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5,193자) · 서한결 · 8월 23일(월)
해제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800, 천막 뒤. 열일곱째 차의 궤도 밑에 한결이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옆에서 다율이 렌치로 볼트 하나를 잡고 있었고, 둘 다 위성 전화가 우는 소리를 한참 못 들은 척했다.
점화부 쇠 상자는 이틀 전부터 비어 있었다. 8월 12일 이후 열흘 동안 남은 넷을 다 썼다. 둘은 손 레버로 돌아온 열넷째와 열다섯째 차를 되살리는 데, 둘은 열여섯째와 열일곱째 차를 만드는 데 들어갔다. 스물둘까지 다섯이 남았고, 역습까지 닷새가 남았다. 지휘소 벽의 숫자는 D-5였다. 다섯을 닷새 안에 만들려면 부품이 있어야 했고, 서울은 부품을 풀지 않았다.
전화가 열두 번째 울렸을 때 한결은 궤도 밑에서 기어 나왔다. 박 팀장이었다.
“금지 풀렸어.”
“예?”
“부품 수출. 오늘 0600부로.”
한결은 손바닥의 그리스를 정비복 허벅지에 닦았다. 아직 덜 아문 새살이 닦는 쪽마다 따끔했다.
“왜 풀렸습니까?”
“나도 몰라.”
“팀장님이 모르십니까?”
“법무팀이 새벽에 내려와 공문 한 장을 놓고 갔어. 이유 칸에는 한 줄이야. 국가 정책 변경에 따라. 그게 다야.”
“그럼 왜 지금입니까?”
“모른다고. 모르는 이유를 믿으라는 말은 안 해. 그런데 하나 더 있어. 컨테이너 하나가 오늘 아침 그단스크 부두에 내렸어. 이미.”
한결은 그 말의 뜻을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풀리기도 전에 실려 있었다는 말이었다.
“공문이 나오기 전에 배가 떴다는 말입니까?”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박 팀장이 전화를 끊었다. 다율이 렌치를 든 채 한결을 쳐다봤다.
“믿으실 겁니까?”
“믿지 않습니다. 열어서 검사한 다음에 씁니다.”
“그러다 늦으면요?”
“늦으면 제가 늦은 겁니다.”
다율은 말없이 렌치를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엄지로 꼽아 가며 셌다. 다섯 대, 닷새, 하루 한 대. 한 대씩이면 겨우 맞는 셈이었다. 한 대씩이 창고 7에서 나오는 밤은 두 번에 한 번뿐이었다. 맞는 셈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았다.
0840, 여단 통신반에서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유선 팩스로 도착한 화물 목록 사본이었다. 감열지가 둥글게 말려 있어서 한결은 작업대 위에 펴 놓고 탄약통 두 개로 양 끝을 눌렀다.
여섯 줄이었다. 점화부 12벌, 96킬로그램. 사격통제 퓨즈 4상자, 38킬로그램. 냉각수 호스, 윤활유, 배선 묶음. 위의 다섯 줄은 맨 아래 합계 칸과 맞았다. 여섯째 줄은 합계 밖에 있었다. 품목란은 비어 있었고, 중량 칸에만 71,400킬로그램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결은 그 숫자를 굴려 낸 전차 한 대의 무게에 견줘 보았다. 55톤. 그보다 더 나가는 무엇인가가 이 목록 어딘가에 붙어 온 것이었다. 소수점이 하나 밀렸겠거니 했다. 그는 그 줄을 손톱으로 한 번 눌렀다가 목록의 위쪽으로 눈을 올렸다. 궤도 연결핀이 없었다. 두 번 읽었다. 핀은 수출 품목이 아니라 소모품으로 분류되어 서울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은 점화부를 풀면서 핀을 잊었거나 일부러 뺐다.
브란도프스키가 인수란에 서명했다. 한결은 박 팀장에게 다시 전화해 여섯째 줄을 물었다.
“그 줄은 내 칸이 아니야. 서울이 한 장에 붙여 보낸 거라 물어도 소용없어.”
“알겠습니다.”
그는 그 줄을 목록의 다른 줄과 함께 넘겼다. 넘기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
1520, 수바우키 외곽 화물 하역장. 화차 문이 열리자 기름과 젖은 나무 냄새가 올라왔다.
