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248자) · 서한결 · 6월 8일(화)
72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610, 한결의 왼쪽 주머니에는 전화가, 오른쪽 주머니에는 접은 공문이 들어 있었다.
밤새 그는 그 둘을 한 번씩 꺼내 봤다. 전화 속 문자는 +7로 시작하는 번호에서 왔고, 공문은 서울 본사 직인이 찍혀 있었다. 계약상 안전 확보 불가 지역. 두 문장이 같은 여덟 글자로 시작했다. 한쪽은 가짜였고 한쪽은 진짜였는데, 진짜 쪽이 한결에게 요구하는 것이 더 많았다. 가짜는 떠나라고만 했고 진짜는 날짜를 적으라고 했다.
0620, 브란도프스키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정비고로 들어왔다. 약속한 사격 수였다. 차량 번호마다 어제 쏜 발수가 그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
“판 서, 오늘 아침 저쪽 정찰대가 1호차 앞으로 붙었습니다. 지금 교전 중입니다.”
0631, 무전이 폴란드어로 빨라졌다. 한결은 이제 숫자 말고도 몇 개를 알아들었다. 왼쪽, 오른쪽, 연기, 그리고 정비. 궤도를 새로 간 1호차는 능선 뒤에서 차체를 숙인 채 첫 발을 냈고, 1.9킬로미터 뒤 정비고 양철 벽이 그 압력에 한 번 들썩였다. 저쪽 보병전투차 둘이 능선 앞 밀밭으로 들어왔다가 하나가 서고 하나가 연막 뒤로 빠졌다. 0638, 저쪽 박격포가 능선 뒤를 더듬었다. 네 발이 흙을 뒤집었고 다섯 번째가 1호차 뒤 20미터에 떨어졌다. 1호차 전차장이 해치를 닫기 전에 누가 봐도 알 만큼 크게 욕을 했다. 한결은 그 욕을 알아들었다. 어제 간 궤도 핀 셋이 버티는지 묻는 욕이었다.
0641, 연막 뒤로 빠졌던 보병전투차가 밀밭 왼쪽 끝에서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전차 한 대가 붙어 있었고, 그 전차는 1호차가 방금 쏜 자리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무전에서 1호차 포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저쪽이 먼저 쐈다. 포탄이 1호차 포탑 옆 흙 둔덕을 깎고 넘어갔고, 깎인 흙이 해치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1호차는 장전하는 6초를 버텼다. 두 번째 발이 저쪽 전차의 궤도를 끊었다. 3호차가 능선 오른쪽 끝에서 몸을 반쯤 내밀어 보병전투차의 옆구리를 쳤다. 밀밭 한가운데 불이 둘 섰다. 바람이 서쪽으로 불어서 타는 냄새가 1.9킬로미터를 건너 정비고까지 왔다. 기름과 고무와 덜 익은 보리가 한꺼번에 타는 냄새였다.
0644, 1호차가 자리를 옮겼다. 옮기는 동안 궤도가 소리를 냈지만, 끊어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결은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숨을 쉬었다. 운전병이 정비고 문가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판 서, 방금 숨 참으셨습니다.”
“궤도 핀 박은 사람은 원래 그렇게 듣습니다.”
“그럼 저도 운전할 때 숨 참겠습니다. 판 서가 제 차 바퀴도 갈았으니까요.”
“그 바퀴는 안 참으셔도 됩니다. 그건 잘 박혔습니다.”
*
0900, 여단 지휘소 한쪽 구석의 작은 화면에 한국 뉴스가 떠 있었다. 누군가 한결을 위해 켜 놓은 채널이었다. 서울은 1600이었다. 외교부 대변인이 단상에 섰다.
“정부는 금일 부로 폴란드 전역에 대한 여행경보를 4단계, 여행금지로 상향합니다. 현지 체류 중인 우리 국민께서는 72시간 이내에 출국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 없이 여행금지 국가에 체류하는 것은 여권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됩니다.”
화면 아래로 자막이 흘렀다. 여행금지국 체류 시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 벌금. 폴란드 통신병 하나가 한국어를 못 읽으면서도 화면과 한결을 번갈아 봤다. 표정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브란도프스키가 지휘소 계단을 내려오다가 화면 앞에 멈췄다. 그는 자막을 읽지 못했지만 72라는 숫자는 읽었다.
