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5,194자) · 서한결 · 7월 2일(금)
금지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700, 서울. 국가안보회의 소회의실의 커튼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탁자 위에 종이컵 커피가 여럿 식어 있었다. 새벽 회의에서 쓰고 치우지 않은 것들이었다. 컵 가장자리마다 누군가 이빨로 씹은 자국이 있었다. 벽 화면에는 서해 지도가 떠 있었고, 산둥반도 끝에 붉은 점 둘이 찍혀 있었다. 0526에 우리 미사일 두 발이 닿은 자리였다. 누가 그 점을 끄는 것을 잊었다.
국가안보실 차장 한도겸이 탁자 끝에 앉았다. 밤을 새웠는데도 넥타이는 목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 맞은편에 방위사업청장이 서류철을 폈다. 산업부 차관 하나와 외교부 국장 하나가 양옆에 앉았다. 안건은 한 줄이었다. 폴란드 방산 부품 수출 건.
한도겸이 먼저 말했다. 그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서쪽으로 두 발이 나갔습니다. 어제까지 우리는 맞은 나라였어요. 오늘부터는 쏜 나라로 읽힙니다. 쏜 나라가 유럽 전선에 전차 부품까지 대면, 모스크바는 우리를 두 전선의 당사국으로 적습니다. 모스크바가 우리를 그렇게 적으면, 북쪽에 무엇을 넘겨줄지는 모스크바가 정합니다. 평양과 모스크바가 맺은 조약이 그걸 허락해요.”
“폴란드와의 계약은 다음 20년입니다.”
방위사업청장이 받았다. 그는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빼 한도겸 쪽으로 밀었다. 폴란드 전차 인도 계획표였다.
“지금 부품을 끊으면 그 전차들이 전선에 서는 걸 세계가 봅니다. 한국 전차는 전쟁이 나면 부품이 끊긴다. 그 한 문장이 20년 갑니다. 다음 계약은 없습니다.”
“다음 계약은 이 전쟁이 끝나야 있어요. 끝나는 날까지 우리가 한 전선에만 서 있어야 그날이 옵니다. 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겁니다. 오늘 새벽 그 원칙을 한 번 어겼으니, 다른 데서는 더 지켜야 합니다.”
방위사업청장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둘 다 옳았다. 방 안의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산업부 차관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점화 장치와 사격통제 부품은 전략물자 목록에 걸려 있어서, 수출 허가를 정지하는 데는 고시 한 줄이면 된다고 했다. 되살리는 데도 한 줄이면 되느냐고 방위사업청장이 물었다. 차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줄로 멈춘 것을 한 줄로 되살린 적이 없었다. 외교부 국장이 헛기침을 하고 서류 하나를 넘겼다.
“현지 언론에 우리 정비 인력 하나가 여행금지를 어기고 남아 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안 나왔습니다.”
“그건 여권법 사안입니다. 이 방의 사안이 아니에요.”
한도겸은 손목시계를 봤다. 그리고 결론을 말했다. 잠정 전면 중단. 이미 허가된 선적분 포함. 그는 그 말을 자기 손으로 적지 않았다. 벽 쪽에 선 행정관이 받아 적었다. 한도겸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의 컵인지 몰랐다.
*
0000, 같은 시각 폴란드. 한결은 창고 7 울타리 밖 옥수수밭에 엎드려 있었다.
셋째 밤이었다. 닷새 전 두 번째 밤은 울타리 앞에서 돌아섰다. 공병들이 새로 묻은 지뢰 줄이 생각보다 넓었고, 조명탄이 뜬 사이 도랑으로 뛰어들다가 배낭 하나를 흙에 흘렸다. 점화부 한 벌이 든 배낭이었다. 다음 날 아침 다율의 화면에서 러시아 병사 하나가 그 배낭을 들고 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셋이었다. 한결과 표트르와 토마시. 토마시는 이제 3호차의 전차장이었다. 전차장이 되고 나서 그가 처음 한 일은 분필로 포탑 옆면의 3을 한 번 더 굵게 칠한 것이었다. 비에스와프가 옥수수밭 끝에서 그들을 받았다. 그는 공병이 흙을 판 자리를 한 달 동안 창고를 세던 눈으로 다 세어 두었다.
