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5,242자) · 정하경 · 7월 19일(월)

징계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900, 창원 본사 3층 감사팀 소회의실. 정하경은 작업복 위에 가운을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검사동에서 곧장 불려 왔다. 가운 주머니에 볼펜 세 자루와 틈새 게이지가 꽂혀 있었고, 소매 끝에 그리스가 까맣게 묻어 있었다. 소회의실은 에어컨이 너무 셌다. 탁자 위의 생수병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한 줄로 흘러내렸다. 맞은편에 감사팀장과 팀원 하나가 앉았다. 팀원 앞에 노트북이 열려 있었고, 그 화면이 벽 스크린에 크게 떠 있었다. 흐린 복사본이었다. 오른쪽 아래 여섯 자리 가운데 마지막 자리 위에 누군가 볼펜으로 8을 적어 놓았다.

“반장님, 이 필증 번호가 반장님 번호가 맞습니까?”

감사팀장이 물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부드러워서 더 길게 끌 수 있는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제 번호입니다.”

“이 필증을 반장님이 발행하셨습니까?”

“제가 찍은 게 아닙니다.”

팀원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빨라졌다. 감사팀장이 손을 들어 그 손을 멈추게 했다.

“그러면 누가 찍었는지 아십니까?”

하경은 스크린의 흐린 필증을 봤다. 오른쪽 아래 서명 자리에 자기 서명이 있었다. 획이 짧고 끝이 위로 들린 서명이었다. 작년 여름 폴란드 인수단 서류에 한 서명이었다. 인수단 기술 연락인이 그 서류를 한 달 동안 들고 다녔다. 그 사람 공구함 맨 아래 칸에 사본이 있을 것이었다.

“그건 말하지 않겠습니다.”

“반장님, 말씀 안 하시면 반장님이 한 걸로 됩니다.”

“압니다.”

하경은 가운 주머니에서 볼펜 하나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손이 할 일이 필요했다.

“말할 수 있는 건 하나입니다. 그 필증에 적힌 로트, 제가 봤습니다. 6월 셋째 주였습니다. 스물하나 가운데 하나를 뺐습니다. 커넥터 도금이 얇아서요. 남은 스물은 제 손으로 합격시켰습니다. 그 부품은 제가 본 겁니다. 필증은 제가 찍은 게 아닙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감사팀장은 한참 하경을 봤다. 그러다 서류철을 덮고 두 손을 그 위에 포갰다.

“반장님, 제 입장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번호가 이렇게 한 번 쓰이면, 폴란드 세관만 이 번호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회사가 지난 10년 동안 찍은 모든 필증이 의심받습니다. 국내 인도분까지요. 우리 육군이 받는 전차도 이 번호로 받습니다. 검사원 번호는 반장님 것이기 전에 회사가 세상에 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걸 만들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막습니다.”

하경은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 자신이 열네 장을 적은 이유와 같은 말이었다. 번호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어긴 사람의 이름을 대면, 그 사람이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서 있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폴란드의 어느 헛간이라고 했다. 이름이 나가면 그 헛간도 나간다.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팀원에게 방금 한 말을 그대로 적으라고 했다. 팀원이 적었다. 자판 소리가 에어컨 소리 위로 또박또박 들렸다.

*

0900, 같은 시각 폴란드는 새벽 두 시였다. 창고 7 뒤 울타리 밖 옥수수밭에서 한결은 불타는 드론 하나를 보고 있었다.

부품이 온 뒤로 닷새 동안 네 번을 갔다. 네 번 다 한 대씩이었다. 오늘 밤이 넷째였다. 표트르가 조종석에 있었고 한결은 포탑 해치에 있었다. 뒤 울타리를 밀고 나온 지 3분 만에 드론 셋이 왔다. 다율이 헛간에서 새로 받은 요격 드론 넷을 한꺼번에 올렸다. 둘이 둘을 받았다. 셋째 것은 토마시의 산탄총이 날개를 뜯었다. 그 드론이 옥수수 줄기 사이에 떨어져 불타고 있었다. 불빛이 전차 옆구리를 붉게 비췄다가 꺼졌다.

