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5,159자) · 서한결 · 6월 14일(월)

회의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930, 헛간 작업대 위에 한결이 종이를 펴 놓았다. 창고 7의 스물두 대를 네 칸짜리 표로 그리는 중이었다. 점화부가 넷 분뿐이면 넷을 먼저 살리고, 산 넷에서 부품을 빼서 다음 넷에 끼우는 식으로 돌려 막아야 했다. 한 번 빼고 끼울 때마다 20분이 들고, 그 20분 동안 창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표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율이 종이 너머로 표를 들여다봤다.

“판 서님, 가실 겁니까?”

“아직 아무도 가라고 안 했습니다.”

“아무도 가라고 안 하면 가실 겁니까?”

한결은 연필을 멈췄다. 다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 무인 지뢰 제거기 사양서가 떠 있었다. 궤도 달린 작은 차 앞에 쟁기 같은 날이 붙어 있었다.

“이게 창고 앞 진입로를 먼저 갑니다. 저는 여기서 몹니다. 판 서님이 가시든 안 가시든 이건 갑니다.”

“신 선임님은 안 가십니까?”

“저는 여기 있어야 이게 갑니다. 그리고 저까지 가면, 판 서님 여권 맡은 대대장님이 제 것까지 맡아야 합니다. 금고가 작습니다.”

주자가 닭장 경계선 상자 위에서 둘을 번갈아 봤다. 한국어는 한 마디도 몰랐지만 금고라는 말이 나올 때 다율이 손으로 네모를 그리자 아이도 따라 네모를 그렸다. 할리나가 부엌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폴란드어로 뭐라고 외쳤다. 운전병의 말로는 점심에 감자를 먹을 사람은 손을 들라는 것이었다. 헛간 안의 모든 손이 올라갔다. 한결의 손도 올라갔다. 연필을 쥔 채였다.

*

1400, 여단 회의실 문이 닫혔다.

회의실이라고 해 봐야 협동농장 사무동 2층의 옛 경리실이었다. 창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았고, 벽에는 1990년대 농기계 달력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긴 탁자에 여단장과 작전참모와 정보참모와 브란도프스키가 앉았고, 법무 담당 대위 하나가 탁자 끝에 서류철을 펴 놓았다. 한결의 자리는 없었다. 한결은 문밖 복도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가 거기 앉으라고 한 것도,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을 뿐이다.

문은 얇았다. 폴란드어는 반도 못 알아들었지만, 누가 말할 때 목소리가 어떻게 올라가고 내려가는지는 들렸다. 브란도프스키가 영어를 섞어 말하는 대목은 다 들렸다. 그 대목들은 한결에게 들리라고 섞는 것 같았다.

작전참모가 먼저 말했다. 그는 영어로 바꿔 말했다. 법무 담당이 옮기지 않아도 되게.

“적 후방 12킬로미터입니다. 민간인을 거기 보내면 그는 전투에 가담한 민간인이 됩니다. 협약상 보호를 잃습니다. 잡히면 포로로 대우받지 못합니다. 저쪽은 그를 간첩으로 다룰 수 있고, 우리는 거기에 항의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여단은 민간인을 적진에 보낸 부대로 기록됩니다. 그 기록은 이 전쟁이 끝나도 남습니다.”

법무 담당이 서류철을 넘기며 조항 번호를 읽었다. 조항 번호는 복도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브란도프스키가 받았다.

“창고 7에 부품 넷 분이 들어갑니다. 스물두 대 가운데 어느 넷에 먼저 끼우고, 나머지는 어떻게 돌려 막는지 아는 사람은 그 사람뿐입니다. 우리 정비병들은 교범대로 끼웁니다. 교범에는 네 대가 스물두 대를 굴리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지도를 그려 주면 됩니다.”

“그림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17분 걸렸고 병사 하나가 무릎이 다 까졌습니다. 그건 포탑 하나였습니다. 이번엔 스물두 대입니다.”

