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267자) · 서한결 · 6월 9일(수)
골라서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430, 동쪽으로 20킬로미터.
소콜로프는 종이 표적 목록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연필을 거꾸로 쥐었다. 지우개 달린 쪽으로 맨 위 줄을 지우고, 거기에 새로 적었다. 정비. 자주포와 지휘 차량과 방공 레이더가 한 칸씩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탁자 둘레에 선 중대장 셋이 서로 얼굴을 봤다.
“소령님, 전차가 아니라 정비를 먼저 칩니까?”
“지난 3주 동안 저 여단 전차가 몇 대 줄었나?”
“확인 격파 열하나입니다.”
“그런데 가동 대수는 셋밖에 안 줄었다. 부순 걸 누가 다시 굴려 보낸다.”
소콜로프가 모니터 하나를 돌려 그들 쪽으로 향하게 했다. 드론이 찍은 영상 여러 개를 이어 붙인 것이었다. 궤도가 끊겨 섰던 전차가 이튿날 다시 능선에 서 있었고, 포탑이 굳었던 전차가 한 시간 뒤에 돌았다. 영상 마지막 장면은 정비 지점을 위에서 찍은 것이었는데, 흙 묻은 정비복을 입은 사람 하나가 트럭 옆에 쪼그려 앉아 호스에 철사를 감고 있었다. 감고, 끊고, 한 번 더 감았다.
“두 바퀴다. 저 손은 늘 두 바퀴를 감는다. 이번이 두 번째로 찍힌 거다.”
“그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고치는 손을 끊으면 전차는 저절로 멈춘다. 전차를 부수는 데는 포탄이 들고, 멈추게 하는 데는 손 하나면 된다.”
그는 수첩 뒷장에 두 바퀴라고 적고, 그 옆에 줄을 두 개 그었다.
중대장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정비 트럭은 전차보다 싸서, 상부에 올릴 때 격파 실적으로 안 칩니다.”
“실적은 내가 올린다. 너희는 트럭을 세.”
탁자 끝에서 일리야가 조종기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보름 전 그가 몬 드론이 3호차 조종수 해치 위에서 터진 뒤로, 그는 밥을 먹을 때도 조종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놓으면 손이 떨렸다. 소콜로프는 그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는 일리야 앞에 날개 긴 배회탄약의 조종 화면을 켜 주었다.
“오늘은 네가 트럭을 고른다. 전차는 쳐다보지도 마라. 사람이 모여 있는 트럭, 쇠를 들고 있는 손이 있는 트럭이다.”
“사람이 있는 트럭입니까?”
“손이 있는 트럭이다.”
일리야는 그 두 말이 어떻게 다른지 묻지 않았다.
*
0610, 한결은 정비 지점 트럭 옆에서 연료 호스를 보고 있었다. 새벽에 새는 자리를 찾아 철사로 두 바퀴 감아 둔 곳이었다. 기름이 더 새지는 않았다. 다율은 그 옆에서 상자를 뜯고 있었다. 어젯밤 늦게 폴란드 쪽 보급으로 들어온 요격 드론 여섯 대였다. 날개 넷 달린 작은 기체에 앞쪽으로 뾰족한 머리가 붙어 있었다.
“이게 저쪽 드론을 받아서 떨어뜨립니까?”
“들이받아서 떨어뜨립니다. 총을 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부딪칩니다. 여섯 대 가운데 하나라도 맞으면 잘한 겁니다.”
“하나 맞히는 데 다섯을 잃는다는 겁니까?”
“저쪽도 전차 한 대 잡는 데 드론 서른 대를 씁니다. 여기서는 그게 산수입니다.”
다율은 기체마다 번호를 붙이다가 멈추고, 매직펜 뚜껑을 입에 문 채 한결을 봤다.
“판 서님, 오늘 1200이면 48시간 남습니다.”
“압니다.”
“세고 계십니까?”
“안 세려고 하는데 전화기가 셉니다.”
다율은 매직펜 뚜껑을 도로 끼웠다. 그러고는 여섯 번째 기체 배에 번호 대신 작게 한 글자를 적었다. 한결이 들여다보니 한글로 서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뭡니까?”
“판 서님 몫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올리겠습니다. 이게 올라갈 때쯤이면 판 서님도 여기 계속 있는 겁니다.”
“그 전에 다섯이 다 떨어지면요?”
“그럼 판 서님이 고쳐 주십시오. 날개 하나쯤은 전화선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한결은 날개를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보고, 전화선 두 바퀴면 한 번은 날겠다고 대답했다.
