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5,283자) · 서한결 · 8월 27일(금)

종대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900, 불탄 헛간 뒤 사탕무밭. 한결은 위장망 밑을 몸을 낮춘 채 걷고 있었다.

전차 스물한 대가 밭고랑 사이에 이마를 맞대고 서 있었다. 스물두 번째 차는 맨 끝에서 견인줄을 단 채 쉬었다. 위장망은 낮은 그물이었고, 그물 위에는 말라 가는 사탕무 잎과 마른풀이 덮여 있었다. 엔진은 어제 저녁부터 전부 꺼져 있었다. 쇠가 식으면 열 영상에 흙과 같은 색으로 찍힌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차에 불을 넣지 않는다. 불을 넣는 것은 어두워진 뒤였다. 역습까지 19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결은 납작한 수첩을 들고 차 앞마다 멈췄다. 차장들이 해치에서 얼굴을 내밀고 차대번호 끝 세 자리를 불렀다. 그가 수첩의 숫자와 맞춰 보고 연필로 점을 찍었다. 이 숫자는 한 대씩 그가 굴린 차의 이름이었다.

“212.”

“212. 6월 22일 새벽, 야누시가 3 쓴 차.”

한결이 중얼거리자 전차장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에이 중사였다. 그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한결은 다음 차로 갔다. 다음은 카롤 하사였다. 열넷째 차였다.

“176.”

“176. 핀 쓴 차. 점화부는 두 번 갈았습니다.”

“두 번이요?”

“한 번은 불에 탔고, 한 번은 손으로 눌러 보냈습니다.”

카롤은 웃지 않았다. 웃어야 하는 말인지 몰랐다. 한결은 점을 찍고 다음으로 걸어갔다. 한 대마다 수첩에는 점 하나가 늘었고 머릿속에는 이야기 하나가 늘었다. 스무 대째에 스타셰크 상사가 해치에서 몸을 내밀었다.

“정비관님, 이 차는 3주 전까지 제 차가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저는 판 서께서 만든 차를 몹니다.”

“차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있던 걸 살린 겁니다.”

스타셰크는 해치 위로 손을 올려 차 포탑 옆면을 한 번 두드렸다. 두드린 자리에 분필 숫자 20이 쓰여 있었다.

0940, 하늘 높은 곳에서 소리가 한 번 지나갔다. 한결은 걸음을 멈췄다. 차장들이 해치 안으로 머리를 넣었다. 위장망 아래 스물두 대의 밭이 한꺼번에 숨을 멈췄다. 소리는 20분 동안 밭 위를 돌았다. 한결은 그 20분 동안 사탕무 줄기를 하나 뽑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흙 냄새가 손가락 사이에서 올라왔다. 소리는 서쪽으로 멀어졌다.

*

1100, 밭 가장자리. 영토방위군 병사 둘이 쇠 탄약 상자를 들고 줄 맨 앞차 옆에 섰다.

“휴대 전화를 전부 이 안에 넣어 주십시오.”

브란도프스키가 영어로 말했고, 차장들이 줄지어 전화를 꺼내 쇠 상자에 떨어뜨렸다. 화면이 꺼진 것도 있었고 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전파는 한 번만 나가도 좌표가 된다. 쇠 상자는 뚜껑을 닫으면 전파를 가둔다는 것을 열흘 전 다율이 가르쳐 주었다. 마치에이 중사는 전화기를 넣기 전에 화면을 한 번 켜서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봤다. 아이 사진인지 아내 사진인지 한결은 보지 않았다. 마치에이는 화면을 끄고 전화기를 상자 맨 위에 엎어 놓았다. 상자가 가득 차고 뚜껑이 닫혔다. 영토방위군 병사 둘이 상자를 들어 밭 가장자리 트럭 옆에 내려놓을 때 안에서 플라스틱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한결은 자기 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배터리는 아침에 이미 빼서 가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1315, 한낮의 열기가 위장망 밑으로 들어왔다. 한결은 열넷째 차 옆을 지나다 멈췄다. 엔진룸 틈에서 흰 김이 가늘게 올라오고 있었다.

냉각수가 새고 있었다. 식은 엔진에서 새는 물이 아니었다. 어제 시동을 끈 뒤에도 남아 있던 열이 오늘 한낮 햇볕을 받아 배관 이음으로 새어 나왔다. 하얀 김은 열 영상에서 밝게 번질 것이다. 위장망 한가운데에 켜진 전구와 같았다.