0214, 조명탄 아래로 박격포가 떨어졌다. 한 발이 차체 오른쪽 20미터에 떨어져 흙을 궤도 위로 퍼부었다. 표트르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흙이 해치 안으로 쏟아져 한결의 목덜미로 들어갔다. 차갑고 축축했다. 두 번째 박격포는 앞에 떨어졌다. 개울로 내려가는 비탈이 무너져 흙더미가 길을 반쯤 막았다. 표트르는 그 흙더미를 궤도 한쪽으로 밟고 올라갔다. 차가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한결은 해치 테두리를 붙잡고 몸이 밖으로 쏠리는 것을 버텼다. 55톤이 기운 채 3초쯤 멈춰 있었다. 그 3초 동안 한결은 궤도가 흙을 물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차가 도로 바로 섰다. 표트르가 조종석에서 뭐라고 소리쳤다. 한결은 그것이 욕인지 기도인지 몰랐다. 차는 개울을 건넜다.

0351, 능선을 넘었다. 굴린 전차가 아홉이 되었다.

*

1130, 창원. 하경은 검사동 책상 서랍을 비우고 있었다.

징계는 빨리 나왔다. 검사원 번호 정지. 대기 부서 발령. 감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인사팀 직원이 종이를 건네며 미안하다고 했다. 하경은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종이를 쓴 사람이 정한 일이 아니었다.

서랍 맨 아래에서 종이 묶음이 나왔다. 열네 장이었다. 규격 안쪽 아래로 나온 것들. 모서리마다 그녀의 번호가 작게 적혀 있었다. 이제 정지된 번호였다. 그녀는 묶음을 상자에 넣지 않았다. 가운 안주머니에 넣었다. 다른 것들은 전부 상자에 넣었다. 볼펜과 게이지와 탁상 달력과 말라 버린 선인장 화분. 화분은 조금 망설이다가 넣었다. 작년 봄 폴란드 인수단이 왔을 때 누군가 두고 간 화분이었다. 물을 주지 않아도 산다고 했는데, 물을 안 줬더니 죽었다. 하경은 그 화분을 버리지 못하고 한 해를 뒀다.

검사동 후배 둘이 상자를 들어 주겠다고 했다. 하경은 혼자 들었다. 무겁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앉았던 책상에서 나온 것치고 가벼웠다.

1210, 휴게실 앞을 지나다 텔레비전 자막을 봤다. 러시아, 나토 분열 입증. 모스크바에서 누군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휴게실 소파에 수출 라인 작업자들이 앉아 그 자막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폴란드로 갈 차들은 오늘도 라인 끝에 서 있었다.

*

1400, 대기 부서는 본관 4층 끝 방이었다. 책상이 여섯, 사람이 둘. 창이 공장 쪽으로 나 있었다.

하경은 창가 책상에 상자를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국내 라인 끝에서 새 전차 한 대가 문을 나가고 있었다. 도색이 번들거렸다. 궤도에 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문 앞에서 검사동 후배 하나가 서류판을 들고 서 있었다. 후배가 필증에 도장을 찍었다. 자기 번호였다. 전차가 경적을 짧게 울리고 공장 문을 나갔다.

새것은 여기서 나갔다. 나간 것들이 어디서 무엇을 뒤집어쓰는지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하경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열네 장을 적었다. 그녀는 가운 안주머니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종이가 거기 있었다.

같은 방의 다른 사람이 커피를 타 주겠다고 했다. 설계팀에서 온 사람이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하경이 물었다. 도면에 자기 이름을 안 넣겠다고 했더니 여기로 왔다고 했다. 둘은 잠깐 웃었다. 커피는 너무 달았다.

*

1500, 폴란드 여단 지휘소. 서울은 밤 열 시였다.

여단장이 지휘소 벽 지도 앞에 섰다. 지도 옆에 참모부가 뽑은 종이 한 장이 핀으로 꽂혀 있었다. 회랑 남쪽 입구 돌파에 필요한 가동 전차, 참모부 추정 마흔다섯 이상. 그 아래에 오늘 아침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가동 스물아홉, 되살린 것 아홉. 합이 서른여덟이었다.

한결은 지휘소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목덜미에 아직 흙이 남아 있었다. 여단장이 그를 보고 물었다.

“판 서, 창고 7에 남은 게 몇 대입니까?”