*
1100, 소리가 먼저 왔다. 이번 소리는 벌 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느렸고, 머리 위를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배회탄약(표적 위를 맴돌다 내려꽂히는 자폭 무기)이었다. 날개가 긴 그 기체는 능선 쪽 전차들 위로 가지 않고, 정비 지점 위에서만 두 바퀴를 돌았다.
“전차가 저쪽에 있는데 왜 여기서 돕니까?”
운전병이 물었다. 한결은 대답 대신 트럭 밑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1103, 그것이 내려왔다. 전차가 아니라 정비 지점 가장자리에 세워 둔 견인차였다. 55톤을 끌어 오는 차였다. 엔진 덮개 위로 불이 솟았고 타이어 여섯 개가 차례로 터졌다. 견인차 옆에서 케이블을 감던 폴란드 정비병 하나가 튕겨 나가 풀밭에 굴렀다.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일어나려고 두 번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엎드렸다.
한결은 트럭 밑에서 그 불을 봤다. 불에 달궈진 견인 케이블이 한 가닥씩 풀려 뱀처럼 꿈틀거렸다. 고무 타는 냄새가 트럭 밑까지 기어들어 와 목구멍을 긁었다. 그는 부상병 쪽으로 기어 나가려다 운전병에게 발목을 붙잡혔다.
“판 서, 위에 아직 있습니다.”
1105, 두 번째 소리가 들렸다. 똑같이 느리고 낮았다.
“신 선임님, 올리십시오.”
다율이 요격 드론 넷을 한꺼번에 띄웠다. 노트북 화면이 넷으로 갈라졌다. 첫째는 빗나가 숲으로 떨어졌고 둘째는 뒤를 쫓다가 전지가 떨어졌다. 셋째가 날개 긴 기체 옆구리를 스치자 그것이 휘청했다. 넷째가 정면으로 받았다. 하늘에서 작은 폭음이 났고, 부서진 날개 조각이 정비 지점 너머 밀밭으로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다율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굳어 있었다. 넷 가운데 하나였다.
“맞았습니다.”
다율이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한결은 입 모양을 보고 알았다.
부상병은 아직 견인차 옆 풀밭에 엎드려 있었다. 불붙은 견인차에서 20미터였다. 위에 관측용 하나가 남아 있었고, 사람이 나가면 좌표가 넘어간다. 다율이 다른 화면을 열었다. 무인 지상차량 하나가 정비 지점 뒤편에서 궤도를 굴려 나왔다. 짐칸 대신 낮은 들것을 얹고 뒤에 끌개를 단 차였다. 지난주에 다율이 정찰차 하나를 뜯어 고쳐 놓은 것이었다. 무인 후송차가 풀밭을 가로질러 부상병 옆에 섰다. 부상병이 들것에 기어오르는 데 1분이 걸렸다. 다율은 화면 속 그 1분 동안 숨을 쉬지 않았다. 차가 부상병을 싣고 돌아오는 동안 관측 드론은 머리 위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차에는 좌표를 넘길 이유가 없었다.
위생병들이 부상병을 받았다. 이름이 크시시에크라고 했다. 다리를 대퇴부까지 붕대로 감는 동안 그는 이를 악물고 욕을 했는데, 욕의 대상은 자기 다리가 아니라 방금 탔던 무인차였다. 딱딱해서 엉덩이가 다 까졌다는 것이었다.
다율이 분필을 찾아 들고 무인 후송차 옆으로 갔다. 차체 옆면, 번호판 자리 위에 분필로 또박또박 적었다. 크시시에크. 한글로 적고 그 아래 폴란드어로 한 번 더 적었다. 운전병이 옆에서 폴란드어 철자를 두 번 고쳐 주었다.
“왜 이름을 씁니까?”
“이 차가 처음 끌고 온 사람이라서요. 다음 사람도 적을 겁니다. 칸이 모자라면 옆면을 하나 더 쓰면 됩니다.”
*
1200, 한결의 전화기가 한 번 떨렸다. 알람이 아니었다. 회사 메일 계정에서 온 자동 알림이었다. 귀하의 계정은 72시간 후 비활성화될 예정입니다. 남은 시간 48시간. 누군가 친절하게 시계까지 달아 놓았다. 한결은 알림을 지우지 않고 화면을 껐다.
1400, 브란도프스키가 정비 지점을 옮기자고 했다.