“카롤 하사, 위로 올라가서 위를 막아.”

한결은 정비복 상의를 벗어 배관 쪽 틈으로 밀어 넣어 김을 눌렀다. 새는 이음은 호스 클램프(호스를 조이는 고리)가 헐거워져 있었다. 클램프를 새로 갈려면 엔진룸 덮개를 열어야 한다. 덮개를 열면 김이 위로 퍼지고, 열고 닫는 데 6분이 걸린다. 위에서는 오전에 지나간 소리가 돌아올 시각이 가까웠다.

한결은 주머니에서 전화선을 꺼냈다. 호스 이음 위로 선을 두 바퀴 돌려 감고, 남은 끝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은 이제 이 일을 생각하지 않고 했다. 두 바퀴째 선 끝을 접는 순간, 새던 물이 가늘어졌고 곧 멎었다. 김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걸린 시간은 2분이었다.

“한 번 더 보십시오.”

카롤이 말했다. 한결은 이음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이 젖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눌러 보았고, 한 번 더 확인하는 데 쓴 시간이 40초였다. 그 40초 사이에 하늘 높은 곳에서 소리가 다시 오기 시작했다. 한결은 상의를 다시 입고 사탕무잎 아래로 몸을 눕혔다. 소리는 머리 위를 한 번 지나갔다. 김은 이미 없었다.

*

1340, 학교 지하실. 소콜로프는 오늘 아침부터 회랑 안 대대 지휘소에 가 있어서 지하실에는 일리야와 부관만 있었다.

일리야가 모니터에서 머리를 들었다.

“소령님이 말씀하신 사탕무밭은 열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이 없는 것이 이상한 거다.”

소콜로프의 목소리는 위성 전화 안에서 지직거렸다. 일리야는 수화기를 어깨에 끼운 채 화면 속 밭을 봤다. 위장망 밑은 흙과 같은 색이었다. 한 군데 위장망이 한낮에 하얗게 번쩍인 것이 40초 있었고, 그 뒤에는 사라졌다. 일리야는 그 40초를 기록해 두었다. 말하지는 않았다. 소콜로프는 무엇을 말하려다가 전화를 끊었다. 지하실에는 계단 위로 올라오는 오후의 먼지 냄새가 났다.

*

1610, 위장망 밑. 벌 소리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높지 않았다.

소리는 밭 가운데, 낮에 김이 올랐던 열넷째 차 위에서 멈췄다. 한자리에 선 소리였다. 한결은 사탕무 고랑에 엎드린 채 그물코 사이로 하늘을 봤다. 검은 점 하나가 포플러 꼭대기 높이에 떠 있었고, 프로펠러가 내리누르는 바람이 마른 사탕무잎을 한 방향으로 눕히며 위장망 끝을 가늘게 떨게 했다.

열넷째 차 옆 고랑에서 누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지난주 다른 대대에서 넘어온 스무 살 보충 포수였다. 그는 위장망 끝으로 기어 나가 숲까지 뛸 자세였다. 표트르가 팔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소리 없이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포수의 군화 뒤축이 흙을 두 번 찼다가 멈췄다. 열 영상에서 서 있는 쇠는 흙과 같은 색이지만, 뛰는 사람은 불처럼 밝다.

1613이 지나고 1615가 지났다. 점은 내려오지도 올라가지도 않았다. 한결은 사탕무 줄기를 쥔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줄기가 손 안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줄기를 놓고 흙을 한 줌 쥐었다. 흙은 미끄러지지 않았다.

1617, 소리가 올라갔다. 점은 동쪽으로 한 번 기울더니 멀어졌다. 표트르가 그제야 발목을 놓았다. 포수는 고랑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 일어나지 못했고, 표트르는 그의 등에 붙은 마른 잎 하나를 아무 말 없이 떼어 냈다.

“못 보고 간 겁니까?”

카롤 하사가 해치 틈으로 속삭였다.

“봤으면 벌써 포가 왔을 겁니다.”

한결은 그렇게 말하고 동쪽 하늘을 오래 봤다. 못 본 것인지, 보고도 세어 두기만 한 것인지는 그도 몰랐다.

*

1630, 천막이 걷히고 있었다. 작업대로 쓰던 부엌 탁자는 병사 둘이 들어 할리나의 부엌으로 돌려보냈다.

