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6,474자) · 2025년 10월 31일~11월 1일, 경주

휴대전화를 놓지 않은 사람

이재명의 삶 · 네오

경주 중부동 새마을부녀회장 장정희는 일흔네 살이었다. APEC 정상회의를 맞아 그는 이웃 정찬하, 손순호와 함께 버스터미널과 중앙시장, 성건동 골목을 돌며 바닥의 담배꽁초를 주웠다. 정찬하는 예순네 살, 손순호는 일흔두 살이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외국인과 관광객이 많이 오니 깨끗한 경주를 보여주고 싶었다.”

정찬하도 말을 보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쾌적해야 경주의 인상도 좋지 않겠냐.”

경주역에서는 스물두 살 대학생 한다경과 스물세 살 함경림이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맞았다. 하루에 100명 남짓에게 길을 알려 줬다. 한다경이 말했다. “기차에서 내린 분들에게 저희가 첫인상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함경림에게는 다른 것이 남았다. “세계 정상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한 것만으로도 뜻깊었다.” 경주시종합자원봉사단의 40개 단체 2,000여 명은 일주일에 한 번에서 세 번씩 거리를 쓸고 쓰레기를 거뒀다. 밤이면 자율방범연합대가 골목을 돌았고, 황리단길과 황남시장의 상인 100곳은 가게 화장실을 누구에게나 열었다. 이병희 황리단길상인회장이 말했다. “상인들이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깨끗하고 친절한 경주, 다시 찾고 싶은 도시 이미지를 만들자는데 공감하고 동참했다.” 동국대 와이즈캠퍼스와 함께 연 APEC 시민대학에는 시민 4,000여 명이 다녔다. 경북도가 뽑은 자원봉사자 254명에 동국대와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온 70명, 외국인 유학생 200명까지 5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정상회의의 안팎을 받쳤다.

*

2025년 10월 31일 저녁, 경주 라한셀렉트호텔 대연회장에 21개 회원국 정상과 초청국, 국제기구 대표 등 400명이 모였다. 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이었다. 사회는 배우 차은우가 맡았고, 식탁에는 경주에서 난 재료로 지은 나물 비빔밥과 갈비찜이 올랐다. 셰프 에드워드 리가 차린 메뉴였다.

의장국 대통령 이재명이 만찬사를 했다. 그는 나날이 새롭게 사방을 아우른다는 신라의 뜻을 꺼내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딛고 나날이 새롭게 일어서 세계만방에 국제사회 복귀를 알린 2025년, APEC 경제지도자분들을 이곳 신라에서 만나 뵈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열한 달 전 계엄의 밤을 지나온 나라였다. 이재명은 경주 땅에 전해 오는 신라 전설의 악기 만파식적을 21개 회원국의 손님들 앞에 꺼냈다. 천년을 넘어 이곳 경주에서 회원들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만파식적의 선율로 거듭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무대에는 열한 살 바이올리니스트 김연아와 댄서 허니제이, 리정이 올랐고 가수 지드래곤도 섰다. 갓을 떠올리게 하는 중절모에 진주 장식 끈을 늘어뜨린 그는 K팝 가수로는 혼자 10분 동안 「파워」를 비롯한 세 곡을 불렀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휴대전화를 들어 무대를 찍었다. 알베르토 반 클라베렌 칠레 외교장관과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의 배우자 티나논 니라밋도 화면을 들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자기 인스타그램에 공연 영상을 올리고 「#K팝영원히」라고 달았다.

*

외교의 약속은 대선 아흐레 전에 나왔다. 2025년 5월 25일 오전, 후보 이재명은 SNS에 외교·안보 공약을 올렸다. 그중 두 줄이 이 경주로 이어졌다.

“지난 정부 최악의 상태에 이른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겠다.”

“한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구현하는 공공외교, 글로벌 평화·번영에 기여하는 K-외교로 G7+ 대한민국을 이루겠다.”

APEC을 경주에서 연다는 것은 앞 정부 때 정해진 일정이었다. 다만 그 의장석에 누가 앉아 무엇을 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경주에서 그는 취임 12일 만에 첫 다자외교에 나선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만나 셔틀외교를 이어 가기로 했다. 일본 언론은 그 행보를 두고 일본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발걸음을 착실히 내디뎠다고 썼다. 미국 대통령에게는 천마총 금관 모형을, 중국 국가주석에게는 바둑판을 준비했다.

*

11월 1일 아침, 북한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외무성 박명호 부상은 담화를 내 한국과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는 것을 비난했다. 비핵화는 실현 불가능한 「개꿈」이라고 했고, 그것을 입에 올리는 한국을 「몰상식」하다고 했다. 회담을 앞두고 강유정 대변인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실현도 의제로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힌 터였다.

