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16자)

귤 표결

지리산에 풀어 준 호랑이 · 하윤슬

호단은 동트기 전 계곡 바닥의 물안개 속에 엎드려 있었다⁠. 폭음탄이 터진 밤부터 사흘째⁠, 배를 채운 것은 가재와 개구리뿐이었다⁠. 물안개에 젖은 털이 무거웠다⁠. 코끝에 고라니 냄새가 닿아 있었다⁠. 풀물 냄새와 젖은 털 냄새⁠, 겁 많은 짐승 특유의 시큼한 땀 냄새였다⁠. 고라니는 개울 건너 오리나무 밑에서 어린 순을 뜯고 있었다⁠. 호단은 바람이 고라니에게서 자기에게로 불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배를 땅에 붙인 채 한 발씩 옮겼다⁠.

예전 같으면 셋을 세기 전에 덮쳤을 거리였다⁠. 호단은 다섯을 더 기다렸다⁠. 배 속이 무거워 뒷다리가 늦게 따라왔다⁠. 고라니가 고개를 들고 귀를 돌렸다⁠. 귀가 돌아가는 순간 호단은 몸을 날렸다⁠.

앞발이 고라니 엉덩이를 쳤다⁠. 발톱 끝에 털과 살갗이 걸려 들어왔다가⁠, 고라니가 짧게 울며 몸을 비트는 바람에 쭉 미끄러졌다⁠. 고라니는 개울로 뛰어들어 물을 튀기며 건너갔다⁠. 호단은 세 걸음을 쫓다가 멈췄다⁠. 숨이 찼다⁠. 배가 아래로 당겼다⁠. 발톱 사이에 고라니 털이 한 줌 끼어 있었다⁠. 호단은 털을 핥았다⁠. 피 맛이 아주 조금 났다⁠.

해가 오르자 호단은 계곡을 버리고 높이 올랐다⁠. 소 냄새가 올라오는 골짜기와 등을 지고 걷고 싶었지만⁠, 산을 오를수록 바람은 오히려 소 냄새를 더 실어 올렸다⁠. 너덜겅 위로 바위 벼랑이 솟아 있었다⁠. 벼랑 아래에 바람이 휘돌아 나가는 자리가 있었고⁠, 휘돌아 나간 바람이 닿지 않는 자리에 검은 구멍이 있었다⁠.

호단은 구멍 앞에서 오래 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오소리 냄새가 났다⁠. 오소리는 떠난 지 오래였다⁠. 흙은 말라 있었고⁠, 안쪽 공기는 바깥보다 따뜻했다⁠. 발밑이 울리지 않았다⁠. 하늘 높은 데서 매 한 마리가 울었을 뿐⁠, 능선 너머의 울림도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다⁠. 호단은 머리를 들이밀고⁠, 어깨를 들이밀고⁠, 배를 끌어 넣었다⁠. 안은 몸을 둥글게 말기에 꼭 맞았다⁠.

호단은 안쪽 벽에 뺨을 문질러 냄새를 남겼다⁠. 바깥에서 바람이 바뀌었다⁠. 골짜기 아래 소 냄새가⁠, 여기서도 실낱처럼 들어왔다⁠.

*

저녁 일곱 시⁠, 무내골 회관 바닥에 스물두 사람이 둘러앉았다⁠. 마을 열두 집에서 한 집도 빠지지 않고 왔다⁠. 방 가운데에 막걸리 주전자 넷과 김치전 접시 여섯이 놓였고⁠, 접시마다 귤이 한 무더기씩 쌓여 있었다⁠. 나미자가 부엌에서 김치전을 부쳐 날랐다⁠. 기름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보일러 열기에 섞여 한담의 눈이 따끔했다⁠.

한담은 문간에 혼자 앉았다⁠. 센터에서 온 사람은 한담뿐이었다⁠. 표정훈은 장관 행사 준비로 세종에 올라가 있었다⁠. 떠나기 전에 표정훈은 한담에게 파일 한 장을 쥐여 주었다⁠. 「⁠외양간 전기 울타리 무료 설치 · 야간 감시 카메라 · 사료 지원 검토⁠」⁠. 마지막 줄의 「⁠검토⁠」에 표정훈이 직접 줄을 쳐 놓았다⁠.

주영길이 메가폰을 들고 일어났다⁠. 방 안이 좁아 메가폰이 천장 형광등에 닿을 뻔했다⁠.

“⁠아아⁠, 이장입니다⁠.⁠”

“⁠이장⁠, 방 안이여⁠. 그냥 말혀⁠.⁠”

“⁠규칙이여⁠. 총회는 메가폰으로 열어⁠.⁠” 주영길은 메가폰을 고쳐 잡았다⁠. “⁠오늘 안건은 셋입니다⁠. 하나⁠, 범 선생을 산에서 내보내 달라고 환경부에 탄원하는 건⁠. 둘⁠, 센터 사람 마을 출입을 막는 건⁠. 셋⁠…⁠…⁠.⁠”

주영길이 메가폰을 내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셋은 내가 따로 올린 건디⁠, 범 선생 덕에 우리 마을이 전국에 났으니⁠, 회관 옆 빈집을 고쳐서 호랑이 민박을⁠…⁠…⁠.⁠”

“⁠이장⁠!⁠”

방 안 여기저기서 귤이 날아갔다⁠. 주영길은 메가폰으로 귤을 막으며 셋은 없던 것으로 하자고 했다⁠.

