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5,197자) · 브란도프스키 · 7월 14일(수)

그단스크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600, 그단스크 항 세관 별관. 브란도프스키는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창구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밤새 차를 몰고 왔다. 회랑 뒤쪽에서 북쪽으로 네 시간이었다. 군복 바짓단에 헛간 마당의 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그 흙이 대리석 바닥에 조금씩 떨어졌다. 별관 창밖으로 항구의 크레인들이 보였다. 목이 긴 새들이 줄지어 선 것처럼 바다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짠 바람에 기름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는 무릎 위에 서류철 두 개를 올려 두었다. 하나는 여단장이 서명한 공문이었다. 다른 하나에는 필증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흐린 복사본이었다.

별관 건너편 여객 터미널 앞에는 새벽부터 줄이 서 있었다. 스웨덴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여행 가방보다 보따리가 많았다. 유모차에 이불을 싣고 온 여자가 있었고, 새장을 든 노인이 있었다. 새장 안의 앵무새가 줄이 움직일 때마다 뭐라고 외쳤다. 브란도프스키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폴란드어로 좋은 아침이라는 말이었다. 줄 선 사람 몇이 웃었다. 노인은 새장에 덮개를 씌웠다. 웃음은 덮개 밑에서도 한동안 이어졌다.

0615, 창구가 열렸다. 세관원은 마흔쯤 된 여자였다. 그녀는 필증을 받아 불빛에 비춰 보고, 돋보기를 꺼내 오른쪽 아래를 봤다. 그러고는 브란도프스키를 봤다.

“대대장님, 이 마지막 자리가 3입니까 8입니까?”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별관 복도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갔다.

“판 서, 번호 마지막 자리가 뭡니까?”

전화 너머에서 한결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숫자 하나를 말했다.

“8입니다. 그분 번호가 맞습니다. 그건 제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브란도프스키는 창구로 돌아가 8이라고 말했다. 세관원은 그 숫자를 볼펜으로 필증 여백에 적었다. 그리고 여단장의 공문을 읽었다. 전시 군수품 긴급 인수 요청. 여단장의 서명 아래에 사단 군수처장의 확인 도장이 있었다. 세관원은 한참 생각하더니 서류 한 장을 더 꺼냈다. 사후 검증 조건부 반출 허가서였다. 검증은 제조사에 조회해서 한다고 했다. 조회는 오늘 저녁에 나간다고 했다. 그녀는 허가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한 번 더 브란도프스키의 바짓단을 봤다. 흙이 대리석 바닥에 작은 무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그녀의 남편이 동쪽 영토방위군에 있다고 했다. 한 달째 연락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손은 서류 여백의 8을 두 번 덧썼다.

“조회 답이 오기 전에 컨테이너가 항구를 나가면, 그 답은 대대장님께 갑니다.”

“압니다.”

“그럼 여기 서명하세요.”

브란도프스키는 서명했다.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한결의 이름은 그 서류 어디에도 없었다. 없게 하려고 그는 네 시간을 운전해 왔다.

*

0910, 부두 3번 선석 옆 조립식 사무실. 미 육군 하역 통제관은 소령이었다. 책상 위에 모니터 둘과 커피 두 잔이 있었다. 한 잔은 다 마셨고 한 잔은 손도 안 댔다. 그는 브란도프스키가 내민 반출 허가서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니터 하나를 돌려 보였다.

크레인 작업 순서표였다. 맨 위부터 수백 줄이 미군 장비였다. 포대 장비, 방공 부품, 탄약. 목적지 칸에 같은 글자가 줄지어 있었다. 태평양. 폴란드 여단의 컨테이너 두 개는 맨 아래에 있었다. 앞에 사백 줄이 넘었다.

“금요일 출항입니다. 워싱턴에서 정한 날짜입니다. 이 배들이 금요일에 못 떠나면 태평양 쪽 누군가가 사흘을 더 기다립니다.”

“이 두 개가 금요일까지 못 나가면 우리 전차 열일곱 대가 사흘을 더 섭니다.”

“압니다, 소령. 저도 압니다.”

