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5,242자) · 서한결 · 6월 21일(월)
창고 7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400, 창고 7 뒤쪽 울타리 밑으로 세차장 배수 도랑이 지나가고 있었다.
비에스와프가 먼저 들어갔다. 도랑은 콘크리트로 발라져 있었고 폭이 어깨 넓이만 했다. 바닥에 기름 섞인 물이 손가락 두 마디쯤 고여 있어서, 엎드려 기면 그 물이 턱 밑으로 차올랐다. 울타리 기둥 하나가 도랑 위에서 조금 들려 있었다. 전차를 씻던 물이 몇 해 동안 기둥 밑을 파먹은 자리였다. 비에스와프는 한 달 동안 그 틈을 손으로 넓혀 두었다고 했다. 표트르가 그 말을 옮기는 동안 한결은 도랑 벽에 붙은 굳은 기름때를 손바닥으로 느꼈다. 겨울마다 이 창고에서 씻겨 나간 궤도의 흙이었다.
0400은 경계병이 교대하는 시각이었다. 여섯이 정문 앞에 모여 담뱃불을 나눠 붙이는 3분 동안, 창고 뒤쪽은 아무도 보지 않았다. 비에스와프는 그 3분을 한 달 동안 셌다. 넷이 차례로 기둥 밑을 빠져나갔고, 아가타는 도랑 끝에 남았다. 영토방위군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오늘 하루 창고 밖에서 전령을 맡기로 했다. 트랙터 기름 냄새가 나는 사내 즈비섹이 비에스와프 뒤에 붙어 들어왔다.
긴 지붕 밑은 캄캄했다. 식은 경유와 쥐똥과 비에 삭은 방수포 냄새가 한꺼번에 코로 들어왔다. 한결은 눈이 어둠에 익기 전에 손으로 먼저 알았다. 손끝에 닿은 것이 궤도였고, 궤도 위로 차체의 모서리가 이어졌다. 그 모서리를 따라가면 조종수 해치가 나온다. 해치는 반쯤 열려 있었다. 그는 몸을 밀어 넣었다.
*
0520, 날이 밝기 시작했다. 여섯 사람이 두 대의 전차 안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한결과 야누시와 표트르는 지붕 밑 셋째 줄 가운데, 육육이의 차체 안에 있었다.
한결은 붉은 손전등을 손바닥으로 반쯤 가리고 조종수석 아래를 비췄다. 점화부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빈 소켓 위에 절연 테이프가 십자로 붙어 있었다. 먼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누군가 붙여 두고 간 것이었다. 야누시는 포탑 천장의 조준경 접안부에 손바닥을 댔다. 작년 십이월 한결이 포탑 위에서 그 조준경 덮개를 열 때 눈송이가 렌즈에 붙었고, 한결은 장갑을 벗고 맨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녹였다. 야누시는 그날 우산을 받쳐 들고 서서 저 사람 손가락이 얼겠다고 생각했다고, 표트르를 시켜 속삭여 전했다. 퓨즈함도 같았다. 뚜껑 안쪽에 네모난 빈칸이 일곱 줄 나 있었고, 그 위에도 테이프가 있었다. 퇴각하던 정비병은 부품을 뽑는 데만 급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끼울 사람을 생각하고 뽑았다.
“돌아와서 끼울 것.”
한결은 여단 창고 상자 뚜껑의 분필 글씨를 입속으로 말했다. 야누시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표트르가 옮기려다 말았다. 옮길 말이 아니었다.
*
0630, 야누시가 포탑 바닥에 앉은 채 배낭 하나를 열었다. 점화부가 아니었다. 기름종이에 싼 둥근 통이 여섯 개 들어 있었다. 소이 수류탄이었다. 한결은 그것이 언제 배낭에 들어갔는지 몰랐다.
야누시가 폴란드어로 낮게 말했다. 표트르가 한 단어씩 영어로 받아 한결에게 넘겼다.
“지금 태우자고 합니다. 스물둘 전부요. 넷 분으로 두 대를 몰고 나가다가 걸리면, 저쪽은 남은 스무 대를 트레일러에 싣고 사진을 찍는다고요. 태우면 저쪽은 아무것도 못 가져갑니다.”
“태우면 우리도 아무것도 못 가져갑니다.”
“그래도 영이 마이너스 스물보다 낫답니다.”
