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242자) · 서한결 · 6월 11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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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900, 한결은 헛간 작업대에 전화기를 세워 놓고 일했다. 화면에는 회사 메일 앱이 떠 있었다. 남은 시간 3시간. 알림은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숫자를 하나씩 줄였다.
오전 내내 그는 1호차 연료 분사 펌프를 뜯었다. 어제 저녁부터 시동이 한 번에 안 걸리는 차였다. 펌프를 뜯는 일은 손이 알아서 했다. 머리는 다른 데 가 있었다. 72시간 전 그는 공문의 날짜 칸을 비워 두었고, 비워 둔 칸은 72시간 동안 한 번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 칸은 이제 1200이면 쓸모가 없어진다. 날짜를 적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주자가 닭장 경계선 상자 위에 앉아 그가 부품을 늘어놓는 것을 구경했다. 한결이 작은 스프링 하나를 떨어뜨리자 아이가 상자에서 내려와, 경계선을 넘지 않은 채 몸만 길게 뻗어 스프링을 주워 건넸다. 한결이 고맙다고 한국어로 말하자 아이가 폴란드어로 뭐라고 대답했다. 운전병이 옮겼다. 떨어뜨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1030, 다율이 헛간에 들어와 작업대 옆에 섰다. 손에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를 한결 앞에 놓았다. 할리나가 끓여 준 보리차라고 했다.
“판 서님, 한 시간 반 남았습니다.”
“신 선임님까지 세지 마십시오. 전화기 하나로 충분합니다.”
“안 세려고 했는데, 제 전화기에도 판 서님이 떠 있습니다. 회사 메신저에서 판 서님 이름 옆에 초록 불이 켜져 있습니다. 1200이 되면 회색이 될 겁니다.”
“그럼 11시 59분에 뭐라고 보내 주십시오. 초록 불일 때 받은 마지막 메시지로 남게요.”
“뭐라고 보낼까요?”
“펌프 스프링 여분 있냐고 물어 주십시오. 진짜로 필요합니다.”
다율은 웃지 않고 전화기를 꺼내 그 문장을 미리 적어 두었다. 보내기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
1150, 박 팀장이 전화했다.
“서 정비관, 10분 남았어. 지금이라도 사진 한 장만 보내면 돼. 날짜는 내가 어제 적어 놨어. 6월 10일. 어제 떠난 걸로 할 수 있어.”
“어제 저는 밀밭에서 트랙터를 고쳤습니다.”
“아무도 몰라. 서류에는 안 들어가.”
“그래서 안 됩니다, 팀장님. 여기 사람들은 서류에 안 들어가는 걸로 하루를 삽니다. 저까지 그렇게 떠나면, 제가 여기 있었던 날이 전부 서류에서 지워집니다.”
위성 전화의 반 박자가 지나갔다. 그다음 반 박자도 지나갔다.
“나는 할 만큼 했어.”
“압니다. 지시자 칸에 팀장님 이름 넣으신 것도 압니다.”
“그건 잊어.”
“안 잊겠습니다.”
박 팀장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서울은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웠고,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퇴근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1200이야. 이 시각부로 자네는 우리 직원이 아니야. 몸조심해, 서한결 씨.”
처음으로 성과 이름을 다 불렀다. 직함 없이 불렀다. 전화가 끊겼다.
1200, 전화기가 세 번 연달아 떨렸다. 메일 계정: 로그인할 수 없습니다. 사내 출입증 앱: 유효하지 않은 사원증입니다. 단체 상해보험: 보장이 종료되었습니다. 세 문장 다 존댓말이었다. 한결은 출입증 앱의 QR 코드를 한 번 열어 봤다. 코드 위에 빨간 가위표가 그어져 있었다. 창원 공장 정문에서 3년 동안 찍던 그 네모였다.
메신저에는 11시 59분에 도착한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다. 펌프 스프링 여분 있나요? 보낸 사람 이름 옆 초록 불은 켜져 있었고, 받는 사람 이름 옆 불은 회색이었다.
72시간이 끝났다. 서울의 결정은 그렇게 종이도 없이 도착했다. 한결은 이제 아무도 아니었다.
*
1428, 동쪽.
