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5,124자) · 서한결 · 6월 16일(수)
바이라인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2010, 한결은 헛간 문턱에 앉아 전화기로 뉴스를 넘겨 봤다. 회사 계정은 잠겼어도 전화기는 아직 인터넷을 잡았다. 첫 화면에 미국 기사가 떠 있었다. 텍사스의 주유소 전광판 사진이었다. 휘발유 가격이 한 달 사이 두 배가 됐다는 제목 아래로, 주유기 앞에 줄 선 픽업트럭들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 기사는 의회 청문회였다. 왜 세 곳에서 싸우느냐고 묻는 의원의 사진이 있었다. 폴란드는 기사 셋째 문단에 한 번 나왔다. 세 곳 가운데 하나로.
다율이 옆에 와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우리가 셋째 문단입니까?”
“셋째 문단이면 괜찮은 겁니다. 넷째부터는 아무도 안 읽습니다.”
“판 서님은 넷째 문단까지 읽으십니까?”
“저는 설명서를 끝까지 읽는 사람입니다.”
다율이 웃었다. 저녁 해가 밀밭 너머로 기울었고, 헛간 그물 그림자가 마당에 길게 누웠다. 1호차 분사 펌프는 아직 작업대 위에 반쯤 조립된 채 놓여 있었다. 한결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작업대로 돌아갔다.
2100, 위성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바르샤바 지역 번호로 시작했다.
한결은 1호차 분사 펌프를 조립하던 손을 바지에 닦고 전화를 받았다. 헛간 안에는 등잔 두 개가 켜져 있었고, 주자는 닭장 앞에서 닭 세 마리에게 저녁을 주고 있었다.
“서한결 씨죠? 배소현입니다. 바르샤바에서 한국 신문에 기사 쓰는 사람이에요.”
한국어였다. 한 달 넘게 한결에게 한국어로 말을 건 사람은 박 팀장과 다율뿐이었다. 목소리가 낮고 빨랐다. 급하게 쓰는 사람이 말하는 속도였다.
“제 번호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단 공보실에 한국 정비관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있다고 하더군요. 번호는 안 줬어요. 대신 회사 바르샤바 지사에 물었더니, 거기 누가 이 번호를 불러 줬어요. 누가 줬는지는 말 안 할게요.”
“무슨 기사를 쓰십니까?”
“철수 명령을 거부한 한국 정비관이요. 정부가 여행금지를 내리고 72시간을 줬는데, 회사가 계약을 끊었는데, 안 나온 사람이 있다는 기사예요.”
한결은 펌프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기름 묻은 손가락이 전화기에 자국을 남겼다.
“그 기사, 빼 주십시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쓰면 두 군데서 읽습니다. 서울은 제 이름을 여권법 위반자 명단에서 찾을 거고, 저쪽은 제 이름을 표적 목록에서 찾을 겁니다. 저쪽이 요즘 정비 트럭만 골라서 칩니다. 트럭 옆에 누가 서 있는지까지 알면 더 쉽게 고릅니다.”
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위성 전화의 반 박자가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는 동안의 조용함이었다.
“서한결 씨, 이 기사의 주어는 당신이 아니에요.”
“제가 안 나왔다는 기사인데요.”
“당신을 버린 정부가 주어예요. 정부가 자기 국민한테 72시간을 주고, 그 국민이 만든 전차가 그 72시간 동안 어디서 싸웠는지는 안 물었다는 기사예요. 회사가 계약서의 지원 장소를 비워 놓고, 그 빈칸에 사람이 가니까 계약을 끊었다는 기사예요. 당신 이름은 그 문장에 안 들어가도 돼요.”
“이름이 안 들어가도 한국 정비관은 여기 저 하나입니다.”
“그럼 이름 없이 쓸게요. 소속도 안 쓰고, 부대 위치도 안 써요. 대신 한 문장은 넣을게요.”
“어떤 문장입니까?”
“정비지원차 이탈 없음.”
한결은 등잔 불빛을 봤다. 불꽃이 한 번 흔들렸다.
“그 문장을 어떻게 아십니까?”
