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188자) · 서한결 · 6월 7일(월)
점선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0510, 6월 7일 월요일. 부품 트럭이 사흘째 오지 않았다.
0522에 브란도프스키가 무전을 받고 정비고로 왔다.
“판 서, 그단스크가 막혔습니다. 폭격이 아닙니다. 배가 부두에 서 있는데 안 내려 줍니다.”
항구는 크레인 수가 정해져 있고 크레인 하나가 하루에 내리는 양도 정해져 있다. 배가 여덟 척 서 있으면 여덟 척을 다 못 내리니 순서를 정해야 하는데, 이번 달부터 그 순서를 정하는 쪽이 바뀌었다고 했다. 미군 물자가 먼저 내려갔고, 그 물자는 다시 태평양으로 가는 배에 실렸다.
“우리 부품이 실린 배는 몇 번째입니까?”
“여덟 척 가운데 일곱 번째랍니다. 어제는 다섯 번째였습니다.”
“내려갈수록 뒤로 갑니까?”
“기다리는 동안 새 배가 앞에 끼어듭니다. 줄을 서 본 사람은 다 압니다.”
브란도프스키는 그 말을 하고 웃으려다 말았다. 정비고 지붕 틈으로 새벽빛이 가늘게 들어와 작업대 모서리를 비췄다.
0602, 한결은 재고를 셌다. 접속함 커넥터 넷, 궤도 연결핀 열넷, 냉각기 영. 렌즈 닦는 천은 여섯으로 넉넉했다. 재고는 많은 것과 없는 것을 나란히 놓고 봐야 한다. 없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이 그 주의 한계가 된다. 이번 주의 한계는 냉각기였다. 열상이 죽으면 밤에 못 나간다.
*
0930, 소각로를 껐다. 사흘 전에 한 약속이었다. 한결이 스위치를 내렸고 다율이 옆에서 시각을 적었다.
같은 조건을 두 번 만들려면 거리와 각도와 그 사이에 있는 것이 같아야 했다. 거리는 흙에 꽂아 둔 막대기로, 각도는 무인 정찰차 2번의 바퀴 자국으로 맞췄다. 사이에는 어제 위장망을 걷어서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은 맞출 수 없었다. 오늘은 불었다. 한결은 종이 맨 위에 바람 있음이라고 적었다.
“지난번 폐유는 얼마나 넣었습니까?”
다율이 물었고, 한결은 드럼통 눈금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안 적었습니다. 제가 안 적었습니다.”
1010, 63, 점선. 1050, 71, 실선. 1130, 74, 실선.
“식는데 숫자가 올라갑니다.”
“모양은 그대로인데 온도가 차량 쪽으로 내려오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가장 닮았을 때가 제일 위험합니다.”
한결은 장갑 낀 손을 소각로 몸통에 대 봤다. 장갑 너머로도 아직 뜨거웠고, 기름 탄 냄새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손을 떼고 종이를 다시 봤다. 숫자가 올라가는 쪽으로 가면 언젠가는 내려온다. 문제는 그 꼭대기가 어디냐였다.
*
1148, 무전이 잡음으로 덮였다. 채널을 바꿔도 따라왔다. 재밍(전파를 흐려 조종과 영상을 끊는 것)이었다. 같은 주파수에 더 센 잡음을 쏘면 우리 전파가 묻힌다. 무전이 안 되면 남는 것은 셋이었다. 유선은 깔 시간이 없고 사람은 뛰어야 하니, 결국 미리 해 둔 약속이 남았다. 무전이 끊기면 각자 자기 앞을 맡고 옆을 믿는다.
1152, 포가 왔다. 두 번째 진지 넷 가운데 셋에 떨어졌다. 두 번째 진지는 어제 판 것이고 파낸 흙은 멀리 버렸다. 드론이 위에서 보면 흙이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버렸는데도 저쪽은 알았다. 방법은 셋이었다. 어제 옮기는 걸 봤거나, 파는 걸 봤거나, 우리 자료 어딘가에 그 좌표가 있었거나. 앞의 둘은 막을 수 있었다. 셋째는 어디를 막아야 하는지 몰랐다.
*
1150, 동쪽.
소콜로프의 모니터에 좌표 네 줄이 떠 있었다. 통신병이 출처를 읽었다.
“폴란드 여단 정비 전산입니다. 고장 난 차를 끌어오려고 예비 진지 위치를 미리 적어 두는 서버입니다. 사흘 전에 들어간 회선에서 나왔습니다.”
