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216자) · 고샤 대위 · 서한결 · 6월 10일(목)

식탁보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1100, 헬기가 밀밭 가장자리 나무줄 뒤에 내렸다.

고샤는 회전날개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비행복 위에 방탄조끼를 걸쳤는데 조끼가 커서 어깨가 자꾸 흘러내렸다. 밀밭은 허리 높이였고, 이삭이 막 여물기 시작해서 스칠 때마다 손등이 따끔거렸다. 밀밭 한가운데로 길게 패인 자국이 나 있었다. 이삭이 한 방향으로 누워 있었고, 흙이 뒤집혀 검게 드러난 그 자국 끝에 은색 동체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여단에서 먼저 온 병사 여섯이 동체 둘레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선 소령 하나가 고샤를 보고 다가왔다. 여단 정보참모였다. 흙 묻은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대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아식별 장비와 데이터링크 모듈 위치를 아십니까? 조종석 뒤 전자 장비실이라고 들었는데, 덮개가 찌그러져서 안 열립니다.”

“조종사는요?”

“조종석 캐노피가 안 열립니다. 절단기가 필요합니다. 절단기는 오후에 옵니다.”

“그럼 장비실 덮개도 오후에 여십시오.”

정보참모가 고샤를 똑바로 봤다.

“대위님, 저 장비가 저쪽 손에 들어가면 폴란드 공군 전체가 주파수를 바꿔야 합니다. 바꾸는 데 2주가 걸립니다. 2주 동안 하늘이 눈을 감습니다. 저 장비 하나 때문에 조종사 몇 명이 더 떨어질지 아십니까?”

“압니다.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저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조종사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둘 다 옳았다. 둘 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목소리가 낮아졌다. 1114, 엎드려 있던 병사 하나가 고개를 들고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소리가 들렸다. 벌 소리였다.

“드론입니다. 광케이블입니다.”

병사 둘이 산탄총을 들고 무릎을 세웠다. 드론은 사람을 노리지 않았다. 곧장 동체로 갔다. 저쪽도 저 장비가 필요했고, 못 가져가면 태워 버리면 됐다. 첫 산탄이 빗나갔다. 두 번째가 날개 하나를 뜯었다. 드론은 기울어진 채로 계속 내려와 동체 꼬리 20미터 앞 밀밭에 박혀 터졌다. 이삭이 둥글게 불타올랐다가, 병사들이 흙을 끼얹어 껐다. 탄 이삭 냄새가 빵 굽는 냄새와 비슷해서, 고샤는 그 냄새 때문에 헛구역질을 했다.

정보참모가 흙을 털고 일어나 불탄 자리를 봤다. 동체 꼬리까지 20미터였다. 그는 태블릿을 옆구리에 도로 끼우며 고샤에게 말했다.

“다음 것은 안 빗나갑니다. 장비실 덮개를 떼든 캐노피를 열든, 여기서는 둘 다 못 합니다.”

“그럼 둘 다 숲에서 합시다. 동체째로 끌고 가면 장비도 사람도 같이 갑니다.”

“순서는요?”

“숲에 닿으면 절단기가 먼저 닿는 쪽부터입니다. 캐노피가 앞에 있습니다.”

정보참모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었다. 고샤는 그가 적는 것을 보지 않았다.

“여기서 오후까지 못 버팁니다. 동체를 숲까지 끌어야 합니다.”

“견인차는 여단에 둘 남았는데 둘 다 전선에 붙어 있습니다.”

정보참모가 무전을 잡았다. 여단 대대 하나가 가까운 농가에 정비 지점을 옮겨 놓았다고 했다. 2킬로미터였다.

*

1240, 한결은 헛간에서 브란도프스키의 무전을 받았다.

“판 서, 밀밭에 떨어진 전투기 동체를 숲까지 끌어야 합니다. 견인차가 없습니다. 끌 수 있는 게 뭐라도 있습니까?”

한결은 헛간 안쪽을 봤다. 파란 트랙터가 서 있었다. 오래된 폴란드산이었고, 페인트가 여러 번 덧칠돼 원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노파가 그 옆 의자에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하나 있습니다. 주인 허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쳐야 합니다.”

