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29자)

범바위

지리산에 풀어 준 호랑이 · 하윤슬

밤 아홉 시 반⁠, 육한담은 관사 툇마루에서 생활안전계장과 통화를 끝냈다⁠. 계장은 방수포 밑에서 끈 한 토막을 보았다는 말로는 남의 트럭 짐칸을 열 수 없다고 했다⁠. 영장이 있어야 하고⁠, 영장을 받으려면 끈보다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계장의 말은 맞았다⁠. 한담은 전화를 끊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준호가 툇마루 끝에서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성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묶은 팔을 무릎에 얹고⁠, 말을 하다 말다 했다⁠. 한담은 준호가 누구와 통화하는지 알았다⁠. 준호는 아버지에게 방수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갈색 가죽 끈⁠, 칼로 자른 끝⁠, 네모난 송신기⁠.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에게 범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준호가 전화기를 내렸다⁠.

“⁠아부지가 선배 바꿔 달래요⁠.⁠”

한담이 전화기를 받았다⁠. 칠구의 목소리는 낮았다⁠.

“⁠곽 대장 창고가 함양 마천에 있어⁠. 저온 창고⁠. 송아지 얼린 것도 거기 넣는다고 내가 아이스박스째 갖다줬어⁠. 지난달에⁠. 비밀번호도 알어⁠. 곽 대장이 나 보는 데서 눌렀어⁠. 형님은 식구라고⁠.⁠”

“⁠어르신⁠.⁠”

“⁠와 봐라⁠. 외양간 앞으로⁠. 내 트럭 타고 가⁠.⁠”

*

칠구의 1톤 트럭은 만수천을 거슬러 올라가 고개를 넘었다⁠. 운전석에 칠구⁠, 가운데 한담⁠, 창가에 준호가 앉았다⁠. 셋이 앉으니 좁았다⁠. 준호의 묶은 팔이 한담의 어깨에 닿았다⁠. 칠구는 고개를 넘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계기판 불빛에 칠구의 손등이 보였다⁠. 손등에 쇠똥이 말라붙어 있었다⁠. 씻지 않고 나온 손이었다⁠.

칠구가 라디오를 켰다⁠. 트로트가 나왔다⁠. 칠구가 껐다⁠. 한참 뒤에 준호가 성한 손을 뻗어 다시 켰다⁠. 다른 트로트가 나왔다⁠. 칠구가 또 껐다⁠.

“⁠아부지⁠, 외양간에 트로트 틀어 주면 소가 살찐대요⁠. 젖도 잘 나오고요⁠.⁠”

“⁠누가 그러냐⁠?⁠”

“⁠이장님이요⁠. 테레비에서 봤대요⁠.⁠”

“⁠그 형님은 테레비에서 안 본 것이 없어⁠.⁠”

칠구는 라디오를 다시 켜지 않았다⁠. 대신 고갯마루에서 창문을 조금 내렸다⁠. 찬 바람이 들어왔다⁠. 칠구가 앞을 본 채 물었다⁠.

“⁠팔은 아프냐⁠?⁠”

“⁠괜찮아요⁠.⁠”

“⁠괜찮은 놈이 왜 초코바를 안 묵냐⁠?⁠”

준호는 대답 대신 점퍼 주머니에서 초코바를 꺼내 이로 포장을 뜯었다⁠. 한 입 베어 물고 나서 반을 아버지 쪽으로 내밀었다⁠. 칠구는 받지 않았다⁠. 준호가 손을 거두려 하자 칠구가 고개를 숙여 초코바 끝을 이로 물어 갔다⁠. 운전대에서 손은 떼지 않았다⁠.

곽두식은 무내골에 있었다⁠. 엽사단장이 마을 순찰을 맡긴 밤이었다⁠. 준호가 단톡방을 열어 보았다⁠. 「⁠곽포수TV · 생방송 · 무내골 야간 순찰⁠」⁠. 화면 속에서 곽두식이 회관 앞을 걷고 있었다⁠. 이장 천막 앞에서 막걸리를 한 병 들어 보였다⁠. 시청자가 칠천 명을 넘었다⁠.

