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6,210자) · 1982~1989년, 서울과 성남
억울한 사람을 위해
이재명의 삶 · 네오
1982년 3월 31일 밤, 집에서는 여섯 식구가 한 방에 잠들어 있었다. 이재명은 이 방 한쪽에서 법학개론을 폈다. 이날 일기에 이재명은 이렇게 한 방에서 고생하며 살아도 정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적었다. 가정에 영원한 행복이 오기를 바란다는 말로 이날의 글을 맺었다.
대학으로 가는 길도 아버지와의 싸움이었다. 주간 대학을 다니면 돈을 벌 수 없으니 꼭 다니고 싶으면 야간 대학을 가라고 아버지는 강요했다. 이재명은 장학금을 가장 많이 주는 대학을 골랐고, 이 대학에서 합격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법학과를 골랐다. 장학금을 두고 이재명은 아버지와 합의를 했다. 자기와 형의 책값을 먼저 떼고 남은 돈은 아버지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 합의를 두고 신사협정을 체결했다고 적었다.
대학은 낯선 곳이었다. 대입 전까지는 시간이 모자라 조바심을 치며 공부했는데, 대학에서는 하루 수업이 한두 개가 전부라 시간이 남아돌았다. 복병은 따로 있었다. 한자와 영어 발음, 교련 수업의 총검술과 제식훈련이었다. 옥편을 뜯어먹을 작정으로 한자를 팠다. 독학한 영어는 문법은 잘했지만 아무도 이재명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바이블을 비블로 읽었고 아이언을 이롱이라고 했다. 미팅도 해 보고 고고장에도 가 봤지만 대체로 시시했다. 교련복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누추한 청년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학생은 없었다. 스무 살 미만 대학생의 70퍼센트가 키스 경험이 있다는 통계를 보고 이재명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재명에게 이성은 머나먼 이국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재명은 사법시험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과 선배들이 고시의 이점을 일러 주었다. 굽은 왼팔로는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다시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막연한 신분 상승의 욕망도 있었다. 처음 이재명이 그린 길은 판사나 검사였다. 판검사가 되어 잘 먹고 잘살며 떵떵거리겠다는 꿈이었다고, 이재명은 훗날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캠퍼스에서 광주학살 사진집과 비디오를 보았지만 학생운동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장학생 자격을 잃을까 봐서였다.
법대 3학년 때 처음 치른 사법시험에서 이재명은 떨어졌다. 상법에서 점수가 모자랐다. 신림동 고시원과 산속 절간으로 들어가 책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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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방한 아들에게 돈을 쥐여 준 사람은 아버지 이경희였다. 아들이 밤늦게 책을 펴면 전기세가 아깝다며 불을 끄던 사람이었다. 공장이 쉬는 날이면 공부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시장 청소를 시키던 사람이기도 했다. 평생 내 집 마련 하나를 붙들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이 아버지가 다시 해 보라며 아들 손에 돈을 쥐여 주었다. 이후로 고시생 아들의 통장에는 말없이 생활비가 들어왔다.
1986년 2월, 중앙대 졸업식 날 이재명은 부모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 한가운데에 아버지가 섰고, 이 오른쪽에 어머니가 섰다. 같은 해 이재명은 바로 위 셋째 형 재선과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가 대구에서 사법시험 1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두 형제는 길 위에서 함께 기뻐했다.
이 무렵 아버지는 위암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2차 시험 합격 소식을 들고 이재명은 아버지의 병상으로 갔다. 공부 좀 해 보겠다는 아들의 기를 그토록 꺾던 아버지였다. 다친 팔과 아버지의 몰이해에 짓눌려, 소년 시절의 아들은 목숨을 끊으려 한 적도 있었다. 병상의 아버지는 아무 말 대신 눈물로 답했다. 공부 대신 공장일을 먼저 내밀던 아버지와 이 공장에서 팔이 굽은 아들은 이 병상 앞에서야 때늦은 화해를 나눴다. 이재명은 이 순간을 자기 청춘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때로 기억했다.
1986년 10월, 이경희는 쉰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아버지 역시 학비 때문에 대학을 그만둔 청년이었다고 아들은 오래 뒤에 적었다.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참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이재명은 같은 글에 덧붙였다.