작전참모가 탁자를 손바닥으로 한 번 짚었다.

“그러면 우리 정비병을 그 사람 옆에 붙여 배우게 하십시오. 두 주면 됩니다.”

“트레일러는 두 주를 안 기다립니다.”

정보참모가 끼어들었다. 그는 어제 한 달 전 교신 기록을 찾아 대조했다고 했다. 비에스와프 상사의 무전 버릇이 맞다고 했다. 숫자 사이에 늘 한 박자를 더 쉬는 버릇이었다. 버스트는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말이 나오자 회의실이 한동안 조용했다. 진짜라면 가야 하고, 진짜라서 더 위험했다.

1520, 창밖 멀리서 둔한 폭음이 났다. 회의실 유리창의 모래주머니 틈으로 흙먼지가 흘러들었다. 활공폭탄이었다. 이번에는 남쪽 교차로였다. 법무 담당이 서류철을 덮어 먼지를 막았고, 여단장은 손을 들어 회의를 멈추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복도 천장의 전구가 흔들렸다. 한결은 흔들리는 전구를 올려다보다가, 그 전구 소켓의 전선이 한 가닥 벗겨져 있는 것을 봤다. 회의실 문이 열리기 전에 고쳐 둘까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공구함이 헛간에 있었다.

1540, 회의실 문이 잠깐 열리고 통신병이 뛰어 들어갔다. 남쪽 교차로에서 보급 트럭 한 대가 맞았다고 했다. 운전병 하나가 죽었다. 연료를 싣고 강 건너 대대로 가던 트럭이었다. 다리가 끊긴 뒤 돌아가는 길을 찾던 차였다. 문이 닫히기 전에 여단장의 목소리가 한 번 들렸다. 누구를 부르는 소리도 아니었고 명령도 아니었다. 그냥 숨을 내쉬는 소리가 목에 걸린 것이었다.

1610, 브란도프스키가 복도로 나왔다. 그는 한결 옆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냈다가 불을 붙이지 않고 도로 넣었다. 창 쪽에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었지만, 불빛은 어디로든 샌다.

“판 서, 안에서 판 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들립니다. 반은 못 알아듣습니다.”

“다행입니다. 제가 한 말 중에 반은 판 서가 들으면 곤란한 말입니다.”

“예를 들면요?”

“판 서가 없으면 이 여단은 한 달 안에 스무 대 밑으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판 서가 자기 가치를 알면 월급을 올려 달라고 할 테니까요.”

“월급 주는 데가 없습니다. 사흘 전부터요.”

브란도프스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그가 문틈으로 한결을 한 번 돌아봤다. 부탁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부탁을 해도 되는지 묻는 얼굴이었다.

회의실 안에서 그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민간인, 그 사람, 한국 정비관, 판 서. 서한결이라는 세 글자는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회의가 자기 목숨을 정하고 있었다.

*

1800, 모스크바. 폴란드는 오후 다섯 시였다.

긴 탁자 끝자리는 여전히 뒷모습이었다. 탁자 위 서류철 첫 장의 숫자는 60이 아니라 29로 바뀌어 있었다. 폴란드 여단의 가동 전차 수였다. 누가 그 숫자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방 안의 누구도 묻지 않았다.

외무부 차관이 보고했다.

“브뤼셀의 5조 회의는 아직 공동성명 문구를 다듬고 있습니다. 오늘 초안에서 무력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모든 수단이라는 말이 들어갔습니다. 다음 초안에서는 그것도 빠질 겁니다.”

총참모부 대장이 받았다.

“증명은 거의 됐습니다. 이제 저 회랑에 서 있는 폴란드 전차들을 우리 쪽으로 가져오면, 증명에 사진이 붙습니다. 골다프 동쪽 창고에 스물두 대가 있습니다. 트레일러 부대를 회랑으로 보내겠습니다.”

탁자 끝의 뒷모습이 한 번 움직였다. 배석자가 몸을 숙였다가 허리를 폈다.

