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5,325자) · 서한결 · 8월 12일(목)

화면이 꺼진 날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436, 개울 건너 밭. 열다섯째 차가 물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앞서 나간 열넷째 차는 이미 맞은편 둑에 올라 포신을 서쪽으로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표트르가 모는 차였다. 한결은 뒤따르는 열다섯째 차의 포탑 해치에 앉았고, 조종간은 토마시가 잡았다. 귀가 먹은 사람은 엔진이 말하는 대로 몰았다. 궤도가 자갈 바닥을 긁을 때마다 차체가 한 번씩 울었고, 그 울림이 엉덩이를 지나 갈비뼈까지 올라왔다.

창고 7에서 두 대를 꺼낸 밤이었다. 점화부 여섯 벌이 넷으로 줄었고 오른쪽 주머니의 핀은 둘 그대로였다. 천막까지 2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천막 그물 밑에 넣으면 굴린 전차는 열다섯이 된다. 지휘소 벽의 숫자는 오늘 아침부터 D-16이었다.

헤드셋에서 다율의 졸린 목소리가 들어왔다.

“판 서님, 방호망 정상입니다. 요격 드론 여섯 대 대기 중입니다. 지뢰 제거기 둘이 앞서 길을 보고 있습니다.”

“개울 건넜습니다. 2킬로미터 남았습니다.”

한결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태엽 시계였고, 초침이 12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0439였다.

0440, 소리가 사라졌다.

폭음이 아니었다. 빛도 없었다. 엔진 소리가 먼저 끊겼고, 헤드셋의 잡음이 그다음에 끊겼고, 개울 쪽 물소리만 남았다. 열다섯째 차는 제 무게로 반 미터쯤 더 미끄러지다 멈췄다. 해치 안을 내려다보니 계기판의 작은 불들이 한꺼번에 꺼져 있었다. 야간 조준경 화면은 회색 판자가 되어 있었다.

토마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소리를 못 들었으니 달라진 것을 몸으로 알았을 것이다. 시동 스위치를 두 번 눌러 보고 손바닥을 펴서 보여 주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손짓이었다.

한결은 엔진실 덮개를 열고 점화부 뚜껑을 젖혔다.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머리카락을 불에 넣었을 때의 냄새였다. 오늘 새벽 창고에서 끼운 새 점화부의 안쪽 판이 갈색으로 말려 있었다. 판 밑의 연료 밸브와 레버는 쇠였고, 쇠는 멀쩡했다. 맞은편 둑에서 표트르가 손을 흔들었다. 한결이 뚜껑을 들어 보이자 표트르도 같은 모양의 뚜껑을 들어 보였다. 둘 다 탔다.

갈아 끼울 점화부는 천막의 쇠 상자 속에 있었다. 걸어서 다녀오면 40분이다. 40분 뒤에는 해가 뜨고, 해가 뜨면 도는 드론이 이 들판 위로 온다.

“손으로 갑니다.”

한결이 말하자 토마시는 입술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

0444, 학교 지하실. 일리야는 탁자 위에 놓인 싸구려 벽시계를 보고 있었다.

전자 시계는 전부 서랍에 들어가 있었다. 전자전 여단에서 온 중위가 그렇게 시켰다. 0440부터 40초 동안 이 마을 반경 안에서 켜 둔 기계는 다 탈 수 있다고 했다. 그 중위는 마이크로파를 쏘는 트럭이 어디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한 번 쏘면 그 자리를 떠야 한다는 것만 말했다. 쏜 자리를 저쪽 포병이 찾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 한 대뿐이라고 했다.

“저쪽 화면이 꺼진 지 4분이다.”

소콜로프가 지도 위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고 말했다.

“눈먼 동안만 쓸모 있는 무기는 눈먼 동안에 쓴다. 실 달린 것만 내보내라.”

광케이블 드론 열이 계단 밑에 날개를 편 채 줄지어 있었다. 일리야가 첫 조의 조장이었다. 높은 데 걸어 둔 관측 드론의 영상이 탁자 모니터에 떠 있었다. 실로 이어진 눈은 펄스가 지나가도 살아 있었다. 화면 속 들판에 차 둘이 서 있었고, 그중 한 대의 엔진 위에 사람이 올라가 무언가를 손으로 쥐고 있었다.

“정비 쪽이 먼저다.”

“저 차 둘입니까, 소령님?”