“도로는 안 됩니다. 도로 옆은 전부 묻었습니다.”
표트르가 옮겼다. 비에스와프는 지도가 아니라 즈비섹을 가리켰다. 즈비섹은 옥수수밭 너머를 턱으로 짚었다. 흙길 하나가 있었다. 지도에 안 나오는 농로였다. 그의 아버지가 이 밭에 비료를 나르던 길이었다. 공병들은 지도를 보고 묻었다.
옥수수 잎이 얼굴을 긁었다. 잎 가장자리가 톱날처럼 잘아서, 스칠 때마다 뺨에 가는 금이 났다. 밤이슬에 젖은 흙냄새 사이로 멀리 창고 발전기의 기름 냄새가 섞여 왔다. 새 발전기였다. 토마시가 날린 것 대신 저쪽이 사흘 만에 새것을 가져다 놓았다. 토마시는 그 소리를 못 들었지만 발전기 불빛이 다시 켜진 것은 봤고, 그것을 볼 때마다 입술을 삐죽였다. 한결이 옆에서 손짓으로 물었다. 다시 맞힐 거냐고. 토마시는 전차장답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전차장답지 않게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발전기를 한 번 쏘는 시늉을 했다.
*
0112, 한결은 지붕 밑 둘째 줄 끝의 차 안에 있었다. 점화부와 퓨즈만 없던 열하나 가운데 하나였다. 딸깍. 레버가 물렸다.
표트르가 조종석에 앉았다. 그는 가슴 주머니 단추를 풀었다. 안경이 나왔다. 금이 두 줄 간 알, 다른 것보다 조금 반짝이는 경첩 나사. 그는 계기판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왼쪽, 조종수 오른손이 안 닿는 자리. 선반이 거기 있었다. 그는 안경을 그 선반에 올렸다. 다리를 접어서, 알이 앞을 보게 놓았다. 급하게 몸을 틀어도 안 떨어지는 자리였다. 열하루 전 배수관 안에서 한결이 그 자리를 알려 주었다.
표트르는 안경을 한 번 손가락으로 밀어 선반 안쪽으로 붙였다. 그러고는 한결을 돌아보지 않고 시동 스위치에 손을 댔다. 한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었지만 표트르의 등이 그 말을 받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시동은 두 번째에 걸렸다.
*
0126, 차가 창고 뒤편 울타리를 밀고 나갔다. 정문이 아니었다. 정문 앞 도로가 덫이라는 것을 이제 모두 알았다. 울타리 기둥 둘이 궤도 밑에 깔려 휘었다. 전차가 옥수수밭으로 들어가자 줄기들이 차체 앞에 부러지며 눕는 소리가 났다. 마른 뼈를 한꺼번에 밟는 소리였다.
경계병들의 기관총이 뒤에서 긁었다. 조명탄이 올라갔다. 옥수수밭이 하얗게 드러났고, 그 가운데 전차 한 대가 누운 줄기를 끌며 가고 있었다. 한결은 포탑 해치에 눈만 내놓고 뒤를 봤다. 창고 지붕 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둘이었다.
0131, 첫 번째 드론이 차체 뒤로 왔다. 3호차 없이 나온 밤이었다. 산탄을 쏠 포수도 없었다. 토마시는 비에스와프와 함께 옥수수밭 끝 도랑에 있었다. 드론이 엔진 덮개 위에서 터졌다. 차가 한 번 휘청했고, 기관실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계기판의 온도 바늘이 한꺼번에 뛰었다.
“서지 마십시오.”
한결이 소리쳤다. 표트르는 서지 않았다. 두 번째 드론은 도랑 쪽에서 날아온 산탄총에 날개를 잃었다. 토마시였다. 귀가 반만 남은 사람이 옥수수 줄기 사이로 날아가는 검은 점을 눈으로만 쫓아 맞혔다.
0214, 농로가 끝나고 개울이 나왔다. 차가 개울에 들어서자 연기 나는 기관실에 물이 튀어 하얀 김이 솟았다. 김이 걷히자 오른쪽 궤도에서 쇳소리가 났다. 드론 파편이 궤도판 하나를 긁고 지나간 자리였다. 한결은 개울 가운데에서 차를 세우게 하고 물속으로 내려갔다. 허리까지 찼다. 차가운 물이 정비복 안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 숨이 막혔다. 그는 손으로 궤도판을 더듬었다. 핀 하나가 반쯤 나와 있었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핀 하나를 꺼내 박았다. 물속에서 치는 망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손바닥만 울렸다. 다섯이 넷이 되었다.
