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220자) · 고샤 대위 · 6월 10일(목)
3분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1500, 워싱턴. 폴란드는 밤 아홉 시였다.
백악관 지하 상황실의 벽 화면 셋이 전날과 같은 자리에 떠 있었다. 대만 해협, 한반도 서해, 발트해 남안. 다만 화면 아래 숫자들이 달라져 있었다. 해협 화면에는 상륙 17일째, 서해 화면에는 군산·평택 피격 5일째라고 적혀 있었고, 발트 화면에는 날짜 대신 물음표가 붙은 60이 여전히 떠 있었다.
합참의장이 먼저 일어섰다.
“세 곳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해협에서 밀리면 태평양 전체가 끝납니다. 폴란드 상공에 있는 조기경보기 두 대와 급유기 넷을 이번 주 안에 동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국가안보보좌관이 서류를 덮었다.
“폴란드 상공을 비우면 5조가 끝납니다. 저쪽이 바라는 게 정확히 그겁니다. 우리가 한 번 안 오는 걸 보여 주면, 태평양의 동맹들이 우리 약속을 어떻게 읽겠습니까? 도쿄도 타이베이도 같은 신문을 봅니다.”
“약속은 비행기가 지킵니다. 비행기는 한 대가 한 곳에만 있습니다.”
“그 한 대가 어디 있느냐가 약속입니다.”
국무부에서 온 차관보가 끼어들었다.
“바르샤바 대사가 오늘만 네 번 전화했습니다. 폴란드 국방장관이 내일 아침 기자회견을 잡았습니다. 우리 결정이 뭐든, 그 회견 전에 알려 줘야 합니다.”
“알려 주면 회견에서 그대로 읽을 겁니다.”
“안 알려 주면 회견에서 우리가 안 왔다고 읽을 겁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둘 다 상대 쪽이 아니라 탁자 끝의 빈 의자를 보고 말했다. 그 의자의 주인은 화상으로 연결돼 있었고, 화면에는 책상 모서리와 손 하나만 보였다. 비서실장이 몸을 숙여 그 화면에 귀를 댔다가 허리를 폈다. 20분 뒤 결정문 초안이 인쇄돼 나왔다. 한 줄이었다.
유럽 전선 항공 지원 축소.
*
0300, 폴란드 중부의 공군 기지.
고샤 대위는 비행 전 브리핑실에서 편성표를 봤다. 어제까지 편성표 맨 윗줄에 있던 나토 조기경보기 한 대의 호출부호가 두 줄로 그어져 있었고, 그 옆에 누군가 볼펜으로 작게 적어 두었다. 재배치. 하늘을 멀리 보는 눈 하나가 밤사이 빠진 것이다.
그녀는 그 두 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 봤다. 볼펜 자국이 종이를 눌러서 뒷장까지 파여 있었다. 그은 사람은 힘을 줘서 그었다. 누가 그었는지 몰라도, 그 사람도 이 줄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3주쯤 전에도 그녀는 같은 여단 위로 3분을 들어갔었다. 그때는 능선 뒤에 몸을 숙인 전차들이 보였고, 그 뒤 1.9킬로미터쯤에 양철 지붕 정비고 하나가 있었다. 정비고 마당에서 누군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종석에서 사람 얼굴이 보일 리 없었는데도 그녀는 그 사람이 올려다본다는 것을 알았다. 땅에 선 사람들은 대개 머리를 숙이는데 그 사람은 들고 있었다.
“눈이 하나 줄면 우리가 더 낮게 갑니다. 낮게 가면 연료를 더 먹습니다. 그래서 체공은 3분입니다.”
브리핑 장교가 그렇게 말하자 방 안 조종사 넷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고샤 옆에 앉은 파베우 중위가 헬멧 가방을 무릎 위로 끌어안았다. 스물여섯 살이었고, 호출부호는 지크였다. 폴란드어로 멧돼지라는 뜻인데, 사관학교 때 밥을 너무 빨리 먹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대위님, 3분이면 제가 아침 먹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침 먹듯이 해. 들어가서 먹고 바로 나와.”
“후식은 없습니까?”
“후식은 돌아와서 내가 사.”