소콜로프는 새 영상을 돌려 보고 있었다. 국도변 농가였다. 헛간 지붕에 그물이 쳐져 있었고, 그물 밑으로 트럭 두 대의 앞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 파란 트랙터가 서 있었다. 그는 배율을 올렸다. 트랙터 연료 호스 끝에 구리색 철사가 감겨 있었다. 두 바퀴였다.
그는 수첩 뒷장의 줄 두 개 옆에 하나를 더 그었다.
“여섯 보내. 광케이블 둘은 그물로 가고, 나머지는 트럭 앞머리.”
“소령님, 저 농가에 민간인이 있습니다. 노파 하나, 아이 하나.”
부관이 화면 구석을 가리켰다. 헛간 옆 마당에 닭장 앞에 앉은 작은 형체가 하나 있었다.
“트럭만 친다. 그물 밑 앞머리만.”
일리야가 조종기를 쥐었다. 그의 손은 이제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는다는 것을 소콜로프는 알아봤고, 그것을 칭찬하지 않았다.
*
1436, 소리가 여럿이었다. 높고 낮은 소리가 섞여서 헛간 둘레를 감쌌다. 다율이 요격 드론 남은 셋을 한꺼번에 올렸다. 하나가 빗나갔고 하나가 하나를 받았다. 셋째는 다율이 서라고 적어 둔 것이었는데, 올라가자마자 저쪽 전파 방해에 걸려 헛간 지붕 그물에 걸렸다.
1438, 저쪽 넷 가운데 둘이 재밍(전파를 흐려 조종과 영상을 끊는 것)에 걸려 흔들리다 떨어졌다. 나머지 둘은 흔들리지 않았다. 광케이블이었다. 하나는 헛간 지붕 그물에 걸려 그물째 터졌다. 그물이 찢어지며 불붙은 줄들이 헛간 안으로 늘어졌고, 병사들이 담요로 두드려 껐다. 다른 하나는 그물 아래를 파고들어 정비 트럭 앞머리에 박혔다. 트럭이 불길에 휩싸였다. 불이 옆 트럭으로 옮겨붙는 데 1분이 걸리지 않았다.
한결은 불붙은 트럭 짐칸으로 뛰어올랐다. 부품 상자를 끌어내려야 했다. 운전병이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가 같이 올라탔다. 둘이 상자 넷을 풀밭으로 던졌다. 다섯 번째 상자를 드는데 짐칸 바닥이 달아올라 군화 밑창이 끈적였다. 운전병이 한결을 끌어내렸다. 1분 뒤 연료 탱크가 터졌다.
1441, 불이 타는 소리 위로 다른 소리가 겹쳤다. 관측용 하나가 아직 헛간 위에 떠 있었다. 사람이 불 끄러 모이면 그 자리가 다음 좌표가 된다. 브란도프스키의 무전이 짧게 들어왔다. 불은 두고 흩어지라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흩어졌다. 할리나는 흩어지지 않았다. 폴란드어를 아는 누구도 그녀에게 그 무전을 옮겨 주지 않았다. 옮겨 줬어도 그녀는 헛간 문짝 앞에서 비키지 않았을 것이다. 한결은 할리나 옆으로 가서 양동이 하나를 더 들었다. 관측 드론은 그 위를 두 바퀴 돌고 갔다. 포는 오지 않았다.
1445, 정비 트럭 두 대가 뼈대만 남았다. 할리나는 불붙은 헛간 문짝에 양동이로 물을 끼얹고 있었고, 주자는 닭장 앞 상자 위에 서서 닭 세 마리를 세고 있었다. 셋이 다 있었다. 풀밭에 던진 상자 넷을 열어 보니 커넥터와 호스와 궤도 판이 들어 있었다. 궤도 연결핀 상자는 다섯 번째였다. 그 상자는 트럭과 같이 탔다.
한결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일곱 개가 거기 있었다.
*
1700, 브란도프스키가 헛간으로 왔다. 그는 불탄 트럭 두 대를 한참 보고 나서 한결 앞에 섰다.
“판 서, 오늘 1200으로 회사와 계약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러면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이제 제가 판 서에게 명령을 내려도 됩니까? 판 서는 이제 어느 회사 사람도 아니니까요.”
한결은 불탄 트럭 쪽을 봤다가 브란도프스키를 봤다.
“저는 아직도 폴란드군이 아닙니다, 대대장님.”
“압니다. 그래서 여쭌 겁니다. 판 서가 폴란드군이었으면 오늘 오후 트럭 짐칸에 올라간 걸로 영창에 넣었을 겁니다.”