통제관은 식은 커피 잔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브란도프스키와 같은 계급이었다. 같은 계급끼리는 명령을 못 한다. 부탁만 할 수 있다. 통제관의 모니터 옆에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해군 정복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동생이라고 했다. 태평양의 어느 배에 있는데, 어느 배인지는 편지에 적을 수 없다고 했다. 금요일에 떠나는 배들이 가는 곳이 그 바다였다. 통제관은 그 사진을 가리키지 않았다. 브란도프스키가 사진을 보는 것을 보고, 모니터를 조금 돌려 사진을 가렸을 뿐이었다.

“제 손으로는 순서를 못 바꿉니다. 이 순서표는 제 위의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제가 한 줄을 바꾸면, 그건 제 이름으로 바뀐 게 됩니다.”

브란도프스키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5월 17일부터 그는 서식에 자기 이름을 적는 사람이 무엇을 거는지 날마다 봤다. 그는 통제관에게 고맙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 밖 부두에서 크레인 하나가 미군 컨테이너를 배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컨테이너 옆면에 흰 글씨로 부대 번호가 적혀 있었다. 두 달 가까이 전 이 전선에서 빠진 포대의 번호였다. 그 포대가 빠진 날 이 전선의 포격은 3분 앞당겨졌다. 브란도프스키는 그 컨테이너가 배 위에 내려앉을 때까지 봤다.

*

1420, 헛간에서 12킬로미터 앞. 한결은 창고 7 쪽 숲 가장자리 참호에 있었다.

어젯밤 꺼낸 차 한 대가 개울 앞에서 섰다. 오늘 아침 그 차를 보러 나왔다가 드론 둘에 발이 묶였다. 둘은 숲 위를 돌며 떠나지 않았다. 참호 안에 표트르와 토마시와 병사 하나가 같이 있었다. 병사의 산탄총에는 탄이 넷 남아 있었다. 개울 앞에 선 차는 참호에서 80미터 떨어져 있었다. 기관실 덮개가 열린 채였다. 어젯밤 연료 필터가 막혀 섰는데, 필터를 가는 데는 10분이면 됐다. 그 10분 동안 드론 둘은 위에서 기다릴 것이었다. 토마시는 그 80미터를 눈으로 재고 또 쟀다.

주머니에서 전화가 떨었다. 브란도프스키였다.

“판 서, 컨테이너 번호를 다시 불러 주십시오. 항만 반장한테 줘야 합니다. 서류에 있는 건 세관이 가져갔습니다.”

한결은 번호를 외워서 불렀다. 알파벳 넷과 숫자 일곱. 끝자리가 둘 다 7이었다. 첫 번째 번호의 여섯째 자리에서 드론 하나가 참호 위로 내려왔다. 한결은 전화기를 가슴에 누르고 엎드렸다. 병사가 쐈다. 빗나갔다. 두 번째에 맞았다. 드론이 참호 뒤 흙더미에 박혀 터졌다. 흙이 등 위로 쏟아졌다. 귀에서 높은 소리가 한참 울렸다.

한결은 흙을 털지 않고 전화기를 귀에 댔다. 두 번째 번호를 처음부터 불렀다. 브란도프스키가 전화 너머에서 한 자리씩 따라 적었다. 끝자리 7을 부를 때, 두 번째 드론이 숲 위를 한 바퀴 돌고 멀어졌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이었다. 드론도 돌아갈 시간이 있었다. 표트르가 참호에서 튀어 나가 개울 앞 차로 달렸고, 한결이 필터를 들고 뒤따랐다. 80미터를 달리는 동안 한결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브란도프스키가 뭐라고 계속 묻고 있었다.

“판 서, 방금 그 소리는 뭡니까?”

“숫자 받아 적으시는 소리입니다.”

전화 너머에서 브란도프스키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떨려 있었다.

한결은 부두에 갈 수 없었다. 그는 어느 회사의 직원도 아니었고 폴란드군도 아니었다. 부두 출입증을 내줄 칸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12킬로미터 앞 참호에서 숫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

1740, 항만 노동자 대기실. 문 위에 광목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토는 어디 있나. 페인트가 흘러내린 손글씨였다. 대기실 안에서 사내들이 담배를 피우며 카드를 치고 있었다. 밤 교대조였다.

