위장망 밑에 고인 습기가 그 위를 적셔 놓았다. 그는 칼등으로 가루를 긁어내고 단자를 다시 조였다. 조인 너트 위에 전화선을 두 바퀴 감았다. 스타셰크가 다시 눌렀다. 네 번째에 걸렸다. 2분 40초였다. 스물하나가 다 걸렸고, 네 번째에 걸린 차가 셋이었다.
2045, 브란도프스키가 종이 한 장과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밭고랑을 건너왔다. 무전이 닫힌 뒤로 그는 걸어 다니는 무전기가 되어 있었다.
“지시서가 아닙니다. 부탁서입니다.”
한결은 손전등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읽었다. 짧은 글에 10분이라는 숫자가 두 번 나왔다. 서는 차를 대열이 얼마나 기다리는지, 그 뒤에는 누구 몫이 되는지가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는 서명 대신 이름 첫 글자 하나가 있었다.
“서명이 없습니다.”
“서명하면 명령이 됩니다. 정비관님께는 명령을 못 드립니다. 내일 새벽까지는요.”
브란도프스키는 작은 물건을 내밀었다. 해 지기 전에 쇠 상자로 들어갔던 한결의 전화기였다.
“상자는 오늘 밤 후방으로 갑니다. 배터리가 빠진 전화기는 돌멩이와 같습니다. 돌멩이는 주인이 들고 다니십시오.”
한결은 전화기를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번호판 모서리와 배터리와 전화기가 한 주머니에서 서로 자리를 다퉜다. 그 안 어딘가에 아직 듣지 않은 목소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
2100, 종대가 밭을 나와 국도로 올라섰다. 한결은 정비지원차 조수석에서 손목의 태엽 시계를 봤다. 초침이 12를 넘어갔다. 서울은 새벽 네 시였다. 어머니가 누운 구립 병원 복도에는 지금 불이 절반만 켜져 있을 것이다.
같은 순간 무전기가 하얗게 끓었다. 운전병이 채널을 돌렸고, 어느 채널이나 모래를 쏟는 소리였다. 다율이 뒷좌석에서 계기판 옆 테이프에 적힌 8에 줄을 긋고 7을 썼다. 역습까지 일곱 시간이었다.
국도 위의 대열은 불을 하나도 켜지 않았다. 운전병은 앞차 뒤판 아래쪽에 누가 칠해 둔 흰 페인트 줄 하나만 보고 따라갔는데, 그 줄이 앞차 배기구의 뜨거운 바람에 흔들려 보일 때마다 핸들을 쥔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가 다시 쥐었다. 열린 창으로 아스팔트에 남은 낮의 열기와 경유 냄새가 같이 들어왔다.
2112, 국도 첫 굽이에서 구난전차가 대열 옆에 붙었다. 스물한째 차는 스물두 번째를 내려놓고 대열로 들어가야 했다. 구난전차 승무원이 해치에서 내려와 견인 걸쇠를 들어 보였다. 걸쇠를 꿰는 고정 핀이 없었다. 지난주 회수 작업에서 진흙에 빠뜨렸다고 했다.
한결의 손이 먼저 오른쪽 주머니로 갔다. 하나 남은 궤도 연결핀이 손끝에 닿았다. 굵기는 대강 맞을 것이다. 등 뒤로 전차들이 한 대씩 지나가며 흙바람을 끼얹었고, 지나가는 궤도 소리가 아스팔트를 긁을 때마다 발밑이 한 번씩 떨렸다. 그는 핀을 쥐었다가 놓았다. 내일 회랑에서 궤도가 끊기면 그 틈을 이을 것은 이 핀 하나뿐이었다. 스물한째 차의 공구함에서 굵은 볼트 하나를 꺼내 걸쇠에 꿰고, 너트가 진동에 풀리지 않게 전화선을 두 바퀴 감았다. 끝을 안으로 접은 뒤 강철줄을 한 번 더 당겨 봤다. 줄이 낮게 울었다. 걸린 시간은 2분이었다.
구난전차 승무원이 볼트 머리를 장갑 낀 손으로 두드려 보고 엄지를 들었다. 스물한째 차가 줄을 벗고 대열로 들어갔다. 표트르와 토마시가 그 차에서 내려 정비지원차 짐칸으로 올라왔다. 표트르는 자리에 앉기 전에 끌려가는 스물두 번째 차를 한 번 돌아봤다.