“여단 공보실 사람이 보여 줬어요. 손실 보고서 사본이요. 정비지원차가 안 나간 걸로 돼 있는데, 그날 밤 그 차에 탔던 민간인이 1,100미터를 걸어갔다 왔다고. 공보실 사람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울 뻔했어요. 그런 사람이 그 종이를 저한테 보여 준 거예요. 누군가는 그 문장을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던 거죠.”
한결은 그 공보실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운전병의 사촌이 여단 공보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
2231, 헛간 밖에서 소리가 났다. 먼 데서 두 번, 가까운 데서 한 번. 헛간 지붕 그물이 흔들리며 먼지가 등잔 위로 떨어졌다. 주자가 닭장 앞에 엎드렸다가, 닭을 품에 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할리나가 부엌에서 뛰어나와 아이를 헛간 기둥 뒤로 끌어당겼다.
“무슨 소리예요?”
전화 너머에서 소현이 물었다. 목소리가 처음으로 빨라지지 않고 멈췄다.
“포입니다. 저쪽 겁니다. 이쪽을 노린 건 아닙니다. 노렸으면 더 가까웠을 겁니다.”
“어떻게 알아요?”
“한 달 들으면 압니다.”
한결은 전화기를 어깨에 끼운 채 할리나 쪽으로 손바닥을 펴 보였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할리나는 그 손바닥을 믿지 않는 얼굴로 아이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주자의 품에서 닭 한 마리가 버둥거리며 날개를 쳤다. 그 닭의 이름이 무엇인지 한결은 아직 몰랐다. 대통령 이름이라고만 들었다.
2234, 세 발이 더 떨어졌다. 이번엔 국도 건너 밀밭이었다. 병사 둘이 헛간 문을 닫고 문짝에 등을 댔다. 한결은 전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았다. 떼면 소현이 전화를 끊고, 그러면 이 이야기는 그녀 혼자 결정하게 될 것이었다.
“서한결 씨,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방금 그 소리도 기사에 쓰실 겁니까?”
“안 써요. 그 소리는 당신 위치를 알려 주니까.”
“기자님이 저보다 더 조심하십니다.”
“저도 72시간 받았어요. 기자는 예외 허가가 나와요. 그래도 다음 주에 서울 들어가요. 이 기사 서울에서 마저 쓰려고요. 여기서 쓸 건 다 봤어요. 서울에 가서 봐야 할 게 남았어요.”
“무엇을 보십니까?”
“이 72시간을 누가 정했는지요.”
“서울 가시면 누구를 만나십니까?”
“아직 몰라요. 문 앞까지는 가 볼 거예요. 문 안은 기자한테 안 열어 주니까.”
2250, 포성이 멎었다. 소현은 이름을 빼겠다는 약속을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한결에게 부탁했다. 이 기사가 나간 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도 알려 달라고. 한결은 알려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번호는 지우지 않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한결은 운전병을 찾았다. 운전병은 정비 트럭 운전석에서 모자를 얼굴에 덮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한결이 차 문을 두드리자 모자 밑에서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제가 안 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물었습니다.”
“사촌이 한 겁니다. 사촌은 공보실에 있고, 저는 그냥 사촌한테 판 서 이야기를 좀 했을 뿐입니다. 한 번. 아니, 세 번.”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운전병이 모자를 벗었다. 얼굴이 빨갰다.
“판 서가 코를 안 곤다는 이야기요. 서류상으로요.”
한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운전병도 따라 웃었다. 둘은 한참 웃다가 동시에 멈췄다. 기사는 이미 쓰이고 있었다.
*
0100, 한결은 헛간 밖 트랙터 옆에 앉아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서울은 아침 여덟 시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처음 거는 집 전화였다. 신호가 다섯 번 갔다.
“여보세요.”
아버지였다. 목소리가 전보다 가늘었다.
“아버지, 저예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위성 전화의 반 박자가 두 번 지나갔다.
“어, 그래. 엄마는 잔다. 새벽에 잠이 들었어.”