0347, 차가 우리 쪽 능선을 넘었다. 굴린 전차가 셋이 되었다.
*
0930, 헛간 마당에서 한결은 연기에 그을린 기관실 덮개를 열고 있었다. 여단 군수참모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라 아직 따뜻했다.
영어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폴란드행 방산 부품 수출을 잠정 전면 중단한다. 이미 허가된 선적분을 포함한다. 그 아래에 여단 명의로 걸어 둔 긴급 주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점화부 스무 벌, 사격통제 퓨즈 스무 상자. 주문서의 기술 연락인 칸에 서한결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름 옆에 누군가 도장을 찍었다. 취소.
서울은 오후 네 시 반이었다. 서울에서 어떤 방이 정한 것이 반나절 만에 종이가 되어 이 헛간까지 왔다. 한결은 그 방을 본 적이 없었다. 종이의 글자는 존댓말도 반말도 아니었다.
다율이 어깨 너머로 종이를 읽었다. 그는 한국어 원문을 찾아 전화기로 외교부 누리집을 열었다. 원문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국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다율은 그 줄을 소리 내어 읽고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판 서님, 종합적으로가 무슨 뜻입니까?”
“많이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누가요?”
“우리 말고요.”
1300, 그단스크 항 선사에서 문자가 왔다. 컨테이너 두 개, 반송 처리. 여단이 6월에 주문해 부두 야적장에 내려 두었던 것이었다. 한결은 그 컨테이너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번호 끝자리가 둘 다 7이어서 창고 7 같다고 다율과 웃은 적이 있었다.
*
2100, 브란도프스키가 헛간으로 왔다. 그는 녹색 탄약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뚜껑을 열어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기름 먹인 천만 한 장 남아 있었다. 천을 싼 매듭이 퇴각하던 정비병의 방향 그대로였다.
“판 서, 여단 창고 상자가 비었습니다.”
“압니다. 오늘 밤 마지막 벌을 제가 끼웠습니다.”
“서울에서는 이제 안 옵니까?”
“안 옵니다. 오늘 아침 서울에서 누가 그렇게 정했습니다.”
브란도프스키는 빈 상자 뚜껑의 분필 글씨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돌아와서 끼울 것. 4. 숫자 4 위에 누군가 가위표를 그어 놓았다. 오늘 오후 군수참모가 그은 것이었다.
“나머지 열아홉은 어떻게 합니까?”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작업대 서랍을 열었다. 공구함 맨 아래 칸에서 꺼내 온 비닐 파일이 있었다. 작년 여름 창원에서 완성차를 인수할 때 받은 서류 사본들이었다. 그는 파일을 넘기다가 한 장에서 멈췄다. 수출 검사 필증이었다. 오른쪽 아래에 검사원 번호가 찍혀 있었다. 정하경. 창원 공장 완성차 검사동 반장. 서류에 자기 이름이 걸린 것은 규격 안쪽이라도 빼는 사람이었다.
*
2300, 한결은 헛간 밖 트랙터 옆에 앉았다. 서울은 새벽 여섯 시였다. 창원도 여섯 시였다. 하경은 늘 여섯 시 반에 공장 셔틀을 탄다고 했다. 작년에 인수 서류를 맞추느라 한 달을 같이 일할 때 들은 말이었다. 그녀는 셔틀 맨 앞자리에 앉아 그날 볼 차의 번호를 미리 외운다고 했다. 외워 두면 차가 검사동에 들어오기 전에 어디가 이상한지 먼저 보인다고. 한결은 그 말을 그때는 농담으로 들었다. 헛간 부엌 창에는 아직 등잔이 켜져 있었다. 할리나가 내일 구울 빵 반죽을 치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전화기에 번호를 눌렀다. 한 자리씩 눌렀다. 누를 때마다 자판이 작게 울렸다. 통화 버튼 위에서 엄지가 한참 멈췄다.
전화기 화면에 창원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열한 자리가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