“판 서, 저 숫자가 판 서 것입니까?”
“한국 사람 전부의 것입니다. 여기 한국 사람은 둘뿐이라, 거의 제 것입니다.”
“72시간이면 월요일 새벽에 온 저쪽 계획표하고 같은 크기군요.”
“그쪽 60시간은 틀렸습니다.”
“서울 숫자는 틀리는 걸 봤습니까?”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울의 숫자는 틀려도 서류가 남는다. 틀렸다는 서류가 아니라, 맞았다는 서류였다.
*
1600, 서울.
본사 12층 회의실 창밖으로 한강이 흐렸다. 긴 탁자에 사업본부장과 법무팀장과 수출관리팀장이 앉았고, 박 팀장은 벽 쪽 보조 의자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 화면에 방금 끝난 외교부 발표가 멈춰 있었다.
“폴란드에 남은 우리 직원이 두 명입니다. 기술지원팀 서한결, 무인체계팀 신다율.”
법무팀장이 서류를 넘겼다.
“민간인 직원이 전투 지역에서 사망하면, 회사가 여권법 위반을 방조한 것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방위사업청 수출 허가 심사에서 우리 이름이 먼저 걸립니다. 폴란드 2차 계약, 루마니아 협상, 전부 그 심사를 거칩니다. 한 사람 때문에 다음 20년을 걸 수는 없습니다.”
사업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논리에 틀린 데가 없었다. 수출관리팀장이 한 줄을 보탰다.
“72시간이 지나면 계약을 해지해야 합니다. 해지 사유는 본인의 철수 거부로 적습니다. 그래야 회사가 막았다는 기록이 남습니다.”
박 팀장이 보조 의자에서 손을 들었다.
“서한결은 지금 거기서 전차를 굴리고 있습니다. 그 전차가 우리 전차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팀장님. 우리 전차 옆에서 우리 직원이 죽으면 그 사진이 어디에 실리겠습니까?”
박 팀장은 손을 내렸다. 그 질문에는 답이 있었다. 사진은 1면에 실린다. 사진 설명에는 회사 이름이 들어가고, 이름 옆에는 수출 전차라는 말이 붙는다. 그는 열아홉 해 동안 그런 사진이 어떻게 나가는지 봐 왔다. 법무팀장이 해지 통보 초안을 화면에 띄웠다. 날짜 칸은 비어 있었다. 72시간 뒤에 채울 칸이었다.
*
1200, 폴란드. 박 팀장의 전화가 왔다.
“서 정비관, 뉴스 봤지. 이번엔 권고가 아니야. 오늘 1200부터 72시간이야. 그게 지나면 회사는 자네를 해지해. 계정, 출입증, 보험, 한꺼번에 잠겨.”
“팀장님, 그 회의에 계셨습니까?”
“있었어. 벽 쪽에.”
위성 전화의 반 박자가 지나갔다.
“날짜는 내가 적어 줄 테니 서명만 해서 보내. 사진 찍어서 보내도 돼. 그럼 바르샤바 가는 차를 내가 잡아. 지사에서 사람이 나가.”
“날짜 칸을 팀장님이 적으시면, 그 날짜에 제가 떠난 게 됩니다.”
“그래야 자네가 살아.”
“제가 떠나면 3호차 궤도는 누가 봅니까?”
“폴란드군 정비병이 봐. 그 사람들도 교육받았어.”
“교육받은 건 창원 교범입니다. 교범에 야전 전화선은 없습니다.”
“서 정비관.”
박 팀장이 한결의 이름을 부른 뒤 한참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사무실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은 저녁 일곱 시였다.
“나는 자네를 붙잡은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아. 날짜 적어.”
전화가 끊겼다. 한결은 오른쪽 주머니의 공문을 꺼내 날짜 칸을 봤다. 비어 있었다. 그는 다시 접었다.
*
1530, 다율이 정비고로 왔다. 표정이 이상했다.
“판 서님, 저는 예외 허가가 나온답니다. 폴란드 국방부가 신청해 줬습니다. 무인 체계는 운용자가 없으면 멈추니까 필수 인력이랍니다.”
“잘됐습니다.”