*
2200, 모스크바. 회의실 벽의 지도 화면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은 발트해 남쪽의 좁은 회랑이었고, 오른쪽은 이 방에서 일곱 시간 떨어진 동쪽 바다였다. 긴 탁자 끝자리는 이번에도 뒷모습이었다. 탁자 위에는 깎은 연필이 자리마다 줄지어 있었는데, 저녁 내내 아무도 그것을 집지 않아서 연필 끝마다 천장 등의 노란 빛이 한 점씩 맺혀 있었다.
총참모부 대장이 말했다.
“저쪽 여단은 내일 새벽에 나옵니다. 그 새벽에 우리 항공이 위에 있으면 끝납니다. 회랑은 계획대로 갑니다.”
“브뤼셀의 나토 회의는 아직 성명 문구를 고르고 있습니다. 그 문구가 정해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외무부 차관이 물었다. 대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당직 장교가 쪽지 한 장을 배석자에게 건네고 물러났다. 배석자가 읽었다.
“극동 경계 레이더 보고입니다. 한반도 서쪽 내륙에서 탄도탄 다수 발사. 서울 시각 0400입니다.”
외무부 차관이 서류철을 덮었다.
“동쪽이 흔들립니다. 한국이 쏘았고 중국이 받을 겁니다. 그 바다에 우리 항구가 있습니다.”
“동쪽은 베이징의 일입니다. 서쪽이 우리 일입니다.”
“베이징의 일이 우리 항구 앞에서 벌어지면 우리 일이 됩니다. 항공을 서쪽에 다 두고 동쪽 하늘을 비울 수는 없습니다.”
탁자 끝의 등이 의자에서 조금 앞으로 기울었다. 배석자가 그 어깨 가까이 귀를 댔다가 물러섰다.
“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일 새벽까지는 밀어붙인다. 다만 항공 연대 둘은 오늘 밤 극동 경계로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대장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배석자는 쪽지 뒷면에 두 줄을 적어 옆 사람에게 넘겼다. 그 종이가 서쪽 들판의 새벽 하늘에서 무엇을 지울지, 방 안의 누구도 묻지 않았다.
*
1500, 워싱턴. 금요일 오후의 상황실 탁자에는 포장도 안 뜯은 샌드위치가 여럿 놓여 있었다.
벽 화면 하나가 한반도로 바뀌었다. 서쪽 내륙에서 가는 호 여러 개가 바다 쪽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합참의장이 숫자를 읽다가 멈췄다. 국가안보보좌관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쏘지 말라 했는데 쏘았다.”
방이 조용해졌다. 복사기 하나가 돌아가다 멎었고, 천장 송풍구의 바람이 탁자 위 브리핑 종이 모서리를 한 번 들썩였다. 탁자 끝에는 소매를 걷은 사람의 등이 있었고, 비서실장이 그 등 쪽으로 몸을 숙였다가 일어섰다.
“지금은 어느 쪽으로도 항모를 보내지 않는다. 지켜본다.”
국무부 차관보가 손을 들었다.
“폴란드는요? 바르샤바는 오늘 밤 역습합니다. 지지 성명을 기다립니다.”
“성명을 내면 한국이 쏜 것까지 우리가 받아 준 걸로 읽힙니다.”
“안 내면 폴란드가 혼자 나간 걸로 읽힙니다.”
“보류입니다.”
이번에는 결정문이 인쇄되지 않았다. 인쇄할 문장이 없었다.
*
2148, 국도가 회랑 쪽 들판으로 꺾이는 자리에서 대열 맨 앞이 섰다. 다율이 정비지원차 뒷좌석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노트북 옆구리 단자에서 가는 실 하나가 문틈으로, 문틈에서 어둠으로 이어져 있었다. 개울 둑에서 주운 러시아 드론의 실이었다. 전파는 막혀도 실은 막히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멧돼지가 그려진 지뢰 제거기가 먼저 굴러갔다. 사람보다 먼저 회랑에 들어가는 것은 그 차였다.
2203, 제거기의 열상 화면에 둥근 점이 여럿 떴다. 길 위에 흩어진 점들이 아직 미지근했다.
“지뢰입니다. 낮에 포로 뿌린 겁니다. 지도에 없는 길이 됐습니다.”