운전병이 옮기는 동안 노파는 칼을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다 듣고 나서야 감자를 양동이에 던져 넣고 한결을 봤다. 그리고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폴란드어로 짧게 말했다.

“할리나랍니다. 자기 이름이 할리나랍니다. 뒤에 있는 큰 트랙터 흙받이에 적힌 게 자기 이름이고, 이 작은 건 이름이 없답니다. 이름 붙일 만큼 말을 잘 들은 적이 없어서랍니다.”

“그럼 써도 됩니까?”

“고치면 써도 된답니다. 대신 고치다 망가뜨리면 이름을 붙이겠답니다. 당신 이름으로요.”

운전병이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한결은 트랙터 보닛을 열었다.

1250, 연료 필터는 한결이 짐작한 대로였다. 원통형 필터 안쪽이 검은 찌꺼기로 떡이 져 있었다. 여분은 없었다. 이 트랙터 필터는 지난 세기 규격이었다. 한결은 필터를 떼어 내 경유로 세 번 헹구고, 속의 여과지를 칼로 조금 도려내 막힌 층을 걷어 냈다. 도로 끼우려니 호스 끝의 클립이 삭아서 부서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야전 전화선 한 토막을 꺼냈다. 피복을 벗기고 심선을 꼬아 호스 끝을 감았다. 두 바퀴 돌리고 끝을 비틀어 물렸다.

할리나가 감자 양동이를 내려놓고 다가와 보닛 안을 들여다봤다. 전화선 두 바퀴를 한참 보더니 폴란드어로 뭐라고 했다. 운전병이 머뭇거리다 옮겼다.

“죽은 남편도 그렇게 고쳤답니다. 빨랫줄로요. 그래서 이 트랙터가 말을 안 들었답니다.”

“전화선은 빨랫줄보다 낫습니다.”

운전병이 그대로 옮기자 할리나가 코웃음을 쳤다. 코웃음 끝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 손을 옆에서 누가 보고 있었다. 할리나의 손녀였다. 닭장 경계선 상자를 넘어오지는 않고, 상자 위에 턱을 괴고 있었다. 한결이 시동 손잡이를 당기자 엔진이 두 번 기침을 하고 세 번째에 걸렸다. 검은 연기가 한 번 크게 나오고 나서 회색으로 가라앉았다. 아이가 상자 위에서 박수를 한 번 쳤다.

“누가 몹니까?”

한결이 묻자 아이가 먼저 손을 들었다. 할리나가 폴란드어로 뭐라고 했고, 아이가 더 길게 대꾸했다. 운전병이 옮겼다.

“주자가 몬답니다. 이 트랙터는 클러치가 이상해서 할머니 말고는 주자만 안답니다. 할머니는 무릎이 안 좋답니다. 할머니는 안 된다고 했고, 주자는 할머니가 작년에 해바라기밭에 처박은 얘기를 꺼냈습니다.”

할리나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손녀의 목도리를 한 번 여며 주었다. 허락이었다.

*

1500, 주자가 트랙터를 몰았다. 한결이 운전석 옆에서 걸었다. 주자는 열두 살이었고 발이 클러치 페달에 겨우 닿았다. 한결은 걸으면서 전화선 두 바퀴를 몇 번이고 내려다봤다. 기름이 새지 않았다. 밀밭 사이 농로는 좁아서 트랙터 바퀴 하나가 자꾸 이삭 쪽으로 빠졌고, 그때마다 주자가 이를 악물고 핸들을 두 손으로 끌어당겼다.

1512, 머리 위에서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벌 소리였지만 높고 가늘었다. 관측용이었다. 한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더 이상해 보였다. 드론은 밀밭 위를 한 바퀴 돌고, 트랙터 위를 한 바퀴 더 돌았다. 주자가 핸들을 쥔 채 고개를 들려고 했다.

“보지 마. 앞만 봐.”

한결은 한국어로 말했다. 주자는 알아들었다. 앞만 봤다. 드론은 세 번째 바퀴를 돌고 동쪽으로 갔다.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았다. 트랙터를 모는 여자아이와 그 옆을 걷는 흙투성이 남자를 본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만 가기로 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 정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1527, 동쪽 멀리서 포성이 났다. 한결은 소리를 셌다. 네 발이었고, 밀밭 끝 300미터쯤에 흙기둥 넷이 차례로 섰다. 관측 드론이 넘긴 좌표가 아니었다. 넘겼다면 트랙터 위로 왔을 것이다. 그저 들판 한쪽을 더듬는 사격이었다. 주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클러치를 밟은 발이 떨려서 트랙터가 한 번 덜컹 섰다.