“그럼 폴란드군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회사 사람도 아니라서, 판 서가 오늘 짐칸에서 떨어졌으면 아무도 보험금을 안 줍니다.”
“그건 좀 덜 다행입니다.”
브란도프스키가 그제야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그는 불탄 트럭 뼈대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쪽이 트럭을 골라서 칩니다. 오늘로 확실해졌습니다. 이 헛간도 이제 압니다. 옮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옮겨도 압니다. 저쪽은 트럭이 아니라 트럭 옆의 손을 봅니다.”
브란도프스키는 그 말을 한참 되새기더니 옮기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물을 두 겹으로 치고, 트럭은 헛간 안에만 세우라고 했다. 할리나에게는 운전병을 통해 정중하게 물었다. 트럭 한 대를 더 들이려면 닭장을 옮겨야 한다고. 할리나의 대답을 옮기던 운전병은 얼굴이 빨개져서 끝까지 옮기지 못했다. 닭장은 옮기지 않았다.
브란도프스키는 웃지 않았다. 그는 한결의 흙투성이 정비복 가슴께를 봤다. 왼쪽 가슴에 회사 로고가 박음질돼 있었다. 오늘 1200부터 아무 뜻도 없어진 로고였다.
“명령은 못 드려도, 이건 드려도 되겠습니까?”
*
1900, 헛간 등잔 아래에서 폴란드 정비병 셋이 한결을 의자에 앉혔다. 광부 노래를 부르던 슐레지아 출신들이었다. 한 사람이 가위를 들었고 한 사람이 바늘에 실을 꿰었다. 셋째는 다리에 붕대를 감은 크시시에크였는데, 목발을 옆에 세워 두고 한결의 정비복 소매를 쥐고 있었다. 그들이 꺼낸 것은 여단 마크였다. 누군가의 전투복에서 떼어 낸 것이었다. 가장자리 실밥이 풀려 있었고, 해진 한쪽 모서리에 흙이 배어 있었다.
가위를 든 병사가 회사 로고 쪽으로 가위를 가져갔다. 크시시에크가 폴란드어로 짧게 뭐라고 하며 그 손을 막았다.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위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로고를 떼지 않았다. 그 바로 옆, 오른쪽에 여단 마크를 댔다. 바늘이 천을 드나들 때마다 실이 당겨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크시시에크가 바느질하는 사이 나머지 둘이 그 노래를 낮게 불렀다. 같은 대목이 두 번 되풀이됐다.
다 꿰매고 나자 크시시에크가 한결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두 개의 마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나는 한국 회사의 것이었고 하나는 폴란드 여단의 것이었다. 둘 다 한결을 제 사람으로 적어 두지 않는 곳의 표식이었다.
“왜 회사 건 안 뗍니까?”
한결이 물었다. 운전병이 옮기고, 크시시에크의 대답을 옮겼다.
“그 회사가 이 전차를 만들었잖아요. 만든 데도 적어 둬야죠. 우리 할아버지 광산 헬멧에도 공장 이름이 붙어 있었답니다.”
*
2200, 여단 지휘소 무전기에서 약한 신호 하나가 튀었다. 채널 잡음 사이로 1초가 채 안 되는 버스트였다. 통신병이 녹음을 되감아 돌렸다. 숫자열이었다. 누구의 암호 규칙도 아니었다. 정보참모가 기만일 가능성부터 말했다. 78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저쪽이 우리 주파수를 압니다. 78 때도 저쪽은 우리 화면이 뭘 믿는지 알았습니다. 이번엔 우리 귀가 뭘 믿는지 시험하는 걸 겁니다.”
“그럼 무시합니까?”
“무시하기 전에 풀어는 봐야죠. 풀어야 뭘 무시하는지 압니다.”
2208, 통신병이 숫자열을 여러 방식으로 풀다가 멈췄다. 알파벳 셋과 숫자 넷이 남았다. 브란도프스키가 그것을 종이에 적어 헛간으로 가져왔다.
한결은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가슴 주머니에서 인수 점검 대장을 꺼냈다. 흙과 기름이 밴 수첩이었다. 서른한 줄 가운데 한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그가 작년 가을에 찍은 차대번호였다.
2210, 그 줄 끝에는 그의 글씨로 날짜와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상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