지크가 웃었다. 웃을 때 앞니 하나가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그는 브리핑이 끝나자 제일 먼저 일어나 자판기 앞으로 갔다가, 동전이 없다며 고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샤는 동전 두 개를 올려 주고 그 손바닥을 한 번 쳤다. 지크는 커피 대신 사탕 한 봉지를 뽑아 와서, 절반을 그녀 헬멧 가방에 쏟아 넣었다.
“후식 미리 드립니다. 대위님은 돌아와서 사 주십시오. 저는 두 번 먹겠습니다.”
*
0530, 정비병들이 사다리를 치우며 두 기체의 날개 밑을 마지막으로 훑었다. 무장 안전핀에 달린 빨간 끈들이 하나씩 뽑혀 정비반장의 손에 모였다. 반장은 끈 다발을 조종석 쪽으로 들어 보이며 개수를 세게 했다. 고샤가 손가락으로 수를 표시하자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 쪽에서는 반장이 끈을 흔들어 보이자 지크가 손가락 대신 엄지를 들었다. 반장이 다시 끈을 흔들었고, 지크는 그제야 손가락으로 셌다.
0548, 두 대가 활주로에서 떠올랐다. FA-50의 조종석은 좁아서, 헬멧을 쓰면 캐노피가 머리 위 한 뼘에 있었다. 고샤는 산소마스크 안에서 자기 숨소리를 들었다. 빠르지 않게 쉬려고 넷을 세며 들이쉬고 넷을 세며 내쉬었다. 발밑으로 새벽 들판이 회색에서 녹색으로 바뀌며 지나갔다. 지크의 기체는 오른쪽 뒤에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왔다. 그 간격을 그녀는 보지 않고도 알았다. 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있던 간격이었다.
0609, 고도를 더 낮췄다. 나무 꼭대기가 캐노피 아래로 빗자루로 쓸듯 지나갔다. 몸이 좌석에 눌렸다가 떴다가 했고, 선회할 때마다 G가 가슴을 눌러 숨이 목에서 걸렸다. 산소마스크 고무가 땀에 미끄러졌다. 경고음이 한 번 울렸다가 멎었다. 저쪽 레이더가 한 번 훑고 지나간 것이었다.
“지크, 들리나?”
“잘 들립니다. 아침 냄새가 납니다.”
“그건 네 마스크 냄새야.”
0611, 지상 통제관의 목소리가 무전에 들어왔다. 폴란드 기계화여단 쪽이었다. 능선 앞 2,000미터에 저쪽 전차 넷이 붙어 있다고 했다. 우리 전차가 능선 뒤에서 버티고 있고, 1분만 늦으면 옆구리가 열린다고 했다.
“고샤 편대, 진입. 3분.”
그녀는 그 말을 자기 입으로 하고 기체 머리를 능선 쪽으로 돌렸다. 능선 너머로 연기 몇 줄이 보였다. 연기 사이로 네모난 것 넷이 움직이고 있었다. 폭탄을 놓는 순간 기체가 한 번 가볍게 떴다. 뒤에서 땅이 들렸다. 두 번째 패스에서 그녀는 넷 가운데 셋이 서 있는 것을 봤다. 넷째는 연기 뒤로 사라졌다.
0613, 경고음이 길게 울었다. 저쪽 휴대용 방공 미사일이었다. 고샤는 플레어를 뿌리며 왼쪽으로 꺾었다. 몸이 좌석 옆으로 쏠렸고 시야 가장자리가 까맣게 좁아졌다. 뒤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지크, 플레어.”
“다 뿌렸습니다. 하나 더 옵니다.”
0614, 오른쪽 뒤에서 섬광이 났다. 고샤는 고개를 돌렸다. 지크의 기체가 꼬리 쪽에서 검은 연기를 끌고 있었다. 기체는 아직 날고 있었다. 날개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지크.”
대답이 없었다.
“지크, 응답해.”
잡음만 들렸다. 고샤는 스로틀을 당겨 속도를 줄이고 지크의 기체 옆으로 붙었다. 캐노피 너머로 지크의 헬멧이 보였다. 앞으로 조금 숙여져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
0616, 관제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고샤, 간격 벌려. 연료 확인하고 귀환해.”
“지크가 아직 날고 있습니다.”
“간격 벌려. 명령이다.”