아버지가 기침을 했다. 입을 막고 하는 기침이었다. 옆에서 자는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고 수화기를 멀리 떼는 소리가 났다. 한결은 서울 집 거실을 그렸다. 소파와 텔레비전, 그 앞의 낮은 탁자, 벽에 붙어 있던 도면이 떨어져 나간 자리의 테이프 자국. 텔레비전은 켜져 있을 것이다. 소리는 줄여 놓았을 것이다.
“뉴스는 보세요?”
“보지. 폴란드도 나오더라. 날씨가 좋던데.”
“여기 날씨 좋아요.”
“그래. 날씨가 좋더라.”
“편지 받았어요. 도면도요.”
“그래. 그 거실 밸브 말이다. 네가 반 바퀴라고 적어 놨더라. 반 바퀴 돌리니까 영 안 따뜻해서, 내가 두 바퀴 돌렸다. 그랬더니 따뜻하더라.”
“다른 방이 식잖아요.”
“다른 방은 안 쓴다. 거실에서 둘이 잔다. 엄마가 소파가 편하다고 해서.”
한결은 트랙터 연료 호스에 감긴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두 바퀴였다. 차갑고 단단했다.
“아버지, 두 바퀴 말고 한 바퀴만 돌려 보세요. 그러면 거실도 따뜻하고 안방도 덜 식어요.”
“한 바퀴?”
“예. 한 바퀴요.”
“그래. 한 바퀴 해 보마. 이따가.”
아버지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한결은 기다렸다. 어디냐고, 언제 오느냐고, 지금 당장 오라고 말할 차례였다. 뉴스를 봤을 것이고, 72시간이라는 숫자도 봤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밸브 손잡이가 뻑뻑하더라. 기름 좀 쳐야 되냐?”
“예. 식용유 말고 기계 기름이요. 공구함 둘째 칸에 있어요.”
“그래. 둘째 칸.”
아버지는 둘째 칸을 한 번 더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끝까지 오라는 말은 없었다. 한결은 끊긴 전화를 무릎에 올려놓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트랙터 연료 탱크가 밤이슬에 젖어 차가웠다. 공구함 둘째 칸에 기계 기름이 있다는 것을 그는 기억했지만, 기름 옆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칸을 열면 알게 될 것이었다. 드라이버 두 개, 절연 테이프, 그리고 한결이 고등학교 때 산 손목시계 드라이버 세트의 나머지 반쪽. 다른 반쪽은 지금 한결의 공구 상자 맨 아래 칸에 있었다. 마레크의 안경 나사를 돌린 것이 그 반쪽이었다. 세트를 반으로 나눈 날, 아버지는 반쪽짜리를 어디 쓰느냐고 물었다. 한결은 그때 대답을 못 했다.
*
6월 19일, 동쪽으로 20킬로미터.
소콜로프의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이 올라왔다. 한국 신문 인터넷판 기사를 캡처해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정보부대가 매일 아침 보내는 묶음 가운데 하나였다. 묶음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 독일 신문이 스무 장쯤 들어 있었고, 대부분은 부관이 읽고 치웠다. 이 한 장만 부관이 소콜로프 앞에 따로 놓았다. 부관은 한국어를 몰랐지만 번역문 두 번째 줄의 단어 하나를 알아봤다. 정비.
일리야가 탁자 끝에서 그 종이를 곁눈으로 봤다. 그는 어젯밤 어머니와 통화하지 못했다. 전화가 사흘째 연결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한국 신문의 번역문을 읽었다. 철수 명령을 거부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도 누군가의 아들일 것이었다. 제목은 철수 명령을 거부한 한국인이었고, 이름은 없었다. 소속도 위치도 없었다. 기사 한가운데 따옴표로 묶인 한 문장이 있었다.
정비지원차 이탈 없음.
소콜로프는 수첩 뒷장을 폈다. 두 바퀴 옆에 줄이 셋 그어져 있었다. 그는 어젯밤 돌려 본 영상 두 개를 떠올리고 줄을 둘 더 그었다. 그리고 연필을 내려놓고, 번역문의 그 한 문장 밑에 자를 대고 줄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