“⁠방송하는 동안은 안 와요⁠.⁠”

준호가 말했다⁠.

“⁠방송을 끄믄⁠?⁠”

“⁠끄면 와요⁠.⁠”

저온 창고는 마천 들머리 감나무 밭 끝에 있었다⁠. 컨테이너 두 개를 붙여 놓고 냉각기를 얹은 창고였다⁠. 냉각기가 웅웅 울었다⁠. 칠구는 트럭을 감나무 그늘에 세우고 창고 문 앞의 숫자판을 눌렀다⁠. 네 자리였다⁠. 딸깍⁠. 문이 열렸다⁠. 찬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냄새가 먼저 왔다⁠. 한담은 문간에서 숨을 멈추었다⁠. 얼어붙은 피 냄새⁠, 짐승 기름 냄새⁠, 쇠기름 냄새⁠, 그리고 굵은 소금 냄새⁠. 소금 냄새 밑으로 한담이 아는 냄새가 가늘게 섞여 있었다⁠. 버터 발라 볶은 팝콘 같은 냄새였다⁠.

칠구가 전등을 켰다⁠. 창고 안쪽에 멧돼지 사체 세 마리가 갈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피해방지단 포획 · 포상금 신청⁠」⁠. 창고 문 옆 접이식 탁자에는 생방송 장비가 놓여 있었다⁠. 셀카봉 두 개⁠, 머리에 쓰는 전등⁠, 「⁠곽포수TV⁠」 글씨를 박은 모자 한 무더기⁠. 모자는 비닐도 뜯지 않은 채였다⁠. 구독자 선물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바닥에는 비닐에 싼 덩어리들이 쌓여 있었다⁠. 칠구의 아이스박스도 거기 있었다⁠. 뚜껑이 열려 있었고⁠, 안은 비어 있었다⁠. 아이스박스 옆에 철사 뭉치가 다발로 묶여 있었다⁠. 무내골 범바위에서 걷어 낸 것과 같은 굵기⁠, 같은 고리였다⁠. 스무 개가 넘었다⁠.

준호가 안쪽 선반으로 걸어갔다⁠. 선반 맨 아래 칸에 공구 상자가 있었고⁠, 공구 상자 위에 갈색 가죽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목 앞에 달렸어야 할 네모난 송신기가 뜯겨 옆에 굴러 있었다⁠. 가죽 끈은 두 군데가 칼로 잘려 있었다⁠. 한담은 장갑을 끼고 송신기를 집어 뒤집었다⁠. 송신기 밑면에 새긴 글씨가 있었다⁠. 연해주를 떠나기 전날⁠, 한담이 제 손으로 확인한 글씨였다⁠. 「⁠JR-02 · 수컷⁠」⁠.

“⁠산솔이에요⁠.⁠”

한담의 목소리는 고르게 나왔다⁠. 손은 고르지 않았다⁠.

선반 옆⁠, 창고 가장 차가운 구석에 둥글게 만 것이 하나 있었다⁠. 굵은 소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소금 사이로 연한 주황 털과 굵은 검은 줄무늬가 비쳤다⁠. 칠구가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한담은 칠구가 손을 대려는 것을 보았다⁠. 칠구는 손을 대지 않았다⁠. 손바닥을 소금 위 한 뼘 높이에 펴서 오래 들고 있었다⁠. 외양간 개울가 모래 위에 손바닥을 펴던 손이었다⁠.

“⁠이것이 범이여⁠?⁠”

“⁠네⁠.⁠”

“⁠수놈⁠.⁠”

“⁠네⁠. 호단이 새끼 아빠예요⁠.⁠”

칠구는 손을 거두었다⁠. 허리를 펴고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갈고리의 멧돼지⁠, 빈 아이스박스⁠, 철사 다발⁠, 소금 속의 줄무늬⁠. 칠구의 숨이 하얗게 나왔다⁠.