같은 달 23일, 사법시험 제28회 합격자 이재명의 이야기가 경인일보에 실렸다. 만 23세였다. 기사 제목은 「지역서 억울한 사람 도울 터」였고, 이 곁에 불우를 극복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말이 붙었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억울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
같은 해 이재명은 병역도 면제받았다. 소년공 시절 프레스에 눌린 왼팔이 6급 장애로 판정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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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재명은 사법연수원 18기로 들어갔다. 같은 해 연초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연수원 안에는 기수마다 비공식 모임이 있었다.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시국과 사회변혁을 의논하는 언더서클이었고, 이재명은 거기서 문무일을 처음 만났다. 공장에서 수많은 불이익을 당해 본 그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연수생은 공무원 신분이라 집단행동이 금지돼 있었다. 제적 같은 중징계가 걸린 일이었는데도 이들은 6월민주항쟁의 거리로 나갔다. 직선제 개헌과 군사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시민들 곁에 연수생들이 함께 섰다. 연수생들의 공부 모임은 노동법학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문병호, 정성호, 최원식, 문무일, 문형배가 이 이름 아래 있었다. 서울대 법대 시절 학생운동을 한 최원식은 운동권 경력이 없던 이재명에게 의식화 교사 노릇을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노동운동 단체와 인권 단체에서 상담 봉사를 했고, 함께 광주의 5·18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광주를 욕하던 소년공 시절의 자신을 이재명은 용서할 수 없었다. 광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기는 한낱 개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고 이재명은 책에 적었다. 광주는 이재명의 구원이었고 스승이었고, 이재명의 사회의식의 뿌리였다.
일기를 쓰는 것은 이재명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1987년 7월 14일, 이재명은 일기장을 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무렵 노동법학회에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특강을 왔다. 개인의 행복을 좇을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이 행복을 조금 내려놓을지 남모르게 번민하던 연수생에게 이날 강연의 한 대목이 꽂혔다.
“하고 싶은 일을 용기 있게 해라. 변호사 내가 해보니까 절대로 안 굶는다.”
이 말에 이재명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판검사의 단맛을 보고 나면 생각을 바꾸기가 더 어려워질 터였다. 힘이 되어 줄 사람은 노동자와 빈민이었다. 시작점은 이때까지 생의 절반을 보낸 성남이었다. 성남을 새로이 일으키고 민주화의 기점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판검사와 변호사 사이에서 망설이던 이때의 자신을, 이재명은 소시민적이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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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정기승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법조계가 반대하고 나섰다. 연수생들도 자치회 차원에서 집단 서명으로 반대 뜻을 밝히려 했다. 연수원 측이 또다시 이것을 막았다.
이날 저녁,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여관에 연수생 몇이 다시 모였다. 문무일과 최원식이 있었고 이재명이 있었다. 연수원이 막아선 서명을 두고 이들은 이 방에서 밤을 새우며 토의했고, 끝내 반대 서명을 다시 하기로 결의했다. 성명서 초안은 이재명이 썼다. 제목은 「사법부 독립에 관한 우리의 견해」였다. 초안을 워낙 잘 써서 고칠 게 없었다고 최원식은 훗날 돌아봤다. 사법연수생 185명의 이름이 이 성명서에 올랐고, 판사들도 집단 성명을 냈다. 이 모든 일에 형으로서 앞장선 사람으로 이재명은 문무일을 기억했다. 문무일은 군법무관을 마친 뒤 검찰을 지망해 검사가 됐다. 같은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두 사람의 길은 거기서 갈렸다.
1988년 7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찬성 141표, 반대 6표, 기권 134표, 무효 14표였다. 사법연수원생들까지 반대하던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은 그렇게 부결됐다.
같은 해 어느 주말, 이재명은 경기도 성남의 성남YMCA 회관 앞에서 빈민운동가 이상락을 만났다. 이날 이후 사법연수생 이재명은 YMCA 시민중계실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시작했다. 일당을 받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가 이재명의 앞에 앉았고, 부당한 대우를 견뎌 온 여공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부녀자들이 앉았다. 이 사연을 들을 때마다 이재명은 소년공 시절이 떠올라 남의 일로 들리지 않았다.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예비 법조인이었지만, 이재명은 상담하러 온 사람들이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찾게 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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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원 성적은 297명 가운데 60위권이었다. 판사는 지방에서, 검사는 수도권에서 시작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이재명이 판검사 임용 대신 변호사 개업을 택하자 연수원장이 직접 이재명을 면담했다. 그만큼 연수원 안에서 눈에 띄던 연수생이었다. 이재명의 선택은 바뀌지 않았다. 노동법학회 동료 정성호는 이재명을 연수생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각자 연고지로 내려가 어려운 사람을 돕자고 멤버들끼리 한 약속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출셋길을 갔을 것이라고 정성호는 말했다. 이재명은 이 약속을 지켰다.