“열셋입니다. 점화부는 열셋 분보다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부품이 아니라 길입니다. 저쪽이 길마다 기다립니다.”

“한 달이면 열셋이 됩니까?”

“모릅니다. 지금까지는 닷새에 넷이었습니다.”

여단장은 종이의 마흔다섯을 손가락으로 한 번 짚었다. 그리고 달력을 봤다. 8월 마지막 주였다. 그는 날짜 하나에 연필로 동그라미를 쳤다.

“8월 28일, 토요일. 역습은 그날이다. 그날 몇 대가 서느냐가 역습의 크기다. 더 기다리면 저쪽도 기다린다.”

작전참모가 그 날짜를 받아 적었다. 정보참모가 받아 적었다. 한결은 받아 적지 않았다. 오늘부터 세면 마흔 날이었다. 그는 그 숫자를 외웠다.

브란도프스키가 지도 앞으로 나와 날짜 옆에 작게 적었다. D-40. 그는 그 숫자를 매일 아침 자기 손으로 고치겠다고 했다. 다율은 지휘소 구석에서 노트북을 열어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한결이 보자 화면을 돌려 보였다. 창고 7에서 헛간까지 전차 한 대를 꺼내 오는 데 든 시간과 잃은 드론 수를 날짜별로 적은 표였다. 줄이 갈수록 시간은 길어지고 잃은 드론은 늘었다. 저쪽이 배우고 있었다. 다율은 표 맨 아래에 빈 줄 하나를 남겨 두었다. 그 줄에 무엇을 적을지는 그도 아직 몰랐다.

*

2230, 창원. 하경은 퇴근 셔틀 맨 앞자리에 앉았다.

버릇대로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내일 검사동에 들어올 차의 번호를 외우는 수첩이었다. 내일 그녀가 볼 차는 없었다. 그래도 수첩을 폈다. 오늘 아침 적어 둔 번호 셋이 있었다. 그녀가 보지 못하고 후배가 본 차들이었다. 그녀는 그 번호를 한 번씩 소리 없이 읽었다. 셔틀이 공장 정문을 나가 해안 도로로 들어섰다. 창밖으로 마산만의 불빛이 흘렀다. 폴란드는 오후 세 시 반일 것이었다. 그 나라 어느 헛간에서 누가 무엇을 끼우고 있을지 하경은 알았다. 그 부품의 커넥터 도금 두께까지 알았다. 그녀는 수첩을 덮고 가방 안쪽 주머니를 한 번 눌렀다. 가운에서 옮겨 넣은 열네 장이 거기 있었다. 정지된 번호가 모서리마다 적힌 종이였다. 셔틀 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보고, 오늘은 늦으셨다고 했다. 하경은 오늘은 일이 적어서 늦었다고 했다. 기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웃었다.

*

2300, 동쪽으로 20킬로미터. 학교 지하실 계단으로 병사들이 상자를 날랐다.

길쭉한 나무 상자였다. 옆면에 스텐실로 글자가 찍혀 있었다. 광케이블. 상자는 계단 아래부터 쌓여 올라가 벽의 아이 그림을 가렸다. 해바라기가 가려지고 탱크가 가려졌다. 부관이 상자 수를 셌다. 삼백이었다. 소콜로프는 탁자 앞에서 그것이 쌓이는 것을 봤다. 모스크바가 드디어 그의 셈을 믿기 시작했다.

탁자 위 야전 전화가 울렸다. 대령이었다. 상자가 도착했느냐고 물었다. 도착했다고 하자 대령은 한 줄을 덧붙였다. 모스크바가 저 여단의 역습 날짜를 안다고 했다. 어디서 알았는지는 대령도 몰랐다. 8월 마지막 주라고 했다. 그 전까지 저 여단을 서른 대 밑으로 묶어 두라고 했다. 소콜로프는 수첩 앞장에 숫자 둘을 적었다. 서른. 그리고 삼백. 일리야가 계단 아래에서 상자 하나를 받아 들다가 그 무게에 휘청했다. 상자 하나에 날개 접힌 드론 하나와 실 한 타래가 들어 있었다. 실 한 타래는 10킬로미터라고 했다.

지하실 벽에 상자 삼백 개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2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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