하루 전 제1세션의 개회사에서 의장 이재명은 협력과 연대만이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확실한 해답이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희망찬 전망만 하기엔 우리가 처한 현실이 녹록지 않다.” 문을 닫고 진행된 그 세션에서 시진핑 주석은 세계무역기구를 핵심으로 하는 다자 무역 시스템을 함께 지키자고 했다고 중국 신화통신이 전했다.

그날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정상회의가 마지막 문서를 채택했다. 「APEC 정상 경주선언」, 「APEC AI 이니셔티브」, 「APEC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공동 프레임워크」의 세 건이었다. 경주선언은 연결과 혁신과 번영이라는 틀 아래 무역과 투자, 디지털, 포용적 성장을 묶었고, 문화창조산업을 새 성장 동력으로 적었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이 한 장의 AI 정상 선언문에 함께 이름을 올린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은 그 자리에서 2028년 G20 정상회의의 의장국도 맡게 됐다.

폐회 전 이재명은 정부가 남북 사이 긴장을 낮추고 신뢰를 되살리는 조치를 먼저 해 왔다고 했다. 앞으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더 적극적인 선제 조치를 이어 가겠다고 했다. 한반도 평화야말로 아시아태평양 번영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는 폐회를 선언하고 의장직을 다음 의장국인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넘겼다. 시진핑은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역내의 오랜 발전과 번영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답했다.

그 선언에서 빠진 말도 있었다. 앞선 해의 선언들에 있던 WTO 중심의 다자 무역 체제를 지지한다는 문장과,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정하다는 표현이 이번에는 없었다. 파이낸셜뉴스는 자유무역이라는 APEC의 기본 이념이 뒷걸음쳤다는 평가를 전했다. 아사히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중심 노선이 다자 협력을 원칙으로 하는 WTO 규칙과 맞지 않은 탓이라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30일 부산에서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정상회의에 나오지 않았고, 그 자리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채웠다.

*

그날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중국 국가주석이 국빈으로 한국을 찾은 것은 2014년 7월 이후 11년 만이었다. 이재명이 먼저 말했다.

“양호한 조건을 활용해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위한 한중 양국이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길 기대한다.”

시진핑이 답했다. “중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가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지역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더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을 용의가 있다.”

회담이 끝나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결과를 전했다. 두 나라는 5년 만기 70조 원, 4,000억 위안 규모의 원-위안 통화스와프 계약서에 서명했다. 서비스무역 교류, 실버산업과 혁신창업, 중국 수출 식물의 검역 요건,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사기 공조, 2026년부터 2030년까지의 경제협력 공동계획까지 양해각서 다섯 건이 함께 오갔다. 위성락 실장이 말했다. “한중관계 발전에 부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호혜적 협력의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는 이재명 정부의 국익과 실용에 기반한 대중 외교 덕분에 한중 관계를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통화스와프는 두 나라의 금융·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고 교역을 늘리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한령을 묻자 그는 좋은 논의가 있었다고 했고, 실무 협의를 하며 풀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했다. 비핵화를 두고는 대화 재개에 중국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데까지는 이야기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

국빈만찬을 앞둔 친교 시간에 두 정상은 선물을 바꿨다. 이재명은 본비자나무 바둑판과 조각 받침대, 나전칠기 자개 원형 쟁반을 건넸다. 시진핑은 문방사우 한 벌과 샤오미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이재명이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물었다.

“통신보안은 잘 됩니까?”

시진핑이 받았다. “백도어(后门)가 깔려 있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언뜻 보면 유쾌한 문답이었다. 원동욱 동아대 교수는 뒤에 그 대답을 유머로 포장된 반격이라고 읽었다. 그 휴대전화의 화면은 한국산이었다.

*

국민의힘은 그 회담을 다르게 셈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수도권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성과 없이 소리만 요란했던 빈 수레 외교라고 했다.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한한령 해제와 무비자 입국 같은 중국과의 현안이 하나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서해 구조물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브릿지 외교는 실패로 귀결됐다.” 데일리안도 한한령 같은 정치·문화 현안이 원론에 그쳤다는 평가를 전했다.