“저쪽이 전차를 안 치고 정비를 칩니다. 여기 있으면 내일은 트럭이 없습니다. 드론 방호망을 칠 수 있는 지붕 있는 자리로 갑니다. 국도변에 농가가 하나 있습니다. 헛간이 큽니다.”
“주인은요?”
“피난 갔다고 들었습니다.”
“저쪽이 트럭을 고르는 걸 우리가 안 건 오늘입니다. 저쪽은 언제부터 골랐을까요?”
“판 서가 배기 지그를 걸던 밤부터일지도 모릅니다.”
브란도프스키는 그 말을 농담처럼 했는데, 말하고 나서 웃지 않았다. 한결은 불탄 견인차 쪽을 봤다. 불은 꺼졌고 검은 뼈대만 남아 김을 올리고 있었다. 55톤을 끌 수 있는 차가 여단에 이제 둘 남았다.
1700, 정비 트럭 둘과 무인 후송차가 국도를 따라 농가로 들어갔다. 마당에 들어서자 헛간 문이 안에서 먼저 열렸다. 문짝을 민 것은 노파였다. 한결은 그 얼굴을 알아봤다. 3주 전 정비고 앞 국도를 파란 트랙터 짐칸에 앉아 지나가던 사람이었다. 헛간 안에 그 파란 트랙터가 서 있었고, 트랙터 옆에서 여자아이가 닭장 문을 붙든 채 이쪽을 봤다. 아이도 한결을 알아본 얼굴이었다. 턱을 한 번 들었다.
노파가 폴란드어로 길게 말했다. 운전병이 받아 옮겼다.
“3주 동안 서쪽으로 갔는데 트랙터가 자꾸 서서, 가다 서다 하는 동안 서쪽 길이 막혔답니다. 그래서 돌아왔답니다. 피난소가 다 차서 집이 낫답니다. 헛간은 써도 된답니다. 대신 닭은 건드리지 말랍니다. 셋 남았는데 셋이 다 이름이 있답니다.”
“이름이 뭡니까?”
운전병이 물었다가 대답을 듣고는 한참 웃음을 참았다.
“셋 다 대통령 이름이랍니다. 누구 대통령인지는 안 가르쳐 준답니다.”
노파는 병사들이 정비 트럭을 헛간 안으로 들이는 것을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트럭 한 대가 문설주를 스치자 그녀가 폴란드어로 한마디 했고, 운전병을 비롯한 병사들이 한꺼번에 차렷 자세가 됐다. 운전병이 한결에게 몰래 속삭였다.
“우리 할머니랑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문 부수면 너희 어머니한테 편지 쓴다고요.”
아이는 닭장을 헛간 가장 안쪽으로 옮겨 놓고, 그 앞에 나무 상자 하나를 놓아 경계선을 만들었다. 병사들은 아무도 그 상자를 넘지 않았다. 한결은 정비 트럭 짐칸에서 공구함을 내리다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상자를 가리키고 고개를 저었다. 한결도 고개를 저었다. 협정이 맺어졌다.
1830, 병사들이 헛간 지붕 위에 드론 방호망을 쳤다. 그물 사이로 저녁 햇빛이 격자로 떨어져 파란 트랙터 위에 얹혔다. 한결은 트랙터 엔진에 귀를 대 봤다. 시동은 안 걸려 있었지만 연료 냄새가 이상했다. 필터가 막힌 냄새였다. 3주 전 국도에서 기침하듯 멈칫하던 그 소리를 그는 기억했다. 오늘 밤 안에 선다고 했던 것은 틀렸다. 이 트랙터는 서다 가다 하면서 3주를 버텼다. 한결은 트랙터 보닛을 손바닥으로 한 번 두드렸다. 버틴 기계에게 정비병들이 하는 버릇이었다.
1920, 노파가 한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말없이 헛간 뒤쪽을 가리켰다. 한결은 그 손끝을 따라 헛간 모퉁이를 돌았다. 뒷마당 풀밭에 큰 초록색 트랙터 한 대가 옆으로 누운 채 끌려와 있었다. 짐칸 쪽이 둥글게 파여 있었고 운전석 문짝이 없었다. 한결은 그 트랙터를 사진으로 먼저 봤다. 5월의 어느 아침 0620, 신뢰도 0.88, 자주포. 노파는 그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얼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도 아니었다. 흙받이에 흰 페인트로 쓴 글씨가 있었다. 끝 획이 조금 흘러내린 붓글씨였다.
할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