“둘 다다. 서 있는 것은 걸어 다니는 것보다 늦다.”

*

0449, 개울 둑. 한결이 레버 손잡이를 쥔 채 동쪽의 희끄무레한 빛을 보고 있을 때, 맞은편 밭에서 사람 하나가 뛰어왔다.

다율이었다. 무전이 죽자 걸어서 나온 것이다. 숨이 끊겨 말이 조각났고, 한쪽 어깨에 멘 천 가방에서 쇠 부딪는 소리가 났다. 연막통이었다. 공병대 창고 안쪽에 남아 있던 옛 물건으로, 불을 붙여 흙바닥에 굴리면 90초 동안 하얀 연기를 낸다. 가방에는 여덟 개가 들어 있었다.

“무인차 넷이 섰습니다. 요격 드론이 떨어졌고 방호망도 꺼졌습니다. 판 서님, 노트북이 안 켜집니다.”

“압니다.”

“저쪽이 끈 거면 곧 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모릅니다. 계산할 화면이 없습니다.”

한결은 열다섯째 차의 엔진실 위에서 내려와 다율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레버를 쥐십시오. 손바닥 말고 손가락 끝으로 쥡니다.”

“제가요?”

“이 안에서 엔진이 말을 합니다. 서기 3초 전에 먼저 떨립니다. 떨리면 큰 소리로 말하십시오. 제가 차를 세웁니다.”

다율은 레버를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건너편 열넷째 차에서는 즈비섹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트랙터를 몰던 손은 한결이 말하지 않아도 레버 쥐는 법을 알았다.

0453, 높은 하늘에서 벌 한 마리 소리가 났다. 하나였다. 한결은 연막통 첫 개에 불을 붙여 차 뒤 흙에 굴렸다. 하얀 기둥이 솟아 열다섯째 차의 뒤판을 덮었다. 앞서 가는 열넷째 차도 같은 연기에 잠겼다. 두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걷는 사람의 속도였다. 천막까지 1.5킬로미터, 연막통 일곱 개, 한 개에 90초.

0457, 벌이 넷으로 늘었다. 실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고, 연기 속에서 하나가 한결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번째 연막통을 굴렸다. 세 번째 연막통은 손바닥이 땀에 젖어 성냥을 두 번 놓친 뒤에 붙었다.

0502, 여섯이 왔다. 하나가 연기 속으로 들어가 열넷째 차의 오른쪽 궤도 앞에서 터졌다. 궤도가 한 칸 벌어졌고 차가 비틀거리며 섰다. 한결은 망치와 핀 하나를 쥐고 그쪽으로 뛰었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이제 하나만 남았다. 벌어진 틈에 핀을 밀어 넣고 한 번 두드렸다. 두드린 소리에 벌들이 방향을 돌렸다.

그때 등 뒤에서 다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떱니다!”

한결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팔을 올려 흔들었다. 토마시는 한결의 팔이 아니라 차체의 울림을 보고 있었다. 열다섯째 차가 제동하며 섰고, 엔진은 꺼지지 않았다. 다율의 손가락이 레버에서 반쯤 풀려 있었다. 그는 풀린 손을 다시 쥐고 속삭였다. 쥐었습니다. 한결은 그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핀으로 눈을 돌렸다.

핀은 박혀 있었다. 한결은 엄지로 핀 머리를 눌러 보았다. 반 개가 높았다. 20초면 끝나는 일이었고, 20초 동안 벌 여섯이 연기 위를 돌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로 망치를 들어 한 번 더 쳤다. 핀 머리가 궤도와 나란해졌다.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았다면 천막 앞 모퉁이에서 이 궤도가 풀렸을 것이다.

0507, 벌 하나가 연기 속에서 방향을 잃고 개울 둑에 처박혔다. 실이 풀린 채 물에 누웠고, 날개가 한 번 떨다가 멈췄다. 나머지는 연막통 일곱째, 여덟째가 꺼질 때까지 돌다가 하나씩 동쪽으로 돌아갔다.

0518, 두 차가 천막 그물 밑으로 들어갔다. 한결은 여덟째 연막통의 마지막 연기가 천막 그물에 걸려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다율은 레버를 쥔 채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한결이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었다. 손가락이 한 번에 안 펴져서 천천히 폈다. 다율은 내려서서 개울 쪽을 돌아보다가 도로 뛰어갔다. 한결이 부르기도 전에 그는 둑에 처박힌 드론 옆에서 실 타래를 주워 들었다. 물을 먹은 10킬로미터짜리 실이었다. 다율은 그것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

0540, 천막. 집결소는 조용했다.