컨테이너는 한 개였고 봉인은 그대로였다. 하역 반장 야드비가가 철도 장갑을 낀 손으로 봉인 번호를 불렀다. 30년 동안 이 역에서 석탄과 사료를 내렸다는 오십대 여자였다. 그녀는 지붕 위를 한 번 올려다봤다.
“저 위에 한 놈 서 있어요. 한 시간 전부터.”
한결은 하늘 높은 곳의 점을 확인하고 컨테이너 문 걸쇠를 올렸다. 하역 인원 여덟이 화차 앞에 한 줄로 섰다. 상자를 손에서 손으로 넘길 줄이었고, 야드비가는 시계만 보고 있었다.
“저놈이 한 바퀴 돌아 나가는 데 4분이에요. 그 안에 끝내요.”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죽어요.”
“상자 번호 하나만 보겠습니다.”
한결은 첫 상자 뚜껑에 붙은 검사 필증을 읽었다. 새로 찍은 번호였다. 맨 끝자리가 3이었다. 하경이 지난봄까지 쓰던 8과 다른 숫자였다. 그는 상자 둘째, 셋째의 필증을 읽고 나서야 손을 뗐다. 열두 벌 가운데 열둘이 같은 번호였다. 하역 인원들이 상자를 날랐고, 야드비가는 4분이 아니라 5분 40초에 지붕을 가리켰다.
“됐어요. 가요. 저놈 돌아와요.”
차량은 셋이었다. 여단 수송차 한 대, 영토방위군의 농장 트럭 하나, 그리고 한결이 타는 정비 트럭이었다. 한결은 상자 열둘을 어느 차에 실을지 정하지 못했다. 수송차는 짙은 올리브색이었고, 농장 트럭은 마른풀을 가득 실어 겉으로는 건초 수레였다. 저쪽 드론이 노리는 것은 군용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전부 건초 밑에 넣으면 되지 않습니까?”
즈비섹이 폴란드어로 말했고, 운전병이 옮겼다. 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수레가 맞으면 열둘이 한꺼번에 없어집니다.”
“수송차가 맞으면 넷만 없어집니다.”
“넷이 없어지는 쪽이 낫다는 말이군요.”
운전병이 자기 차 옆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도장이 벗겨진 올리브색 철판이 퉁 하고 울렸다. 그는 웃는 얼굴이었고, 웃으면서 한결을 봤다. 한결은 여덟을 건초 밑에 넣고 넷을 수송차에 실었다. 한 군데에 모두 넣지 않는 것이 이 길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계산이었다. 계산하는 동안 운전병의 웃음이 어디서 멎었는지는 보지 않았다.
1648, 국도 18킬로미터 지점. 수송차를 운전하던 운전병이 백미러를 보고 소리쳤다.
“위에 둘이 왔습니다!”
드론 둘이 올리브색 수송차 위에서 한 바퀴 돌았다. 한 대가 내려왔다. 폭발은 운전석 오른쪽에서 일어났고, 수송차가 도랑 쪽으로 기울며 불이 붙었다. 뒤따르던 농장 트럭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즈비섹이 건초 수레를 몰아 불타는 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 두 번째 드론이 수송차에 몸을 던졌다. 건초 수레 위에는 눈길이 오지 않았다.
한결은 정비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운전병은 도랑 옆 풀밭에 엎드린 채 팔을 뻗고 있었다. 팔 끝에 쇠 상자가 하나 끌려 나와 있었다. 불붙은 차에서 그가 끌어낸 것이었다. 소매가 타 있었고 눈썹이 한쪽 없었다. 그는 한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 개는 건졌습니다.”
“한 개면 충분합니다.”
한결은 상자를 받으면서 소매 탄 자리를 한 번 봤다.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열둘이 여덟이 되었고, 여덟에 하나가 더해져 아홉이 되었다. 수송차는 도랑에서 탔다.
1652, 하늘의 벌 하나가 불타는 수송차 위를 돌다가 길을 따라 눈을 돌렸다. 건초 수레는 400미터 앞에서 서 있었다. 즈비섹이 묻는 얼굴로 한결을 돌아봤다. 달리면 먼지가 일고, 먼지는 도는 눈에 선으로 보인다. 서 있으면 건초 수레는 길가의 건초 수레였다. 한결은 손바닥을 아래로 눌러 보였다. 서 있으라는 손짓이었다.
