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5,202자) · 서한결 · 8월 26일(목)

스물셋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100, 창고 7. 지붕 밑 첫째 줄의 스물한째 차가 네 번째 시동에 걸렸다.

딸깍 뒤에 네 번이었다. 이 창고의 차는 한 대도 첫 번에 걸린 적이 없었다. 엔진 소리가 함석 지붕 밑에서 한 번 울리자 한결은 해치 위에서 손바닥으로 차체를 두 번 눌렀다. 걸렸다는 뜻이었다. 표트르가 조종석에서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하나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붕 밑 줄은 거의 비어 있었다. 바닥 콘크리트에는 차가 서 있던 자리마다 기름으로 검게 눌린 직사각형이 찍혀 있었고, 그 직사각형 하나하나에 한결이 처음 이 창고에 들어온 날 쌍안경으로 적던 번호가 분필로 남아 있었다. 스물한 개의 빈 자리 가운데 맨 끝에만 방수포 덮인 차체가 남아 있었다. 방수포 가장자리에는 두 달 사이 먼지가 눈처럼 앉았다.

굴린 전차는 스물이었다. 24일 밤에 스물을 만들었고, 25일 밤은 쉬었다. 저쪽 보급 열이 정문 앞 도로에 아예 눌러앉았기 때문이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 밤에는 종대가 움직이고, 역습은 모레 0400이었다. 지붕 위에는 서 있는 드론이 여느 때처럼 있었다. 새벽 교대는 0500, 해는 0545에 뜬다.

0118, 맨 안쪽 줄의 스물두 번째 차. 한결은 엔진실 덮개를 열었다. 점화부는 이미 끼워져 있었다. 시동 스위치를 누르자 엔진이 한 번 기침을 하고 서 버렸다. 한 번 더 눌렀다. 같은 소리였다.

점화부가 아니었다. 한결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엔진실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연료 분사 제어부(분사량을 정하는 작은 컴퓨터 상자)가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에 볼트 구멍 네 개만 뚫려 있었다. 먼지 낀 구멍 둘레에 새로 닦인 자국이 있었다. 5월 17일 이 차가 정비 입고된 이유가 바로 그 부품 교체였다. 퇴각하던 정비중대는 이 차에서 빼 갈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목록에도 없었습니다.”

한결은 중얼거렸다. 옆에서 토마시가 입술을 읽고 고개를 갸웃했다. 한결은 빈 구멍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토마시가 그 구멍을 보고, 한결을 보고, 밖에서 들어오는 트럭 불빛을 보고, 마지막으로 스물한째 차의 포신 쪽을 가리켰다. 끌고 가자는 손짓이었다.

“끌고 가서 어디서 합니까?”

한결은 아직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토마시가 가리킨 쪽으로 눈이 갔다. 회랑에는 부서진 전차가 몇 대 누워 있었다. 6월 이후 여단이 잃은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 제어부가 멀쩡한 차가 있을 수 있었다.

0140, 스물한째 차 뒤판에서 강철 견인줄이 풀려 나갔다. 줄 끝이 스물두 번째 차 앞 고리에 걸렸다. 토마시가 죽은 차의 조종석에 올라앉았다. 엔진이 안 돌면 제동 쪽 힘도 못 쓴다. 끌려가는 55톤을 세우는 것은 토마시의 두 팔뚝이었다.

0212, 뒤 울타리를 밀고 나갔다. 이번에는 한 줄이 아니라 두 줄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스물한째 차가 끌려 하는 동안 줄이 팽팽하게 올라와 흙먼지가 두 줄의 길을 따라 길게 일었다. 먼지는 도는 눈에 선으로 보인다. 한결은 그것을 알았고, 알아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0231, 옥수수밭 가운데에서 지붕 위의 드론 소리가 끊겼다.