1989년, 이재명은 연수원을 수료하고 성남시청 근처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개업 비용 가운데 일부는 성일학원 원장 김창구가 댔다. 공장 다니던 소년의 검정고시 공부를 무료로 돕던 사람이었고, 이재명이 은사로 꼽는 사람이었다. 사무실 보증금은 대출로 마련했다. 이 대출에 보증을 서 준 사람은 『전태일 평전』을 쓴 변호사 조영래였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남공단의 노동자들이 왔고, 경원대와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경희대 수원캠퍼스의 운동권 학생들도 왔다. 개업 초기 이재명이 맡은 일은 대부분 노동 사건과 학원 사건이었다. 인근 지역 노동자들까지 상담을 청해 오자, 이재명은 경기 이천에 광주·여주·이천노동상담소를 열고 소장을 맡았다. 같은 해 이재명은 컴퓨터 부품 조립업체 에프코아코리아의 위장 폐업 사건을 맡았다. 분당신도시 건설 반대 운동을 하던 이호승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구속돼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자, 젊은 변호사가 먼저 나서서 무료로 변론하겠다고 했다. 이호승은 이 일을 오래도록 고맙게 여겼다.
같은 해 말 이재명은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앞에 단독 사무실을 열고, 이 사무실에도 노동상담소를 붙였다. 구속된 노동자를 무료로 변론하는 날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이재명을 노상 변호사라고 불렀다. 가난에 쫓겨 성남으로 와 소년 노동자로 뼈아픈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공단의 노동자들에게 가장 쓸모 있는 도구가 되는 일이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이 됐다. 1986년 10월 신문에 실린 이 한 문장대로였다.
출처 · 세계일보, 2021년 12월 20일, 「李, 웹 자서전서 “미팅·고고장도 시시.. 대학생활 시간 남아돌았다”」 · 한경비즈니스, 2025년 6월 7일, 「가난에 치여 학교도 못 다닌 14살 소년, 대통령이 되기까지〔이재명 시대〕」 · 동행미디어 시대, 2025년 4월 27일, 「‘소년공’ 출신 이재명, 다시 대선 길에 나서다」 · 한겨레, 2020년 8월 8일, 「이재명, 파란만장 인생처럼 대선주자 지지율도 역전할까」 · SBS, 2025년 5월 17일, 「이재명, 5·18 맞아 호남 표심 잡기…“광주는 사회적 어머니”」 · 경향신문, 2025년 6월 4일, 「이재명, 부모님으로 받은 최고 재산 ‘강철 체력’···‘과로사’ 동생·‘불화’ 셋째 형에 회한」 · 뉴스1, 2021년 5월 8일, 「이재명 “공부 기 꺾었던 아버지, 사법 2차합격에 눈물.. 화해”」 · 주간동아, 2021년 12월 18일, 「승소 후각 남달랐던 변호사 李, 싸움의 감 뛰어났던 검사 尹」 · 서울신문, 2025년 4월 28일, 「소년공→변방의 장수→세 번째 대권 도전 나선 ‘불굴의 정치인’」 · 주간동아, 2025년 6월 4일, 「삼수 끝에 대권 쟁취한 ‘아웃사이더’ 이재명」 · 연합뉴스, 2017년 7월 4일, 「이재명 “문무일, 사법파동 성명 앞장선 형..적폐청산 기대”」 · 서울신문, 2017년 7월 4일, 「이재명 “문무일은 사법파동 성명 앞장섰던 형”」 · 조선일보, 2024년 3월 1일, 「與·野·신당… 이재명 ‘운동권 의식화 멘토’ 3인의 엇갈린 운명」 · 뉴시스, 2018년 6월 14일, 「16년 만에 경기도지사 탈환한 이재명은 누구인가」 · 세계일보, 2022년 1월 12일, 「‘노무현 변호사 특강’서 깨달은 과거의 이재명..“내가 힘을 줄 사람은 노동자·빈민”」 · 아시아경제, 2023년 10월 7일, 「〔정치 그날엔〕1988 정기승 대법원장 부결…정말 ‘치명적 실수’ 때문?」 · 매일경제, 2021년 10월 10일, 「“밥 굶지는 않는다” 노무현 한마디에..이재명 인생 스토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