운전병이 한결 옆에서 불붙은 소매를 풀밭에 비벼 끄고 있었다. 두 사람과 트럭 둘이 도랑 위에서 25분을 그렇게 섰다. 벌은 한 번 더 불타는 차를 맴돌고, 길 끝 쪽에서 해가 기우는 것을 따라 서쪽으로 사라졌다. 즈비섹이 시동을 걸었을 때 한결은 그제야 자기 손이 정비복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
1910, 천막. 한결은 아홉 벌을 한 벌씩 꺼내 등잔 불빛에 돌려 보았다. 접합면에 흠이 없는지, 안쪽 판에 눌린 자국이 없는지, 필증의 번호가 상자 번호와 맞는지를 한 벌마다 따졌다. 서울이 풀어 준 부품이라는 이유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풀어 준 이유를 모른다는 이유로 버릴 수도 없었다. 아홉 벌 모두 흠이 없었고, 그는 그것들을 쇠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전화기가 한 번 떨렸다. 하루에 한 번 위성 연결이 열리는 시각이었다. 창원의 하경이었다. 문자 한 줄이었다.
“새 검사 번호 나왔습니다. 끝자리 3입니다. 이 번호로는 아무것도 못 찍게 해 주세요.”
한결은 그 줄을 읽다가 처음으로 웃었다. 답장은 짧게 썼다. 못 찍게 하겠습니다. 보내기 단추를 누르는 손이 아직 덜 아물어 있었다.
*
2000, 창고 7 뒤 개울. 한결과 표트르와 토마시와 즈비섹이 둑에 엎드렸다.
오늘 밤은 일찍 갔다. 저쪽 보급 트럭 열이 7시 반부터 정문 앞 도로를 지나간다는 것을 비에스와프가 알려 주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창고 틈새로 금을 긋고 지나가는 동안 엔진 소리는 트럭 소리에 묻혔다. 시동을 거는 것은 트럭이 지나갈 때만이었다. 한결은 오른쪽 주머니의 핀을 손가락으로 한 번 만졌다. 하나였다.
창고 안은 석 달 전보다 차가웠다. 마른풀과 경유와 오래 닫힌 쇠 냄새가 섞여 있었고, 지붕 함석에는 서 있는 드론의 소리가 아직 얹혀 있었다. 토마시는 콘크리트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엎드렸다. 귀가 먹은 사람의 귀는 거기 있었다. 트럭이 한 대 지나갈 때마다 바닥이 한 번 울었고, 그는 울림을 세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2031, 지붕 밑 첫째 줄의 차 앞에서 한결은 점화부를 끼웠다. 트럭 여덟 번째가 지나갔다. 한결은 시동을 걸려다가 손을 멈췄다. 토마시가 바닥에서 손가락 둘을 폈다. 여덟 번째 뒤에 간격이 두 대분 벌어진다는 신호였다. 그 사이에 걸면 엔진 소리가 홀로 남는다. 한결은 기다렸다. 아홉 번째가 오는 불빛이 창고 벽을 긁었고, 그 소리 밑으로 딸깍 한 번이 숨었다. 걸렸다. 선 드론은 지붕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2108, 둘째 차가 같은 방식으로 걸렸다. 이번에는 토마시가 먼저 일어나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둘이라는 뜻이었고, 열일곱에서 열아홉이 된다는 뜻이었다.
2140, 두 차가 뒤 울타리를 밀고 나갔다. 철사 한 바퀴가 감겨 있던 울타리 기둥이 궤도 밑에서 마른 나뭇가지처럼 꺾였다. 정문 쪽 초소에서 담뱃불 하나가 이쪽으로 돌아섰다가 도로 제자리를 향했다. 경계병은 트럭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 있었고, 한결은 그 눈부심이 몇 분이나 더 갈지 세지 않았다. 정문 앞 도로의 트럭 불빛은 아직 끊기지 않았다. 한결은 해치 위에서 그 불빛이 어디로 가는지 보았다. 보급 트럭 열이 아니었다. 트럭 사이에 장갑차가 섞여 있었고, 그 뒤로 포탑 달린 차량이 이어졌다. 열은 창고 앞에서 서쪽으로 꺾지 않고 곧장 회랑 쪽으로 들어갔다. 불빛 하나하나가 저쪽 대대가 이동하는 줄이었다. 역습 날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줄이었다.
한결은 포탑 해치를 닫았다. 어둠 속에서 해치 안쪽에 붙은 검사 필증 한 장만 손전등 빛을 받아 하얬다. 끝자리는 3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