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5,211자) · 서한결 · 6월 20일(일)

철사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2130, 헛간 바닥에 배낭 네 개가 나란히 놓였다.

배낭마다 기름 먹인 천에 싼 점화부 뭉치와 퓨즈 상자가 들어 있었다. 여단 창고의 녹색 상자 여섯에서 꺼낸 것이었다. 넷 분을 넷이 나눠 멨다. 한결이 무게를 한 번씩 들어 보고, 가장 무거운 것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야누시가 말없이 그것을 도로 밀어내고 자기 것과 바꿨다.

잠입조는 넷이었다. 한결, 야누시, 토마시, 표트르. 적 후방에서 영토방위군 셋이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토마시는 귀가 아직 먹먹해서 누가 말을 걸면 입술을 봤다. 표트르는 스물두 살이었고, 3호차의 빈 조종수 자리를 맡은 지 보름이 조금 넘었다. 넷 가운데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은 그뿐이었다. 대학에서 두 학기 배우다 말았다고 했다. 그는 3호차를 몰고 나가지 않고 창고 7의 전차를 몰고 돌아올 사람이었다.

출발 전에 야누시가 여단 창고에 다녀왔다. 돌아온 그는 한결 앞에 손바닥을 펴 보였다. 궤도 연결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여단 창고 선반 구석에서 찾은 것이라고 했다. 트럭과 같이 탄 상자에 들어 있던 것과 같은 규격이었다.

“이건 제 몫입니다. 제 궤도에 쓸 겁니다.”

브란도프스키가 옮겼다. 야누시는 핀 두 개를 자기 가슴 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한결의 주머니에는 여전히 일곱 개가 있었다. 한결은 야누시 몫까지 셈에 넣지 않았다.

한결의 조끼 앞판 주머니에는 작전참모의 세라믹 판이 들어 있었다. 무게 때문에 어깨끈이 목을 파고들었다. 브란도프스키가 그 끈을 두 손으로 한 번 고쳐 매 주었다.

“판 서, 여권은 제 금고에 있습니다.”

“압니다.”

“그러니 돌아오셔야 합니다. 판 서가 안 돌아오면 저는 저 금고를 평생 못 열 겁니다. 열 때마다 판 서 것이 제일 위에 있을 테니까요.”

할리나가 부엌에서 나와 빵 네 덩이를 신문지에 싸서 배낭마다 하나씩 쑤셔 넣었다. 주자는 닭장 경계선 상자 위에 서서 한결에게 턱을 한 번 들었다. 한결도 턱을 들었다. 다율은 헛간 구석에서 노트북 화면에 비친 무인 지뢰 제거기 궤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면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

2200, 넷이 헛간 뒤 밀밭으로 들어갔다. 달은 반쯤 차 있었고 구름이 그 위를 자주 지나갔다. 무전기는 전원을 뺀 채 배낭 맨 밑에 넣었다. 전파를 내면 맞는다. 한 달 동안 그들이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대신 한결의 가슴 주머니에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정보참모가 영토방위군의 버스트를 받아 그려 준 길이었다. 도랑, 배수로, 무너진 다리 밑, 옥수수밭 가장자리, 다시 배수로. 12킬로미터를 연필 선 하나로 이은 지도였다.

2340, 첫 배수로에 들어갔다. 물이 정강이까지 찼다. 6월인데도 물은 뼈가 시릴 만큼 찼고, 바닥의 진흙이 군화를 빨아들였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쩝 하는 소리가 났다. 야누시가 손을 들면 멈추고, 손바닥을 아래로 누르면 엎드리고, 손가락 둘을 앞으로 까딱하면 다시 갔다. 말은 하지 않았다. 토마시에게는 그게 오히려 편했다. 그는 처음으로 남들과 같은 속도로 알아들었다.

*

0000, 동쪽으로 20킬로미터.

일리야는 천막 밖 소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사흘 만에 신호가 잡혔다. 모스크바 외곽 아파트의 부엌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주전자 끓는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였다.

“일류샤, 너 괜찮니? 텔레비전에서는 다 잘되고 있다고 하는데, 옆집 코스탸가 안 돌아왔어. 그 집 엄마가 매일 역에 나가.”