“보내십시오. 사진은 5조 회의가 문구를 끝내기 전에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경제 쪽에서 온 차관 하나가 손을 들었다. 트레일러 부대를 회랑으로 돌리면 벨라루스 쪽 곡물 수송이 두 주 늦어진다고 했다. 곡물 가격이 오르면 지방에서 불평이 나온다고 했다. 대장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동원령 두 번째 물결이 나간 지방에서는 곡물보다 아들 소식을 기다린다고 대답했다. 방 안의 누구도 그 대답을 받아 적지 않았다. 배석자는 몸을 숙이지 않았다. 탁자 끝의 뒷모습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장이 서류 한 장에 서명했다. 수송 명령서였다. 서명이 끝난 종이는 부관의 가죽 가방에 들어갔고, 가방은 문 밖으로 나갔다.

*

2300, 회의실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여단장이었다. 그는 복도 의자에 앉은 한결 앞에 섰다. 한결이 일어서려 하자 손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여단장은 선 채로 영어로 말했다. 천천히, 한 단어씩 골라서 말했다.

“판 서. 여단은 판 서에게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없고, 내리지도 않을 겁니다.”

“압니다.”

“다만 판 서가 가겠다고 하면, 여단은 막지 않겠습니다. 이게 오늘 회의가 아홉 시간 걸려 낸 결론입니다. 가라는 게 아닙니다. 가겠다면 막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결은 여단장의 군화를 봤다. 끈 하나가 풀려 있었다. 아홉 시간 동안 아무도 그걸 말해 주지 않은 것이었다. 여단장은 그 말을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대답을 듣지 않았다. 대답을 듣는 순간 그것이 명령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결은 알았다.

두 번째로 나온 사람은 작전참모였다. 그는 한결 앞을 그냥 지나가려다 멈췄다. 한결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회의 내내 반대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자기 방탄조끼 옆구리의 찍찍이를 뜯고, 앞판 주머니에서 세라믹 판 하나를 빼냈다. 무게 때문에 손목이 한 번 꺾였다. 그는 그 판을 한결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여전히 반대합니다.”

그 말을 하고 그는 계단을 내려갔다. 방탄조끼 앞판 자리가 헐렁하게 비어 흔들렸다.

한결은 무릎 위의 판을 두 손으로 들어 봤다. 3킬로그램쯤 됐다. 판 가장자리에 긁힌 자국이 여럿 있었고, 한쪽 모서리에 매직펜으로 이름 머리글자가 적혀 있었다. 판은 아직 사람 몸의 온기를 조금 품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법무 담당이 서류철을 챙겨 나오다가 한결 무릎 위의 판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조항 번호를 하나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판 모서리의 머리글자를 읽고는 입을 다물고 지나갔다. 계단 아래에서 그가 작전참모를 부르는 소리가 났고,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

2330, 한결은 헛간으로 돌아왔다. 헛간 마당에 3호차가 서 있었다. 야누시가 포탑 위에 앉아 담배도 없이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표트르가 조종수 해치에 걸터앉아 있었고, 토마시는 궤도 위에 누워 별을 보고 있었다. 셋 다 한결을 기다린 얼굴이었다.

한결은 방탄판을 옆구리에 낀 채 3호차 앞에 섰다. 궤도에는 일주일 전에 박은 핀 넷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토마시가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그 판을 보고, 저건 참모님 거라고 알아봤다. 머리글자를 읽은 것이었다. 토마시는 귀가 아직 절반만 돌아와서, 알아본 사실을 헛간 전체에 들릴 만큼 크게 말했다. 부엌 창에서 할리나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토마시는 그 소리는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표트르가 조종수 해치에서 몸을 빼 내려왔다. 가슴 주머니 하나가 불룩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야누시가 포탑에서 뛰어내려 한결 앞에 섰다. 폴란드어로 짧게 말했고, 운전병이 헛간 문간에서 하품을 참으며 옮겼다.

“3호차가 앞에 섭니다.”

1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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