“⁠나는 범이 싫다⁠.⁠”

칠구가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했다⁠. 한담과 준호 둘 다에게였다⁠.

“⁠지금도 싫어⁠. 내 송아지 묵었고⁠, 이장 형님 칠번 묵었고⁠, 내 아들 팔에 서른 바늘을 냈어⁠. 내일 엽사단이 올라가서 쏜다 혀도 나는 안 말려⁠. 협약서에 그렇게 써 놨고 나도 도장 찍었으니께⁠.⁠” 칠구는 철사 다발을 장화 끝으로 건드렸다⁠. “⁠그래도 이건 도둑질이여⁠. 산에서 훔친 것이여⁠. 범을 잡을라믄 협약서대로 잡든가⁠, 장관이 쏘라 해서 쏘든가 혀야제⁠. 몰래 철사 놓고 몰래 가죽 벗겨서 몰래 소금 쳐 놓는 것은⁠, 내 외양간에 밤에 들어와서 송아지 끌고 가는 놈하고 똑같어⁠.⁠”

준호가 아버지를 보았다⁠. 칠구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

“⁠나는 그런 놈한테 송아지를 줬어⁠. 알고 줬어⁠. 그것도 내 일이여⁠.⁠”

*

호단은 자정이 지나 첫째를 낳았다⁠.

배가 마지막으로 크게 조여들었을 때 호단은 굴 안쪽 벽에 등을 대고 마른 잎을 물어뜯었다⁠. 몸 밖으로 무언가 미끄러져 나왔다⁠. 젖고 따뜻하고 작았다⁠. 호단은 몸을 돌려 혀로 핥았다⁠. 젖은 막이 혀에 감겼다⁠. 핥고 또 핥았다⁠. 막이 걷히자 작은 것이 몸을 떨었고⁠, 가는 소리를 냈다⁠. 바늘 끝으로 긁는 것 같은 소리였다⁠. 호단의 귀가 소리를 향해 돌아갔다⁠. 산의 어떤 소리보다 작은데⁠, 산의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둘째는 첫째가 젖을 찾아 호단의 배를 더듬는 동안 나왔다⁠. 둘째는 첫째보다 작았고⁠, 한참 동안 소리를 내지 않았다⁠. 호단은 둘째를 오래 핥았다⁠. 혀로 굴려 가며⁠, 코로 밀어 가며 핥았다⁠. 둘째가 마침내 기침을 하듯 숨을 터뜨리고 울었다⁠. 첫째보다 높은 소리였다⁠.

굴 안에 새 냄새가 가득 찼다⁠. 젖 냄새⁠, 피 냄새⁠, 젖은 털 냄새⁠. 산에서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였는데⁠, 호단의 몸은 이 냄새를 처음부터 알았다⁠. 호단은 옆으로 누워 두 새끼를 배와 앞발 사이에 끌어 넣었다⁠. 새끼들이 젖을 찾아 꼬물거렸다⁠. 첫째가 먼저 물었다⁠. 둘째는 두 번 놓쳤다가 물었다⁠. 젖이 빨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배 속이 비었는데⁠, 비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산 아래에서 개 짖는 소리가 올라왔다⁠. 호단은 귀를 눕히고 왼 앞발로 두 새끼를 덮었다⁠. 발목에 홈이 패인 앞발이었다⁠. 홈이 새끼들의 등에 닿았다⁠. 새끼들은 그대로 젖을 빨았다⁠.

*

새벽 한 시 사십 분⁠, 감나무 밭 끝에 전조등 불빛이 들어왔다⁠. 사륜 트럭이었다⁠. 한담이 창고 안쪽 전등을 끄기도 전에 트럭이 창고 앞에 멈췄다⁠. 곽두식이 내렸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었다⁠. 화면에 창고 안 감시 카메라 화면이 떠 있었다⁠.

“⁠형님⁠.⁠”

곽두식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웃음은 없었다⁠.