한결은 연필과 종이를 꺼냈다. 무릎 위에 종이를 펴고 네모를 스물두 개 그렸다. 어젯밤 쌍안경으로 본 것과 방금 손으로 더듬은 것을 합쳐 칸을 채웠다. 점화부와 퓨즈만 없는 차가 열하나였다. 궤도가 풀린 차가 넷, 파워팩을 반쯤 들어낸 차가 둘이었고, 나머지는 포탑 안이 뜯겨서 무엇이 없는지 아직 몰랐다.
“오늘 밤 둘입니다. 이 차하고 옆 차. 둘이 우리 쪽에 닿으면 거기서 점화부를 뽑아 다시 들고 옵니다. 넷 분으로 스물둘을 돌려 막는 겁니다. 한 번에 둘, 올 때마다 둘.”
“올 때마다 저쪽도 기다린다고 합니다.”
“압니다.”
야누시는 종이의 네모들을 오래 봤다. 그의 엄지손톱에 기름때가 반달 모양으로 끼어 있었다. 그는 한결이 그린 칸 가운데 하나를 손톱으로 짚었다. 육육이였다. 그러고는 짧게 말했다.
“못 나가면 내가 태운다.”
표트르가 그 말은 옮기지 않았다. 옮기지 않아도 한결은 알아들었다. 야누시는 소이 수류탄 여섯 개를 도로 기름종이에 싸서 자기 무릎 옆에 두었다. 배낭에 넣지 않고, 손이 닿는 자리에 두었다.
*
1040, 머리 위 차체 지붕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났다. 군화 밑창이었다. 셋은 숨을 멈췄다.
경계병 하나가 전차 위로 올라와 앉았다. 해치 틈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가 그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담배에 불을 붙였고, 재를 포탑 위에 털었다. 재가 해치 틈으로 조금씩 떨어져 한결의 무릎에 앉았다. 담배 연기가 쇠 냄새와 섞여 차체 안으로 내려왔다. 한결은 기침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턱에 힘을 주어 눌렀다. 표트르의 눈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커져 있었다.
1047, 무언가가 해치 틈으로 굴러떨어졌다. 한결의 무릎 위에 떨어져 작게 튀었다. 라이터였다. 금속 뚜껑에 닻 그림이 새겨진 싸구려 라이터였다.
위에서 경계병이 욕을 했다. 해치 틈으로 얼굴이 반쯤 들어왔다. 햇빛을 등진 얼굴이라 눈만 번들거렸다. 한결은 조종수석 등받이 뒤에 몸을 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야누시의 손이 칼자루에 가 있었다. 경계병은 어둠 속을 한참 내려다봤다. 들어오려면 몸을 옆으로 틀어 해치 틈을 비집어야 했다. 그는 배가 나와 있었다. 한 번 몸을 틀어 보다가 혀를 차고, 라이터 따위 하나 더 있다는 투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군화 소리가 포탑을 건너 멀어졌다.
한결은 라이터를 손바닥에 쥐었다. 아직 따뜻했다. 표트르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뱃살에게 감사를.
*
1520, 땅이 흔들렸다. 우리 쪽 포였다. 창고에서 서쪽으로 400미터쯤 떨어진 러시아 포 진지 쪽이었다. 첫 발이 떨어지고 25초 뒤에 두 번째가 떨어졌다. 지붕 함석이 떨리며 먼지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경계병들이 발전기 옆 방공호로 뛰어가는 발소리가 났다. 한결은 해치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마당 건너편에서 흙기둥이 솟았다가 천천히 무너졌다. 그 사이로 러시아 병사 둘이 누군가를 들쳐 메고 뛰었다. 들린 사람의 다리 하나가 이상한 각도로 흔들렸다.
K9이었다. 여단 포대는 사흘에 한 번 이 진지를 두드렸다. 오늘이 그 사흘째라는 것을 비에스와프는 알았고, 그래서 창고에 들어오는 날을 오늘로 잡았다. 포가 떨어지는 동안 경계병들은 방공호에서 안 나온다. 옆 전차에서 비에스와프가 해치 밖으로 손을 내밀어 둘을 펴 보였다. 20분 동안 아무도 안 온다는 뜻이었다.
한결은 그 20분에 차체 밑으로 들어갔다. 육육이의 궤도 연결부를 손으로 하나씩 더듬었다. 핀이 전부 박혀 있었다. 옆 차의 궤도는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오른쪽 셋째 바퀴 뒤에서 핀 머리 두 개가 반쯤 빠져 나와 있었다. 그는 그 자리를 기억했다. 오늘 밤 그 두 개를 박아야 했다. 주머니 속에서 핀 일곱 개가 그의 허벅지에 눌렸다.