다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대열은 1.5킬로미터 길이로 어둠 속에 서 있었고, 선 대열은 날이 밝으면 표적이었다. 다율은 제거기의 쟁기 날을 내리고 길 한쪽을 밀어 나갔다. 화면 속 흙이 한 줄로 뒤집혔다. 둥근 점 하나가 쟁기 날 끝에 걸려 길 밖으로 밀려날 때마다 다율은 숨을 참았고, 화면이 흔들리지 않으면 숨을 내쉬었다.
2219, 대열 가운데에서 흰 김이 올랐다. 열넷째 차였다. 낮에 전화선으로 감아 둔 냉각수 호스가 공회전의 열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새고 있었다. 한결은 정비지원차에서 뛰어내려 서 있는 전차들 사이를 달렸다. 카롤 하사가 해치 위에서 상의로 김을 덮고 있었다. 한결은 엔진룸 틈으로 손을 넣었다. 낮에 감은 선 위에 한 바퀴를 덧감으면 1분이면 끝났지만, 덧감은 자리는 오늘 밤은 버티고 새벽에 터진다. 그는 선을 풀고 호스 끝을 2센티미터 잘라 낸 뒤, 새 자리에 두 바퀴를 다시 감았다. 손등에 끓는 물이 튀어 살갗이 따끔했다.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김이 가라앉는 데 4분이 걸렸다.
정비지원차로 돌아왔을 때 다율의 화면 속 흙길은 거의 끝에 닿아 있었다. 31분이 걸린 길이었다.
2236, 화면이 멈췄다. 실이 어딘가에서 끊겨 있었다. 마지막 장면 속에서 제거기는 쟁기 날을 든 채 길 끝에 서 있었다. 돌아올 수는 없지만 그 자리가 열린 길의 끝이었다.
“길은 열렸습니다. 그런데 열렸다고 알릴 방법이 없습니다.”
걸어서 알리면 맨 뒤까지 40분이었다. 표트르가 짐칸에서 내려 손전등을 들고 맨 앞 전차 위로 올라갔다. 그는 손바닥으로 유리를 가리고 빛을 두 번 끊어 보냈다. 짧게, 쉬고, 짧게. 마치에이 중사가 해치에서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표트르는 한 번 더 보내고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치에이가 제 손전등을 꺼내 뒤 차에 같은 빛을 넘겼다. 빛은 차에서 차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이 두 번씩 끊기며 대열을 따라 멀어지는 동안, 한결은 그 빛이 닿는 차의 번호를 머릿속에서 하나씩 불렀다. 4분 뒤, 대열 맨 끝 구난전차 쪽에서 빛 두 개가 끊겨 돌아왔다.
“저게 뭡니까?”
운전병이 물었다. 표트르는 전차에서 내려오며 손가락 둘로 허공에 원을 두 번 그렸다.
“두 바퀴.”
한결은 그 손가락을 봤다. 석 달 동안 자기 손이 철사를 감던 모양이었다. 표트르는 그것을 한 번도 배운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대열이 움직였다. 한 대씩 제거기가 뒤집어 놓은 흙길을 밟고 지나갔다. 지나간 차마다 꽁무니에서 빛이 두 번 끊겼고, 전차장들은 그 빛을 서로 두 바퀴라고 불렀다.
*
2351, 출발선 뒤 숲. 운전병이 무전기 다이얼을 러시아 쪽 주파수에 대 놓고 있었다. 우리 쪽 채널은 모래 소리뿐이었지만 저쪽 말은 잡음 밑에서 낮게 들렸다. 조종사와 관제소가 주고받는 짧은 숫자들이었다. 운전병은 할머니에게 배운 러시아어로 그 숫자를 받아 적다가 볼펜을 멈췄다.
그 소리가 한꺼번에 끊겼다.
운전병이 다이얼을 좌우로 돌렸다. 한 채널, 또 한 채널. 저쪽 비행기의 말이 다 없어졌다.
“조용합니다. 이렇게 조용한 건 5월 이후 처음입니다.”
다율이 차창으로 동쪽을 봤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역습까지 네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결은 오른쪽 주머니 위에 손을 얹었다. 핀은 하나 그대로였다. 태엽 시계는 2353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은 아침 일곱 시가 가까웠고, 병원 복도의 불이 다 켜질 시각이었다.
표트르의 손전등은 꺼진 채 그의 무릎 위에서 동쪽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