그 정상회의가 지나간 경주의 거리에서도 말이 갈렸다. 황리단길에서 만난 일본인 관광객 사토 미호는 APEC 때문에 경주에 관심이 생겨 왔다고 했다. 20대 경주 시민 김지민이 말했다. “경주에서 세계적인 행사가 열렸다는 점에 자긍심을 갖는다.” 그는 행사도 별 무리 없이 잘 끝낸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황리단길의 한 전통주 상인은 매출이 평소의 두 배쯤 늘었고 손님 상당수가 외국인이었다고 했다. 마흔두 살의 한 주민은 출근길마다 길이 막혀 돌아가야 했고 안내도 모자라 매번 헷갈렸다고 했다. 한 택시 기사는 평소 10분이면 갈 거리를 40분 넘게 달렸다.

*

회의장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그 회의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 유지성은 일흔네 살이었다. 30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다 돌아와 13년째 전화 통역 봉사를 하고 있었다. 정상회의 기간에 그가 맡은 말은 인도네시아어였고, 통역이 필요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면 그 말을 옮겨 주는 일이었다.

“가장 통역이 필요한 시간에 도움을 드리고 싶어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기다렸다.”

경기 고양시에서 내려온 예순다섯 살 은퇴자 손주영은 황리단길 식당에서 외국인 손님에게 메뉴를 풀어 줬다. “대단한 어학 능력은 아니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스무 살 유학생 레오 리카르도는 황리단길에서 외국인 관광객에게 길을 안내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며칠, 한 나라가 국제사회로 돌아왔다는 말이 만찬장에서 나왔다. 그 말을 경주역의 대학생과 골목의 부녀회장과,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은 일흔네 살의 통역 봉사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받쳤다.

출처 · 서울신문, 2025년 11월 2일, 「“우리가 경주의 첫인상” 꽁초 줍고 밤낮 통역한 APEC 숨은 주역들」 · 매일신문, 2025년 10월 31일, 「〔경주APEC〕 APEC 정상회의,성숙한 경주시민 의식 빛나」 · 서울신문, 2025년 10월 31일, 「李대통령 “만파식적 화음, 번영 안겨줄 것”… 차은우·GD 총출동한 APEC 만찬」 · 헤럴드경제, 2025년 11월 1일, 「갓 쓴 지드래곤에 APEC 정상들, 촬영 삼매경…말레이 총리 SNS로 공유」 · MBN, 2025년 5월 26일, 「이재명 “한미동맹 복원·남북 대화 재개”…외교안보 4대 공약 발표」 · 파이낸셜뉴스, 2025년 11월 2일, 「취임 12일 만에 다자외교 나선 다카이치… 현지 언론 “순조로운 출발” 〔글로벌 리포트〕」 · 데일리안, 2025년 11월 3일, 「트럼프엔 금관, 시진핑엔 바둑판…경주 APEC 무엇을 남겼나」 · 세계일보, 2025년 11월 1일, 「‘한반도 비핵화’ 논하는 한·중에 뿔난 북…“실현불가능 개꿈”」 · 조선일보, 2025년 11월 1일, 「트럼프 빠진 APEC서… 시진핑 “다자무역체제 함께 지키자”」 · 조선일보, 2025년 11월 1일, 「APEC 경주선언서 자취 감춘 ‘WTO’... 자유무역 지지 수위는 후퇴」 · 파이낸셜뉴스, 2025년 11월 2일, 「다자 자유무역 문구 빠진 ‘경주선언’… AI·인구문제 첫 채택 〔경주 APEC 결산〕」 · 뉴시스, 2025년 11월 1일, 「APEC 정상 ‘경주선언’ 채택…李 “한반도 평화 대승적·선제적 조치 지속”(종합)」 · 정책브리핑, 2025년 12월 8일, 「이재명 정부 첫 6개월의 기록, 국민께 보고드립니다」 · 매일경제, 2025년 11월 1일, 「한중정상회담 갖는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경주APEC〕」 · 데일리안, 2025년 11월 1일, 「〔APEC 2025〕 李대통령 “北과 대화재개 위한 소통 기대”…시진핑 “평화 발전 용의 있어”」 · 헤럴드경제, 2025년 11월 1일, 「“한-중 70조 원 통화스와프 체결…한한령 해제 관련 좋은 논의 있어”〔경주 APEC〕」 · 조선비즈, 2025년 11월 1일, 「韓·中, 70조원 규모 ‘원-위안 통화스와프’ 체결…“한중 관계 전면 복원”(종합)」 · 프레시안, 2025년 11월 3일, 「“샤오미 디스플레이는 한국산”…‘농담’ 보다 주목해야할 시진핑 발언」 · 헤럴드경제, 2025년 11월 1일, 「송언석 “한중 회담, 빈 수레 외교…서해 구조물 등 현안 해결 못 해”」 · 경향신문, 2025년 11월 1일, 「APEC 폐막에도 열기는 계속···시민들 “자부심 느꼈다”〔경주 APEC〕」

3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