“괜찮아. 저건 우리 거 아니야.”

한결은 한국어로 말하고 나서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쪽 것이었다. 다만 이쪽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주자는 그 차이를 알아들었는지 다시 1단을 넣었다.

1540, 동체에 닿았다. 병사들이 동체 앞바퀴 다리에 쇠사슬을 감았다. 주자가 1단을 넣었다. 트랙터가 신음하듯 울었고 바퀴가 흙을 파며 헛돌았다. 한결이 뒷바퀴 밑에 널빤지를 밀어 넣었다. 두 번째 시도에 동체가 움직였다. 은색 동체가 밀밭 위를 천천히, 누운 이삭을 한 번 더 눕히며 끌려갔다. 고샤는 그 옆을 따라 걸었다. 캐노피 안의 헬멧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봤다.

1720, 숲 가장자리에 닿았다. 1800에 절단기가 왔다. 캐노피를 여는 데 40분이 걸렸다.

*

1900, 헛간 마당에 들것이 놓였다. 조종사는 비행복 그대로였다. 헬멧을 벗긴 얼굴은 스물여섯 살이었다. 앞니 하나가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군용 담요를 가지러 병사 하나가 트럭으로 뛰어갔는데, 그보다 먼저 할리나가 집에서 나왔다. 두 팔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식탁보였다. 흰 바탕에 가장자리를 따라 빨간 실로 작은 꽃이 수놓여 있었고, 한가운데 오래된 커피 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다. 할리나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그것을 펼쳐 조종사를 덮었다. 발끝부터 덮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덮기 전에 손을 한 번 멈췄다. 그리고 덮었다. 식탁보 가장자리가 들것 밖으로 늘어져 흙에 닿자 그녀가 그것을 걷어 올려 접어 넣었다.

고샤가 뭐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할리나는 식탁보 위에 손바닥을 한 번 얹었다가 떼고, 감자 양동이가 있는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병사가 가져온 담요는 트럭 짐칸에 그대로 놓였다.

*

2400, 헛간 안 등잔 아래에서 한결은 전화기를 봤다. 회사 계정 알림이 한 번 더 와 있었다. 남은 시간 12시간.

주자는 트랙터 운전석에서 잠들어 있었다. 할리나가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다가, 그게 아까 병사가 가져온 군용 담요라는 것을 알고 한 번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덮었다.

고샤는 헛간 문턱에 앉아 있었다. 한결이 물을 한 잔 가져다주자 그녀는 받아서 마시지 않고 두 손으로 쥐고만 있었다. 한참 뒤에 영어로 물었다.

“한국 사람이에요?”

“예. 전차 정비관입니다. 내일 낮까지는요. 그다음은 잘 모르겠습니다.”

“3주쯤 전에 저 여단 정비고 위로 들어간 적이 있어요. 마당에서 누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다들 머리를 숙이는데 한 사람만.”

“정비병들은 위를 봅니다. 뭐가 떨어질지 봐야 하니까요.”

고샤는 그 대답을 듣고 처음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비행복 가슴 주머니를 한 번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한결은 묻지 않았다.

0200, 조종사를 실어 갈 트럭이 왔다. 고샤도 그 트럭 조수석에 탔다. 문을 닫기 전에 그녀는 헛간 문가에 서 있던 할리나에게 폴란드어로 뭔가를 물었다. 할리나가 짧게 대답했다. 고샤가 한결 쪽을 보고 다시 영어로 물었다.

“저 트랙터, 누가 고쳤어요?”

한결이 대답하기 전에 할리나가 한 번 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운전병이 한결 옆에서 작게 옮겼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랍니다.”

고샤는 그 말을 듣고 한결을 한참 봤다. 그리고 트럭 문을 닫았다. 트럭이 떠난 마당에 파란 트랙터가 서 있었다. 연료 호스 끝에 감긴 전화선이 등잔 불빛에 구리색으로 반짝였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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