칠구가 일어났다⁠. 장화를 벗은 양말 바닥에 지푸라기가 붙어 있었다⁠. 칠구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송아지가 다음 달 경매에 나갈 놈이었다는 것⁠, 보상이 두 달 뒤 팔 할이라는 것⁠, 협약서를 쓸 때 범이 마을에 내려온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침 텔레비전에서 자기가 범 새끼 죽이려는 농부가 되었다는 것⁠.

“⁠나는 밤새 범을 안 쐈어⁠. 저 아가씨가 봤어⁠.⁠” 칠구가 문간의 한담을 턱으로 가리켰다⁠. “⁠안 쏜 놈이 쏠라고 한 놈이 되는 디가 이 나라여⁠. 그라믄 나는 이제 어찌 혀야 쓰겄소⁠? 소를 산에 바치든가⁠, 범을 산에서 내보내든가⁠.⁠”

방 안이 조용했다⁠. 나미자가 부엌 문간에서 뒤집개를 든 채 칠구를 보았다⁠.

조용함을 먼저 깬 사람은 마을 맨 아래 집에 사는 귀농 부부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삼 년째⁠, 소 대신 블루베리를 키우고 주말마다 방 두 칸을 민박으로 내주는 집이었다⁠. 남편이 막걸리 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민박에 어제오늘 전화가 열한 통 왔어요⁠. 호랑이 보러 오고 싶다고요⁠. 주말 예약이 다 찼습니다⁠.⁠”

“⁠그라믄 범 덕에 돈 버는 집도 있다는 것이여⁠?⁠”

“⁠돈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요⁠. 범이 나가면 손님도 안 올 거라는⁠…⁠…⁠.⁠”

“⁠그것이 돈 얘기여⁠.⁠”

칠구가 말했다⁠. 귀농 부부의 아내가 남편 팔을 꼬집었다⁠. 남편은 입을 다물었다⁠.

방 안쪽에서 아흔 넘은 할아버지 한 분이 지팡이로 바닥을 두 번 쳤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었다⁠. 귀가 어두워 방송도 잘 못 듣는 분이 오늘은 맨 앞에 앉아 있었다⁠.

“⁠범바위⁠.⁠”

할아버지가 말했다⁠. 다들 할아버지를 보았다⁠.

“⁠우리 할아부지가 범바위 밑에서 범을 봤어⁠. 내가 다섯 살 묵었을 적에 들은 얘기여⁠. 범이 골짜기로 내려오믄 마을 사람들이 징을 쳤어⁠. 징을 치믄 범이 올라가⁠. 징을 안 치믄 소가 없어지고⁠.⁠”

“⁠그래서 할아부지네는 어찌 했소⁠?⁠”

주영길이 물었다⁠.

“⁠징을 쳤제⁠. 밤마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무릎에 눕혔다⁠. “⁠그러다 왜놈 순사들이 와서 범을 다 잡아갔어⁠. 징은 그 뒤로 엿 바꿔 묵었고⁠.⁠”

방 안이 웃었다가⁠, 웃음이 금방 가라앉았다⁠. 칠구는 웃지 않았다⁠.

“⁠센터 아가씨도 말혀 봐⁠. 공평하게⁠.⁠”

주영길이 메가폰을 한담에게 내밀었다⁠. 한담은 메가폰을 받지 않고 일어났다⁠.

“⁠울타리를 쳐 드리겠습니다⁠. 외양간마다 전기 울타리요⁠. 돈은 센터가 내요⁠. 밤에는 카메라를 달아서 범이 마을 가까이 오면 바로 알 수 있게 하겠습니다⁠.⁠”

“⁠울타리 치믄 범이 안 오냐⁠?⁠”

칠구가 물었다⁠.

“⁠넘을 수는 있어요⁠. 범은 제 키보다 높이 뛰어요⁠. 그래도 전기에 한 번 데면 다시는 안 넘어요⁠.⁠”

“⁠한 번 데는 동안 송아지 하나가 더 죽어⁠.⁠”

한담은 대답을 고르지 않고 바로 했다⁠.

“⁠그럴 수도 있어요⁠.⁠”

윗집 할매가 귤을 까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 아가씨는 거짓말은 안 하는구먼⁠.⁠”

“⁠거짓말 안 하는 것하고 송아지 안 죽는 것은 다른 일이여⁠.⁠” 칠구가 말했다⁠.

한담은 문간에 놓인 준호의 신발을 보았다⁠. 준호는 방 한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센터 주황 조끼를 입은 채였다⁠. 칠구가 아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니는 조끼 벗든가⁠, 나가든가⁠.⁠”

준호가 무릎을 더 끌어안았다⁠. 할머니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나미자가 뒤집개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 마을 총회여⁠. 준호는 이 마을 사람이여⁠. 조끼 입었다고 마을 사람이 아니여⁠?⁠”

“⁠조끼가 센터 조끼잖여⁠.⁠”

“⁠조끼는 조끼고⁠.⁠”

준호는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조끼 지퍼를 내렸다⁠. 주황 조끼를 벗어 접어서 무릎 옆에 놓았다⁠. 조끼 안에는 엄마가 작년에 사 준 회색 스웨터가 있었다⁠. 칠구는 더 말하지 않고 앉았다⁠.