“고치는 손이 적어 둔 거로군.”
소콜로프는 네 줄을 포병 회선으로 넘기고, 수첩에 그 서버 이름을 옮겨 적었다.
*
1201, 무전이 없으니 서로 부르지 못했다. 3호차는 규칙에 없는 짓을 했다. 두 번째 자리가 드러났으면 첫 번째 자리가 오히려 빈다며 야누시가 첫 진지로 되돌아갔다. 새 조종수 표트르가 마레크의 자리에서 사흘째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1204, 오른쪽이 비었다. 5호차 자리였다. 5호차는 열상이 죽어 오늘 나오지 못했고, 빈 자리로 저쪽 둘이 들어왔다. 3호차가 오른쪽으로 돌면서 능선 위로 몸이 나왔다. 2,000에서 쏘아 하나를 세웠고, 둘째가 3호차 옆을 봤다. 1207, 1호차가 뒤에서 그것을 세웠다. 1호차는 그 각도를 잡으려고 자기 자리를 버렸고, 버린 자리로 셋째가 들어왔다.
1209, 1호차 왼쪽 궤도가 끊겼다. 차가 그 자리에서 반 바퀴 돌고 멈췄다. 움직이지 못하는 전차는 진지가 된다. 진지는 쏘는 동안만 산다. 1호차는 멈춘 채로 세 발을 더 쐈다. 한결은 1,900미터 뒤 정비고 문턱에서 그 세 발을 들었다. 무전이 없으니 누가 쏘는지 알 길이 없었는데,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간격으로 세 번 울리는 소리를 듣고 그는 그것이 서 있는 차라는 것을 알았다. 움직이는 차는 쏠 때마다 소리가 난 자리가 조금씩 옮겨 간다. 1211, 3호차 오른쪽 궤도도 맞았다. 끊긴 궤도가 앞으로 쏟아지면서 차가 한쪽만 그 위에 올라타 기울었다. 기울면 포신이 수평이 아니어서, 포탑을 돌릴 때마다 포신이 위나 아래로 딸려 간다. 조준 장치가 보정할 수 있는 각도를 넘어 있었다.
“넘습니다.”
“쏴.”
빗나갔다. 두 번째는 맞았다. 셋째가 맞고도 뒤로 물러났다. 물러날 수 있으면 안 뚫린 것이다. 1214, 저쪽이 적외선 연막을 치고 물러갔다. 40초 뒤 연막이 걷힌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1240, 무전이 돌아왔다. 첫 소리가 야누시의 긴 폴란드어였다. 브란도프스키는 옮기지 않았다. 한결은 알고 있었다. 냉각기 이야기였다. 5호차 냉각기를 통째로 갈아야 했는데 여분이 없다는 것을 한결은 사흘 전에 알았고, 알고도 구하지 못했다. 그 차가 안 나갔고, 그 자리가 비었고, 둘이 들어왔고, 3호차가 능선 위로 나왔고, 1호차가 자리를 버렸다. 그렇게 이어 놓으면 다 한결에게 왔다. 안 이어 놓으면 아무에게도 안 왔다.
*
1330, 여섯 줄이 찼다. 1210, 66, 실선. 1250, 58, 점선. 1330, 49, 안 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다율은 시각이 되면 화면을 보고 적었다. 바람이 불어 지난번보다 빨리 식었는데도 실선은 세 번 붙었다.
“고친 게 아니었습니다. 점선은 애매한 걸 애매하다고 표시한 겁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이 소각로는 74까지 갑니다. 74는 애매한 게 아닙니다.”
다율은 종이를 접지 않고 들고 일어섰다.
“오늘 저녁 여단 보고에서 이걸 내겠습니다. 나흘 동안 확인된 오탐은 셋인데, 확인 안 된 게 얼마인지는 이 종이가 말합니다.”
*
2210, 창원.
정하경 반장은 사흘째 냉각기를 봤다. 수출분 스물넷 가운데 스물둘을 봤고, 40분째에 흔들린 것이 넷이었다. 넷을 뺐다. 품질기획팀에서 사람이 내려와 규격 안인데 왜 빼느냐고 물었다. 하경은 서랍을 열어 종이 묶음을 꺼냈다. 열네 장이었다.
“규격 안쪽 아래로 나온 것들입니다. 두 해 동안 적었습니다.”