한결은 걸음을 멈췄다. 서 있던 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라진 곳 쪽 하늘에 아무것도 없었다.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안심할 이유가 없었다. 저쪽 눈이 어디로 옮겨 갔는지 모르는 채 줄 두 개가 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0238, 개울 둑 앞에서 스물두 번째 차의 오른쪽 궤도가 둑 가장자리 흙을 물었다. 둑이 한 뼘 무너졌다. 차가 옆으로 기울며 줄이 활처럼 당겨졌다. 앞차의 표트르가 속도를 올리려는 것이 엔진 소리로 들렸다. 올리면 줄이 끊긴다. 올리지 않으면 차가 개울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한결은 팔을 들어 흔들었다. 서라는 손짓이었다. 표트르는 팔이 아니라 한결의 동작 하나로 엔진을 뒤로 뺐다. 줄이 한 번 울었다. 팽팽하던 쇠가 낮은 소리로 노래했다. 토마시가 그 울림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기울어진 차의 제동을 한 번 더 걸었다. 차는 반 뼘 미끄러지다가 섰다.

0244, 하늘 높은 곳에서 벌 소리가 일어났다. 하나가 아니었다. 소리가 한 방향에서 셋으로 갈라졌다. 선 드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먼저 알린 것이었다.

한결은 개울 둑으로 달려 내려가 줄이 둑에 닿는 자리를 눈으로 쟀다. 줄이 흙을 파고 있었다. 둑 가장자리에는 지난봄 누가 박아 둔 쇠 말뚝이 하나 서 있었다. 한결은 그 말뚝에 강철줄을 두 바퀴 감아 줄이 흙을 파지 않고 쇠를 타게 했다. 줄을 감는 동안 손바닥의 새살이 철사 올에 걸려 찢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는 감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

0247, 학교 지하실. 일리야가 탁자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먼지 두 줄입니다, 소령님. 한 대가 한 대를 끌고 있습니다.”

소콜로프는 지도에서 고개를 들었다. 화면 속 옥수수밭 한가운데에서 달빛을 받은 먼지가 둑 쪽으로 길게 눕고 있었다. 끌려가는 차는 연기를 안 냈다. 안 돌아가는 차였다.

“고장 난 차를 끌고 나온다.”

대대 주력은 이미 회랑 쪽으로 옮겨 가고 있었고, 이 지하실에 남은 광케이블은 마흔이었다. 선 드론 하나를 대대 쪽으로 돌린 것도 그였다. 그는 손가락 셋을 폈다.

“셋만 보내라. 줄을 끊어. 차는 건드리지 마라.”

“줄만입니까?”

“끌려가는 것이 서 있는 것보다 정비병에게 더 비싸다.”

*

0251, 개울 둑. 광케이블 드론이 처음 밭 위를 지났다. 한 대가 줄 위를 낮게 훑었다. 실이 쇠줄에 스치며 가는 소리를 냈다. 한결은 줄을 향해 몸을 던지지는 않았다. 줄 한가운데 쇠 말뚝이 줄을 받고 있었고, 드론이 노리는 자리는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곳이었다. 말뚝 위의 줄은 헐거웠다.

표트르가 스물한째 차를 천천히 밀었다. 줄이 쇠 말뚝 위에서 한 번 낮게 울었다. 두 번째 드론이 줄 옆을 스쳤고, 셋째는 방향을 못 잡고 개울 건너 포플러 밑으로 처박혔다. 차 두 대가 개울을 건넜고, 스물두 번째 차의 기울어진 궤도가 말뚝을 지나며 흙을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둑이 무너지지 않았다.

0540, 두 차가 천막 그물 밑으로 들어왔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한결은 오른쪽 주머니의 핀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하나였다.

*

0900, 천막. 브란도프스키는 스물두 번째 차의 비어 있는 엔진실을 한참 보고 있다가 말했다.

“정비관님, 회랑에서 고치시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부서진 차에서 제어부를 뺍니다. 모레 새벽, 역습이 지나가는 길에 있습니다.”

“정비병이 역습 대열을 따라 들어가겠다는 말씀입니까?”

“스물두 번째 차를 끌고 갑니다. 거기서 고칩니다.”

“한 대 때문에요?”

“한 대가 아니라 스물둘입니다. 하나가 비면 스물하나입니다.”

브란도프스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막 밖에서 병사들이 빵 냄새를 맡고 줄을 서는 소리가 났다. 그는 한결의 옆을 비켜 천막 기둥에 팔을 얹었다.