“엄마, 나는 괜찮아. 나는 탁자 앞에만 있어. 화면만 봐. 총은 안 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총을 쏘지 않았다. 화면을 보고 손가락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 손가락 끝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화면이 하얘졌다가 검게 끊기는 것으로만 알았다.

“텔레비전에서 두 번째 동원령 이야기가 나왔어. 너네 사촌 사샤도 종이 받았어. 너 있는 데로 가니?”

“몰라, 엄마. 나는 몰라.”

“밥은 먹니?”

“먹어. 보르시 먹어.”

어머니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전화가 끊겼다. 일리야는 전화기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소콜로프가 탁자 앞에서 그를 봤다. 일리야의 눈이 붉었다. 소콜로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니터 하나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관측 드론 화면이었다.

*

0112, 관측 드론 소리가 들렸다. 높고 가늘었다. 야누시가 손바닥을 아래로 눌렀다. 넷이 배수로 물속에 엎드렸다. 한결은 얼굴을 반쯤 물에 담근 채 숨을 쉬었다. 물 냄새와 썩은 풀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몸의 열이 위에서 보이지 않게 진흙과 풀을 등 위에 덮었다. 차가운 진흙이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드론 소리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가, 돌아왔다. 한 바퀴를 돌았다. 두 바퀴째에 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한결은 배낭 속 점화부의 무게를 등으로 느꼈다. 그 무게만 아니면 벌써 일어섰을 것 같았다. 세 바퀴째를 돌고 소리가 멀어졌다. 야누시가 손가락 둘을 까딱할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까딱한 것은 12분 뒤였다.

0131, 배수로가 끊기고 포장도로 하나를 건너야 했다. 도로 폭은 8미터였다. 야누시가 도로 가장자리 풀숲에 엎드려 좌우를 오래 봤다. 멀리 동쪽에서 불빛 둘이 다가왔다. 전조등을 가린 트럭이었다. 가린 틈으로 새는 가느다란 빛 두 줄이 아스팔트 위를 쓸며 왔다. 넷은 풀숲에 얼굴을 묻었다. 트럭 엔진 소리가 머리 옆을 지나갔다. 짐칸에 탄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러시아어였고, 누군가 웃었다. 담배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트럭이 지나간 뒤에도 야누시는 손을 들지 않았다. 두 번째 트럭이 왔다. 그것도 지나갔다. 세 번째는 오지 않았다. 야누시가 손가락 둘을 까딱했고, 넷은 한 사람씩 허리를 숙인 채 도로를 건넜다. 한결은 아스팔트를 밟는 4초 동안 자기 군화 밑창의 진흙이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서 아침에 그 발자국을 볼 것이다. 아침이면 넷은 이미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0150, 무너진 다리 밑 콘크리트 배수관 앞에서 영토방위군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맨 앞의 사람이 쉰 살쯤 돼 보였고 턱수염이 희끗했다. 비에스와프 상사였다. 그 뒤에 스무 살 남짓한 여자 하나와 트랙터 기름 냄새가 나는 사내 하나가 있었다. 셋 다 군복 위에 농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비에스와프가 야누시와 짧게 악수하고 한결을 봤다. 폴란드어로 뭐라고 말하는데, 숫자 사이에 한 박자를 더 쉬는 말투였다. 정보참모가 찾아낸 그 버릇이었다. 표트르가 한결에게 서툰 영어로 옮겨 주었다.

“당신이 그 번호판 두 개를 새로 단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에스와프가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거칠고 따뜻했다.

“그 두 대를 읽느라 조종수 자리 밑에서 세 시간을 누워 있었답니다. 번호가 이상해서요. 여단 전산 것하고 달라서, 우리가 틀렸나 했답니다.”

*

0210, 배수관 안에서 잠깐 쉬었다. 콘크리트 벽에 등을 대자 젖은 옷이 등에 들러붙었다. 할리나의 빵을 꺼냈다. 신문지가 젖어 빵 겉이 눅눅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토마시는 빵을 반으로 갈라 영토방위군 여자에게 건넸고, 여자는 사양하다가 받았다. 여자가 고맙다고 말했는데 토마시는 입술을 못 읽었다. 여자가 한 번 더, 이번에는 크게 말했다. 배수관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고 비에스와프가 둘 다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토마시는 그 손짓은 알아들었다.