“보고된 겁니까?”
“아닙니다. 오늘 넷이 나와서요.”
품질기획팀 사람은 첫 장부터 넘겨 보다가 세 장째에서 멈췄다. 날짜와 일련번호와 흔들린 시각이 연필로 빼곡했고, 모서리마다 하경의 검사원 번호가 작게 적혀 있었다.
“이걸 두 해 동안 혼자 적으셨습니까?”
“규격을 정한 사람은 40분을 안 봤습니다. 저는 봤습니다.”
넷을 뺀 스무 대는 그날 밤 부두로 가는 트럭에 실렸다. 하경은 그 트럭이 공장 문을 나설 때까지 서류철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
1500, 한결은 1호차 앞에 앉았다. 궤도가 20미터쯤 늘어져 있었고 연결핀 자리 셋이 어긋나 있었다. 장력을 먼저 풀고, 판 앞뒤의 핀을 뽑고, 튀지 않게 폴란드 정비병 하나가 붙어 눌렀다. 새 판을 넣고 망치로 핀을 쳐서 박았다. 셋을 썼다. 그다음이 3호차였다. 넷을 썼다. 마지막 핀을 박기 전에 한결은 진흙 속에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핀을 올려놓았다. 흙 묻은 손바닥 위의 쇠막대 하나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일곱이 남았다. 일곱이면 이런 일을 두 번 더 할 수 있었다. 세 번째부터는 못 한다.
1540, 전화에 문자가 왔다. +7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본사는 이미 당신을 버렸습니다. 계약상 안전 확보 불가 지역에 남는 것은 본인의 선택입니다.
1640, 브란도프스키가 서류 한 장을 들고 왔다. 본사에서 온 한국어 공문이었다. 철수 권고. 사유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계약상 안전 확보 불가 지역 근무 확인, 본인 동의 시 즉시 귀국 조치. 날짜 칸이 비어 있었다. 본인이 적는 칸이었다. 한결은 전화 화면과 공문을 나란히 놓고 봤다. 계약상 안전 확보 불가 지역.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문자는 공문보다 한 시간 먼저 왔다. 저쪽은 서울이 무슨 말을 할지 서울보다 먼저 알았거나, 서울이 저쪽이 쓸 법한 말을 골랐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든 한결에게는 같은 문장이었다.
“판 서, 그 문자는 가짜입니다.”
“압니다. 그런데 공문이 진짜라서 문자가 가짜 같지 않습니다.”
브란도프스키는 공문을 한결 손에 남겨 두고 전화를 들여다봤다. +7이라는 숫자를 한참 보다가, 그는 그 번호를 자기 수첩에 옮겨 적었다.
1700, 박 팀장이 전화했다.
“받았지? 내가 올린 거야. 항구가 막혔어. 부품이 안 가면 자네가 할 게 없어. 없는 걸로 고치는 건 정비가 아니야. 지금 뭘로 고치고 있어?”
“있는 걸로 고칩니다. 핀 일곱입니다.”
“그다음엔?”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 내년에 나가. 나가기 전에 자네 보내고 싶어. 날짜만 적어서 보내.”
*
1800, 궤도를 간 3호차가 나갔다. 야누시가 해치에서 한결을 내려다보며 폴란드어로 짧게 말했다. 브란도프스키는 옆에 없었다. 야누시가 손바닥을 위로 펴서 두 번 들어 올렸다. 한결은 그것도 못 알아들었다. 지나가던 정비병 하나가 서툰 영어로 옮겼다.
“히 세이즈, 씽큐. 앤드… 씽큐 포 스테잉.”
정비병은 자기 영어가 맞았는지 확인하려는 듯 한결의 얼굴을 살폈다.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비병은 만족한 얼굴로 갔다. 3호차는 벌써 정비고 모퉁이를 돌고 있었고, 해치 위의 야누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결은 작업대로 돌아왔다. 0.2와 보일러 도면과 61이 적힌 종이 옆에 공문을 네 번째로 세웠다. 네 번째 것이 제일 컸다. 서식이라 그랬다. 그는 그것을 다시 집어 날짜 칸을 봤다.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부품 상자를 열었다. 접속함 커넥터가 넷 있었다. 궤도 연결핀이 일곱 있었다. 한결은 일곱을 세어 보고 다시 넣었다.
세는 동안 밖에서 시동이 걸렸다. 네 번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