“저는 이 여단의 대대장입니다. 정비관님의 계약서는 전투 지역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6월에 정비관님이 나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저는 말리지 않았습니다. 말릴 권한이 없었습니다.”

“압니다.”

“지금은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쓰지 않겠습니다.”

그는 군복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천막 한구석 여단 금고에서 가져온 열쇠였다. 그가 작은 봉투를 한결 앞에 놓았다. 6월 8일 한결이 열흘째 되던 날 맡긴 여권이었다. 봉투 가장자리가 두 달 넘게 눌려서 한쪽이 접혀 있었다.

“금고는 오늘 후방으로 갑니다. 내일부터 이 여단에는 금고가 없습니다.”

“저는 갈 곳이…….”

“이제 들고 계셔도 됩니다.”

한결은 봉투를 열지 않고 손바닥으로 눌러 보았다. 여권은 얇았다. 이렇게 얇은 것이 두 달 동안 한 사람의 퇴로였다. 브란도프스키가 한 발 물러서서 경례 대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한결은 봉투를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천막 입구에서 다율이 렌치를 들고 서 있었다. 한 시간 전부터 서 있었던 것 같았다.

“판 서님, 저도 종대에 따라갑니다. 지뢰 제거기 둘이 살아 있습니다. 앞에 보내겠습니다.”

“무선은 안 됩니다.”

“압니다. 실을 쓰겠습니다. 개울 둑에서 주운 그 실입니다.”

한결은 다율의 손을 봤다. 손가락 끝마다 전화선에 찔린 자국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말릴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릴 권한이 없는 사람이 말릴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였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1400, 할리나의 부엌. 화덕 열기가 문밖까지 나와 있었다.

문밖에는 전차장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모자를 벗어 손에 쥐고, 차례가 오면 한 손으로 빵을 받아 가슴께로 안았다. 받는 순서가 차대번호 순서였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 줄이었다.

테이블 위에 빵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둥글고 무거운 호밀빵이었다. 껍질이 갈라진 틈마다 김이 한 줄씩 빠져나갔다. 주자가 헛간 터 쪽 창문으로 빵 수를 세고 있었다. 다섯, 열, 열다섯. 아이가 두 번째로 센 것을 한결은 보았다. 둘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스물셋입니다.”

주자가 영어로 말했다. 한결은 고개를 갸웃했다. 스물두 대가 서는 줄이니 스물둘이어야 했다. 운전병이 팔에 붕대를 감은 채 부엌 문 옆에 서 있다가 할리나에게 폴란드어로 뭐라고 물었다. 할리나가 반죽 묻은 손으로 짧게 대답했다.

운전병이 한결을 돌아보며 옮겼다.

“하나는 아무도 아닌 사람 몫이랍니다.”

한결은 그 말을 들은 지 두 달이 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6월에 파란 트랙터 연료 호스를 이은 그에게 할리나가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맨 끝 빵을 집어 들었다. 갓 구운 껍질이 손가락 끝에 뜨거웠다. 새살이 오른 손바닥에는 더 뜨거웠다. 그는 빵을 놓지 않았다.

할리나가 부엌 문턱에서 두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

2200, 천막. 브란도프스키가 여단장의 말을 종이에 적어 와 작업대 위에 놓았다.

“내일 밤 이동입니다. 모레 0400, 역습 개시입니다.”

한결은 종이를 읽고 스물두 번째 차 쪽을 보았다.

2300, 한결은 스물두 번째 차 조종석에 올라갔다. 표트르가 조종석 계기판 위 선반 왼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안경이 놓여 있었다. 어제 강 건너 대대에 가서 가져온 것이었다. 안경을 받은 쪽은 두 손으로 돌려줬다고 했다. 금이 두 줄 간 알과 다른 것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경첩 나사가 불빛 아래서 보였다.

한결은 가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여권을 꺼내 한 번 펼쳤다가 접어 선반 오른쪽, 안경 바로 옆에 올렸다. 가슴 주머니는 비었고, 비어서 오히려 가벼웠다.

선반 위에 안경과 여권이 나란히 있었다.

3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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