“판 서님 것은 신청 안 했답니다. 전차 정비관은 폴란드군에도 있다고 했답니다.”
다율은 그 말을 하고 나서 한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결은 렌치를 공구함에 도로 넣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폴란드군에도 정비관은 있습니다.”
“판 서님만큼 안 됩니다.”
“그건 서류에 안 들어가는 말입니다.”
다율은 한동안 노트북 가방끈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했다.
“저도 신청 취소할까요?”
“그러면 무인차 넷이 멈춥니다. 멈춘 무인차는 제가 못 고칩니다. 액추에이터 규격이 다르니까요.”
다율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한결을 봤다. 다르게 만들어야 따로 팔린다고 말한 것이 자기였다는 걸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
1840, 한결은 3호차 궤도 앞에 쪼그려 앉아 어제 박은 핀 넷을 하나씩 두드려 봤다. 소리가 다 같았다. 표트르가 조종수 해치에서 고개를 내밀고 뭘 하느냐고 물었고, 한결은 핀을 가리킨 뒤 손가락으로 귀를 짚었다. 표트르는 알아듣고 자기도 망치를 가져와 한결 옆에 쪼그려 앉았다. 둘은 핀 넷을 한 번씩 더 두드렸다. 소리는 여전히 같았다. 표트르가 그걸로 됐느냐는 듯 엄지를 들었고, 한결도 엄지를 들었다. 저녁 해가 궤도 판 사이의 흙을 붉게 비췄다. 밀밭 쪽 연기는 아직 다 가라앉지 않았다.
*
2300, 한결은 대대 지휘 천막 앞에 섰다. 브란도프스키는 등유 램프 아래에서 사격 수를 옮겨 적고 있었다. 한결이 가슴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짙은 녹색 표지 모서리가 반년 동안 주머니에서 닳아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이걸 맡아 주십시오.”
브란도프스키는 여권을 집지 않았다.
“판 서, 이건 판 서가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종이입니다.”
“압니다. 제가 들고 있으면 공항으로 갈 것 같아서요. 오늘 밤에도 두 번 꺼내 봤습니다.”
“72시간 안에 마음이 바뀌면요?”
“그때는 대대장님께 달라고 하겠습니다. 부탁하는 쪽이 저라면 조금 더 오래 생각할 겁니다.”
브란도프스키는 한참 여권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막 구석의 철제 금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탄약 상자만 한 작은 금고였고, 문에 다이얼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가 몸으로 다이얼을 가리고 돌렸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여섯 번 났다. 문이 열리자 안에 대대 암호철과 봉인된 봉투 몇 개가 보였다. 그는 여권을 그 위에 올려놓고 문을 닫은 다음 다이얼을 한 바퀴 크게 돌려 놓았다.
“번호는 안 여쭙겠습니다.”
“안 여쭤도 안 알려 드립니다.”
브란도프스키는 금고 위에 손바닥을 한 번 얹었다가 일어섰다. 램프 불빛에 그의 그림자가 천막 벽에 크게 흔들렸다.
“판 서, 이건 명령이 아닙니다. 제가 판 서에게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부탁뿐입니다. 그러니 부탁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72시간 동안 판 서가 달라고 하면, 저는 이 금고를 열겠습니다. 이유는 안 묻겠습니다.”
“대대장님이 그 자리에 안 계시면요?”
“그러면 부대대장이 엽니다. 번호는 둘만 압니다.”
“둘 다 안 계시면요?”
브란도프스키가 잠깐 생각했다.
“그러면 판 서는 여기 남는 겁니다. 그때는 저도 판 서를 못 보내 드립니다.”
한결은 웃었다. 브란도프스키도 웃었는데, 웃음이 끝나기 전에 그는 램프 심지를 한 칸 낮췄다. 불빛이 천막 밖으로 새면 위에서 본다.
2330, 한결은 정비고로 돌아와 공문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날짜 칸은 비운 채 작업대 위, 0.2와 보일러 도면과 61 옆에 네 번째로 세웠다. 전화기는 뒤집어 놓았다. 화면이 켜질 때마다 +7이 뜨는 것은 아니었지만, 켜질 때마다 그 번호일까 봐 손이 먼저 갔다.
2350, 72시간 가운데 12시간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금고 번호는 한결이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