고샤는 간격을 벌리지 않았다. 지크의 날개 끝과 자기 날개 끝 사이는 3년 동안 지켜 온 그 간격 그대로였다. 편대 비행을 처음 배울 때 교관은 간격을 벌리는 것보다 좁히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벌리는 건 겁이 해 주고 좁히는 건 사람이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둘 다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크의 기체 꼬리를 봤다. 수직 꼬리날개 아래쪽이 뜯겨 나가 있었고, 거기서 가는 연기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캐노피는 금이 가지 않았다. 헬멧은 숙여진 채 조금씩 흔들렸는데, 그것이 기체 진동 때문인지 다른 까닭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 불렀다. 지크. 지크. 파베우. 대답은 오지 않았다. 지크의 기체는 서쪽으로, 조금씩 낮아지며 날았다. 자동 조종이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래로 회랑 남쪽의 밀밭이 지나갔다. 연료 경고등이 켜졌다. 돌아갈 연료가 13분 남아 있었다.
“고샤, 다시 말한다. 간격 벌려.”
“조금만 더 갑니다.”
0621, 지크의 기체가 밀밭 위로 천천히 기울었다. 날개 한쪽이 먼저 이삭을 스쳤고, 그다음에 땅이 기체를 받았다. 먼지와 이삭이 한꺼번에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불은 나지 않았다. 사출 좌석은 올라오지 않았다. 고샤는 그 위를 한 바퀴 돌았다. 밀밭 가운데 길게 패인 자국이 있었고, 그 끝에 은색 동체가 누워 있었다.
“고샤, 위치 기록했다. 귀환해. 지금.”
그녀는 두 번째 바퀴를 돌지 않았다. 대신 무전에 한 번 더 불렀다.
“지크.”
그리고 기체 머리를 서쪽으로 돌렸다. 연료는 11분이었다.
돌아가는 하늘은 조용했다. 오른쪽 뒤, 늘 무언가가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녀는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두 번 봤다. 두 번 다 비어 있었다. 무전에서는 다른 편대들이 호출부호를 부르며 오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지크가 아니었다. 산소마스크 안에 숨이 고였다. 넷을 세며 들이쉬려 했는데 셋에서 걸렸다. 그녀는 셋으로 쉬었다.
0648, 여단 통제관이 한 번 더 무전에 들어왔다. 폴란드어였고 짧았다. 능선 앞 전차 셋이 섰고, 우리 쪽 옆구리가 안 열렸다고 했다. 마지막에 한 문장이 더 붙었다. 윙맨 기체 추락 지점은 여단이 확보하겠다고 했다.
“고샤, 수신했나?”
“수신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3분은 제대로 끝났다. 끝난 3분 뒤에 붙은 것들이 문제였다.
*
0720, 기지 활주로에 한 대만 내렸다. 정비병들이 사다리를 대기도 전에 고샤는 캐노피를 열었다. 산소마스크를 떼어 내자 얼굴에 눌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정비반장이 두 번째 기체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활주로 끝을 한 번 봤을 뿐이었다.
디브리핑실에서 공군 정보장교가 그녀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조종사의 상태를 묻기 전에 기체의 암호 장비를 물었다. 피아식별 장비와 데이터링크 모듈이 그대로 그 밀밭에 있다는 것이었다. 저쪽이 먼저 가져가면 폴란드 공군 전체가 주파수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여단이 오늘 안에 사람을 보낸답니다. 장비부터 회수합니다.”
“조종사부터입니다.”
“대위님, 조종사는 이미…….”
정보장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고샤는 그 끝나지 않은 말을 오래 봤다.
“헬기 자리 하나 주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대위님은 오늘 한 번 더 뜨셔야 합니다.”
“그럼 그 전에 다녀오겠습니다. 3분이면 됩니다.”
정보장교는 3분이라는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고샤는 헬멧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추락 좌표를 옮겨 적었다. 회랑 남쪽 밀밭, 마을 이름이 지도에 작게 붙어 있었다. 그 마을 끝의 농가 하나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자리였다. 수첩 사이에는 아침에 지크가 쏟아 넣은 사탕 하나가 끼어 있었다. 후식이었다. 그녀는 그 사탕을 비행복 가슴 주머니에 옮겨 넣고 지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