한결은 작업대 위의 종이 넷을 하나씩 탄약통에 넣었다. 0.2. 보일러 도면. 여섯 줄. 날짜 칸이 빈 철수 권고서. 마지막으로 그을린 번호판을 집어 들어 한참 들여다보다가 탁자 위에 두고 돌아섰다. 번호판은 전차에 실을 물건이 아니었다. 전차는 내일 새벽에 앞으로 나가고, 번호판은 이 마당에서 가는 곳이 없었다.

1830, 종대가 줄을 지어 밭 밖으로 천천히 몸을 돌릴 준비를 했다. 아직 엔진은 켜지 않았다. 병사들이 해치에서 나와 마당에 모였다. 할리나가 주자를 앞세워 헛간 터 앞에 섰다. 할리나는 앞치마를 벗고 검은 숄을 두르고 있었다. 주자는 두 손으로 무엇을 감싸 들고 있었다.

할리나가 폴란드어로 한마디 했다. 운전병이 한결 옆에서 팔 붕대를 만지며 옮겼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은 안 한답니다. 그런 말은 닭들한테도 안 한답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빵 값은 나중에 받겠답니다.”

한결이 웃을 틈도 없이 주자가 앞으로 걸어왔다. 아이가 두 손을 내밀었다. 그을린 번호판이었다. 가장자리가 검고 숫자 둘째 자리가 열에 부푼 번호판. 한결이 탁자 위에 두고 온 것이었다.

“가져가요.”

주자가 영어로 말했다.

“전차에는 실을 수 없습니다.”

“아저씨 주머니에는 들어가잖아요.”

한결은 번호판을 받았다. 손바닥보다 약간 컸다. 정비복 가슴 주머니에는 다 안 들어가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번호판을 안으로 눌러 넣었다. 주자가 한 걸음 물러섰고, 할리나가 숄 속에서 손을 꺼내 한결의 정비복 소매를 한 번 쓸어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1900, 밭 한구석. 한결은 전차 사이에서 가슴 주머니의 배터리를 꺼냈다.

그는 규칙을 알고 있었다. 위성 연결은 하루 한 번 이 무렵에만 열렸다. 어머니 소식이 온다면 이 시각뿐이었다. 쇠 상자에 넣지 않은 전화는 이 밭에 그의 것 하나뿐이었다. 그는 배터리를 끼우고 전원 단추를 눌렀다.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알았다. 켜는 데 걸린 시간은 4초였다.

화면이 켜졌다. 부재중 전화 하나. 그리고 번호가 떴다. 서울 번호였다. 배소현이었다.

전화가 울었다. 짧은 진동음이 정비복 가슴께에서 번호판에 닿아 쇳소리로 울렸다. 사탕무밭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열 대가 넘는 전차의 해치가 동시에 이쪽으로 열렸다. 한결은 벨이 한 번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손톱으로 전화기 뒷면 뚜껑을 밀어 배터리를 뽑았다. 걸린 시간은 3초였다.

화면이 꺼지기 전에 작은 봉투 그림 하나가 떴다. 음성 메시지였다.

그는 서 있었다. 전화기와 배터리를 두 손에 따로 쥔 채. 차장들이 해치 안으로 머리를 넣는 소리가 줄지어 났다.

1904, 사탕무밭에서 300미터 떨어진 마른 도랑에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한 발, 두 발, 열 발까지. 땅이 울릴 때마다 위장망 끝이 한 번씩 들렸다 내려앉았다. 불이 붙은 사탕무밭 가장자리에서 잎이 타는 냄새가 났다. 열 발이 전부였다. 열 발은 한 군데도 밭 안쪽에 닿지 않았다.

한결은 3초를 생각했다. 7초였다면 방위가 두 군데에서 교차했을 것이다. 3초는 너무 짧았다.

1930, 브란도프스키가 밭 한가운데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걸어왔다. 그는 한결의 손에 든 전화기와 배터리를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종이를 한결에게 읽게 했다.

여단장의 글씨였다. 지금부터 전파는 쓰지 않는다. 지시는 종이로만 한다.

한결은 전화기를 쇠 상자 안에 넣었다. 뚜껑은 닫히지 않은 채였다. 그는 배터리만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번호판 옆, 비어 있던 여권 자리였다.

주머니 속에서 번호판 모서리와 배터리가 한 번 부딪쳤다.

3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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