반장은 예순이 넘어 보였다. 손가락 마디가 굵었고 엄지손톱 하나가 까맣게 죽어 있었다. 크레인 쇠줄에 찧은 손톱이었다. 그는 브란도프스키의 계급장을 보고, 흙 묻은 바짓단을 보고, 카드를 내려놓았다.

“대대장이 직접 왔으면 급한 거겠지.”

브란도프스키는 사정을 말했다. 컨테이너 두 개, 점화부, 열일곱 대. 반장은 끝까지 듣고 창밖의 크레인들을 봤다.

“밤 교대 크레인 하나는 미군 순서표에 안 묶여 있어. 우리 항만 정비용이야. 그걸 쓰면 내 이름이 작업 일지에 남는다. 왜 대대장이 직접 와서 부탁하는지 먼저 들어야겠어.”

브란도프스키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2015년 이야기를 했다. 훈련장에서 견인 케이블이 끊어진 날의 이야기였다. 계약직 정비병 하나, 군번이 없어서 사고 보고서에 이름이 들어갈 칸이 없었던 사람. 그 뒤로 서식을 볼 때마다 칸부터 센다고 했다. 지금 전선에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서류에 칸이 없는 한국 사람이라고.

반장은 담배를 비벼 껐다. 한참 재떨이를 보다가 물었다.

“그 정비병, 이름이 뭐였소?”

“미하우 지엘린스키.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기타를 쳤고, 부대 트럭 라디오를 다 고쳐 놓고 갔습니다.”

대기실 안의 카드 소리가 멎었다. 담배 연기가 형광등 밑에서 한 층으로 고여 움직이지 않았다. 카드를 쥔 사내 하나가 카드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반장을 봤다. 그 사내도 그 이름을 아는 얼굴이었다. 반장이 일어섰다. 그는 대기실 구석 사물함을 열고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테이프로 사물함 문 안쪽에 붙여 두었던 것이었다. 젊은 남자가 트럭 보닛에 걸터앉아 기타를 안고 웃고 있었다. 트럭 문짝에 여단 마크가 있었다.

“내 누이 아들이야. 사고 보고서에 이름이 없다는 건 누이가 받은 편지에도 적혀 있었어. 장비 손상. 그 한 줄.”

반장은 사진을 사물함 문에 도로 붙였다. 테이프가 헐거워 한 번에 안 붙었다. 그는 엄지로 두 번 눌렀다.

“밤 교대 크레인은 2100에 돌아. 번호 줘.”

*

2200, 부두 끝 야적장. 크레인 하나가 불을 켜고 움직였다. 쇠줄이 내려가고, 끝자리가 7인 컨테이너 하나가 땅에서 떨어졌다. 공중에서 한 번 흔들리다가 여단 트레일러 위에 내려앉았다. 두 번째도 그렇게 올랐다. 반장은 크레인 운전실에 앉아 있었다. 작업 일지의 운전자 칸에 그는 자기 이름을 크게 적었다. 크레인 불빛이 검은 물 위에 길게 떨어져 흔들렸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쇠줄을 울렸다. 밤 교대 사내들은 카드판을 대기실에 두고 나와 야적장 가장자리에 서서 그것을 지켜봤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컨테이너가 트레일러에 내려앉는 소리가 났을 때, 누군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브란도프스키가 전화를 걸었다.

“판 서, 둘 다 올랐습니다.”

한결은 헛간 작업대 앞에서 그 말을 들었다. 점화부 스무 벌이었다. 헛간의 쇳덩이 둘과 창고 7의 열일곱이 그 안에 있었다.

*

2200, 같은 시각 창원은 새벽 다섯 시였다. 본사 감사팀 당직자가 밤사이 들어온 메일을 열었다. 폴란드 그단스크 세관의 조회 요청이었다. 수출 검사 필증 진위 확인. 첨부된 흐린 사본 오른쪽 아래에 볼펜으로 숫자 하나가 적혀 있었다. 8.

당직자는 사내 검사원 조회 창을 열고 그 여섯 자리를 한 자리씩 입력했다.

조회 창에 정하경이라는 이름이 떴다.

2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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