*
1810, 교대 시각에 아가타가 배수 도랑으로 다시 들어왔다. 옷이 허리까지 젖어 있었다. 그녀는 무너진 다리 밑 배관에서 여단 전령을 만나고 왔다. 손바닥 안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 비에스와프가 그것을 펴서 해치 틈으로 들어온 빛에 비췄다. 숫자 넷이었다.
0100.
우리 쪽이 창고 남쪽 러시아 진지를 치는 시각이었다. 진짜 공격이 아니라 저쪽 눈을 남쪽으로 돌리기 위한 양동이었다. 그 30분 동안 두 대가 창고를 나가야 했다. 비에스와프는 종이를 소매 안쪽에 대고 숫자를 연필로 한 번 더 적었다. 그리고 종이는 입에 넣고 씹었다.
*
1930, 해가 기울자 차체 안이 금방 어두워졌다. 한결은 오늘 밤 할 일을 순서대로 두 사람에게 맞췄다. 말로 하면 소리가 났으므로 손으로 했다.
점화부를 소켓에 밀어 넣는다. 한결이 주먹을 앞으로 밀었다. 표트르가 따라 밀었고 야누시도 밀었다. 퓨즈를 첫 줄부터 꽂는다. 한결이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둘이 따라 폈다. 잠금 레버를 내린다. 한결은 손바닥을 아래로 눌렀다. 레버가 제자리에 걸리면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다음으로 간다.
그 소리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한결은 입 모양으로 한국말을 했다. 딸깍. 표트르가 영어로 뭐라고 하려다 그만두고 한결의 입 모양을 따라 했다. 야누시는 폴란드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셋은 순서를 처음부터 다시 맞췄다. 밀고, 펴고, 누르고. 세 번째 맞출 때 레버를 누르는 손이 셋 다 같은 박자로 내려갔고, 셋의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딸깍.
야누시의 입에서도 한국말이 나왔다. 셋은 그 사실을 동시에 알았다. 표트르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고, 야누시는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한결도 조종수석 등받이에 이마를 대고 한참 숨을 참았다. 옆 전차에서 토마시가 해치 틈으로 이쪽을 봤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입술을 읽으려 했지만 어둠이 너무 짙었다.
*
2130, 창고 서쪽 들판에서 불빛이 한 번 번쩍했다. 소리는 1초 뒤에 왔다. 둔하고 무거웠다. 대전차지뢰였다.
해치 틈으로 보니 들판 한가운데서 작은 것 하나가 흙먼지를 헤치고 계속 기어오고 있었다. 궤도 달린 낮은 차였다. 앞에 쟁기 날 같은 것이 달려 있었고, 날이 흙을 뒤집을 때마다 흰 먼지가 달빛에 올라왔다. 다율의 무인 지뢰 제거기였다. 12킬로미터 밖 헛간에서 다율이 노트북 앞에 앉아 그것을 몰고 있었다. 방금 지뢰 하나를 밟고도 뒤집히지 않았다.
경계병들이 정문 쪽에서 소리쳤다. 조명탄이 올라갔다. 들판이 대낮처럼 하얘졌고, 기관총이 그 하얀 들판을 긁었다. 탄이 제거기의 차체를 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제거기는 서지 않았다. 창고에서 우리 쪽 능선으로 가는 도로 옆을 따라 한 줄을 갈았고, 돌아서 한 줄을 더 갈았다. 두 번째 줄 끝에서 지뢰가 하나 더 터졌다. 제거기가 옆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궤도를 붙였다.
2146, 박격포가 들판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거기는 그 사이를 기어 도랑 속으로 사라졌다. 조명탄이 꺼지자 들판에 흙냄새와 화약 냄새가 남았다. 도로 옆으로 뒤집힌 흙 두 줄이 달빛에 검게 보였다. 오늘 밤 두 대가 밟고 나갈 길이었다.
*
2200, 트레일러까지 32시간이 남았다. 준비가 끝난 차는 둘이었다.
한결은 경계병의 라이터를 조종수석 옆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높고 가는 소리였다. 관측 드론이었다. 한결은 소리가 한 바퀴 돌고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멀어지지 않았다. 도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창고 지붕 바로 위에서 한자리에 서 있었다.
천장 함석판이 그 소리에 맞춰 가늘게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