*

표결은 귤로 했다⁠. 찬성하는 사람은 귤을 손바닥에 올려 들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들지 않았다⁠. 귤은 저마다 앞에 쌓인 무더기에서 하나씩 집었다⁠. 주영길은 귤이 손에 붙어 있으면 손을 드는 것보다 표가 또렷하게 보인다고 했다⁠. 누가 내린 손을 다시 올리면 귤이 떨어져서 바로 안다고 했다⁠.

첫 번째 안건⁠, 환경부 탄원⁠. 귤 열여덟 개가 올라갔다⁠. 준호는 귤을 들지 않았다⁠. 나미자도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안건⁠, 센터 사람 마을 출입 금지⁠. 칠구가 귤을 들었다⁠. 윗집 할매가 들었다⁠. 할아버지들이 들었다⁠. 귤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껍질의 기름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주영길은 귤을 반쯤 들었다가 한담을 보고 내렸다가⁠, 칠구를 보고 다시 들었다⁠. 귤 스물두 개 가운데 열다섯 개가 올라갔다⁠. 주영길의 귤은 올라간 채로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김치전 접시에 떨어졌다⁠. 주영길은 귤을 주워 바지에 닦고 다시 들어 올리며⁠, 귤이 미끄러웠을 뿐 마음은 안 미끄러졌다고 했다⁠. 누군가 이장 마음이 제일 잘 미끄러진다고 했고⁠, 회관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통과요⁠.⁠”

주영길이 메가폰에 대고 말했다⁠. 메가폰 소리가 회관 유리창을 떨게 했다⁠.

“⁠세 번째는 없는 거고⁠…⁠…⁠.⁠” 주영길이 메가폰을 내렸다⁠. “⁠울타리는 어찌 혀⁠? 울타리는 사람이 아니고 쇠붙이잖여⁠. 쇠붙이는 출입해도 되지 않겄어⁠?⁠”

방 안에 웃음이 났다⁠. 한 할아버지가 울타리는 받자고 했고⁠, 할머니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구가 귤을 내려놓았다⁠.

“⁠다른 집은 받든가 말든가⁠. 내 외양간엔 안 쳐⁠. 센터 돈으로 친 울타리 안에서 송아지 키우믄⁠, 나중에 송아지 죽어도 울타리 탓이 되제⁠. 범 탓이 안 되고⁠.⁠”

한담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려는데 윗집 할매가 귤 하나를 한담의 조끼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출입 금지는 내일부터여⁠. 오늘은 김치전 묵고 가⁠.⁠”

*

한담은 회관 마당에 세운 트럭 운전석에서 김치전을 다 먹었다⁠. 기름이 손가락에 묻었다⁠. 회관 창 안에서는 표결이 끝난 사람들이 막걸리를 따르며 떠들었다⁠. 한담은 시동을 걸려다 말았다⁠. 창 너머 방 한구석에 준호와 칠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칠구가 휴대전화를 준호에게 내밀고 있었다⁠. 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칠구가 한 번 더 내밀었다⁠. 준호는 한참 아버지의 손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받았다⁠. 엄지가 화면 위를 오갔다⁠. 화면 불빛이 준호의 얼굴을 파랗게 비추었다⁠. 한담이 아는 화면이었다⁠. 초록 바탕에 하얀 범 발자국 그림⁠. 추적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위치 앱이었다⁠. 준호가 무언가를 치고⁠, 한 번 지우고⁠, 다시 쳤다⁠. 화면 가운데 빨간 점 하나가 떠올랐다⁠.

칠구가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화면을 오래 보았다⁠. 손가락 두 개로 지도를 넓혔다 좁혔다⁠. 빨간 점은 범바위 아래에 있었다⁠. 무내골 개울에서 직선으로 이 킬로미터⁠, 칠구의 외양간 바로 위였다⁠.

준호가 창밖을 보았다⁠. 트럭 운전석의 한담과 눈이 마주쳤다⁠. 준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한담도 돌리지 않았다⁠. 준호의 입이 무언가 말하는 모양으로 움직였다⁠. 창이 막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담은 조끼 주머니의 귤을 꺼내 손안에서 굴리다가⁠, 시동을 걸었다⁠.

관사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빨간 점은 저녁 여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네 번 연달아 범바위 아래 같은 자리에 찍혀 있었다⁠. 사냥하는 범은 한 자리에 네 시간을 머물지 않는다⁠. 한담은 지도 위 범바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가락 끝에 김치전 기름이 남아 화면에 얼룩이 졌다⁠. 굴이었다⁠. 호단이 겨울을 날 자리를 골랐고⁠, 고른 자리는 칠구의 외양간 바로 위였다⁠. 지금 굴 자리를 아는 휴대전화가 센터 밖에 하나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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