비에스와프는 빵을 먹지 않고 품에 넣었다. 나중에 먹겠다고 했다. 한 달 동안 그는 먹을 것이 생기면 늘 나중으로 미뤘다고, 표트르가 옮겼다. 그의 외투 소매 끝이 해져서 실밥이 늘어져 있었다. 소매 안쪽에 연필로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스물두 대의 차대번호였다. 종이는 젖으니까 소매에 적었다고 했다.

표트르가 한결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는 가슴 주머니 단추를 풀고 무언가를 꺼냈다. 안경이었다. 한쪽 다리의 경첩에 다른 나사보다 조금 반짝이는 나사 하나가 박혀 있었다. 알에는 금이 두 줄 가 있었다. 야누시가 그걸 자기에게 맡겼다고 표트르가 말했다. 조종수 자리의 물건이니까 조종수가 가져야 한다고 했다고.

표트르는 안경을 두 손으로 들고 한결에게 물었다. 두 학기짜리 영어를 한 단어씩 골라서 물었다.

“창고에서 몰고 나올 차에요. 이거, 어디 두면 됩니까? 선반. 마레크 자리가 어디였는지 저는 모릅니다. 3호차에서는 계기판 위였습니다. 다른 차도 같은 자리에 선반이 있습니까?”

한결은 안경을 봤다. 자기가 끼운 나사가 달빛에 조금 반짝였다.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계기판 위 왼쪽, 조종수 오른손이 안 닿는 데입니다. 거기 두면 급하게 몸을 틀어도 안 떨어집니다.”

표트르는 그 말을 듣고 안경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단추를 채우고, 그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야누시가 한 것과 같은 동작이었다.

*

0340, 옥수수밭 끝 배수로에서 넷이 고개를 들었다. 300미터 앞에 철조망 울타리가 있었고, 그 안에 창고 7이 있었다. 폴란드군 차량 정비창이었다. 긴 지붕 셋에 넓은 콘크리트 마당. 마당과 지붕 밑에 네모난 것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나오자 포신들이 한꺼번에 희미하게 빛났다. 한결은 셌다. 두 번 셌다. 스물둘이었다.

비에스와프가 손가락으로 울타리 둘레를 짚으며 속삭였다. 경계병은 여섯, 2시간마다 교대, 개는 없고, 동쪽 문 옆에 발전기 하나.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사흘 전 저쪽 장교들이 문 앞에서 떠드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트레일러가 6월 23일 0600에 온다고.

한결은 쌍안경으로 한 대씩 훑었다. 마당 쪽에 선 것들은 포탑에 방수포를 덮어 놓았고, 지붕 밑 것들은 해치가 반쯤 열린 채였다. 한 대는 기관실 덮개가 들려 있었다. 파워팩을 반쯤 들어내다 만 것이었다. 또 한 대는 궤도 한쪽이 바닥에 풀려 있었다. 그리고 지붕 밑 셋째 줄 가운데 한 대의 포탑 옆면에, 흰 페인트로 쓴 전술 번호가 쌍안경 속에서 또렷하게 읽혔다. 한결이 작년 십이월, 눈 오는 날 조준경을 닦은 차였다. 그날 야누시가 들고 있던 우산은 바람에 뒤집혔다.

야누시가 한결 옆에 엎드린 채 쌍안경을 넘겨받았다. 그도 그 번호를 봤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고 같은 차를 봤다.

한결은 손목시계를 봤다. 0350이었다. 50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쌍안경을 들어 창고 정문을 봤다. 문짝 두 개가 가운데서 맞닿는 자리에 쇠고리가 있었고, 고리에 철사가 감겨 있었다. 퇴각하던 정비중대가 문을 닫고 간 흔적이었다. 한결은 배율을 올렸다. 철사는 두 바퀴가 아니었다. 한 바퀴였다. 끝을 비틀지도 않고 그냥 꺾어 놓은, 급하게 떠난 사람의 손이 감은 철사였다.

1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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