“⁠식구라 캐서 비밀번호 알려 드렸더니⁠, 남의 집 창고에 밤손님으로 오셨네예⁠.⁠”

칠구가 창고 문간으로 나갔다⁠. 한담과 준호가 뒤따랐다⁠. 냉각기가 웅웅 울었다⁠. 곽두식은 칠구 뒤의 한담을 보고⁠, 준호를 보고⁠, 준호가 손에 든 휴대전화를 보았다⁠. 준호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져 있었다⁠. 통화 중이었다⁠. 「⁠112⁠」⁠.

“⁠동생님⁠, 경찰 불렀습니꺼⁠?⁠”

“⁠아까요⁠. 들어오자마자요⁠.⁠”

곽두식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 듣는 한숨이었다⁠. 곽두식은 칠구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형님⁠. 생각해 보이소⁠. 형님 송아지 미끼로 쓰라고 준 것도 형님입니더⁠. 형님이 범 잡아 달라고 제 전화번호 누른 것도 형님이고⁠. 경찰 오면 형님도 같이 갑니더⁠. 올무 미끼 대 준 사람으로⁠. 형님 그래도 좋습니꺼⁠?⁠”

“⁠같이 가자⁠.⁠”

칠구가 말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준 것은 내가 말허께⁠. 니가 판 것은 니가 말혀⁠.⁠”

곽두식이 칠구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다 몸을 돌려 트럭으로 걸어갔다⁠. 운전석 문을 여는 손이 빨랐다⁠. 준호가 트럭 앞으로 뛰어나갔다⁠. 묶은 팔을 가슴에 붙인 채⁠, 성한 팔을 벌리고 트럭 앞을 막았다⁠. 전조등 불빛이 준호의 붕대를 하얗게 비추었다⁠.

“⁠준호야⁠!⁠”

칠구가 소리쳤다⁠. 곽두식은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었다⁠. 트럭이 한 뼘 앞으로 나왔다가 멈췄다⁠. 감나무 밭 끝 고갯길에서 파란 불빛이 번쩍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순찰차 두 대였다⁠.

곽두식은 기어를 빼고 운전대에 이마를 댔다⁠.

순찰차에서 내린 생활안전계장은 창고 안을 둘러보고 나서 한담에게 짧게 말했다⁠. 끈보다 나은 것이 있다고 했다⁠. 곽두식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곽두식은 순찰차 뒷자리에 타기 전에 칠구를 돌아보았다⁠.

“⁠형님도 내일 오이소⁠.⁠”

“⁠간다⁠.⁠”

칠구는 순찰차가 고갯길로 사라질 때까지 창고 문간에 있었다⁠. 한담은 준호의 붕대를 다시 감아 주었다⁠. 준호의 팔이 떨렸다⁠. 칠구가 다가와 아들의 성한 어깨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니는 트럭 앞에 왜 나가냐⁠?⁠”

“⁠아부지가 송아지 앞에 나가시는 거랑 같아요⁠.⁠”

칠구는 대답하지 않고 운전석에 올랐다⁠.

*

새벽 세 시⁠, 고개를 넘어오는 트럭 안에서 한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세종의 표정훈이었다⁠.

“⁠장관님께 진술서 드렸어요⁠. 창고 일도 방금 경찰에서 연락받았고요⁠. 엽사단 새벽 출발은 보류예요⁠.⁠”

“⁠철회는요⁠?⁠”

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철회는 아니에요⁠. 사람이 다쳤다는 사실은 그대로예요⁠. 장관님이 내일 아침 열 시에 무내골 회관으로 직접 가신답니다⁠. 마을 앞에서 정하시겠대요⁠. 사살이든⁠, 재포획이든⁠, 다른 무엇이든⁠.⁠”

트럭이 고갯마루를 넘었다⁠. 앞 유리 너머로 반야봉의 검은 어깨가 보였고⁠, 어깨 아래 어둠 속에 범바위가 있었다⁠. 한담은 휴대전화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칠구가 운전대를 쥔 채 앞만 보고 말했다⁠.

“⁠내일 나도 회관에서 말혀야 쓰겄구먼⁠.⁠”

1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범바위 · 지리산에 풀어 준 호랑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