무인차 넷은 방호망 아래에 한 줄로 서 있었고 전부 장난감 같았다. 노트북 두 대는 불이 안 들어왔고 요격 드론 아홉 대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천막 그물 밑에 시동을 끄고 세워 둔 전차 아홉 대는 멀쩡했다. 켜 있던 것만 죽었고 꺼 둔 것은 살았다. 한결은 그것을 천막 기둥에 분필로 적어 두었다.

점화부 쇠 상자 넷은 열어 보니 안에서 아무것도 타지 않았다. 녹색 쇠 뚜껑이 닫혀 있던 값이었다.

1100, 브란도프스키가 여단 참모부의 종이를 작업대에 폈다. 무선이 안 되어 사람이 들고 온 종이였다. 첫 줄은 한결이 분필로 적은 것과 같았다.

“역습 날 아침에 저게 한 번 더 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날은 전차가 다 켜 있습니다.”

“그래서 여쭙는 겁니다. 저 트럭은 하루에 한 번이라고 하지만, 참모부는 28일 새벽에 두 번째가 올 거라고 봅니다.”

브란도프스키는 종이 맨 아래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단장이 오늘 안으로 모든 차에 손으로 하는 순서를 가르치라고 했다는 줄이었다.

“순서는 가르칠 수 있습니다. 손은 못 가르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르쳐 주십시오.”

1500, 천막 뒤 공터. 다율은 나무 상자에 앉아 죽은 노트북을 열어 보았다.

검은 화면이었다. 전원 단추를 눌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 한 번 더 눌렀다. 그는 노트북을 무릎 위에서 덮으려다 말고 한결을 올려다봤다. 한결은 맞은편 상자에 앉아 전화선 30센티미터를 자르고 있었다.

“제가 2년 동안 한 것이 화면 안에 있었습니다.”

“압니다.”

“손으로 하는 건 하나도 못 합니다.”

“압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는 겁니다.”

한결이 잘라 낸 전화선을 내밀었다. 다율은 받아서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한결은 낡은 렌치 손잡이 한쪽에 풀린 볼트를 하나 물려 두고 그 둘레를 한 바퀴 돌리게 했다.

“한 바퀴는 풀립니다. 세 바퀴는 안 풀리지만 끝이 남아서 뭔가에 걸립니다.”

“그래서 두 바퀴입니까?”

“두 바퀴에서 끝을 안으로 접으면 안 풀리고 안 걸립니다.”

다율의 첫 번째는 느슨했다. 한결이 선을 풀어 다시 줬다. 두 번째는 너무 팽팽해서 선이 끊어졌다. 세 번째에 다율은 호흡을 멈추고 두 바퀴를 감았다. 끝을 안으로 접으려다 손가락 끝이 찔렸다. 피가 한 방울 나왔고, 그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결은 그 선을 손가락으로 당겨 보았다. 선은 풀리지 않았다.

“다시 하십시오.”

“한 번 됐는데요.”

“한 번은 우연입니다. 열 번 하면 손이 압니다.”

다율은 선을 풀고 다시 감았다. 열 번째까지 한결은 말하지 않았다. 열한 번째에 다율이 먼저 말했다.

“이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한결은 렌치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5호차 궤도 옆으로 가십시오. 핀이 어디 있는지는 제가 보여 드립니다.”

다율은 죽은 노트북을 덮어 작업대 구석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렌치를 쥔 채 한결 옆에 섰다.

2000, 천막 안에는 등잔이 켜져 있었다. 브란도프스키는 지휘소에서 막 받아 온 종이를 작업대에 놓았다. 서울의 부품 수출 금지는 풀리지 않았다. 점화부는 쇠 상자 안에 넷이 남았고, 스물둘까지는 일곱 대가 모자랐다. 지휘소 벽의 D-16은 밤이 지나야 D-15로 고쳐질 것이었다. 고쳐 쓸 사람은 브란도프스키였고, 그는 그 숫자를 지우개로 지울 때마다 한 번씩 손을 멈췄다.

작업대 구석, 닫힌 노트북 위에는 렌치가 얹혀 있었다. 손잡이에는 두 바퀴 감은 전화선이 걸려 있었다.

3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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